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Ⅰ
(1999-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을 아십니까?(시23:1上) 1999.12.5 주일오전 1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시23:1上) 1999.12.12 주일오전 12
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2(시23:1下) 1999.12.19 주일오전 25
4. 염려를 극복하는 길(시23:2) 1999.12.26 주일오전 28
5.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시23:3上) 2000.1.2 주일오전 39
6. 영혼의 침체1(시23:3上) 2000.1.9 주일오전 51
7. 영혼의 침체2(시23:3上) 2000.1.16 주일오전 66
8. 영혼의 침체3(시23:3上) 2000.1.23 주일오전 77
9. 의(義)의 길로 인도하시려고(시23:3下) 2000.1.30 주일오전 91
10.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시23:3中) 2000.2.6 주일오전 107
1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시23:4) 2000.2.13 주일오전 124
12. 밥상 앞에서 아무는 상처(시23:5下) 2000.2.20 주일오전 135
13. 말할 수 없는 기쁨(시23:5中) 2000.2.27 주일오전 151
14. 빈잔에 넘치는 은혜(시23:5下) 2000.3.5 주일오전 165
15. 끊을 수 없는 선하심(시23:6上) 2000.3.12 주일오전 178
16.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라(시23:6下) 2000.3.19 주일오전 191
1.하나님을 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23:1上)
이름을 알 수 없는 질병을 걸렸습니다. 뚜렷한 병명도 없는데 몸을 점점 쇠약해져 가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각한 신경증세까지 보였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서 모두들 들어가기 원하는 좋은 회사에서 잘나가는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촉망받는 엘리트였는데 이제 서서히 침몰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건강 때문에 직장까지 사직하고 요양을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병명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그러던 끝에 친구가 너무 딱하니까 진실한 기독교인인 의사가 운영하고 있는 정신과 병원을 소개시켜주었습니다. 그 병원에 가서 의사와 함께 오랜 시간동안 상담을 하면서 이 사람은 많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두서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환자인 이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죠. 눈물 섞인 하소연이 다 끝나고 났을 때, 의사는 간단하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잘 오셨습니다. 그 병은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입원을 해야 됩니까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뭔가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편지봉투를 봉해서 주면서 약국에 가서 약을 짓기 전에 집에 가서 조용한 시간에 이 봉투를 한번 펼쳐보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가서 집에 가서 식구들을 다 물리고 밤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침대 머리맡에 스탠드를 켜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 봉투를 뜯어서 도대체 이 명의에 처방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신중하게 자기에게 처방전을 뜯어보라고 그러나 그리고 가서 뜯어봤더니 진짜 약국에서 쓰는 처방전이 나왔습니다. “처방전, 이름 아무 아무개, 나이 몇 살, 성별 남자, 아래와 같이 처방하오니 드시고 속히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1번 약 이름 구약, 약의 종류 시편 23편, 용법 및 용량 하루에 다섯 번씩 물 없이 천천히 씹어 드시오. 부작용 아직 발견된 바가 없음. 기타사항 꾸준히 드셔야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 이 사람이 너무 황당해서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분노하기 시작했어요. “야 인생이 말년에 오니까 이젠 별 거지같은 녀석이 나를 희롱하는구나.” 그리고 밤새도록 잠을 들려고 애를 썼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가위에 눌리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목을 조여 오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서 새벽시간에 잠깐 잤다가 벌떡 일어났을 때에는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그 미워하던 의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이 이 사람이 돈을 벌려고 마음을 먹었더라면 나에게 약을 지어주었어야지 왜 나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그랬을까?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가서 휴지통의 처방전을 꺼내서 다시 책상에 놓고 오랫동안 읽지 않았던 성경을 꺼내서 작은 독서카드에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다섯 번씩 규칙적으로 복용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공복에 한번, 아침 먹고 식간에 한번, 점심 먹고 한번, 저녁 먹고 또 한번,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또 한번, 물 없이 천천히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시편 23편을 읽으니까 일주일이면 서른다섯 번이고 넉 주가 지나니까 백 사십 번을 읽게 되었고 한 달 반쯤 지났을 때에는 본인이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저절로 시편 23편이 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카드도 필요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 밤에 잠 들 때까지 하루에 다섯 번씩 시편 23편을 매일처럼 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정원을 조용히 거닐면서 이제 이 사람이 시편 23편을 어제 하던 대로 그대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을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며 기름으로 내게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어제까지 느끼지 못하던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성경을 외울 때에 이 성경이 이상하게 스며들 듯이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윽고 들어올 때는 부드러운 물처럼 스며들었는데 스며들어오고 나서 이상하게 이 흘러들어 온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큰 파괴력을 발휘하면서 뭔가 가슴 속에서 큰 콘크리트 더미 같은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어서 집들 같은 것들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태어나서는 이제껏 그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통곡하면서 울었어요. 정원엘 주저앉아서 어린 아이처럼 통곡을 하면서 엉엉 우는 동안에 마음속에 선명한 한 줄기 빛과 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어요. 그것은 자기가 이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환경 때문이라고, 그리고 건강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씀이 물 같이 자신의 가슴속에 흘러들어오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더니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불행이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오지 않은 데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느낌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 체험됐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막 무너지는 아픔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막 무너지는 것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서는 견딜 수 없고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큰 기쁨과 그리고 자유가 온 마음에 가득 느껴졌어요. 병이 나았을까요? 안 나았을까요? 그죠. 안 나았으면 얘기할 필요도 없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으로부터 한 사십여 년 전, 주일 학교 시간에 뛰어다니면서 마루로 된 바닥에서 선생님의 율동에 맞춰서 함께 율동을 하면서 부르던 이 노래, 아직까지도 귀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익숙해진 성경구절이 사실 우리들이 그 참된 의미를 잘 모르는 성경구절 투성 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의미를 많이 안다고 자부하기 힘듭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익숙해진 성경구절입니까? 시편 23편이 바로 그러한 성경구절입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이 한 토막이고 2절부터 5절이 두 번째 토막이고 6절이 세 번째 토막입니다. 1절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 신앙고백이고,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 근거이고 6절은 여호와를 목자로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시인은 시편 속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형식을 깨뜨리면서 23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보편적인 시작 형식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탄원의 기도나 혹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경배로 시작을 하는데 오늘 이 23편은 잔잔한 자기 고백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시편 23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고백을 낳습니다. 고백은 삶을 낳습니다. 여러분 안에 고백이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신앙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인은 23편을 조용한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흔들 수 없는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진 고백, 그것으로서 23편을 시작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23편의 시작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작할 때, 왜 하필이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 하느냐고 묻는 것은 말장난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단어, 한 글자가 피할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의해서 선택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기록한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명칭이 세 가지가 나오는데 주, 그다음에 또 하나는 여호와, 또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그 중에서 주는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대명사로 제쳐놓으면 하나님과 야훼, 히브리어로 엘로힘과 야훼라고 하는 이 두 단어가 하나님을 향한 가장 대표적인 성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성함은 구약성경에서 각각 어느 정도는 구분되어서 사용된다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 능력 많으신 하나님, 온 세상이 경배해여야 할 지존하신 하나님, 이런 걸 의미할 때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야훼 우리 말 성경에서 여호와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만 계시해주신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리고 그 아브라함에 의해서 가정을 이루시고 족장들의 역사,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가 펼쳐지고 그 속에서 믿음의 선조들에게 계속 경험되었던 그 믿음의 선조들에게만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자기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어떻게 살도록 가르쳐주시고 위기와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구원의 손길을 펼쳐서 도와주심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던 그런 특별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가르쳐진 이름이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드디어 야곱의 집안이 국무총리가 된 요셉을 따라서 애굽에 내려가면서 이제 그들의 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계시하시고 기적의 기적을 거듭하신 끝에 그들을 그 큰 손으로 애굽에서 탈출시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은 여호와 자신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계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가운데서 그들이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들이며 그것이 바로 언약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그들이 특별히 생각하셨고 특별한 관계 속에 있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교육 시키고 깨달으시면서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국가가 되어서 국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 국가, 그 민족,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 믿는 이 온 세계에 하나님 자신이 누구시고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이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관계 속에서 주어진 이름이 바로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할 때에 이 여호와라고 하는 말이 이미 다윗의 가슴 속에는 이렇게 설명 드린 장구한 언약의 역사,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은 약속의 역사를 가진 특별한 은총을 받는 백성으로서 그 중에 서있는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이에요. 이게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오늘 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에 의해서 묶여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오늘 여호와라는 말을 통해서 고백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 믿으신 것 후회해본 적 있어요? 신앙생활 하신 것 후회해본 적 있느냐구요? 대부분의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말할 수 없이 기뻐해본 적도 없지만 후회해본 적도 없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저는 후회해본 적이 있어요. 철없던 시절에 예수님을 딱 믿기 시작하니까 이상하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 이거죠. 신앙이 없었지만 예수님을 딱 믿고 나니까 부족한 신앙이긴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큰 힘이 내 인생을 붙들고 움직이시는 거예요. 그런데 왜 나 좋아하는 쪽으로는 안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그때 어린 신앙인데도 그때 하나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야, 이거 예수님 믿는 게 장난이 아니구나. 이거 한번 딱 걸렸구나. 찍혔구나.”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내 인생 최대 실수는 예수를 믿은거다 그러고 다녔어요. 얼마나 철이 없었겠어요. 돌아다니면서 잘 한다고. 이게 언약의 관계에요. 여러분 이제 주님의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믿게 하셨고 또, 믿게 하시려고 작정하고 계신 한 여러분 주님의 것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습니다. 예수 불퇴. 물러주지 않아요. 여호와란 이 말은 이런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나와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지금 하나님 믿을까 말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믿었어도 순종하면서 살까 말까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다 쓸데없는 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할 양들이 바깥에도 있다. 나의 양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성령 충만하게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만 예수님과 언약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했어도 주님이 구원하려고 딱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찍어놓은 사람들도 이미 예수님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망가도 여러분들은 결국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데도 도망가고 주님이 찾으시는데도 신앙으로 승복하지 않고 제 갈 길로 계속 걸어가면 결국 손해는 여러분들이 보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불렀을 때에 가슴 속에 두고 있었던 언약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피할 수가 없게 된 것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곧 여호와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어느 측면에서 뵙옵느냐에 따라서 여호와라고 부르고 싶을 때도 있고 또 어느 측면에 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싶을 때도 있다 이 얘기죠. 근데 그 하나님이신 여호와,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거죠. 우리들이 우선 하나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미 하나님은 인간과 비교되실 수 없는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많은 사람들이 살다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그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유산을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영이시고 보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매개체를 본 것이지 하나님 자신은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한번 이 우주의 넓고 광대함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의 세계를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밤이면 하늘 높이 떠 있는 별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별들 가운데 수억 분에 일 밖에는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우주의 드넓은 천지,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우리들은 모두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발달하게 되면서 조금씩 우주의 신비가 벗겨집니다. 얼마 전 우리는 페스파인더라고 하는 화성으로 보낸 탐사선이 지구에서 리모콘으로 조정되어서 광석도 채집하고 수많은 자료를 보내는 그 조그만 로봇의 움직임을 보면서 전 세계가 경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대다수의 인간들은 인류의 과학의 위대한 힘에 대해서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그렇게 발달하고 아무리 인간이 그렇게 우주선을 띄워 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어마어마한 우주 가운데 손톱만한 작은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끔 신문지상에는 별들에 생성이라고 하는 슈퍼스타의 폭발현상들이 이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주공간에서 장엄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거기서 별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어떤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쓰여 있었습니다. “슈퍼스타 탄생” 그리고 외신보도에 의해서 허였게 부서지는 폭발광경이 일어나고 이 사진은 이천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허블 망원경으로 찍은 것입니다. 허블 망원경은 말이죠, 대기권에서 비추면 공기에 의해서 빛이 투과가 덜 되니까 흐리니까 무중력 상태의 대기로 띄어요. 리모콘으로 조정해서 인공위성처럼 떠서 이 리모콘으로 지구에서 조정을 해서 원하는 천체를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명하게 보이죠. 이 눈앞에 보에 들어오고 있는 광경들, 그 장렬하듯이 폭발하는 엄청난 광경이 지금 우리 눈에 들어와서 보는 사람들의 이 마음에 큰 신비를 불러일으키는데 미안하지만 정작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그곳에서는 2천만 년 전에 폭발이 끝났습니다. 도대체 이 우주는 얼마나 넓은 곳일까요? 과학자들의 추측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백오십억 광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더 많은 광년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최근에 이야기에 의하면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려 가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매 초 2천 킬로미터씩 폭발하면서 팽창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그 팽창이 끝나고 나면 줄어드는 때도 오리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우주 이 끝이 저 끝이 백오십 광년이라고 하면 그 끝이 끝나고 나면 그 뒤에는 뭐가 있는가? 양쪽이 백오십 광년이라면 위로 뚫고 나가면 거긴 뭐가 있는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수많은 사람이 질문하지만 대답해주는 사람 없이 우리는 수많은 지구의 역사 속에서 살았다가는 사라지고 살았다가는 사라졌습니다. 하루살이하고 파리가 놀다가 파리가 말했습니다. “야,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가면서 머리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내일이 언젠가?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가다가 하루가 끝났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파리하고 매미하고 놀다가 매미가 얘기했습니다. “다음 달에 만나자.” 파리는 또 생각했습니다. “다음 달이 무슨 뜻인가?” 그러다 그 달에 죽었습니다. 동해안에서 얼마 전에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천삼백 년쯤 되었을 것이라고 사료되는 거북이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도로 놓아주었지요. 그런데 그 거북이 그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 너는 나보다 낫구나.” 천삼백 년 살았어요. 언제부터 살았을까요? 이조시대도 다 보고 통일신라시대도 살았어요. 얼마나 더 살지 몰라요.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조선시대 본 사람도 여기는 별로 없어요. 신라시대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그리고 확실한 예언 한 가지는 60년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소수에 사람들이겠죠. 넉넉잡아서 80년 잡으면 만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게 인간인데 그 인간이 얼마나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이거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작품 중 하나에 불과해요. 뿐만 아니라 이렇게 거시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볼 때에도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러나 미시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보아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뚜렷하게 드러나요. 인간이 밥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찌죠. 살이 찌는데 살이 찌는 것과 함께 핏줄도 늘어나요. 근육이 늘어나고 세포가 생성되면서 똑같이 살이 너무나 빨리 찐 나머지 미처 핏줄이 생기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 본적 있습니까? 동물들이 식물과 함께 어울려서 산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식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고 토해놓은 산소가 동물들에게는 꼭 필요한 가스이고 그리고 동물들이 쓰다가 토해놓은 이산화탄소는 이제 식물들의 광합성 작용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됩니다. 꽃 피고 새 우는 아름다운 땅, 그리고 따뜻하고 맑은 물에만 고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빛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저 수천 미터 심해 속에 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아예 자기 스스로 자가발전을 해서 빛을 내는 물고기들도 살고 있다고 하니 하나님에 창조의 위대함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바다를 볼 적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여태까지 인간이 잡은 오징어 가운데 최대의 크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17미터였다고 하니 그 오징어의 크기는 아마 32평 아파트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수십 명이 앉아서 노닥거리며 야유회를 해도 좋을 만한 그 오징어가 바다 속에 살고 있었다고 하니 우리 눈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 바다의 세계는 얼마나 놀라울까요? 커다란 고래는 백오십 톤까지 된다고 하고 핏줄은 어린아이들이 기어 다니면서 놀 수 있을 정도로 굵고 심장은 승용차만하고 심장의 박동 소리가 일천 킬로미터 바깥에서 음향탐지기로 탐지가 된다고 하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얼마나 헌사한지 모릅니다. 그 속에서 그 많은 피조물들과 동료로서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 다른 동물들에게 주시지 않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넣어 주시고 영혼을 주신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과 동료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우리의 선배들도 많이 있습니다. 장엄하게 자란 나무숲 속에 들어가서 우리는 수많은 선배님들을 봅니다. 우리는 태어난 지 일, 이년 혹은 십년, 이십년, 끽 해봐야 사오십년,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 그래봐야 팔구십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숲 속에 들어가면 팔구십년 묵은 나무는 땔감도 못할 정도입니다. 보통 거기서 명함 한 장 내밀려면 그래도 오, 육백년은 된 나무여야지 명함을 내밀지 않습니까? 그런 거목들의 숲을 거닐면서 우리는 역시 그들과 함께 어깨하며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얘들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들에게는 없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영혼을 주신 것을 제외하면 너희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손에 의해서 지은바 된 존재들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천지창조의 동기생들이지.” 라고 말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주 하나님
우리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을 주 하나님 날 사랑해
보십시오. 그 큰 우주, 그 위대한 별들, 그 많은 위성들, 하나님에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흐르는 물도 날아다닌 새도, 바다를 헤엄치는 큰 고래도 할 수 없는 일, 하나를 인간에게 할 수 있게 하셨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주 하나님을 사랑해
할렐루야! 요새 아멘 소리가 작아졌어요. 할렐루야! 그걸 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얼마나 놀라워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와 똑같이 주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손으로 빚으셨어요.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그 생기가 영혼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런 피조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셔서 우리를 낳으셔서 당신과 함께 가족관계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그 하나님, 그 거시적인 시각에서 봐도 위대하신 하나님이요, 미시적인 시각에서 봐도 위대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단지 그 하나님으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인도에 타고르라고 하는 시선과 아이슈타인이라고 하는 사람 둘이 만나서 토론을 하는데 좁힐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존재의 문제에요. 무슨 뜻이냐면 인간이 인식할 때에만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게 타고르의 생각이었어요. 아이슈타인은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가 흐르는 사람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것을 생각할 수 있든지 없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여기서 이거를 보든지 안 보든지 이것은 존재한다. 아이슈타인이 그거를 얘기하는 거예요. 타고르의 생각은 달라요. 그게 우리가 없는데 이게 존재하는 게 무슨 상관있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거를 이것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누가 이 존재를 인식할 수 있고 이 존재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사람이 존재할 때에 이게 존재하는 것이지 아무도 이거를 인지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게 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러니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아무리 살아계시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이 엄청난 우주를 만드셨고 그리고 이 위대한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미세한 창조의 질서를 오늘도 움직이신다 하더라도 우리와 관계가 없으면 그 하나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근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시되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그런데 무슨 문제가 일어났냐 하면 인간이 죄가 들어오고 유혹을 받아서 타락하게 되면서 창조 시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매졌던 이 아름다운 관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흐르던 가족과의 관계가 깨뜨려져 버린 거예요. 그 관계를 되찾는 일이 이 시인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신앙을 갖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이 모든 말은 안 하면서도 살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일을 내가 택한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에 인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요. 원래의 인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애들은 공부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공부하는 게 매우 즐거운 사람들은 약간 정신 이상 증세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게 본성 상 싫어하게 되어 있어요. 근데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다가 우리 때도 보면 학교를 안 나오고 도망을 가는 거예요. 도망가가지고 재미있는 게 있는 가 봤더니 뭐 그런 것도 아니에요. 학교 다닐 때에 도망친 애들 한 두 주 만에 와서 너 뭐 했니 그러니까 인천 가는 석탄 차에 몰래 숨어서 탔대요. 그래서 뭐 했는데? 석탄 속에 숨어서 놀았대요. 누구하고? 석탄하고 놀았대요. 그러고는 나중에 얼굴 새카매져 가지고 와서 잡혀서 와서 선생한테 개 패듯이 두들겨 맞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잖아요. 요즘은 더 심하죠. 이제는 아예 학교 뛰쳐나오면 머리도 노란 물, 빨간 물, 뭐 파란 물, 막 들여요. 저는 그 색깔 들이는 것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막 자기 입고 싶은 것 다 입어보는 거예요. 너무 신나죠. 술집에 간다고 뭐라고 그러겠어요, 담배 핀다고 뭐라고 그러겠어요. 요즘 어른들이 애들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그러고 막 사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에 딱 붙잡혀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거예요. 근데 돌아가는 게 너무 이상한 거예요. 왜? 학교는 오래 다녔어도 적응이 안 되는데 날라리처럼 노는 거는 금방 적응이 되는 거예요. 여기가 고향 같은 거예요. 이 PC방이 내 고향이고, 그리고 이 단란주점이 내 영원한 안식처같이 여겨지는 거예요. 그 학교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상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자기의 느낌일 뿐이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신앙을 갖는다는 거는 원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예전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자기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그 창조 행위를 통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가족 관계 된 것을 알고 그 하나님께 효도하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산 거예요. 죄가 들어오니까 이상한 약 먹은 짐승처럼 부모도 몰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도 몰라보고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도 몰라보고 안하무인격이 되어서 뛰쳐나가서 제 멋대로 막 살아 가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에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를 만드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집 나간 너를 찾고 계신다. 어느 순간에 그것이 인격적으로 믿어져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그렇게 집 나온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라 이거죠. 그거를 모두 경험하고 오늘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나면 예수를 믿은 게 신기한 게 아니라 안 믿으면서 그렇게 오래 산 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야, 참 신기하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그렇게 잘 살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면 파도치는 것과 같은 인생의 굽이굽이 사연들이 결국은 하나의 꼭지점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꼭지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었어요. 할렐루야! 오늘 이 시인이 그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에요. 여러분, 인간이 아무리 연구해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왜 불행해지는가? 그 요인이에요. 돈이 없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죠? 그게 맞는다면 부자들은 다 행복해야 되잖아요. 안 그렇거든요. 그러면 또 뭐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 그럼 좋은 부모 만난 사람들은 다 행복해야 되잖아요. 그건 아니잖아요. 그죠? 내 불행은 내 얼굴이 못생겨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잘생긴 사람은 다 행복해져야 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여러분 자신이 증명하고 있잖아요. 인간의 불행의 원인은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모두 다 지엽적인 것이고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데에 모든 불행의 요인이 있는 것이에요. 자,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더 이해를 잘 하실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볼게요. 쓸데없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참 많죠. 저도 열등감에 시달렸던 사람이거든요. 심지어는 나는 왜 이렇게 키가 클까? 지금은 하나도 안 큰데 어려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야, 너는 멀대 같이 키만 크냐.” 그런 소리 몇 번 듣고 나니까 나는 왜 이렇게 키만 클까? 아무리 봐도 내가 뭐 잘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못하는 것도 없었지만 또 특별히 잘하는 것도 하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런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 있죠? 근데 언제 그런 열등감이 사라지게 되는지 한번 보세요. 자기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간이 참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며 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와서 “야, 너 진짜 너만 한 사람 없어.” 사람이 진짜 자기 절망에 깊이 빠져있을 때에 누군가 와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격려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존감이 살아있을 때에 그게 격려가 되는 것이지 이게 완전히 무너진 사람들한테는 “야 진짜 너만 한 사람 없어.” 이러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거예요. 자기는 자신이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 하는데 “야, 너 같이 잘생긴 사람이 어딧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거예요. 그렇죠? 내가 여러분 보고 신앙생활 잘 하는 여러분들에게 다가가서 “신앙생활 참 잘하십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처 안받지만 예배도 안 나오고 오락가락 하는 사람한테 다가가서 “신앙생활 참 잘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교회 안 나오려고 할 거예요 “이게, 누구 놀리냐.” 말이죠. “야, 목사가 한번 교회에 안 나왔다고 이제 마음이 꼬부라졌구나.” 딱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에요. 거 봐요. 그렇게 입장이 다른 거예요. 물론 이제 ‘잘’ 이라는 말을 ‘잘’ 이렇게 하느냐. ‘자아알’ 이렇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하튼 그런 원리라는 거죠. 근데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아무리 주위에서 너는 뭐도 괜찮고, 뭐도 그래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기가 그 하나님에게 있어서 관심 바깥이라고 생각 됐었는데 그 하나님이 자기를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에 자존감이 회복되고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게 생각 될 때에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그 하나님이 사랑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오랜 동안 자기를 묶어두었던 열등감과 이 치욕스러움에서 해방되게 되는 것이에요.
