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85
목 차
하나님의 은총(시 85:1-1) 33
진노를 거두기를 탄원함(시 85:3-5) 38
진정한 부흥(시 85:6-7) 43
화평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시 85:8) 47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운 구원(시 85:9) 51
하나님의 경륜(시 85:10) 55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시 85:11) 60
모든 좋은 것의 여호와(시 85:12) 65
주의 길을 닦게 하심(시 85:13) 72
시편65편 강해 1
시편85편 강해 63
하나님의 은총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셀라)(시 85:1-2)
본문해설
이 시는 탄원의 내용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찬송시입니다. 아마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건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살아나도록 도우시고 대적들의 손에서 건져달라는 기도의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1절과 2절은 이 시 전체의 제목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를 기술하거나 시를 쓸 때 공통적으로 하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스라엘 백성들이 쓰던 문학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어떤 사실들을 기술하거나 찬송할 때 제목을 앞에 놓고 그 제목을 상세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신문 기사에 헤드라인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내용을 상세하게 써내려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했는지를 2절에서부터 상세하게 써내려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문학적인 서술방식이었습니다. 신약에서 누가라는 사람이 누가복음도 쓰고 사도행전을 썼다고 보는데,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맨 처음이 겹칩니다. 그래서 하나의 글을 읽고 그 다음을 읽을 때 예전의 글이 생각나고 연속성이 있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서술이나 시의 작법이었습니다.
포로 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심
여기에서 하나님을 정말 찬송하고 싶은 것은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이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 되었을 때 완전한 해방은 아니지만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적인 일을 하나님께서 베푸십니다. 바사 왕 고레스 때 페르시아의 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이 때 이스라엘에게 혜택이 주어집니다.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원래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돌아간 사람들이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줍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해서라기보다는 제국을 잘 통치하기 위해 종교적인 융화정책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왕이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니 우리가 그 나라에 무조선 저항하고 항거할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우리의 종교를 믿으면서 시민으로 살 수 있겠구나.’ 이런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런 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로써 제국 전체를 통합해서 다스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큰 제국을 형성한 나라일수록 관용으로 다스렸습니다. 수많은 문화의 융합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정복한 사람이 획일적인 자를 가지고 모든 상황을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용정책을 사용해서 나라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성전에 있었는데 성전은 다 파괴되어서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되면서 신앙에 있어서 경전을 중심으로 한 가르침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커다란 전환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이것이 하님을 향한 찬송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지금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이 회고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기를 원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그것을 상기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심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은총이 무엇이냐 하면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여기서 ‘덮었다’라는 것은 ‘구속하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은 이것을 명료하게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포로로 끌려가라.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변함없는 선포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역사를 해석하면서 그 역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인식시키셔서 그들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죄의 용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죄사하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으로 나타날 것이라 예고하였습니다. 이사야, 다니엘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증거 해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할 이유였습니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이 마치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만큼 커다란 찬송의 제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 간 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면, 70년 후에 돌아온 것은 반대로 은총에 대한 감격과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깊이 경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라고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병행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를 사하고 덮으셨습니다.” 이것을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셨나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의 땅’이라는 용어인데, 이것은 ‘땅’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땅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람을 생각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땅에 많은 곡식들을 잘 여물게 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감격적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감격적인 것입니다. 그 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감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영원히 멸망시키시고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시고 자신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동안에 정결케 하시고, 그루터기를 남겨 두어서 그들로 다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을 우선 교회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입하실 신약의 종교를 세우셨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정결케 하시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새로운 언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준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교회와 개인도 종종 엄청난 시련을 통해서 다시 정결하게 하시어 하나님 앞에 태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의 용서를 얻은 것은 예수께서 새 언약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성경구절을 적용해 보면 언제나 우리가 한 때 이 세상에서 포로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포로가 되어서 희망 없이 살던 죄인들이었는데 하나님이 건져 주셔서 주님의 땅에서 은혜를 입게 하셨다는 것,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것이 일생을 사는 동안 찬송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고 환란과 커다란 고통을 당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신앙을 굳게 붙들며 살도록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노를 거두기를 탄원함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시 85:3-5)
본문해설
