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함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84:2-4)
녹취자 : 김미현
결국은 이렇게 시인이 하나님의 집이 사랑스러워진 것은 집이 사랑스러울 이유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짐승의 가죽으로 했으니까 햇빛이 내리 쬐이고 해서 거무칙칙하게 되어버린 그런 것이었는데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멀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을 하면서 진을 칠 때에 제일 먼저 성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성막 동서남북으로 열두 지파가 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진 치는 자리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200만 명 가까운 족속들이 진을 쳤으니 그 텐트가 볼만했을 것입니다. 그냥 동네 텐트가 아닙니다. 200만 명 내지 300만 명 되는 사람이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다 살았을 테니 어마어마한 위에서 보면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알록달록하고 뭔가 화려한 무늬를 가진 그런 성전이 아니라 짐승의 가죽으로 텐트 지붕을 했습니다. 거무칙칙하고 멀리서 볼 때에 눈에 확 들어올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세마포로 울타리를 한 것 이외에는 그렇게 별로 눈에 들어올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멀리에서 언덕을 넘다가도 그것만 탁 보면 한없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좋은 나무로 멋있는 벽돌로 고급 가죽으로 잘 지었기 때문에 멋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계시니까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난주에 많은 이야기를 1절과 관련해서 했습니다. 다시 되풀어 하고 싶은 얘기는 없고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신앙에 하나님 앞에 신령한 은혜 체험을 한 사람들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교회와 밀접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불행합니다. 그가 이전에 어떤 신앙의 생활을 했던지 하여튼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한 교회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고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더 불행한 사람입니다. 믿으십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헌신이 메마르고 있는 것은 이것은 근본적으로 훈련이 안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그 하나님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이제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이것이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입니다. 이해가 안가는 얘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여호와의 궁정’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갑니다. 그 다음에 ‘쇠약하다’는 말이 이해가 안갑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고라의 자손들에 의해서 몇 편의 시가 쓰여 졌는데 이 시가 쓰여진 시대를 만약 다윗 시대라고 본다면 다윗 시대에 여전히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성전은 과연 궁정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만했습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어간 어마어마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는 아직 그러한 장엄한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고 광야에서 치던 그 성막의 전통을 따라서 실로에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무엇이라고 표현하느냐하면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가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사모하는 것은 좋은데 쇠약해지는 것은 왜 쇠약해집니까? 오히려 힘을 얻어야지 거기서 왜 쇠약해지느냐? 이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이 시인은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고 그랬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 계신 그 집을 자기의 모든 영혼으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에서 보면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단지 육체와 삶 속에서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 가지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내 몸 밖에 뭔가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 있다면 그것은 몸 밖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깊은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해서 타오르는 그 사랑이 시켜서 내가 고난을 받고, 복음과 함께 핍박을 받고, 죽음의 위험을 넘어서고, 유대인의 간계를 위한 당한 시험과 이방인으로 말미암아 당한 고통과 모든 환란과 시련을 겪으면서 이 사명의 길을 걸어왔다 이 뜻입니다.
(예화) 여러분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모여오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가 들어서니까 사람들이 막 모입니다. 그러니까 교인이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역자들이 죽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인들이 불어나니까 한편으로는 좋지만 한편으로는 죽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같이 모여 앉아서 회의를 하는데 그 중에 어느 부교역자가 하는 말이 “왜 하필이면 우리 교회로만 이렇게 자꾸만 오는 거야?”
제 친구가 케냐에 선교사로 가있는데 선교사들이 모여앉아서 회의를 하는데 그 인디언들이 불분명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를 믿었다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데 회개를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모르냐고 하니까 이해가 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평생 봐왔으니까 눈 하나만 깜짝깜짝해도 티가 들어가서 그러는지 아니면 날 쳐다보라고 그러는지 이해가 되는데 문화가 다르니까 이 사람들 표정을 낱낱이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통점도 있겠지만 읽을 수가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정 깊은 곳을 헤아릴 길이 없다고 합니다. 간단합니다. 놀라운 은사를 받아서 심령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사쿠라구나 딱 골라내면 되는데 그 정도가 아니니까 모여 앉아 있는데 그 사람들이 복음 사역에 자꾸 잘 협조를 안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선교사 하나가 불평을 하면서 “껌둥이 새끼들!” 자기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심령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의 몸은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자리에 갖다놔서 그 자리에서 기계가 돌아가면 그러면 심령으로 섬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가 주일마다 여기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주일 내내 마음이 곤고하고 괴롭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올라가서 설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의 삶의 어떤 한 부분으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의 전존재가 전심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계신 그 성소를 앙망하고 그리워한다.’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주님을 바라는데 있어서 특수한 단계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영혼으로 사모하는 것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심지어는 심령을 다해서 찾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심령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기도가 아니면 성경은 기도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이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며 이이야기는 특별한 수준의 신앙이나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심령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갈망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런 마음의 경향이 바로 신앙이다 이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누누이 우리의 행하는 바나 믿는 바나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의 선행조차도 깊은 심령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서는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한 일인데도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선한 일이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출석했다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 속에 자부심으로 굳어져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방해하고 있다면 그럴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교회를 성수주일을 52주를 50주밖에 못하고 두주 빠지고 나서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범죄 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향한 갈망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누누이 심령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예배가 아니면 예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원문에 보면 ‘영과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지니라.’고 했습니다.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높은 수준의 사랑이 아니라 말하자면 이러한 사모함이 아니면 그것은 사모함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거나 금식기도를 하거나 절기를 지키는 모든 것도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내거나 금식을 한 것을 주님께서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나 절기를 지키나 금식을 한 것을 주님이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십일조는 하고 금식은 하고 다 하는데 심령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령으로부터 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인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러한 의를 가리켜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그러한 자기 의는 하나님께로 올려지는 향연에 빠진 죽은 파리새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향기로운 제사에 쓰이는 기름이 있는데 이것이 올라가는데 거기에 빠진 파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구약성경도 우리에게 말하는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너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심령을 다하여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리고 심령을 다하여 너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라.’이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직분을 주면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모험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하는 예는 아주 드물고 실패하는 예는 허다합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고 고통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원리적으로 바르게 하나님의 일꾼을 세워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큰 시험에 빠집니다.
