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존 안에서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시 60:12).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많은 그 능력을 주셨지만, 이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행사하도록 그렇게 주신 것이죠. 마땅한 신앙의 태도는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이 있으면 그 좋은 것의 특별함을 보면서 그 좋고 특별한 것, 남에게는 없고 나에게 있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면 남에게 없는 특별한 것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 많이 찬송하게 되는 것이죠. 찬송하고 경배하는 자는 찬송 받고 경배 받으실 그 이유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이 확인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남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 다른 사람보다 우리가 유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은 의지하지 않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이 남보다 더 나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예요.
인간의 감정의 분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성에서 분출되는 감정은 모두 덕이 있어요.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 낭비하듯이 분출되는 감정은 모두 악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우리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우리를 구원하고 붙들어 주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쓸모없는 좌절과 패배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거죠. 그러니까 나 자신에게 있는 어떤 장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이 쓸모없는 인간도 구원해 주셨고, 지금도 은혜 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노라면 나 같은 인간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이거는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에 비해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없이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야. 아마 나 없으면 이 세상도 시시할 걸.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냐 하는 이야기예요. 그렇죠? 어떤 것에 대해서 사랑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발견하게 하실 때 ‘아 참 좋구나, 참 예쁘구나, 그러니 저것을 저렇게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실까’ ‘야 저 사람은 참 곱구나 그러니 저 사람을 창조하셔서 우리 곁에 두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 아름다움을 많이 느낄수록 그 사람은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야 저것 참 예쁘구나 어떻게 하면 저걸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야, 저 여자는 참 예쁘구나.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면 이러한 감정의 분출이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 앞에 악하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남겼어요. ‘우리 모두 주 안에서 사랑하자.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람에게서든 사물에게서든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한번의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리지 말고 그 아름다운 아름다움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자. 그래서 그 아름다운 것 때문에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자.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사랑한다면 우리 중 아무도 잃어버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 그 사람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면 그 사람이 사라져도 그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주셨던 근원이신 하나님이 남으니까 결국은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런 거거든요.
용기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이 용기 있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용기는 우리로 하여금 도전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게 하고 두려움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해태할 수 있는 사람을 격려해서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잖아요. 근데 그 용기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없는 용기는 인간의 사악한 욕망의 분출이에요. 분출이에요.
구약 성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후라는 인물이 그런 인물이었잖아요. 그죠. 아합이 이세벨과 함께 악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는 그런 일들을 많이 했죠. 이 예후는 아주 혁명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숙청해요. 어떻게 되죠? 나라의 기반이 무너져요.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고 돌볼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결국은 역사적으로 보면 그 사람의 이러한 행동이 신앙이 아니라 혈기였다고 봐야되요. 그런 측면이 훨씬 더 강한 거죠.
오늘 시인은 이런 용기가 아니라 ‘용감히 행하리니’ 할 때에 그는 덧붙이기를 하나님을 의지하고 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용기는 아주 덕스러운 용기이죠. 여기에는 절제가 있고 여기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통제되는 그런 종류의 용기예요.
아까 뭐 잠시 얘기하다가 그쳤습니다만 우리가 무엇인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어쨌든 나 바깥으로 베푼다는 것은 훌륭한 것이잖아요. 근데 하나님 안에서 그것에 붙들려서 베푸는 것은 아름다운 자선이죠. 그러나 그런 하나님께 대한 의존에서 떠나서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의 방탕함 때문에 그래서 많은 것들을 낭비하고자 할 때 그것이 결국은 사치가 되고, 분에 넘치는 이런 영화가 되는 것이죠. 낭비가 되는 것이죠. 이런 것은 덕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모든 감정의 분출이 하나님을 향한 의지함을 떠나면 그러면 그것은 악이 흐르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청교도들이 절제를 그렇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오늘 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용기는 그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가운데 솟구치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나오는 용기, 이 용기는 우리의 마음속에 한없이 솟아서 그래서 이 용기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이렇게 의지했던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대적을 원수로 여기시고 그를 밟으실 자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영적인 전쟁이에요. 오늘 이기기도 하고, 내일 지기도 하고, 또 내내 이기기도 하고 내내 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 전쟁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냐에 따라 다른 거죠. 승리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전심으로 그분을 앙망하고 의지하며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용기가 나오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