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편 51:15).
14절의 기도가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시기를 원하는 그러한 소극적인 기도라고 할 것 같으면, 15절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그런 적극적인 기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시인이 오늘 여기에서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라고 먼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죄와 관련된 성도의 영혼과 실제 삶에 대해서 몇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우선 첫째는 죄가 우리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입니다. 알다시피 이 시인은 노래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이 사람은 가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그런 그 가인으로서의 삶이었죠. 그래서 노래와 시를 즐기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나자 단번에 이렇게 하나님을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었던 마음의 커다란 속박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시인이 하나님 앞에 부른 노래는 여러 범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노래와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노래와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 백성과 그리고 나라에 대한 노래와 그리고 성전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들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노래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 대한 노래와 그리고 자기 자신을 헤아리며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는 탄원의 기도 이렇게 7가지 정도의 범주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노래한 이 대상이, 대상의 외연이 이 자연과 그리고 우주에까지 확장되게 됩니다. 이것은 저 멀리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까지 확장이 되고, 그리고 저 깊이로는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율법에까지 확장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 창조주이신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여러모로 드러내셨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드러내신 그 모습이, 그 아름다움이 창조세계에도 다 묻어 있고, 어디에도 그런 것들이 묻어 있지만 사실은 창조세계에는 흐리게 묻어 있고, 그것들이 가운데로 들어올수록 아름다움의 농도가 짙어지게 되는데 그 가운데가 바로 성경이에요, 성경. 그래서 성경을 핵심으로 해서 자연의 세계로 펼쳐질 때 하나님이 이 세계 속에 드러내신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낮아지는 거죠. 그 농도가 낮아지는 이유는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당신이 심으신 그 아름다움이 한편으로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세계가 변질되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 자기 자신 속에 커다란 부패가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게 하나님이 자연을 주신 목적과 성경을 주신 목적은 원래 꼭 같아요. 그래서 자연을 주신 목적도 하나님이 ‘나 하나님을 알아라’ 하고 주신 것이고, 성경을 주신 목적도 ‘나 하나님을 알아라’ 하고 주신 것이에요. 이것은 마치 사람을 지으신 이유와 신자를 지으신 이유와도 똑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신자를 삼으신 이유와 같고 또 다르게 보면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은 교회를 지으신 목적과 일치해요. 그래서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이 어떻게 설계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알게 하는 철학을 주신 목적과 신학을 주신 목적도 일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구원하여 신자로 삼으시고 성화의 길을 가게 하시는 이유는 참으로 하나님이 그를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에요. 교회는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에 세우시려고 했던 그 나라도 돌아가기 위한 것이고, 성경은 하나님이 원래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셨던 거기 그 지식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신학을 통해 탐구하는 지식은 하나님이 철학을 주신 그 목적과 동일한 것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둘 사이에, 각각의 둘 사이에 인간이 그 두개를 통해서 원래 하나님이 주신 목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모르고 인간으로서 똑바로 살아서 참된 인간으로 돌아간다면 예수님이 필요 없죠. 인간이 자연을 보고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성경이 필요가 없죠. 인간이 하나님 없이 홀로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서 충분히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다면 신학이 필요 없고, 인간의 모이는 이 사회가 저절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교회가 필요가 없죠. 그래서 그 사이에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와 중구[?]하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가 필요해서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인이 저 바깥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노래하고 읽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어제 저녁에 솔로몬에게 주셨던 마음과 같이 탁월한 지혜와 총명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놀라운 은혜, 그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 시인이 경험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으로부터 저 끝에 하나님이 주신 이 자연의 세계까지 희미하게 묻어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까지도 찾아내서 그렇게 기쁨으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가인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가인의 삶이 결국은 끝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을 향한 그 아름다운 노래는 이 시인의 개인적인 결심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영혼의 자유함 때문이었어요. 죄를 짓자 이 영혼의 자유함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두 번째는 뭘 보여 주냐 하면 이렇게 본래의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하던 시인의 이 찬양이 그쳤을 때 그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찬양도 하나님과의 교통의 방식이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시편에 보면 시편은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노래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문득문득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이 들어와요. 이것은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인용된 적도 있지만은 학자들은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별로 못 봤어요.
나 개인적인 생각은 이 시편 속에 불쑥 튀어나오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직접 화법이 있잖아요. 따옴표를 쳐야 될 것 같은 하나님 말씀들이 있잖아요. 있어요? 없어요? 있잖아. 그것들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 시인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음성일 가능성이 많다는 거죠. 대부분은 그렇게 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봐요. 증명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그 중의 하나만 합시다. 다윗은 그의 시대에도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에도 다윗의 정체성은 선지자였어요. 왕이면서도 동시에 선지자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시의 형태로, 이렇게 오경을 해석하거나,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전해주고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이 다윗은 정확하게 모세의 사역을 승계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모세가 선지자의 비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에도 이 사람의 시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 여기에 나온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던 그 입술이 닫혔습니다. 결국은 그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 시인이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 짝을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내용이 자신의 입술을 열어 달라는 간절한 몸부림의 기도였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며 그게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는 세 번째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혼의 묶인 것을 풀어줄 수 있는 자유케 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다른 곳에 보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영혼의 회복을 기도하다가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악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부짖음을 들으셨도다’ 라는 기도죠.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고, 그리고 그 용서 속에서 영혼의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시인이 이 과정을 통해서 깊이 깨달았던 것이죠.
삶에 있어서 우리 하나님의 주권, 다시 말해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인정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한 사람이 맨 마음으로 주님이 위대하고 높으시니까 ‘나는 주님의 종으로 살아야 되겠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영혼을 건져주시는 그 능력과 일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철저히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이 영혼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삶의 나머지 방면에서도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에요. 이게 바로 시인이 죄 속에서 경험하였던 것이에요.
더 많이 있지만 하나만 더하고 끝내겠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범죄 중에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는 이 시인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은혜 중에 있을 때에는 자기가 춤추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율법을 읽으면서 깨닫는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노래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지성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명시적으로 그렇게 자만스럽게 고백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러나 여러모로 볼 때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겠죠. 무의식 속에 그런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야경이 깊기 전에 그 시를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 시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리고 9번 연단하는 은보다도 더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던 이런 지성의 어두움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주님의 은혜로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소산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 범죄한 자신에게 다시 하늘을 열고 화목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타락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죠. 타락할 때에는 이런 것을 배워야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니 범죄한 이 사람 다윗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다윗이 범죄한 그 기회를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시인 안에 가르쳐 주시고 일으키시는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셔야 되는 것이죠. 이 일을 위해서 다윗은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고,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한 일이 아무것도 도와주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 뛰어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것은 시인이었지만 시인의 이 범죄를 사용해서 오히려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깨달을 수 없었을 그 심오한 비밀을 알게 하심으로 이 범죄를 통해서 시인은 가슴을 녹이는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 알 수 없었던 그런 찬란한 은혜의 빛, 그것의 고귀함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마치 어두움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빛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부모를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가정의 참된 행복과 가치를 아는 어린 아이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섭리 속에 그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철저한 이 불행을, 그렇게 철저한 불행을 사용하셔서 이렇게 놀라운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셨는데 왜 다윗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는 범죄와 타락은 그냥 그것으로 끝나고 더 이상 영혼의 아름다운 것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일 새벽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 넓은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저희는 늘 주님을 떠나고 범죄하나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주님의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