(예화) 전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 교회가 큰 어려움이 있으면서 안수집사 몇 사람이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고 그리고 교회 코앞에 있으면서도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사랑이 너무 많으셔서 ‘그래도 이 실족한 한 영혼이 귀하지 않겠는가? 장로를 시켜주면 아마 다시 열심을 내고 교회 나오지 않겠는가?’ 공동의회에서 투표도 안 나오는 것을 억지로 밀어붙여서 간신히 투표수를 채워서 장로를 세웠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에 커다란 불란을 일으키고 본인도 파선하고 교회도 파선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중에 저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다 대통령 시켜 놓으면 그날부터 누구든지 다 애국자가 됩니다. 누구든지 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서울 시장 시켜 놓으면 누구든지 질서 잘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아마 유심히 들여다 볼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선 시인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된 심령이 그 영혼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과연 그것을 궁정이라고 할 수 있느냐? 궁정이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속에는 물론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겉은 초라했습니다. 한 나라에 임금도 그런데 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셔서 거기를 궁정이라고 여길 수가 있겠느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여호와의 천막일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천막일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궁정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된 것은 벽돌이나 아니면 건축물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 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예화) 외국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지난 여름 손봉호 교수님과 같이 이야기였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유학할 때 교회를 90년씩 걸려서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90년 지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쪽에서 고치면서 또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으면서 돈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마지막에 교수님 유학하면서 올 때 커다란 크레인이 와서 교회를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팔고 다른 곳에 가서 조그맣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무너져 나가면서 수퍼마켓이나 이런 것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벽돌의 종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되는 것이지 벽돌이나 건축물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강남에 집회 나갔을 때에 그 목사님도 집회 다니면서 우리 선배입니다. 선배인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인격자체가 겸손입니다. “목사님 제가 후배가 아닙니까? 교회가 참 크군요.” 한 450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러니 개척해서 이만큼 하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개척교회 강도사에게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니까 몸 둘 바를 몰라 하시는 것입니다.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한 수 배워야지 무슨 말씀입니까?” 겸손 자체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쫙 베어서 무엇을 물어보면 “제가 뭐 아는 게 있나요?” 그런데 그렇게 진실하신 분이 진짜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데 사실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자기도 교회를 지을 바에야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이지 않으면 강남에서 교회를 못짓 지 않습니까? 땅 한 평에 1000만원입니다. 100평을 사면 10억입니다. 100평짜리 지어서 몇 명이나 들어가겠습니까? 500평 짓는다고 하면 50억입니다. 50억을 싸들고 다녀도 그만한 땅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는 얘기가 자기도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교회를 하다가 보니까 결국은 무슨 문제에 부딪히게 되느냐 하면 늘 옮겨 다녀야 하는 문제, 나아가서는 교회가 건물이 없는 교회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는데 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건물이 사람들을 모아준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모아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정하는 기준이나 이런 것들이 말씀을 들어보고 그리고 그 속에서 뭔가 자기가 깊이 충족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교회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교회는 그냥 놀아리로 다니는 것이니 부담스럽고 무언가 자기를 몰아세우고 그러는 것을 싫고 자기가 와도 안 온 것처럼 신경 안 쓰고 가도 안간 것처럼 신경 안 쓰는 그리고 심방도 안 찾아오는 그리고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헌금하고 그렇게 대중 속에서 묻혀서 신앙생활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잘 숨을 수 있는 곳이 사람이 많은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분 얘기가 ‘변화시키고 새롭게 한다.’ 그것은 나중 문제고 와야지만 무슨 설교를 할 것이고 설교를 들어야 변화를 시키든지 새롭게 하든지 할 것이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절대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목회자로서 그 고민을 아주 다른 사람이 얘기할 때는 별로 어필이 안 되었는데 그분이 얘기하시는데 워낙 진실하신 분이니까 그것이 가슴이 와 닿았습니다.