(예화) 이런 얘기하면 여러분 모두 웃으실 텐데 제가 철들기 전에 어렸을 때에 국민 학교 다닐 때까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저학년 때까지. 제일 저를 힘들게 만드는 어른들의 두 말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거고, 또 하나는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 이거 두개에요. 여러분, 제발 그 얘기 좀 하지 마. 근데 아니 가끔 놀리는 거예요. “야, 너 임마.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근데 평소에는 괜찮은데 뭔가 부모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 되거나 동생들과 차별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때 그게 아주 새록새록 생각이 나요. 그러면서 “맞아. 난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게 분명해.” 그리고 거울을 보니까 진짜 동생들하고 얼굴이 다른 거예요. “봐. 난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제는 어느 병원에서 낳고 어느 병원에서 낳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나는 어느 병원에서 낳다는 얘기 못 들었으니까 진짜 다리 밑에서 주워 왔구나. 집에서 낳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는데 어쨌든지 간에 다리 밑에서 낳은 게 아닌가? 그때 다리가 있었거든요. 우리 동네에. 근데 그 다리, 종암동 다리 밑에 꽤 큰 다리였어요. 근데 그 다리 밑에 누가 사냐하면 타마구종이로 이렇게 움막을 쳐놓고 양아치들이 사는 것이에요. 그래 가지고 비닐봉지를 들고 가서 막 비빔밥 스타일의 짬밥들을 다 얻어다가 그 항구에다 집어넣고 불 때가지고 끓여가지고 디글디글 먹는 거예요. 그 애들이 가가지고 돌도 던지고 놀리지요. 그러다가 이러면 애들이 질겁해서 도망을 가고 하는 건데 거기를 지나면서 자꾸 생각을 하는 거죠. ‘저기에 우리 형제가 있을까? 나를 저기에서 주워왔다는데’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망태할아버지 잡아간다는 것. 그때는 망태가 굉장히 컸어요. 그래서 넝마주의들이 망태를 이렇게 했는데, 나는 할아버지가 그거 하는 것은 못 봤는데 이렇게 해서 집어넣고 다니는 거죠. 그러니까 애들은 거기에 한10명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거예요. 근데 거기에 잡혀갔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지만 이제 애들을 잡아다가 뭘 하는 지가 어려서 그렇게 궁금했어요. ‘어디로 데려갈까? 끓여 먹을까? 어떻게 할까?’ 근데 그게 ‘너는 우리 집 애가 아니고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그러니까 나중에 하는 얘기가 망태할아버지 보고 가져가라고 해야겠다. 딱 아귀가 맞는 거예요. 논리가 딱 맞는 거예요. 주워왔으니까 이제 버리는구나. 저는 그래서 사실 뭐 그때는 다 그랬지만 저는 어린 기억에도 이렇게 우리 아버님이 오늘도 나오셨을 텐데 저를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그런 기억이 없어요. 요즘 애들을 우리도 보면 막 끌어안고 중학교 다니는 그 큰 놈 끌어안고 뽀뽀해주고 뭐 사랑한다고 그러는데 난 한번도 그런 걸 기억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언젠가 아버님한테 물어봤던 것 같아요. “왜 그런 것 한번도 안 해주셨냐?” 그랬더니 “우리 아버지도 안 해주셨다.”
그땐 다 그렇게 키운 거예요. 근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 하는 게 이거예요. 그러면 말이죠, 하나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 있잖아요. 그렇죠? 그 아이들에게 최선의 해결은 뭔지 생각을 해보세요. 좋은 옷, 많은 용돈, 멋있는 차, 훌륭한 대학 해결돼요? 살아는 가겠죠. 그렇지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언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사건을 통해서든지 뭘 통해서든지 간에 깊이 경험하고 그 아들인, 딸인 자기 자신을 자녀로서 깊이 사랑하고 부모에게 있어서 내가 매우 귀한 존재이고 이 부모의 성품은 자녀인 자신을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그런 쓸데없는 속박에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이것을 염두 해두고 오늘 시인이“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에게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 나는 모른다. 나는 너희 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하나님은 내 목자다. 왜냐하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경험이 있고 내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심으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었으니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나는 고백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에요. 이걸 생각해야 되는 것이에요. 뭐냐 하면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서 있어서 가장 관건이 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에요. 이 경험은 단지 기적이나 은사 그리고 강력한 어떤 신비한 체험, 그런 것이 신앙에 있어서 핵심이 아니에요. 핵심이 아니라 잘 들으세요. 신앙에 있어서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이에요. 그러면 그 두개가 어떻게 다릅니까? 다르지요. 예를 들자면 서울에 와서 하숙을 하고 있는 자녀를 보면서 시골에 엄마 아빠가 올라와서 고생하고 있는 아이 공부 하는 걸 보면서 끌어안고 ‘그래 너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이거는 인격의 경험이고 ‘그래 밥이라도 거르지 말고 사먹어라.’ 그리고 5만이고 7만원이고 넣어주는 것은 이거는 또 다른 신비한 경험들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알죠? 그러니까 항상 신앙에 있어서 체험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체험이라고 말할 때에는 꼭 신비하고 매우 영적인 이런 것들만 생각하지 말고 인격인 경험이에요. 신앙이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잖아요. 그렇죠? 하나님이 전에는 하늘에 계신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방언하지 못하고 기적을 보지 안했어도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이 느껴지는 거예요. 온 몸으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에 대한 인격의 경험이에요. 혼자 있을 땐 전에 혼자 있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있는 동안에는 혼자 있을 때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해요. 이게 기도잖아요. “하나님, 지금 너무 아프거든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하나님 오늘 너무 기쁜 날이죠? 그죠?” 이렇게 그 인격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게 인격적인 경험이 동반된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능해지는 거예요. 아무리 여러분들이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교회에 출석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인격적인 경험이 없으면 예배드릴 때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교회당 나가면 하나님 없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 담을 쌓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삶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는 것이에요. 이런 하나님의 인격을 여러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인격이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어야지만 비로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아직까지도 부인의 등살에 못 이겨서 교회에 나오는 불쌍한 남편들이 있습니까? 금년에 가기 전에 그런 삶은 종식해요. 자존심 상하지도 않아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서 교회에 나오거나, 매주일 주는 용돈이라는 현상금 때문에 부모의 강요를 받아서 교회를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니는 회사가 기독교인 회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있습니까? 미션스쿨에서 도장 받아가기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주보 받아가지 위해 교회 오는 사람 아직도 여기 참석하고 있습니까? 이제 그분은 이제는 모두 버려야 돼요. 하나님이 계시면 믿는 것이고, 안계시면 그만두는 것이지 그게 뭐예요? ‘하나님 살아계셔?’ ‘아니.’ ‘왜 교회에 나가?’ ‘그래두.’ ‘뭔데?’ ‘안가면 찝찝해.’ 이게 뭐예요? 하려면 하고 안 하려면 집어치우고 정리해야죠. 확실히 하라 이거예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지금 이 시간에 뭐하려고 여기 앉아서 이런 이야기 듣고 앉아 있어요. 세상에 가서 한 푼이라도 벌지 놀면 뭘 해요. 그래도 떠날 수 없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언약에 묶여있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그러면 이제는 생각을 해요. 나도 이제 부인 눈치 보면서 교회 나가고 그런 게 아니라 남편 눈치보고 교회 나가는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경험했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나는 주님이 좋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지 이게 진짜 신앙생활이지 그렇지 않아요? 이 교회에 저 교회 오락가락하면서 말이지 그렇게 살아서 뭐해요. 여러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으면 일평생 교회를 다니다가 마지막에 죽을 때, ‘천지신명이여...’ 그러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된다구요. 낳기만 하면 다 부모에요? 부모의 몸에서 나오기만 하면 다 자식이에요? 함께 사귀고 사랑하고 허물을 덮어주며 함께 동고동락하고 살아가는 이 교제 속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기억하세요. 피가 물보다 진하다라고 할 때에는 피붙이끼리 섞여서 살아갈 때에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지. 그걸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도 없이 매일 매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이 세상 사람이 모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는 신앙 고백 없이 우리 부인의 하나님, 우리 애들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님 그러고 살아가야 되겠느냐? 이게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불연 듯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해야지 내가 그분의 인격을 경험하고 나도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라. 이 얘기에요. 보십시오. 돈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서 거리로 뛰어나가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그 인간 죽어버리기를 기도하는 것이 인생의 도움이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면 죽여 버리든지 죽일 수 없다면 죽을 때까지 안 보고 사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돈이 생기고 막상 그 사람이 죽어도 진정으로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에요.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에 의해서 인간의 불행의 요인들이 해소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신지를 배우는 것이 인생을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질러가는 지름길이라 이거죠. 자, 곤고합니까? 고통 받으십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괴로우십니까? 그래 여러분들의 삶에 진정한 안식이 없습니까? 죄의식이 있어서 가책을 받고 있습니까? 이제 내가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씨름하던 그 문제에서 떠나십시오. 손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잠시 접어두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시선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하십시오. 거기 모든 답이 있습니다. 이렇게 배우십시오. 지금 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말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책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 하나, 하나 알아가면서 여러분들이 포기했던 여러분들의 문제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면서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이 이러한 과정을 밟으면서 선조들이 믿었던 위대한 하나님을 오늘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23편의 숲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이제 것까지 여러분들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차례입니다. ‘주님, 주님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오랫동안 사단이 나의 마음에 깊은 어두움을 드리워서 어떤 진리의 빛도 깃들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어두운 나의 마음을 찢으시고 선명한 지식의 빛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 마음 가운데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셔서 주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새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①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上)
시편 23편 1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한때 양을 치는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목동으로서 양을 오래도록 쳐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늘 시편 23편을 이처럼 그림같이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목자라고 말입니다. 이 목자라고 하는 말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목동이었던 다윗이 지금은 하나님께 한 마리의 양으로서 돌봄과 보살핌을 받는 목양 아래 있지만 한때에는 자기도 목자로서 많은 양떼들을 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늘 다른 사람 아닌 그러한 경험을 가진 다윗이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이렇게 부른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그림이 성경에 하도 많이 실려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이 참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커다란 전쟁을 수행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는 장군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강한 능력으로 기적을 베푸셔서 자기가 원하시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하시지만 어떤 때는 마치 하나님이 힘없는 분처럼 먼 길을 떠나가는 당신의 백성을 향해서 눈물 흘리시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하나님에 대한 그림이 실려 있지만 그것을 하나로 모두 통합해서 묶으면 그게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다 라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짐승을 치는 사람입니다. 짐승을 치되 그 짐승을 잘 자라도록 돕고 보살피면서 길러주는 선한 사람입니다. 23편에는 어느 곳에도 목자라는 말은 나오지만 그 목자가 양을 기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양을 키우고 있는 사람만 목자가 아니라 돼지를 치는 사람도, 소를 치는 사람도 말을 기르는 사람도 목자입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 번도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손에 기르는 돼지나 황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이 생각은 파란 풀밭, 그리고 그 풀밭도 하늘이 맞닿은 파란 풀밭, 그리고 정말 그 세제로 목욕을 하고 드라이기로 말린 것처럼 티 한 점이 없는 아주 순백의 깨끗한 양, 그런 양이 파란 풀밭 위를 뛰어나는 그런 그림을 이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상상을 하고 우리가 바로 그러한 양이라 생각을 합니다. 사는 건 개판처럼 살아도 상상은 순백의 양이라고 상상을 하는 거죠. 그렇게 상상을 하는데 무슨 비용이 들겠어요? 자기 맘이지. 근데 사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양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긍정적이에요. 그래서 어느 사람을 가리켜서 그 사람은 양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잔재주가 없고 그리고 순하고 착하고 뭐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양이다 그럽니다. 여러분, 양하고 이리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이리가 이겨요. 이리가 훨씬 낳죠. 그래도 여러분들이 누가 말할 때에 ‘저 사람 참 양 같아.’ 그러면 가만히 있어도 ‘저 인간은 이리 같아.’ 그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아주 우호적이에요. 그러나 그거는 코리안 컨텍스트에요. 한국의 문명이라. 우리는 양이 별로 없잖아요. 근데 정작 이 양을 많이 키우는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서남아시아와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양 그러면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짐승이 아니에요. 지금도 이란이나 이라크 지방에 가면 가장 험악한 욕이 뭐냐면 양 같은 놈이라는 것이 가장 험한 욕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양은 어떤 존재냐면 욕심 많고 멍청하고 그러면서도 고집만 있고 게으르고 더럽고 그런 짐승의 대명사가 양이에요. 양을 가만히 보면 이 양은 누군가의 보호가 없이 살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성경도 양에 대한 생각은 긍정적이지만은 아니에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뭐라고 나오냐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러니까 양의 특징이 뭐냐 하면 고집이 많고 제멋대로라는 거예요.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거죠. 그 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모든 짐승들이 자기를 보호할 만한 방어기제를 다 가지고 있어요. 사자는 빠른 발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맹수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합니다. 호랑이는 말할 것도 없고요, 치타 같은 것도 그렇죠. 그런가 하면 또 기린은 목이 길어서 그래서 멀리서 오는 적을 미리 동태를 살필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카멜레온 같은 것들은 싸워서 이길 힘은 없지만 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위에 색깔과 같이 변신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스컹크 같은 것은 하다하다 아무 것도 방어기제가 없으니까 그거를 해서 다른 사람들을 졸지에 기절시키고 적을 따돌리는 그런 재주도 가지고 있어요. 이 양은 어때요? 아무것도 자기를 보호할 방어기제가 없어요. 날카로운 이빨이 아니라 풀을 뜯어먹기에 적합한 사람 이빨 같은 어금니가 발달한 치아를 가지고 있고 빠른 다리가 없어서 종종걸음을 치며 걸을 뿐이고, 그리고 뿔이 있기는 있는데 염소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뿔이 아니라 호떡처럼 빵처럼 이렇게 말려서 매달려 붙은 적군과 싸워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짐승이에요. 뿐만 아니라 양은 가시거리가 매우 짧아요. 2미터 정도까지 볼 수 있고 한 3미터만 넘어가면 사물이 보이질 않는데요. 성경에 보면 양이 길을 잃은 비유가 나오잖아요. 양이 그렇게 길을 잘 잃어버리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머리가 나빠서 고집이 있어서 제가 가고 싶은 대로 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일단 한번 대열에서 벗어나면 지독히 근시안이기 때문에 자기가 왔던 길을 스스로 찾아갈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길 잃은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돌아 온 양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다 이거죠.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양에게는 없어요. 그런 양이 목자의 보호를 벗어나서 광야를 다니고 있으면 그것은 광야를 사는 많은 짐승들의 훌륭한 도시락이에요. 그러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결정적인 메시지는 뭐냐 하면 양이 목자의 보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너희 인간들도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것이 하필이면 양에다가 우리를 비유하는 결정적인 메시지에요.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목사님 그 말이, 말이 안 됩니다. 왜? 산에도 양이 있잖아요. 그렇죠? 야생으로 자라는 양이 있잖아요. 산양. 배꼽이 아주 유명한 한약재죠? 그죠? 그러면 어떻습니까? 산양이든지 집양이든지, 그래요. 산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양이 있으면 산에 살아가는 양이 있으면 산에서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적응을 했겠죠. 그런데 그래서 산양이 사자와 싸워서 이겼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어요? 여전히 산을 돌아다니는 양도 그 수많은 짐승들에게 먹이가 되기는 마찬가지에요. 근데 여기서 시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양은 오랫동안 야생에서 자라온 특별한 종자인 야생의 영양들이 아니에요. 그거는 자기의 손에 의해서 기러지던 그 복슬복슬한 양들이라고요. 그러면 여러분이 또 하나 이런 질문들을 할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그렇게 양이 목자가 없이 살 수 없다는 이야기 뻔한 데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 뜻인데 그러면 오늘날 저렇게 수 없이 많이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씩씩하게 잘 삽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이런 거예요. 사니 사는 것이 오죽하겠느냐 라는 것이에요. 살고 있으니 사는 것이 오죽하겠느냐는 거죠. 변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물질이나 명예 그들의 권세 같은 것들을 부러워해도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무게를 이기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이 이렇게 술을 어마어마하게 마셔대고, 그 마지막 가는 길이 무엇인지 뻔한 데도 마약에 사람들이 빠지고, 그리고 향락에 이처럼 몰두하는 이 모습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아가는 인간의 절대적인 고독감을 이기지 못하는 또 하나의 정신병적인 증세에요. 그렇기 때문에 뭔가 깊은 쾌락에 탐닉하게 타락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병이라고요. 그러니까 말이죠, 체념하고 사는 거예요. 목자가 없이 양떼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지내다가 밤에 멍하고 있는데 사자가 달려와 가지고 단순에 채가는 거예요. 옆에 조금 아까까지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 하던 친구가 한입에 사자에게 물려서 피를 흘리면서 끌려가는 거예요. 그래도 끌려가나보다 그리고 안 끌려간 양은 옆에서 또 자는 거예요. 왜? 저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체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만과 아집 위에 무지가 겹치고 해서 전혀 풍성한 삶과는 거리가 먼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말이죠,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제가 없잖아요. 나, 한 사람만 어떻게 잘못되면 내 가족과 나와 관계된 수많은 사람이 함께 파멸로 가요. 그리고 인간은 문제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너무나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육신이 살아있지만 그러나 그의 영혼은 깊이 황폐해져 가고 내면의 세계가 모두 붕괴되어 간다 이거죠. 그런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염두 해 둔다면 살아있는 것이 모두 살아 있는 것이 모두 산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정말 움직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우리는 살았다고 말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자기를 보호해요. 우스운 질문인지 모르지만 사자와 얼룩말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대답을 해봐요. 괜찮아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대답을 해서 알아맞히면 너무 수준이 낮다고 그럴 거고 그죠? 그런데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공식은 사자가 틀림없이 이긴다. 근데 저는 그 동물의 왕국을 이렇게 보다가 어느 날 야, 기가 막히는구나. 우리의 상식이 깨지는 거예요. 얼룩말이 사자를 이기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이기나 했더니 사자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가 얼룩말이에요. 얼룩말을 뒤에서 막 따라와서 공격을 해서 뒷덜미를 물어요. 그 정도로 점프를 한다고요. 그리고 쓰러뜨리면 그 즉시 내장 있는 배부터 먹기 시작해요. 어느 날 사자가 왔는데 도시락이 많은 거예요. 얼룩덜룩한 도시락이 잔뜩 놓인 거예요. 하나만 있어도 감지덕지인데 새까맣게 놓인 거예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군침을 삼키면서 저쪽에 부터 오는 거예요. 신기하게 그 많은 말들이 도망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사자가 확 나타나니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새끼들을 가운데로 몰아요. 새끼들을 가운데다 몰고 엄마 아빠 얼룩말들이 180도 정도로 반원을 그리면서 그 엉덩이를 사자 쪽으로 보이고 서요. 뭘 하나 그랬더니 사자가 도움닫기를 하는 거예요. 점프를 해서 한 마리를 물어야 되니까 막 뛰는 거예요. 그런데 일정한 사전거리에 왔다고 생각되니까 누가 지시를 했는지는 모르는데 일제히 뒷발로 땅을 막 파면서 흙하고 돌멩이를 던지는데 이게 한 마리가 아니고 수 십 마리가 하니까 말하자면 전투에서 얘기하는 화면구성을 하는 거예요. 이런 돌멩이들이 막 날라 와요. 막 달려와서 얼룩말을 물으려고 막 점프를 하려고 하는데 이만한 돌멩이가 총알같이 날라 오더니 눈탱이에 와서 정확하게 맞는 거예요. 소리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그러더니 뒤를 돌아서 절뚝절뚝 돌아가요. 얼마나 불쌍한지 몰라요. 그런 얼룩말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제가 있는데 인간에게는 없는 거예요. 세상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려고 맘먹으면 우리는 불행을 당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오래 전에 이미 우리 조상들이 체득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팔자소관이라는 거예요.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숙명이에요. 그걸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에 잘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모습이에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요. 그리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난 후에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맛봐요.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옛날과 같이 그렇게 체념을 하고 살아 갈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가 그의 손에 기르는 양이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원래의 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만드는 불신앙은 어떤 특정한 죄라기보다는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 만만함이에요. 이게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죄에요. 죄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강도, 강간, 간음, 사기 협잡, 그런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런 모든 악한 열매의 뿌리 속에는 뭐가 있냐 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교만과 불신앙이 있는 거예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이 신앙에 안 들어 가냐 하면 사상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철학가가 예수를 믿고 회심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에요. 사상,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고 유교사상에 푹 절은 사람, 또 불교사상에 불타는 사람, 또 뭐 인생이라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개똥철학 아주 든든히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머릿속에 신앙이 안 들어가요. 그 대신 들어가면 정말 새로운 사람이 돼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런 식으로 철학을 붙들면서 살았기 때문에 신앙이 들어오면 감사하다 그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치할 수 있는 뭔가 체계를 세우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이에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흐리고 신앙이 들어가는 것 같은데 텅 빈 사람들이 많아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정말 좋은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정말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 그런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창녀요, 기생이요, 세리요,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께서 정책적으로 불쌍한 사람들, 하층 민중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적으로는 죄를 많이 지어서 지탄을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죄를 많이 짓지 않은 당시에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주님이 전심으로 의뢰하고 하나님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여러분에게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에 깊은 간구,
마음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마음 뉘 알아주리요.
그런 마음이에요. 이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면 신기한 게 믿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간적인 박력은 점점 사라집니다. 예수 처음 믿고 만신창이가 되어가지고 이제 예수 좀 믿어 보겠다고 온 사람의 딱 얼굴을 보면 말이죠, 이 얼굴 속에 뼈가 들어갔어요. 근육 속에.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웃지도 않아요. 슬픈 얘기를 해도 눈만 껌벅껌벅, 심각해지면 자. 우스운 얘기를 해도 안 웃고, 슬픈 얘기를 해도 안 울고, 심각한 얘기하면 자버리고 그래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하면 이 뼈들이 하나씩 빠지기 시작해요. 그리고 근육이 쫙 풀어져요. 요만큼만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우스워서 뱃살을 잡아요. 그리고 조금만 슬픈 얘기를 해도 눈물이 막 흐르고. 그게 뭐에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정서적인 해방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이죠, 정말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찾으셔요. 신앙이 깊어지면 인간적인 박력이 빠져 나가요. 박력이 없어요. 왜? 자기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거든요. 그러니까 신앙이 없었을 때에는 일 년 내내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어요. 그래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하나님 도와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훼방만 놓지 마십시오.’ 도와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대. 교회 나가면 불길한 예감이 든대. ‘이러다가 뼈도 못 추리지’ 그런 생각이 든대. 이건 하나님이 복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 훼방만 놓지 마라. 그러던 사람이 신앙이 들어가면 점점 더 많이 기도해야 돼는 거예요. 왜? 자기의 힘으로는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옛날에는 잘 산다고 그랬는데 사실은 그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옛날에는 하나님을 정말 잘 섬겼는데 왕년에 말이죠. 근데 금년에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년에 하나님을 섬길 자신이 없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하나님, 주님이 저를 붙들고 계실 때에만 제가 주님의 자녀처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옛날에 예수 제대로 안 믿을 때에 누가 ‘야 넌 너무 약해.’ 그러면 ‘씨, 내가 왜 약해. 내가 얼마나 강한대.’ 그러던 사람이 이젠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 저를 너무 강한 사람으로 보지 마옵소서. 저는 주님이 붙들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이만큼 사는 사람이고 주님이 저를 놓아버리시면 곧 쓰러질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고, 그리고 산에서 흔들리고 있는 갈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마음이 생겨요. 아침이면 아침이기 때문에 주님 없이 살 수 없고 낮이 되면 낮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밤이 되면 밤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잠 들 수 없는 그런 사람. 그래서 하나님에게 절대 의존적으로 절대 의존적인 사고 속에서 매일 하나님의 도움에 중독 된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만난 사람의 신앙생활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문제는 죄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죄 가운데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이에요.
