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제사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찢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지난 사간에 말씀 드린바와 같이 짐승이 사냥감을 한발 혹은 두발로 짐승을 물고 살을 찢는 장면을 묘사한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섬짓한 그런 묘사에요. 그러면 도대체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언약 맺으신 백성들을 향해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을 하실 수 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 표현이 과격한 만큼 사랑의 깊이를 보여 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지금 이 백성들을 찢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당신과 이 언약관계로부터 이탈되어서 바른 길로 가지 않는 그 백성들을 향한 마음이거든요. 하나님 자신은 부족한 것이나 모자란 것이 없으신 분이시죠. 마치 그 하나님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실하게 필요하신 것처럼, 너희들이 나를 떠나면 나를 아는 지식을 버리면 내가 너희들을 찢어 버리겠다, 라고까지 강력하게 촉구하는 그 모습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무엇인가 손해가 나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의 교통 속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것은 결국 사랑의 표현인 것이죠. 스승의 날이면 한번 씩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는 고등학교 때 은사가 계신데 그때 학교선생님들의 월급이라는 것이 하찮았거든요. 근데 지금은 죽었는데 제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하루는 그 선생님께서, “야 그 아무게는 도대체 왜 학교를 안 나오냐” 등록금을 못 내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못나오는 거죠. 절 보고 그러시는 거예요. 가서 내가 학교 나오란다고 그래라, 연락을 해라, 그러시는 거예요. 담임선생님도 아니었는데 그래서 찾아가서, 야 너 아무개 선생님이 등록금이 어떻게 되었든 널 보자 그러신다, 깜짝 놀라는 거예요, 갔어요. 오자마지 뺨을 후려갈기는 거예요. 한차례가 아니라 서너 차례 후려갈기면서, “너 이놈의 자식 너는 정신상태가 썩어 먹었다” 등록금을 못 내서 학교에서 나가라 그래도 복도에다 가방을 놓고라도 유리창 틈새로 공부할 생각을 해야지, 이 나쁜 놈의 자식 하고 갈기는 거예요. 등록금 못 낸 것도 서러운데 후려갈기니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그 선생님이 등록금을 내 준 거예요. 그런 경우에 그것이 강력한 사랑의 초청이 되는 거죠. 무슨 소린지 느낌이 와요. 느낌이 와요? 겉으로 볼 때는 “아이고 그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어떻게 하냐 그래, 되는 대로 마련이 되면 다시 공부를 하도록 해라. 굉장히 젊잖죠. 오자마자 싸대기를 후려갈기면서, 이 썩어빠진 놈의 자식 말이지, 어느 것이 더 훨신 인격적이에요? 사랑의 표현은 후자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되죠. 강력한 애정의 표현이에요. 그러면서 그렇게 썩은 예배를 드리는 너희들은 나를 버린 사람이다. 그러면서 그렇게 맘에도 없는 그 따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보호를 받아 보려고 하는 그런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노력들이고, 대안이 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새로운 제사가 있는데, 그게 뭐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럼 결국은
뭐에요, 감사하라 이거죠. 이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감사가 없었다 이거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감사는 땡큐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누구에게 혜택을 받고 도움을 받으면, 감사합니다, 혹은 땡큐, 고맙습니다, 고맙다 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것은 영혼과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우리의 마음속에 받은바 혜택을 고마워하면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거죠. 진정한 감사는 영혼의 행동이에요, 영혼의 행동이에요.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런 표현을 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의 영혼은 마치 펄펄 달아오르는 용광로에 쇠가 들어가 그 쇠가 예전의 시커멓던 쇠가 아니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쇠가 되어 용광로의 물과 일치를 이루듯이 우리가 그 분을 진심으로 믿는 그 순간에 우리의 영혼에 참된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있는 그 곳에는 반드시 참된 사랑이 있다. 라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더 주목할 만한 표현은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지만, 사랑은 믿음을 불러 오지 못한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얘기죠. 그 사람이 보기에 가서 고행을 하고, 성지순례를 하고, 그리고 면죄부를 사고, 하는 이것들은 영혼의 행동이 아니라는 거죠.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감사는 그래서 히브리말에 보면, 감사하다는 말과 찬양하다는 말은 같은 단어에요. 근데 이거는 단순히 이것을 읽으면서 땡큐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전존재적인 하나님을 향한 의존과 그리고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그 진정한 경배의 표현이에요. 