그렇지만 원리적으로 볼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고라의 자손은 천막에 지나지 않는 하나님의 텐트를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인의 관심이 어디에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교회가 분열되면서 수많은 영혼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고 시험에 들면서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 것은 글쎄 저도 앞으로 그런 야심가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교회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설교자가 워낙 뛰어나서 그래서 광야에서 세례요한이 외쳤을 때 광야에서 모레바람이 일어나는 그 벌판에서 외쳤지만 하나님이 결국은 큰 부흥을 주셔서 요단과 그 다음 예루살렘과 요단강 건너 사변에서 사람들을 광야로 보내었습니다. 사람을 좇아서 아파트 단지로 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좇아서 신도시로 간 것이 아니라 신도시로 가건 아파트로 가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외쳤는데 그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 거리와 상관없이 왔습니다. 그리고 시설과 상관이 없이 나왔습니다. 광야에 앉을 의자 하나 없었습니다. 멍석 하나 없었습니다. 좋은 엠프나 외국에서 수입한 오르간도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성가대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학위를 많이 가진 설교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자라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그리고 허름한 짐승의 가죽을 둘러 쓰고 그리고 샌들을 신은 그러한 초라한 설교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적인 부흥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부흥입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여기 지금 주택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걸려서 누비는 넓은 땅덩어리에 사는 단독주택가에 모든 세대수를 다 합친다 해도 고층 빌딩 두동 값도 안 됩니다. 고층빌딩에 두동 세동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동을 허물어서 쫙 깔아 놓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많은 것이 별거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적게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으니까 오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지난 집회 때 제 마음에 굉장히 많은 도전을 받고 금년에 목회 계획을 세우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한 사람 두 사람 오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보내주셔야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셔야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것이 딱 그치면 사람들은 급속히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지난번 집회 갔던 교회 석 달 동안 20가정이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70가정 모이는 교회에서 20가정이 빠져나갔습니다. 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데 하나, 둘 보내주는 것도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것이지만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보내주는 것은 더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참된 부흥과 영적인 변화를 기초로 성장을 할 때에 그 교회가 커가는 그 규모가 영적인 영향력의 규모에 비례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러한 기본적인 성도들이 내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깨뜨려져서 변화를 받고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 형식적인 신자에서 영혼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 그리고 직업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이런 영혼의 참다운 변화의 기초되지 않는 성장은 물거품입니다. 그래서 피터와그너라고 하는 유명한 교회성장학자가 최근에 얘기한 것이 한 때 60년대 이후로 교회의 양적인 성장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이분이 내린 결론은 “양적인 팽창은 질적인 성장을 보장해주지 않지만 질적인 성장은 양적인 팽창을 보장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몇 명을 보내주시든지 간에 그것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계속해서 노력을 하면서 전도를 하되 문제는 모인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서 형식적인 신자가 변하여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직업적인 예수꾼들이 변해서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리고 교회와 피상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던 그러한 원리적으로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변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 속에서 뜨거운 생명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로 변화시켜 갈 때에 그 교회는 언젠가는 폭발적인 부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심령에 변화된 부흥을 만난 사람들은 그 교회가 그렇게 그 성막이 그렇게 초라한 대도 그는 궁정으로 보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훌륭한 벽돌이나 아름다운 화강암이나 대리석으로 치장하지도 못했습니다. 짐승의 가죽을 덮어씌운 텐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그는 무엇이라고 묘사합니까?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고 은혜 받은 성도가 교회를 보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아무리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워보여도 그 교회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 건물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계셔서 오늘도 그를 구하는 자에게 만나주시는 하나님 그 은혜, 그 사랑 때문에 그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르니까 그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 여호와의 궁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허무맹랑한 사람이 자기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교회에 정착을 못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궁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과 은혜가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건축과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는 그 때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맨 처음 회심한 교회가 황량한 벌판에 서있는데 여기 반 만한 교회입니다. 버스타고 지나가면서 친구가 하는 말이 “야 남준아, 저것도 교회냐 코딱지 만해가지고 참 창피하다 저게 무슨 교회냐.” 내 옆에서 그랬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 벌판에 저렇게 콧구멍만한 교회가 왜 서있냐? 저기 누가 예수 믿으러 가겠느냐.” 그런데 제가 몇 달 있다 그 교회 가서 회심하였습니다. 