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기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다윗이 말하는 악인의 정체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그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악인은 결국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표준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악인이라고 말을 하고, 또 마음의 성향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표준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가 악인이라고 부른다 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악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하는 하는 교훈을 떠난 사람들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게 믿어야할 규칙과 살아야할 교훈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사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마음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삶도 그것에 어울리는 생활을 해나가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삶에 교훈을 저버린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을 믿음의 규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 모든 지혜의 기초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그 믿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이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시다 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질서라는 것을 알게 되게 때문이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에 비로소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 되었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을 때에,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참 소중한 것이구나, 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당신을 향해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주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 참 귀하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는 거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한 판단도 흔들리는 거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한다. 왜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왜 이렇게 생각할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편하기 때문이에요.
요즘 영국에서는 한때는 그래도 기독교 신앙이 꽃피웠던 나라인데 열심히 시민들의 돈을 거둬서 그 큰 이층버스에다가 글자를 써 붙인대요, 하나님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맘먹고 사십시오. 그것을 광고를 내겠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기부를 하더라는 얘깁니다. 그 광고비로, 하나님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사십시오.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게 걱정이 될 까요, 왜일까요? 자신의 삶이 현저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을 떠나 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걱정이 되는 거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위로가 되는 거죠. 거기에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의 성도들이 용기를 얻은 거죠. 사람은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를 아신다, 이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것은 악한 자는 생활의 측면에서 본 사람이고, 어리석은 자는 지성의 측면에서 본 사람이에요. 머릿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혼란과 무지 속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것이에요. 그런데 이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무엇이 있다, 없다, 라고 판단할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판단을 하겠어요? 우리의 몸이 있으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물들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다섯 가지 통로밖에 없어요. 눈, 귀, 입, 코, 살갗, 살갗은 접촉을 통해서, 귀는 들리는 것을 통해서, 입을 맛을 통해서, 코는 냄새를 통해서, 눈은 보는 것을 통해서, 바깥 세계의 정보와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실어 나르는 거죠. 거기에 이 다섯 가지 그물에 걸리면 우리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자 바람은 눈에도 안보입니다. 코로 냄새도 안 맡아져요, 그렇다고 혀를 벌린다고 해서 바람이 쓰고 달고 씬 맛을 내는 건 아니죠, 그리고 바람은 때로는 귀에도 들리지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들이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죠, 어떻게? 살갗에 바람의 기운이 스치면 우리는 눈 코 귀 입은, 바람을 못 봐도 살갗에 스치는 바람의 감각을 보면서 바람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들이 만질 수 있는 것은 볼 수 있는 것 이모든 것들은, 있는 것 가운데 지극히 일부에요, 수많은 빛의 파장 가운데 가시광선은 아주 적은 부분이에요 소리가 파장이 너무 커도 못 듣고 너무 작아도 못 들어요. 그렇게 우리의 몸의 이 모든 구조들이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은 눈이나 코나 입이나 귀로 파악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이 아닌 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감각에 의지해서만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죠. 우리의 이 마음속에는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양심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양심이나 사랑 미움을 찾기 위해서 우리의 배를 가르고 장기를 뒤져 본다고 해서 거기에서 사랑이나 미움이나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죠. 그러면 그것들은 해부학적으로 우리의 몸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부학적으로는 없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그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있어요. 그래서 작용을 해요. 그래서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도 믿음이 가르쳐 주는 것이고, 양심이 있다는 것도 누가 본 사람은 없지만 믿음이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에요. 똑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육신의 다섯 가지 기관으로 뵈옵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으로서 하나님을 뵈옵는 분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치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라고 판단을 내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이 사람들의 본성이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그런 생활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느냐 이것은 우리가 그 이후에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문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매일매일 해나가야지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입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이 연약하지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가르쳐 주신 그 생활의 교훈을 따라서 매일매일 순종하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는 이러한 하나님이다 라고 가르쳐 주신, 이렇게 너희는 믿어라 교훈해 주신 그 믿음의 그 규칙을 배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믿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에요, 교리를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삶이 어리석은 자들과는 거리가 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혜로운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