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2-13).
이제 아무래도 이 시편 속에는 두 개의 시제가 섞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공부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논리적인 에세이가 아니기 때문에 시제가 섞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때의 상황을 현재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 고난이 모두 끝난 다음의 회고를 또 현재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뭐 원수들에게 압재를 당하면서 막 도망을 다닐 때에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뭐 칼이 날라오고 화살이 날라 오는데 시를 쓰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뭐 상황이 끝나고 나서 좀 마음을 돌릴 만하면 시를 썼던지 아니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어떤 이유에서 과거를 회고할 상황이 되었을 때에 그 회고와 함께 또 지금 현재 자신의 심경을 또 다른 현재의 시제로 이렇게 사용하지 않았겠어요?
그것 말고도 이것이 헛갈리게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직접 여기에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보면 갑자기 하나님의 대사가 나와요. ‘나 여호와가 이러이러 하노라’ 이렇게 이런 것들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을 하고 그렇게 직접 화법으로 인용했을 수도 있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은 깊은 하나님과의 교재 속에서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그 음성을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시인은 특히 다윗은 시인인 동시에 선지자였거든요.
선지자에게 계시를 전달하는 두 가지 양식이 있었는데 보여주시는 것과 들려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보여주시는 것이 초기의 형태이고 그리고 들려주시는 것이 후기의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경에서 선지자를 선지자라고 되어 있고 또 선견자라고도 나와요. 히브리말로 나비라는 사람과 로에라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나비는 여러 가지 학설이 많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소명감에 끓는 것을, 끓는 상태를 가리키고 로에는 라하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오는 분사형태인데 사물을 이렇게 본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말씀에 이렇게 자극이 되는 그런 사람이죠. 그런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방식으로 말씀하신 게 이 시편 속에 이렇게 뭉텅뭉텅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 시제가 과거인데 현재로 쓰고, 현재인데 현재로 쓰고, 또 하나님이 과거에 주신 그 말씀인데 현재로 쓰고 이렇게 하면서 시제가 막 들쑥날쑥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잘 보면서 선후관계를 설명을 하면서 이제 시편을 읽어야만 되는 거거든요. 전문가들에게 속한 거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12절의 상황은 아마도 그 원수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승리한 다음의 이제 고백이라고 여겨져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감사제를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 즉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다’. 무슨 뜻이냐면 ‘주께서 나를 이러이러한 원수의 악재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신다면 내가 주께 이렇게 이렇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서원이겠죠. 그런 서원을 원수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압박을 받을 때에 했으니 그러니까 이제는 그렇게 성취가 되었은 즉 내가 주님 앞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라는 거죠.
신앙은 기억이에요, 기억.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늘 주시는 말씀을 잊지 말라,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외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잊지 말라 말씀하시죠. ‘너희가 애굽의 종 되었던 땅에서 하나님이 너희를 건져내시고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또한 너희를 업어 그렇게 가나안 땅으로 날랐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게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이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메세지였다면 오늘 우리를 향한 메세지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내가 너희를 건졌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통해 너희에게 베풀어진 이 구속의 사실을 잊지 말아라, 그 은혜를 잊지 말아라,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 나의 아들의 피로 샀노라’ 이런 메세지가 신앙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신앙은 그것을 끊임없이 회고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나같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회고하는 거예요. 그런 회고의 이유는 뭐냐 하면 오늘 감사의 삶을 살기를 위함이에요. 그러니까 어제 밤에도 이제 좀 내일 가서 설교할 거를 원고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오늘날은 모든 기독교인으로 신자로서의 모든 거룩한 생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이 진실한 말하자면 삶, 이것은 한 가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거거든요. 그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기억함으로써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근데 기억할 사건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흉내 낸다고는 하지만 그거는 마치 사과나무에다가 배 매달아 놓은 거하고 똑같은 거지, 그게 제 나무에서 나온 겁니까? 그게 문제인 거예요, 그게. 그런데도 조국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이렇게 그 회고할 것을 만들어 줘야 되는데 그래서 그 회고의 사건을 회상하면 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 큰 은혜를 내가 어떻게 감당을 할까, 이게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데 근데 회고할게 없는 거예요. 회고할게 없는 거예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그 출애굽의 사건을 회고하게 하신 이유가 그렇게 회고하게 하심으로써 살게 하시는 삶이 무엇이었어요. 그 율법을 따르는 삶이었거든요. 근데 못하는 거예요. 회고할 삶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무슨 뭐, 우리 교회는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쉼이 있습니다. 무슨 스포츠 교회, 뭐 무슨 교회 이게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십자가의 큰 은혜에 대한 기억, 이것을 토대로 모든 감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진리 앞에서 꺾어지게 만들고, 그리고 고난과 시련을 모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렇게 만들어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이제 감사제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감사제를 드리는 게 뭐냐 하면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원수들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고비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셨다 그런 이야기죠. 그렇게 건져주신 이유와 경륜을 알게 되는 거죠. 이게 바로 과거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자기가 내린 결론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의 빛을 다니게 하시려고 원수가 자기를 삼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뜻이에요. 여기에서 실족한다는 것은 원수의 원대로 떨어진다는 거거든요.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
그 생명의 빛, 여기에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이 빛은 결국은 뭐냐 하면 밝은 거잖아요, 빛이. 빛은 뭐든 밝은 것이잖아요. 그 밝은 빛은 성경에서 빛이라고 하면 빛이 많은 게 아니라 둘밖에 없어요. 물리적인 빛과 영적인 빛 둘 중의 하나예요. 물리적인 빛은 훤하게 비취는 대낮같은 빛이죠. 물리적인 빛이에요, 그게. 영적인 빛은 뭐예요? 모든 영적인 빛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빛이 바로 영광이에요. 그 영광의 빛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췸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깨닫고 그리고 그 찬란한 진리의 빛으로 살게 되는데, 그거는 또한 생명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생명의 빛이기도 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생명의 빛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에요. 진리가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에 잇닿은 그런 충만한 빛이 있으니 그것이 곧 영생의 빛이란 말이죠.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비취는 진리의 빛, 이것이 바로 광채예요. 이 빛은 공간에 비취는 빛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비취는 빛이요, 특별히 인간의 지성에 비취는 빛이에요. 인간의 지성에 비취는 빛이에요.
