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전에서 받은 축복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84:3-4)
녹취자: 표명희
지난 시간에는 제가 부흥회에 갔고 그 이전 시간에는 부흥회였고 그래서 두주를 건너 띄었습니다마는 너무 오래 됐으니까 한번 상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본 것은 2절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진다. 어떻게 해서 예수 믿는 신자의 영혼과 교회가 연결이 되는가 그 말씀을 드렸고 왜 그렇게 사모할 때 쇠약해 지는가? 그 속에서 우리들이 개인의 영적인 삶과 교회와의 관계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걸 말씀 드렸습니다. 그 시간이 대단히 은혜로웠던 시간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사랑 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 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그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될 수 있겠느냐?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 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마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충성스럽게 섬길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분위기가 전혀 바뀝니다. 3절과 4절을 한번 다시 보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성전을 사모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 시대에 우리가 과연 오늘날 왕이라고 하는 그 말이 갖는 그 무한한 의미를 얼마나 이해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의심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왕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왕은 한 마디로 비교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 그래서 동양에서도 땅에서 나는 모든 풀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 나라 왕의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모든 새 그것도 왕의 것입니다. 하여튼 그 나라에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왕의 것이었습니다. 왕의 것이었는데 하물며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떻게 취급되었겠습니까? 남의 집에 들어와서 빌붙어 사는 사람정도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 왕이 다스리고 왕의 소유인 그 땅에서 태어나고 먹고 자라는 모든 것이 전부다 왕의 집안의 신세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충성의 윤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는 이 시인은 이렇게 그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나의 왕 세상의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지만 이 시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왕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 아니라 빈 말이 아니라 겉치레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하나님이 이 시인의 인생에 이렇게 오셔서 자기를 다스려 주시고 통치해 주실 때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필연적으로 교회와 관련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와 관련을 맺게 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가고 그 교회 속에서 우리는 신앙이 자라갑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는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말씀을 가르쳐주고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바르게 아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주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것이 말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등록하는 것을 마치 무슨 사교단체에 등록하는 것보다 더 가볍게 생각하고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고 단골집을 정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이런 사고들은 말하자면 신앙이 희박한 시대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는 시대에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근데 어쨌든 이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전적으로 자기를 다스려주시고 통치하시고 지배하기를 기뻐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 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특성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국한된 하나님의 백성 이외에는 가질 수 없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특성은 무엇입니까? 무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면 우리를 다스려주시면 우리는 선하고 행복할 것이며 하나님 이외에 누가 우리의 인생과 삶을 다스리고 이 세상을 다스린다면 그러면 우리는 불행해 질 것이라는 확신 이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일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닌 다른 것들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강요를 받을 바에야 차라리 죽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깃들어 있는 지울 수 없는 특성이요 성품이라고 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신앙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를 사모하는 것은 단순히 거기에 안락과 쉼과 위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만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가 있고 거기에만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나와 나의 인생을 다스려 주 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언제나 이어질 듯 끊어지고 또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러한 불행함을 되풀이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끊으시거나 다시 붙이시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죄악과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는 나 자신의 죄 된 육신의 본성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나를 지배하고 내 인생을 다스리려고 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견고해 졌다가는 연약해지고 연약해 졌다가는 다시 견고해지고 하는 이러한 말하자면 관계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하고 굳세게 그리고 거기에 견고하게 서 있어서 언제든지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려주시는 완전한 통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숨길 수 없는 표 이 세상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표는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장 행복해 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해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를 다스리고 또 죄가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의 자아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백성의 성품입니다.