3절은 1절과 2절에 붙는 하나의 단락입니다. 시인이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신실하셔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의 상태에서 돌아오게 하셨고, 이것은 결국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덮어주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내면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시던 분노와 진노를 돌이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내용을 생각나게 합니다. 39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죄와 죄에 대해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묘사되어있지만 40장부터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으로 메시지가 시작됩니다. 여기에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고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복음적인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잘못하자 하나님이 잠시 그들을 꾸짖으시고 징계하셨지만 결국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당신께로 돌이키게끔 만들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 진노를 돌이키신 것이 이스라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영적인 형편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다시 살려주셔야 할 중대한 상황 속에서 그분의 은총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마음입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분노를 거두소서” 제일 먼저 하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구원이 개인의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의 개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해주시는 우리 하나님이시여”, 그러니까 한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뽑힘 받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나 죄와 불순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구원하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 당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완전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나타내 보여줌에 있어서 구원의 행동보다 더 탁월하고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영적인 위기와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해주실 분이 그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결국 이 모든 것의 구원이, 은혜가, 그리고 보호와 인도가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 당신께 기대는 모든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돌이키소서
이어서 시인은 두 가지를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돌이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모든 위기와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역경과 어려움을 만나게 된 근원적인 이유가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배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났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지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서 구원해달라는 호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을 돌이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들의 잘못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고,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진노를 거두소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고 구했던 또 다른 내용은 자신들을 향한 주님의 진노를 거두어 달리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여전히 진노하고 계시고 이것 때문에 자신들이 역경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에워싼 모든 시련과 어려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면서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태들을 만납니다. 그때 거기에는 언제나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되었다면 돈을 벌지 못했든지, 아니면 지혜가 모자라서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위기를 만났을 때 거기에 원인이 왜 없겠습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가난하게 만들고 커다란 위기로 몰아넣은 눈으로 보이는 원인과 이유를 가지고 씨름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이상의 근원적인 원인을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가난해진 데에는 사업을 잘못한 원인도 있고 세계 경기가 침체된 원인도 있고 가까운 사람이 나를 속여서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된 원인이 있습니다. 모든 시련과 어려움이 그런 원인들을 통해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왜 그런 일이 나의 생애에 일어났는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려는 것이 신앙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제2원인이고, 제2의 원인들을 움직인 제1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비참한 처지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있고 그것이 하나님께 진노를 안겨드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것들을 푸시면 자신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어려움도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향하신 주님의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함
그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단연코 하나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겠나이까”라고 호소합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돌아오게 하신 것을 보더라도 우리가 잘못해서 잠시 진노하실 수 있으나 영원히 노하실수 없고, 한세대나 두세대를 향하여 진노하실 수는 있으나 그 대가 계속 이어지기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어떤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못할 때 그를 올바르게 교육하기 위해 잠시 책망하고 그를 향해 노할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식이 부모에게로 충분히 돌이키지 않아도 부모의 마음이 먼저 자식에게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도 때린 자식을 또한 싸매고 불쌍히 여기고 눈물을 흘리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부모의 본성이라면, 완전한 하나님은 얼마나 놀랍게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겠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희망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있습니다. 믿음은 다름이 아니라 구원이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상태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진정한 부흥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시 85:6-7)
본문해설
이 구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로서 특히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이것을 평범한 문장으로 풀면, “하나님이여 우리를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 그들에게 나타난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의 미국을 바라보며 이 백성이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떨리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시고 탁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떨리는 것입니다. 이 앞에서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께 복종하게 됩니다. 그것과 함께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이끌리는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한계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기꺼운 순종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두려움만을 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사랑스러우셔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리는 친밀함 속에서 진정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만큼만 온전히 기뻐할 수 있고 온전히 기뻐하는 만큼만 하나님을 올바르게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고 두려우신지를 보여주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어서 하나님께로 이끌리게 하며,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신 큰 사랑으로 그분 앞에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소서
본문에는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현재는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죽어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릴 때 기막히게 적합해서 모든 사람이 수긍할만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생명의 특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타자에 대한 것입니다. 생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신진대사로서 자가 능력이 있습니다. 피가 돌고 세포가 죽으면 다시 살아나고 저녁에 자고나면 눈을 뜨게 되고 무언가를 먹으면 소화되어서 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를 다 쓰면 배고픈 현상이 일어납니다.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현상들이 살아있는 것들에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생명의 특징은 자기 생명을 방해하거나 편안함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반응인데, 이것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로 나무로 만든 문화재들이 자주 부식되는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집을 지을 때 일기가 좋고 순조로운 때 쑥쑥 자란 나무를 사용하면 나무가 트고 갈라지고 벌레가 먹습니다. 일본에서는 문화재를 가꾸는데 사용할 나무를 가꾸는 숲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900ha정도 있는데 2000ha이상은 되어야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길러서 모든 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1년에 2mm씩 자란 나무들만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 년에 1cm이상 자란 나무까지 사용하고 있어서 나무의 마디 길이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날이 춥고 기후가 안 좋으면 나무가 천천히 자라고, 일기가 좋으면 나무가 쑥쑥 자라기 때문에 열대지방에서는 나무가 1년에도 몇 cm씩 큽니다. 50여년 됐다고 하는 나무를 보았는데 제가 보기에는 400년 이상 된 것 같이 보이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외부의 작용에 대한 반응이며 생명인데, 죽음이란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피가 돌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고 신진대사가 멈추고 바깥에서 뭐라 해도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육체의 죽음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죽음은 이와 다릅니다. 