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몰랐으니까 말은 못했지만 틀림없이 그 때 제 마음과 친구의 마음에는 미션스쿨을 나온 형제인데 저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저 허허벌판에 콧구멍만한 2층 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 때는 지하실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주택난이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실 교회라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때 가난한 교회의 대명사는 2층 교회였습니다. 지금은 2층 교회는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2층이 얼마나 비쌉니까? 이것 배를 주어도 2층을 못 얻습니다. 지금은 이제 옛날 2층 교회 목회자라고 하면 후지고 가난한 목회자 지금은 지하실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야, 방배동에서 8월에 물을 4번이나 퍼냈다며? 그 컴컴한 지하실에서 또 지날 때 하필이면 왜 화장실 앞을 지나는지 알 수가 없는데 그 지하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각으로 사람들이 이 성막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된 고라의 자손의 눈에는 ‘그것이 무엇이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느냐?’ 그렇게 물을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이 교회를 사랑하고 이 성막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이 성막이 질긴 가죽이나 고급 모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퇴락하고 그것이 말하자면 빛이 바래갈 때 내 사랑도 바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이 하나님의 성막을 궁전이라고 부르기까지 사모하게 된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대한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은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하는 말을 ‘목회자니까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회자니까 모든 교우들이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에 유익이 될 테니까 저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가 아니라 어느 교회에 가던지 간에 이 교회를 떠나서 옮길 때에는 정말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다른 교회를 가지고 가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인 삶입니다. 여러분이 앉아있는 이 의자는 시내 성구사에서 살 수 있는 의자 중에서 최고로 싼 것입니다. 9만 원짜리입니다. 보통 의자가 요만한 것이 15만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보면 나무 같지만 나무가 아니라 나무 부스러진 톱밥 같은 것을 풀을 먹여서 프레스에 눌러서 합판처럼 만든 것입니다. 여기다 물 계속 부어 놓으면 퉁퉁 불어서 후루룩 다 녹아버립니다. 무겁기는 또 오지게 무겁습니다. 청소한번 하려면 두 배는 무겁습니다. 값은 반밖에 안 되는 것이 무게는 두 배가 나갑니다. 돈이 없어서 이것을 산 것입니다. 돈도 없고 날짜도 안 맞아서 산 것입니다. 여러분 값으로 따지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빨로 물어뜯으면 우지직 뜯어집니다. 망치로 퉁 치면 퉁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뻑하고 깨집니다. 나무가 아니라 풀 먹인 합판 나무 조각 부스러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의자를 보면서 그런 것이 문제가 되고 지하실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고 환기가 안 되는 것이 문제가 되고 대청소하면서 의자 뒤집은 것 보셨죠? 곰팡이가 파랗게 피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냐 하면 여기서 하나님을 못 만날 때 그 때 문제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가난한 교회에 등록을 잘 안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제 마음 같은 줄 알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하면서 등록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체험이 없으니까 들어오는 것을 다 쳐다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 이렇게 작다는 것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개척교회라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언젠가 교회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또 문제가 됩니다. ‘일꾼이 없으니 날 무엇을 시켜먹을 것이다.’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다 문제가 됩니다. 안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왔건 어떻게 끌려 왔건 아니면 협박을 받아서 왔건 납치가 되어서 왔건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이것은 9만 원짜리 의자, 지하실 교회,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갈 길을 몰라서 방황하고 ‘내가 이 길로 가야할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그러면서 고민을 하던 가운데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나의 모든 잘못들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새로운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것은 단순히 다 뿌리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값하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추억이 깃들어 있고 이곳에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살던 그런 추억이 깃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예화) 남대문에 가보면 찌개를 해가지고 돈을 엄청나게 번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찌개만 해가지고 돈을 번 사람인데 6.25나고 나서 바로 생겼다고 합니다. 유명한 잡탕집입니다. 그것이 생기기 시작해서 남대문 골목 전체가 그 찌개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돈 많이 벌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지금 들어가 보면 20년 전에 내 직장 다니면서 먹던 그 환경 그대로입니다. 칙칙하게 누리튀튀 하게 때묻어있는 합판이 있고 삐거덕거리고 올라가는 2층, 그다음에 싸구려 비닐 장판, 때가 새까맣게 쩔은 소반 그대로입니다. 한번 물어봤습니다. “돈 그렇게 많이 벌었다면서 저 빌딩도 샀다면서 왜 이렇게 해놓았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사람이 올 때마다 그 추억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뀌고 나면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고 대규모로 갈 것 같지만 이렇게 소규모로 복작복작하고 늦게 오면 자리가 없어가지고 구석에서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이 바로 20년 전에도 그랬고 25년 전에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젊은이가 중년이 되어서 중년이 노년이 되어서 여기를 찾아와서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보면서 오히려 애정을 가지고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것 참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추억을 쌓아 이곳에서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으신 분은 언젠가 우리는 이사를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여기 꽉 차면 여기 못 있으니 이사해야 합니다. 반으로 치고 2층으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디로 가야할 것 아닙니까? 기발한 생각입니다. 반으로 쳐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디론가 가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때는 그 사람이 여기가 왠지 자꾸 뒤돌아보아지고 ‘여기서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던 데인데.’ ‘여기서 내가 변화를 받고 신학을 하기로 하였지.’ ‘여기서 내가 오늘날 애기아빠를 만났지. 애기아빠 될 사람을 내가 여기서 만났지.’ 자매들이 아멘을 안 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없습니다. ‘만났지 그리고 결혼을 하기로 했지 그리고 전도 다니다가 걸어 다니다가 저 빵집에서 우리가 배고팠는데 만두를 먹었지.’ 추억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과 은혜가 없으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맨날 물러오던 기억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힘들게 물 푸던 기억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초라한 집을 하나님의 궁정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위대하고 큰데 달린 것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하나님을 체험하니까 그런 교회를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하나님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서 섬기다 보니까 나를 여기서 섬기게 하신 하나님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이 더 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다보니까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고 어디서부터가 매듭을 풀어야할지 풀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무엇 특별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러다가 그 교회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 목회자 품에 안겨서 축도를 받으면서 관속에 들어가고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다시 만날 날을 그리워하며 손수건을 흔드는 가운데 흙에 묻혀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먼저 올라가면서 ‘나 먼저 가서 미안하다.’ 그러면서 빠이빠이 하고 올라가서 저기서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 사람 만나기 위해서 또 가는 것입니다. 남은 사람들은 또 올라가서 거기 열린교회 동창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생은 박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화려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그를 볼 때 불꽃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불꽃처럼 삽시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아이들 결혼을 시키고 거기서 죽어서 임종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무엇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특별한 것입니다. 그렇게 별것 아닌 것 같은 인생을 사는 일에 충실할 때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시인이 무엇이라고 했냐면 ‘사모하여 쇠약했다.’ 사모해서 힘을 얻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를 침같이 새 힘을 얻는다고 하였는데 여기는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했더니 힘이 없어지고 쇠약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남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즐거움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고통입니다. ‘눈물의 씨앗’이라고 누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들이 왜 남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때에 그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피 끓는 애통함으로 탄식하면서 괴로워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루살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되었나, 짓밟히거나 말거나 오늘 나는 무엇을 먹을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장에 보면 사람들이 예레미야 시대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거리가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모레는 무엇을 입을까?’ 그것이 근심이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을 지나는 너희들이여 어찌하여 너희들에게는 내 마음에 임한 것 같은 근심이 없느냐?” 그러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왜 너희는 근심하지 않느냐?” 울부짖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근심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오히려 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박력 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려 깊게 삽니다. 박력 있게 산다고 말하지 않고 확신 있게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나님과 관계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고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어떤 여자를 여장한 남자가 사랑을 했는데 남자가 왠지 이 여자가 미워지는 것입니다. 싫어지는 것입니다. 자꾸 안 만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여자가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하는 말이 “내 어디가 보기 싫어서 나를 미워하느냐? 나를 피하느냐? 코가 높다면 칼로 깎고, 입이 좀 덜 찢어졌다면 칼로 찢을 각오가 되어있으니까 나를 사랑해달라.” 그것이 말이 됩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심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하게 되면 그 여자처럼 사모하게 되면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불안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쇠약해집니다. 쉽게 얘기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상사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라고 하는 영국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저는 감탄하였습니다. 저는 그 정도까지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면 우리의 마음이 녹아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간절해지고 다른 것에 관심이 없어지고 하나님만을 찾기 위해서 내 마음이 절박해지고 마음이 아파오고 그런데 그분은 더 뛰어넘었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는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리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리움은 안타까움으로 변합니다. 목마름이 생겨납니다. 심지어는 육신에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러니까 이분은 완전히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너무 하나님을 목말라한 나머지 그래서 그것이 과장이 아닌가 생각했다가 시편을 보니 다 나옵니다. ‘내가 주님을 찾기 위해서 내 심령이 냉과류와 같이 되었사옵나이다. 내가 방아쇠와 같이 슬프게 우나이다. 부엉이와 같이 내가 슬프게 부르짖나이다.’ 시편에 다 나오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쇠잔하나이다. 내 육체는 쇠잔하나 나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나이다. 그리고 내 피골이 상접하였사오니.’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 쇠약함이 바로 그런 쇠약합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쇠약함이 아니라 긍정적인 쇠약함입니다.