주여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노래이고 구원이며 나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심령을 두루두루 살피시면서 그런 마음을 누가 가지고 있는 지를 찾으시는 거예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
(예화)봄철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 같은 곳에 많이 가잖아요. 언젠가 한번은 어느 대공원에 갔는지 뭐 어딘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튼 그런 곳을 갔어요. 그 앞에 머리는 예쁘게 땋아서 파마를 하고 옷도 어쩜 그렇게 화사하게 비싸 보이는 공주 같은 옷을 입고 애도 그렇게 예뻐요. 한 5살쯤 됐을까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예쁜 양말에다 샌들을 신고 걸어요. 애가 행복한 표정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애가 울기 시작해요. 두리번거리더니 ‘엄마!’ 그러고 막 울어요. 이렇게 보니까 애가 완전히 입술이 새까맣게 질려서 우는 거예요. 여태까지는 엄마 아빠가 옆에 있는 줄을 알고 저 보고 싶은 것 보면서 덜렁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딱 주위를 돌아보니까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엄마 아빠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막 자지러지게 우는 거예요. 이쪽 손에 장난감 들고, 저쪽 손에 아이스크림 들었는데 그 아이가 어떤 마음이었겠어요? 예쁜 동물도 부모를 잃어버린 그것을 확인한 이 순간에는 이 아이에게는 그 예쁜 동물도, 재미난 놀이기구, 그 다음에 졸라서 하나 얻어먹은 아이스크림, 아빠가 사준 예쁜 장난감 이런 것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부모를 잃어버렸는데. 주위에 지나다니는 아저씨들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야, 참 넌 어쩜 머리를 예쁘게 했니? 어느 미장원에 갔냐? 야, 어쩜 이렇게 옷이 이렇게 예쁘냐? 얼마주고 샀냐? 야, 너 이렇게 차려 입으니까 진짜 이 공원의 공주 같다.’ 그런 얘기 수많은 사람이 와서 해줘도 이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없어요. 이 아이는 거기서 자지러지게 울면서 누구를 찾느냐 하면 엄마를 찾는 거예요. 엄마보다도 더 멋있게 생긴 잘 모르는 아줌마 10명이 오면 엄마를 대신 할 수 있겠어요? 필요 없어요. 엄마를 찾는 거예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그런 마음을 갖기를 원하세요. 주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세요? 여러분들은 신앙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렇게 여러분들이 나와서 예배드리는 주일 예배 시간에 좋은 차타고 스키 싣고 스키장 가는 것 그런 것 보지 말고 정말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인생의 시점에서 얼마나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좌절하고 추락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힘들게 교회를 수리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들을 위해서 땀 흐리며 수고하고 일 할 때에 좋은 요리 집에 앉아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거나하게 노래 부르며 술 마시는 모습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이튿날 이른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방에서 벽을 향해서 그 술에서 깨어나고 눈을 뜰 때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쾌락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보라고요. 하나님 자녀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고 주님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기 약함이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자기 약함이. 하나님이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도록 창조해 놓으신 피조물이 바로 인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옵션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것은 필수에요. 필수. 그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삶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본래의 인생의 의미가 구현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특별히 열심히 신앙생활 하도록 이렇게 강조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특별한 신앙의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이에요. 목자 있어요? 여러분들의 인생에 목자가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인생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번민과 고통에 사로잡힐 때, 누구에게 피합니까? 비디오 가게로 도망갑니까? 영화관으로 도망갑니까? 단란주점이 피난처가 되고 있죠? 이 세상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하나님 없이 살아 갈수 없는 환경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자기를 치료하는 방법이에요. 여러분들은 목자가 있습니까? 환란의 비바람이 불거나, 시련의 눈보라가 치거나, 유혹이 손짓 할 때, 여러분들은 어디로 도망가십니까? 여러분들에게 목자가 있느냐 말입니다. 주님의 우리의 목자시라고 오늘 시인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팔을 넓게 벌리시고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예요. 아픈 마음, 상한 마음, 깨어진 꿈, 조각난 인간관계, 모든 것들을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들고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당신의 사랑하는 품으로 돌아오길 원하셔요. 저는 이제까지 예배를 인도하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약속보다도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약속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입니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 기대하셨던 삶입니다. 여기로 돌아가십시다. 한 가지 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즉, 목자가 양을 다루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신다는 말씀이죠. 여러분들은 서부 개척시대의 영화 같은 것들을 보시면 말이나 소를 집단적으로 사육을 하고 그들을 기르는 카우보이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청바지에 가죽옷을 입고 총을 차고 말을 잘 타는 사람, 모자를 쓰고 그리고 채찍을 잘 휘두르는 사람, 엄청나게 넓은 들에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을 저녁 때 이제 우리 안에 집어넣을 때에 수십 명의 카우보이들이 원을 그리면서 총을 쏘면서 말들을 한 곳으로 막 몰아갑니다. 총소리와 채찍소리에 놀란 말들이 한곳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하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그들을 우리 속으로 집어넣고 문을 닿아 걸면 카우보이의 하루가 끝난 것이에요. 소도 비슷한 방법으로 하죠. 그러나 양은 어때요? 그렇게 다루지를 않아요. 팔레스타인 지방을 여행하고 온 어느 여행객들이 글을 썼는데 이런 내용을 적었어요. 도로가 있는데 이제 이쪽에도 풀밭이고 도로 저쪽 편에도 풀밭이에요. 그런데 양떼들이 천 마리 정도가 이동을 하더래요. 이렇게. 근데 이제 차가 가는데 양이 이동을 하는데 양이 빨리 지나가야 할 텐데 양을 인도하는 목동이 갑자기 볼일이 급해진 모양이에요. 그래서 양을 내버려두고 어딘가 화장실을 향해서 뛰었대요. 그 동안에 양떼들이 움직이지를 않고 거기 도로를 가로 막고 서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빵빵하고 누르면 양들이 좀 비켜 주리라 생각을 했는데 움직이지도 않더래요. 불을 깜빡깜빡해도 안 되고 내려서 이렇게, 이렇게 비키라고 툭툭 쳐도 전혀 움직이질 않더래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양쪽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서 목자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목자가 딱 나타나더니 허리춤에서 피리 하나를 꺼내더니 불기 시작하면서 가자 그러더래요. 양떼들이 쫙 움직여요. 이게 양이에요. 이거를 통해서 우리들이 뭘 배우냐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끔 만드시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이끌어 가시는 방법이 인격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요. 여러분이 영원히 잊지 말아야 될 단어가 인격적이라는 단어에요. 그거를 여러분들이 깊이 기억을 해야 돼요. 만약에 여러분 전쟁이 나면 여러분, 어떤 방식으로 전투가 진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뭐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의 대부분도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없지만 한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철원 쪽에 가면 높은 산들이 있습니다. 산악지대가. 어느 군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게 6.25때에 하루 저녁 동안 일곱 번인가 주인이 바뀐 그곳이라고 그러면서 쭉 설명을 해줘요. 일곱 번씩 고지가 바뀌었을 때에 처음에 전투를 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위에서 공산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올라오는 아군을 향해서 막 비 오듯이 기총 사살을 할 때에 영화에서는 그러죠. 어떤 용감한 소위 하나가 막 피투성이가 된 채 권총을 빼들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뒤에서 수많은 졸병들이 네 그러고 계속 쫓아오죠. 그리고 그 소위는 총알이 비 오듯이 쏟아져도 한방도 안 맞고 마지막에는 탈환을 하는 장면이죠. 이거는 영화에서나 그렇게 나오죠. 진짜 전투가 일어나면 지휘관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뒤에 선대요. 앞으로 내보내죠. 공격 그러면 공격을 왜 하겠어요? 총알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여러 방도 소용이 없어요. 딱 한방 맞으면 안녕인데 누가 그거를 하겠어요. 안 가죠. 하도 안 가면 뒤에서 권총을 갈겨대는 거예요. 안 가면 죽여 버린다고 막 명령불복종은 전쟁 중에 사살이잖아요. 할 수 없이 일어나는 거예요. 공격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억지로 일어났는데 마침 기관총이 막 소낙비처럼 날아오면서 흐물흐물하게 시뻘건 피 덩어리가 되가지고 쓰러지는 거예요. 친구가 옆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면 눈이 딱 뒤집히는 거예요. 이 자식들 다 죽여 버린다고 그러면서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그런 전쟁이 성립을 한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해요. 오늘 잘 생각을 해봅시다. 주일날은 어디 와야 돼요? 교회에 와야 돼요. 주일날을 하루 종일 교회에 와서 사는 날이에요. 주일날을 교회 오는 날이죠. 주일날 교회 오는 날인데 교회 안 가고 놀러 가면 어떻게 돼요? 놀러 가면 큰 일 나요 안 나요? 대답을 안 해요. 자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 봅시다.
(예화)주일날인데 어느 자매가 교회 가까운데 사는 사람들이 지각을 잘하더라고요. 멀리 사는 사람들은 지각을 안 하거나 아애 안 오거나 그러는데 가까운데 사는 사람들은 꼭 오긴 오는데 지각을 해요. 교회 가까이에 사는 분들이여, 회개하라. 회개해요. 멀리서 비싼 돈 내고 이사를 와요. 어떻게 이사를 하게 됐냐? 교회 가까이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싶대. 그런데 멀리 있을 때보다 더 늦게 나오고 멀리 있을 때에는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새벽기도에 나오더니 이제 가까운데 있으니까 더 안 나와요. 근데 하튼 교회 가까이에 사는 어느 자매가 이게 뭐 우리 열린 교회 이야기가 아니고 닫힌 교회 이야기인데, 어쨌든 있는데 주일날 뭐 하는 날이냐니까 이 자매가 하는 이야기가 늦잠 자는 날이래. 주일 학교 봉사를 그렇게 안 하는 이유는 잠자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이제 푹 자고 11시에 예배 시작이니까 10시 45분에 일어나면 딱 맞는 거예요. 그래서 5분 동안에 세수하고 5분 동안에 챙겨 입고 그라고 5분 동안에 천천히 걸어가면 예배 시작 딱 됐단 말이죠. 그래서 45분에 딱 일어나서 5분 동안에 세수를 하고 성경찬송을 들고 막 떠나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거예요. ‘따르르릉’ 그래 전화를 받았죠. ‘여보세요?’ ‘어, 너 아무개냐?’ ‘어 난데. 웬일이니?’ ‘웬일은 무슨 웬일이냐?’ ‘오늘 이번에 너 우리하고 동창들이 모두 관악산으로 등산가기로 약속했잖아. 기억도 안나.’ 그러는 거예요. ‘안 돼. 난 오늘 주일이라서 교회에 가야돼.’ 그러니까 얘가 ‘야, 교회는 새털같이 많은 날, 하필이면 주일날 교회에 가냐.’ 말이 좀 안 되죠. 주일날 교회 가는 날인데 ‘안 되냐? 왜 그러냐?’ ‘아, 난 안 돼. 주일날은 교회 가야돼. 그래도 나는 교회 가야돼.’ 전화 거는 자매가 똑똑한 자매였어요. ‘야, 너 주일 저녁 때 교회 가냐?’ 자기는 주일 저녁 예배 때 안 가니까 ‘난 저녁 예배 때는 안가. 낮에만 가지.’ ‘그래, 그럼 잘 됐다. 어차피 하루 한번 드리는 거니까 낮에 가서 우리랑 놀고 그리고 저녁 때 너 가서 교회가면 돼잖냐?’ ‘안 돼.’ ‘무슨 하나님이 낮에만 오시고 밤에는 안 오시냐. 야, 오리라고 믿고 끊는다. 1시 20분까지야.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와. 과천이야. 끊는다. 오늘 안 오면 다시 안 봐.’ 시계를 보니까 벌써 11시 5분이에요. 가만히 생각 하는 거예요. 두 개를 비교하는 거예요. 컴컴한 예배당에서 목사님이 또 가면 혼내키고 말이지, 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가서 줄서서 밥 타먹고 이런 것 생각하다가 관악산, 환한 햇빛이 비치고 풀밭이 있고 아 좋다. 그래 오늘은 일반은총으로 가는 날이다. 그리고 보따리를 싸는 거예요. 성경찬송 내려놓고 보따리를 싸다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저녁 예배에 가야지 그러고 성경찬송을 밑에 넣고 갔어요. 친구들하고 오랜 만에 만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새들도 노래하죠, 물도 흐르죠, 그러면서 산을 올라가는데 정말 일반은총으로 선택한 게 참 다행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좋다고 그러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갔는데 넓직한 풀밭이 있어요. 거기 앉아서 이제 도시락을 싸가지고 갔어요. 그래서 다 까서 도시락을 먹는 거예요. 김밥을 먹다가 목이 말라서 ‘야 너 물 좀 줘라.’ 그랬더니 ‘응, 여기 있어.’ 그런데 웬 물이 뚜껑을 딱 따니까 김이 막 나오네. 이게 뭐냐 그러니까 ‘야, 맥주야.’ ‘안 돼. 교회 다니고 주일날 어떻게 이런 걸 먹냐.’ ‘야, 이건 뭐 독일에서는 음료수야.’ ‘이게 술이지 어떻게 음료수야.’ 그랬더니 친구들이 ‘야, 얘가 이게 술이란다. 맥주도 술이래. 웃기지.’ 그러니까 막 웃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음료수라니까 조금만 먹어보자. 그러고 딱 먹으니까 몇 년 동안 잠자고 있던 옛 입맛이 쫙 살아나요. 그래가지고 목마를 때는 목이 조금 밖에 안 말랐는데 이거는 먹을수록 목이 계속 말라. 한 통, 두 통 먹다보니까 아홉 통이나 먹어. 그래서 몸을 조금 가누기가 힘들고 산길이라서 굽긴 했지만 유난히 더 굽어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부축을 받으면서 걸어 내려가는 거예요. ‘야, 빨리 가자.’ 왜? ‘저녁 예배시간 늦겠다.’ 걸어가는데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어요. 교회에서 이런 일반은총을 모르고 주일마다 풀 죽은 얼굴로 컴컴한 교회당에 모여 있는 그 불쌍한 수많은 영혼들이 생각이 나요. 그러면서 이제 내려오는데 일은 마지막에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다가 관악산을 보면 다리 건너기 전에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잖아요. 선물의 집 쭉 있고 하는데 거기서 땅인 줄 알고 밟았는데 바나나 껍질이었어요. 계단에서 데굴데굴 구른 거예요. 눈을 떠보니 병원에 자기가 입원해 있어요. 그 다음 주일날 아침이 되었어요. 안내하는 집사님이 교회에서 안내를 이렇게 서시는데 웬 택시가 오더니 교회 앞에 턱 서는 거예요. 그러더니 문이 열리니까 영화에서 보면 미라같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감은 사람이 목발 두 개 짚고 누군가 부축을 받으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하고 도와줬죠. ‘안녕하세요.’ 목소리는 어디서 듣던 목소린데 얼굴이 보여야지. 눈밖에 안 나와. 이게 누구신가 그랬더니 ‘집사님, 저 이 교회에 다니는 박아무개 자매에요.’ ‘자매가 이게 웬일인가?’ ‘예배 끝나고 나서 간증시간에 말 할게요.’ 드디어 이제 기다리던 간증시간이 다가왔어요. 목사님이 지난 주간에 특별히 하나님 만나신 분 있으면 말씀해 주시라고 그러자 이 자매가 목발을 탁 들고 걸어 나와 전에 있었던 일들을 다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잘 오다가 마지막 바나나 껍질을 밟고 계단에서 일곱 바퀴 구른 다 터져서 이렇게 병원에 입원했는데 여러분 정말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늘 말은 들었지만 이게 정말 나한테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여러분 저처럼 되지 말고 주일 잘 지키세요. 그때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면서 ‘아멘’ ‘할렐루야’ 옆에 있던 사람이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주일날 교회 나오기를 정말 잘했지. 지난 주일도 낚시 좋아하던 최 집사가 교회 안 나오고 주일날 낚시 들고 갔다가 친구가 휘두르는 낚시 바늘에 코 껴가지고 다섯 바늘이나 꼬맺다는데 야, 우리가 진짜 졸더라도 꼭 교회 나와야지.’
