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스러운 주의 장막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
녹취자: 이병두
신앙생활을 하면서 비록 열심히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원리가 바른 원리를 찾아서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면 지금은 열심이 있고 생기가 있는 것 같으나 곧 마르고 쇠약해집니다. 그러나 바른 원리를 찾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리고 그 원리에 충실하려고 애를 쓰면 우리가 훨씬 더 쉽게 회복될 수 있고 또 반대편에서는 훨씬 더 쉽게 그릇된 신앙의 자리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견고함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생활의 어려운 모습 가운데 하나는 견고함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신앙이 자라는 것과 함께 우리는 견고해져 갑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그 견고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너무 소수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어느 시대건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느 교회든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신앙생활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소수는 은혜를 받고 체험을 합니다.
그러나 견고하지 못하면 그런 것들이 우리 신앙을 위해서 잘 기여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 신앙의 특징 단 두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는 피상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견고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견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없다는 얘깁니다.
살인적인 광풍이 몰아치고 나서 가끔 산 위에 올라가 보면 꽤 큰 나무가 도끼로 내려친 것같이 뚝 부러진 적이 있습니다.
(예화) 87년도로 기억이 됩니다. 기도원 갔다 오는 길에 비바람이 치는 것과 함께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습니다. 포천에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가로수가 그래도 20년씩은 되었을 것입니다. 차가 가지를 못하고 무서워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로수가 무서워서 못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이렇게 큰 가로수가 흔들흔들 하다가 우지끈 그러면서 앞으로 그냥 쓰러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안 보태더라고 봉고를 타고 가는데 봉고가 휘청휘청 술 먹은 것처럼 흔들릴 정도로 그렇게 바람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까지 오고 땅이 물컹물컹하니까 포플러 나무가 그냥 막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약과이고 아예 바람이 세게 불어버리면 나무가 도끼로 찍은 것처럼 똑하고 부러져 버립니다. 바람이 불지 아니할 때는 나무가 얼마나 견고하게 심겨져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바람이 불 때는 큰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앞에 있는 가지들은 막 난리를 쳐도 원둥치는 고요하게 제자리를 버티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유혹이 많고 도전이 많고 영적인 전쟁이 충만한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꿋꿋함입니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큰 은혜와 축복의 자리로까지는 나아왔으나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신앙은 한순간에 헌신을 맹세하는 다짐으로서 평가되거나 척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다 산 다음에 얼마나 그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하나님을 추구해 왔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대편에서 이야기 한다면, 사단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우리가 견고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눈물을 흘리고 헌신을 맹세하는 것은 마귀가 두려워하지 않는데 여러분들이 견고해져 가는 것은 매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견고하지 못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좋은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영적인 변화를 주시려고 하더라도 문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이 견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쉽게 결심하는 사람들일수록 쉽게 그 결심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합니다. 마음을 먹고 삼일을 지나면 결심한 것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삼일에 한 번씩 결심을 하면 된다 그러면 평생 가지 않겠느냐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보나 신앙적으로 보나 깊은 자극이 있을 때에만 결심을 하게 되지 아무 때나 자다가 일어나서 결심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자극이 있을 때에 도전을 받을 때에 우리는 결심하고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결단을 내리는 것은 몇 번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단, 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생활이 견고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면 내가 견고하고 안 붙들어주시면 견고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인생을 다 산 다음에 뒤를 돌아다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칼빈주의적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강하게 해 주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강하여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쉽게 이야기해서 견고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붙잡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핑계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성경은 견고하지 않은 사람을 가르쳐서 "마음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는 자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리고 구름과 같습니다. 구름이 어떻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에 새까맣게 구름이 껴서 푸른 하늘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데 오후가 되면, 다 사라지고 깃털구름 하나 보이지 않는 맑은 하늘이 됩니다. 