(예화) 나는 아주 오래 들었던 신학교 1학년 들어갔을 때 아주 젊은 교수 한분이 오셔서 히브리어를 가르쳐 주시면서 본인이 직접 신문에서 읽었는데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우리에게 들려주었는데 그것을 들은 지가 벌써 15년 이상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전주에 가면 전주예수병원이라고 있다고 합니다. 그 예수병원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멀쩡한 남자가 원장실에서 상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용건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 사람이 예수병원에 신문을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 ‘눈을 삽니다.’ 이것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눈을 팔러 온 사람입니다. 그 때 돈 50만원만 주면 눈을 팔겠다고 그래서 이제 살아있는 멀쩡한 사람 눈을 죽은 사람도 아닌 멀쩡한 사람 눈을 파내야 하는데 무조건 돈 줄 테니까 눈 내놓으라고 칼을 들이댈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 멀쩡한 눈을 팔려고 합니까?” 그 이야기를 하다가 그 담당의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하도 울다가 원장님에게 소개를 시켜준 것입니다. 원장님한테 가서 다시 이야기를 하는데 장로님이셨던 원장님이 그 자리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직원들을 모아가지고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목회자를 모실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인들이 15명 정도가 모였는데 거기서 집사인데 어쩔 수 없이 그 교회를 목회 아닌 목회를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는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석을 보면서 실력도 안 닿지만 그러나 설교를 하고 이 집사 목회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마음에 고통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는 이렇게 슬레이트로 지은 집에서 편하게 사는데 하나님의 교회는 브로쿠에 루핑을 친 집입니다. 기스리를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거기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내가 언제까지 이런 죄송스러운 삶을 살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건축 헌금을 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도지 얻을 데도 없고 해서 자기가 결심을 하고 시작을 해서 이제 일을 안 나가고 시냇가에서 모레를 퍼다가 시멘트를 사다가 벽돌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벽돌을 찍어서 그 벽돌을 말려서 물을 뿌려서 양생을 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자기 손으로 하나씩 하나씩 놓으면서 위에다 슬레트를 치려고 시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 누구말대로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날 몇 년 만에 큰 폭풍이 지나간 것입니다. 힘없이 훅 하고 바람이 부니까 브로크고 뭐고 다 부서져 버리고 지붕은 저기 멀리 날아갔는데 떨어져서 박살이 나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고 보니 이제 그나마 없는 돈 자기돈 교회 돈 다 털어서 그것을 그나마 했는데 완전히 다 망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고민을 하면서 이제 돈 한 푼도 없습니다. 일 안 나가서 돈도 못 벌고 그랬으니 더 없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고심하는데 이제는 안 짓느니만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지붕도 없습니다. 갑바 쪼가리로 덮어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고민을 하는데 50만원이 딱 필요한데 그런데 신문을 딱 보니까 “눈을 삽니다.” 그 신문을 본 다음부터 눈을 감고 다녀보는 것입니다. ‘내가 눈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불편해서 안 되겠다.’ 생각을 하는데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양)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사람은 몸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 밖에는 정말 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하다 그 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사람의 마음을 녹여주시옵소서.’ 이빨을 뽑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부인 허락은 받아서 눈을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락도 안 받고 가가지고 어느 날 와서 “여보 나 눈 빼었소.” 그러면 부인이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에꾸 눈 남편과 안산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그날부터 ‘하나님, 제 마음은 확정되었사오니 우리 아내의 마음을 녹여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어느 정도 했다고 치고 부인한테 “여보 이러이러해서 이러이러한데 결론은 내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지으려고 하오. 눈이야 어차피 한 30년 있다가 버리는 것인데 교회는 한번 지으면 영원한 것 아니겠소.” 부인이 펄펄 뛰는 것입니다. 나는 에꾸하고 못산다고 가난하게 사는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이제는 병신하고 살라는 말이냐고 말도 안 된다고 성경보라고 누가 눈 빼서 교회 지은 사람이 있느냐고 펄펄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부인의 마음을 남편이 저녁때마다 뒤로 돌아 누워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는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흐르겠지만 아직은 안 뽑았으니 양쪽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견디다 견디다 이 아내가 “그러면 여보 당신 좋을 때로 하시오.” 그랬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너무 마음 아파했는데 이제 드디어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제 교회를 지을 견적을 뽑고 일 맡길 데를 찾아놓고 내가 돈 구해가지고 오겠다고 잠간 기다려라 하고 신문을 들고 병원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정을 의사가 물으니까 “눈이나 빼고 돈이나 주면 되지 왜 이렇게 따지는 것이 많으냐?” 했더니 사정을 듣기 전에는 눈을 안산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얘기를 하니까 이 양반도 크리스찬이라 얘기를 듣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원 전체에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 원장님이 전 직원들을 불러놓고 간증을 시켰습니다. “우리 이렇게 예수 믿어서 되겠느냐.”고 전직원들이 거기서 월급 타는 날이었는지 제대로 걸렸습니다. 거기서 나온 돈이 50만원이 훨씬 넘게 나왔습니다. 눈은 받은 것으로 하고 가지고 가셔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목회 잘하시라고 그러니까 이 양반이 눈을 빼러갔다가 눈은 오히려 그대로 가지고 오고 헌금만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안대를 하고 올 남편을 기다리고 있던 부인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못 팔았느냐고 하나님이 사셨다고 헌금 걷어서 섬김을 받았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 나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모든 학생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누가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바로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바보 같아지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모든 인생의 꿈과 소망과 기대와 인생의 삶의 목표와 삶의 모든 비전이 그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되고 바르게 되지 못하고 부흥하고 부흥하지 못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이 되고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순풍의 돛단배와 같이 은혜롭게 성도들을 새롭게 살리고 그리고 말씀에 변화를 받고 은혜가 충만할 때 그 때에는 그것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모든 불행과 고통도 넉넉히 이기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교회가 시험에 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그것을 부여 앉고 쇠약해지고 이것이 바로 사모하기 때문에 쇠약해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의 의미를 가장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체험을 하면 확실히 잘 압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서 이 고라의 자손은 사랑스러웠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은 쇠약함과 아픔과 고통을 동반한 사모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너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도 신약이든지 구약이던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을 향한 관계와 사랑은 동일한 원리입니다. 사도바울은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춥고 배고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마음에 눌리는 고통이 있으니 그것은 모든 교회를 향한 염려라.’ 왜? 