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언약 백성의 삶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시 50:13).
여기에서 하나님이 질문 하시는 장면이 나오죠.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이건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는 구별되는 영적인 분이시며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표명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모든 참된 경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시냐를 아는데서 출발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제사를 형식적으로 드려서 나를 만족시키고 내가 그 제사를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건 잘못된거다. 왜냐하면 나는 음식에 주린다든지 피에 굶주린다든지 그런거 없다. 내가 설령 주린다 하더라도 주릴 수도 없지만 혹시 주린다고 하더라도 너한테 달라고 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와 거기에 있는 충만한 것이 다 나 여호와의 것이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겠느냐 내가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경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아는 정확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예요
이게 인제 고대 근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내용인데 사실 이 제사의 제도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는거거든요. 이게 결국은 계시의 통일성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섬기도록 제사를 계시해주셨는데 이게 정식으로 제사에 관한 규례는 주전 15세기 모세때 나오지만 그러나 실제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전이예요. 그래서 아담에 타락이후 즉시 시작되었다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예요
증거가 뭐냐하면 이미 벌써 그후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에게부터 벌써 제사가 발견되쟎아요 그러니까 율법은 훨씬 후에 주어졌어도 제사는 율법이 있기 전에 벌써 있었다 이런 이야기예요. 그런 제사가 세계 일류의 모든 보편적인 의식이 된거죠. 우리 나라에서도 제사를 드리쟎아요. 이거는 전부 다 시대가 흘러오면서 변한 하나의 약식의 제사이고 원래 궁중에서 드리던 제사는 생식으로 드리는 거였어요. 그 제사의 예법으로 돌아가 보면은 성경의 제사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죠. 섬짓할 정도로 유사한 거죠. 중근동 지방에서도 이러한 제사의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은 거룩하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며 불변하시고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거든요. 근데 이제 고대 중동 지방에서 섬기던 다신교적인 사상에 있어서의 신은 그런 완전하고 도덕적이고 뭐 이런 인간과 언약을 맺고 그런 신이 아니라 때거지로 몰려다니면서 걸근 데는 신이예요.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신들이 복을 준다든지 이런 개념은 오히려 약하고 심술을 자꾸 부려요.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이 제사를 지내로서 신들을 달래야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신관도 유사하거든요. 큰 빌딩 짓고 그럴 때 아직도 지하실을 파고 거기에 돼지 대가리를 놓고 구부렁거리고 절을 할 때에 건축비가 덜 들게 해달라든지 3층을 지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5층이 되게 해달라든지 뭐 그런 황당한 소원을 갖고 하는게 아니라 제발 가만히 있어라 여기 터줏대감이 있는데 여기 심술 부리지 말고 제발 니 땅 판다고 심술부리지 말고 가만 있어라 그래서 우리 사업에 방해를 놓지마라 그런 정도의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될 때에 이 제사는 다분히 뇌물의 성격을 띄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이 이방의 제사의 개념이 신앙이 떨어지면 이스라엘에 속으로 계속 들어오는거예요 그래서 이방인들이 이방신들을 섬길 때에 이방신들에게 보험을 걸듯이 뇌물을 바치는 것처럼 이렇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따라하는 거예요. 이런 여러분 누군가에게 뇌물을 줄때에 마음과 뜻과 성품을 바쳐서 뇌물을 줍니까 속으로 ‘야 이자식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러고 던져 주는거지. 그러니까 중심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 없이 드리는 모든 예배는 뇌물이예요.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게 생각없이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 위한게 아니라 저 위한 거예요. 왜, 주일날 예배를 안드리면 찝찝해서 마음에 부담을 느낄 자기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털어버리기 위한 것이예요. 이런 식의 이방의 뇌물 개념으로서의 예배, 뇌물 개념으로서의 제사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되면 풀어볼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자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의존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그 모든 제사는 뇌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이 오히려 제사를 안드리는 게 낫지 당신 자신이 그것도 언약 백성들에 의해서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하나님이 차마 견디지 못하시는 거죠.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는거죠.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매일 모욕을 받는다.’ 바로 그 이유라 이얘기예요. 언제든지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생각,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진술, 거기에 기초한 진지한 사색,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섬겨지는 것 이예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이예요.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는 거죠. “나는 당신을 뜨겁게 사랑해. 내 온 생명을 주고 싶어. 그런데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개의치 않아 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든지 어디에 살든지 그리고 출신이 어디든지 성격이 어떻든지 나는 아무상관 없어“ 이거는 육에 의해서 몸을 파는 여자들의 고백이예요.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아무 상관없어. 나는 그저 뜨겁게 사랑할 뿐이야. ” 그거는 진정한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면 어떨때는 보면 막 생애적으로 지독하게 방황을 하쟎아요. 거의 죽을 자리에까지 가쟎아요 그래도 나중에 주님 앞에 돌아와 그리고 자유함을 얻게 될 때에 그 깨달음은 뭐냐하면 모두, 하나도 예외없이, 하나님은 무엇이시며 하나님은 어떤 분 이신가에 대한 대답에 정확하게 연결이 돼있는거예요. 이해 안되세요? 다시 설명하면, 예를 들어 봅시다 .
아무렇게나 막살아요. 그러다가 큰 환난을 당해요. 그러면서 뭘 깨닫냐 하면 ‘아 ,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구나! 결국은 그 하나님에 대한 답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헤어나기 위해서 지독하게 막 몸부림을 치는데 아무 일도 안돼.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때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방황하던 사람이 다시 영혼에 생기를 회복하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될 때에 거기에는 하나님이 죄인도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답 때문에 생애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겨 주셨어요. 그런데 개중에 보면은 정말 하나님 두려운 지를 모르고 하나님 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직분을 헌 옷 보따리 팽개치듯이 아무렇게나 팽채치고 자기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인생에 깊은 위기를 만나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각성하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돼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 자신이 무엇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가 하는 이 두 가지 대답, 하나님은 무엇이시며, 이건 존재에 관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이건 성품에 관한 거예요. 거기로 귀결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거에요. 또 하나님의 한 쪽 만을 발견하고 치우쳐서 잘못 사는 경우도 있지요. 예를 들자면 곤고하고 괸장히 힘들지만 오래전에 하나님이 용서하신 죄를 가지고 깊이 고통을 받으며 그러며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방종한 삶을 오히려 원망 속에서 살게 되요. 그건 뭐냐하면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의로운 성품은 발견했는데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는 지식이 전혀 없는거예요.
구원파 같은 경우가 대표적 이쟎아요. 성화를 안가르치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멀리 떠난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은 괸장히 강조를 하죠. 그런데 돌아온 다음에는 끊임없이 그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를 죽이면서 살아야 되는 성화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삶이 온전해질 수 없는 거죠. 이런식으로 해서 모든 삶은 철저하게 일호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하나님이 무엇이시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이 질문에 연결이 되는 거죠.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외쳤던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나에게는, 나는 그러한 영인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게 나아오는 너희들은 이 세상에 잡신들에게 뇌물을 드리듯이 제사를 드려서 너희의 인생에 보험을 들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나를 예배하는 길이 있다’ 그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걸 내일 이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