그렇게 변화무쌍한 것이 구름입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바로 그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성품과 태도는 견고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뜨거울지라도 견고함이 없으면 찾아가는 것을 몇 번 두드리다가 끝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이 있어서 1월 1일이 되면 교사를 하겠다 집사를 하겠다 리더를 하겠다 손을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초에 헌신을 다짐한 것이 진지하지 않았고 장난같이 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기도 응답까지 받고 시작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언제든지 견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어도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견고함이 없으니까, 그런 넘치는 헌신이 있고 진지함이 있어도 다 완수 못하고 중간에서 도중하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고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예화) 시골에서 키에다가 이렇게 공중으로 던지면 바람이 휘익 불어서 알곡은 떨어지고 쭉정이는 밖으로 날아가는데, 사람들은 날아가는 쭉정이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날려 보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결심을 하고 결단을 해도 계속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니까 아예 결단을 하는 것, 그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생각과 사고의 모든 것들이 전부 부정적으로 굳어갑니다. '또 안 될 텐데, 그래서 뭘 하나?'하면서 언어와 생각의 모든 것들이 도전적이고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그런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대신에 계속해서 패배적이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견고케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이 아니면 이길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승리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해서 성경이 말할 때는 마치 신앙의 모든 문제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견고해라, 강하라, 이겨라, 승리하라'
그 비유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사건에서 보면,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가나안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주신 것이 정상이라면 주님이 천둥도 내리실 수 있고 벼락도 내리실 수 있고 애굽에서 장자를 모두 죽이신 하나님이 그 가나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죽어라’ 한마디만 하면 끝날 텐데 다 청소해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맞이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서 싸워라 쟁취하라! 그리고 빼앗아라'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자녀들에게 수많은 약속과 은혜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들을 누리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셨지만, 그 승리를 쟁취하고 누리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왜 그렇게 그 사람들이 소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까? 견고하게 진짜 싸워서 이기지 못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은혜를 주셨는데, 인기투표해서 1위 나온 곡은 '오 신실하신 주'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변함없이 1년 동안 신실했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룬 신앙의 열매들은 모두 다 틀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싸움을 열심히 싸우고 승리해서 금년 한해에 말할 수 없는 많은 은혜의 수확들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려고 애를 썼고, 경건하게 출발을 했지만 지금 그러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기는커녕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이는 견고함의 차이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견고해져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도 그 견고함을 얻는 신앙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견고함 들이 자꾸 무너지고 쉽게 그 견고함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것들이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이 84편 2절과 관련해서 그 견고함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하며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편을 집에 가서 한번 곰곰이 생각하시면서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고라의 자손입니다. 틀림없이 이 이야기도 시편 42편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갈 때 그 다윗과 동행했던 고라의 자손, 그 42편 기자와 동일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분명히 그 시기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대한 사모함과 사랑을 말하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서가 42편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84편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는 바는( 84편만이 아니라 시편 전체를 보면서 깨닫는 바는, 그리고 구약 전체를 보면서 깨닫는 바는, 신약 전체를 보면서 깨닫는 바는) 그러한 견고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갔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교회 (구약에서는 성전)와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 성전과 떨어지지 아니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교회를 향한 그리움으로 표현되고 있고, 교회를 향한 그리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읽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왜 여러 가지 많은 직책을 누리고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집에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집에 있을 때에 다른 곳에서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집이 여호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 집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그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내게는 좋사오니'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는 장막이었습니다. 광야에 쳐져 있는 것과 같은 장막이었습니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텐트 식으로 되어있는 장막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막은 사랑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장막의 겉은 짐승의 가죽이나 이런 것들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겉에는 하얀 천이 주욱 둘러쳐있고, 그 가운데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장막이 쳐져 있습니다. 바람을 맞고 햇빛을 맞고 비를 맞고 하며 오랜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텐트를 오래 쳐놔보면 칙칙한 빛으로 변하듯이 장막도 바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외모로 볼 때는 전혀 영광스럽고 화려해 보이지를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인은 그 장막을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 합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데 그 성막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가 없사옵나이다‘의 뜻입니다.
