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새 성품
“내 백성아 들을찌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7-12).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관계는 제사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관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은 양쪽 당사자들이 서로 의무를 지고 어떤 일을 위해서 약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은 일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워낙 크고 위대하시니까 특정한 백성들을 불러서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일방성 안에서 하나님 당신 자신이 그 백성들을 향하여 은혜를 베푸시고 또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고, 또 언약을 맺은 백성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살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형성된 것을 인간들이 자꾸 잊어버릴 수 있잖아요. 그것을 하나님이 상기시키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제사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인간들은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매우 특별한 은총을 입은 무리들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정도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제사를 통해서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어서 실제적이고 중대한 약속들이 현실화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무한한 은혜의 공급과 죄사함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떠한 죄를 지었던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제사를 통해서 그 백성들을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 속에서 구현됩니다. 속죄의 제사는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였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죄를 제물에게로 옮기고 그 제물을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이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상징이죠. 그렇게 해서 제물을 하나님 앞에 태워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죄의 현실성과 그 죄의 무서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결과. 이런 것들을 실연식 교육 방법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또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으로부터 오는 은혜들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아름다운 제사가 하나님 앞에 그들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말할 수 없이 훌륭하게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주님 앞에 세우고 하는 이 모든 일에 아주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신앙이 나태해지고 나면 이것이 형식에 흐르게 되었습니다. 일단 제사가 형식에 흐르게 되면 그 제사제도 안에 깃들여있는 하나님과의 은혜언약이 보증하는 바를 재현하지 못합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모하는 심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너무 훌륭한 은혜의 방법입니다. 어디 가서 방황하고 노래한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갈망이 없으면 예배만큼 그 사람에게 지루하고 힘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차라리 어디 가서 땅을 파는 게 쉽지 그 긴 시간동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으면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은 죄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죄 용서를 경험하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판단력을 주시고 또 은혜의 힘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간구하면 은혜의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질 때 기도는 아무 힘도 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너무나 자주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과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도 없이 관습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사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불충실하시거나 변절하시거나 잊어버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항상 이쪽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깨뜨리시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이쪽 편이 문제가 있습니다. 항상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리려 합니다. 그런 제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랑의 줄에 매여서 생각하는 것이죠. 우리가 아직 이방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셨구나. 이 제사의 제도가 바로 그 광야시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참 죄가 많은 인간들이어서 이 짐승처럼 피 흘리며 죽었어야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대신 이 짐승들이 죽게 하고 우리를 주님 앞에 살게 하셨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예요. 이런 것이 신앙이 식어지게 되면 차가운 형식만 남게 되죠.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이 제사를 하나님 위해서 드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 내가 짐승의 피를 마시겠느냐, 내가 배가 고파서 짐승들을 먹으려고 하겠느냐. 혹시 그렇다할지라도 만약에 굳이 그것이 필요하면 봐라. 너희들에게 준 많은 제물들, 짐승들, 산에 있는 새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냐. 내가 필요하다면 너희가 바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가 취할 수 있지 않느냐. 제가 말씀드린 것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제사는 그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져야하냐면, 예배를 드리던 기도를 하건 봉사를 하건 무엇을 하던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을 섬겨야하는 무거운 의무감만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새로워지도록 그리고 그렇게 새로워지는 나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기쁨을 얻으시기 위해 나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하시고, 섬기는 것도 하나님은 어떤 것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지만, 내가 이렇게 섬기는 것이 나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섬김으로 부르셨다. 그래서 이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삶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