영혼은 처음부터 불멸하는 존재이므로 이런 식으로 소멸하거나 멸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스스로 신진대사를 한다기보다는 영혼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영혼은 올바른 양식인 진리를 공급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진리를 소화하고 영혼으로서의 독특한 기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생기와 활력, 기운을 잃어버리고 힘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기뻐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게 되며 영적인 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일들에 대해 아주 나태하고 게으르거나 거의 하지 않게 되고, 영혼을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 상태를 영혼의 죽음이라고 본다면, 다시 살려달라는 말은 우리의 영혼에 다시 진리의 빛을 주셔서 올바른 영혼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백성들이 당신을 기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면 당연히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이유는 부모와의 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그 부모를 진정으로 기뻐하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진정으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순종적인 행동이 효도입니다. 자식의 부모사랑이나 부모의 자식사랑은 한결같이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부흥을 구함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영혼을 살려달라는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부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를 확 살아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7절에서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병행법으로 같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은 ‘주의 구원’이며 우리에게 보여 달라는 것은 우리에게 주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자하심, 즉 ‘헤세드’입니다. 가치 없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구원은 불신자를 구원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아가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셔서 그것을 알고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 하나님을 기뻐하고 순종하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탄원입니다.
왜 이런 탄원을 드리고 있을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은 비참한 상태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은 자신들을 향해 분노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부흥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도 그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교회를 하나님의 생기로 다시 살리셔서 주님의 백성들이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기뻐하는 교회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빌어야하는 가장 급한 기도제목입니다.
화평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8)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심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모든 과정을 회고하면서 이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8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그것이 화평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그 화평을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나라의 백성은 그 왕의 백성일 뿐인데 이스라엘은 왕의 백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은 나라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속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심을 입은 무리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은 사람입니다. 성도된 것이 자신들의 거룩한 행실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덧입혀져서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는 언약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과 깊이 약정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성도들과의 관계 속으로 묶어서 그들을 구별해서 대하시고, 그들에게는 다른 백성들에게 보여주시지 않는 특별한 자비를 보여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율법에 대한 의식, 양심 같은 것들이 있어서 자신이 그것을 거스를 때 거스른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것조차 안주셨다면 세상은 아마 짐승들이 모여 사는 세상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인격적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규칙과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규칙과 교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지극한 능력, 큰 손으로 붙드셔서 은총을 입은 자녀답게 살게 하시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십니다. 시인이 볼 때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떠난 이스라엘의 모든 불순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 이 모든 것들을 집약하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인간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니 다윗이 늘 이기더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기도 했고 그 전에는 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요셉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은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 하나님과 동행함, 이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현실적인 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백성들인데 그들이 시련을 만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기 때문이고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평화는 한 번 깨뜨려지면 영원히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 앞에 돌아와 자백하며 용서하시는 은혜를 의지함으로써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져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 있다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라
그러면서 시인은 덧붙여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과거에 충분히 어리석은 일을 행했고, 어리석음 속에서 불순종하고 방황하고 고통 받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고 죄짓고 악을 행하며 살았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지는 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지혜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료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진리의 빛 아래 살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압니다. 그러나 일단 이것이 무너져버리면 자신의 욕망이 눈을 멀게 하고,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어리석게 된 사람들은 그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 속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이 알고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질 때 하나님이 손해 보실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신 분이신데 말입니다. 결국은 고통 받고 불행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있지만 사랑은 그렇게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한없는 연민을 느끼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멀리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오늘날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지만, 이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깨우쳐 다시 이 평화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운 구원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시 85:9)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는데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시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을 회상하면서,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려움가운데 두셨지만 영원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주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이렇게 탄원하는 가운데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러면서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어려움 가운데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다는 것입니다. 불순종, 죄, 하나님을 향한 반역,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마음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고난을 통해 회복시키심