나의 왕이라고 하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이 고라의 자손이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를 때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나 유다의 왕이나 아람의 왕이나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앗수르나 바벨론의 왕이나 이런 정도의 왕들과 비교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의 왕이 아닙니다. 호세아서는 말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왕을 세우셨고 분노하심으로 그 왕을 폐하시는 도다. 하나님은 왕 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왕 되심은 이 세상의 모든 왕 되심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 되심은 단지 하나님의 통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이세상의 권세 자들이 세움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왕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지금도 이 세상에 임금들을 세우기도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고 다시 세우기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세상의 왕과 그리고 세상의 왕권은 쇠약해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고 버림을 받고 타도당하고 다시일어서고 다시 무너지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의 왕권은 흔들리지 않고 세세무궁토록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위대하신 하나님을 오늘 이 시인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이런 하나님을 발견하고 이런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준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묻는 것입니다. 그는 또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뛰어남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만군의 여호와는 야훼 쯜라오투라는 말인데 이 말은 복수입니다. 수많은 군대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수많은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군대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나라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그 모든 군대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과연 그 군대가 하나님의 왕권을 모두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함에 있어서 수많은 군대들을 부리고 계십니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가 그분의 손에 있고 그리고 언제든지 그분에게로부터 반포되는 명령을 기다리며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기로 준비한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하늘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만군과 함께 여호와는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시고 그 백성들을 지키시며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크고 놀랍고 위대하고 우주적인 그 하나님을 오늘 이 시인은 부르고 있습니다. 어디서 만났습니까? 이 모두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그 궁정을 사모하고 그리하여 승전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게 될 때 만났던 하나님을 오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 시인이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운지요. 고백할 수 있었던 그 이유를 우리는 이 3절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장막을 보면서 그렇게 금할 수 없는 사랑으로 자기의 마음이 벅찰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대적들과 싸워서 이기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다스리심을 기뻐하게 하시기위해서 역사하시며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를 영적으로 지키시기 위해서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움직이고 계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성소가 사랑스러워지는 이런 은혜가 심령 속에 넘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말하기를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성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이런 이름이 우주적이고 아주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준다면 오늘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하는 이 말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가치 없는 피조물들에게 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참새는 가치 없는 짐승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씀 하셨습니다. 그 하늘을 나는 새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거늘 어찌하여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화폐 가치로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해 전에 한번 어느 주석을 보니까 한 앗사리온이 오백 원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고 하니까 그러면 참새 한 마리당 이백 오십 원 어치정도 됩니다. 지금은 아마 참새구이 집에서 한 마리 먹을 때 이백 오십 원 주고는 아마 못 먹을 겁니다. 어찌됐던 지간에 한 마리에 불과 몇 백 원에 지나지 않는 새들이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은 누구 때문이냐? 이렇게 말하면서 인간이 한없이 귀하고 한없이 하나님이 인간을 간섭하시고 사랑하시는 증거를 한없이 가치 없는 새를 하나님이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을 보면서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참새는 불명예스럽게도 가장 가치 없고 그러한 무가치한 피조물 중에 하나로 거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과 함께 들에 핀 백합과 함께 아궁 속에 던질 풀 이런 것과 함께 가치 없는 미물로 취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정말 책을 찾아도 안 나옵니다. 정말 새끼가 그렇게 성전에 들어와서 집을 짓고 살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넘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은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백성들 이외에게 조차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가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진리를 실제생활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이끌어 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런 건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우리가 지난 여름처럼 물이 가득 찼습니다. 할 수 없이 인부들을 불러다가 공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인부들이 왔습니다. 드디어 일을 시작해야 되겠는데 임금에 대한 협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집사님들은 조금이라도 교회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말하자면 시세보다 낮게 주고 싶어 할 것이고 일을 하러온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양자 간에 줄다리기가 벌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죠? 집사님들의 입장에서는 그랬습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깎는 것이 교회의 돈을 아끼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성경을 보면 우리들은 아주 실제적인 암시를 받게 됩니다. 