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피난처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다윗이 왕이 되기를 꿈꾸었던 야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한 언약 백성에 불과하였는데 하나님이 그를 쓰시겠다고 불러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기름을 부어 주시려면 왕이 되도록 모든 게 다 준비가 끝난 다음에 뭐 왕의 보좌에 나아가기 직전에 기름을 부어주시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지 그에게 진작 기름을 부어주시고, 그리고 상당한 시간동안 이제 사울에게서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일평생 세 번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기름부음은 그에 있어서 일생 잊혀지지 않는 강력한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강력한 기름부음을 이 다윗에게 허락한 이례로 그는 내적으로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남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하고 나서 사울의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또 이제 다윗이 이 사울을 피하기 위해 굴에 숨었던 때에 그 경험을 노래하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시입니다. 그는 누구에게 호소하거나 어떻게 정치적인 수를 쓰거나 할 수 있는 힘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울이 치면 맞고 추격을 하면 도망을 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굴에 숨어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 가장 고통스러운 그 은신의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 비는 기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이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두 번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이 다윗의 처지가 얼마나 외롭고 비참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든지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놓이게 되는 고통과 고난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든지 혹은 자기의 죄와 잘못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통이든지 간에 그런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께 피합니다. 그런 가장 고통스러운 때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의 기회로 삼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죠.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극심한 고난의 때에 그 고난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그렇게 깊은 어두움 속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타락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통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소유함에 있어서는 타락하기 전에 인간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하나님은 그 타락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인간에게 알릴 수 없었을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비록 타락한 이후에 인간이 타락하기 전 인간과는 비교되지 않는 불리한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신 처음 좋은 것들을 많이 상실하였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죄를 인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 죄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는 그러한 심정이 되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능가하는 정도로 이후의 인간들에게 갖게 하심으로써 아담도 몰랐던 비밀,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지성과 올곧은 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덜 의지할 가능성이 많았지만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 때문에,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마음이 녹아내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앞에 올리는 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킨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과 인간들이 당신을 의지하며 따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주님의 사람으로 크게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를 사면을 두루 살펴도 아무 돕는 자가 없게 만드시고 불같이 치열한 시련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정신과 마음 그리고 그 의존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의존의 마음 때문에 용상에 올랐으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 그분을 섬기는 한 종일뿐이요. 또 자신은 그 모든 권세를 지니고 있으나,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 곤고하고 궁핍한 하나님의 한 자녀일 뿐이라는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재앙 아래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굴 밖에는 치열한 사울의 군사들의 추격이 있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에 에워 쌓여 있습니다. 그 큰 재앙을 지나면서 그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괴로운 일과 고통, 시련과 고난, 그것이 자신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이든지 혹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품 안에서만 우리가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하지 아니하시고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또 남이 보기에는 평탄을 가더라도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고통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셔서 그로 하여금 고난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 한 분 만을 온전히 갈망하고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시고 또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셔도 이 세상의 근본이 괴로우며 고통일 뿐이라는 고백 속에서 그 모든 인생사에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고 바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폭풍과 같은 추위가 불어오고 얼음을 얼리는 것 같은 사풍이 몰아칠 때 그 역경을 인해서 이 세상이 자신의 고향이 아님을 알아 하나님을 의지하시게 하시는가 하면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기도할 때 형통한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어두운 이 세상에 여전히 살도록 부르시고, 그리고 이 속에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게끔 자기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렇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터전인 이 시간과 공간, 이 세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 이 모든 섭리는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을 전심으로 갈망하고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렇게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심에 있어서 우리의 인생의 일어나는 모든 좋고, 혹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재앙이 지나기 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 지 이 시인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고,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은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고 거기에 도달할 것은 확신하고 있는데 거기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이 시인에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사를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지 않는 이유는 만약 그 미래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속에서 우리는 말씀을 붙드는 믿음을 갖게 되고,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의존의 심정을 갖게 되고,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혼자갈 수 없는 이 길이기 때문에 주님의 손을 붙들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오늘 이 시인은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피하겠습니다. 주님은 종종 독수리로 묘사되었습니다. 깊음 있게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영광은 그의 날개에 있습니다. 그 큰 날개로 이 시인을 덮어 눈으로는 원수들이 찾을 수 없게 하고, 그리고 발견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공격하는 것으로는 이 독수리의 보호를 받고 보복을 받음으로 이 시인이 연약하나 그들의 강함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날개 그늘 아래라고 하는 것은 보호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품 가까이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하여 결국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재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고난의 때를 이겼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소리치든지 혹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자기를 향한 수많은 송사와 그리고 정죄의 외침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지라도 그는 그 모든 것들 중 아무것도 부인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것들을 안고 하나님을 의존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내가 피하겠습니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일들은 기쁘고 행복한 거 같아도 이미 그 안에 슬픔이 내재되어 있고, 슬프고 쓰라린 거 같아도 사실은 그 안에 이미 기쁨과 행복이 담겨있습니다. 신앙은 이 표상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인생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뒤에 그 모든 것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순경이든지 역경이든지 그 모든 것을 인하여 주님께로 피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중 어느 때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없는 줄 알아서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마음의 전부가 되도록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좋고, 나쁘고, 크고, 작은 모든 사건과 기회들을 그분의 성품을 알고 그분의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날개의 그늘 아래 지키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