그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고 그리고 성도들을 세워준 그 교회가 올바르게 되고 있는지를 깊이 고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한번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가 하나님을 한번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그가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거룩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가 끊임없는 목회 현장 속에서 양떼들을 사랑하고 눈물로 교회를 개척하고 그리고 텐트를 끌고 다니면서 그것을 기워서 먹고 살면서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서신은 철저하게 교회라고 하는 상황에서 쓰여 진 글입니다. 학자의 논문, 목회자가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바울 서신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읽힙니다. 교회 속에서 목회적이고 목양적이고 그리고 교회 속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특성들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같은 갈망의 동참할 때에 그 서신이 열리는 것입니다. 시편은 어떻게 열립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씨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속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 속에서 슬픔과 아픔을 같이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야지 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보따리 싸들고 공부하러 다닌다고만해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치 계속 지식을 축적하면 내가 남보다 성경을 훨씬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로 이 시인이 오늘 이렇게 사모하여 쇠약할 정도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1절에서 얘기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 고백은 요즘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남발하는데 너무 ‘I love you. I like you. 난 너를 좋아해.’ 대중가요에서도 맨날 얘기하는데 함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1절에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사람들이 가끔 봄날에 아름다운 동산에 올라가서 ‘아 산천이 참 아름답구나.’ 그런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그 속에서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고 그 속에서 쇠약할 정도로 약해져가는 그러할 정도로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좀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렇게 많은 세월들을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허송세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일 애매모호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전도사님들입니다. 왜 애매모호하냐하면 전도사 직분을 맡고 있을 때에는 성도들보다 열심히 뛰어나야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일수도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사례를 받고 봉사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자인데 여러분처럼 들으시면서 회개하실 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처럼 11시 5분에 나오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누구든지 저만이 아니라 누구를 갖다 여기에 세워놓아도 그 사람은 결코 지각 안합니다. 이러는 내가 개척 예배하는 날 오후에 10분 나온 것 아십니까? 자다가. 영원히 기억에 남는 사건입니다. 누구를 세워놓아도 그렇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저는 주위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 갈 때 그렇게 성도들에게 ‘열심을 내라.’ 그러던 사람이 교회 그만두고 나니까 주일을 간신히 지킵니다. 그리고 여기 가서 한번 저기 가서 한번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를 사랑할 수 있지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만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자라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칼빈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그 사람이 로마 교회의 폭압적인 지배와 독재 앞에 얼마나 고통 했던 사람입니까? 그 사람의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를 사랑해야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참 하나님의 자녀라면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사랑하고 그 품을 즐거워하고 그 품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이 그렇게 쇠약할 정도로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했던 것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에 문제 있을 것이 없습니다. 마귀의 최대의 방해공작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 속에서 그런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 이상하게 재미있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보다도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잘 치료받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병원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고 찢겨진 사람들이 가장 하나님을 잘 만나고 가장 잘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서 수십 년 동안 받았던 상처가 치유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맺혔던 끔찍한 상처들이 완전히 치유됩니다. 그리고 해결 받습니다. 편안합니다. 그런데 또 웃기는 것이 그렇게 치유되고 나면 교회처럼 상처를 많이 받는 곳이 없습니다. 왜 그럽니까? 이제는 그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니까 사랑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교회 속에서 끊임없는 상처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려고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요금이나 내고 예배 한 번씩 드리고 가는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는 법이 없습니다. 받을 시간이 없습니다. 와서 예배드리고 가니까 축도 끝나기 전에 가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누구냐 하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상처가 가장 많습니다. 가장 많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종들에게 상처가 가장 많습니다. 왜 그런 상처를 자꾸 주는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전심으로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제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궁금하면 시험해 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예수 믿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아 보십시오. 교회 속에서 한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소수이고 그 은혜를 간직하면서 오늘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것을 한없는 즐거움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들이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최고의 도전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영혼이 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해서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만들고 여호와의 초라한 집을 궁정이라고 부르며 육신이,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끔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그러므로 교회가 부흥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간다면 그는 결코 떠돌아다니면서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심령이 곤고할 때 부흥회 한번 참석할 수 있고 기도원 한번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떠돌아다니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어쨌든 이것을 쏟아놓지 않고는 가슴에 불을 품은 것과 같이 괴로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쏟아놓고 섬기고 싶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이런 소망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들 가운데 싹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성경이 마지막으로 2절에 말하고 있는 것이 ‘생존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나이다.’ 이 사람이 부르짖었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교회 생활하는 사람은 늘 부르짖어도 관념의 하나님이나 죽어있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어떻게 오늘 이 시편을 보면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만약 이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내 마음에 불을 지르셨나이까?’ 불타오르고 무엇에? 사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성소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내 마음 속에 불타오릅니다. 