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84
목 차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함(시 84:1-2) 1
주의 집에서 누리는 복(시 84:3-4) 6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시 84:5) 11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시 84:6) 15
하나님 앞에 사는 행복(시 84:7-8) 20
주의 궁정에 거함(시 84:9-10) 25
태양과 방패이신 하나님(시 84:11-12) 29
시편65편 강해 1
시편84편 강해 1
시편84편 강해 6
시편84편 강해 11
시편84편 강해 15
시편84편 강해 21
시편84편 강해 25
시편84편 강해 29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함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내 영혼의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1-2)
본문해설
고라자손이 이 시를 썼다기보다는 아마도 다윗이 쓴 시를 고라 자손의 집안에서 보존했다는 뜻일 거라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나오는 문체들이 다윗의 시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고라자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시는 42편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피난을 갔을 때 동행했던 고라 자손 중 한사람이 두고 온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막을 그리워하면서 부른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스러운 주의 장막
이 시는 하나님의 집인 성막,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위로와 힘을 얻는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만약에 이 시기를 다윗의 시대라고 한다면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은 성막시대였습니다. 내부가 화려한 것이지 겉모습이 화려하지는 않았습니다. 천막을 치고 물돼지 가죽으로 덮은 그저 18평 크기의 직사각형 텐트였고, 주위에 하얀 천이 쳐져있어서 막사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사람이 아름답다고 할 때 얼굴의 모양이 예뻐서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것이지만 자신의 마음이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는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 고라자손에게 있어서 ‘주의 장막’이었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역사까지 통틀어 이야기한다면 그 장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신들의 선조를 인도하셨고, 자신과 관련하여 이야기한다면 거기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성막, 성소, 혹은 성전 사상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곳이었습니다. 국가적인 큰 위기를 만나도 성소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기쁜 일을 만나도 거기에 올라가서 감사제를 드리고, 너무 감격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고 싶으면 서원제를 드리면서 기쁨과 슬픔, 설움과 고통, 모든 것을 함께하며 성소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사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라자손은 거기에서 쫓겨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는 반드시 제사가 동반되어야 했고, 그것은 오직 한곳에서만 올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떨어져 나와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짐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하며”, 사모하는데 왜 쇠약할까요? ‘여호와의 궁정’이라는 표현은 그곳이 비록 텐트이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호와가 왕이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모하기 때문에 내가 쇠약해집니다.” 이것은 상사병을 생각하면 됩니다. 너무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고 만나면 해결이 되는데 못 만날 때는 이게 병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만나고 싶고 그리워할 때 만나면 되는데 못 만나도록 환경이 가로막는 것입니다. 마음에 애끊는 그리움은 있는데 그리워하는 대상을 만나지 못하니까 마음의 병이되고 이것이 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사병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성소로부터 축출되어서 거기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할 수 없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움은 강렬한데 하나님을 뵈올 수 없으니까 그 속에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의 육체도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거기서 하나님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마음에 병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이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엇을 향한 사랑은 그것이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그때 비로소 자신 속에 있는 사랑의 힘의 크기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없어져도 충분히 살 수 있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사랑한다고 느꼈던 강렬한 느낌은 그야말로 느낌일 뿐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사라졌을 때 가슴깊이 그립고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칠 정도라면, 사실은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시인은 그런 심정으로 사모하여 쇠약해졌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구절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이 납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교, 하나님과 나누는 영혼의 교제를 이토록 그리워해서 육신이 쇠약할 정도까지 갈망하는 때가 얼마나 있을까?’ 우리의 예배에는 간절함이 없고 우리의 기도에는 갈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섬김에는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오르는 마음의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땅에서 축출되어서 이방 사람들의 조롱까지 받으면서 하나님의 성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소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과 나눴던 수많은 추억들을 동반합니다. 여러분이 옛날에 다니던 교회를 가보았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시험에 많이 들고 괴롭힘을 당하고 고생을 했던 교회는 거기에 들어서면 마음이 묵직하면서 고난을 받았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어떤 교회는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감격을 경험했던 기억이 쭉 떠오릅니다. 그 건물을 보면서 그런 감정들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필드 목사님은 마음이 곤고해지면 어렸을 때 자신이 회심한 의자에 입을 맞추면서 결심을 새롭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랑의 추억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와 함께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음