참새와 제비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집을 짓고 거기에 거하며 그리고 거기서 생명을 부지하고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만나고 그 백성들에게 한없는 은혜와 소위 얘기하는 히브리어로 헤세드 아가페를 베풀어 주시는 장소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미물들조차도 땅에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같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는 것이 말하자면 옳다는 사상이 여기에 깃 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와 관련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안에 지체는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물질적인 혜택을 받으러온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기위해서 온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예외이고 우리는 또 다른 원리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외부에서 와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용역을 제공하거나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보다는 훨씬 더 너그럽고 풍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난 생각합니다. 저는 공사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물건을 교회에 납품하는 사람들 가운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이런 문제에 걸려서 예수를 안 믿고 교회생활을 안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자 그럼 좀 더 쉬운 원리를 제시해보겠습니다. 우리가 교회 쓸 용품을 위해서 이 앞에 있는 문방구에 가서 물건을 삽니다. 깎으면 깎을수록 교회의 귀한 헌금을 아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거래 할 때는 언제든지 아주 터무니없는 이익을 남기게 하는 것은 경제 정의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그렇죠? 500원짜리 물건을 교회이기 때문에 천원에 파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것을 용납해 주는 것은 정의의 측면에서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그러 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입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은덕을 입을 수 있는 그러한 삶이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것을 교회에만 적용시키면 안 됩니다. 여러분 자신에게도 적용시켜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 합니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전 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저한테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나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그 앞에서 늘 식료품을 사는데 물건 값을 바득바득 깎았던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 물건 값을 삼년이 넘도록 거래하면서 한 번도 깎지 않았습니다. 주부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예민한 사람입니까? 10원만 더 받아도 주부들에게 있어서는 돈에 대해서는 민감한 감각대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안갑니다. 절대 다른 집으로 갑니다. 아무리 멀어도 이쪽 내버려두고 저쪽 집에 갑니다. 십 원, 이십 원만 싸도 저쪽에 가서 삽니다. 남자들은 좀 덜 한데 주부들에게는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신이 주부들에게는 필요합니다. 풍작 풍작 쓰면 그 집안이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복음 전파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는 물론 여러분들이 물건 값을 깍지 않는다고 저절로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직장 다닐 때 안 믿는 사람들이 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얼굴 배짝 마르고 안경 쓰고 키 조그맣고 따지기 좋아하면 백 퍼센트 예수 믿는 사람이랍니다. 그것도 예수 많이 믿는 사람이랍니다. 거기에 머리까지 벗어진 것을 하나 추가합니다. 이런 것들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에서 시인만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찾는 성소를 찾는 미물들도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거지나 잠잘 곳이 없어서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서 80%이상은 거짓말입니다. 이교회 한번 저 교회 한번 돌아다니면서 집이 목포인데 가면 교회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고 어느 교회 목사님은 또 잘 곳이 없으면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다고 편지까지 써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교회 가서 만난 사람을 저쪽 교회 가서 만나고 합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거짓말이고 아니고는 그 사람 사정이고 교회가 딱 볼 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그 사람 인 생에 도움이 되겠느냐? 안 도와주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각자의 판단이니까 누가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출발이 어떻게 되는 거냐 그 거지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도움을 얻기 위해서 들어왔을 때 불쾌하고 싫은 기분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쌍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드는데 굉장히 이 사람이 긍휼히 여겨지고 불쌍히 여겨지는데 그러나 내가 도와주는 것이 이 사람의 인생에 해로운 것이다. 라는 그런 판단이 들면 그 사람에게는 행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 처음 다니던 교회에 불같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잘 한다고 교회에 거지가 세 명이나 왔습니다. 진짜 떼거지였습니다. 거지가 돈 좀 달라고 또 자고 가자고하니까 그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거 못해주겠느냐고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기도실에 잠자리를 깔아주고 교회에서 편히 자는데 그 사람들이 술 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목사님한테 혼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그 혼나는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큰 통찰을 얻었습니다. 아 정말 날카로운 판단이시구나. 그때 혼난 요지가 뭐였냐면 그때 제가 혼나는 광경을 참여하지 않았으면 그런 통찰을 못 가졌을 지도 모르는데 제가 최근에도 집회를 간 몇 교회서도 목회자들이 그 문제 때문에 아주 판단을 못 내리고 고민하는 걸 봤는데 거지가 마구 온다고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겨우 한번 참석 한 다음에 교회에서 먹고 자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불 깔고 드러누워서 목욕도 안하고 냄새가 나고 근데 이것을 내쫒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애기해서 그런데 저는 통찰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목사님 말씀이 이거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사들로서 그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하자가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 술 취한 사람들을 재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원칙에 어긋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니까 너희 집에 가서 재워라. 