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구할 때 나타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시 55:1).
시편의 분류상 이 55편도 탄원시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탄원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시이다. 그런 뜻입니다.
1절에서 제일 먼저 이 다윗이 기도 속에서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소원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옵소서..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기도가 어떻게 보면 좀 그 이해가 잘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신데 어디 계신들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리가 있겠으며 또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숨으실 수가 있는가 라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 없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어디에 인간이 피한들 하나님 앞에 안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어디에 간들 하나님 당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 순종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뵈옵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당신을 만나는 것이니 인간이 어디에 무엇을 하든지 당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그렇게 고백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도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구할 때에 숨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본 설명이라기보다는 경험적으로 본 기도죠. 어디든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피할 데가 없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이 시인의 기도를 아주 간절한 기도를 아주 풍부한 임재 속에서 들으시는 것 같은 경험을 주실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주님을 풍성하게 교제하고 교통을 누리는 때와 그렇지 못한 때로 나뉘어지는 것이죠. 그것을 이제 시인의 관점에서 표현을 하자면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내가 간구하여도 주님은 숨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충분히 이제 그런 표현을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신자에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로부터 너무 멀리 계시다는 느낌, 어떤 때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자 얼굴을 보이시지 않는다는 그런 경험은 왜 생겨나게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은 둘로 설명할 수 있어요.
첫째는 기도 속에서 오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느낌은 인간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몇 가지 들자면, 우선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해도 당신의 친밀함을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죠.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죄가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죄의 힘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이 축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고 그리고 불순종 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인간에게 주신 그 은혜를 거두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것은 죄의 힘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엄밀하게 말하면 죄의 힘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물론 죄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죄의 힘을 보여준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거두시는 것이에요. 그걸 현상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죄의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가보자면 하나님께서 그 인간에게 주신 그 은혜를 거두시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죄와 은혜의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죄와 은혜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선택의 갈등, 그리고 그 이후에 오는 역사하는 죄의 크기와 그 다음에 우리 안에서 그 죄와의 싸움에서 져서 사라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역설적으로 죄의 힘이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소멸되는 것처럼 현상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설명할 때는 인간의 속에 있는 죄의 크기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인간이 선택하는 의지와 관련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보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이 그만큼 은혜를 거두시는 거죠. 그렇게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설명할 때에는 이해하기 쉽게 우리 안의 죄와 은혜가 싸우고 그리고 죄가 강해질 때에 그 때에 은혜는 소멸되게 됩니다..이런 식으로 우리들이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설명이 실제적으로 이런 그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련해서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사유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쉽게 다가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 아닐까요?
(예화)우리들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라고 할 때 사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이 아니죠.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 자신이 도니까..그런데 우리들이 그 설명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우리 일상 속에서 아이고 해가 떴네..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과학 선생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죠. 어? 해가 떴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죠. 천문학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어? 별이 나타났네? 나타나긴 뭐가 나타나..원래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니까 보이고 훤해지니까 안 보일 뿐이지 별이 나타나긴 뭘 나타나요..그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틀린 것이 아니죠. 그렇지만 이제 보다 더 엄밀하게 설명을 하자면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이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이런 교통의 은택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뭐냐면 이제 비록 죄를 자기가 선택하진 않았어도 무지할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죠. 요즘 말로 하면 삽질한다고 하잖아요? 난 그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사람들 쓰는 말 가만히 들어 보니까 엄한 일 하고 있을 때 삽질 한다고 그러더라구..무지하게 되면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삽질 하듯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인데 삽질 하듯이 목숨을 걸고서 계속 하는 거죠. 거기에서 하나님 만날 수 없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기초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리고 저렇게 예배하면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아니죠.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진리의 요소를 제쳐놓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감정으로만 예배했던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주님을 만날 수 없었고 한쪽에서는 소위 얘기하는 의문에 적힌 대로 예배하고 영으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도 주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결국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령은 있었지만 진리가 없는 예배를, 예루살렘 사람들은 진리는 있었지만 성령이 없는 예배를, 이렇게 드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하나가 올바르지 않으면 나머지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광은 있었겠지만 그게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의문에 예배를 드렸지만 그것이 어찌 진리라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이나 저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이나 주님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죠. 무지 가운데 있을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때로는 하나님이 이 둘다의 요소들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가 있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아니겠어요?
(예화)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안 만나 주시는 것은 이해가 되죠? 불순종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기도 속에 없어요,. 그래서 기도하러 나오지만 긴밀한 기도가 안 돼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죄를 버렸어요. 그리고 회개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기도의 세계가 복구되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기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물론 이제 거기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오랫동안 커다란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어느 날 한 순간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해서 기도의 문이 확 열리고 기도의 은혜의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결국 무엇 때문이겠어요? 여러 가지로 많이 설명할 수 있겠지만 두 가지 정도의 설명이 가능해요. 그게 뭐냐면 인간이 부분적으로 회개했어도 그 한 번의 회개로 마음의 성향으로써 남아있던 죄에 대한 사랑, 악한 의지 이런 것들이 상처는 입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뿌리 채 뽑혀 나가는 것은 아니에요. 많은 얘기가 필요합니다만 대충 그래요. 그러니까 마음 안에 있는 그런 성향은 사실은 의지 않에 있는 성향이거든요.. 그러면 그러한 의지는 악한 의지에요.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비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지가 선한 의지가 아닐 때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회개하고 단정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그와 교통을 미루시게 되는 것이죠. 많은 얘기가 필요합니다. 의지와 관련해서는? 그렇고..
그 다음에 이런 모든 것들도 해당이 안 되는데도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당신의 교통을 상당한 시간 동안 미루실 적이 있어요. 그래서 많이 부르짖고 기도하지만 어떠한 응답도 없는,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때와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반영하지 못 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기도 속에 대하심으로써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과연 옳은지를 스스로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시는 거죠. 대표적인게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성령께서 막으시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마게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그리고 유럽으로 복음의 물줄기가 옮겨지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그런 거예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심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계시고 우리를 훈련하셔요. 그러나 어떤 경우도 이것이,, 이럻게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우리에 대한 보복이나 복수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죠.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당신의 공정한 성품을 알게 하시기 위한 훌륭한 훈련 방법이에요. 만약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 의지의 선악의 여부, 하나님의 섭리과 경륜, 이런 것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우리들이 이렇게 풍부한 교통을 누릴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게 되죠.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깨뜨려져서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한동안 그 사실을 굳게 깨닫고 붙들게 되죠. 기도가 안 돼 보고 나서야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간구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게 되죠. 그래서 유혹이 올 때 그것을 다시 잃어버리고 그 옛날처럼 고통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라는 마음이 죄를 버리고 선을 선택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훌륭한 우리를 향한 자기 반성의 촉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우리들이 자녀들 훈련 시킬 때도 따끔하게 야단친 다음에는 금방 용서해 주지 않죠. 방에 혼자서 울고 있든지 말든지 문을 확 쿵 닫고 내버려 두잖아요. 그게 왜 그래요? 야단은 맞았지만 네가 혼자 생각하면서 각성을 해라..그래서 스스로를 완성하게 만들어 주는 거죠. 하나님도 우리를 얼마든지 그렇게 다루시는 것이죠.
그래서 숨는다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데 시인이 다급하게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간청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자기가 매우 특별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특별한 상황이라는 것이 뭐냐? 내일 아침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