시인은 마지막으로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나는 이방의 땅으로 쫓겨 나왔고 하나님의 장막은 여기서 멉니다. 그래서 당신을 예배할 수도 없고 제사를 지낼 수도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나를 다시 성막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쫓겨난 다윗 왕이 다시 고국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라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와 전 인격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부르짖다’라는 말, ‘카라’(ar;q)라는 표현은 마음에 찬 열망이 너무 커서 속으로 하는 기도에 머무를 수 없고, 통렬함으로 쏟아져 나오는 부르짖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마음에 가두어 둘 수 없는 통렬한 영혼의 울부짖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쫓겨 나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시인이 믿었던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계실 뿐만 아니라 살아계시는 하나님, 단지 존재 할 뿐만 아니라 정말 살아계셔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보호하시고 만지시고 도우시고 붙으시며 우리의 탄원을 들으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이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며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께 부르짖는 자의 애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은 어려운 상황과 시련을 능가하고, 나 같은 인간을 향한 그분의 큰 사랑은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셔서 우리가 마음과 육체의 모든 힘을 다해 당신께 부르짖을 때까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마음을 대해 하나님 앞에 다시 사는 성도들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집에서 누리는 복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시 84:3-4)
본문해설
1절과 2절에서는 하나님의 궁전을 사모하는 시인의 심경을 피력을 했다면 3절과 4절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이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렬한 사모함은 결국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임재의 삶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을 원하지만 시인은 어떤 이유로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이 생겨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떨어지게 되었지만, 그 집에 함께 거하면서 누리는 신자의 진정한 복에 대해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궁정을 향한 사모함이 마음속에서 불붙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이 자비와 긍휼입니다.
참새도 돌보아주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참새’라는 것은 가장 하찮은 피조물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참새는 가장 하찮고 가치 없는 피조물 중의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에 소위 병행법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무엇은 어떻게 어떻게 하고, 또 다른 무엇은 어떻게 어떻게 한다고 할 때, 이 두개가 짝을 이루면서 같은 의미를 가진 말들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제비’는 ‘참새’라는 말에 짝을 맞춘 병행법에서의 또 다른 평행단어입니다. 참새도 제비도 모두 하찮은 피조물의 한 대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들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는 같은 말을 다르게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중요한 피조물로 대접받지 못하는 하찮은 참새도 하나님의 궁정에서는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돌봄을 받고, 그 집의 제비조차도 새끼를 둘 수 있는 보금자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참새나 제비 새끼도 이러한 긍휼과 자비를 하나님의 집에서 받는데 하물며 언약백성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주시겠습니까?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 살펴주실 것을 우리가 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떠나있기 때문에 비로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외에 자신을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분이 없다는 것을 깊이 경험했고, 그러한 자비와 긍휼을 하나님의 집에서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주의 집에서 얻는 긍휼과 자비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많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 기억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무가치 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나 같은 인간, 때로는 나 자신도 스스로의 가치를 몰라서 방황하는 나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기셔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다는 그리움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양심의 작용과 양심이 의식하는 율법의 기능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함으로 두렵고 떨리게 만듭니다. 양심이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올바르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캄캄하고 어두운 밤길에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헤드라이트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 하나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뿐만 아니라 매순간 붙드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의식하고 느낄 때 그분 앞에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미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단지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마음이 서러울 때도 하나님의 집을 찾았고, 나라가 큰 위기를 만나 고통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마음을 쏟으며 자신의 중심을 토했고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백성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죄가 있으면 용서하시고 시련이 있는 경우에는 피할 길을 주시고 죽은 자와 방불하도록 연약할 때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는 언제나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때때로 양심은 ‘네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느냐?’ 하고 매질을 해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언제나 계속됩니다. 그래서 때리시면서도 어루만지시고, 치시면서도 싸매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성도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거기에서 세상을 이길 모든 힘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모든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의 복
시인은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산다’라는 뜻은 ‘거한다’는 뜻으로, 잠간 앉아 있다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곳에 삶의 기반을 잡고 거기에 영원히 거주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일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잠깐 찾아와서 부탁을 하고 가는 사람을 향해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서 기쁨과 설움을 함께 느끼고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 앞에 한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느끼는 기쁨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고, 저들이 느끼는 고통이 나에게 아픔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입니다.
