찬송받으실 하나님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시 33:1-3).
다윗의 시 일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표제에는 안 나와 있지만,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어우러지는 내용들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들어 있죠. 찬송하라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거죠. 그리고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이 행할바로다’ 여기서 정직하다라는 것은 거짓말을 안한다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마음과 삶이 모두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자면 올곧은 자의, 올곧은 자의 마땅이 행할 바로다 왜 올곧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냐 그런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선 첫째는 이렇게 올바르고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살아가는 삶이, 그리고 삶을 움직이는 마음이 굳고 쉽게 흔들리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죠. 그래서 믿음 생활도 이렇게 굳고 휘청 거리면서 흔들리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에 어울리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속 보여 주세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일수록 그 하나님이 참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요.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자비를 보여주세요. 가치 없고 아무 아름다운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를 사랑하려고 많이 애쓰면서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과 분투하며 싸울 때 그때 영혼들을 깊이 사랑할 때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셔요. 우리와 더불어 분투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세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올바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움직이시되 당신은 움직이시지 않는 그 올바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거예요
두 번째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휘청 거리지 않고 정말 올곧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더 많이 찬양해야 되요.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지는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우리 인간은 맨 처음 창조된 아름다운 지위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타락하게 되었죠. 처음부터 인간은 비유를 하자 면은 이런 전등처럼 만들어진 거예요. 생명과 사랑이신 하나님께 연결될 때에, 그때에 생명과 사랑을 바라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거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인데도 정직하고 올곧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삶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더 많이 찬송해야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죠. 이해되죠? 그런 겁니다 .그다음에 2절부터 3절부까지는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열줄 비파로 찬양하고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이 악기가 어떤것이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주 섬세하게 공교하게 연주하라는 거, 그러니까 ‘수금과 비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악기를 부르면서 그 악기를 아주 섬세하게 연주하라’ 이게 무슨 뜻이냐,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면은 찬송의 기본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 하나님께 어울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그런 가락으로 노래를 불러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과 마음 안에 어떤 쇄신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거죠. 이게 찬송의 유익이죠. 유익이 바로 그런 거죠. 그래서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찬송보다 선행되야 될게 있어여. 이게 머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앎이예요. 알지 못한 것을 찬송할 수 없고 만약에 알지 못한 것을 찬송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쓸모없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그렇치 않습니까? 그래서 이 시인이 지금 수금과 열줄 비파 그리고 그것들을 온 마음을 기울여서 정성껏 연주하는, 그것은 머냐하면 그렇게 연주해서 높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이죠.
어제 회심집회를 했어요. 애들이 주일날 6학년부터 저 아래 애들까지 이니까 주일날 한 850명이 모인데요. 근데 어제 밤에 950명이 왔어여. 그리고 저는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 아이들이 450명 모인 곳에 들어갔는데 열린교회 목회하고 나서 처음이예요. 애들이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을 해요. 그렇게 탁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느껴졌어여.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다 모아서 십자가 찬송을 아이들이 부르고 있었어요. 정말 놀라웠어요. 내가 어저께 늦게까지 기도했어요. 애들이 제가 보기에 한 40분이상 기도했어요. 많은 아이들이 회심하고 또 회심한 아이들이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아주 은혜를 받고 그런 것을 봤어여. 하여간 장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이들이 아주 절실하게 회개하는 것을 봤어여. 그러한 것을 이렇게 보면서 말이죠. 