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하기 전에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시 38:10-11).
여기에서 시인이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며 내 눈의 빛도 떠났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심장이 뛴다"라고 하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여기서 여러분들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분노하는 일이 있거나 하게 되면, 심장의 박동이 급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경험적으로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거죠. 기력이 쇠하며, 죄에 빠지게 되면. 여기서는 지금 죄에 빠져서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면서 행복해 하고 있는 그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죠. 그건 이미 지났고, 말없이 양심의 가책이 밀려오는 가운데 고통 받고 있는 한 성도의 모습을 여기서 보여주는 거죠. 그런 깊은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인제 무기력해 지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모든 행복한 일, 좋은 일 이런 것들은 신자의 경우 하나님과 연관이 될 때에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고 이런 것들을 가져다 주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양심의 큰 고통을 당하고 있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흥미를 느끼고 이러는 것 없거든요. 우리의 기력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관련이 되지만 시실은 정신적으로 훨씬 더 많이 관련이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러면 우리의 육체의 상당한 힘이 남아 있어도 우리는 기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지금도 보면 자녀들이 도시에 와서 잘 살고 부모님들이 농촌에 사는 게 자식의 마음에는 늘 안쓰럽고 마음에 걸리죠. 그래서 무조건 올라오시라고 합니다. 그 시골에 불편한 집에서 사는 것 보다는 도시의 아파트 큼지막한 데서 곁방이라도 하나 차고 사는 것이 도시에 사는 그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훨씬 편리하고, 육신도 고달프지 않고 편해 보여요. 근데 그렇게 돌아오면 시골 노인들은 죽습니다. 얼마 못살고 대부분이 죽어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마음의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에요. 그 아파트에 그렇게 쾅하고 갇혀서 집지키는 강아지처럼, 애들 다 나가고 나면 두 노인들 우두커니 앉아서 인생의 참된 호감, 행복 이런 것은 사실 그런 게 아니거든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정신적 요소가 좌우하는 거에요. 그래서 오히려 그 시골에는 함께 살아온 이웃들도 있으니까 교제도 있죠. 그리고 거기서는 아주 분명하게 자기 일이 있죠. 왜냐하면 밭에 있는 채소들이나 뒤뜰에 있는 강이지나 돼지들이나 이 모든 것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끊임없이 부르는 거에요.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을 하고 마음에 활기들을 갖게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활기에요.
그런데 이 시인은 이런 활기들을 잃어버린 거죠. 그는 일상적인 걸 이야기 한거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어요. 진정한 믿는 사람들에게 활기를 주는 게 뭐겠어요. 잠시 이 세상에서 좋은 일들이 있고, 거기에서 잠시 즐거움을 누리고 행복감을 찾는 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그 신자에게 그런 것들을 영원히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럴 순 없잖아요. 그니깐 그것은 잘못된 거라 이거죠.
그래서 여기서 기력이 쇠했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런 많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고 주님 때문에 봉사하고 섬기고 하는 이러한 많은 섬김과 헌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늘 있어도 그런 것들의 초점이 하나님 이어야 한다는 거죠. 거기로부터 오는 기쁨과 은혜, 도움 이런 것들이 내 마음 속에서 늘 살아서 역사하고 움직이고 하는 그런 것들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활기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런 기력들이 다 쇠해 버린 거죠.
그래서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기만 하면 살이 찌는 사람이 있어요.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막 고민하고 그러면 살이 마르고 막 이럴 거 같은데, 꿈지럭 거리기 싫으니깐 계속 잠만 자는 거죠. 난 여러 사람 봤어요. 비정상적으로 살이 찌는 거에요. 잘래도 기운이 있어야 자니깐 또 먹는 건 먹어야 하잖아요. 그게 모두 다 기력이 쇠하여 버리는 거죠.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 가능한 이야기죠? 그러니까 근심이 많고 괴로움이 심하고 가책을 느끼니까 눈이 침침해 지는 거죠.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밝은 진리의 빛을 볼 수 없게끔 영안이 흐려지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 가책을 받는 시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서서히 그의 삶의 질서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죠.
아직까지는 내면에서만 고통이 생기고 일어났었는데 그 다음에서는 뭘 이야기 했냐면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친척들도 멀리 서있나이다." 예전에 그렇게 가깝고 자기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각기 자기를 떠나고 그리고 친척들조차도 멀어져서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 앞에 세워서 고치시려고 하기 전에는 반드시 외로운 순간을 주셔요.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주셔요. 그래서 많은 고통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죄를 선택하고 기쁨을 쫓은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죄를 지은 이 시인에게 그 죄에 대한 분노 때문에 보복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니거든요. 마치 부모가 자식이 잘못했을 때 바르게 하려고 야단을 치는 그것을 부모의 복수라고 볼 수 없듯이, 그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할 수 있도록 그를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끄시려고,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 그의 마음을 고통 가운데서 자기가 선택한 죄의 대한 사랑으로부터 끊어요. 그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예화) 아이들이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불이 아이들에게 신기해합니다. 불, 칼, 위험한 것을 아이들이 신기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불가지고 장난하고 싶어 합니다. 저희 어렸을 때도 방학 때 큰 기와집이었는데 겨울에 임시로 광을 만듭니다. 강원도니까 워낙 춥습니다. 안방에 들어가서 앉아있었는데 뭐가 타는 소리가 납니다. “아무래도 장작불이 타는데 바깥으로 나온 거 같은데 네가 가서 안으로 밀어 집어넣고 오너라.” “네.” 그리고 내려왔는데 장작이 타는 게 아니라 광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릅니다. 그것이 옆에 있는 처마에 옮겨 붙으면서 온 집안을 태울 기세입니다. 펌프에 달려가 보니까 펌프는 꽝꽝 얼었습니다. 큰일 났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방에 안 들립니다. 소방차가 왔는데, 시골에 무슨 소방차가 있겠습니까? 구루마인데 양쪽에 장정이 올라가서 펌프를 틀면 물이 나오는 조그만 걸 들고 옵니다. 어쨌든 간신히 끄기는 껐는데 웬 불인가 했더니, 동생이 애들이랑 같이 광에 들어가서 부모들이 하도 못하게 하니까 성냥을 몰래 갖고 와서 그어 본 것입니다. 그었는데 그게 지푸라기에 달라붙어서 타니까 둘이 무서워서 내뺀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호기심이 있어서 한 번 그런 일을 경험하거나 불에 데고 나면 그다음에는 호기심이 변하여 경계심이 되듯이 하나님이 당신을 떠나서 세상을 선택하고 죄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그 죄에 즐거움이 잠시 지난 후에 무엇이 느끼게 되는 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실 때 결국 인간은 그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두려움과 고통을, 또 한편으로는 다시 만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복과 기쁨을 안겨주심으로 말미암아 잠시 선택한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삶이 그릇된 것이고,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서 사는 것에 있다라고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