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비웃으시는 하나님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시 59:6-8).
Ⅰ. 본문해설
1.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성경에 이 개는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개는 무법하고 무도한 그러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많이 표현합니다. 예를 들자면 시편 22편의 고난의 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고하는 가운데 ‘개들이 나를 에워쌓나이다.’ 라고 시인이 고백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당신을 에워싸던 수많은 대적 자들 특별히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그분의 고난의 주역이 되었던 원인이 되었던 많은 무도한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스데반은 불법한 자들의 무법한 행실이라고 묘사했고, 사도바울은 복음진리가 선포되는데도 그것을 끊임없이 대적하는 완고한 유대인들을 가리켜서 개들이요, 행악 자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 개처럼 울면서 성으로 두루 다닌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개를 아주 사랑스럽게 기르는 애완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집을 나간 고양이들, 집에서 버림받은 동물들로서 어떻게 보면 야생 화된 동물들이 많잖아요. 그런 개들처럼 그렇게 울면서 성으로 두루 다닌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인을 대적하고 고통을 주는 원수들이 정말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마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가슴에 법이 많아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죠. 원수가 미워도 감히 그를 헤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고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 어떤 욕망이 넘쳐도 선을 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어요. 이런 하나님을 향한 공경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가슴속에는 무법이에요. 그래서 신약의 정신에서 보면 사랑 없음이 모든 무법의 근원이에요. 사랑은 수많은 법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하게 되요.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의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싫어할 텐데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좋아할 거야.’ 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찾아내어서 그것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법과 질서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그게 사랑이에요. 이해되시죠? 틀림없는 이야기잖아요. 만약에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 마음에 있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런 것이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무법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수많은 하나님의 질서들이 가슴속에서 아주 아름답게 와 닿아요. 그리고 그 법과 질서를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나는 확신하건데 만약 한사람이 진정으로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자연을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친환경주의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니까 말이죠.
(예화) 어렸을 때의 일인데 주일학교 때 애들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로 기억 되요. 교회에 있었는데 애들이 ‘야, 우리 주일예배 끝나고 새 잡으러 가자.’ 애들이 새총을 다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새를 잡으러 가려고하자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그 소리를 듣고 그래요. 저를 부르더니 ‘애야, 나는 새를 잡으러 안 갔으면 좋겠다.’ ‘왜요?’ ‘걔네들도 하나님이 살라고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을 잡아서 무엇 하려고 주일날 그 새를 죽이러 가니?’ 그분이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교회집사님이었어요. 그런 감각들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설득되어서 포기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질서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 질서가 너무 좋아 자연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교회에까지 그리고 내 영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수없이 아름다운 질서들이 떠오르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질서들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질서들 안에 자기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고 좋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사랑의 속성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 모든 하나님 안에 있는 질서들이 예쁘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에요. 그리고 많은 자기에게 수많은 구속을 주는 것이에요. 그것을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자신이 남편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 자기가 수고하고 애를 쓰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겠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수고하고 애쓸 사람이 있다는 것 때문에…….
(예화)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에 살던 집이 철거되어 대토를 받아 이사를 갔어요. 여덟 평씩 잘라서 주고 알아서 집을 짓고 살라고 했으니까 뭐 형편없지요. 그런 빈민촌에서 사는데 그 길 건너편에 그 집은 여덟 평을 주었는데 너무 돈이 없어서 블록으로 지붕을 씌우는 그런 집도 못 짓고 텐트를 치고 사는 집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에 사는 아줌마의 얼굴이 어린 나이에도 보면 저 아줌마는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예쁘장해요. 그런데 며칠에 한 번씩 아침에 일어나서 남자들이 입는 옷을 가지고 와서 수없이 그렇게 먼지도 없는데 터는 것이에요.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아이고 저것도 자기 서방이 있다고 과시를 하는 것 좀 봐라.’ 고해요. 어린나이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까 이 남자가 택시 운전하는 사람인데 그 아줌마가 첩이에요. 택시 운전하는 사람이 그런 능력이 어떻게 있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그 동네에서 사마리아여자 비슷한 것이에요. 그렇게 며칠 동안 남편이 본처의 집에 가고 애들하고 있다가 며칠에 한 번씩 거기에 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옷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먼지도 나지 않는 옷을 털면서 나도 남편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죠.
