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나의 피난처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4-16).
시인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악인을 단순히 우연적인 악인이 아니라 그 뿌리 자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악인 됨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악인을 만나 고통을 받을수록 자신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이 악인에게 퍼붓는, 악인을 향하여 하나님께 올리는 이 기도는 단순한 이 마음의 정욕에서 우러나오는 파괴적인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도 이 개는 무도하고 그리고 의식이 없고 그러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개처럼 자기의 토한 것으로 돌아갔고’ 이런 베드로 사도의 표현도 나옵니다. 무엇인가 굶주림을 해결하거나 목마름을 해결하거나 어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이 모습을 개처럼 울며 성을 두루 다닌다고 말을 했고 날이 저물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런 개를 돌보아줄 돕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역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악인의 결국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비록 악인처럼 강하지 못하고 악인은 득세하고 자신은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악인은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는 처지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신은 지금은 비록 연약한 것 같지만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를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앞 절에서의 무대는 저녁이고 밤인데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은 미래형으로 주의 힘을 노래하고 아침에 주의 인자를 찬송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금은 비록 악인에게 지는 것 같고 해를 당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주의 힘을 노래하겠습니다. 그것은 무슨 힘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언제 찬송했습니까? 하나님이 그 능력을 행사하시고 그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을 위하시는 당신의 관계를 드러내보여 주셨을 때 그 힘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언약백성들의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것이죠.
시인이 이런 역사를 염두에 두며 하나님 앞에 여호와의 힘을 찬송할 수 있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악인에게 해를 당하는 것 같고 원수가 자기보다 강한 것 같지만 그리고 자신은 악인이 갖고 있는 그런 종류의 힘이 없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고 이길 것이라고 하는 이 불굴의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큰 힘이 나타나서 당신의 공의를 펼치실 때에 악인은 멸하나 자신은 하나님의 펼치시는 그 공의 아래 희생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공평을 펼치도록 구하기 위해서는 비록 원수보다 약하고 환난과 고난을 당하지만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우리 주님께 속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 사람들만이 자신 있게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그 은혜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의 힘을 노래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그 큰 힘의 행사는 악을 행하는 악인들에게는 엄격하게 나타나는 공의의 소산이지만 은총을 바라면서 산 언약백성들에게는 주님의 인자하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언약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자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어미가 자기의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언약백성들을 돌보시는 것이죠. 시인은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총에 대한 이 기대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에도 그런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대한 확신에 붙들려 살아요. 오늘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내일 느끼기는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미래의 불안에 대한 해소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확신은 오늘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주님과 화목한 가운데서 살아가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요. 왜?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는 이것이 미래에 투영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나 오늘 주님의 그 자비와 사랑들 느낄 수 없이 관계가 깨뜨려졌을 때 절망과 파괴적인 생각들이 밀려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내일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시인은 비록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 의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오늘 하나님과의 돈독한 관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 증거가 없어도 내일 아침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할 것이라는 확신에 붙들렸어요. 상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하면서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이심이니이다.’ 라고 말이죠.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도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위에 서있는 산성,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산성 속에 피난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환난 날에 난리가 미치지 아니하는 피난처, 거기를 주님의 품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악인에게 핍박을 받고 원수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붙들어 때로는 시련과 환난을 당하시게 하시면서 까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죠.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고 악이 나에게 미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주님의 품이 산성이요, 환난 날에 피할 피난처가 되는 것이죠. 그분의 품안에서 쉬노라면 성난 파도와 같이 출렁거리듯 나를 에워싼 수많은 상황들이 잠자고 나는 그 환난과 풍랑 때문에 주님의 품을 더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품으로 다시 불러들이시고 당신 앞에서 사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의지할 만한 이는 우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며 오늘도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