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불쌍하면 너희 집에 가서 재워라. 가장 바람직한 것은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을 위한 유숙소가 있으면 좋겠죠.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너희 집에 가서 재워라. 그렇게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것을 지금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교회에 재운 것이 결국 당신들에게는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냐는 이런 추궁 이셨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엇 그제도 저희 교회에 어떤 사람이 와서 자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안 된다. 여관비는 못줘도 여인숙에 가서 잘 돈은 요즘은 돈만 있으면 잘 수 있으니까 돈을 줄 테니까 여인숙에서 자라 교회는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우리 교인들조차도 자는 걸 목적으로 오는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하더라도 목회자인 나는 막는다. 왜? 하나님의 교회는 잠자기 위해서 오는 곳 일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러 왔다가 잠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은 우리 교인들도 교회를 그렇게 이용 안하는데 교인이 아닌 당신이 교회를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느냐? 그건 안 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말하자면 혜택을 입을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온 사람들은 결코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혜택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가장 가치 없는 그러한 인생인 것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어디서 그들이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래서 한번 간증을 했던 적 있습니다만 그 교회에 있을 때 하루는 저녁때 나가서 중간쯤 앉아서 기도하는데 웬 청년이 어두운데 들어옵니다.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데 이거 뭐 소리도 안내고 깊이 묵상 기도하는데 이렇게 보니까 성경찬송을 들고 와서 옆에 탁 놓고 엎드려 기도하는데 얼마나 기도하는지 한 세 시간을 해도 안 끝났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옆에 가서 보니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웠습니다. 그리고 더 기도하겠느냐? 그랬더니 더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또 더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열두시가 넘지 않게 기도하고 돌아가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지금 그 교회에서 집사가 되어 있습니다. 정신적 우울증 증세도 있고 그런 청년 이었는데 다 치료받고 그 교회에 있는 자매하고 결혼한다고 엊그제 청첩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망이 없고 정말 긍휼히 여길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들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교회에 회원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생각 중에 하나는 저 사람이 교회에 없었으면 하는 그 생각이야말로 가장 악한 것입니다. 오늘 여기 보십시오. 참새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참새도 여호와의 집에서는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고 그리고 깃들 곳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왕궁에 이런 새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가 집에 이런 새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온 우주에 뛰어나신 온 우주의 백성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이곳에 거기에 이들이 깃들면서 말하자면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도 이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서 이렇게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이 성경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사는가? 과연 우리로 말미암아서 소망이 없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우리의 인격의 그늘아래 깃들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그리고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다는 이유 때문에 가치 없고 이 세상에서 사랑 받을 수 없었고 이 세상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내신앙의 인격의 그늘아래 깃들여서 보호와 쉼을 얻고 있는가? 나는 그런 의미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작은 교회가 되고 있는가? 가슴이 막 아려오면서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구속하여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시는 이 놀라운 사랑을 맛보고 경험하고 그리고 체험한 사람들이 그리고 한때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참새는 낫죠. 참새가 무얼 먹고 삽니까? 공중에 나는 새가 무얼 먹고 삽니까? 제비가 무얼 먹고 삽니까?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그러니까 연결이 참 묘하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은 그 누가 지었습니까? 자기네들이 지었습니다. 자기네들이 누구입니까? 은혜 받은 사람들이 짖기를 성경은 제비도 하나님의 전에서 깃들 곳을 얻는다. 그랬습니다. 자기들은 고백하기를 벌레 같은 나라고 했습니다. 제비는 벌레를 먹고 사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신들의 존재가 그 참새 나 하나님에 집에 깃든 제비의 존재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 인생들입니다. 말하자면 그 성전인 자기의 육체, 자기의 삶 자기의 신앙, 그 인격의 그늘 아래 이렇게 깃들 수 있게 못한다는 그 것에 대해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픈 그런 시간들을 제가 한 이틀 동안 보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베푸시는 그 놀라운 은혜와 그 헤아릴 수 없는 헤세드 아가페의 특권들 이런 놀라운 은총들을 우리들이 받고 또 받을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의 헤세드가 이 가치 없는 인생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의 교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에서 가장 우스운 사람이 누구냐면 자기가 교회에서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이 교회에서는 가장 무가치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이교회에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은 그 교회에서 가장 무가치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단체는 자기가 있어야지만, 이 회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교회는 자신이 가장 무가치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사람들이 그 모인 곳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구성되는 원리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윤리도 틀리고, 모든 게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아지는 자가 높아짐을 받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낮아지는 자가 높아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대접받습니다. 