사실은 이게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자기는 티끌만큼도 가치가 없는 인간이요,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도 진정으로 감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에 그는 자기의 것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사람이 되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전적으로 그 하나님의 소유이며, 혜택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살아 숨 쉬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것이죠. 땡큐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 뜻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한 번의 예배, 그리고 진리의 말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교제, 주님이 주신 사명, 이 모든 것들이 감격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감격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러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는 거예요. 이것이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런 거예요. 더 재미있는 것은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보이겠다, 두 개가 병행꼴의 짝을 이루면서 등장을 하는 거죠. 감사를 드리는 자와 행위를 옳게 하는 자가, 짝을 이루면서 등장을 하는 거죠. 그건 무슨 뜻이에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율법적인 삶이라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참된 감사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이거죠,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이거죠. 밖으로 흘러나온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이거죠. 그러면 여기서 지금 비난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미도 없는 제사를 드리고 형식적으로 성전을 들락거리고 있을 그때에, 그들의 행동이 그러했다면 그들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는 어떻다는 거예요?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하나님이 없는 거죠.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막보는 삶이라고 얘기했잖아요.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자기보다 현저히 지위가 낮고 그의 하는 짓이나 모든 것들이 거슬려서 그래서 이 인간과 관계를 끊어도 추호도 내가 손해 볼 것이 없다 라, 생각되고, 관계를 계속할 때에 내가 계속 치댐을 당하고 되고 결국은 내가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 우리는 사람을 막보게 되는 거죠. 그 얘기는 뭐냐면 하찮고, 가치가 없는 존재이고, 그리고 너 같은 거하고는 관계가 끊어져도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뜻이에요. 그게 바로 막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렇게 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이거에요. 그럼 그렇게 막보는 사람들이 교회는 왜 그렇게 나오느냐? 저위해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왠지 한 주간 동안 자기를 에워쌀지도 모르는 두려움, 양심의 가책, 무엇인가 할 일을 안 한 것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 이런 것들을 떨 쳐 버리기 위해서 오는 거니까, 참석하는 그 즉시 이미 받아야 할 모든 것들을 받은 거죠. 하나님은 그에게 추호도 그에게 빚진 게 없으시죠.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 절반 이상이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고 구자 근처도 안간 사람들이에요. 성경은 신앙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아요.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아주 티끌과 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든 신에 대한 의식은, 막연한 신에 대한 의식이지,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의식이 아니라는 거죠. 영혼의 참된 행위가 아닌 모든 제사, 그리고 모든 은혜의 수단,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그릇된 동기들,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탄핵을 받았던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막보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참된 사랑을 동반한 믿음이라든지, 또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전심으로 드리는 특허라든지 그런 거 없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행위를 하면 할수록 그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현저한 무시이고 멸시에요.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방향과 꼭 같았어요.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심판하시고 당신의 교회를 정결케 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거기에 참여하게 하시는 거죠. 이것은 정말 성경 속에 나타나는 영원한 진리에요. 아무도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나타나셔서 너희 어떻게 그렇게 나를 막보는 삶을 사느냐, 어떻게 너희는 나를 이렇게 막보며 예배하느냐 할 때에, 오주님 예상하던 지적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모두 거기에 묻어서 그렇게 하나보다 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선지자가 필요했던 것이에요. 그래서 누군가가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증거 해주고, 그런 메시지가 필요했던 것이에요. 