사람들은 그렇게 간증을 해야지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일조도 마찬가지에요. 십일조를 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십일조 한 달 안 하면 어떻게 돼요? 회사 다니던 사람들은 세무사찰 나오고 사업하던 사람들은 거덜 나고 직장 다니는 사람이 왜 그런지 하튼 지난 달에 우수사원 표창 받았는데 이번 달에 그만 두라고 그러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러나 확률적으로 그런 안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때에 여러분들이 ‘아, 주일날 하루 정도 교회 빠져도 괜찮구나. 한 달 정도 띄어 먹어도 상관이 없구나.’ 그런 생각을 여러분들이 만약에 한다면 불행한 길로 접어드는 것이에요. 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한 거니까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셔요.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어느 한 순간에 참으시다가 이제는 이 인간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으실 때에 하나님 손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신앙생활이에요.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대화가 돼야 된다고요. 생각을 해보세요. 부모들이 가끔가다 그러거든요. 애들이 하도 말 안 듣고 빗나가고 공부 안 하고 그러면 붙들고 나중에 막 웅변대회 하잖아요. ‘야, 이 녀석들아, 내가 어떻게 사는 줄 아냐.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먹을 걸 먹었냐, 입을 걸 입었냐? 다 너희들을 위해서 뼈 빠지게 고생하고’ 그런 소리 할 때에 애들이 제일 싫어한대요. 애들이 말은 안 하지만 마음속으로 아빠가 그런 신파조로 나가면서 너희들을 위해서 뼈 빠지게 고생하고, 내가 왜 이렇게 밤늦게 들어오는 줄 아냐, 내가 왜 이렇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줄 아냐, 다 너희들 먹여 살리려고 그러는 거다. 그때에 아이들은 속으로 ‘아, 저 인간 진짜 상종 못하겠네.’ 어느 상담실에 문을 두드렸는데요, 그 부모가 그 엄마 아빠가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사람들이고 가정도 굉장히 괜찮아요. 아이들이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집이에요. 딸 아이 하나가 근데 이 엄마는 아직까지도 머리 안 깬 거예요. 내가 제를 위해 못해준 게 뭐있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게 자라나는 자식들한테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 가지고 있는 부모는 정말 감당하기 싫은 사람이라고요. 그 자녀들과 부모와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돈이나 선물, 그 다음에 교육 시켜주는 것, 이게 아니라 대화가 돼야 된다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은 성립을 안 해요. 무슨 말씀인 줄 아세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강아지를 아무리 사랑해도 인격적인 사랑은 아니에요. 인격적인 관계는 인격을 가진 개체들끼리만 존재할 수 있는 관계에요.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하려면 대화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에요. 말로 해서 얘기가 통해야 돼요. 인격적인 관계가 어떤 관계에요? 아버지가 자기가 요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지를 자식에 쭉 이야기를 해요. 자식이 그거를 알겠어요? 사업을 해봤어요? 직장생활을 해봤어요? 돈 받아가지고 학교생활을 하는데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들으면서 자기는 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 정말 아빠가 얼마나 힘들까? 이 IMF 상황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실까?’ 이런 것들이 느껴지고 먹을 것, 입을 것 다 대주었는데도 ‘아빠, 나 괴로워.’ ‘네가 뭘 했는데 괴롭냐? 돈을 벌어 오랬냐? 땅을 파랬냐? 응? 입혀주고 먹여주고 공부하라는데 그것도 못하냐.’ 사실 자기도 못했거든요. 그런 관계 속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을 안 하는 거예요. ‘아, 이건 난 세대차이가 나서 잘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것 진짜 고민이겠구나. 어느 친구가 싫어하는데 그 친구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것이 인격적인 관계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 인격적이라고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적으로 커다랗게 충격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자랑도 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거예요. 오죽 깨닫지 못했으면 하나님께서 한방 흙탕물에다 튀기셨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되 인격적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 하기 싫으면 관둬요. 여러분들이 하기 싫으면 신앙생활은 안 돼는 거예요. 머리를 뚫어서 깔때기를 끼워서 신앙을 이렇게 물처럼 부을 수 있는 거면 깔때기 많이 샀죠. 그렇게 안 돼는 거라고요. 자기가 하기 싫으면 소용없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교회 안 나오면 전도사님들, 목사님들이 전화 해 가지고 왜 안 나오셨냐고 그러면 안 된다고 나오라고 그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래도 나와서 깨닫고 변화 받을 기회를 마련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신앙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요. 오늘날 여러분 선택을 해요. 신앙이 싫으면 그만 두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으면 제대로 해요. 제대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으면 하나님 떠나서 사는 거고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다 라는 것이 생기면 그때는 제대로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이거죠. 인격적인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하나님이 말로 하실 때에 듣는 신앙이 돼야지만 인격적인 신앙이 성립을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어디서도 자기는 뭐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고속도로에서 몇 바퀴 구르고 사업을 하다 망해서 미국으로 도망을 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감방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만나고, 왜 하나님을 그렇게 복잡하게만 만나려고 그래요? 이렇게 말로 할 때에 듣고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시구나, 그리고 내가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 잘못된 생각이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심정이 이런 심정이구나, 그런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신 차리고 살아가고 신앙생활 하는 것, 이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이에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학교 가서는 만날 도시락 까먹고 엎드려 자고 비싼 돈 내고 학원에 가서만 공부하려고 그런다고. 여러분들 중에서도 많을 줄 모르지만 요새 과외비 지불한 사람, 여러분, 세상에 나아가서 환란 많이 당하고 나서 하나님 만나고 깨달았다고 그러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우리 보잖아요. 라디오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 사람들이 깨달았다는 것 충격적인 것 깨달은 것 있으면 한번 들어보세요. 뭐 어떡해서 하나님을 만나지를 대하소설 하나를 써도 다 못 쓰는 거예요. 뭐 사업 망하고 자녀가 죽고 막 멀리 갔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깨달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대요. 만날 가르쳐주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면 큰일 난다. 그건 행복해보여도 진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다 가르쳐줄 때는 만날 졸고 딴 생각하고 뭐 어쩌고저쩌고 그러더니 가가지고 무슨 비용이 들어요. 와 가지고 앉아 있기만 하면 깨닫는 건데 그런데 재산도 날리고 자식도 죽고 뭐 병들고 다 털어 먹고 말이죠. 요즘은 좀 덜해요. 옛날에는 꼭 우리 교회 오는 분들은 왕년에 잘 살던 사람, 왕년에 사업을 크게 하던 사람, 그리고 다 손 들고 들어와요. 그러게 말로 할 때 안 듣고 그렇게 비싼 과외비를 지불하고 그래. 차라리 그 돈 교회에 헌금하고 깨달았으면 말이지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고 좋아 하시겠어요. 그러면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돼요. 시편이 150편이 있는데 그게 나중에 편집한 거거든요. 1편에다 뭘 놓아야 하는지 편집자들이 많이 고심했겠어요. 이 시편이 연대순도 아니고 저자순도 아니에요. 가나다순도 아니에요. 그런데 1편에다 가장 먼저 둔 게 뭐에요?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이게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될 수 있잖아요.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아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이해를 해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마음을 그대로 전수 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돼요. 이게 효도에요. 효도. 여러분, 효도가 뭡니까? 효도는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5월 8일 날 갈비를 짝으로 사가지고 가서 실컷 잡수시오, 하고 안기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고요. 누구 말따나 5월 8일 날 박스에다 꽃송이 한 박스 가지고 가서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매년 한 송이씩 꺼내서 달으시라고 그게 효도가 아니잖아요. 자동이체 해 놓고 몇 푼씩 통장으로 자동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그런 것들만이 효도가 아니에요.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자기가 헤아리는 거예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게 자기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그게 효도에요. 여러분, 정말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여러분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저는 정말 교회를 목회 하면서 일평생 제 가슴에 깊이 새긴 단어가 이 인격적이라는 세 글자에요. 교회를 이끌어 가다보면 중대한 결단을 내리거나 어떤 방향으로 교회가 가고자 할 때에 그때 하나님이 목회자나 교회에 특별한 일꾼들을 통해서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휙휙 이끌어 가실 수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인격적으로 포로로 살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시켜서 데려가신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그런 경우가 있지만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든 개인적인 인격의 승복 없이는 신앙생활이 성립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싫으면 그만 아니에요. 누가 강요를 하냐 이거죠. 교회 지하실에다 유치장을 만들어 놓고 주일 한번 빠진 사람 일주일 구류시키고 말이지 그런 권한이 교회는 없다고. 사랑으로 충고하고 바르게 살라고 강력하게 요구해도 벌떡 일어나서 여러분들이 나한테 네가 뭔데 그러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영적인 권유이고 신앙의 권유에요. 하나님 앞에서 정말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에 붙들린바 되어서 그 줄에 단단히 매일 때, 여러분 이 세상에 어떠한 살벌한 법아래서 신앙 생활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그 법을 존중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니에요.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살던 사람이 어떻게 이 사랑의 줄에 매이게 됩니까? 지금 머무는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면서 예전에는 자기 혼자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것은 커다란 자랑이요, 기쁨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주님의 그 사랑의 줄에 매이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좋으신 주님의 그 아름다운 인격과 고매한 성품을 발견하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을 깨닫고 즐거운 곳에서 우리를 수없이 오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마다하고 하나님 앞 나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이러한 초라한 삶을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는 이런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노예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오지 않았습니까? 왜 교회에 나와야되는지도 모르면서 교회에 꾸물꾸물 나오는 생활, 뭔가 조직에 얽어 매여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탈출구도 없는 그런 식의 교회생활, 이런 것들이 정말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어떻게 지난 주일에 교회 못 나오겠다고 그러시더니 오늘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아, 목사님. 그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안 나오면 웬지 일주일 내내 일이 꼬이고 찝찝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식으로 교회생활 하는 사람 모두 나중에 천국에서 못 만날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정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요. 그래서 이제는 뭔가 하나님 앞에 얄팍한 그 복 받는 그런 기대나 혹은 이렇게 안 하면 하나님 앞에서 요절이 날 것이라는 그 어떤 두려움, 그런 것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노예적인 신앙생활이에요. 노예는 뼈 빠지게 일하지만 잘못된 노예는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자기의 등판에 내려 꽂칠지도 모르는 채찍이 두려워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자녀는 그렇게 일하지 않아요. 인격적으로 여러분 정말 주님을 만났습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마치 비만증에 걸린 사람처럼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 것,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은 있어서도 몸은 도저히 움직이지 않고 신앙적인 어떤 순발력을 잃어버린 갑갑한 삶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흔히 핑계 대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복잡한 사회생활이나 고단한 일과나 가정생활이나 이런 것 때문에 여러분들의 그렇게 신앙생활이 비둔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깊은 승복, 이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비만증이 걸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될 것이라는 일보다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에요. 그게 뭐냐 이거에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생활하니까 교회 와서 말이죠, 직분이나 주고 무슨 투표나 하고 해서 무슨 사람을 어르고 띄어주어야지만 비로소 힘이 나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생활이냐는 거예요.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정말 꽃 피고 향기로운 화려한 생활이 아닌 매일매일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기쁨, 그리고 죄와 어두움 속에서 아무 쓸모없는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의 감동 때문에 내가 이보다도 진한 감동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으며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좋으신 주님을 떠나서 어디서 내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주님께 굳게 붙어있는 신앙생활, 내 모든 즐거움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며 내 모든 인생의 참되 성취를 하나님의 섬기는데서 찾으려고 하는 이 인격적인 신앙생활, 노예와 같이 이끌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매일 매일을 만나는 기쁨 속에서 이 즐거운 신앙생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한 가지를 깊이 명심해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인격적인 감화 없이는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없고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면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것은 여기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라 유아실도 적용되는 원칙이에요. 젊었을 때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라 외워도 잘 외워지지 않고 이해력도 떨어지는 노쇠한 나이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라고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정말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생활,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주님의 아픈 마음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주님의 기쁜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져서 하나님이 말로 하실 때에 그 주님의 마음을 발견하면서 피가 나듯이 회초리로 맞는 것보다 더 아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주님이 오죽 하셨으면 나에게 저렇게 말씀하셨을 까, 그래서 살점이 터지고 종아리에서 피가 나는 것보다 더 뼈아픈 아픔을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 돼야 돼요. 12월 6일 날이 제 생일이었습니다. 딸내미가 이제 2학년인데 편지를 길게 써서 보냈어요.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아빠, 기도원 갔다 오시거나 설교를 하고 오셔서 피곤한 얼굴로 잠자리에 누우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요.’ 근데 편지를 보면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이게 자녀가 진짜 인격적으로 부모를 아는 거죠. 뭐 그 아이가 정말 찢어졌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어디서 많은 들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 장문의 편지를 보면서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인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하나님 저 때문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셨죠. 주님이 털 끝 하나 제 인생에 징계를 내리시거나 벌을 주시지 않았지만 하나님 그렇게 제가 주님을 아프시게 해드렸다는 생각을 하니까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때려주십시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말이죠, 이렇게 예배시간에 정신 차리고 설교를 듣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외치는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노예적인 신앙생활을 외쳐야지만 겨우 신앙생활이 가능한데 그거는 나중에 죽어보면 알지만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해약 안 해주는 보험회사에 계약한 사람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정말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없지만 주님은 오늘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서서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과연 하나님의 뜻이 그러한가를 헤아릴 수 있게끔 만드시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어요.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어요. 그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죄에서 씻어주셔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고 값 주고 사신 사람들이에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너무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모를 때에 아무렇게나 살았지만 주님의 친절한 사랑,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는 거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니까 여러분들이 막 살아서는 안 되고 여러분들이 천하보다도 귀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바르게 사는 비결을 터득하면서 정말 이제는 누군가의 강요나 어거지에 못 이겨서 신앙생활 하려면 그만 두고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 버리는 것이 낫다 이거죠. 제가 가르치던 제자가 있었는데 사업을 크게 하고 외국을 자주 드나들던 형제였어요. 그러더니 저를 언제는 찾아와서 ‘교수님, 저 미국에 갔다 오는 길에 선물을 하나 사 왔습니다.’ 그리고 뭘 하나 요만한 걸 내어놓아요. 아, 고맙다고 선물은 항상 좋잖아요. 간 다음에 뜯어보니까 볼펜이에요.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지 왜 볼펜이니. 볼펜은 한국에도 얼마나 많은데.’ 서랍에다 휙 던졌어요. 언젠가 공항에 가니 똑같은 볼펜이 있더라고요. 들여다보고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그때 IMF땐데 백 불이래요. 그러면 얼마에요. IMF때는 15만원이나 갔어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한번 만져 봤어요. ‘야, 되게 비싼 거구나.’ 누가 가끔 와서 보면서 좋다 그래요. ‘꿈도 꾸지 마라.’ 그래요. 아직 열 줄도 안 썼어요. 고대로 모셔놔요.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 봐요. 십자가를 보라고요. 주님이 그 피로 여러분들을 구속하셔서 하나님 자녀 삼으셨어요. 이제 우리는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풍성한 교제의 삶을 살면서 인생을 축복되게 살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지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면서 수시로 일어나는 자기의 동료들이 피 찢어 원수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그런 광경들을 체념하듯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비인격적이고 종교적인 습관을 따라서 살아온 신앙생활이었다면 오늘부로 종식하십시오. 과거를 모두 끊어내고 그리고 이 창립기념일에 새 출발하십시오. 어떤 신앙으로? 인격적으로 주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생활로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②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上)
못 박히셨으니 구원받고 돌아가십시오.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냉담하게 거절하고 마지막에는 화를 내면서 꺼져버리라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신실한 전도자였던 이 목회자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이라도 하고 떠나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할아버지 병상 머리맡에 고개를 숙이고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천천히 외우고 있는데 이 할아버지가 갑자기 소리 내어서 우는 거예요. 그 완악하던 사람이 펑펑 우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목사님, 아득히 먼 옛날이지만 우리 어머님이 나에게 외우게 해주셨던 그 기도가 생각이 납니다. 언제나 어머니는 저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식사할 때나 잠잘 때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외우게 했는데 이제 생각이 납니다.’ 그 마음이 열려서 복음을 다 듣고 그리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이 목사님이 다시 그 병원을 찾아가 봤더니 병상이 깨끗하고 치워져 있었어요. 간호원에게 여기 누워있던 할아버지가 어디 가셨냐고 물었더니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갑자기 사람이 변해서 늘 무의식 속에서도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수없이 부르더니 마지막에 자기에게 기도하면서 유언하기를 그렇게 말하더래요. ‘어머니 이제 제가 당신께로 갑니다.’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주기도문을 배웠어요. 그게 신앙생활이었어요. 그러나 인격적이지는 않았죠. 그러니까 지식은 지식대로 돌았지만 이제 죽을 나이가 다 되어서야 그 주기도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 펑펑 울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거예요. 신앙생활은 결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신앙생활은 노예적인 신앙생활과 인격적인 신앙생활 두 개가 있어요. 뭔가 무서워서 교회에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뭔가 복을 받으려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자는 두려움의 노예이고 후자는 욕망의 노예에요. 모두 노예적인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은 노예적인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돼야 돼요. 인격적인 신아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되어야 된다고요. 주님이 말씀으로 하실 때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식 된 자신에게 느껴져야지만 인격적인 신앙생활 되는 거예요. 근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관계가 망가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말을 데리고 물가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지만 물을 먹이는 것은 강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하나님과 말이 통하는 사이가 돼야 돼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깊이 깨닫고 말씀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으면서 하나님을 믿어야 할 참된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죠. 자기가 하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믿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올바로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셔도 하나님은 정당하신 거예요. 자기가 안 한 거예요. 이제는 여러분들이 그런 노예적인 신앙생활, 욕망의 노예가 되고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서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지도 모르게 신앙생활 하는 그런 식의 노예 된 신앙생활은 이제 청산해야 돼요. 그런 신앙생활이 전혀 여러분 자신을 지켜줄 수 없고 그런 신앙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잠시의 느낌일 뿐이고 진짜 여러분들이 신앙이 필요한 인생의 상황 속에서 그런 식의 노예적인 신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에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요점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목자라고 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한계와 약점을 알면서 다루신다는 거죠. 물론 우리 인간들 속에는 공통된 경험이라는 것이 있어요. 성공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배울 만한 것이 있죠. 그리고 또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는 공통점들이 있기는 있어요.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것과 함께 기억해야 되는 것은 나는 나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차이점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자녀들을 기를 때에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야, 임마 아무개 좀 봐라. 개는 공부 얼마나 잘 하냐.’ 저는 그런 이야기는 안 합니다. ‘야, 임마 아무개 좀 봐라. 내가 개 네 만큼 너를 돈을 안 줬냐, 학교를 안 보내줬냐, 책상을 안 사줬냐, 책을 안 사줬냐, 뭐 부족하게 해준게 있냐 아무개 좀 봐라.’ 그럴 때 애들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알아요? ‘아이씨, 미치겠네. 돌아버리겠네.’ 그러니까 개는 개에요. 제 기억에 저는 아직 한 번도 아이들에게 그런 비교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좋으면 그런 애 낳지 왜 저런 애를 낳아가지고 그러냐 이거에요. 제품이 신통치 않은데 제품에 맞게 교육을 시켜야지요. 제가 늘 말씀 드리잖아요. 공부를 조금 잘 하는 것은 정상인데 아주 잘하는 것은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제가 다니던 교회에 형제가 하나 있었는데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태어난 기계 같았어요. 진짜 그렇게 공부를 잘 해요. 어느 정도 잘 하냐면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한 번도 시험에 떨어진 적이 없었데요. 면허시험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대학원 마치면 군대를 가야하는데 군대도 시험 보면 군대 안 가는 시험이 있어요. 시험은 굉장히 어려웠어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에 여러 명 응시했는데 한명이 붙을 정도로 그렇게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너 군대 안 가냐’ 그랬더니 ‘공부해서 해결하죠.’ 그러더라고요. 열심히 공부하더니 붙었어요. ‘어떻게 됐냐?’ 그랬더니 군대 간대요. 훈련 받으러 간대. 한 달 만에 나왔는데 중위 계급장을 달고 나왔어요. ‘어떻게 진짜 불공평한 나라다. 어떻게 공부 잘 한다고 그럴 수가 있냐.’ 그랬는데 조금 있으니까 제대했대요. 6개월 만에 제대하더라고. 그게 석사장교라는 시험이에요. 참 웃기더라고요. 그러니까 운전면허까지 포함해서 일생 동안 시험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공부를 했으니까 그러니까 자기는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떨어졌을 때에 어떤 기분이 드는지, 시험에 있어서 실패라는 게 뭔지, 자기는 느낌이 잘 안 온다고 그래요. 공부를 잘 하니까 중고등부 선생을 했는데 부모가 찾아와서 뭐 저 뒤에 앉아서 한참 심각하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그땐 제가 전도사였거든요. 전도사님 뻔 하지요. 아무개 그 녀석 공부 못해가지고 집사님 속 썩여가지고 저렇게 지금 하소연을 하는 거라고. 그러더니 이 형제가 아주 겸손하고 샌님 같은 형제였어요. 근데 뭐라고 그랬는줄 알아요? 엉뚱하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전도사님, 왜 애들이 공부를 못할까요?’ 나도 애들 때에 공부를 못했으니까 가만히 있었죠. 자기 혼자 또 그러는 거예요. 자기는 정말 공부 못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데요. 왜 못하냐.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야, 너는 공부 잘해서 계속 1등만 하다가 서울대 들어 왔으니까 그러는데 너 고3때, 공부 많이 했지?’ 그러니까 ‘아니요.’ 그래요. 원래 공부 못하는 애들이 밤새고 난리를 치지 그렇게 아주 잘 하는 애들은 자기는 학원 다녀 본 적이 없고 하루에 고3때 8시간씩 안자면 활동을 못했데요. 그런데 공부 못하는 애들은 고거만 닮으려고 그러거든요. 근데 그러는 거예요. 어떻게 공부를 못 할 수 가 있네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잘났다. 그러더니 한 걸음 더 나가더니 그래요. 아니 왜 못 하네요.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면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그거 왜 못하는지 이해가 안 간대요. 그래서 내가 ‘잘 났다.’ 속으로 내가 나는 이해가 잘 간다. 한 달 쯤 지났는데 코가 석자는 빠져서 인생 살 맛이 안 난대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공부만 하도 하니까 몸이 약해져서 테니스장에, 그때 테니스가 아주 붐이었어요. 그래서 그 테니스장에 이제 등록을 했대요. 그러더니 우리나라는 모든 교육의 문제가 뭐냐 하면 영어도 맨 처음에 들어가면 만날 기초 타령하고 독일어고 뭐고 하여튼 그래서 알파벳만 배우다가 결국은 끝나잖아요. 테니스장에도 똑같이 그런 철학이 적용이 된 거죠. 공도 안 주고 이것만 하라고 그러더래요. 이거. 이거를 일주일 시키더니 그 다음에 공을 주더래요. 그러더니 공을 이렇게 코치가 던져주면 치는데 한 이주쯤 됐는데 코치가 공을 집어던지더니 씩씩대면서 오더래요.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냐고 그러더래요. 내가 여기서 7년 동안 코치노릇 했지만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열 받아서 못 가르치겠다고. 아니 왜 못하니? 이렇게 치면 돼지. 책에 다 나와 있는데 모르면 나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왜 못하니? 그 형제가 처음으로 공부 못하는 사람이 이해가 되더래요. 그러면서 같이 가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잘 치는데 자기 혼자 그 구사리를 맞고 그리고 보따리를 싸들고 저녁에 걸어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대요. ‘야, 이상하다. 진짜 책에도 다 나와 있고 코치가 다 가르쳐주고.’ 공이 날라 오는데 이렇게 치면 맞을 것 같은데 근데 꼭 안 맞는다 이거에요. 공부 못하는 애들도 이런 심정이겠구나. 요렇게 하면 되겠지 했는데 안 되는 그런 것이겠구나. 맞아요. 근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나 이런 것들을 보세요. 학교 가면 공부 못하면 사람 취급도 안 해요. 사교계에 나가면 얼굴 못 생기면 사람 취급도 안 해요. 교회에 오면 나쁜 얘기지만 신앙 없으면 사람취급도 못 받아요. 그렇죠? 그게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에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는 거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셔요. 여러분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군대 훈련시키듯이 인도해서 여기에 데려오신 면도 있어요. 공동체니까. 그러나 또 한편 보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인도하시는 방식은 하나님이 달라요. 다르시다구요. 다르게 인도하신다구요. 제가 여러 해 동안 대학에서 선생님 노릇을 했잖아요. 그런데 제가 가르치던 과목 중에서 시험에 많이 든 과목 중에 하나가 이 구약성경에 쓰여 진 히브리어입니다. 이 히브리어는 제가 여러 해 가르쳤는데 이거는 글자 자체가 보도 듣도 못하던 글자에요. 그리고 거꾸로 쓴다고요. 대개 모든 글자가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나가는데 이거는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나가요. 그래서 누가 그러더라고요. 신약성경에 기록 된 희랍어는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쓰고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쓰니까 두 개가 이렇게 돌면 만나면 복음화가 된대요. 해석은 좋은데 어쨌든지 간에 그래요. 그러니까 시험을 보면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거예요. 무슨 점수를 줘도 반점을 주고 뭐 세모 표를 주고 그런 것 없어요. 틀리면 틀린 거고 맞으면 맞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과목은 몰라도 그 과목은 보고 쓸 유혹들을 많이 받아요. 그리고 레포트를 내 주면 레포트를 자기 책을 찾아서 다 쓰려면 어려우니까 남에 것을 보고서 비슷하게 쓰고 싶은 유혹을 많이 느끼고 서너 개를 놓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이렇게 따서 편집을 하고 유혹을 느낀다고. 왜? 시간이 반도 안 걸리니까. 그런데 이제 레포트나 이런 것을 딱 받아보면 선생노릇하면 벌써 눈치로 알잖아요. 딱 보면 이게 이놈이 남의 것 보고 썼구나. 알잖아요. 대학에 처음 갔을 때에는 충성이 뻐쳤지요. 레포트 수백 장을 쫙 놓고 조교하고 앉아서 똑같은 것이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요. 하루 종일. 그래서 드디어 찾아내요. 그때 제 별명이 검찰총장이었어요. 근데 이제 몇 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겼어요. 누구누구 올라와라. 내가 올라오라고 그러면 좋은 일 때문에 올라오라고 그런 적이 없거든요. 김 교수가 올라오래. 넌 큰 일 났다. 그리고 올라와요. 그러면 이제 자기가 왜 왔는지 알거든요. 그러면
4.염려를 극복하는 길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신앙의 영역 속에는 무조건 믿어야 하는 영역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일단 믿고 난 다음에는 내가 왜 그것을 그렇게 믿는지 논리를 세우고 탐구를 해서 답을 찾아내야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1절에서 여호와는 자신의 목자이시다 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5절까지는 상세하게 왜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되어주시는지를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팔레스타인 지방은 천해의 자연조건을 가추고 풀을 비롯해서 식물들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이 유리하는 생활을 해여야 했던 것도 바로 가축들을 키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축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꼴과 물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믿음의 조상들은 이제 이리 저리 유리하면서 양떼를 먹이고 가축들을 길렀습니다. 한 때 양을 치던 목자였던 다윗역시 그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지혜롭고 선한 목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을 때에 그늘에 천막이나 쳐놓고 낮잠이나 자는 것이 아니라 언덕 높은 곳에 올라서 사면을 두루 살피며 다음 날 이양들이 먹을 좋은 꼴이 어느 목초지에 있는지 살피는 법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행했고 다윗이 주님을 그렇게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필요를 그렇게 채우신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 23편 2절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요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그분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사실이고, 세 번째는 그분이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돌봄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이 의지하면서 살아갈 유일한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파란 풀밭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고 그리고 거기에 쉬게 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인간들에게 풀밭은 야유회하기에 참 좋은 장소지만 양떼들에게 이 풀밭은 도시락입니다. 그리고 그 양식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 바로 양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깊이 승복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니까 주님이 자신의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들을 시를 따라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런 공급의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문맥에서는 대부분 끼니가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식사시간에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지만 그러나 정말 우리 중에 몇 사람이나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박한 식탁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사랑의 공급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다음의 끼니를 염려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해본 사람은 이 기도의 의미를 압니다. 흐르는 눈물에 젖은 밥을 비벼 먹어본 사람들만이 양식이 없는 서러움을 알고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제가 이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염려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리고 근심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느 철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염려를 통해서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비로소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염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이 염려, 오늘 이 시를 적어 내려가는 다윗은 깊이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후일에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불후의 왕이 되어서 그래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의 추격을 받으면서 이 동굴, 저 들판을 배회하며 돕는 이도 없이 도망 다니던 시절에는 배곯는 시절을 지나야 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은 적이 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그렇게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깊이 고통을 받고 가슴 아파 본 사람 이 다윗이 나의 모든 먹고 입고 쓸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백할 때에 그 고백은 남 다른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먹고 입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당신을 섬기고 사랑하는 대신에 마음 전체가 먹고 입고 마시고 쓰는 그 염려로 가득 찬 채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염려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몇 칠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미국에서 많은 군인들이 이 한국에 있는 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중에 벤플릿트 장군만 해도 약 3만 명이 넘는 한국의 고아들을 미국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쟁의 상처를 씻고 새 삶을 살게 만들어 주었죠. 그런데 그때 일입니다. 전쟁 통 안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길거리를 유리방황하는 어린 고아들을 모두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그리고 미군들이 먹는 좋은 식사로 기름지게 저녁을 먹여서 깨끗한 침대에 아이들을 눕히고 그리고 재웠습니다. 그런데 왠지 아이들이 잠을 자지 않습니다. 미군병사가 통역을 세워서 왜 잠을 자지 않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아저씨, 우리 내일은 뭘 먹어요?’ 그러니까 배가 부르고 편안한 환경이 되었는데도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이 편하지 않는 것이에요. 이 지혜로운 병사가 취사반에 연락을 해서 아이들 머리통만한 햄버거를 만들어서 내일 먹을 것이라고 하면서 모두 나눠주었어요. 배부른 아이들은 그것을 가슴에 안고서야 새근새근 잠들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고 하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도록 주님이 명령하셨는데 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지 못할까요? 그것을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큰 원수나 마귀, 질병, 가난, 고통, 시련, 전쟁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무엇일까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일상의 생활을 위한 염려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마치신 말씀이 내일을 위하여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장엄한 소명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이 그리스도인의 그 부르심을 따라서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염려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들에 피는 백합을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주님이 말씀하셔야 됐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에 의하면 인간이 먹고 마시는 문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이 땅에 자기가 아끼는 보물을 쌓아두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면 그 다음에 우리를 제일 잘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자식, 우리 남편,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훌륭한 방법, 가장 손쉽고 필수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돈이에요. 돈을 가지면 돈이 할 없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돈만큼 많은 일을 손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아무리 신앙이 돈독해도 새로 산 차를 타고 새로 산 집에 누워서, 혹은 새로 산 의자에 앉아서 그래본 적 있을 거예요. 야, 확실히 돈이 좋긴 좋구나. 돈 좋은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전에 내가 자랑하던 것, 내게 유익하던 것은 다 배설물과 같도다. 이 세상에 있는 돈도 다 배설물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은 ‘아, 그 배설물 나한테나 다 쏟아주지.’ 돈이 그렇게 좋은 거예요. 근데 그걸 그렇게 애써서 모으는 것도 무엇 때문이냐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에요.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얼마나 구두쇠요, 노랭인지 하튼 돈 관리를 아무한테도 안 맡기고 자기 혼자 하는 거예요. 수십 개의 통장을 가지고 그래서 돈을 갖고 빼고 꾸기도 하고 다른 사람 꿔주기도 하고 그랬는데 딱 죽고 나니까 그 사람한테 꿔갔다는 사람은 하나도 안 나오고 빚 줬다는 사람만 새카맣게 나오는 거예요. 자기는 그 통장을 가지고 일생동안 그 돈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시고 나니까 그 모든 것들은 다 버려지는 것이에요. 염려와 근심을 많이 하는데 문제는 우리들이 그렇게 염려하고 근심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먹고 산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에요.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먹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먹고 살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손 놓고 무위도식해서는 안 되죠. 뭐라도 우리들이 열심히 해야지요.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야지요. 한 푼이라도 벌고 그리고 열심히 생활해야지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한 자신의 노력이 자기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산다는 그런 신앙의 고백을 가져야 하는 것이에요.