근데 이제 한 영국에서는 18C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에서는 19C 중엽에 일어나고 우리나라가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그래봐야 20C 중반정도라고 볼 수 있지 않아요? 뭐, 일제시대 때 산업들이 일어났지만, 사회 전체에 파장을 미치는 어떤 산업이 되기까지에는 그 정도의 세월이 걸리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미국이나 영국의 역사를 이렇게 더듬어 보면 이게 결국은 교회가 약화되는데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만 이 문제와 관련시켜서 이야기하면 미국을 기준으로 1800년대 중엽, 19C 중엽이죠. 찰스 피니 때인데 그 이후로부터 교회에 설교의 큰 변화가 일어나요. 그게 뭐냐 하면 논리적이었거든요, 지금까지 설교가. 장중하게, 물론 그 당시에도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이 있고 못하는 목사님이 있겠지만 어느 교회에 가든지 설교가 이렇게 논리적이었어요. 그거를 2차 대각성 운동 후에 던져버리게 됩니다. 이게 이제 중대한 교회의 변화예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뭐 지금 이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가 없고 그렇게 그럴 이유가 있었어요. 어쨌든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대중화를 하고자 하는 유혹들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산업화 자체가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니까 그러니까 이제 물건을 팔아도 대중화 시켜야지 팔 수 있는 거죠. 그러잖아요? 두통 그러면 무슨 약 그러고 머리에 툭 떠오르는 이게 대중화 되는, 똑같은 많은 다른 많은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대중화거든요. 대중화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간단하고 쉬워야 되는 거죠. 그래서 그걸 던져버리고 그 다음서부터는 이 장중한 진리의 구조를 벗어내 던져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 만난 경험, 그 다음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그 다음에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자극, 이런 것들이 설교 속에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근데 그러면서 그것이 이제 이 19C 에는 천천히 계속 되다가, 20C 들어오면서 무디 같은 사람에 의해서 아주 급속도록 빨리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후에 그런 설교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라고 하는 것을 잘 몰랐죠. 그렇게 전개가 되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되냐 하면 사람이 미우면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도 보기 싫잖아요. 그러니까 20C 이후로는 이제, 20C 중반을 넘어 1차 대전을 치루고, 2차 대전을 치루면서 이제는 객관적인 진리 같은 것들은 없다 그런 시대가, 이성주의 시대가 종말을 구하거든요, 대체로. 그게 주류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논리라고 하는 것을 객관적인 진리를 입증하는데 쓰는 훌륭한 기구이지 어차피 있지도 않은 객관적인 진리 자체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논리적으로 그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논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소위 메타담론이라고 해서 우리 현실에서 이렇게 늘 볼 수 있는 이러한 이야기들 이면에 있는 그러한 더 높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걸 거부해요. 그 자체가 우리밖에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인간의 사상들이기 때문에 그걸 거부하는 거죠. 그러니까 논리가 필요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냥 간증이나 하고 그 다음에 그저 슬슬슬 흘러가는 이야기나 하고 하면서 이게 흘러내려 오는 풍조들이 나오는 거예요. 미국의 방송한번 기회 닿으면 틀어서 TV 방송보세요. 그거예요. 강단에 서서 설교하지도 않아요. 그냥 주머니에다가 손 꽂아놓고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러면서 성경하나 들고 떠드는 거예요. 이런 식의 논리를 집어 던지니까 어떤 사람이 논리가 아닌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의 감동을 받는다든지 한다고 하더라도 이게 진리에 기초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어제도 어떤 교수님을 만났는데 그래요. 자기 가족들하고, 자기 친척하고 집에 가서 잠깐 열린 교회 인터넷을 쳐다봤는데 그러더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설교다. ‘본문 말씀은~’ 그렇게 안한다는 거죠. ‘요즘 세상은~’ 이렇게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러고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진리를 전달하려면 논리적이어야 되요. 왜냐하면 그 논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진리를 전달하는 훌륭한 툴(tool)이에요. 나머지가 보조적인 수단으로 쓰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 없이는 사상 형성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자꾸 벗어버리라고 그러는 거거든요. 벗어버리고 그 다음에 이야기처럼 설교를 해 달라는 거거든요. 가끔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늘 그런 설교를 하면 마치 벽돌을 쌓지 않고 갖다가 확 쏟아놓은 것 같은 신앙이 되는 거죠.
오늘 여기에 보면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그렇게 원수를 만나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진리가 얼마나 귀한 줄 알고 그 앞에 살게 하시려고 나를 다니게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진리의 빛 앞에 사는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이 시인이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