윌리엄 퍼킨스 라고 하는 영국의 청교도는 그래서 그러한 선지자의 기능은 신약에서 목사들에게 계승 되었다고 믿었어요. 목회자라는 말처럼 애매모호한 말이 없어요. 저는 썩 좋아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저 함께 엉기덩기 묻어서, 그래서 우리 함께, 우리 모두 함께, 함께 아닙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죠지 휫필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3만명을 동시에 놓고 육성으로 설교를 해서 또렷이 알아 들을 수 있게 설교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이라는 사람이 역사 속에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도대체 이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가는지 실험을 했습니다. 1마일 바깥에서, 1.65킬로에요. 또렷하게 설교내용을 들을 수 있었대요. 그렇게 전설적인 설교의 역사를 남겼던 분인데, 그분이 평생 설교하면서 지킨 철칙이 있어요. 우리가 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설교자들에게 강하게 권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한때, 저도 깊이 공감을 했어요. 그게 뭐냐면, 그 말이 성도들로 하여금 애매하게 숨게 만든다는 거죠. 목회자도 지금 하려고 애를 쓰는 중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 분은 평생 설교 속에서 우리가 라는 말을 사용을 안했어요. 너희가, 당신들이, 그대들이 그렇게 표현을 했어요. 그러면 자기는 완전한 사람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죠. 어떤 메시지를 들고 교인들에게 똑바로 해라고 외칠 때가 되면 설교자는 자기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든지, 아니면 못했을 때는 회개를 했던지, 그거라는 거죠. 그러면 그건 하나님의 관계에서 해결 된 거고 그러면 자신은 설교할 때만큼은 하나님 편에 있는 거고, 교인들을 하나님과 마주하면서 설교를 듣기 때문에, 우리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것이 아니다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목회자하고는 그렇게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에요. 그거 절대 좋은 게 없어요 .여러분, 여기를 떠나서도 마찬가지에요. 그거 안 좋아요. 절대 좋은 거 없어요. 나는 별로 좋은 거 못 봤어요. 여러 가지 손해가 있는데 목회자와 친밀하면은 말씀을 잘 안 듣게 되요. 교제의 기초가 진리가 아니라 그래서 진정으로 목양 받는 사람들은 늘 목회자하고 식탁을 마주하고 가까이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목양을 받는 게 아니라 먼발치에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하는 사람들이 목양을 받는 거예요.
아세요?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정말 여러분들이 생각을 많이 해야 되요. 목회자 가까이 있어서 늘 붙어 다니고 가족처럼 지내고 하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선포될 때 어떤 심리냐고 하면은 자기는 목사 편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굉장히 해로운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느 정도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느 이렇게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목회자는 평생 외로운 거예요. 여러분들은 와서 다 털어 놓을 수 있지만 목회자는 그런 거 없어요. 그러고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거죠. 그래서 큰 문제는 뭐냐면 사랑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가 문제죠. 지혜로운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각각 있었는데, 마지막에 뭐라고 하냐면 반은 등불을 잘 준비하고 반은 안했거든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뭐라면 다 졸며 잤다. 등불 준비한 처녀나, 아니면 빈 통 들고 온 처녀나 다 자는 거죠. 사실 어떻게 보면 깨어 있어서 슬기로운 처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슬기로운 처녀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깨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필요한 거예요. 보라 신랑이라. 그건 도대체 누가 외치는 소리였겠어요? 그리고 그런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음속에서 강하게 반발할 때 그건 둘 중의 하나에요. 중생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마음에 지금 사단의 강력한 지배아래 놓여있거나 둘 중의 하나에요. 그 밖의 세 번째 없어요. 둘 중의 하나에요. 그 영혼은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결국 이 시편 오십편 에서 피를 토하듯이 당신의 분노를, 물을 쏟듯이, 당신의 마음의 슬픔을 표현하신 다음 마지막 내린 결론은, 감사로 제사를 드려라. 너무 싱겁지 않아요, 그런데 이것은 그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영혼의 참된 변화, 주님께 붙어있는 사랑과 그리고 온전한 믿음의 합일, 그 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절대의존의 신앙, 이런 것이에요. 그래서 그 형상이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주님 앞에 그러한 영혼과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그 좋으신 하나님께 전심으로 경배하며 정성스러운 제사, 그것이 주님이 받음 지식한 제사에요. 그러한 제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그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온전해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되게 변화되는 거예요. 그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