시인에게 그 장막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그 장막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의 장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허름한 장막 그 자체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 장막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산다고 칩시다. 그러면 언제나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작은 내 집 뿐이리'하고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다투고 전쟁을 치르는 지긋지긋한 사람과 살고 있다면, 그러면 거기가 보기도 싫은 곳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몇 평짜리로 계산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참 사랑이 있을 때, 그것이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허름한 장막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시인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왕궁도 보았고, 부잣집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건축물들에 비하면 이 장막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 안에 주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고,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는데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한 교회에 등록하고 혹은 한 교회에 출석해서 매 주일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 식구와 같은 멤버입니다. 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만약 그냥 예배만 매주 드리지 아니하고,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하는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렇게 자꾸 촉구하고 그런 의식을 자꾸 심어주면 신앙과는 다름없이 교회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일본 사람들이 아프리카 이런데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 가서 시장을 개척하는데 거기에 멤버들이 2명 혹은 3명 혹은 7명 이렇게 그룹을 지어가지고 짝을 지어서 그 허허벌판과 같은 곳에 나아가서 이제 거래선을 뚫고 시장을 개척하고 물건을 팔고, 판매망을 세우고 수요를 창출해 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자기들을 환영하지 않는 그런 이국에서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활동하면서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월급을 받는 한 회사에 동료라는 의식을 가지고는 이 일을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래서 훈련을 시킨 것이 지옥훈련입니다. 저도 한번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상세하게 들었습니다. 그리로 보내서 급류를 타고 내리는 이런 아주 위험한 생명의 위험까지 그런 코스에다가 보트를 태워서 거기에 물에 빠지지 않는 옷과 그런 구명조끼 같은 것을 입혀가지고 며칠씩 그 급류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그런 몇 시간씩 급류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그런 위험한데에 보트를 태워보냅니다 . 생사를 같이 거는 겁니다. 요즘 회사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입사원 훈련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전쟁놀이입니다. 돈을 주면 그 장비를 일체 빌려주는데 군복을 입습니다. 그리고 총이 있습니다. 총이 있는데 쏘면 총알이 몇 십 미터 나갑니다. 그 총알은 사람 죽이는 총알이 아니라 빵하고 쏘면 옷에 닿으면 퍽하고 물감이 터집니다. 그것은 맞은 사람은 죽습니다. 그렇게 놓고 산 하나를 빌려서 이쪽에 30명 저쪽에 30명 먹고, 그 다름에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안 맞으려고 도망을 다니면서 총을 쏩니다. 총도 진짜 총하고 크기가 똑같습니다. 그렇게 총알이 날아가고 폭탄이 터치는 소리를 산 위에 틀어 놓으면 실감이 납니다. 그렇게 싸우는데 다들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하면서 한번 치루고 나면, 아무리 만나서 예의를 차리면서 아 제가 이번에 누구입니다. 저는 누구입니다. 백번 인사 하는 것보다도 거기서 말하자면 한번 전투를 치르고 나면 한 가족이 된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전쟁에서도 똑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아직 사람이 죽지 않는 상황에서 통계를 내어 보니까 전쟁 통에 5천발의 총을 쏴서 1명이 죽으면 그것은 아주 굉장히 많은 사람을 죽인 전쟁이다. 그러니까 돌격 그러면 사람들이 적군을 겨누고 영화에서처럼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니까 바위틈에 숨어서 하늘을 향해서 총을 쏩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전우가 맞아 죽으면 피를 봅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이 확 갑니다. 잠깐 동안 정신이 약간 이렇게 휘익 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비로소 전쟁에 대해서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백병전 같은 것이 벌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렇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그 교회에서 그 사람이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에 긍지를 갖게 만들어 주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너무 훌륭하고 유명하다든지 교회가 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아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올바르지 않은 동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언제든지 교회 안에서 배타적입니다. 즉 우리들 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게 하는 정상적인 방법은 사람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일어나서 그들이 이전에는 사랑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전에는 경외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그 은혜와 축복들을 필요로 하면서 살아가는 이러한 간절한 신앙들이 안에서 회복되어질 때,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대접을 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고 가치를 인정받을 때에는 서로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충족되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배타적이고 언제나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교회에 나오는 이유도 하나님 때문이고 그 교회를 떠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 속에서 섬기는 것도 하나님 때문에 섬기고, 그 속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 신앙생활이 참으로 축복되고, 우리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특권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사람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를 기뻐하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지를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도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나옵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21살 때 회심했습니다. 물론 교회를 다닌 것은 갓난아기 때부터 다녔는데, 그 이십여 년을 돌아보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한 그래프와 내가 은혜 충만했던 그래프는 놀랍게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신자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면서 적도 없이 여기 가서 한 술 얻어먹고 저기 가서 한 술 얻어먹는 소위 영적인 거지의 삶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부잣집 잔치할 때 가면, 고기 한 점 얻어먹고 가난한 집에 가면 된장찌개에다 밥 말아서 한 그릇 먹고 나오고 이런 삶을 계속해서 사는 것,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일 수 없다는 이야깁니다.