어른 흉내 내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성도들이 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자연스럽게 그 성도들의 마음과 삶속에서 이런 헤세드 아가페의 사랑이 세상을 향해 미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런 사랑이 없는 모든 이유는 결국은 교인들이 자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긍휼히 여기는 이러한 마음도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들을 긍휼이 여기고 또 하나님의 그런 긍휼히 여기는 사랑을 받기에 자기들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 지를 깨달을 때 그 교인들이 모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이 이 미물들에게 미치고 전파 되고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해택을 받고 유익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체험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이 시인은 자기뿐만 아니라 참새나 제비 같은 피조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런 원리를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는 이러한 선상에 서야 합니다. 교회가 자신을 위해서는 오히려 인색하고 남을 위해서는 오히려 부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가운데서 여러분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서 다가오는 사람들의 손길을 거절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한 없이 많이 받게 될 때 그 때에 성도들은 오늘 참새와 제비가 쉴 곳을 얻었던 성전과 같이 그렇게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그 헤세드 그 아가페를 자기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고 폄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바로 복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저 사람 속에는 나와는 다른 어떤 인생의 원리가 저 사람을 움직이고 있으며, 나와는 틀린 어떤 주인이 저의 삶을 주관하고 그리고 저인생과 영혼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있다는 인상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편 83편 3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들로 말미암아서 안 믿는 사람들이 유익을 받고 이익을 받는 그런 삶을 살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더욱 그런 삶을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인생의 대 선배도 아니지만 저는 예수를 믿고 셋방살이부터 살림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는 꼭 조언을 합니다. 무슨 조언을 해 줄게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저는 조언을 합니다. “내 집으로 들어갑니까? 셋방으로 들어갑니까?” “셋방으로 들어갑니다.” 무슨 거창한 조언을 해줄게 있겠습니까? 수도세와 전기세 때문에 주인집과 싸우지 마십시오. 이것이 제일 처음 주는 조언입니다. 여러분 세를 살다보면 말도 안 돼는 경우를 당합니다. 한 등 쓰는데 만원씩 내라고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싸우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말 초라해 지고 맙니다. 그런 것들을 이기는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 보십시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이 고라의 자손이 여기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재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복음자리를 얻었나이다.
하나님의 교회와 관련 되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가끔 와서 말도 안 되게 밥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밥을 해서 대접 할 수 없으면 우리는 가서 떡국이라도 사먹을 수 있게 교회에서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이 그것을 통해서 한 영혼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은혜를 받은 증거인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 찬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 교회에서 나는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누구도 내가 없으면 교회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교회에 짐이 되고 가치가 없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남을 높입니다. 그리고 추어도 누가 교회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부분들을 통해서 우리는 강해지고 또 강한 부분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더 새로워지는 은혜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원리가 우리 개인에게도 철저히 지배해서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열린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덕은 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사경회에 참석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덕을 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덕을 보고,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인격과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헌신된 마음 때문에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깃들어서 잠시 쉼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안에서 이러한 성전의 모습이 이루어져 가야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마지막으로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 하리이다. 그러면서 다시 제비를 포함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집에 거하는 것들이 복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 있다고 하는 사실이 복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할 때는 물론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교회 갈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 가는 날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충만 하지 못하고 심경이 괴롭고 그럴 때에도 교회 와서, 올 때는 그런 걸 기대하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가면 내가 하나님 앞에 깨져야지 그런 생각 안하고 올적 많습니다. 억지로 왔을 때도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다른 사람의 기도를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쉽게 혼자서 살 때는 녹아지지 않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녹아지는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느 장소에서 보다도 이 장소에서 하나님을 잘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다른 장소에서 보다도, 더 하나님에 관해서 잘 배우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이곳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끼고 이곳에서 기도할 때 우리는 다른 곳에서 보다 더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선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랑 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사람만큼 불행한 그리스도인이 없습니다. 