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신 하나님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시 54:7).
이제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셨던 일들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셨습니다...당하고 있는 환난은 지금만 만난 환난이 아니라 예전에도 많이 만난 환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환난을 예전에도 많이 만났는데 예전에 만났을 때에도 똑같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했더니 하나님이 자기를 그 큰 환난에서 건져 내셨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 그렇게 건져 내셨으면 지금도 그렇게 건져 내실 것이요, 앞으로도 그렇게 건져 내시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오늘은 도와주었다가 내일은 마음이 변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시종이 여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만약에 지난날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또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앞으로도 나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그런 자연스런 확신이에요. 그것이 결국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죠. 인간은 변덕이 심하고 자기의 말을 스스로 어길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셔서 그래서 이런 환난 속에서 간구하면 예전에도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셨다 이 얘기죠. 지금은 이 모든 것에서 자기가 완전히 구출 받은 상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 일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회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오늘 자신이 되새겨 보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 주시고 그리고 도와주신 사건들을 통해서 주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의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속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고 시종이 여일하셔서 언제나 당신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에서 이 시인이 위로를 받고 있는 거죠. 그래서 자기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그것이 그 한 사건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보편적인 성품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내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겨우 움직이셨다 라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내 기도는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이 원래 그러신 분이시기 때문에 언약 백성인 나를 건져 주셨다..그래서 기도는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의 그러하심이 나의 도움이 되셨다...그래서 이런 환난을 겪고 나면 기도에 대해서 배우는 것 보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거죠.
두 번째는 똑같이 하나님이 내 원수가 보응을 받는 것을 나로 하여금 보게 하셨습니다... 이거죠. 똑같은 거죠. 왜냐면 하나님이 나를 그 환난 가운데 건져 주신 것과 원수가 보응을 받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선한 질서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나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를 어긋나도록 살아가는 나를, 선한 질서에 어긋나도록 살아가는 나를 하나님께서, 선한 질서에 어긋나도록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행한 일에 보응을 받게 하셨는데 그 사건 틀리고, 나를 건져 주신 사건 틀리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 때문에 고통 받는 나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선하신 성품으로 그들 가운데 행하시니까 건져냄을 받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봅시다.
(예화) 우리가 일본에게 점령을 당해서 36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었어요. 해방이 되니까 압박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기쁨의 날이었지만 압제하고 있던 일본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날이죠. 그래서 그 때 해방이 되던 바로 그 때에 일본 사람이 쓴 그 글을 읽어 봤는데 그 때 항복을 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 때에 느꼈던, 한국에 있던 일본 사람들의 공포는 굉장한 것이었다고 해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린치를 당하고 그랬죠.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이 나와요.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내가 너희를 건지겠고, 여호와의 날에 내가 그들을 심판할 것이며..그런 표현들이 나와요. 그 여호와의 날이 뭐냐면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날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말 성경에는 권고하시는 날에..그렇게 나오는데 그 권고가 잘 하라고 타이르는게 아니라 아주 옛날 말로 방문하는..그런 뜻이에요. 히브리 말로 파카드라고 하는데,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평상시에선 하나님이 저 하늘 높이 계신데 그 여호와의 날에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신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나요. 그래서 그 이전에 구김살이 있는 것처럼 보이던 모든 질서들을 하나님이 바로 잡으시는 거죠. 이 때에 의롭게 하나님을 바라면서도 억울하게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자유와 구원이 주어지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질서 속에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던 사람들에게는 말하자면 종말이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큰 환난을 당하게 돼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굳게 붙드셔서 주님 앞에 다시 살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시인이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하게 돼요. 예전에 그 신실하심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순풍에 돛 단 것처럼 그렇게 인생을 항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항상 만족스러운 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신앙은 그것을 바라보는 거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나를 통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 그것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이 길을 가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