사람들은 고통가운데 있으면 얼른 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하나님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만심과 거짓된 마음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한번 보아라.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남으로 네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반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동물은 고통을 받아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끼면서 예전에 하던 것들에 대한 학습효과를 얻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반성,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고통을 받을 때 그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앙이 없을 때는 고통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미움, 증오, 좌절, 원망, 이런 것들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만나는 다양한 고통의 의미를 묻고 거기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아는 깊이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인생을 기름지게 합니다. 땅을 생각해 봅시다. 땅에 쓰레기를 묻으면 땅의 지력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을 땅이 분해하면서 비옥한 땅을 만듭니다. 그러나 땅이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버리게 되면 쓰레기들이 그 땅을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척박한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신앙은 지력과 같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경건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풍성하면, 적당한 고통이 와도 그것들을 소화해 내고 아프지만 그것들의 의미를 물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비옥하게 합니다. 성경을 보면 높은 수준의 신앙의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에게 고난과 시련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련과 고통, 아픔,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생각과 삶을 헤쳐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면 주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어려움이나 시련을 당하면 제일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려고 하시는구나. 그 동안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만하게 살았었는데 이제 하나님이 나를 고치려고 하시는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향한 경건을 회복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그분의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 되도록 만들었던 것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셔서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영광을 머무르게 하심
그러면서 시인은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광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영광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하는 효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저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구나. 저 백성들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백성들이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런 영광이 우리의 땅에 머무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패와 타락은 이 영광을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님 때문에 존귀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종류의 영광이어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면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고 세워주신 계획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드러내야 할 영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 하나님 밖에서 영광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에서 신앙의 타락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어그러짐이 나타납니다. 결국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영광을 추구하던 것으로부터 돌이키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귀해진 것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이고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행복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금년 한해 늘 주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주님이 그런 자리에 세워주시면 그 영광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분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시 85:10)
본문해설
85편의 내용의 윤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는 내용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사실의 조화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인데 왜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은총을 베푸셨는가 하는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을 9절 이하에서부터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앞부분에는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분노하셔서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지만 구원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탄원이 나옵니다. 옛날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분의 자비하심에 따라 다시 그들을 돌아오게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곤란 중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용서해주셔서 다시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두 개의 커다란 구원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에서 포로로 살다가 해방된 구원의 사건, 그 중에서도 특별히 홍해를 가르고 구원해주신 사건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하나의 징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9절에서 두 개의 상반된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하나님께서 다시 베푸시는 자비의 근거를 하나님의 구원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를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10절이 나옵니다.
상반된 두 개념, 인애와 진리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같은 내용을 두 가지 병행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의’와 ‘화평’이라는 말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단어가 서로 바뀌면서 서로 X자 모양으로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인애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허물이 있으면 덮어주고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어도 덮고 넘어가서 그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주는 것이 인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진리로 판단을 받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작용들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져다가 비추면 “너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네가 돈이 많을지는 모르지만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너는 매우 잘못되었다. 왜 그렇게 악한 생각을 하면서 사느냐?”라고 판단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비추어 보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이 멀쩡해 보이지만 진리로 비추면 “네가 얼굴은 예쁜지 모르지만 심보는 틀려먹었다. 너는 옳은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판단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진리는 냉정한 것입니다. 타협이 없습니다. 칼날과도 같은 것입니다. 칼날로 무엇이든 치고 지나가면 베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날카로운 칼같이 우리를 베고 지나가는 것인데 왜 진리가 좋다고 하는 것입니까? 진리가 비추어질 때 책망 받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진리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이 다 똑같습니까?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진리에 스스로 합치시켜서 구원을 얻는 것은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두 다 똑같이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로 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께 구원을 얻은 사람의 경우에는 의롭게 삶으로 말미암아 이미 얻은 구원을 다시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현저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작용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진리가 치는 칼날처럼 되어서 진리를 마주할 때마다 아픈 것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진리를 자꾸 피하게 됩니다. 