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함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 42:6-8).
여기서는 이제 회상이 나오는데요. 이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앞 절, 5절에서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이렇게 이루어진 자아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실천하는 장면이 이제 6~8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그가 회상을 하게 된 이유가 "낙망이 되었기 때문에 제가 회상합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정말 어떠한 희망도 없어 보이는 것이죠. 나라는 잃어버렸고 자신들은 낯선 나라에 망명을 와 있으며 사람들은 늘 조롱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그렇게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속히 개선되고 어떤 변화가 올 것이라고 하는 조짐도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성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뵈옵는 그 모든 일들이 불가능하게 된 거죠.
그때에 이 시인이 요단 땅과 그 다음에 헤르몬과 미살산을 기억을 합니다. 직감적으로 볼 때에 이것은 요단 땅이나 헤르몬, 미살산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기억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도우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자신들을 향한 긍휼을 보여주시는 그 때다 라고 하는 것이죠. 요단 땅은 여러 분이 알다시피 요단강을 끼고 있는 땅들 아니에요? 거기에서 무슨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요단강을 건널 때에 하나님께서 물을 말리시고 법궤를 메고 걷게끔 만들어 주셨죠. 그래서 정복하게 만들어주신 땅 아닙니까? 그리고 그 땅을 건너고 나서 처음 공격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여리고 땅이었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 그 큰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가나안 정복의 장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이죠. 이러한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던 요단 땅, 시인이 직접 거기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이 시인이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주석가에 따라서는 이제 요단 땅에서 일어났던 이 일을 지금 저처럼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시의 저자를 다윗으로 보고, 다윗이 바로 요단강 거기에서 반역을 당했을 때에 구사일생으로 요단강에서 구출되는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과 요단을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겨서 회상하였던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신 위대한 일인 이 요단강 도하의 사건과 요단 땅 정복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거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가 바로 헤르몬산과 미살산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광야의 여행 도중에 큰일을 행하고 이 광야의 여행을 끝내고 들어와서 가나안 정복을 할 때에 일어났던 큰 승리를 기념하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 헤르몬산과 미살산에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돕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던 하나님의 그 큰 능력과 위대한 힘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고전적인 경건의 기법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가 보면, 하나님 앞에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개인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낙심이 될 때가 있지만, 특별히 그런 게 없다고 하더라도 내려누르는 환영의 큰 중압감을 느끼면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살 소망이 끊어지고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아주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깊은 낙심과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죄를 통해서 양심의 가책과 함께 이런 것들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서히 잠식되어간 경건의 능력의 상실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모두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상실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혹은 사람들의 기질에 따라서는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 순간에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한없는 거리감이 느껴지고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매우 무가치한 존재다 라고 하는 이러한 느낌이 강물처럼 밀려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같은 것을 보면,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순간에 찾아오는 영적인 절망과 낙담, 이런 것들이 자주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에 가장 좋은 치유법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이 과거 나의 삶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회상하는 것이 이러한 낙망과 그리고 양심의 송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게 되는 거죠. 우리는 그렇게 말씀에 약속이 자신의 과거의 생애 속에서 어떻게 틀림없이 실현된 것을 발견하게 될 그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고 은혜의 약속은 반드시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이렇게 시인처럼 낙담과 그리고 우울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고 그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게 메이지 않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요단 땅과 헤르몬, 미살산에서의 주를 기억을 했지만, 현실로써는 "폭포 소리의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그랬어요. 시인은 이런 큰 환란, 나라를 잃어버리고 망명의 길을 떠나는 이 커다란 환란이 원수들의 간교한 계교를 통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좀 더 멀리 보면 결국 그 모든 물결과 큰 폭포소리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직접 내신 것이었어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었죠. 그랬기 때문에 악한 원수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그 모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낮에는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아무리 환란이 많이 와도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주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참 강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아주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강한 존재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약한 존재에요.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에요. 그래서 이 신자가 일생을 사는 동안에 가장 큰 적은 절망이에요. 절망은 사실은 죄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거죠.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은 30에 파는 죄를 지었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3번이나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한사람은 나가서 목메어 죽고, 한사람은 다시 회복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살죠. 그래서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에요. 특히 우리들이 양심에 거스르는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하건 할 때 밀려오는 절망, 영혼의 침체에 깊이 빠졌을 때 '나 같은 존재는 별로 의미도 없을 거야' 그리고 '나는 이 상황 속에 하나님에 의해 내팽겨졌다' 하는 이런 절망, 이런 것들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죄를 짓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큰 영향을 우리에게 미치는 거에요.
사람이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죄의 크기만큼 똑같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도 일종의 하나의 정동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심적인 상태가 어떤 상황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절망감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게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거에요. 정도가 다르게. 그렇게 되기 때문에, 이제 인생에 있어서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효과를 만들어내요.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에 우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복이라든지, 무슨 하나님 앞에 변화라든지 이런 것이 아니에요. 절망 그것이 데려 가는 것은 파멸이에요. 그러니까 욥기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거에요. 그것이 절망이 우리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환란과 시련이 닥치고 낙심스러울 때마다 항상 과거를 회상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상해요. 그리고 그 과거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붙드시던 그 놀라운 은총을 생각한 거죠. 그러면서 거기에서 영혼의 생명을 공급을 받는 거에요. 그러면 이길 수가 있는 거죠.
잘 보면, 하나님을 우리가 많이 의지하면서 그분께로 오는 큰 은혜의 도움을 받았던 때에는 언제였었냐 하면, 정말 절망적이고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차이점은 뭐냐 하면, 그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고 하나님 앞에 절망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은혜를 받을 때, 그 때에 그 절망스러운 상황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공급받는 그런 시간이 되었던 거죠. 그래서 그 상황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겨나가게 되는 거죠. 이런 것들이 바로 은혜로 이기는 연단,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도 목사인데도 이렇게 살다 보면, 낙심이 될 때가 있어요. "아, 이제는 희망이 없다!" 그리고 말로 다 여러분들에게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낙심이 될 때가 있어요. 그때에 과거를 회상하게 되요.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이 그냥 우연히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세밀한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이것보다도 훨씬 곤고하고 절망스러울 그 때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우셨는지를 생각하라.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께 피하는 거에요. 나는 주님 앞에 늘 변하고, 변심하고, 그리고 올곧지 못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언제나 나를 꼭 붙들고 이 길을 걸어 오셨다라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지금보다도 훨씬 절망스러운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붙들고 여기까지 오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도우시면서 이곳까지 오셨다는 사실을 회상하게 되는 거에요. 거기에서 주님을 붙들고 그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에요.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에요.
그래서 이 절망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에요. 분명하게 악한 영들로부터 오는 것이에요. 더군다나 그 절망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로 우리들을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앙이 또한 거기에 함께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절망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이에요. 파멸이란 말이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절망은 마지막으로 우리를 거기에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회상하고 그러면서 그 약속이 어떻게 신실하게 나의 일생 속에서 시행 되었는가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늘 감사하는 사람들은 이 절망에 덜 빠져요. 왜냐하면 이 감사 그 자체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회상, 현재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에 대한 경험, 여기에서 오는 감사이기 때문에 절망에 훨씬 덜 빠지죠. 이런 관계가 끊어질 때에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에요.
어떠한 위기에 있어서도 어떤 어려움 속에 있어서도, 두 가지,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지키신다는 거에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