여러분, 신앙이 깊지 못하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대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시대에는 언제나 이런 일들이 유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화) 엊그제 신문을 봤는데 독일 이야기가 나오는데, 독일에는 십일조 이런 것을 안냅니다. 내가 기독교인입니다. 입사할 때 체크를 딱 해 놓으면 백분의 일을 떼어냅니다. 백일조입니다. 백분의 일은 세금으로 딱 떼어서 나라에서 정부가 관리해서 각 교회에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는데, 나누어 줄때는 매달 매주 설교할 것도 옵니다. 그러면 목회자도 편할 것입니다. 설교할 것을 가지고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어는 교회든 다 똑같은 설교를 합니다. 얼마나 은혜가 될 지는 궁급합니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가 평생 3번 교회 가는데 유아 세례 받을 때 한번 , 결혼 할 때 한번, 죽어서 한번, 제가 보면 한 번 더 갈 것 같습니다. 애기 유아세례 줄때 그래야 말이 됩니다. 4번 가면서도 종교세를 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삽니다.
여러분 오늘날에 십일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내가 십일조도 내고 주일도 지킨다고 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견고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그런 식으로 교회도 못 정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문제를 안 느끼면서 너끈히 살아갈 수 있다면 이미 깊이 병든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정상적인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한 교회를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거기에 애정을 가지고 거기에 소속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문제가 있는 교회든 없는 교회든지 말입니다. 그런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는 가고, 갔다가는 오고 그러는데 이것도 전부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과 같습니다. 오늘 내가 우리 부모님이 계신 그 집에 태어나서 자랐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호적 파가지고 다른 집에 가겠다고 다른 집에가 이름 올려놓고, 거기 가서 살아보니까 애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애들 쫓아내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주님이 떠나라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주 떠나라 하시는지 저는 신뢰가 안 갑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회심을 해서 전에 있던 교회에 1년 있다가 개척하게 된 것 빼고 세 교회를 다녔습니다. 18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세 교회를 다녔습니다. 한 교회에서 5년 한 교회에서 8년, 한 교회에서 6년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래 있었겠습니까? 대우가 좋고 여건이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한 교회도 그런 적 없었습니다. 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는 하셨는데 떠나라고는 안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그게 다입니다. 그런데 6개월에 한 번씩 교회를 옮기는 사람과 1년에 한 번씩 교회 등록을 옮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말을 많이 하는데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옮기는 것에 대해 하나의 철칙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라 하실 때보다도 더 확실하게 떠나라하는 응답이 있으면, 그때가 떠날 때라는 것입니다. 저는 내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열린 교회를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출발이 아예 하나님이 가라하셨는지 말라하셨는지도 없이 그냥 간 것입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난 다음에 아무래도 그때 하나님이 가라 하신 것 같지 않다하면, 이런 식으로 되면 견고함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끔 신학생들 가운데 보면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는 제자훈련을 잘하는 교회, 아니면 행정이 잘 돼 있는 교회, 3학년 때는 전도사로 써주는 교회, 졸업한 후에는 시무전도사로 써주는 교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 시간표대로 움직이겠습니까? 한 번 교회를 정하고는 그 교회 밖에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제가 자꾸 저의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데, 저는 한 교회에서 8년, 한 교회에서 6년, 한 교회에서 5년 있는 동안에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그 교회 예배를 빠지고 다른 교회 예배를 간 적이 17년 동안에 다섯 번이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사실 신학교 초창기에는 굉장히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교회 가서 그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까 성경을 보는 눈이 틀리더라", "어느 교회 가니까 교회 건축이 특이하더라"선배 목사님들도 두루두루 시야를 넓히고 그래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는 무슨 특이한 신앙은 아니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 가라 하셨으니까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교회로 보내주셔서 나를 훈련시켜주시지 않겠는가?'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은혜를 받고 안 받는 것도 교회를 옮기는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내 상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교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로는 굉장히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역자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평신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1년 동안 열린 교회에 있으면서 여러분들 기쁘고 즐거운 일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말씀을 들으면서 한없는 은혜를 받고 펑펑 운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정말 힘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저 때문에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 때문에도 그랬고, 어떨 때는 '하필이면 예배당만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는 조그만 교회에 다녀야 되나'하는 생각도 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헌금에 대한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느끼기를 원하는 바는 전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데,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여기에 나를 보내셨다고 생각을 하면, 그런 고통들이 문제로는 다가와도 나를 쓰러트리거나 넘어트리지는 못합니다.