진리에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빛이 계속 비추지만, 거기에 합당하게 살려는 진지하고 진실한 노력이 없으면 진리로 말미암아 상처와 판단을 받을 뿐 그것으로 인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자꾸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가리켜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진리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생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싱그럽게 새소리가 들리는 숲속에서 창문을 열면 환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안질이 걸린 사람에게는 아침에 찬란한 햇살이 고역인 것입니다. 눈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접시 위에 맛있게 요리된 음식, 아귀찜 같은 것이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데 입이 헐어서 다 터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고문입니다. 음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 질병이 좋은 것들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애와 진리는 함께 만나기 매우 어려운 반대편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그 두 개는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그 두 가지가 언제나 함께 있어서 진리를 따라 책망 받아도 행복한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설교 시간에 잘한다고 계속 칭찬해 주는 설교가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하나씩 풀어서 그 말씀이 자신을 해부해서 자기가 몰랐던 죄를 보여주고, 이렇게 고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회개가 나오고 거기에서 자신의 영혼이 온전해지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맛입니다. 아픔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만드는 것이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성도는 이런 진리의 맛을 안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빛이 멀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간단하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면 육체와 영혼 중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빛이 비추면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를 올바르게 사랑합니다.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나면 나라는 존재를 사랑할 때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만을 편애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만나는 인애와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인애와 진리가 멀리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끊임없이 원하지만 진리로 자신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것으로 체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와 함께 사는 성도에게는 항상 진리의 말씀을 통한 은혜의 정동이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인애와 진리는 만나는 것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우리 안에서 만나서 진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책망하지만, 책망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상반된 사실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바깥에서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진리로 짓밟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쳐서 다시 살리고자 하시는 진리와 인애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험되어 집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고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더라”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인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진리가 우리를 향해 갖는 판단을 보여준 것입니다. 진리가 뭐라고 판단합니까? “너희는 모두 사형이다.” 이것이 진리의 판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대속의 공로 때문에 우리와 다시 관계를 맺으시는 모습은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진리와 그럴 가치 없는 인간들을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의와 화평의 입맞춤
X자로 교차하는 이야기가 전개하고 발전시키는데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의’는 율법에 합치하는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의의 개념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 했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것입니다.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할 사람과 하나님이 평화로운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열망, 이 둘이 함께 입 맞추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이루어지기전에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기 전에 하나님 마음 안에서 인애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춤으로서 이 일들이 성취되었습니다. 입 맞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하고 입을 맞추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하고 입을 맞춥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인애와 진리를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어 이 둘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강령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리가 너무 투철하고 정의가 투철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인애와 화평이라는 명목 하에 진리도 밟고 정의도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완성하는 사랑이 아니면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추구하는 정의가 아니면 참된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1)
징계, 신실하심의 표현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 맞추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리’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에메트’(tm,a)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진리라기보다는 신실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에 충실하신 성품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신실함이라고 성경에 제시를 합니다. 제대로 이야기하면, “신실함은 땅에서 솟아나고 의로움은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이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신실함이 땅에서 솟아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불순종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신실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고 그분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당신의 언약을 파기하고 보복하고 불신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는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하고 범죄하고 어리석은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책망하셔서 커다란 시련과 환란이 오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충실하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고 한다면 때리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때리실 때는 당신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해서 복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여러분이 야단을 칠 때 속상해서 화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 아이가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망하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해서 그들에게 고통과 시련과 괴로움이 계속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신실하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악한 길로 달려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입증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는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잘 지켜보려고 하다가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빗나가면 하나님이 ‘나도 굳이 그럴 필요 없다.’라고 하시면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조금 나은 하나님일 수는 있지만 거의 비슷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언약에 충실하심
신실함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으로부터 신실함이 나오고, 신실하심은 바로 하나님의 진실하신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이 결국은 진리에 합치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당신에게 합치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내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과 실제 나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런 존재여야 한다는 것과 실제 나 사이에 격차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약속하셨을 때 그 약속을 식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식언을 한다고 하면 그분은 진실성을 의심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신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당신과 맺은 언약을 따라 언제나 같은 태도를 갖고 올곧게 가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지 않습니다. 약속에 충실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불순종하고 배반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하나님이 다시 징계하시면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축복하시고, 번영이 오면 다시 교만해져서 불순종하고, 또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다시 회개하고, 회개하면 복을 주시는 일들이 되풀이 됩니다.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한 번에 끊어져나가지 않고 계속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 충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으신 언약에 대해 충실하신 신실함은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신실하신 하나님
