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열납하실 때에1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2-13)
그래서 이제 시인이 어쨌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깊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토했습니다. 그리고 견비 해져서 굵은 베옷으로 자신의 옷을 삼았습니다. 베옷이라고 하는 것은 상복입니다. 그리고 그 베옷이 상징하는 것이 슬픔과 비참함이에요. 그러니깐 실제로 베옷을 입기도 하였겠지만, 시인이 하나님앞에 고난을 당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그 관경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은 그것이 정당한 것이든지 때로는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지 간에 우리를 정화시키고 하나님앞에서 단정하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선물이에요. 이세상에 모든 인간들 중 누구도 하나님앞에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패해 질 수 있고 마음이 교만해 질 수 있고 은혜에서 미끄러져 의지가 부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앞에 세우고 그 말씀앞에 거울로 삼아서 우리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방법이 고난이에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이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서 살도록 경려를 받고 있는 시대에는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핀다고 하는 것은 정말 거의 불가능한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일상적인 방법으로 우리자신을 반성하여 돌이키게 하실 수 없을 그때에 종종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서 그래서 우리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시인이 탁월한 경건을 소유하고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였습니다. 정말 시편 곳곳에 뭍어있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이러한 세계를 지닌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예외가 아닌 아담의 후손이었고 죄인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끄러지고 어쨌든 죄 가운데 있게 되었고 그 속에서 고난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 슬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배옷을 입고 베옷으로써 한동안 자신의 의복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이러한 그의 지난 모든 날들은 자기가 하나님앞에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시인은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철저한 회개의 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말거리가 되었고, 그리고 오히려 술먹고 취한 사람들 조차도 조롱하듯이 이시인의 비참한 처지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사람으로부터 멸시와 모욕의 가득찬 시간들을 보낼 때, 시인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절망하는 대신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시인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앞에서 우리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다면, 시인과 같은 위대한 인물도 부패했는데, 우리야 말할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시인이 선택한 하나의 길은 기도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곤고한 날에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모으고 부르짖는 것이 이시인의 간절한 기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간에 절망하는 그 절망의 끝은 욥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기까지 모두 표출되지 않아서 그렇지 마지막에 거기로 우리를 데려 가는 것이죠. 죄죽임의 교리에서 사람을 향한 미움이 양심의 억제를 받지 않고 환경의 제악을 받지 않고 무안히 계속 펼쳐지면 마지막에는 살인을 하는 것이 그 죄가 가고 싶어하는 것이 끝인 것처럼 똑같이 절망하는 마음이 양심에 억제를 받지 않고 상황에 제악을 받지 않고 끝까지 펼쳐질 때에 그 절망이 우리를 마지막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종착역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고 자기자신은 파멸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어떤 식으로 말하던지 간에 절망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에요. 절대로, 절망은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 아니에요.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죄인이 죄에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의식하고 깨닫고 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데에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에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의지의 참여가 있고 사단의 세력의 개입이 있어요. 그래서 절망은 신앙과 아주 유사해요. 그래서 신앙을 갖게 되며는 어느 막다른 순간에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직 하나님만 보이면서 그분만이 나를 구원 할 수 있다 고 확신을 하게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지마는 반대로 절망하게되고 의지가 거기에 깊이 이끌리게 되며는 절망하는 자체에서 인간이 큰 쾨감과 안정을 얻어요. 그래서 그리고 몰입을 하게 된거죠.
예) 이번에 뭐 에프원 대회 인가 그것을 해서 신문에 도배를 하고 막 그렇게 떠들썩하고 며칠 잔치하고 끝났는데, 빚이 칠백억을 졌다 그러더라고 그렇게 350키로 정도로 에프원 카가 달리며는 시야가 야구공 만하게 보인답니다. 빨라질수록 시야가 계속 좁아지는 거죠. 왜냐하면 너무 빠르니깐, 시야가 아주 좁게 야구공 만하게 보인다는 거에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깊이 절망하고 주님을 붙드는 믿음이 있게 될 때에도 아무것도 안보이고 주님이 보는 것처럼 절망하게 되며는 모든 희망적인 것들에 대한 해석의 능력이 사라지고 미친 듯이 그 절망하나에 치닫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는 거에요. 그런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인간의 이 자살을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으로 본거에요. 쉽게 이야기 하면 인생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그냥 사는데 마땅이 내가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차이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좁힐 수 없는 엄청난 절망으로 밀려올 때에 그때에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하고 싶은데, 내가 원하지 않은 나로 존재하도록 강요를 당하니깐, 자살을 해버리는 거에요. 그렇게 하는 그것이기 때문에 진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죽는 다는 말이에요. 그런 역설이 나오는 거죠. 그렇게 되는거죠. 신앙과 절망이 아주 유사해요.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마는 새벽기도니깐 길게는 못하겠습니다. 근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절망 속에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의 섬리 하나님의 주권아래 굴복하여야 할 존재라는 그 인식만 가지고 있으며는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인식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큰 난관을 만나고 절망에 빠질 때에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며는 사실은 그렇게 절망에 빠져들지 않는데, 신앙이 좀 없어도 도움이 됩니다. 뭐 어짜피 인생이라는 것이 한번 왔다가 살아지는 것인데, 그러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안보이는 거죠. 그냥 미친듯이 질주 하게 되는 거죠. 그때에 인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들어나게 되는 거에요. 이시인은 잘못했지만, 그래서 주님앞에 베옷을 입고 원수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 자신을 죄중에서도 붙드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앞에 기도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절망에 빠진 시인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탄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자신이 기도하는 그때가 주님이 열납하시는 때에 어떻게! 죄를 지어서 의지 할 곳이 없을 때에, 자신의 죄를 뉘우 칠 때, 원수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할 때에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를 받으시는 열납하시는 때에 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열납하실 때가 있다는 생각자체가 사실 성경과 모순이 되지 않을 까요. 언제든지 하나님은 죄인들을 기다리시고 그리고 어리석은 죄인들을 하나님앞에 부르시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그것이 아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때를 열납하시는 때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때에 주님은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 인간의 사랑, 인간의 인정과 정, 이런 것들은 참 잔인하고 야박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을 실망하게 하면, 그 모든 것들을 한번에 지워 버리는 것이 인간의 정이에요.
예) 저는 언젠가 한번 한때, 코미디언으로 상당히 이름을 날리던 연애인이 있었어요. 여러분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사람인데, 그양반이 개인적으로 간증 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어요. 어느날 인기가 떨어지는데,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든데요. 어느날 인기가 떨어지는데 자살하고 싶은 생각 밖에 안들더라는 거에요. 그렇게 자기에 대해서 환호하던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릴 때에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심정적으로 매일 수면제를 만지작 거리면서 난 죽는 것 밖에 없구나. 그런 좌절을 느끼게 되었더라 이거죠.
인간의 인정, 박수와 갈채는 어는 한순간에 어느 한순간에 그렇게 차갑게 변심할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굉장히 마음 아파하셔요. 왜냐하면 결국은 그가 무엇을 의지하든지 의지하는 그것이 영원하고 안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삐치고 화가 나서라기 보다는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며 살 때에 그것이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고 결국은 그것이 뼈저린 실패를 가져 온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상한 마음이 있는 그곳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찾아오시고 그리고 물같이 녹는 마음이 있는 그곳에는 언제나 주님이 임재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은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 항상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의존을 이렇게 떨쳐버리는 시간들이 필요한 거에요. 그게 자기 깨어짐이고, 그것이 하나님앞에서 자기를 버리고 포기하는 거에요.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삶! 생활,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믿음의 생활이라 이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