(예화)어느 권사님이 꿈을 꾸셨는데 옛날에 넝마주의들이 지고 다니던 커다란 망태 기억하시죠. 대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싸리나무로 만들기도 하는데 굉장히 크잖아요. 그거를 자기가 지고 가더래요. 길거리를 가는데 계속 까만 보자기가 떨어지더래요. 집게로 계속 집어넣는데 한 없이 가도 가도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잔뜩 집어넣고 꿈에 그거를 지고 가다가 도저히 무거워서 질수가 없어서 그 짐에 깔렸대요. 깔려서 드러누웠는데 드러누워서도 집게로 집어서 계속 그거를 망태에 집어넣는 거예요. 눈을 들어서 보니까 저 앞에서 웬 시커먼 놈이 낄낄 거리며 웃으면서 계속 그 시커먼 보자기를 뿌리면서 언덕 위로 올라가더래. 그러니까 마귀죠. 마귀가 근심과 염려를 계속 뿌리는 거예요. 그거를 계속해서 집어넣으면서 가는 거죠.
근심과 염려에는 신령한 근심과 염려가 있고 그리고 속된 근심과 염려가 있어요. 신령한 근심과 염려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징조에요. 돈만 있고 밥만 먹으면 아무 염려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 영혼은 정말 하나님 앞에 안전한가? 그리고 나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인가?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나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왜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주님을 모른 채 죽어갈까.’ 이런 것들은 거룩하고 신령한 근심이에요. 그런 근심은 결코 우리의 육신에 해를 주지 않아요. 그것을 기억하라고. 신령한 근심은 오히려 우리의 육신에 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을 더 활기 있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신령한 근심을 너무 많이 해서 스트레스 쌓여서 죽었다는 사람 봤어요?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너무나 고민하다가 돌아버렸대요. 어떻게 하면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을까를 너무나 고민하다가 화병이 생겼대요. 그런 것 본 적 있느냐 구요. 신령한 근심은 우리에게 그런 악한 영향을 가져다주지 않아요. 근데 문제는 뭐예요? 이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까 하는 고민들 그러면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금방 목사님은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너무 절박한 문제다. 흐르는 눈물에 밥을 비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모른다고 그렇게 얘기해놓고 지금 와서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게 무슨 이율배반이냐. 이율배반이 아니라 우리들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문제라고 해서 그것과 비례해서 더 많이 고민을 함으로서 우리들이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필수적이잖아요. 근데 언젠가는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지고 고민을 한다고 해서 그게 내게 도움이 되느냐 구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불러 가시는 거예요.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죽음에 공포에 휘감겨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중요한데 맡긴 거예요. 체념한 거죠. 먹고 입고 사는 문제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그런 고백이 있어야 되요. 그러면 왜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 부지런히 애쓰고 노력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이 왜 없느냐? 왜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마시는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리고 그것으로 마음이 새카맣게 숯덩이가 되고 그것에 모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일 년을 살았지만 뭘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한 푼이라도 모으려고 몸부림친 것 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을 바치면서 산 시간들이 너무나 없었다는 고백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승복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시편에서 시인이 어려운 일을 만날 때면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이 어디서 오나 그랬어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면 눈을 들어서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많은 산들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왜? 저 큰 산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그 창조주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신데 내가 이만한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손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에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오는 도다 라는 고백을 가진 거예요. 결국 인간들이 몸부림치며 버리적 거리면서 살지만 그러나 사는 것이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주체성이 강한 사람들을 싫어하세요. 주체성이 강하고 그리고 자기 아집이 강하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자기가 아니면 해결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인생의 문제도 나 아니면 해결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 하나님이 안 좋아 하셔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받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깊이 승복해서 주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나면 그 다음에 즉각적으로 우리 마음에 파고드는 복음적인 생각이 무엇이냐면 ‘아, 나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구나.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구나.’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거예요. 지난 한해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고백하는 거예요. 집에서 놀면서 빌어먹은 사람들만이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일 년을 열심히 살았던 사람도 결국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살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비롯해서 매일 매일 부딪치는 문제들 때문에 불안해하고 염려하면서 가슴을 끓이고 평안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깊이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되 그 동기 자체가 순수하지 않은 거예요. 부모 적부터 계속 교회 다녔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교회 나오는 거예요. 부인의 손에 강제로 이끌려서 그 바가지가 지겨워서 간신히 교회 나오는 그런 신앙생활,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넌 꼭 교회 다녀라 유언을 했다고 해서 부모님이 죽을 때에 교회 꼭 다니라고 유언을 한 것은 요 시간에 교회에 가서 매 주일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라는 그 유언이었겠어요? 제대로 잘 믿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겠지.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가면 왠지 일주일 내내 찝찝하니까 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그런 생활, 그런 것들은 비인격적인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세상에 가면 하나님 눈치가 보이고 하나님 믿으면 세상 생각에 유혹을 끊지 못하는 거예요. 세상에 가도 이방인이고 신앙의 세계에 와도 왠지 이방인이에요. 열렬하게 하나님 믿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양다리 걸치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그렇게 신앙생활 하니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서도 늘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할까 근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완전한 사랑과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인격적인 깊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는 다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그의 생각은 늘 염려 속에 깊이 감겨 있어요. 일단 염려와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정복하고 나면 마음은 우리의 몸의 사령부이기 때문에 나머지를 정복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온갖 탐욕과 범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직장생활하고 신앙생활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고 사업할 때는 자꾸 신자라는 이야기 하지 말라 그러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되겠냐 거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정말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것이 여러분들을 실질적으로 먹고 입고 그리고 마시고 살아가는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느냐는 것이에요. 하나님께 목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의미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만 하나님께 맡기고 사소한 것은 우리가 알아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 그런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지만 이런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살다가 죽을 수 있는 것이에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리고 정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고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자기를 구원해 주신 이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고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오니 이제까지는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을 내 맘대로 살면서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렸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 인격적인 승복, 그래서 주님의 행복이 내 마음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즐거움이 내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보람이 되는 그 인격적인 관계,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듣고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을 전해주시고 그 마음을 우리의 속에 담아서 그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 진실한 신앙생활, 이 신앙의 생활로 들어설 때에야 만 비로소 모든 먹고 입고 쓰고 마시는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목사님, 너무 그렇게 신앙, 신앙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제 것까지 살아가면서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 같은 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돈도 있고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여력이 제게 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에요. 그렇게 여러분들의 염려를 해결해 줄 수는 물질을 손에 넣기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픔을 드렸는지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의 인격이 기초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범죄와 하나님께 드리는 고통의 연속이에요. 그리고 그런 터 위에서 여러분들이 부를 쌓고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쌓은 부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하면 여러분들의 그 번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실까요? 정말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고 종이 상전의 손을 주목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의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 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그런 가슴 여린 고백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세요. 그래서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그것을 믿고 안심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가진 것 없어도, 혹은 가진 것이 있어도 있는 것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는 삶, 그것 아니겠어요?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정말 많이 있는 사람도 그 물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매일매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의지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사람의 도움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목매여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 먹고 입고 마시며 사는 방법이에요.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무엇이 살았습니까? 좋은 직장 얻었기 때문에 잘 살았나요? 동방의 귀인이 나타나서 여러분들을 도와줘서 토정비결의 뜻대로 잘 살았나요? 부모님 덕분에 잘 살았나요? 아닙니다. 저희 교회에 작년에 여기 이사 올 때에 우리 모두 떨리는 마음이었어요. 왜? 일 년의 예산을 짜고 나니까 그 지난날에 우리들이 짠 예산보다 두 배 반이 넘었어요. 이 돈이 꼭 필요한데 나올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일 년을 지내왔어요. 그리고 일 년이 지나고 결산을 해보니까 진짜 넘치도록 들어와서 그래서 우리의 모든 염려가 해결되고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며 전도하고 있습니다. 돈이 그 일을 했죠. 그러나 우리는 돈 때문에 교회가 운영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주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면 누가 헌금했겠으며 또 헌금 할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실제로 여러분들의 생업에 복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마음에는 원이로되 환경적으로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결국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이제껏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었습니까? 태어날 때에 빈 손들고 태어나서 이제껏 살 때까지 시시때때로 여러분들을 먹이고 입히시며 IMF의 극심한 위기 상황에서 여러분들을 거리를 유리하는 노숙자들로 만들지 않으시고 여러분들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그리고 먹을 것을,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여력과 그리고 상처 받지 않고 모든 가족들이 궁핍함이 다소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어려움을 이기며 화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모든 그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러한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들의 쓸 것을 우리의 육신,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서 우리를 이제껏 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에 거미줄 같은 신앙이지만 붙들고 여기까지 와서 이만큼이라도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동이 양을 이끌고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가서 거기에서 풀을 먹게 한 것처럼 주님이 우리의 육신에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고 그런 은혜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만입이 있어서 하나님께 다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향해서 주님의 이 말씀을 대입할 때에는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만합니다. 일 년 동안 비록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가 걱정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영혼이 심한 기갈 상태에 있어서 육신의 허기짐을 면하였어도 영혼이 곤고해서 마른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았을 때에 여러분들 앞에 샘을 터트리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이 여러분들의 영혼이 고단하고 그리고 불안과 염려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여러분들을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셔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진정한 생수의 샘을 주신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여러분들을 인도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영혼의 목마름이 육신의 목마름 보다 훨씬 큽니다. 목마를 때에 여러분들에게 생수의 샘을 터서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목을 축이게 하시고 곤비한 영혼이 길거리에 쓰러져 있을 때에 말씀의 떡을 여러분들에게 공급하므로 기력을 회복하게 만드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한 해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의로운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중에 얼마큼이나 보답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목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는 늘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죄 가운데서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불순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영혼과 육신에 지속적으로 공급해주심으로 오늘 이렇게 살아있게 만드셨습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주의 성실하신 도우심으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있게 된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제껏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리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난 해에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들 불안해하는 불확실한 내년 한해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만 하면 넉넉히 이길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이 인격적으로 깊이 주님께 승복하고 그리고 그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거짓과 허위와 위선과 가식과 그리고 이 모든 허물은 버리고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경외함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데 먹고 입고 마시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사는 진실한 성도의 삶을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염려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풀밭에 누이신다고 말합니다. 푸른 초장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공급이라고 한다면 누이신다고 하는 것은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휴일 날 아빠의 모습을 그려오라고 했어요. 어떤 아이는 아빠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 장면을 그려오기도 하고 아빠가 페인트칠하는 장면을 그려오기도 하고 또 어떤 어린이는 아빠하고 엄마하고 온 가족이 손잡고 교회 나가는 그림을 그려오기도 했는데 한 아이는 그림을 그려왔는데 네모를 하나 크게 그려놓고 밑에다가 발을 두 개를 달았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그랬어요. “야 임마, 이게 뭐냐? 애들은 이렇게 잘 그려왔는데 이게 뭐냐? 머리도 없고 팔도 없고 다리만 두 개 있는 이 네모가 이게 뭐냐?” 그래 이 아이가 말했어요. “선생님, 그거 다 그린 거예요. 그거 우리 아빠 일요일이에요.” “그게 뭐냐?” 그랬더니 “네모난 큰 거는 이불이에요.” 그리고 그 속에 푹 파묻혀서 만 내 놓고 자는 모습을 그리고 제목을 붙이기를 아빠의 일요일이야. 여러분은 요새 어린아이 많이 태어났잖아요. 오늘 별이 태어나서 처음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렇게 아이들을 들여다봐요. 있다가 아이 가진 부모들은 저 문 앞에서 좀 보여줘요. 얼마나 그 모습이 평안한지 몰라요. 특히 잠자고 있을 때는요, 정말 근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염려가 없으니까 평안한 거예요. 그 조그만 아이들은 고민 안 해요. 우리 엄마가 내일도 젓을 줄까? 그런 고민은 안 해요. 우리 엄마가 또 밀가루를 우유 가루인줄 알고 잘못 타면 어떡하나? 젓 병은 소독했을까? 주일날 와서 또 나를 다른 애하고 바꿔 가면 어떻게 하나? 그런 고민 안 해요. 염려가 없으니까 얼굴에 평안이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근데 고런 게 그저 초등학교 들어가지 전까지는 계속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면 없어요. 우리 딸내미가 서너 살 때 자는 모습을 이렇게 지켜보면 그렇게 평안했어요. 요새 가끔 지켜보면 평안이 없어요. 학원 가야되는데 숙제 검사는 내일 할 것인가? 또 뭐는 어떻게 해야 되나, 뭐는 어떻게 해야 되나? 염려 속에 염려가 이미 벌써 많이 들어요. 중학교 쯤 들어간 아들놈은 평안이 아주 없어요. 무슨 학원 다닌다, 무슨 시험 본다, 스트레스 왕창, 잘 때는 얼굴을 확 찡그리고 자요. 잠꼬대까지 하고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떻겠어요? 우리같이 나이가 많은 어른들의 잠자는 모습은 어떻겠어요? 오늘 밤에 가서 가족들 자는 모습을 이렇게 쳐다봐요. 정말 불쌍한 인생들이에요. 염려와 근심이 주름에 골골이 스며들어 있어요. 그리고 중년 남자들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일하고 일요일이라고 휴일이라고 가족들이 어디 좀 가자고 교회 가자고 그리고 이불 확 제기면 새우처럼 웅크리고 그냥 한숨 더 자려고 말이죠. 안식이 있어요? 휴식이 없다고. 뭐가 없어서? 물질이 없어서 휴식이 없나요, 시간이 없어서 휴식이 없나요? 아니에요. 목자가 안 계신 삶에는 돈이 있고 휴식이 있어도 정말 안식은 없는 거예요. 저는 여름에 성수기에 피서를 안 가본지가 오래 됐어요. 물론 첫째 원인은 그때 꼭 수련회가 있고 집회가 있으니까 못 갔지만 또 그때 논다고 하더라도 진짜 갈 맘이 없어요. 왜? 사람이 바글바글, 그 속에 무슨 안식이 있겠어요? 차는 막혀서 씩씩거리죠, 여관을 가보면 모두 사람들이 잡았죠, 또 여기저기 텐트 칠 자리에는 사람들이 다 치고 있죠, 불량배들이 득실거리죠, 거기 왜 가요? 스트레스가 팍팍 쌓여서 돌아오고 집에 돌아와서 휴가 갔다 와서 퍼지고 나면 그때 안식이 밀려오는데 그 다음날에는 출근해야죠. 휴가 증후군이라고 하잖아요. 진정한 휴식은 육신적인 안식에 있지 않아요. 정말 진정한 휴식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목자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아우그스트 어거스틴은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고 학문도 뛰어나서 그래서 천재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결국은 육신이 원하는 데로 방탕한 길을 모두 걸어가다가 그러다 마지막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고백하는 한 마디의 말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만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내게 평안이 없었습니다.” 라고 말이죠. 평안이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오늘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이 돈 때문이라 돈만 해결되면 살만 할 텐데,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지금 불안해하고 그리고 휴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돈이나 여러분들의 이 세상에서의 일 때문이 아니라 부실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에요. 제대로 믿어야지만 신앙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제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신앙이 인생을 사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고 갈등만 일으키지. 예전에 하나님 모를 때에는 마음껏 퍼 먹고 나쁜 짓하고 돌아다녔잖아요. 지금은 어때요? 지금은 그렇게 하려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못하잖아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열렬하게 믿느냐?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살자니 신앙이 울고 신앙을 만족시키자니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용납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발은 교회에 들여놓고 한발은 세상에 딛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진정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하단 말이죠. 휴식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휴식이 있어요. 불철주야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고달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이 아니에요. 진정한 안식은 영혼의 안식이기 때문에 빛 가운데 살면서 진리를 따라 행하고 양심을 등지고 살지 않는 진실한 신앙생활,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어려움을 토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휴식이 있는 것이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제껏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 인생을 살아오는 날 동안에 아무 염려와 근심이 없이 마음에 기쁨으로 충만하고 그런 기쁨을 누려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자유를 누린 적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던 때 말고 언제 또 있었느냐는 이야기에요. 언제 있었느냐고?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진짜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 그래서 늘 말씀 드리잖아요. 믿기 싫으면 관둬라 이거예요. 누가 강요를 하느냐. 그래서 믿으려면 잘 믿으라. 이거에요. 그래야지만 행복해지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우리 자신의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안 된다 이거에요. 내가 정말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렇게 생각되면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라 이거죠. 주일날 못 이기는 것처럼 어거지로 교회 나와서 견디다가 예배 끝나자마자 뽕 하고 사라지고 일주일 내내 하나님 잊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느 성경에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느냐 이거죠. 그런 사람들이 정말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에 나는 목자이신 당신의 품안에서 행복하며 염려가 없으며 안식을 누립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그러니까 그렇지를 못하니까 근심과 염려가 쌓이고 그 근심과 염려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대로 해결해보려고 하니까 계속해서 불순종과 죄가 쌓여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잠시는 자기가 불순종과 죄를 선택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기가 선택한 불순종과 죄가 자기를 사로잡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99년이 가기 전에 결정을 해요. 내가 진실한 신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관둘 것인가? 정말 뜨거운 신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떠난 사람이 될 것인가?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제 더 이상 미적거리지 말고 99년이 지나가기 전에 한번 결정 하라 이거에요. 왜? 그렇게 해야지만 우리의 삶에 진정한 안식이 있고 쉼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거죠. 여러분, 사람을 만나 봐요. 이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들은 사람이 가서 말을 붙여도 말이 유순해요. “이거 좀 어떻게 해야 되요? 이것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하니까 “어, 그거 왜 그래요? 내가 도와드리죠.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그래요. 사람이 뭐 이렇게 줄을 서다가 새치기를 해도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들은 바쁘신 일이 있나보죠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게 여유가 없고 쉼이 없는 사람들은 짜증이 충만합니다. 신경질 충만합니다. 아무한테나 막 짜증내. 나중에 회개하더라도 일단 짜증을 내고 보고 성질을 부려보는 거예요. 그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래요? 휴식이 없기 때문에 안식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안식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에 고요와 평정이 있어요. 쓸데없이 콩 튀듯, 팥 튀듯 그러지 않아요. 여유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그리고 그들을 화목 시켜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이 아니면 이런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정말 그 목자 되시는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보니까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조금은 부족한 번역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still water. 그리고 quiet waters 이렇게 표기가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이냐면 이것은 쉴 만한 물가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이끄시는 도다 이렇게 번역이 되어있어요. 히브리 성경에 메 메호노트라고 나오는데 메는 물이 메호노트는 마나 움직이지 않다, 멈추다 거기에서 온 부사에요. 그러니까 움직이지 않는 흐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인도하시며 그런 말이에요.
(예화) 저는 어려서 초등학교 때에 여름이 되기만 하면 부모님이 계신 시골에 놀러갑니다. 서울에서 공부했으니까 시골로 가는 거지요. 갔다가 닷새나 열흘, 보름 뭐 이렇게 있다가 올라오는데 그때 구경거리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물 구경이에요. 여름에 홍수가 나잖아요. 지금은 산에 나무가 많아서 좀 덜 한데 그때는 전부다 민둥산이니까 한번 비가 쏟아지면 막 것잡을 수 없이 황토물이 쏟아져 흘러내려요. 그런데 물 구경하다가 이렇게 올라와서 개울에 서서보면 별개 다 떠내려 와요. 뭐 바가지도 떠내려 오고 무슨 어떤 사람은 물에 산삼 떠내려 오는 것도 건졌대요. 뭐 그런 사람도 있고 어떤 때는 초가지붕 채 떠내려 오더라고요. 어떻게 된 건지. 근데 제일 안타까운 것은 뭐냐 하면 짐승들이 떠내려 오는 거예요. 순식간에 물난리가 나서 말하자면 돼지우리나 막사를 덮친 거죠. 근데 여러분 생각하기에 소가 헤엄 잘 칠 것 같아요 못 칠 것 같아요? 잘 쳐요. 돼지는 미련해서 금방 가라앉을 것 같죠? 근데 돼지도 헤엄 참 잘 쳐요. 목을 딱 내 놓고 목 따는 소리를 하면서 쫙 흘러갑니다. 닭은 어때요? 닭도 여러분 무슨 헤엄을 치냐고 그러잖아요? 물에 잘 안 빠져요. 잘 떠내려가요. 고양이도 마찬가지에요. 개는? 오죽했으면 개헤엄이라고 그러잖아요. 얼마나 잘 치는 줄 몰라요. 오리는? 물에 빠진 오리 봤어요? 참 헤엄 잘 쳐요. 물론 이제 한강까지 떠내려가진 않지요. 중간에 다 빠져 죽지만 하튼 그렇게 헤엄 잘 친다고. 양은 어때요? 양이 잘 치는 헤엄은 하나밖에 없어요. 잠수. 작년에 들어 간 양이 올해도 안 나왔어요. 몸 전체가 털이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가면 스펀지처럼 물을 쫙 빨아드려요. 그리고 끌어당긴다고. 아무리 수영을 잘 해도 무스탕 입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그 무스탕이 양을 벗겨낸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양은 무스탕을 입었기 때문에 도저히 헤엄을 칠 수가 없어요. 가라앉는다고. 그러니까 생래적으로 물을 무서워해요. 그래서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흘러가는 물은 마시질 못한대요. 그거를 아니까 목동이 졸졸졸 시냇물이 흐를 때에 양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는 돌멩이, 풀뿌리, 그런 것들을 갖다놓고 댐을 쌓는 거예요. 그래서 물을 고이게 만들어요. 그 고여서 움직이지 않는 댐에 갇힌 물을 여기에서 메 메호노트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 그 가장자리로 양떼를 데리고 와서 물을 먹이는 거예요.
