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영광과 진정한 존귀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50:13).
원래 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좋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들을 소유하거나 지님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 합니다. 사람은 그저 아무것도 지니질 않은 태어난 그대로로 본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또 어떤 것들을 소유하고 어떤 권력을 쥐고 있고 이런 것에 따라서 사람은 사람들에게 달리 보이게 마련이고 대접을 받기 마련이예요. 어느 기관에서 통계를 냈는데 백화점이나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 옷을 잘 차려 입고 화장을 하고 갔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 대접받는 것이 틀리다 그렇게 통계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옷 하나만 다르게 걸쳐도 사람들에게 틀리게 대접을 받는 이유는 인간이 사람들을 평가할 때에 그렇게 외모의 영광으로 평가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런거 거든요.
그런 영광이 사람들에게 더해질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인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 영광이 이 세상에서의 영광이라면 죽음과 함께 모두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항상 종말론적인 빛 아래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에 그때에 그 삶이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삶을 삶으로만 비춰보면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영광들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그 삶을 죽음으로서 비춰보면 죽음의 빛으로 비춰보면 삶이 비로소 어떤 게 헛된 영광이고 어떤 것이 참된 영광인가 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저가 그렇게 많은 영광을 누려도 죽으면 가져가는 것도 없고 그가 이 세상에서 누렸던 많은 영광이 사람에게서부터 받고 사람에게 보여지는 영광이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 그 영광이 함께 따라가지 못한다. 그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는 자기를 축하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고 그렇게 인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결국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렇게 살았던 수많은 자기 조상들의 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거죠.
그러면 죽음 이라고 하는 휘장을 지나게 되면 죽음이라고 하는 휘장을 지나기 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고 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고 그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이 모든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람에게 높임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의 삶과 사람들에게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은 너무나 현저하게 차이가 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일단 그 죽음의 휘장을 지나고 나면 자기한테 박수치고 영광을 돌리던 많은 사람들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은 죽음의 휘장을 지났을 때에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이 세상의 시간이나 공간 이 세상에서의 욕망, 헛된 영광 이런 것들에 가려서 잘 볼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을 온전히 뵈옵게 되는 그러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 영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세계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죠. 그것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어떠함을 알기 때문에 죽음의 휘장을 지나서 맞닥뜨리게 될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이 현실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죠.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만나게 게 될 그 현실을 아주 두려워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잠잘 때 마다 악몽을 꾼다면 잠드는 것을 두려워 할 거예요. 잠드는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잠든 후에 만나게 되는 꿈의 세계를 직면하기가 두려운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똑같은 거죠. 죽는 거 자체를 두려워 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죽음 이후에 맞이할 그 현실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죄가 들어온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과 이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아주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예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의 평화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거죠. 그러니까 깊은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기 위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살고 거기에 소명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죠. 그래서 리차드 백스터라고 하는 청교도는 ‘성도의 참 안식은 죽음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것이 바로 성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예요. 그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동행을 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여전히 죽음은 두려움으로 남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만나게 될 그 하나님이 두려우니까.
그래서 이제 이 시인은 이야기하기를 ‘존귀에 처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뭐가 존귀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에서 높이 들리고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쥐고 그 풀에 꽃과 같은 영광에 싸여서 수많은 사람의 박수갈채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존귀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존귀는 하나님께 소중히 여김을 받으며 사는 것이예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붙잡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생활 그것이 바로 존귀한 자의 생활이예요. 그러한 존귀한 자의 삶을 그걸 하찮게 여기고 그런 자신의 지위가 소중한 지위인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멸망할 짐승과 같다, 시인은 말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도 이 땅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잠시 이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팔기를 마치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 것처럼 한다고 성경은 말해요. 하나님과의 평화를 팔아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이 얼마나 큰 영광이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죽음의 빛 아래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며 그 때에 아주 삶에 대한 공정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예요. 거기에서 죽음의 빛이 비취면 어떤 효과가 있냐하면 우리에게 잠시 사라질 것과 영원히 남을 것이 어떤 것들인지 보여 주는 힘이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유한함을 노래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신앙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죽음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을 만나고 그렇게 해서 매일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신자인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