저는 교회가 이렇게 설 때, 너무 확실하게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셨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고 쓴 물을 머금는 것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온다고 하더라도 저는 '하나님이 그런 것을 다 알고 나를 여기에 두시지 않았는가?' 지금은 몸에 많이 붙었습니다. 밤 11시쯤 강의를 끝내고 들어와서 새벽4시에 일어나는데 처음 6개월은 속에서 늘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렇게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몸에 배었습니다. 의례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구역질을 할 줄 아시면서도 나를 보내셨다' 생각하니까 간단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최고의 자산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서 순종하며 있는 동안에, 그때에는 적어도 우리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냐하면, 하나님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여기서 느끼는 모든 불만족과 그리고 내가 여기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축복을 안 해주셔서가 아니라, 나에게 '여기 있어야 하느냐?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그러면 근본적으로 뿌리 채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오늘 시인이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교회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그 교회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모든 풍조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영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큰 것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거기에 세워두시는 경우도 봤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교회에 대한 생각들을 바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록을 할 때는 신중하게 심각하게, 혼인 신고서를 쓰는 기분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등록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잘 생각하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우리교회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동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교회생활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에게 매이는 사람들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면 결단하고 떠나야 합니다. 저는 오래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면서 안 힘든 적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있던 교회를 떠날 때는 물론 하나님이 평강을 주셨지만 인간적인 사랑이 너무나 깊어서 살을 에는 것 같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하나님 제가 다시는 그 교회를 위해서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기도하면 자꾸 애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려고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만난 그 성도들은 그 교회를 떠난 지 꼭 8년 만에 만난 것입니다. 그런 인간적인 것들도 우리는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만난,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신다 라고 하는 그런 확신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들이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오늘 그 장막이 주님의 장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 장막 안에 주님이 계실 때, 우리는 그 장막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꼭 하고 싶은 것이 제가 갓난아기 적부터 다니던 그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오늘 이 열린 교회 올 때까지 신앙생활 했던 모든 교회를 순례하는 것이 저의 금년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가고 싶다는 강한 도전들이 자꾸 사라져버리는 것이 뭐냐 하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교회가 한 교회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그때 그 모습의 교회가 아닙니다.