얼마나 세심해요. 뭐 소나 말 같으면 막 데리고 물 가운데 들어가서 세차 하듯이 발을 물에 담그고 그리고 물을 먹게 만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양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발은 물에 젖지 않고 고개만 내밀어서 그래서 흐르지 않게끔 잘 막아놓은 움직이지 않는 물에 입을 대고 그리고 필요한 만큼 물을 마시도록 그렇게 양을 인도한단 말이죠. 목자가 그렇게 하면서 양의 멱살을 잡고 먹어 그러면서 흐르는 물 앞에다 머리를 주어 박으면서 “먹어. 쳐 먹어.” 그런데 무서우니까 못 먹지요. 그때에 소도 먹고 말도 먹고 갔는데 너희들이 다 배부르니까 안 먹는 거지. 안 먹으려면 관둬라. 너 손해지. 내 손해냐. 그러고 끌고 가다가 기진맥진해서 양을 쓰러뜨리는 목자는 없다는 이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분명히 원하시는 뜻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하세요. 여러분들이 잘 순종하고 성령에 충만할 때에만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 제 멋대로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의 양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추격해서 여러분들을 감화시키고 감동을 주고 인격적으로 승복시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연약 함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을 하나하나 인도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믿음이 지금 다윗만 같지 못하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 없고 여러분들의 신앙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 없어요. 모두 그렇게 묘목과 같이 어린 신앙에서 출발했어요. 지금은 묘목과 같이 어리지만 그러나 바람 맞고 그리고 비료를 먹고 물을 마시고 햇빛을 머금으면서 차츰차츰 거목이 되어 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말고 여러분들을 이렇게 세밀히 인도하실 분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시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 시인이 움직이지 않는 맑은 물을 만들어놓고 사랑하는 양떼들을 데려다가 물을 먹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을 인도하셔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이루신 임마누엘의 샘에서 여러분들이 그 복음의 생수를 마시고 새 힘을 얻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지치고 병든 여러분들의 영혼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보혈의 샘에서 생수를 마시고 새 힘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진정한 신앙의 관계로 돌아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들을 값없이 그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이 은혜의 샘으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샘에서 그 생수를 먹고 죄 많은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해진 여러분들의 심령이 회복을 얻고 여러분들의 육신이 나음을 얻어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온 한 줄기 불꽃처럼 그렇게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자신이 주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버린 잃어버린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목자의 음성이 들리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산 넘고 물 건너 한 영혼을 찾아온 그 목자의 손에 이끌려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기까지 여러분들이 그 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얼마나 험악한 인생의 길을 걸어왔던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을 발견했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에 포착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떠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감화를 받으며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인격적인 신앙의 승복을 보여주고 있는 한 여러분들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지키실 것이며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제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지킬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목양이 있는 거룩한 신앙생활, 주님의 돌보심 아래 우리는 부족하지만 넉넉히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목자 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피 뭍은 십자가 아래로 우리를 불러 모으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5.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上)
시인이 괜히 여호와가 자기가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뒤에 깔린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2절에서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거기서 시인은 자기를 자기로 하여금 염려를 극복하게 하고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실 뿐 아니라 주님의 품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하시며 자신의 약점을 알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돌보심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으며 주님은 자기의 목자이고 자신은 자기를 기르시는 주님의 손에서 자라는 한 양이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도 우리는 주님의 크신 은혜 속에서 살았습니다. 시시때때로 공급해주시는 주님의 양식과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보내주시는 주님의 도우심 때문에 살아왔습니다. 한 해를 지나면서 우리는 이런 감격이 더 큽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돌보심이 아니었더라면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았던 지난 1,2년 사이를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이유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주 가까운데 있습니다. 우리를 지난 한 해 동안도 건강하게 하시고, 또 질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명을 아주 거둬가지 않으시고 다시 살 기회를 주시고 회복을 주신 하나님, 우리의 일용할 양식들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가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올 한 해의 경제사정이 어떻다고 전망을 하던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돌보시고 먹이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한 가지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올 한 해의 경제 사정이나 그리고 올 한 해의 국내적인 여러 정치사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인격적인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올 한해도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쓸 것을 공급해주셔서 결국은 일 년을 지난 다음에 나의 산 것이 나로 말미암음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은혜로다 라고 고백하게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사실 한 가지를 예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자신의 진정한 목자시라는 사실을 고백함에 있어서 그것을 능가하는 또 다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고 하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신의 진정한 목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자녀 교육의 위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전에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결핍된 환경이 자녀들을 망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극심한 가난이 아이들의 교육을 막고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 그 아이들이 빗나가는 것이 아닌 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30년 전에 비해서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런 처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여전히 2,30년 전에 아이들이 훨씬 나았고 청소년 문제가 그때가 훨씬 적었다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문제는 아이들에게 밥과 옷, 마실 물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먹고 입고 마시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제 지난 세대에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생각이지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은 아이들에게 자꾸 옛날에 고생했던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아이들이 밥맛없다고 그럽니다. “야, 이놈아, 이 애비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소금에다 꽁보리밥에다가 책보가 어디 있냐?” 애들이 속으로 “아이고, 지긋지긋하다.” 어떻게 보면 그 시대 아이들이 행복했는지 몰라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런 입고 먹고 쓸 것만 공급되고 정신적인 것들이 이 가정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에요. 오히려 예전 농경시대에 살던 아이들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리고 부모의 끈끈한 정, 동기간의 끈끈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함께 배워갔습니다. 이웃을 배웠고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들을 다함께 배워간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을 짐승처럼 생각하는 그런 풍조 속에서 자라갔다 이거죠. 기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수많은 가전제품에 둘러쌓여서 그리고 넉넉한 먹거리들을 냉장고에 잔뜩 쌓아놓고 밥 굶을 염려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정말 그 자녀들의 마음속에 필요한 정신적인 것들이 부모를 통해서 공급되고 있냐는 이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자랄 때에 돈 대주는 물주는 존재하지만 부모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이민 가서 “이 놈의 자식” 하고 때리려고 그랬더니 손을 탁 잡으면서 이아들 하는 얘기가 “아빠에게는 나를 18세까지 양육할 의무만 있지 때릴 권리는 없다.” 고 하더래요. 그렇게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한테는 그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물주예요. 그런 관계만 존재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단지 먹고 입고 쓰는 것이 오고가는 거래의 관계 만으로서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그것에 대한 대답을 오늘 시인이 주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여기서 ‘소생시키다.’ 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하야’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살게 하다.’ 라는 것입니다. 죽었거나 혹은 거의 죽은 상태에 이르러서 살았다고 말하기에 힘든 그 상황을 어느 한 순간에 확 살아나게 만드셔서 그래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을 여기서 소생이라고 말합니다. 소생이라는 번역도 정확한 번역이 아니죠. 우리 소생은 대개 어때요? 죽었다가 눈을 게슴츠레 뜨는 것을 소생이라고 그러죠. 이건 그게 아니라 살아있게 하는 것이죠. 거의 죽어 있는 상태에서 확 살아있게 하는 거죠. 말하자면 5,6월에 생선 궤짝에서 푹푹 썩어가던 꽁치를 바닷물 속에 집어넣으니까 살아서 막 헤엄쳐서 가버리는 그런 정도의 소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영혼이 소생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낄 때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이 강해지고 그 하나님밖에는 자신을 진정으로 살릴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오늘날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영적인 특성이 무시되고 있는 시대에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한 혼돈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에요.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될 것인가 하는 의지나 생각들도 불분명하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란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해야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느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다고 하는 표면적인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전혀 아니에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의미들을 행해서 삶이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되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따르면 그가 세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가 중요하고 결혼식을 어디서 올렸느냐가 중요하고 죽을 때에 교회묘지에 묻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슨 예식을 할 때에 제사를 지내느냐 추도예배를 지내느냐 같은 것들이 신앙의 기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신앙의 모습일 수는 있습니다만 표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생래적으로 절간이나 제사 이런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신앙이 진정으로 있느냐 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래서야 되겠느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도덕적인 요구를 만족시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고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쁘게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갖기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특이하고 열렬한 체험을 하는 것이 곧 열광적이 되는 것이 신앙의 핵심에 들어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체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아프리카에 살던 사람이 눈이 가득 쌓인 설악산에서 감격을 하는 것 같은 특이한 체험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성경에 의하면 참된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어두운 영혼 속에 비추인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좀 더 쉬운 표현으로 말하면 전에는 죽어 있던 영혼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겉으로 보이는 이 몸은 컴퓨터로 말하자면 본체와 자판, 그리고 모니터 같은 하드웨어에요. 우리의 속사람은 그 컴퓨터를 작동하게 하는 소프트웨어와 같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시기 위해서는 컴퓨터와 같은 우리의 외적인 육신의 사람뿐 아니라 그러한 컴퓨터를 작동하는 사람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는 프로그램이 가동될 때에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 진정한 쓸모 있는 컴퓨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제가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서 영적 특성이 무시되고 있는 시대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앙은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성과 감정과 의지, 전 영역이 함께 반응해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 자체가 신앙이 아니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신앙이 없었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그런 종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예전에 몰랐던 정확한 지식을 갖게 되요. 참된 신앙은 바로 올바른 지식에 기초해요. 그래서 예전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던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되기 위해서는 참된 지식에 접해야 해요.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하나님은 누구시고, 이렇게 생각 없이 사는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이며, 사후에 어떤 세계가 있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살아서 숨 쉬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되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 것들을 배우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참된 정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해요.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는 음악을 좋아해도, 맨 유행가 그 다음에 요즘 애들 좋아하는 그런 거였죠. 어느 학생 하나가 수학 문제를 푸는데 두들겨 부수는 음악을 들으면서 수학을 풀어요.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시끄러워서 들을 수가 없어요. 그러고도 뭐가 들어오느냐 그러니까 아저씨, 나는 이렇게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다리를 덜덜 떨어야지만 수학이 풀리기 시작한대. 그것도 기이하잖아요.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나면 제일 싫은 게 그런 노래, 저도 옛날에 그런 노래들을 참 좋아했어요. 이제는 다 싫어요.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런 노래들이 싫어요. 왜? 부르는 것이 죄라기보다는 마음속의 소프트웨어가 거룩의 소프트웨어로 바뀌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그런 것이 싫은 거예요. 그런 것으로 바뀐 거예요. 이게 들어와 받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 정서적인 변화가 있고 그리고 그 다음에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의지가 있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삶이 신앙으로 가는 삶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거예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전인격적인 삶으로 삶을 바꿔놓을 것인가? 무엇이 그렇게 우리를 바꿔놓을 것인가? 인간이 얼마나 바뀌기를 거부하는 존재인지 여러분 아세요? 여러분 습관 하나 고치는데 얼마나 힘들지 여러분 잘 아시죠? 버릇하나 고치는데 얼마나 힘든지 아시죠?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런 전인격적인 변화,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의 변화에요. 그리고 이런 마음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온다는 이거죠. 영혼이 하나님 앞에 죽었던 상태에서 소생되는 변화를 경험할 때에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에 영향을 끼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에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 얼마나 많이 잘못됐는가를 알 수 있잖아요. 무슨 얘기냐면 쉽게 얘기하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으려면 인격이 바꿔야 되고 인격을 바꾸려면 삶이 바꿔야 되요. 왜냐하면 생각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인격을 인격이 인생을 낳기 때문이에요. 근본적인 것을 고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소프트웨어가 새로워져야 해요. 그런 것을 갖다가 컴퓨터를 가져다 놓고 이따금씩 컴퓨터의 모니터 머리를 탁 때리면서 이놈의 것 왜 안 들어오는 거야, 본체를 발로 뻥 차면서 왜 안 들와. 지금은 우리 가전제품이 참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옛날 6,70년대에만 해도 말이죠, 어떤 속담이 있었냐면 외제는 때리면 망가지고 국산은 안 들어올 때에 때리면 들어온다고 했어요. 가전제품이야 때리면 가끔 들어오지만 근본적으로 소프트웨어 자체가 안 들어간 망가진 이 컴퓨터 같은 인간을 그걸 두들겨 팬다고 해서 그게 나오느냐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되기를 하나님 앞에 갈망해야 되요. 그리고 핵심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에요. 야박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모태신앙을 물려받고 그리고 그 아무리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매주일 교회에 나오지 않는 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성경은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근데 이런 기도교인, 신앙에 있어서 이런 영적인 특성들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으로 때워보려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뭔가 자기가 물질적인 기여를 하는 것으로 보상을 해보려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그런 일로서 그것이 곧 신앙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에요.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해저본적이 있습니까? 나 같은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누려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죠.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사랑, 불신자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믿는 사람들조차도 왜 이 시인이 경험했던 것처럼 이 소생의 은혜를 경험해야 하는가? 시인이 내 영혼을 다시 살리시고 라고 고백한 것,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고백을 했던 그것을 보면 이 시인도 언젠가는 죽은 자와 같이 영혼이 깊이 침체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렇게 침체되어 있는 상태에는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요. 매일 한집에서 자고 먹고 그러면서도 이 아버지의 사랑이 뭔지를 모르고 엄마의 정이 뭔지를 모르는 그런 불행한 자녀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일 예배드리고 매주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이 정말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침체된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생의 은혜에요. 다시 말하면 심령에 부흥의 은혜라 이런 말씀이죠. 그러면 심령에 소생하는 그 은혜 그런 것들을 다시 경험해야 할 정도로 깊이 침체된 원인이 무엇이겠는 가죠. 그게 결국은 죄와 부패, 불순종 이런 것들 때문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이 떠오를 거예요. 우리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겠는가? 이 세상에는 매일 신문에 오르내리는 정말 흉악무도한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는데 우리야 정말 힘없는 민초가 아닌가? 우리가 무슨 정치가도 아니고 국회청문회에 나갈 사람들도 아니고 신문에 오르내리는 흉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아닌데 무슨 죄를 그렇게 있기에 그 죄가 우리의 영혼의 침체시킨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 하나 이런 의문을 들 수 있어요. 아니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죄를 좀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데 뭐 하나님이 우리가 지은 작은 죄 때문에 그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그 죄 때문에 깊은 침체로 몰고 가서 우울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슬픈 나날들을 지나게 하실까?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일일까? 이런 의문으로 떠오를 수 있어요.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하고 싶어요. 물론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비교적 적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은 나라의 경영을 위해서도 많이 이로운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가운데 살인죄를 저지르시고 지명수배를 받아서 쫓기시는 분들이 여기 계십니까? 어젯밤에 간음을 하고 아직 목욕도 하지 않은 몸으로 예배에 장소에 나와 있는 분들 여러분들 중에 있습니까? 나는 아마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모아 이런 질문을 던지면 뜨끔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조금도 뜨끔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도덕적이고 덜 부패한 사람들이고 덜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침체를 가져오는 죄라고 하는 것은 질의 문제이지 양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의 질을 따질 때에는 사실은 죄의 크기를 즉각적으로 생각합니다. 죄의 크기가 크면 그 질이 매우 나쁜 것이고 그리고 죄가 작으면 용서해주기를 즐거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화)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납작한 접시 위에 차가운 물을 붓고 개구리를 한 마리 올려놓고 알코올램프 불꽃을 조정해서 1초에 0.02도 섭씨씩만 온도가 상승하도록 물을 끊였습니다. 물론 개구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팔짝 하고 뛰어서 도망칠 수 있는 그러한 처지에 있었죠.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1시간 20분 후에 개구리는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논에서 잡아온 개구리를 뜨뜻한 물에 집어넣으려고 했더라면 아마 이 개구리가 죽어도 그 접시 위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죄와 불순종 이런 것들은 어느 한 순간에 파도처럼 다가와서 덮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빛줄기에 바위 패이듯이 서서히 우리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저항력들을 약화시키고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의 생기를 말려버린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화) 어떤 병사들이 개울가에서 돌멩이를 줍고 있었는데 지휘관이 세 사람의 병사에게 명령하기를 자루 하나씩 줄 테이니 50KG씩 돌멩이를 주워오라고 했습니다. 세 명이 주워왔는데 한 명은 돌멩이 한 개에 50KG 짜리를 넣어왔고 또 한 사람은 두 개를 넣어왔고 또 한 사람은 저 무거운 돌멩이를 어깨 아프게 왜 저렇게 지고 갈까 하면서 잘디 잔 돌멩이 수천 개를 모아서 50KG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습니다. 킬로그램을 확인한 후에 지휘관은 황당한 명령을 내렸는데 ‘이제부터 가져온 돌멩이를 제자리에 가져다둔다. 실시!’ 했습니다. 한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가 가져온 곳을 찾아냈는데 공깃돌만한 작은 돌멩이를 한 포대 지고 온 사람은 어디에다 두어야 할 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매일 이 정도야 하면서 의식 없이 살아가는 죄, 성질나는 데로 살아가는 그런 절제가 없는 삶, 욕망에 굴복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삶, 기질과 습성대로 나는 살아갈 테니 너희들은 적응하라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고쳐지지 않고 옛 성질과 옛 기질을 그대로를 뿜어내면서 살아가는 것을 자기의 주체성에 대한 자랑인 것처럼 생각하고는 부끄러운 것을 자랑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죄라는 것을 그냥 지나가고 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남듯이 그냥 자동적으로 그 사람의 생활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죄입니다. 특별히 말에 있어서 절제가 없는 사람들은 입을 열면 그 자체가 그 죄가 떡 가래처럼 쏟아져 나와서 자신의 온 몸을 휘어 감는 것입니다. 자기는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함부로 한 죄가 사람을 죽인 죄만 하랴. 내가 살아가면서 내 기질, 내 성품대로 내 성질대로 살아 간 나는 자연인이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이 삶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정도로 큰 죄랴. 물론 신문에서는 그런 것 관심 없어요. 신문에 여러분 방배4동에 아무 아무개 집사가 아무렇게나 막 말을 하더라. 그리고 신문에 난 적 본적이 있어요. 아무 아무개가 쓸데없는 얘기만 주절거리면서 다니는데 참 주책없는 그런 사람이더라. 그러면서 신문에 난 적 있어요? 신문에는 그런 것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어마어마한 죄에 덩어리들이 되요. 그래서 영혼에 그나마 남아 있는 생명들을 고사시켜요. 흘러들어오는 맑은 물보다 썩어가는 물이 많으면 결국은 그 호수는 언젠가 죽음의 호수가 되는 것이에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못 받는 것은 아니죠. 자기의 욕심을 쫓아서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는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욕망에 시달렸을까 그러면서 회개할 때는 새 물이 들어오죠. 그런데 은혜의 물은 매우 적어. 그리고 이 솟아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이 물들이 생산하는 오염물질이 배출되는 것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면 결국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시화호처럼 되는 거예요. ‘그런 것 아니에요. 그래도 내가 은혜를 받는대.’ 누가 아니래요. 받는다는 이 얘기에요. ‘그래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누가 안 사랑한다는 그런 사람 있냐고. 그런데 그건 조금이에요. 새 물은 조금씩 들어와. 근데 오염물질은 더 많이 배출돼.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면 죄악이 가득 찬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그런 호수와 같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죠.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럴 때는 그냥 물이 조금 들어오면 안 되니까 포크레인을 가지고 와서 그냥 산등성이를 파가지고 그 더러운 똥물을 다 쏟아내 버리고 다시 콘크리트를 쌓아 가지고 다시 해야 돼요. 그걸 가리켜서 뭐라고 그래요? 심령의 각성이요, 심령의 부흥이요, 심령의 변화에요. 그러면 이제 우리는 또 하나 말씀 드린 것 같은 그런 질문은 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큰데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크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사랑이에요.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죠? 이 세상에서 청소년 중에서 우리 아들만큼 사랑하는 청소년이 없어요. 근데 개만큼 나한테 많이 맞은 애도 없어요.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왜 남의 집 애들을 때리겠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고 하나님의 계획은 계획이에요. 여러분이 부모라면 잔뜩 사다가 우유다 빵이다 밥이다 먹여놓고 그래 그냥 너 대견하다. 일본 씨름 선수처럼 살만 쪄라. 내 평생 소원, 네가 180KG 되는 것이다. 그런 부모가 있으면 그게 부모에요? 사육사지. 뭔가 사람이 되어 가야 될 것 아니에요. 생각이 달라지고 그래야 될 것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크죠. 근데 하나님의 사랑이 만약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무조건 모든 지 유야무야 해버리고 없애버리는 그런 사랑이라고 할 것 같으면 왜 굳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을 그렇게 힘들게 택하셨겠어요? 우리는 죄를 지었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죄를 해결할 길이 없어요. 그러면 그냥 다 용서 그래 버리면 되지 나는 정부에서 사면 자주 해주는 것 반대에요. 사람이 죄를 지어도 내년 3월이면 다 없어지는데 이러는 거예요. 그게 뭐에요? 나라의 공의가 안 서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들의 죄를 다 벗겨서 예수님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그리고 그 예수님을 어린 양 삼으셔서 그 끔찍한 심판을 그 죄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 위에 베푸시고 우리에게 쏟아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그분에 쏟아 부으신 거예요. 십자가라는 이 사건 자체가 우리의 죄를 향해서 용서해주시는 눈물겨운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쪽 측면에서 보면 인간들이 당신을 향해서 지은 범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그 치열한 진노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무슨 찔림일까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저렇게 진노하시는 분이시구나.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감당하셨구나. 거기에서 오는 찔림이에요. 그리고 나니까 어떤 고백이 나와요?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새해는 아멘 좀 합시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우리 신앙의 이치가 그렇구나.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가 정말 그런 침체 속에 있고 내가 정말 그런 영광스러운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우리는 이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또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어떤 것이냐? 그것은 남들이 살아가는 신앙생활 이게 기준이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거예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 말씀에 정면으로 위반 되는 거예요. 지난 해에 일어난 제일 큰 사건 가운데 하나가 서해에서 일어난 교전 이었죠. 서해교전이라고 불러요. 대개는 용어가 도발이었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군대에서도 교전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전쟁이었다는 이야기죠. 근데 그걸 보면서 우리는 큰 충격을 받은 거예요. 맨 날 말이죠, 땅에 질질 끌리는 바지나 입고 다니고 혁대도 없이 꽁무니에다 바지를 걸고 다니고 머리는 노랑 물을 들이고 말이지 담배 꼬나물고 어른, 애도 없이 인사도 안 하고 말이지, 그러고 껍적거리고 다니던 놈들 머리 깍여서 옷 입혀서 데려 간 곳이 요즘 군대 아니에요. 예? 뻔한 것 아니에요. 저 깡깽이들이 뭘 하랴? 사실 불안했거든요. 근데 새로운 사실을 보여줬어요. 요새 장교들도 보통 고달픈 것이 아니래요. 옛날에는 ‘하라’ 그러면 그게 바로 법이었대요. ‘하라’ 그러면 ‘왜요?’ 복잡해졌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애들이 뭘 하랴? 불안했거든요. 그러나 막상 총알이 날라 오는 상황이 되자 몸을 돌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전투에 임해서 말이죠, 이북의 군인은 100명 가까이 죽고 배가 몇 채씩 침몰해도 자신들은 안전하게 자기 임무를 다했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 북한의 군인들이 죽은 것은 우리들이 그렇게 환영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마음 든든하다. 이 머리에 노랑 물들이고 다니고 귀걸이 하고 다니고 유별나게 굴어도 그래도 지 밥벌이는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요새 세금 내는 마음이 즐거워요. 그런 고백을 한 거예요. 그런데 같은 군인이라도 한번 보라고요. 월남이 망했을 때에 말이죠, 미군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여태까지 여기에서 쓴 무기하고 먹을 것만 갖다가 하늘에서 쏟아 부었어도 거기에 맞아서 베트콩들이 다 죽었을 거라고. 그랬는데 결국은 졌잖아요. 5만 명의 미군과 700대의 최신의 전투기들이 격투당하고 죽었어요. 그런데 대나무에다 독을 발라가지고 다니면서 찌른 그 베트콩들한테 졌다는 이야기에요. 가장 큰 원인이 뭐예요? 군인들이 오늘 저녁에 미군이 무기를 공급해주면 밤에 그거 가져가서 술집에 맡기고 밥 먹고 술 먹고 그 다음날은 그 총에 맞아 죽는 거예요. 그 당시에 모든 군인들이 대부분 다 그렇게 살은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그런 그때에 어떻게 무기를 그럴 수 있냐 그런 사람이 나왔으면 왕따 당했을 거예요. 그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 군인의 모습일 수는 없어요. 마찬가지에요. 우리 신앙생활도 왜 하필이면 망가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부분의 평균 이하의 난쟁이 같은 교인들 하고 비교를 하느냐 이야기에요.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하고 비교를 하라 이야기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주위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바가 뭐냐 하면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 제자들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기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회복이라는 것은 뭐냐? 또 교회도 나갈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겨우 성경, 찬송 들고 교회에 가서 도장 찍고 오는 그런 출석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눈치 상으로도 알 수 있잖아요. 내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he restores my soul. 내 영혼을 그분이 회복시키셨도다. 주일날 성경, 찬송 들고 교회에 나가서 도장 한번 찍고 온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해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내 영혼을 회복시키셨도다 그러는 거예요. 주께서 나로 오늘 교회에 출석하게 하셨도다. 졸고는 왔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이 시인은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감격에서 “아, 내 영혼을 살리셨도다.” 이것은 생애 잊혀 지지 않는 경험을 한 거예요. 그런 회복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다 이거죠. 그래서 어떡해요? 남들이 모두 슬퍼하는 상황이지만 신앙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 남들이 모두 그렇게 살지만 믿음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도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가난하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에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행복, 자기 식구의 행복, 자기만족, 자기 부요함, 이런 것들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때에 정말 평화의 도구가 되어서 자기를 통해서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고통이 있는 곳에 행복을, 그리고 아픔이 있는 곳에 치료가, 죽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회복된 영혼이 필요 하다는 거죠. 그러면 이제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아까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 영혼의 진정한 회복, 죽어있는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소생이 가능하겠느냐는 거죠.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에요. 아이를 기를 때에 제일 힘겨운 일 중에 하나가 아플 때에요. 아플 때에 약을 먹으면 되는데 근데 약을 안 먹는다는 거죠.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 약을 잘 먹는 것은 아니고 유난히 약을 못 먹는 사람도 있죠. 근데 약국에 가보면 약이 참 다양해요. 어떤 약은 똑같은 약인데 주사약으로 만들었어요. 바늘만 보면 도망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이번에는 먹는 약으로 만들었어요. 알약은 도저히 못 삼키는 사람을 위해서 물약으로 만들었어요. 또 물약을 못 먹는 사람을 위해서 가루로 만들었어요. 가루로 먹으면 목이 매이는 사람을 위해서 약을 동그랗게 만들었어요. 동그랗게 만든 것도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설탕을 입히기도 하고 달지는 않아도 코팅을 해서 반질반질하게 만들어서 목에 마찰이 없이 넘어가게 만든 약이 있는가 하면 터져도 입안에서 터지지 말고 위 속에서 터지라고 캡슐을 씌워서 만든 약도 있어요. 뭐 별의별 약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제약회사에서 약을 만든 사람의 초미의 관심사는 무엇이냐면 어떻게 하면 이 약을 체내에 투입할 것인가 그거예요.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약을 만들어요. 또 더 발달하고 나니까 어떤 수단들이 나오느냐면 전에는 큼지막했었는데 고농도로 농축을 해서 크기를 작게 만드는 기술도 나오는 거예요. 하튼 별의별 방법을 다 만들어서 사용을 한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우랠리우스 어거스틴 같은 성자는 17세에 이미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뿌리치고 당시의 지성인들이 빠지던 마니교 철학에 빠지거든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깊은 타락을 경험하고 17세에 이미 사생아의 아버지가 되었죠. 그런 식의 인생을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그 영혼이 회복되고 소생되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렇게 방탕한 사람이 성경을 읽느냐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하도 답답하니까 아이들이 바로 그 옆에서 동요를 부르게 해주신 거예요. ‘집어라, 들어라, 읽어라.’ 그 소리가 아주 귀전을 때리면서 다가오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옆에 있는 책을 주어서 들었는데 성경이었어요. 아무데나 펼치니까 로마서였어요. ‘이제는 어두움의 일을 버리고 빛의 자녀로 살라’ 거기에서 주님 만났어요. 그리고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오늘날 어거스틴을 탕자 어거스틴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 어거스틴이라고 불러요.