그게 어려서는 그 의미를 몰랐는데 나이가 드니까 참 이해가 되요. 벌써 새카맣게 흑백사진처럼 지나간 지금으로부터 사십년도 넘는 세월의 이야기지만 그 여성의 얼굴이 아릿하게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려요. 아, 얼마나 사는 게 그렇게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으면 남편이 오면 그렇게 온 동네가 보도록 아주 큰소리로 그 옷을 때리면서 그렇게 옷을 털었을까하는 생각을 해요. 바로 그런 것이에요. 만약에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서 의무를 져야하는 그 의무라는 것이 결국은 법에 대한 복종이잖아요? 어미로서 어미할일을 한다고 하는 법에 복종하는 것이 의무잖아요. 그게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한 남자에게 소속되어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먼지도 나지 않는 그 옷을 그렇게 막대기로 때리면서 털었겠어요. 마음이 애잔해요. 그렇게 사랑은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에 매이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변함없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아무리 예수를 많이 믿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것은 날마다 위협받는 것이에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마음 지킴이라는 책속에서 이야기하기를 성도의 별명은 사랑지킴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끊임없이 원수가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 누구도 그것은 신앙의 연조가 깊기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게 바로 사랑의 법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어요. 그래서 무법하고 불법하게 행하면서 개처럼 성을 두루 다니는 것이에요.
2. 그 입에는 악을 토하고 입술에는 칼이 있어
그 입에는 악을 토하고 입술에는 칼이 있는 것이에요. 그 입으로 악을 토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죠. 베드로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이것은 하나의 습관적인 악을 지칭하는 것이에요. 베드로서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근본적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비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죄를 짓는 것을 가리켜서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지요. 돼지가 그 씻었던 곳에 다시 눕고 개가 토하였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성경에서 그리는 개의 특징이 무법하기 때문에 자각하는 마음이 없이 자기가 토한 것을 먹고 그 먹은 것을 토하고 하는 것을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여기서 묘사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의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말의 실수가 있을 수 있지요.
제가 그런 설교를 한 십여 년 전에 한 적이 있지요. 우리가 은혜의 물에 성화될 때에 마지막에 가장 늦게 은혜의 물에 풍덩 들어가는 것이 어디라고요?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어디라고요? 입술이에요. 입술……. 마지막까지 성화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입술이에요. 온 몸을 다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것이 입술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말의 실수나 허물로 인해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수가 있어요. 악을 토하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그리는 이것은 뭐냐 하면 끊임없이 반복해서 토해내는 것이에요. 끊임없이 악을 토하고 다시 또 먹고 먹은 것을 다시 토하고 또 먹고 하는 반복적인 일들을 계속하는 것이니까 이 안에 더러움이라고 하는 감각의 기준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게 악인의 특징이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입술에는 칼이 있는데 이것은 연약함으로 어쩌다가 한번 쏟아져 나와서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후회하는 그런 종류의 칼이 아니라 달고 다니는 칼이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며 살아요. 그게 얼마나 비참한 삶이겠어요. 오히려 이 개 같은 인간들에게 악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그리고 주님의 위로가 있어요. 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들의 가까이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렇게 개처럼 두루 울며 다니고 악을 토한 것을 다시 또 먹고 그 입에 칼을 달고 다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런 위로, 이런 긍휼, 이런 사랑은 없어요. 머릿속으로 생각할 뿐이지 자신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죠.
그렇게 오래 믿으면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갈가리 찢겨지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기업이 얼마나 큰데 왜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고 주님의 구원을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아프게 할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아요. 그게 보다 완전하신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하고 사람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찬양)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렇게 고난가운데 주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예수는 내 친구 나를 버리질 않네.’ 그런 고백을 하고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 길이요, 그리고 나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게 해주지만 본인에게는 그게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그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이 슬퍼하시는 그 모습, 그리고 마음 아파하시는 그 탄식, 그는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느끼는데 그 영혼에 햇볕이 들 수 있겠어요?
3.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열방을 비웃으시리로다
그래서 오늘 시인이 말하기를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열방을 비웃으시리로다.’ 그들은 악으로 선을 이기는 것 같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가로막는 것 같고 불법으로 사랑을, 행악으로 진리를 차단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이는 도구가 되고 그렇게 도구가 되었던 그들은 하나님께 싫어버린바 되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이 시인은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난 받으면서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죠.
Ⅱ. 사랑하고 섬겨야함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우리의 인생인데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며 살아도 다 못하는 인생이고 이 세상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랑하고 섬기고 자기를 희생해야할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기다리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일까? 몰랐을 때는 몰라서 그렇게 산다고 하지만 이미 맛보고 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왜 그렇게 사는 것일까? 시인은 이런 사람들은 검불과 같고 바람에 나는 지푸라기와 같다고 생각했어요. 고난과 시련이 잠시 왔으나 주님을 붙들고 사는 자신과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