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시 59:4-5).
Ⅰ. 시편을 읽을 때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
시편에 보면 시인의 고백가운데 ‘내가 허물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고백이 너무 자기 의에 가득 찬 고백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1. 구약에서는 알 수 없었던 복음의 계시
물론 이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살피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사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이 시인들이 누렸던 진리를 아는 빛이 당시로 볼 때에는 아주 커다란 빛이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복음의 계시를 통해서 알고 있는 우리의 이해에는 사뭇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로 구원해 주시기 위한 주님의 계시의 점진적인 발전 속에서 우리는 극치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극치를 본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앞으로 점점 더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성취는 아직까지도 극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 구원의 성취를 가져올 구속의 대업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그의 고난 안에서 이미 극치를 이룬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대업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 안에서 극치를 이루었고 이루어진 구속의 사실을 통해서 그것이 성취될 구원의 실현의 극치는 미래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아직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고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인간들이 남아있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구약의 시인 다윗이 정말 궁창에까지 가득 찬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고 그의 자비하심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 알고 있는 이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한 인식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커다란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자비, 그 은혜를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 다윗도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우리들이 아는 것만큼은 알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합니다.
2. 다윗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두 번째는 이제 여기에서 비록 시인이 악인을 멸해달라고, 긍휼이 여기지 말아달라고 극단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시인이 ‘자기는 허물이 없는데 사람들이 달려와서 준비합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준비한다는 뜻은 자기를 치기 위해서 준비한다는 것이죠. 전쟁에서 마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그런 것이죠. ‘준비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조차도 다윗이 비록 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러나 자기가 정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시편 여러 곳에서 그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가? 그리고 죄악을 감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는 허물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것은 정말로 자기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악인을 사용하셔서 징벌을 당하여야할 만큼의 현저하게 눈에 띄는, 양심에 거스르는 죄를 자신의 삶 속에서 찾지 못했다는 고백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죄는 두 가지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양심을 거슬러서 우리가 명백하게 의식할 수 있는 죄와 있기는 있지만 명백하게 우리의 양심을 거스르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명백하게 죄에 대한 기억이나 의식을 찾아낼 수 없는 죄들이 있어요. 모든 죄가 같은 성질의 것이고 우리의 영혼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자만 그러나 후자의 죄는 마치 우리 몸 안에 남아있는 그런 균과 같아요. 그 균들이 우리 몸에 있지만 그러나 그냥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의식적으로 자기가 양심을 거슬러 지은 죄는 끊임없이 그것과는 반대로 그 사람의 마음 안에 남아서 실제로 그의 모든 영혼의 작용들을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방해를 하는 것이에요. 물론 이럴 수는 있지요. 현저히 눈이 멀고 어두워졌기 때문에 자신이 양심에 거스르도록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서도 극도의 무감각한 상태 속에서 그것이 악이고 죄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런 경우에는 이미 벌써 깊은 침륜에 빠져있는 것이죠.
다윗이 나는 허물이 없습니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어떠한 죄도 자기 안에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인이 자기를 들어서 징계하실만한 그런 죄가 자신 안에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우리는 악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기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시인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일치를 이루고 있어요. 즉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려고 끊임없이 자기를 하나님께 합치시키고자 진리 안에서 노력을 해요. 이때에 자기가 하나님께 부속되어 있으면 부속되어 있을수록 하나님을 거스르기 위해서 도전하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도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반감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한 반감이요, 대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반감과 대적 이것이 끊임없이 계속 될 때에 시인은 오히려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고난을 받고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 부분을 우리는 항상 해석해 나가야하는 것이죠.
Ⅱ. 오늘날 우리들이 적용해야할 점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만약에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맞서고 대적하는 자들로 인하여 언제나 고난을 받게 되어있는 것이죠. 만약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과 동일한 사랑을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너무나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서도 항상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대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이 반대의 고난을 당하게 되요.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가능해요.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언약백성들이지만 형식상으로는 언약의 백성들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사람들이 항상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역사를 돌아보면 사람의 비유를 맞추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그리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산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에요. 선지자들의 역사를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와서 그 백성들에게 전해주었고 이것을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하여 설교하고 외쳤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박해를 받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죽어갔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백성들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속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교회 안에 남아서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 말씀을 맞서며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신앙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자신의 영혼에 안전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런 생활이 날마다의 삶속에서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교회는 떠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존재이고 신앙은 버리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신앙의 형식은 포기하지 않으나 거룩함은 언제든지 싫어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아래 붙잡혀서 그래서 신앙으로 사는 이런 생활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