사랑 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한 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온 인격을 던져서 주님을 사랑할 것인가 내 뜻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는 삶을 살 것인가 말 것 인가 하는 그 기로에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되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과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가치 없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얼마나큰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찬송 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입을 벌려서 가락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만을 의미 하는 게 아니고 삶 전체로서 하나님께 노래가 되고 싶어 하고 향기가 되고 싶어 하는 것 어쨌든지 그 하나님의 이름과 그 하나님의 그 존귀하심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들을 간절히 사모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그 사랑 할 수 있는 교회를 가진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과 신앙의 체험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되고 있는 한 그들은 어떤 상태이든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이 없을 때, 그가 교회 밖 어디에서 다른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전심으로 사랑 할 수 있는 교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빗나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사랑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교회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과 교회를 올바르지 않게 사랑하는 것 두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누구 말 따라 설교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잘하는 설교와 못 하는 설교밖에 없듯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체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존경심, 그 하나님에 대한 깊은 찬미 하고자 하는 마음, 이런 것들로 기초에서 비롯된 교회사랑은 참되고 바른 교회 사랑이고 이런 것들로 기초하지 않고, 다른 것들에 기초한 모든 교회를 향한 사랑은 올바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사랑은 겉으로는 사랑 같지만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 정체를 드러내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격적으로 남녀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깊이 사모하기 때문 그래서 이루어지는 그 사랑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기초가 되지 못할 때에 사람들은 언제나 그 사랑은 불안합니다. 강의가 있어서 가끔 제주도에 내려갔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기사가 하는 말이, 엄청난 사람들이 그날도 결혼해서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 하는 말이 선생님 공항에 저렇게 알록달록한 치마 입고, 양복 입고 팔짱을 끼고 있는 저 부부들이 행복해보이죠?” “ 예” . “신혼여행을 끝마치고 갈 때에 따로 가는 부부들을 많이 봤습니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이 패물 때문 입니다.” 그래서 벌써 호텔에 들어가지 않고, 로비에서 퉁탕 거리거나, 정원에 앉아서 둘이 심각하게 얘기하는 쪽은 틀림없이 같은 방 안 쓰고 그리고 따로따로 서울 올라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올라가면 즉시 헤어지는 것입니다. 혼인신고도 못했으니까 이혼 할 필요도 없는 것 입니다. 자기는 이 바닥에서 택시 운전하면서 그런 사람을 많이 봤답니다. 그렇죠? 그럴 것 아닙니까? 분명히 보면 신혼부부인 게 틀림없는데 여자는 여자대로 택시 타고 남자는 남자대로 택시를 타니까 그 부부 앞길이 뻔한 것 아닙니까 ? 참 다운 인격적인 사랑에 기초 하지 않는 사랑은 언제나 그런 문제를 낳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행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옥석을 가려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신앙의 체험과 믿음이 깊어지는 것 없이 교회를 향한 열심을 내는 사람을 교회는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왜? 언제든지 그들의 열심이 빗나간 열심이 되기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과 사랑은 기초가 올바르면 올바르게 갈 확률이 많지만 기초가 올바르지 않으면 목표도 빗나간 열심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기초가 분명하지 않으면 열심도 빗나간 열심이 될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 너는 교회에서 사냐?”이렇게 주변에서 얘기 합니다. “야 너는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서 사냐?” 맞습니다. 누가 그렇게 묻거든 “예” 우리는 교회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집에 있기를 가장 즐거워하고 그 집에 있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 주고 교회에 있을 때 우리가 바로 있어야할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 주의 집에 가장 확실하게 거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사찰입니다. 퇴근도 집으로 합니다. 출근도 집에서 합니다. 목회자들보다도 더 철저히 교회에 가까운 곳에 혹은 교회 속에 제가 살아 봐서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교회의 사찰로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잘 유지되면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 희귀 하다는 사실,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목회자 때문에 시험 들고 교인 때문에 시험 들고 교회를 향한 원망 교회에서 자기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들에 대한 한 매침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녔던 몇몇 교회에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만 제가 알고 관계 했던 몇몇 교회는 다 그렇게 사찰 집사님들이 말하자면 마음속에 한이 맺혀 있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교회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 합니다. 여러분 우선 하나님께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집을 섬기는 일은 교역자의 버금가는 소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비극은 소명이 없이 많은 직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들어와서 그렇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교회가 교회의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말 교회가 생각을 바꾸고 개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집사를 하다가 교육전도사가 됐는데, 저를 대하는 눈길이 틀려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누가 교역자가 교회에서 사례금을 받으면 누구를 위해서 세상의 직업을 포기하고 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세상에서 직장을 다니다 그 직장을 그만두고 교회 와서 사찰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위해서 그 사람이 그 길을 걸어가야 했을까요? 여러분 그것이 교회가 있기 전에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결단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삵 꾼입니다. 