그 하나님이 어떤분 이신지를 아는 것이 찬송하는 것보다 먼저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나면 정말 우리의 찬양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이게 어떠한 면에서 아름다워야 하냐면 첫째로 그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전심으로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에 있어서 그 아주 아름다움이 요구된다는 거 그래서 왜 그런거 있잖아요, 무엇인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것을 그리기 똑같이 그리기 위해서 마음을 다 기울이는 그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수금을 부르고 열줄 비파를 타고 수금으로 노래하고 열줄 비파로 노래하고 그것도 아주 숙련된 사람이 정교하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된다는거 자체가 머냐하면 그렇게 찬송 받으실만한 하니님이시라는 것을 지식으로 발견하는 것이죠. 그렇게 찬송받으실 만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식으로 발견하는 거죠. 그래서 하니님의 이름을 전심으로 높이는 거죠. 두 번째가 머냐하면은 마음으로. 그 연주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벅차는 감격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환희 ‘야! 하나님이 이렇게 아름다우시구나. 야! 하나님은 정말 살아게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시구나’ ‘정말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구나’라고 하나님을 이제껏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하나님께로부터 비취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두 가지 아름다움, 첫째는 자연적인 질서의 아름다움 그 시편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로소이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니 전하는 자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알수 있으니 자연에 대한 모든 그 노래 여기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가 있는 거예요. 왜 ?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모든 아르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거예요. 그렇죠? 요즘은 머 그런 거 안하지만은 옛날에는 여성이면은 제일먼저 바느질하는 거, 수예를 뜨는 거, 이런 것들을 배웠잖아요. 그것이 아주 정교하게 바느질 되고 아주 정교하고 예쁘게 수를 놓아지고 옷감을 짜고 그런 거를 보면서 그것을 보면서 그 옷을 짠 사람의 내면을 알게 되잖아요. ‘아! 마음이 참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옷감을 한결 같이 짜고 근데 사람이 성실하지 않고 사람이 무엇인가 약속한 한 가지에 착념하는 사람이 아니면 일관되지 않고 옷감이 그렇게 한결같지 않죠. 결국은 어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자연에 있는 그 찬란하고 눈부신 그 아름다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말하자면 소산이란 말이죠.
그러니깐 그것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자연적인 질서는 또 하나의 질서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만든 것이예요. 그것이 머냐하면 도덕적인 질서예요. 그 찬란한 도덕적인 질서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무질서한 것 같아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거스르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그러면서도 또 오래 참으시고, 그러면서도 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뭔가 일이 바뀌는 것 같지만은 하나님은 바뀌지 아니하시고 이런 아주 놀라운 질서를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거죠. 이것은 육신의 눈만으로는 안보여요 마음의 눈을 더해야 보여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은혜를 받을 때가 되면은 ‘나의 삶을 하나하나 움직이신 그것이 정말 정교하신 하나님의 법칙이구나. 정말 하나님이 나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 모든 것들을 이루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신앙 생활이예요.
그러면 이제 세 번째로 시인은 새, 노래로 찬양하자, 새, 노래로 찬양하자, 이게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죠. 새 노래라는 게 무슨? 우리 찬송 속에서도, 그것도 시편에서 나온것입니다마는 새 노래로 드리자 랄랄라 하나님께 돌릴 찬송을 새 노래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라는 말이 나오죠. 이게 머죠? 새 노래의 반대말은 머겠어요? 옛 노래에요. 혹은 항상 부르던 노래겠죠? 왜 새 노래로 자꾸 찬양하라고 그래요? 하나님이 이 자연의 세계와 이 모든 믿음으로 보는 하나님의 이 땅을 당신의 목적을 따라서 다스리시는 그 도덕적인 질서를 우리가 정말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볼 수 있는 눈만 갖게 되면은 그것이 지루하게 계속 똑같은 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계속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새로운 것을 계속 발견하게 되요.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렇게 되잖아요. 저 사람이 저 모습이 다겠지, 그러는데 만나면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요. 또 만나면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요. 꽁꺼풀이 씌었으니까 나쁜 건 안보이고 좋은 것만 계속 보이는 거예요. 그럴수록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우리들이 그렇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지성이 말이죠. 이 세상에 감각적인 사물들이 달라붙어 있는 것들이 해방되기만 하면 거기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찬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런 고백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주의 성실하심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간절한 사모함이 그런 것들이 이제 생겨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예요. 그것이 우리의 믿음 생활이예요.
그러니까 새로운 감격이 있을 때 옛날 노래로서는 그것을 다 표현을 못해요. 왜?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인간이 태어난 가장 큰 행복은 아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된 거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고 그 선하심을 맛보고 그래서 그 분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다 하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