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잠함은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시 39:6-9).
시인이 어쨌든 고난 받는 상황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인생의 허무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악하게 대하며 부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 그래서 시인에게 고통을 주는 이 사람들의 동기는 대부분 이익의 문제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부분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이 그 사람 때문에 무엇인가 자기 욕망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중에서 제물은 아마 그 모든 다툼의 으뜸일 것입니다. 새롭게 깨닫게 된 인생의 모습이 자기가 죽으면 누가 취할지도 모르는 그 제물에 집착하면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고 구박하는 사람들, 이게 인생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시인이 새롭게 깨닫게 된 거죠. 그러면서 이제 자신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을 통해서 깊이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구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이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보기에는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이 신자의 마음을 아주 놀랍게 바꾸는데 사용하시는 거죠. 그래서 고난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그런 마음을 갖게도 하시고 또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마음을 버리게도 하시는 것이 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죄과, 이 모든 잘못, 이런 것들이 결국은 이 고통을 통해서 본인에게도 밝혀지게 되고, 또 본인도 그것을 버리게 되고 하는 정화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한 모든 지상의 성도들은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이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시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은 참 불공평하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악인은 아주 형통하게 이 세상에서 살고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그 고통 속에서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죠. 만약에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살아있는 날 동안 인생의 그 과정 하나에게서만 볼 것 같으면, 그러면 아마 모든 것이 부당하다라는 느낌을 갖을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인간을 다루시는 것은 이 지상의 세계에서만 끝나는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영원한 형벌과 그리고 상급을 예비하셔서 거기에 까지 맞닿아 공의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의 불평등해 보이는 그 고통과 하나님의 심판, 이것들이 모두 해소가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악인이 자기의 이익 때문에 이 시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리고 지금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지만 오늘 시인은 이 문제를 자기를 괴롭힌 그 인간사 악과 자기 사이에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는 것이 내 죄과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경건한 이 시인이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이 시인이 지은 죄 때문이었다."고만 우리가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를 심판하고 책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를 혼내줄 권한을 하나님이 부여하지 않으셨죠. 만약에 그런 권한을 부여 받았다면, 경건한 자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 벌 대신 상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 경건한 시인은 악한 자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과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신자의 시각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통을 받는 것이죠. 마치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게 되면 탈이 나는 것 같이 그렇게 악을 행하기 때문에 마음 안에서, 혹은 환경 안에서, 혹은 사람을 통하여, 혹은 몸에 질병을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고통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찾아올 수 없는 고통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신자의 입장에서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악인에게 고통을 받고 있고 그 악인의 행위가 부당하지만 이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기의 죄과, 그리고 자기의 과오 때문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잠잠해야 할 이유를 거기에서 발견하는 거죠. 그래서 시인이 말하기를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는 것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죠.
만약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시인은 우리들이 흔히 행하는 것처럼 두 번 죄를 짓게 되는 것이죠.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옳게 행하지 못하여 마음 안에 죄과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에게 고통을 주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아 모시고 자기가 바뀌는 대신 단지 고통의 도구가 될 뿐이었던 그 인간과 다투며 미워하고 살인과 같은 마음을 품는다면, 그러면 그 일을 섭리하신 하나님께 대한 무지한 반항이고 또 사랑해야할 이웃을 향한 불순종이기 때문에 결국은 두 번을 범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가하는 그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마치 연극배우 일 뿐이고 이 모든 각본은 하나님에 의해 짜지고 하나님이 연출하셔서 하나님이 보낸 도구로 이 사람은 내게 왔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하나님을 바라게 되는 거죠. 그러면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비춰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그릇된 태도를 고치게 되는 거죠.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그릇된 태도에요. 그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고치고 돌이켜 살 때에 거기에 신자의 희망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는 두 가지가 보증이 되어 있는데, 죄를 이기고 순종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의 공급,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 배푸시는 무한한 용서와 자비, 이 두 가지가 약속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그가 악을 행하였더라도 용서해 줄 것이고 그 악 때문에 필연적으로 짓게 될 더 큰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의 힘을 주시는 거에요.
유혹을 받거나 혹은 어떤 오류에 빠질 것 같은 때에 우리들이 쉽게 빠져버리는 이유는 그 순간에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그 유혹에서 벗어날 마음과 정결함, 그리고 싸울 수 있는 내적인 힘, 이런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마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