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위하여 수치를 당할 때 2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69:9-11)
이렇게 시인이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할 때, 세상에서는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자기가 가장 가까이 하던 사람들 조차도 자신을 본척 하지 않는 그런 소외를 경험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지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상태와 그로말미암아 당하는 또다른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키고 그랬는데, 이것에 대한 해석이 두가지정도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데, 부정적인 의미에서 보며는 이것은 주님의 집을 위한다는 악인의 열성 때문에 시인이 고난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한 편으로 보며는 시인 자신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에 확 사로 접혀서 그것에 자신이 사로잡힌 바된다. 이렇게 우리들이 두가지의 해석의 가능성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 2장에 보며는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쫒고 돈바꾸는 상들을 뒤엎으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이 성경구절이 이용이 됩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리라 고 한 말씀을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이제 제자들이 이 성경구절을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전자의 해석으로 우리들이 보는 것이 좋다. 라는 판단이 어느 정도 서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의 문맥도 찬찬히 읽어 보며는 저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마음속에 확정이 잘 안되요. 그것이 과연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 그렇게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고 하는 이런 잘못된 방식들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에 대해서 제자들이 생각을 한건지, 정결케 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생각을 한건지 그것이 제마음속에는 잘 확정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아마도 이구절 상반절은 아마도 이 시인이 자기가 당하는 이 많은 고난이 사실은 주님의 집을 위한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힘이 정말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올바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열성 때문에 많은 악인 들에게 고통을 받고 심지어는 자기가 그렇게 살기를 포기했더러면, 미움과 원망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말하자며는 미움을 받는 이런 상황속에 있게된 것을 가르치고 뒤에는 이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시인을 핍박하려고 하는 악인들에 대한 비난이 아닌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시인은 악인들로부터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부터도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이 시인이 그 고통을 받고 악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악한 사람의 의도는 이 시인의 모든 행동 거지를 해석하는데 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앞에 울며 매달리고 또, 하나님앞에 자신의 소원을 아뢰며, 금식을 할 때 조차도 그것이 오히려 시인에게 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인이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면서 혹시 자신이 잘못되지 않을까? 혹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고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에서의 신앙은 바로 개인의 신앙과 공동체의 상태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하면서 시인이 하나님앞에 자신에게 엄격히 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했더니 그것이 호히려 시인에게는 욕이 되었던 것이죠. “저봐라! 저가 저렇게 금식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아마 지가 큰 잘못을 했나보다.” 이런 욕이 돌아온 것이죠. 저런 금식, 저런 눈물의 간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들이 돌아온 것이죠. 사랑은 무엇을 해석하는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선하고 좋은 방향으로 해석을 하려고 그 사랑이 없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미움이 가득하게 되면, 그 사람의 선한 것 조차도 악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사랑의 성향은 해석의 성향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은 처음부터 이 시인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였거나, 혹은 후에 이 시인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접은 사람들이 였기 때문에, 시인의 어떠한 좋은 점과 하나님앞에서 살려는 신실한 자세 조차도 악인들에게는 아주 가혹한 해석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시인이 칭찬할만하고 경건하고 진실한 행동이 그들에게는 이 시인에게는 그들의 이 모든 해석이 한없는 욕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을 때에 바로 그런 삶을 살지 않으 셨나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세상에 살아계신 동안에 주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가까이 계시고 그들을 먹이신 것이 예수님에게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셔 한 패거리가 된다는 그런 비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긍휼이 넘치는 마음으로 병든 자를 고쳐준 것이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런 불량한 그런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처음부터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없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니, 시인의 이런 고난도 어떻게 보며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단지 이세상의 사람의 아들일 뿐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당하게 되는 그 고난은 예수님이 이세상에 계실 때에 고난을 당하셨던 이유와 아주 유사하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도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악한 본질 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베옷을 입는 다고 하는 것은 슬픔의 상징이에요. 그래서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았다. 혹은 재를 뿌리며 앉아있다 라고 하는 것은 뭘의미 하냐며는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공동체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전체에게 미친 어떤 불행한 결과가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의 죄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자신은 자기가 깔고 앉은 이 재처럼 모두 파괴되어야 마땅하다는 고백속에서 슬픔의 상징인 베옷을 입는 거에요. 이것은 철저한 회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69편 시를 지은 것이 시기가 어는 시기인지 그리고 69편에서 이시인이 부르짖는 그 내용들이 혹시 범죄한 것에 대한 참회시가 아닌지 등등에 대해서 사실은 우리는 별로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보며는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앞에 단지 굵은 베로 옷을 삼고 그리고 하나님앞에 회개한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재를 무릅쓰고 베옷을 입고 앉은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문맥을 보며는 그런 자세를 이야기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이것이 진짜 개별적인 범죄로 인해서 이런 마음을 갖게 된것지, 아니면 이스라엘 중에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의 죄때문이라는 공동체로서의 지체된 연대의식 때문에 나오는 것인지 우리는 쉽게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그것이 어느쪽이든지 간에 이 시인의 죄에대한 철저한 회개는 공동체와의 밀접한 연관관계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은 구약에 나타났던 인물중에 다윗만큼 신약시대의 이루어질 교회의 영적인 유기체적 성격에대하서 풍부하게 보여준 인물이 많지 않아요.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냐하며는 결국 한사람의 신앙의 깊이 영적인 깊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비밀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교회안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들과 영적인 연관을 맺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거기에 접붙혀져 한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 지체이 한몸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놀라운 사랑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주시는 그런 삼위일체적인 사랑에서 분여받는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받는 사랑조차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는 그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누리는 중보적 사랑이라고 본거죠. 동의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그 교회를 위한 삼위하나님의 관계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이시인의 고백을 통해서 한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처지를 당하든지 돌아가서 하나님앞에 우리의 처한 상황을 해석하게 해주시는 우리의 유일한 궁극자 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와 우리의 악함을 고백하고 또, 교회에 벌어지고 있는 혹은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이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이유와 섬리와 그것에 대한 치유책들을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따로 떨어질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된 사람들이고, 또, 그렇게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을 세상에 두셨다는 의미에서 세상도 현실도 포기할 수 없는 그 우리 앞에 있는 어면한 사실이라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힘있는데로 나의 살아있음이 교회를 바르게 하는데 이바지하고 또, 교회가 살아있으니 이세상을 올바르게 하는데 이바지 하도록 살아가는 그런 신앙의 포괄적인 관계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