(예화)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착실하게 신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이 사랑하는 형제를 만나서 결혼을 했어요. 형제는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었어요. 결혼을 하니까 한 집에서 살게 되는 것 아니에요. 이제 남편 될 형제가 짐을 실고 오니까 그 짐을 책꽂이에 정리를 하는데 어 이상하게 거기에 자기가 너무나 아꼈지만 잃어버렸던 성경책 빨간 것이 거기 짐 속에 있는 거예요. 이것을 꺼내보니까 아 글쎄 속에 자기의 이름을 안 썼지만 성경 읽으면서 느낌 같은 것 표시해놓은 것들이 다 그대로 자기 글씨가 적혀있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여보 이것 어디서 났냐고 그러니까 “여보, 그거 함부로 만지지마.” 그걸 빼서 도로 단정하게 책꽂이에 꽂으며 하는 말이 “사실은 내가 밤손님이었거든” 이게 무슨 소린 줄 아나? 도둑.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이집 저집 다니면서 털고 그러던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지겹게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더래. 그래가지고 재수 없다고 그러면서 책상을 발길로 뻥 차고 나오려고 그러는데 예쁜 책 하나가 딱 꽂혀있어요. 에이 이거라도 가져가면 혹시 누가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고 한권 들고 나왔는데 성경을 딱 펼치는데 “너희는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그게 계기가 되어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다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변화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목사의 길을 가려고 한다고 그랬더니 이 자매가 하는 말이 “여보 그때 도둑맞은 집이 우리 집이야.”
하늘나라의 말씀은 이처럼 기이하게 여러 가지 통로로 우리에게 전해져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옆에 있느냐가 중요해요. 신앙이 좋은 사람이 옆에 있어서 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언젠가 여러분들도 변화될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말씀 드릴 것은 그것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데려가는 안내자 역할을 할 뿐이지 그러한 체험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 변화 받기 위해서 오늘 복면 쓰고 밤일하러 갈까요? 또 어거스틴이 동요를 들으면서 성경책을 집어 들어 변화되었다고 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무지무악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고무줄 돌리면서 집어라 들어라 동요 부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하나님이 하도 답답하니까 그런 방법이라도 사용하신 거잖아요. 성경을 통해서 인간들이 변화되는데 성경을 읽어야지.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인간들을 변화시킬 텐데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어야지. 하도 답답하시니까 하나님이 이런 저런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죠. 그러면 뭐냐 이거죠.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들이 그렇게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되요. 이것이 침체된 영혼이 회복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이죠. 지금 가만히 귀 기울여 보세요. 시계 초 똑딱이는 소리, 전기 흐르는 소리, 밖에 차 지나가는 소리 다 나지요. 근데 이것은 우리가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거예요. 새해는 제발 부탁인데 핸드폰 소리 좀 들리지 않게 해줘요. 이것은 우리가 듣는 것이 아니라 다 들리는 거죠. 근데 지금 여러분들은 설교가 들려요? 듣고 있어요? 듣고 있죠. 들리는 소리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귀를 기울인다는 말은 의지를 가지고 듣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자녀들이 부모의 훈계를 듣는다 그럴 때 그것은 뭐예요? 부모가 말을 하면 귀가 뚫렸으니까 들리겠지. 들리는데 “아이고, 지겨워. 저 얘기 또 하는구나. 저거 언제 끝나나. 아이고, 지겨워.” 그러면 듣는 것이 아니에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것, 제가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의 열배는 더 되는 사람들에게 스물 배는 더 되는 사람들에게도 설교를 해 본적이 있지만 나는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제일 행복해요. 왜냐하면 여러분처럼 잘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도 흡족하지가 않아요. 신년이기 때문에 내가 가르쳐 드릴게요. 예배시간에는 일찍 와서 말씀의 은혜를 위해 기도하고 반듯하게 앉아서 조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가문의 수치요, 만고의 역적이에요.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정자세로 앉아서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설교자가 이야기하는 논리 속으로 들와서 그래서 그랬단 말이지, 그러면 그런데 아하 그랬겠구나 어쩌면 저런 일이 이렇게 하면서 논리를 따라오는 청취가 되어야지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듣는 거란 거예요. 그렇게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오고 그 깨달음이 영혼이 회복되는 길이에요.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요, 주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 이런 것들이 함께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우리 모습을 보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의 감화를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는 거예요. 귀만 기울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잘 들리는 거예요. 대학을 몇 개씩 나오고 지성인들이 도저히 들을 수 없었는데 아주 학교도 별로 못 다닌 할머니가 깊이 이해하는 거예요. 무엇 때문이죠? 한 사람의 귀에는 들리고 한 사람은 듣기 때문이에요. 한 사람은 아직 영혼의 회복이 주어지지 않았고 한 사람은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과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자 이런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우리는 가끔 병영열차를 타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주름살이 패인 어머니, 할머니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던 우리 병영열차를 타는 입대병들의 모습을 사진 같은 곳에서 본 적이 있죠? 그 아들이 군대로 떠나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멀리 떠나는데 창문에 가려져서 뭐라고, 뭐라고 그러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그 눈에 맺힌 그렁거리는 눈물, 그리고 뭐라고 움직이는 어머니의 입술, 할머니의 입술과 그 밭일에 거칠어진 손짓을 보면서 그 자식은 충분히 그 어머니를 읽어내는 거예요. 그게 인격적인 관계에요. 그게 가능하다고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오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대한 이해의 폭이 엄청 넓어지는 거예요. 근데 말이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었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할수록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포되는 그 말씀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옛날에 제가 어느 할아버지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거든요. 이 할아버지는 50세가 넘어서 목사님이 되셨고 책도 많이 읽으실 처지도 아니고 또, 많이 돌아다니신 분도 아니니까 맨 그 얘기가 그 얘기죠. 저도 좀 그런 경향이 있죠. 한 8년 있다가 보니까 훤해요. “아 내가 옛날에 흥남에 있을 때에” 그러면 무슨 얘기인지 뻔해요. 런닝 바람으로 펌프 푸다가 욕먹은 이야기, “일사 후퇴 때에 내려오다가 어느 주막에 들렸는데 밥을 주는데” 그러면 아유 저거 쉰밥 얻어먹고 탈난 이야기구나. 그러니까 설교가 흘러갈 때는 주목을 하고 있다가 “내가 흥남에서” 그러면 교인들이 전부 고개를 푹 숙여요. 또 저 얘기군. “아 내가 주막집에 갔는데” “내가 개척할 때에” 그 뒤에는 한 10분 동안은 다 아는 이야기에요. 토시 하나 안 틀리는 얘기. 다 그래요. 그래서 친구 전도사 한 사람이 “내가 흥남에 있을 때” 고개를 숙이고 거기서 마주 보고 웃는 거예요. 또 펌프 푸는 얘기 나온다. 다 그러는데 한 사람이 저 앞자리에 앉아서 그냥 맨 날 듣는 이야기인데 얼굴이 훤해요. 약간 뻐드렁이거든요. 이빨, 치아를 이렇게 내놓으시면 그냥 환해요. “내가 흥남에 있을 때” 그러면 환히 웃으면서 골백번도 더 들은 얘기인데 누군 줄 아세요? 사모님이에요. 남들이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그러겠지만 그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사랑스러우신 거라. 정치 깡패나 하고 맨 날 속 썩이던 자기 남편이 어떻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저렇게 목사가 되어서 그래서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나? 그게 다른 사람은 매일 들어서 지겹지만 “흥남에서” 그러면 “아, 그 얘기 또 하는구나.”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가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사랑하면 입만 뻥긋거려도 감미로운 목소리에요. 영혼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은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요. “어유, 예배는 짧은 맛에 드리는데 뭐 하러 이렇게 길어.” 짧은 설교가 명 설교라는데 왜 이렇게 긴가.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고 영혼에 깊은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틀린 거예요.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이게 신앙생활 아니에요. 주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고, 들으면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고 들으면서 우리를 고치고 들으면서 우리의 고통을 위로받고 들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자리에 들 때에 어린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인사가 무엇인지 아세요? 쉐마에요. 히브리말로 샤마의 명령어에요. 들어라. 사무엘이라는 말이 거기서 온 것이거든요. 들어라. 여러분, 제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있어요. 그거는 말이죠, 탁월한 청중들이 마음을 다해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주님을 뵈올 것이라고 소망을 가진 성도들,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를 총 맞은 짐승처럼 침체의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나 갈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이나 또 갈 길이 어딘지를 알아도 아는 그 길로 갈 힘이 없어서 인생의 행로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낙담한 사람이나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 사람들이든지 간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오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사죄의 은총을 인도의 은혜를 힘주심의 능력을 공급받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진 탁월한 청중들, 한 번의 예배에 마음을 건 사람들, 한 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 대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교회, 얼마나 행복할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2,3시간 설교를 해도 궁시렁거리는 교인이 없는 교회.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함께 한 가지를 더 명심해야 되는데 침체된 영혼의 참다운 소생을 위해서는 정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참된 변화를 받고 진정한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정직이 필요하다 이거죠. 이 정직은 진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허위, 가식, 위선, 거들먹거리는 것, 그리고 자기가 누군지 알아달라고 뻥튀기하는 것,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어요. 그들의 신앙생활은 늘 곤고하고 가난할 거예요. 죄에 대해서 지적받기를 싫어하고 늘 격려해주기를 원할 거예요. 방종한 자식을 잘한다, 잘한다하면 마지막에 불량배가 되지 않고 무엇이 되겠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늘 그런 상황을 강요받았을지 몰라도 그런 상황을 교회에 와서는 모든 허위와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돼요. 그리고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들어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돼요.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모자라면 모자라는데로 그렇게 진실되게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사람들을 높이 평가해주는 장소가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위세, 허위, 가식, 위선, 뻐기는 것, 교만,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는 것, 이런 것들이 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불쌍하게 생각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피하면 안 돼요. “아, 이 말씀은 그 인간이 들어야 되는데, 오늘 안 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쭉 들으면서 “야 정말 그 인간 오늘 참 진짜 오늘 왔어야지만 그 인간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는데 정말 그 인간이 불쌍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지가 나는 불쌍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래서 우리는 정직해져도 괜찮잖아요. 왜?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우리 주님이 계시잖아요. 그래서 신앙생활 할 때에 정직하고 뭔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가슴에 와 닿은 것이 있으면 회피하지 말아야 돼요. 그것이 무엇일까? 왜 내가 전에는 저런 것들을 몰랐을까? 왜 나의 마음은 이렇게 굳어져 있을까? 왜 다른 사람이 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나는 무지할까? 이렇게 고민되는 것을 끝까지 붙들고 정직하게 갈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정말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모두 회복된 영혼으로 우리 좋으신 주님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찬 사람들로,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 중 한 이야기만 들어도 여러분의 마음에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그런 살아있는 신자들로 회복된 심령을 가지고 소생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대치할 수 없는 열망이에요. 그런 열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영혼을 회복을 경험할 만한 자리에 서면 하나님이 반드시 수십 년 동안 여러분들이 어두움 속에서 신앙생활 해왔어도 하나님이 그 사랑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소생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어요. 너무 긴 세월동안 무지와 어두움 속에 지내왔어도 하루아침에 비추는 찬란한 말씀의 빛, 한 줄기 빛 앞에서 어두움은 수십 년 동안의 권세를 버리고 물러날 수 있어요. 이제는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아야 할 때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제 첫 번째 주일 예배를 우리들이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이제껏 까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돌멩이 같은 나의 마음, 죄와 그리고 불순종으로 깊은 침체에서 굳어진 내 마음에 주님 은혜의 물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보내셔서 그래서 내 영혼을 회복된 영혼으로 삼아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한 해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가장 간절한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6.영혼의 침체(1)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녹취자: 임국한
‘살아났다’라는 것은 언젠가 죽은 적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고 하는 얘기는 지금은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적으로 찬송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죽은 적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의 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 시인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놀라운 소생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소생하고 나니까 주님이 자기의 인생의 목자시라는 사실이 더 뼈저리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정말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자기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자기 안에 계신 그러한 목자와 양의 삶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지만 그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왜 그러면 시인이 소생이 필요하리만치 죽어 있는 상태까지 들어갔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야지만 우리도 한편으로는 어떤 것들이 우리가 지금은 비록 살아있는 영혼이지만 언젠가는 죽게 할 수 있고, 만약에 시인과 같이 영혼이 죽어있는 것과 같은 침체를 경험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다시 살아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동시에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윗의 이 말의 이면으로 한 번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인 깊은 침체. 그 중요한 원인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죄와 불순종이고 두 번째는 무지, 무엇을 모르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고통입니다. 이것을 다 하면 여러분들이 너무 입력되는 양이 많으니까 밀레니엄 버그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만 이번 주에 하고 뭐 세월이야 많으니까 하나하나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죄가 혹은 불순종이, 이 둘은 같은 말인데 불순종은 밖으로 드러난 삶이고 죄는 내면이니까. 그 죄와 불순종이 살아있는 영혼으로 하여금 깊은 침체에 들어가게 만들어서 죽은 것 같이 되게 한다, 그것을 오늘 살펴보고 거기로부터 시인은 어떻게 벗어났을까를 살펴보면 우리의 영혼을 죽음의 상태로 몰아가는 가장 커다란 대적 하나를 이길 중요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당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될 사람들을 하나님이 미리 선택하셔서 선지자를 통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는 사건입니다. 근데 그 기름부음의 사건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기름부음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성령을 함께 부어주셨습니다. 지금과 같이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를 맛보는 그런 때가 아니라 특별한 사람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하면서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힘, 지혜, 능력, 은혜 등의 것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면 로봇과 같이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 저절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격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런 기본적인 능력들을 공급해 주셔서 그가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이전에는 없었던 특별한 능력, 지도력 등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기름부음을 세 차례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다윗은 정말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삶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게 상세하게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어쨌든 그 기름을 붓기 위해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냈을 때에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하다’ 이 히브리어로 ‘아하레 레비’라는 단어인데, 무슨 뜻이냐면 ‘내 마음을 따라오는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이야 너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주냐’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마음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볼 때 하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다윗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매우 흡사했고 다윗의 마음에 가지고 있는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매우 흡사해서 다윗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마음에 일체감을 느끼실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좋은 신자였다는 말입니다. 그 위에 성령의 은혜까지 부어졌으니까 금상첨화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부어져서 이제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탕 자체가 고운 신앙으로 다녀진데다가 그 위에 순결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성령의 은혜까지 부어져서 하나님의 심오한 영적인 세계까지 통찰할 수 있는 선지자의 능력까지 아울러 받았으니, 또한 왕이 되었으니 그 이후에 다윗의 생애는 정말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도 이 세상에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순전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다윗이 그런 삶을 살다가 그냥 죽었다면, 우리는 그냥 바라만 보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이야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도 영혼이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침체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작은 침체야 여러 번 경험했겠지만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잘못이 두 번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것은 행정적으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조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5년에 한 번씩 인구조사를 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인구조사를 합니다. 그 이유는 국가 정책을 세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는 인구조사의 목표가 조금 달랐습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세금 같은 경제적인 이유도 없지는 않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이유입니다. 인구조사를 통해서 성년 남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나이 든 사람 빼고 너무 어린 아이들 빼고. 그리고 병든 사람 빼고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군인이 얼마나 되는가를 헤아리는 것이 이 인구조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여자들은 인구조사 할 때 세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의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도 참 이상한 게 얼마나 보급부대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이제 세상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는 그것이 아주 불쾌한 죄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하나는 인구조사를 통해서 다윗이 ‘아, 내 나라가 이만큼 되었구나’ 하는 자기 나라라는 의식, 그것이 하나님께 안 좋게 보였고 두 번째로는 ‘이 정도 군사가 있으니 이제는 대국이구나’ 하는 자만심,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안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았는데 다윗이 그것을 강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었던 시절부터 지도자들에게 계속 강조했던 사실이 뭐냐면 너희 이스라엘 나라의 힘은 사람이나 말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는 이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그것을 모두 ‘아멘’하고 받아들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것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순간적인 정책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 같았는데 신앙적으로는 그게 정책적인 실수가 아니라 다윗 밑바닥에 깔려있는 은근한 자기 자만심,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국력을 의지하려는 세상 나라의 임금들의 습성 등이 다윗의 내면세계 속에 깊이 파고들어온 것입니다. 이미 다윗의 마음이 많이 변질된 것을 인구조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만 안 놔두셨습니다. 큰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에 7만 명의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는 징계를 당합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다윗이 뼈저리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그것과 함께 또 하나 있었던 범죄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이 대목에 있어서는 ‘그 사람 나쁘다. 왜 이런 일을 했을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다윗을 보면 이 대목은 깊이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여인의 사랑에 굶주린 남자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기록도 성경에 안 나오고, 아버지나 형들에게도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또 결혼을 했어도 아내에게도 좋은 사랑을 받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간음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세한 묘사가 안 나오지만, 산책을 하다가 저쪽에 목욕하고 있는 여자를 본 것입니다. 무슨 목욕을 그렇게 허술하게 했는지. 그 내막이야 우리가 가보지 않았으니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첫 번 만남이었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헷사람 우리아가 이미 이름이 알려진 군인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아마 첫 번째 만남이었다고 보긴 어려울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그런 연정이 싹이 트게 되었고, 어떤 성적인 충동이라기보다는 성적인 충동과 여인의 정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상처받은 과거, 이런 것들이 결합이 되면서 그런 죄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소문난 범죄가 실행에 옮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여자를 보면서 깊이 성적인 충동을 느끼고 그것이 적절하게 예전의 가족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결탁이 되면서 쉽게 범죄에 빠지는 모습이 다윗의 모습인가, 아니면 충만한 은혜 가운데 주님만을 찬송하는 순결한 삶을 살아가던 주 앞에 한 마리 어린양 같던 순결한 신앙이 다윗의 원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둘 다 원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그런 어린양과 같이 주님을 순결하게 따르던 일생동안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산 그 모습은 하나님의 깊은 은혜 안에 있을 때의 다윗의 모습이었고, 충동에 의해서 과거의 상처와 함께 결탁이 되어서 간음의 죄 속에 들어가게 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 전의 다윗의 육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아의 아내에 대한 급격한 충동 같은 것들은 단순히 성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그 왕으로서 한 여인에게 자신을 깊이 용납 받고 싶어 하는 어떤 인격적인 결합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당시의 문맥으로 보면 큰 문제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국가는 가산제 국가개념이었습니다. 가산제라는 것은 국가 전체가 왕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은 임금의 집안의 땅, 풀, 나무, 날아다니는 새 모두 임금 것인데 그것을 빌려 얻어먹고 살아가는 처지에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가산제 전제국가의 개념에서 본다면 온 나라에 사는 백성이 다 자기 백성인데, 물론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자기가 맘에 든다는데 그 중에 한 백성을 데려다가 같이 지냈거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기 아들의 아내를 빼앗은 사람도 있고 형의 아내, 동생의 아내 등 난잡한 근친상간 관계가 얼마나 많습니까.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이유가 무엇이냐면 다윗이 그냥 고대의 한 국가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절대 똑같이 다루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믿기 전에는 나쁜 짓 많이 하고 돌아다니고 하고 그래도 되게 안 걸렸죠?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 믿고 나니까 잘 걸리죠. 그게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이 이제 똑같이 다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부정도 하고 탈세도 하는 등 잘못을 해도 잘 넘어갔습니다. 예수 믿고 나면 뭐만 하려고 하면 매번 걸립니다. 왜?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깊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서는 다 통용되는 것인데도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셔서 가책을 느끼게 만들고 못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다윗이 벌써 이런 죄에 자신을 노출하기 전까지 깊은 고갈의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던 것입니다. 무너졌는데, 다윗이 이것을 깊이 경험하면서 이러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 하나 있는 것 같다.’ 썰렁합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윗은 다는 몰라도 상당히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그런 범죄에 떨어지기 전에 자기 고갈을 먼저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고갈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죄에 대한 모든 저항력이 해제된 상태에서 딱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랬을 때 다윗에게 (우리 속에) 신령한 은혜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굉장히 담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종이호랑이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담대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강퍅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변한 상태에서 범죄 했을 때 다윗은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시 괴로웠을 겁니다. 양심에 가책이 오고. ‘제사를 드리면 되겠지 뭐, 제사장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했겠죠. 요즘 우리가 잘못하나 하면 ‘부흥회가서 은혜 받으면 되겠지 뭐’ 아니면 ‘다음 주일날 와서 회개하면 되겠지 뭐’ 그것도 안 되면 ‘기도원이나 한번 올라가면 되겠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려본 것입니다. 신기한 것이, 다윗은 살아오면서 자기가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그 제사를 거절하시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그 제사를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것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받았을 신앙적인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하나님이 안 받으실 때도 있구나’ 그게 다윗이 B.C. 10세기 때 사람인데,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으실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B.C. 2세기 후의 선지자들의 변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Topic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영적인 진보에 있어서 이미 선지자들보다 200년을 앞서간 시대를 살면서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시편 51편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니, 번제를 원치 아니하시니 그것을 기뻐하셨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당연합니다. 짐승이 없겠습니까, 제사장이 없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곳이 없겠습니까. 다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자기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안 받으신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다윗의 그런 고백을 그 당시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 아마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는. 여기에서 다윗이 엄청난 충격을 받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 23편을 비롯해서 걸출한 다윗의 시편을 깊이 탐구해 들어가면 우리들이 굉장히 거대한 복음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그렇게 만나게 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이냐면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에 대해서 아주 충격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심오한 생각을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사랑, 은혜, 의 이런 것들에 대해서 탁월하게 갖게 된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기름부음을 받은 다음에 빛 가운데 계속 살았을 때는 그 빛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었는데 죄를 통해 어두움 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나서 이 빛의 진실한 가치와 빛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더 새롭게 느끼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물론 범죄 한다고 해서 모두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교과서에는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느꼈을 다윗의 깊은 고민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지금 영적인 인물들의 최정상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고통이 우리들이 범죄하고 느끼는 고통보다 훨씬 더 처절했을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죄를 지어도 그 죄 때문에 자신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는다든지 그런 것 없습니다. 왜? 어차피 팔팔하게 살아있는 영혼이 아니기 때문에 까무러쳤다가 좀 더 까무러쳤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살아본 사람들만이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죽음 가까이 가본 사람만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증오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만이 용서라는 말을 들을 때 눈물을 펑펑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온갖 몸부림을 다 쳐보는데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다윗이 은혜가 떨어지면서 그 여자를 보면서 연정을 느끼고 그러면서 상처와 모든 것들이 결합이 되면서 간음죄로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죄를 선택한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서부터는, 일단 유혹의 갈고리를 다윗이 물고 나니까 그것을 잡아당기는 것이 다윗이 아닌 죄가 다윗을 끌고 간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데리고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루 잤는데 임신을 했습니다. 임신을 하니까 고민이 된 것입니다. 