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심으로 도우소서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시편 54:5)
이제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있고 나서 자신에게 그렇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탄원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나의 원수들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라는 고백이죠.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안가죠. 하나님은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인데 어떻게 비록 그가 자기의 원수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라는 고백이 나오느냐 하는 것이죠. 이 문제는 이렇게 풀면 됩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도 악이 된다 하는 거죠. 원래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기준점을 하나님께 놓고 보면 이 악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는 이 많은 악한 행동과 일들은 그런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악이라고 하는 말은 종종 죄를 악으로 가리키기도 하고, 그리고 악을 악으로 가리키기도 하고, 마음에 있는 죄의 결과로서의 악을 의미할 때도 악을 사용하기도 해요. 이렇게 성경에서 나오는 악의 사용은 아주 현상학적인,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나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악하게 살 때에 찾아가셔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자신의 속성을 따라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셔요.
그러니까 어제, 그리고 그저께 이틀에 걸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그 분이 맺으시는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했던 것처럼 같은 이치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배울 수밖에 없는 거죠.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둘이 있을 때 한 사람은 은혜 언약 안에서 선하게 삶으로써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거에 비해서 악하게 사는 그 사람은 바로 그 옆에 있으면서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악인이 당하는 악은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게 되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악이에요. 그에게는 하나님의 선한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 그 자체가 악이 되는 것이죠.
적합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바위에 자신의 몸을 세게 부딪친다고 생각해 봅시다. 살짝 부딪힐 때는 살짝 아프지만 힘차게 달려가 암벽을 향해서 머리를 앞세우고 돌격을 한다면서 머리가 부딪치면서 피가 나고 온 몸에 흐르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의 큰 섭리와 경륜 속에서 그들이 행한 것을 갚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악을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셈이 되도록 그렇게 당신 자신의 속성의 효과를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복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는 것처럼 악을 행하고 주님께 반역하는 사람도 현저히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에요. 다만 이럴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아는 것이라고 단정할 때에도 그 앎의 방식이 문제가 되는 거죠. 즉, 악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하고 있어요. 왜? 그가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시고 그가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그 속성은 끊임없는 고통의 방식으로 그 사람의 외적인 생활과 내적인 심령 속에서 경험 되요. 그러나 그가 그런 괴롭힘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그렇게 따지면 악인으로서 하나님의 징벌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많이 알았다는 결론이 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에 시행되는 방식을 알되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거스르는 악인, 시인에게 고통을 주는 이 악인을 당신 자신의 성품을 따라서 다스리실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악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절대적인 선은 하나님께 좋은 것이고 상대적인 선은 나에게 좋은 것이에요. 나의 마음과 영혼의 경향성이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이죠. 그러나 이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이 나에게 나쁜 것일 수 있고, 나에게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는 나쁜 것일 수 있는 것이죠. 성화의 삶은 이 둘을 끊임없이 근접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죠. 많이 성화된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자기도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자신은 좋아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다윗을 끊임없이 구박하고 고통을 가하는데 그는 그것이 좋아서 그 일을 하는데 하나님은 매우 싫은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향하여 당신 자신의 질서대로 사람을 살기를 원하셔서 당신 자신의 속성을 발현하시는 것이죠. 그것이 악인에게는 악이 되는 거죠. 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악으로 나의 원수들을 멸해달라는 이 다윗의 기도는 전혀 모순이 없는 기도로 해석이 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집요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미워했고,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마지막에 자신들에게 생명주시기 위해 오신 그분을 십자가에 죽여서 그 생명을 빼앗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어요?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악하셨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악하실 수 있느냐,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는가,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나쁜 것이었어요. 그럼 우리는 묻죠? 그분이 누구를 속이셨느냐, 누구의 물건을 빼앗으셨냐, 누구를 죽이셨느냐, 그들의 눈에는 반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바라바라는 흉악한 강도가 훨씬 더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럴 수 있는 거죠. 칼 한 자루, 그리고 창 한개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이 세상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자체가 하나님을 거슬러 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찌르는 칼이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신 이유는 그분이 진리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집요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미워했던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 모든 성품의 빛을 우리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담지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이 세상의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면서 그들은 이제껏 까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죠. 그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악하게 보였던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이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라고 말하는 거죠. 마지막 기도가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거든요. 여기에서 성실하심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성품의 발현이에요. 그 신실하심은 결국은 진실하심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진실하심은 하나님, 당신 자신은 당신 자신을 향하여 모순이 없으신 거죠. 우리는 모순이 스스로 우리 안에 모순을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분명히 올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힘든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꺾어서 스스로 모순되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는 거죠. 그런 진실하심으로부터 신실하심이 나오는 거죠. 이 신실하심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 언약의 충실하시는 그 속성이 신실하심이에요. 그런데 신실하심 뒤에는 진실하심이 있고 이 진실하심 그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에요. 변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해서 그 불변성에 기초해서 진실성, 진실성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의 핵심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거죠. 바닷가에서 파도가 수많은 종류의 파도가 암벽을 때려요. 바람이 불지 않고 조용할 때는 찰싹거리는 파도가, 풍랑이 일고 바람이 불 때에는 집채만 한 밀려오면서 암벽을 때려요. 근데 어떤 파도든지 간에 때리면 언제나 파도는 거기에 부딪쳐서 하얀 거품을 내며 흩어지는 것처럼 언제나 거기 있어서 파도의 크기는 각기 달라도 언제나 똑같은 방향으로 일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불변하신 성품을 따라서 그렇게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런 변함이 없는 성실하심으로 ‘저희는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이고 간구예요. 그래서 악한 자는 잠시 번성하는 것 같으나 그러나 한낮의 벤 풀과 같이 속히 마르게 될 것이다 라는 신앙의 고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없는 잠시 시간의 번영을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주님께 붙어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주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거죠.
그래서 이 시인이 악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항상 묵상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 묵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곤란과 어려움이 닥칠 때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의 도움이 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깊이 묵상하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하면서 그러면서 주님 주권 아래 복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라고 할 때 결국은 주님의 속성을 의지하면서 사는 거예요. 주님의 속성을 또한 주님의 성품을 의지하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의 의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