연애와 결혼이 어떻게 다릅니까? 연애는 그냥 사랑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을 통해서 사람들은 살게 됩니다. 이는 삶을 함께 영위해가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에게 운명이 되고 짊어져야 할 짐이 되고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일체의 삶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마치 전깃줄에 앉은 참새처럼 총소리 한 번 나면 모두 날아갈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할지라도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주님을 찬송함
“그들이 항상 주님을 찬송하리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이 항상 찬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비와 긍휼하심을 매일 매일 누리며 사는 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겨 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긍휼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과 자비를 힘입어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본문해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이 어떤 복을 누리는지를 5절과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원문 성경에는 “주께 힘을 얻는 자의 행복이여,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둔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나옵니다.
주께 힘을 얻는 자의 복
여기에서 주께 힘을 얻는다는 뜻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항상 기쁘고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많은 시련과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한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힘이 없으면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아, 이 시점에서 내 인생의 끈을 놓아버려야겠다.’ 이런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아, 이제 여기가 내가 견딜 수 있는 한계이구나. 여기서 꽉 붙들고 있었던 인생의 끈을 놓아버려야겠다.’라는 한계상황까지 가본 적 없습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이 큰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예전에는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어려운 것도 극복을 했는데, 그만한 어려움에서 인생의 끈을 놔버려야겠다는 한계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강 철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투신자살을 합니다. 오죽하면, 그 다리에 전화기를 달아놨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화 한통 해보라고 말입니다. 거기에서 24시간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상담을 해서 살려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리에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글귀를 거기에 써놓을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다리에서 뛰어내려서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상황에서 더 이상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거기에서 인생의 끈을 탁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결국 그것은 힘이 부족해서입니다. 힘이 있으면 많은 어려움이 와도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자기가 약해지지 않고 ‘강하신 하나님 밖에는 나에게 소망이 없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병들어 보지 않고 ‘내가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사는 것이 매일 매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것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오해를 당하고 미움을 받아보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기쁨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좋을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은 인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죄가 들어온 이후, 이 세상의 불안정성과 성도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부분적으로 불완전한 부분들, 또 한편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려는 마귀의 궤계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삶을 살고 넘어지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스스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야되는데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위로부터 내리는 어떤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힘을 세상에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도 어느 정도는 세상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넉넉한 물질이 있으면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야 면할 수 없겠지만 그 증상은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가난하면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배신을 하거나 미워하지만 높은 지위에 있으면 속으로는 ‘저 자식’ 하고 욕을 해도 대놓고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본문에서 ‘복이 있다’라고 할 때의 복은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언약 관계에 있는 성도들이 받는 복 즉, 신령한 복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의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을 때 그런 종류의 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힘을 세상에서 얻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은 주님께 힘을 얻는 사람인 것입니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의지하면서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사람들은 신령한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 힘을 얻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랑의 힘과 생명의 힘이 주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질 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극히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시련과 고통이 가득한 인생의 길을 믿음으로 걸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고 낙심이 되는데 예배당에 나와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나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의 복
두 번째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 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시온’이라는 말이 안 나오고 “그 마음에 큰길이 있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큰길’이라는 것은 의미상으로 순례자의 큰길을 말합니다. 순례는 결국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를 가리킵니다. 시온의 원래의 뜻은 ‘마른땅, 요새’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은총을 내리시는 장소, 예루살렘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령한, 선택된,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이러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시온의 대로’는 하나님의 임재와 선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으로 가는 큰길은 말하자면 왕의 대로입니다. 왕들이 행차하는 큰 길입니다. 시온의 대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그 길을 따라서 우리에게 오시기도 하십니다. 이런 대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불안전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 고난과 역경에 처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받고 주님과의 교통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이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길 수 없고 극복을 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을 하나님 의지하면서 이기게 되었던 기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전에 그랬다고 해서 오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주신 은혜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제는 예전의 은혜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은혜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아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시 84:6)
본문해설
6절과 7절에서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눈물 골짜기’라고 할 때 우리말 성경에는 이것이 ‘눈물’로 되어있지만 원래는 소리를 내어서 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카’(hk;B)라는 단어는 소리를 내서 애곡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한다면 “그들이 울음 골짜기를 지날 때에” 이렇게 될 것입니다. ‘울다’라는 뜻의 ‘바카’라는 단어는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우는 것,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흐느껴 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소리를 내어서 통곡하며 우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난다는 것
여기에서 울음 골짜기를 지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며 사는 자녀들임이지만 그들의 인생길에도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두 가지로 생각이 됩니다.