출발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점을 교회는 철저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면 그는 교회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교회에는 사례금이나 생활비를 사찰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준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억누르고 하대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은 절대 가질 수 없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교회가 아주 칼 같은 분별력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직원들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복한 결과로 세워진 사람들 이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가 반성을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성령이 슬퍼하시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은 사례금이 2,200,000이고 사찰은 200,000이더랍니다. 목사님은 세 식구고 사찰은 다섯 식구 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한테 물었습니다. “장로님 어떻게 목사님 사례금은 220인데 사찰 사례금이 20만원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장로님하시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사장 봉급하고, 수위 봉급하고 같습니까?” 사고가 무엇이 지배하고 있는 지를 벌써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례금이 같아야 된다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의 구조들은 성령이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나는 가치 없는 참새 그리고 가치 없는 새들도 다른 곳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깃들 곳을 찾고 새끼들의 보금자리를 얻고, 보호를 입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치는 헤세드 아가페를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이런 특권들을 하나님의 성소에서 이피조물들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면에 대해서는 기회 있으면 더 얘기하겠습니다마는 우리는 엄청나게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산다고 해서 그것이 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교회에 붙어서 사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없이 이 교회에 있는 것이 즐겁고, 이교회에 있는 것이 좋고 그리고 이교회에서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아서 뒤편에 나오는 시인의 고백대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 보다 내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러한 고백이 흘러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집에 거하는 것 성소에 거하는 것 그것이 한없이 즐겁고 귀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가 직원들과 사찰에 대해서 굉장히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섬기는 그 말할 수 없는 특권!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원들로 하여금 이렇게 이곳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 천 날보다. 좋사옵나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고난은 받았고 역경은 있었고, 그다음에 힘에 넘치도록 고생은 했지만은 내가 열린 교회에서 목회하는 날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행복했고 다른 곳에서 내가 대접을 받았던 그 수많은 장소 수많은 날보다도 내게 있어서 행복하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그 교회가 내게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끔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이시인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철석 주저앉는다는 말입니다. 잠깐 들렀다 가는 것 이 아니라 털석 주저앉아서 진을 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잠깐 들렀다가 가는 관계가 아니라 언제 떠날지 기약 없이 주저앉아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심사숙고하고 교회를 정하십시오. 깊이 기도하고 교회를 정하셔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를 받고 정하신 이후에는 오래도록 거기에 거하도록 주께서 새로운 곳으로 부르실 때까지 우리는 그 교회에서 헤세드 아가페를 체험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때문에 은혜를 받아서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곤곤한 사람들이 아니면 참새와 제비와 같이 가치 없는 죄인들이 우리의 인격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깃들이고 또 깃들여서 혜택을 보고 은혜를 입는 이러한 관계가 되어 질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나가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깊이 있는 신앙생활로 가는 첫걸음 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 대한 피상적이고 정리되지 못한 이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로 나타납니다. 정리되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한 신앙생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천에 가서도 얘기했습니다. 아파트 당첨되면 다 도망가는 게 최고인 줄 아는데,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정 하고, 그 다음에 거처를 정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이지, 교회는 교회대로 놀고 집은 집대로 놀고, 이런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옮길 수 없는 사정이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교회와 집의 거리가 그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방해를 줄 수 없는 사람은 하와이에서 와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그 모임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주일마다 대구에서 왔다 갔다 하고. 제주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러한 거리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데 방해하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가까이 오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늘 함께 거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 하리이다. 저희가 언제든지 그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주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찬양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으로 드려지는 이런 삶이될 때 교회를 알아 가는 이 지식,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그 속에서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즐거움 이런 것들이 우리들 가운데 더 견고해지고 두터워져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주님의 완전한 다스림이 있는 그 하나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죽어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모든 후손들이 여러분들의 죽음을 보면서 가슴 아파 하면서도 눈물을 씻고는 우리의 죽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찬송하면서 그래 우리가 마지막에는 저분처럼 믿음을 지키며 우리도 살다가 죽어야지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지막 삶입니다. 무슨 화려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와 함께 그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이러한 삶들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