그 불이 나의 육신을 삼키고 나의 육신의 소망을 삼키고 마지막으로는 내 모든 인생을 삼켜서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시인이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지금 살아서 관념 속에 묶여 있거나, 생각 속에 묶여 있거나, 교리 속에 묶여있거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살아서 그리고 내가 간구할 때 내 기도를 들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살아계신 능력을 가지고 나를 위해 살아계신 하나님처럼 역사하시고, 그 생명을 가지고 나를 위해 역사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기도에 인격적으로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나의 간구하는 바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실 수 있고, 내 앞에서 능한 일을 능히 행하시고, 내 앞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를 위해 기적을 창출하시고, 내 앞에 요단강이 갈라지게 하시고, 내 앞에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그리고 내 마른땅에서 샘물이 돋아나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시고 그리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며 지금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간구할 때 내 앞에서 기적을 창출하시고 그리고 메마른 땅을 지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굶주리며 광야 길을 헤맬 때에 하늘을 여시고 만나를 내리시는 이렇게 행동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뜨겁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생명적인 관계를 붙들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생활이 그냥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후진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그 교회와 함께하시는 한 그 교회는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내 마음과 육체가 함께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되 생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관념 속의 하나님,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리 속의 하나님 그리고 묶여버린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오히려 기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 시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과 육체를 쏟아 부으며 기도했고 그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역사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의 마음의 멀어지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몸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교회 나오기가 힘들어지고, 예배 참석하기가 어려워지거든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언제나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심령이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교회 속에서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우리의 슬픔과 모든 괴로움들을 이 교회 속에서 우리 용해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딱 볼 때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것은 잠시 음식 한 그릇씩 먹고 가기 위해서 줄서기 위해서 식당에서 모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생명과 바꿀 수 없는 그런 이유 때문에 여기에 나와 있듯이 이 사람도 이 사람도 이 사람도 다 그런 관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다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지체를 소홀하게 여기고 우습게 알고 그리고 그들을 홀대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 그리고 자신 이 삼자의 관계가 원리적으로 바르게 붙들려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곳에서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내수동 교회에서 영결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몇 번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올라오셔서 “오늘 우리를 위해서 김 아무개 장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영결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 장로님이 오늘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장로님은 교회가 세워지던 30여 년 전 이곳에 오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얘기를 하면서 “찬송가 몇 장을 부르시겠습니다. 이 찬송은 고인이 평소에 가장 즐기던 찬송가였습니다.” 목사님이 교인들이 무슨 찬송을 좋아하시는 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유족들에서부터 다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장로님의 육성을 듣겠습니다.” 그리고 기도 녹음한 것을 틀어주는 것입니다. 잠잠하게 울려 퍼집니다. 그 장로님 돌아가실 때도 말씀하시던 일, 개척교회 때 교회를 지으니까 물이 얼까봐 물을 잠궈 놓고 가면 얼지 않습니까? 틀어놓으면 물이 콸콸 나옵니다. 집에를 못가시고 앉아서 그 물을 안 얼게 하려고 수돗물을 안 얼게 하려고 거기 앉아서 떨면서 밤새도록 지킨 이야기, 그런 얘기를 쭉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시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고 열심히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마지막 어디서 영결예배 드립니까? 영안실에서 친척들 모여서 옆에서 == 벌이면서 영결예배가 아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면서 살았던 그 예배는 모든 성도들에게 그 분은 죽어서 가면서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떠나갑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그렇게 경건하고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겼던 사람들이 죽어서 나갈 때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심령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내가 정말 저렇게 살다가 죽어야하겠다.’ 그런 결심이 생깁니다. 반면에 어떤 집에는 ‘막판에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정말 이 집에 십자가 휘장이 걸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마지막에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에 그래서 마지막에 이 세상에 살았을 때만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죽어서 장례식을 통해서라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보면서 언제든지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위기에 처할 때 마다 그렇게 기도와 헌신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던 그렇게 후세들이 우리의 후손들이 그리워하는 영적인 아버지, 영적인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교회에 기억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좀 한참 다녀야하지 않겠습니까? 6개월에 한번 등록카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그렇게 해서 무엇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참 하나님을 섬기다가 죽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면서 가는 것, 가는 것입니다. 누구는 빨리 가고 누구는 좀 늦게 갑니다. 그 차이는 있지만 그냥 가는 것입니다. 먼저 간 사람이 거기 터 잡아 놓고 상 차려 놓고 동창회할 때 기다릴 것입니다.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마지막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는 ‘회장을 했냐? 사장을 했냐? 무슨 대표를 했냐? 무슨 동창회장을 했냐? 국회의원을 했냐?’ 그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어느 교회를 섬기다가 왔느냐 그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올라가서 그렇게 마지막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올라가서 어떻게 합니까? 올라가서도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거기 올라가면 이 세상에 있는 것 모두 다 이루어집니다. 소망도 이루어지고 믿음도 성취됩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 이 옅은 믿음이 아옵나니.’ 그 속에서 주님이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거기 다 모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서 섬겼던 그 열린교회를 내려다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고 마지막에 이 세상 모두 끝나고 그리고 그 다음에 혼인잔치와 함께 모든 백성들이 들려 올라가서 하늘에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드라마의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뭐 특별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 한분이고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마음껏 펼치면서 살 수 있도록 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