내가 늘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고 기도했고 그 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납니다. 거기에서 여름이면 땀을 흘리고 겨울이면 눈물을 흘리고 그러면서 주님을 섬기고 예배했는데, 한곳에서 8년을 예배드렸고 새벽기도를 매일 했으니까 사 백 곱하기 팔을 하면 삼천 이 백 번 이상 드렸고 그 중에서 삼분의 이 이상은 같은 자리에서 예배드렸으니 추억이 없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향한 추억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추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깊이 사랑한 추억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 추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연단 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때 생명까지 내어줄 정도로 뜨겁게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누린 사람들이면 언제나 교회를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심방 가서도 늘 교회 가까이로 오라고 주문해서 부담을 많이 끼치는데, 부담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곤고할 때도 교회 문 열고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아침에 힘이 없을 때도 나와서 기도하고, 건강이 나빠서 고통할 때도 나와서 기도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곁에 늘 가까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과 다름없이 늘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의 최대의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을 바치고 싶을 정도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누렸던 모든 성도들은 한결같이 자기의 있는 것을 아낌없이 다 주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교회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하나님을 우리를 이년이고 삼 년이고 몇 해고 있다가 우리는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헤어진다고 하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지 않아도 좋다고 합리화 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정말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교회가 작다 돈이 없다 건물이 후지다 교육시설이 뒤떨어졌다 음향시설이 후지다 등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기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곳을 사랑하는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말씀해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의 주위에 있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들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회자가 한 분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하는 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서른두 살에 당회장이 되어서 교회를 건축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돈을 내서 언제 교회를 짓느냐는 것입니다. 헌금을 해서 언제 교회를 짓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니까 헌금으로 교회 짓지 무슨 적금타서 교회 짓는가 했더니 그것이 아닙니다. 재산을 처분해야지 전세 살던 사람 월세로 내려가고 집 가진 사람 전세로 내려가야지, 그러면 간단하게 교회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해서 지었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재정적인 필요를 느끼고 선교와 구제를 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자고 교인들에게 그렇게 안타깝게 호소함에 있어서 마치, 보험회사가 보험 상품을 선전하듯이 알록달록한 카달로그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현혹해야만 헌금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다 교회를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점점 처음 말씀드린 원리적으로 올바른 신앙생활에서 이탈되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올바르다 하는 것은 내가 있고, 그리고 사랑하는 교회가 있고, 그 사랑하는 교회를 섬기는 동기가 나의 사랑이신 하나님 때문에 이 세 가지가 충족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교회를 나와 주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에 자기가 나와 주는 것을 마치 보험에 가입해 주는 것같이 그렇게 교회에서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교역자도 하나님이 보내셔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교역자들도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사님을 내년에 가라 하시면 갈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면 입 싹 씻고, 옛날 김남준 강도사하고의 추억은 가슴에 간직하지도 않은 채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 많은 미래를 기약하는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오늘을 충실히 사는 데에 우리들이 신경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 있던 교회를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서 섬기다가 떠나왔으면서도 늘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보고 싶었습니다. 어는 정도로 보고 싶었냐면 밤이 되어 누워있으면 얼굴이 떠오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형제들도 부모도 그렇게 보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가 아직 교회를 못 정하고 있을 때였는데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전화 한 통만 하면 다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이 나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사랑했는데, 제가 떠나고 났는데도 사람들이 아무런 동요가 없이 여전히 잘 모이고 교회도 잘나오고 그러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되겠습니까?, 감사하지 말아야 되겠습니까? 감사해야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섭섭합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그 부르심 속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다 떠나고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아도 저는 낙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교회를 사랑했다면 나중에 여러분들이 교회를 떠날 때 목회자에게 와서 내가 얼마나 교회에 헌신했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사람 때문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튼튼하고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우리들을 하나님의 장막에 들여보내실 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속에서 오늘 이 고라의 자손과 같은 고백을 받아내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여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사랑스러운지요" 그런 고백을 받아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늘 가슴 속에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모든 것이 다 형식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데 교회의 상처에 대해서 아파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자가용에 아들을 태워 가지고 가다가 ‘꽝’ 하고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핸들을 틀었는데 자기는 살고 아들이 치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키 크고 안경 쓴 외과 의사가 걸어 나오더니 "아니, 이거 내 아들 아니야" 누구였을까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그 외과 의사인데 아들이 그렇게 실려온 것을 보고 내 아들이라고 엉엉 울면서 수술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모든 환자가 올 때마다 그 의사가 운다면 병원은 초상집이 되고 말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니까 상처로 인하여서 아파하고 사랑하니까 영혼 깊은 것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중보의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는 그 삶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이렇게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하는 고백을 하나님께서 받아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모두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금년 한 해 동안 깊이 체험하고, 또 그렇게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는 이런 간구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나, 내가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 그리고 그 교회를 사랑하게 만드시는 하나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충만한 신앙의 생활을 하셔서 많은 열매들을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시편 84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