본문은 신실함이 땅에서 솟아난다고 표현합니다. 어디든 땅이 아닌 곳은 없습니다.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토는 아니지 않습니까? 땅에서 모든 소산들이 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땅으로부터 취하여졌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제외하고는 모두 땅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과 온 세계에서 당신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만 햇빛과 단비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이 살고 죄인들이 사는 곳, 극렬하게 하나님께 대항하고 악을 행하는 곳에도 하나님은 양식을 주시고 햇빛과 단비를 주십니다. 그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난다는 표현은 10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과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벗어나서 살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면전의식 속에 살아감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기에서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크’(qd<x)라는 단어인데 ‘의’, 혹은 ‘의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모든 것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 하나님이 안계신가보다. 내가 이렇게 한들 하나님이 설마 보시겠는가?’라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일지라도 ‘지금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구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또렷이 하고 있다면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어른이고 그동안 아무리 신앙생활을 깊이 해온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가 하나님 면전의식을 상실하고 나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욕망 덩어리인데 완전하고 의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악마가 저지를 수 있는 것까지 모두 다 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이 억제되고 절제되니까 통제되는 것이지, 통제가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감시가 되겠습니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신앙을 심어준다는 것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면전 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일학교 할 때 불렀던 찬송입니다.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 ♬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내려다보시네
그것이 신앙입니다. 아이들이 어디에 가 있든지, 성도들이 어디에 있든지, 예배를 드릴 때뿐만 아니라 홀로 어두운 골방에 있어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 의식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리우데자네이루라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굽어보시는 예수님 상을 크게 만들었더니 범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설마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겠습니까?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인데 말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예수님상이 내려다보니까 범죄가 현저히 줄어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면전의식,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보지 못하시는 곳이 없지만 우리의 신앙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명민하게 의식합니다. ‘하나님이 내려다보시거늘 내가 어찌하여 범죄 할 수 있겠는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면전의식을 가지고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이 진리의 말씀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내려다보시고 지켜보신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민감하게 의식해서 순종할 때나 별로 의식하지 못해서 불순종할 때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언제나 거기 계셔서 그들을 내려다보시고 지키시고 살펴보고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은 차라리 때리셔서라도 그들을 고치고 돌이켜서 다시 당신과의 언약관계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아프고 쓰라린 것이지만 전체로 보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켜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시는 은혜가 계속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났어도 하나님과 결별한 자들이 되지 않고 지금도 그분의 은혜에 붙들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의지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욱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좋은 것의 여호와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시 85:12)
본문해설
이 시를 12절, 13절에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다루는 내용과 13절에서 다루는 내용이 각각 다릅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땅이 그 산물을 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 땅들이 많은 곡식의 산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겨 주어서 부유하게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히브리어 성경에는 ‘선함’이라고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선을 우리에게 베푸시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하다, 악하다는 것은 기준이 없으면 그것을 판단해서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준은 수시로 변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소비생활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어렵고 가난할 때는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을 죄악처럼 가르칩니다. 몽당연필에 볼펜 껍질을 끼워서 쓰고, 치약도 5mm 만큼만 짜서 쓰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나라가 어느 정도 잘 살게 되어서 경제가 돌아가면, 그렇게 사는 것은 나라 경제에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소비가 미덕이라고 가르칩니다. 어마어마한 매체들을 동원해서 소비를 촉진시킵니다. 이것들은 결국 인간이 정한 선과 악이라는 근거가 얼마나 수시로 변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영원한 선악의 기준이 되는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냐는 판단을 매우 흐리게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법입니다. 법은 계속 진화하면서 변합니다. 지금과 30년 전의 법이 다르고, 60년 전의 법이 다르고, 90년 전의 법이 다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판단하도록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떤 기준을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본적인 선과 악의 판단에 있어서 언제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의도하셨던 바에 부합하면 선이고, 그것을 거스르면 악입니다. 세월이 변하고 법이 변해도 궁극적인 판단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희미하게나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질서가 있고, 그 질서를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악하게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당신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한 충족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은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새롭게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자신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계시고, 새로운 깨달음이나 자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기도 하고, 알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선에 대해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 안에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함께 있습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안에 이것이 공존합니다. 악을 향해서는 의지가 자유한 상태에 있지만 선을 향해서는 노예의 상태에 있습니다. 부자유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선과 관련한 무능력과 수많은 모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 선하심을 드러내심