우선 인생 자체가 괴로움의 바다, 고해를 지난다는 것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늙음과 병듦, 태어나고 죽는 것, 거기서 만나는 기쁨과 슬픔, 애절함, 이 모든 것을 안 겪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인생길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삶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순간 우리를 천상의 세계로 올리셔서 구름 위를 걸으며 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있는 죄와 불완전함 때문에 인생 자체가 시련을 겪으며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인생길에 이런 울음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이런 울음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관계가 얼마나 복된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만을 의지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어리석은지를 절실하게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대로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울음골짜기와 같은 인생을 지날 때 은혜의 혜택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시련과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거기에서 베풀어주시는 복 1: 많은 샘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두 가지 복이 있는데, 하나는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샘은 생명과도 같아서 때로는 이 샘물을 놓고 전쟁도 불사할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수천 년 전에 파놓은 우물이 있는데 가서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깊습니다. 그 이야기는 낮게 파서는 물이 안 나왔다는 것입니다. 수맥을 발견하는 것도 힘들지만 사시사철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정도까지 우물을 판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판다고 항상 먹는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쓴 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물은 물인데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른 땅을 지나면서 샘들을 발견하고 그 샘에서 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로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괴로운 인생길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이 실제로 많은 샘을 주신 것이다.”라는 뜻도 되지만,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면 이 ‘샘’은 ‘생명, 사랑, 위로’라는 의미입니다. 눈물과 울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울어서 눈물을 많이 흘리게 되면 몸은 수분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이 울고 정신적으로 지치게 되면 탈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고 통곡하면서 지쳤을 때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믿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그런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도 슬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많은 샘들을 내십니다. 믿음 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눈물을 쏟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지나면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때문에 신앙으로 살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베풀어주시는 복 2: 이른 비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이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농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눈물 골짜기’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이고 실제 골짜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라고 할 때 농업과 관계된 이야기가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의 그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라는 것은 농업과 관계된 것입니다. 이른 비가 내리면 파종을 하게 되고, 늦은 비가 내리면 그 비로 마지막 결실을 하고 추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때에 정확하게 비가 오면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되고, 이 때 정확하게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들게 되는데 늦은 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른 비입니다. 이른 비가 안 오면 파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지방은 강수량이 아주 적은 지방입니다. 만약에 그 때 이른 비가 내리지 않으면 파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은 유럽에서도 아주 중요한 농산물 수출 국가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독일로부터 상상할 수 없을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보상금을 받았을 때 그들은 “폐허가 된 전쟁터에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온 땅에 수로시설을 도입해서 어느 땅에서나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민족의 살 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받은 돈을 피해자들에게 한 푼도 나누어 주지 않고, 막대한 돈을 모두 국토에 물을 공급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위대한 농업국가가 된 것입니다. 비 한 방울 제대로 오지 않는 땅까지 모두 관개시설을 해서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일부 지역이 아니라 거의 전 국토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인생의 길에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있습니다. 샘을 가리키는 것이 사랑과 위로 같은 영적인 축복을 가리킨다면,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는 것은 섭리적인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은 울음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농사가 잘 되도록 도와주셔서 이 땅에서 굶주리지 않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눈물 골짜기와 같은 인생을 지날 때 우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아시고, 당신의 자녀들이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눈물 골짜기와 같은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으시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고치십니다.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위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게 하시고 위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섭리의 복을 주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짓밟히고 낙오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위로와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사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행복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시 84:7-8)
본문해설
시인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을 6절에 이어서 7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그들은 힘을 얻는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복 1: 힘을 얻음
힘을 얻는다는 것은 울음 골짜기와 같은 인생을 지날 때 누리는 혜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인생에 어떠한 시련도 오지 않고 평화와 행복만이 깃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시련과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불안전함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또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섭리와 계획 속에서 그들을 연단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을 주시고, 자기 혼자 독립하여 살아가려고 하는 교만을 꺾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붙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 누리는 복이요 은혜입니다.
