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을 토할 곳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이렇게 개인적인 신앙의 간증을 하고난 다음에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야할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받은 바 그 은혜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올바로 알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사실은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알게 되었을 그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의무감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전하게 되는 더 큰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이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도 희랍사람들은 이 지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식을 자기의 의식 속으로 투영시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밖에 있는 이런 것들에 대한 인상을 머릿속에 투영시켜서 이 안에 있는 꽃에 대한 생각하고 만나게 되는 것을 지식이라고 본 것이에요. 그 다음에 히브리 사람들은 지식을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보이는 이 꽃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을 뒤섞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이 꽃에 대한 인식이 자기에게 들어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 꽃 속에 뒤섞어서 그래서 이것 자체를 자신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 그리고 내가 이 꽃에 대한 인식 속에 섞이는 것, 그것을 아주 쉽게 얘기하면 단순히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 꽃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냄새도 맡아보고 그 다음에 건드려보고 그래서 이 꽃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에요.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가보지도 않고 이렇게 얘기하면 권위가 없지만)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저 남자를 잘 안다.’ 고 말하면 큰일 난답니다. 그것은 혼삿길이 막혀요. 그럴 정도로 안다는 지식은 경험과 뒤섞이는 성질을 가진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고 나면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보면 우리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 술술 나오는 이야기들은 전부 다 경험과 관련이 있어요.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력했느냐에 의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일 순위, 이 순위, 삼 순위가 마음속에서 정해지는 것이에요. 그 순서를 따라서 말을 할 때에는 말을 하는 것이 쉬워지지만 일 순위에 있는 것을 저 밑에 집어넣고 사 순위, 오 순위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하려고 할 때에는 이게 말도 버벅거리고 더듬게 되는 것이에요.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산성이시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시고 구원이신 것을 아주 절실하게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 시인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분을 대하며 살아야할지를 전하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요.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로 집약되는 것이죠. 그게 뭐냐 하면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항상 그렇다는 뜻이에요.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면서 경험하게 된 구원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에요. ‘아! 우리의 본분은 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구나!’ 그것을 배우게 된 것이죠. ‘아! 그렇구나! 우리의 의무는 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구나!’ 그것을 배우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모든 백성들도 의지하며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고 있는 것이에요. 의지에 대해서는 많이 말씀을 드렸으니까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마음을 토하라’ 고 했거든요. 종종 나오는 표현입니다. 우리들의 토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죠. 이미 무엇인가 먹은 것들을 확하고 게워내는 것이죠. 자 그렇게 되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생활 속에서 토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에요. 특별한 질병이 있지 않는 한 토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정상적으로는 토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그것이 밑으로 내려가서 위에서 소화가 되는데 토한다는 것은 이것이 역류해서 확 올라와서 밖으로 쏟아내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토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위장에서 이것들을 토해내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을 토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시인이 글을 쓰면서 마치 우리의 위나 장이 음식을 보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생각을 저장하고 있는 위라는 이야기지요. 그런 이야기를 나중에 훨씬 더 후대입니다만 플라톤이 이야기합니다. 다 맞아떨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두는 것이죠.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는 쓰고, 달고, 맵고 그런 맛을 느끼면서 음식이 내려가지만 내려간 후에는 그것이 쓰지도 달지도 맵지도 않아요. 느끼지 못하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많은 일들이 여기서 경험되지만 일단 기억 속으로 내려가면 기억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애달프지도 않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들이 다시 올라올 때 다시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건드려서 슬펐던 기억은 다시 우리를 슬픔으로 데려가고 기뻤던 기억은 우리를 기쁨으로 데려가요. 물론 슬프고 가슴 아픈 것들도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렇지만 슬픈 감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죠. 5년 전에 가슴 아프고 슬펐던 일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웃기고 그렇게 되는 경우는 흔치않다는 것이죠.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시인은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라.’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마음을 토한다는 것은 의지하는 감정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이 묻혀있는 생각까지도 모두 다 아시는 분이시잖아요. 모두 아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보고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토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려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염려와 근심과 고통과 괴로움과 심지어는 우리들이 받는 유혹과 죄악까지도 하나님 앞에 모두 토하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분이시지만 그것을 주님 앞에 토해놓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마음을 모두 쏟아놓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일 때도 기도를 많이 하게 되지만 기도를 많이 깊이 하게 되면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면 점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점점 사라지면 하나님 앞에 더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마지막으로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정말 경험한 고백이거든요. 그래서 나의 산성, 나의 구원, 나의 피난처가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로 바뀌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으로 모든 백성들을 불러들여서 함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자고 하나님 앞에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