이렇게 보면, “여호와께서 좋은 것, 혹은 선을 주시나니”라고 할 때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모순이나 결함이 없으시고, 무능한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 자신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이 정해 놓으신 목적도 선합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들을 그것에 합당하게 살도록 돌보시고, 인간들 중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을 일깨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혹은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자유롭게 살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차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에 대한 결과를 받게 됩니다. 그 때 수많은 악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악의 책임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 때 고통과 좋지 않은 일들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계속 거스르며 살아도 모든 것이 좋고 괜찮다면, 당신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인간들이 행하면서 살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하나님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의사 표명화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희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말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뜻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85편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이 분노하신 것도 결국은 그들이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신 것도, 율법을 따라 하나님 앞에 살아갈 힘을 주신 것도, 불순종할 때 책망하신 것도, 책망하신 후에 회개케 하신 것도, 회개할 때 그들을 용서해주신 것도, 용서하신 후에 다시 은혜를 베푸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했을 때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의 크기는 부모마다 다릅니다. 때로는 자식만도 못한 짐승 같은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나쁜 길로 빠지고 악해집니다. 어떤 부모에게 자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자녀를 너무 사랑합니다. 자신이 죽어서라도 이 자녀가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가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크게 가슴 아파하고 자식을 향한 기대와 사랑은 자식이 행한 악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부모가 자식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녀가 악을 행해서 감옥을 드나듭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에 커다란 동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가 악하게 살고 악의 결과로 고통을 받아도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듯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선하심을 깨달음
하나님의 무한히 사랑하시는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 적용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이스라엘을 향해 한없이 크고 그들을 향한 사랑으로 녹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그 결과 비참해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때려서라도 그들을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사랑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분노와 마음 아파하는 표현들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성숙하고 난 다음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때 부모님이 나를 때린 것은 보기 싫거나 미워서가 아니라 나를 향한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내가 그릇된 길로 갈 때 그렇게 마음 아파하면서 때리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계속 불순종하면서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내적인 고통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 모든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헛된 것들을 추구할 때 우리의 마음을 허무했던 것, 악을 행했을 때 고통스러운 결과가 왔던 것, 불순종할 때 영혼에 고통이 있었던 것, 주님이 우리를 때리셨던 것,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때려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무한하게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난 후에야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가르쳐주는 교훈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해주었습니다. 아들에게는 깨달음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티끌만큼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산을 가지고 멀리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고 싶어 하는 자식을 붙들어 두어서는 진정으로 자신의 유업을 물려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고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허랑방탕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결국은 모든 재물을 허비하고 친구들도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돼지 쥐엄 열매라도 먹어 보려고 하는데 그것조차 없어서 쓰러질 지경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풍족한 품꾼들과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집을 나간 탕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버지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선한 것들이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모든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악하게 사는데 무조건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을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 정도밖에 안된 아이가 난잡한 행동을 하고 악에 빠져서 세상을 향해 갈 때 여러분들이 정말 그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두면서 어떤 일을 해도 예쁘다고 칭찬만 하고 그런 일을 계속 하라고 돈을 줄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파괴되는 일인데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사랑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에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 고통을 당하고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자신들의 불순종을 회고하면서 불순종한 이들을 진노로 다루신 것도, 진노를 돌이켜 그들을 용서해주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왔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육신과 안목에 좋은 것만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거슬러서 멀리 떠나려고 했지만 수많은 사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시고 어루만져 올바르게 하셨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신실하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실하지 못함과 악한 것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의 불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의 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모든 좋은 것과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부터만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반절의 이야기입니다.
땅이 산물을 내게 하심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며 사는 것이 땅과 밀접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땅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주님이 보실 때 그 땅에 공의가 현저하게 망가질 때 악이 땅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악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크면, 땅들이 고통을 느끼고 충분한 소산을 내지 못하는 재앙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땅과 인간은 그야말로 신토불이입니다.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과 얼마나 평화를 누리며 온전히 사는가에 따라 땅의 상태는 현저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든 세계의 운명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운명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고,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약속하시면서 이 땅에 추위와 더위, 자연의 모든 질서들이 회복되고 영구히 계속될 것을 약속하신 것도 인간의 운명과 땅의 운명이 얼마나 밀접한지를 보여줍니다. 타락한 후에 모든 피조세계가 탄식하면서 우리 몸의 구속을 바라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이 온전한 구속을 받을 때 땅에 맺힌 모든 저주와 심판들이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의 모든 저주와 맺힘이 풀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땅과 인간이 충만한 생명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십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때 이 땅에 산물들이 나와서 인간이 누리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그분을 향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믿음의 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근실하게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약속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고 이 세상에서 평안한 질서를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와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선하심을 맛보며 사는 가운데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닦게 하심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시 85:13)
본문해설