힘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감당하고 소화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시험을 주실 때, 피할 길을 주시거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힘이라는 것은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그 문제를 감당하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복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와 상관없이 사태는 발행합니다. 시련이 감당할만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가 없어서 자살을 하든지, 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힘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사태들을 맞서고, 해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 끝났으면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 내적으로 다시 충만해져서 다음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어려움이 왔을 때 죽을 것 같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마음속에서 악한 성품도 나왔었는데,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조금 더 성숙해지고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살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살림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살림살이를 통해서 가족들이 계속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 죽은 것 같이 들어왔다가 가족들과 어울리면서 밥도 먹고 생활을 하다 보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가정이 있습니다. 밖에서 펄펄 살다가도 집에만 들어오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죽고 싶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삶의 사태를 헤쳐 나갈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 중에 한 두 사람만 그렇고 나머지는 힘이 많으면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주면서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서로 없을 때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입니다. 그 힘은 단지 권력의 힘이나 물질의 힘이나 사회적인 지위의 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태들을 스스로 맞서서 해석하고 헤쳐나간 후에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서 나 자신이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길입니다.
언젠가 미국에 집회를 갔는데 끝나고 나서 반나절이 비었습니다. 비행기를 그 다음날 타게 됐습니다. 곁에 있는 어느 공원으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가서 보니 대여섯 명이 깔고 앉을 수 있을 만한 넓이의 나무 판때기 하나가 서있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의 상처만 잘라서 세워 놓았는데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그 나이테를 보면 신기한 것이, 세계사에서 무슨 일이 미국과 관련되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남북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을 겪었을 때는 나무의 테 모양이 다릅니다. 평범한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다릅니다. 다른 때는 나이테가 평안하고 나무도 많이 자랍니다. 그런데 땅이 고통을 받을 때는 나무도 덜 자랐을 뿐만 아니라 테 자체가 평화롭지 않고 선이 달라집니다.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말없이 그곳 산 속에 서있는 나무 앞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2차 대전에 일어났다고 해서 미국 본토가 폭격을 당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수많은 미국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6.25 때 우리나라에서 죽은 미국인이 6만여 명에서 5만 명 정도 된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것을 겪은 것이 그 나라 땅에 고통을 주고 그것이 나이테에 반영이 되는구나.’ 하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과학적으로 그것을 입증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낱 미물인 나무도 그 땅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발생할 때 나이테와 성장에 저렇게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연약한 존재일까? 인간의 몸의 75%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그런 것입니다. 일본의 어떤 사람이 물을 영하 2℃와 영하 1℃ 사이에 놓고, 물을 향해 욕도 써놓고 좋은 말도 써놓았는데 거기에 따라 물의 결정체가 변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런 사태에 대해 과연 중립적일 수 있을까? 매일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우울하고 가슴 아픈 일을 생각하면 온몸에 기운이 없고 힘이 없는데, 기쁘고 감사한 일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오늘도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문제는 힘의 문제입니다. 역경을 헤치고 시련을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그들과 우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돈이 더 많았습니까? 아닙니다. 얼굴이 예뻤습니까? 아닙니다. 키가 컸습니까? 덩치가 큰 사람도 인생의 두려움은 키 작은 사람보다 더 클 때가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인생의 사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은 인생의 울음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그것을 헤쳐나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 시련과 고난이 닥칠 때 그 고난을 맞서서 해석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마지막에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힘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사태를 해석하는 자세와 방향이 달라집니다. 새가 똑같이 소리를 내도 마음이 슬픈 사람에게는 우는 소리로 들리고, 좋은 일이 있어서 기쁜 사람에게는 노래하는 소리로 들리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얻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 역시 힘의 문제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은 역경이나 시련을 만나면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서 감동적인 일생의 기록들을 남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로부터 받는 힘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돈이 많은 것,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위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정신의 크기와 힘이 있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그 무엇, 이것이 바로 힘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복 2: 하나님 앞에 거함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갔더니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다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 그것이 자신의 죄 때문일 수도 있고, 불순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타날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든지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얻는 행복은 언제나 우리에게 고통의 열매들을 남기지만, 주님의 선하심 때문에 누리는 진정한 행복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돌보심, 은혜, 사랑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당신 앞에서 힘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행복과 즐거움, 이것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탄원으로 마무리 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여기에서 ‘야곱’이라는 것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입니다. 야곱은 간사했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그분의 은혜의 붙들려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나는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붙들려 사는 언약자손이 아닙니까?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시인이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며 쇠약해졌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이 복을 누렸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는 이방 땅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립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을 꼭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궁정에 거함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9-10)
방패이신 하나님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고백과 탄원을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마겐’(@gEm;)이라고 하는 ‘방패’에 대한 이야기가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방패는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후려치는 칼을 막는데 사용하는 방어용 무기입니다.