이 구절은 시편 85편을 마무리하는 구절로서 대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포로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들은 다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서 자신들의 처지가 그분의 진노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잠시 진노하시지만 영원히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시고 구원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진노 속에서 깨닫는 하나님의 선하심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런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주실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춘다는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심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마음을 낮추고 깨닫게 해서 당신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신정론적인 접근입니다. 이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놀라운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분명하다면 선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선한 데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일단 인간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실제적으로 멀어지게 되면 고통이나 시련의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에너지 자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이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때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친 매우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태들 속에서 어떻게든지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선한 방향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하면 죄를 짓겠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된다는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것은 사랑을 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악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쪽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게 일어나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찼는데 사랑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교 속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선하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이라도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그도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이냐, 아니면 단지 좋음이냐 하는 문제는 별개라 해도 자신에게 좋음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느낍니다. 내 앞에 나쁜 사태가 일어나고 내게 고통을 주는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선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은혜로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방향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선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고 인자한 사람은 속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항상 선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속기도 하고 때로는 손해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의 성향입니다. 말하자면 사랑과 너그러움이 시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들에게 일어난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의 평화로 데려가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땅에서도 그대로 실현이 되어서 하나님이 물질적인 넉넉함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의가 주의 앞에 행함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의가 주의 앞에 앞서가며”라는 구절은 의로움, 율법에 부합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의’라고 부르고,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상태를 ‘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입혀서 의롭지 않은 백성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율법을 행하기에 모자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덧입혀서 당신의 사랑스러운 백성이라고 인정해주시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입혀주시니까 당연히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마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양심에 커다란 가책을 느끼다가 가룟 유다처럼 죽어버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돕지 않으셔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양심의 작용이 극대화되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양심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양심과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유죄의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양심이 저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는 믿음을 필요로 하며 이 믿음 역시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믿는 주체의 자유의지의 소산으로서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명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믿고자 하는 자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마틴 루터는 설교 속에서 천국에 가보면 앞에 문에는 ‘믿는 자만 들어올 수 있다.’라고 되어있지만 들어가 보면 그 문 뒤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만 믿었다.’라는 문구가 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문 앞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는 것 같지만 들어가서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은 것도 내가 자랑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을 덧입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으로서의 의를 덧입혀주시면 양심의 작용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주의 앞에 앞서 행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앞’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그분의 거룩한 현존을 느끼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먼저 은총을 덧입혀주시고,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회개함으로 커다란 부흥을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의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주의 길을 닦음
그리고 “주의 길을 닦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근동 지방에 있었던 'king’s highway', ‘왕의 대로’와 관련된 문화적인 관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왕이 행차를 할 때 지금처럼 몰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왕이 오시기 전에 “왕이 00년 00월 00시에 이곳을 지나가신다.”라고 나팔을 붑니다. “왕이 곧 이리로 지나가실 것이니 너희는 왕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뒤에 도로를 보수하는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이사야 40장에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왕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무슨 일이 생길까요? 길이 울퉁불퉁하면 왕의 마차가 편안하게 지나갈 수 없으므로 도로를 보수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높은 곳은 깎아서 낮은 곳으로 흙을 붓고 낮은 곳은 높은 곳의 흙을 받아서 돋웁니다. 그렇게 깎고 돋우어서 평평하게 만듭니다. 지금도 보면 포장하지 않은 도로는 비가 한번 오면 길이 울퉁불퉁해져서 비가 온 뒤 맑아지고 나면 트랙터가 지나갑니다. 깎아서 고르고 나면 길이 훨씬 평평해지고 그 위로 차가 지나다니게 되면 다시 판판한 도로가 됩니다. 그래서 아스팔트를 깔지 않은 도로는 유지비가 굉장히 많이 듭니다.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차가 다니기 힘들 정도의 길이 됩니다. 그것을 다 닦아놓은 다음에 왕이 지나갑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자가 아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성경은 그 역할을 마치 왕에 앞서 가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왔다 너희는 회개하라.” 이것이 세례 요한이 외침이었습니다. 이 외침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가 마음에 높은 것, 교만한 것을 낮추고 낮아져 주저앉은 마음은 돋워주어서 잠시 후에 나타나 천국 복음을 선포하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있고,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주님의 임재 앞에 서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길에 왕의 대로가 나고 거기에 하나님이 찬란한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때가 온다는 것을 1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13절은 부흥에 대한 열망의 기도로 막을 내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만나주실 사람들에게 먼저 은혜를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각성시키고 깨닫게 하셔서 그 마음이 주님을 만날 만한 상태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와 이 조국 교회와 민족 위에 권고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도록 마음 깊이 빌어야할 의무가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시편65편 강해 1
시편85편 강해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