“하나님이 방패이시다.”라는 것은 모든 환란과 시련,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라는 것은 하나님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언약백성들을 세상의 많은 환란과 시련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고백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세상의 불완전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만납니다.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항상 올바를 수는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으로 시련과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방패가 되셔서 지켜주십니다. 시인들은 곳곳에서 자기의 방패가 되어 주신 하나님을 찬송했고, 보호해주시는 은총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최고의 표현 중 하나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방패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왕의 얼굴을 살피소서
이어서 시인은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당시에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 세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망명길에 오르고 있는 다윗 왕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그 왕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세우신 왕이 반역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의 얼굴을 살펴봐 주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실 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악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무서운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친밀함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하고 시인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시련당하고 있는 왕을 친근히 여기셔서 그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얼마나 왕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힘입어 살기를 바랐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 거하는 복
이어서 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 집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사는 행복의 정체에 대해 말합니다. “주님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궁정’은 당시로 말하면 성막입니다. 아직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습니다. 속은 화려하지만 겉은 물돼지 가죽으로 덮어놓은 텐트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을 지내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예배하며 사는 행복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인지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이유는 주님의 궁정이 화려하기 때문이라든지, 혹은 훌륭한 음식을 먹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는 주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삶은 단 하루라 할지라도 다른 곳에서 큰 영광을 누리며 3년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복되고 즐겁다는 사실을 시인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악인의 장막, 다시 말해서 크고 화려하고 영광이 넘치는 큰 집에서 호강을 하면서 살지만 악인에게 덕을 입어서 행복하게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실제로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수종을 들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면서 일생을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시인이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만 사랑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마음의 질서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질서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즐거워하면서 당신 앞에서 사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분을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본분입니다.
태양과 방패이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12)
태양과 방패이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또 다른 찬양으로 이 시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이며 방패이시라”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방패’는 ‘보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은 시련과 어려움, 환란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보호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태양입니다. 해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은유로 많이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계신 것이 마치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취는 찬란한 영광은 햇빛이 식물들을 자라게 하고 세상의 양식들을 생산해 내는 에너지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햇빛이 없으면 모든 생물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이 햇빛을 비취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을 살아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해는 은총에 대한 비유이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과 은총의 근원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그것을 자세히 서술하는데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너그럽게 대하시고 혜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들을 존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강력한 나라들에 에워싸여 있을 때도 그들에게 적절한 영화를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들의 죄는 너그럽게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갈 때는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주셔서 용기를 얻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태양과 방패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니이다” ‘정직’이라기보다는 “올곧게 행하는 자에게”라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올곧음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르고 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은혜와 영화를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좋은 것들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을 하나님이 아낌없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영광입니다.
주를 의지하는 자의 복
이 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는 구절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만약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시편 84편을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지었을 때 그는 다윗과 함께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심령이 가난할 대로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당신의 기름 부으신 다윗을 다시 왕위에 복귀시켜주시도록, 악한 자들에 의하여 빼앗긴 왕국을 다시금 돌려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 왕국이 세상 나라의 기준에서 보면 대단할 것이 없지만, 압박받고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요단강 위로, 아래로, 건너편으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대의 판도를 영토로 삼았고, 작은 나라들이 조공을 바쳐오고 이스라엘 왕권에 복종하였던 통일 왕국 시대였습니다. 그러다가 반역하는 무리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들은 요단강 건너편으로 쫓겨 왔을 때 심령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새로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했고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42편의 경우를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는 고백도 그런 배경에서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할 자신들의 처지를 절실하게 자각하게 하심으로써 이 어려운 국가적인 위기를 통해 다윗과 경건한 신하들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될 언약백성들의 의무를 일깨우셨습니다. 그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서 시인은 진정한 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진정한 영적인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존하는 절대적인 신앙이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모든 기쁨과 영광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이고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힘과 용기, 영광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은혜를 받고 영광을 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을 당합니다. 울음 골짜기를 지나는 때에 그곳에서 많은 샘이 나와서 위로를 받고, 비가 내려서 결실을 얻음으로써 다시 힘을 얻는 일들을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시련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항상 곤고하고 어려운 때를 기억하면서 주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주님께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종교의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거룩한 힘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65편 강해 1
시편84편 강해 1
시편84편 강해 6
시편84편 강해 11
시편84편 강해 15
시편84편 강해 21
시편84편 강해 25
시편84편 강해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