여자가 잡혀가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자는 죽이게 되어있는데, 끝까지 불지 않고 자기를 숨겨줄 지도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죽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율법과 상관없이 그 여자를 사랑하니까 결혼해야겠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 허락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전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전쟁하고 있는 우리아를 불러와서 여자와 동침을 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우리아도 참 충직한 사람이지, 자신의 동료들이 전쟁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어떻게 부인을 끼고 따뜻한 데서 누워 잘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술을 잔뜩 먹였는데도 대문간에 꼬부리고 있다가 그냥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은폐하려고 했다가 안 돼서 그 다음으로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아를 앞세워 전쟁터에 들어가서 적군을 쳐들어갔다가 그 만 남겨놓고 빨리 도망을 와버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적군의 손을 빌려서 죽인 것입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총풍사건이 그때 벌써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손에 칼만 안 잡았을 뿐이지 다윗이 리모콘으로 원격조종해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윗이 그 여자를 보면서 성적인 충동을 느꼈을 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그림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줘서 다윗이 그 의로운 우리아를 죽이고 손에 피묻어있는 모습을 비디오처럼 보여주셨을 것 같았으면 밥맛 떨어져서라도 충동적으로 간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자기가 어떤 범죄를 해야겠다고 고정이 되니까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것 하나만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혹의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깊이 빠져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싶었던 의도는 없었는데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죄가 자기를 끌고 들어간 것이고, 죄가 그 사람을 다스린 것, 통치한 것이었습니다. 그쯤에서 나단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놈!’ 하고 책망하셨으니까 끝났지, 내버려뒀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하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편, 다윗의 내면세계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었을까요? 다윗의 시편에 보면 늘 하나님 사랑, 하나님의 친밀함,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 등에 대한 찬송 제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이까’ 그런 감격으로 가득 차있는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내면의 세계가 죄악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파괴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찬양들은 사라져버렸고 몸은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이로 변하고, 입을 열면 하나님 앞에 흘려 내던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나오던 악기의 줄은 줄이 끊어진 화현과 같이 된 것입니다. 심지어 어느 상태가 되었냐하면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시고 주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 고 호소했으니,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기쁨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심지어는 주님이 성령을 거둘 것 같은 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이 묘사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을 비슷한 시간에 주목할 만한 일이 하나 일어났는데,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여호와의 신을 거두어 가신 일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울이 미친 사람처럼 되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한 인간이 하나님의 신이 떠날 때에 어떻게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임하고, 그 여호와의 부리시는 성령이 떠나가시고 악신이 임할 때 그 인간이 얼마나 추잡할 정도로 파괴적인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을 자신의 그 고통스러운 도망자 생활을 통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장인인 사울에게서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이었는데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은 위기를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침체라, 죽은 것 같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약한 표현입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흉악하게 귀신들릴 것 같은 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죄를 통해서 그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지금 이 설교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적으로 타락하면 전부다 돌 것 같은 위기를 느끼는데, 요즘 멀쩡한 채 살아가는걸 보니까 우리는 다윗보다 나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구나.’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워낙 순결하고 정결한 속에서 하나님과의 풍부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죽음처럼 다가왔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그 죄가 그렇게 무서운 죄구나’ 그런데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것, 온 천하가 자기 것이고 건축 헌금만 90조원 어치를 한 사람인데 다른 것으로 범죄 할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빠질 수밖에 없는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다윗이 빠지기 쉬운 그 죄에 빠졌으니까 이 죄가 그렇게 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 만약에 다윗이 이 죄가 아닌 다른 죄에 빠졌다고 할 것 같아도 역시 그 효과는 정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가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 없지만, 질적으로는 똑같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죄로 말미암아 영혼의 부자유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역으로 말하자면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이 깨끗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던 적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깊은 은혜와 신비한 세계 속에서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죄로 말미암아서 구렁텅이에 처박히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이 되고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영혼의 절대 절명의 위기를 느낀 것이 이 범죄 때문이었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간음이라고 하는 특정한 죄라기보다는 그 간음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죄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명백해지게 됩니다. 왜 우리는 구원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께서 내 영혼의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신령한 환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영혼의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말 진실한 영혼의 참된 살아있음, 생명이 있는 영혼의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반문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죽어있으면 살아나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기억하느냐 못하느냐 하고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르고 있는 죄가 더 심각한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50kg 짜리 돌멩이 하나를 메고 온 사람은 정확하게 그것을 제자리에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공깃돌만한 것 한 자루를 지고 온 사람은 그 중에 단 하나도 제자리에 둘 수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아주 명백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실패하고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더러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양심이 정확하게 그 죄에 대해 자신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왜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워낙 쉽게, 소문난 큰 죄를 저질러 경찰로부터 지명수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는 죄 짓는 것이 너무나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가책이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청년들을 데리고 청평에 수련회를 갔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허해하는 것 같아서 청평시내에서 닭을 20마리 샀습니다. 금방 되냐고 하니까 금방 된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서른 댓 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줌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닭을 잡는데, 닭을 잡아서 푹 찔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백정입니다. 토할 것 같아서 눈길을 돌렸었습니다.
그 아줌마도 처음 닭 잡는 날에는 나처럼 생목이 올랐을 것입니다. 토할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하니까 이력이 나서 껄껄껄 웃으면서도 푹 찔러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쌓이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잉태되서 소생을 하는데 그런 죄들이 계속해서 쌓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딱딱한 껍질을 형성을 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것이 살아서 역사하지 못하도록 캡슐을 싸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생명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속에 생명이 있는데 뚫고 살아나서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의 인격, 삶, 사고, 정서, 의지 등에 영향을 거의 못 주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을 받지 못하는 삶을 가리켜서 쉽게 얘기하면 영적 생활이 전무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흘러가도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는 적도 없고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그저 이번 한 주도 신앙생활 잘 했다고 하는 것은 주일날 가서 예배드리고 지난주에 낸 주정헌금 봉투에 도장 찍힌 것을 보면서 ‘어이구, 한 번 부었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는데, 그런 것은 영적인 생명이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겉모습에 집중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떻게든 사람들의 존경과 명예를 얻어 보고 싶었는데, 교회 다니게 되니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아볼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런 세상 욕심의 종이 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대만 바뀐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이었는데 지금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의 상태는 침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표현이 약합니다. 죽음과 가까운 상태입니다.
(예화) 황무지에서는 아무 것도 안 자라납니다. 일 년에 비가 한두 번 올까말까 한 사막에서도 땅을 파보고, 사막을 다녀보면 신기한 식물들이 다 자랍니다. 그 상황에 적응해서 자라나는 식물들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비가 내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햇살이 비치고, 감동의 시냇물이 흐르고, 그럴 때에 꽃피고 향기로운 동산과 같은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고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습니다. 더 이상 햇빛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런 햇빛과 물, 공기 등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정원은 모두 황폐화되고 그런 것들이 없어도 자랄 수 있는 것들이 정원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신앙의 깊은 감격 이런 것들만 우리 속에서 뭐가 자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거의 사라진 속에서도 뭔가 자랍니다. 그게 뭐냐면 죄와 불순종, 패역, 불결 이런 것들에 대한 옛 기질 등이 뿌리를 박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세계가 파괴된 곳에서 죄악 된 나름대로의 세계가 다시 형성되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게 된 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벌써 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은혜기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정원과 같은 것들이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자라는 옛 기질 등이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내리면 모두 말라서 죽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지 적용을 해보십시오.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께 미움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 번의 죄로 말미암아 이처럼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채 영혼의 깊은 어두움, 그 슬픔 속에서 하나님 없는 자와 같이 살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둠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여러분 속에 주님의 손길이 와 닿는 것 같은 감격이 있습니까? 주님의 숨결이 느껴집니까? 주님과의 사랑에 깊이 빠져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 연모의 정을 느껴봅니까? 위기와 고난 속에서 괴로워할 때 시련보다 훨씬 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까? 갈 길을 몰라 방황할 때 이리로 오라고 오른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힘찬 지시하시는 손이 여러분에게 감지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사라진 가장 커다란 원인이 죄와 불순종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다윗은 급격하게 죄에 떨어져서 짧은 순간에 그것들을 쉽게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 헐떡거리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체질화된 불순종과 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생한 교제와 영혼의 축복을 잃어버리고도 너무나 오랫동안 그런 것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여러분들의 관계 속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저절로 은혜가 충만해지고 신령한 영적인 생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분 있으면 얘기해보십시오. 20년 전에 영적인 침체가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녀 시절에 첫 사랑을 잊어버리고 지금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었는데도 처음 그 사랑으로 못 돌아가 본 사람이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주님 만나고 첫 사랑을 경험했는데 대학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는데도 거기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는 아주 정직한 것입니다. 얼렁뚱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이 우리 영혼에 깊은 죽음과 같은 침체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해결의 길이 없는가? 해결의 길이 없다면 오늘 시인이 그런 것을 한 때 경험한 사람으로서 ‘아이 샬랏 원,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해결의 길이 무엇이냐면 회개입니다. 그 한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볼 때 우리들이 소문난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다윗은 죄로 말미암아 소문이 났지만 회개 때문에 더 유명해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 회개에 대한 처절한 기억이 죄에 대한 범죄의 기억을 능가하는 사람으로 비춰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를 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눈물로 침상을 밤마다 띄우고 요를 적신다’ 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편 여러 곳에서 참회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없이 비참하게 생각하는 표현들을 여러 곳에서 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하게 될 때에는 자기가 저지르고자 하는 죄 이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회개할 때는 하나님 이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렇게 처절한, 뼈 속까지 녹는 것 같은 깊은 회개를 하나님 앞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깊이 존경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다윗입니다. 바울보다 훨씬 어떤 면에서 훌륭한 면이 많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왜? 이 사람이 속에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과 강함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 뭐냐면 그렇게 뼈저리게 범죄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공할 죄악이었는데도 그 속에서 자신의 정결함을 되찾고자 깊은 회개하는 눈물로 영혼의 통증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자 하나님이 그 끔찍한 타락을 통해서 다윗이 은혜의 세계 속에서만 살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어두움의 세계를 보게 하심으로서 빛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예화) 말씀을 준비하러 강원도에 며칠 묵었는데요, 강원도만 가면 제가 하는 것이 있어요. 후~~음 하~~(숨 들이 마시고 내뱉기) 강원도 사는 사람은 그런 사람 아무도 없어요. 늘 마시는 게 그 공기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그리워요. 이렇게 확 들이마실 때 폐부 깊이 와 닿는 착근착근한 공기의 느낌. 그게 꼭 단숨에 우리의 몸속에 흐르고 피 속에 흐르고 있는 더러운 찌꺼기들을 몰아낼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뼈저린 죄악을 통해서 그 은혜가 사라진 어두움 속에서 통증과 영혼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말로만 듣다가 몸소 자신의 죄악을 통해서 뼈저리게 경험하고 나니까 도달되는 결론이,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구나, 정말 그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눈이 확 뜨여져서 구약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깊이 심오하게 통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이미 이 사람이 시편 23편과 같은 곳에서 보여주는 복음에 대한 통찰은 당대의 수준을 넘어선 최정상의 수준인 것입니다. 8세기 이후에 7세기로 내려가는 선지자들은 영적인 유산에 있어서 다윗의 경험에 ……(설교 끊어짐)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것들을, 그런데서 어떤 메시지들을 받느냐 하면 우리가 의롭게 산 사람을 통해서만 진리를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던 이 다윗을 통해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뼈저린 이 다시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소문난 죄의 경험을 통해서도 진리의 빛을 공급받는구나 하는 메시지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이제까지 바르게 살았어야 했습니다. 순종하며 살았어야 했습니다. 옳게 살았어야 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 살았습니다. 범죄 했습니다. 오랫동안 불순종 가운데서 살아왔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마음의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의 가장 커다란 원인 중에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뼈저린 후회입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됐지만 일어났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지워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죽어도 그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결의 길은 무엇이냐 하면 빨리 회개하고 과거에 일어난 그 일이 더 이상 내 신앙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가 진실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개한 계기가 있었는데 저절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를 죄의식을 인해서 고뇌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결국 무엇을 통해서 그것을 행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이후에 도달한 다윗의 영적인 수준이 나단 선지자의 수준과 비교할 때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나단 선지자가 과연 다윗이 발견했던 이 장엄한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훨씬 낮을지도 모르는 선지자의 투박한 지적에 의해서 그는 내면의 세계가 깨뜨려지고 피처럼 쏟아져 나오는 회개를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나단 선지자가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생명을 얻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먼저 죽일 수 있는 메시지를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죄 가운데 살아있는 자신을 죽이는 것이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할 자기 자신을 소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 범죄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이 어떤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가슴을 찢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다음에 그는 소리치듯이 선언합니다. ‘행악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서 물러가라’ 범죄하고 나니까 수많은 악한 미지의 사람들이 ‘야, 이제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다윗에게 양심의 소송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고서 소리치는 것입니다. ‘행악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서 물러가라 여호와께서 내 슬피 우는 목소리를 들으셨도다’ 진실한 회개입니다. 그것이 없는 신앙생활은 지금은 여러분들이 성자와 같을지 모르지만 잠시 후에는 여러분들을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가 있는 신앙생활은, 지금은 여러분들이 너절한 쓰레기 같은 인간일지 모르지만 잠시 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성자와 같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눈물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 그런 주님의 성품에는 정말 어울리는 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회개하는 그 눈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눈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당하는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상받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자신의 죄 때문에 벌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의 범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잃어버리고 주님 자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느껴질 수 없도록 만들어 준 우리 자신의 허물을 깊이 회개하는 가운데서 흐르는 눈물은 하나님이 지나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인간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도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이면서 동시에 우리 육신의 친구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갈등 가운데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향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운 완성에 대해서 예언해야 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하고 깊이 고통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을 때 주님이 어떻게 다윗을 대접해주셨는지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범죄하고,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여 버릴 때, 성경은 말하기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의 보시기에 심히 악하더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생명을 구하며 자신의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 늘 그러하셨던 것처럼 다윗에게도 회복의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고 우리의 체질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어디까지 꺾으면 우리가 참을 수 있고 어느 한도까지 우리가 참을 수 있는지 아시는 분이시고 당신의 은혜 없이 얼마나 당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며 당신이 돌이키실 때 얼마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안길 수밖에 없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죄인들인지를 주님이 뼈저리게 느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의 생명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음의 상태에 있습니까? 아니면 삶과 죽음에 대해서 던진 이 설교자의 질문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을 모르고 살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우리의 영혼이 알지만, 우리들이 모르는 모든 것을 영혼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서 여러분의 영혼 속에 있는 외침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살려 달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영혼에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이 깃들게 해달라고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어두움과 불화와 죄악의 먹구름을 걷어버리고 ‘나’ 영혼을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게 해달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습니까.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을 보십시오. 아무도 완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를 악물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악마의 손톱에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자신의 삶에, 면상에 긁히는 한이 있어도 믿음을 따라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넘어졌던 사람들이었고, 그 연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에 의해서 채워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범죄 했던 사람들이었고,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흉악한 죄인들과의 차이는, 그들은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 속으로 다시 들어간 사람들이고, 흉악하게 죽은 수많은 죄인의 무리들은 영영 그 빛을 다시 되찾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는 차이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비 오는 날 바깥에서 놀고 들어올 때 온통 뒤집어 쓴 흙탕물과 오물, 그 차림새로 집에 들어오던 어느 날, ‘너무 더러워 졌으니 저 자식은 이제 버려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천하보다도 귀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은 우리의 평화를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지불하실 수 없는 최고의 대가를 주고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어떠한 어두움 속에 있든지 어떠한 무지와 죄악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간절한 소원은 우리를 고치고 치료해서 다시 살리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소원은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시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고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좋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우리의 인생 전체를 드려서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가치 없는 죄인들을 당신의 자녀 삼으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사는 것 보시는 것이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오늘도 목자 잃은 양 같은 우리들을, 완악한 우리들을 찾으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용서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했나니
우리 긍휼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마음은 다윗을 불러주실 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찾아 나서시면서 어느 후미진 어두움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능동적으로 주님을 떠났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께 돌아올 수 없고 또 돌아오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영혼의 깊은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여러분들의 잡다한 삶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못박히신 목자의 팔을 여러분들에게 내미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이제는 우리를 더 이상 죄 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막혔던 하나님과의 불화의 담을 헐고 찬란하게 비치는 은혜의 빛, 하나님의 사랑의 빛, 그리고 어두움의 그늘이 깃들 수 없는 참다운 지식의 빛 아래서 주님 자신을 기뻐하시며 살게 하시려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런 회개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주님께로 돌아갈 차례가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사랑의 추격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늘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 인격적인 주님의 그 사랑에 붙잡히시고 승복하는 복된 주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영혼의 침체 2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시23:3上)
시편 73편을 봐야 되겠습니다. 제가 1절부터 읽을 테니까 그 스토리를 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짐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다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아멘.
젊었을 때에 다니던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가 종로에 있었는데 거기는 기다랗게 생긴 레스토랑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문부터 문 앞에는 환하게 불을 달아놨고 저 멀리 갈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레스토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구석부터 앉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사람은 본성 속에 이렇게 컴컴한 데를 좋아하는 기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불빛에 대해서는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두운 것이 죽어도 싫습니다. 환한 것이 좋아요. 그래서 저는 개척하기 전에 내가 교회를 개척하면 편의점처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교회당을 어둡게 하는지 침침해요. 저는 지금의 이 교회당도 마음에 전혀 들지 않습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전기세가 싸다면 한 세배정도 더 밝게 해서 여러분들 얼굴의 주근깨까지 모두 보이는 그런 예배당으로 만들고 싶어요. 일본에 있는 어느 작은 도시에서 그 마을의 자치단체장을 선거하는데 한 후보자가 나와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만약에 이 도시의 시장이 되면 다른 것은 몰라도 가로등을 배로 늘려주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야간범죄가 유난히 많은 도시였는데 그 사람이 당선되고 나서 공약대로 가로등수를 배로 늘렸습니다. 그랬더니 일 년 후에 통계가 나왔는데 정확하게 야간범죄가 50%가 줄었다고 합니다.
내가 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우리가 무지의 어두움 속에 있으면 사단은 마음껏 우리의 인생을 헤집고 다니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우리의 인생을 끌고 다닙니다. 집안에 들어온 도둑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것이듯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침투한 악한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은 참된 지식의 빛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면 내놓고 우리를 농락하던 악한 세력들이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셨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와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감격이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반대로 이러한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은 자와 같이 되었던 침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깊이 침체되어서 죽을 것과 같은 영혼의 침체, 죽음을 방불케 하는 침체의 자리에 들었던 이유가 세 가지가 있었다고 지난시간에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죄요, 또 하나는 무지요, 또 하나는 고통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는 죄가 어떻게 우리를 영혼의 침체 속으로 몰고 가는지 그 죄에 빠진 사람이 소생되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입증하였습니다.
오늘 다루고자하는 것은 무지입니다. 시편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깊은 영혼의 침체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무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범죄는 무서운 것이지만 무지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겪고 있는 영혼의 골 깊은 침체를 보노라면 여러분들이 결코 무지가 죄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시편 73편 표제에는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아삽이라는 사람이기 보다는 이 시가 아삽의 가문에서 보존되었다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시를 쓴 사람이 그 가문에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죠. 그것은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여튼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73편에서 볼 수 있는 이 시인은 아주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 기도 속에서 주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경건한 백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이 시인이 이 평화롭던 신앙의 세계에 커다란 충격파가 밀려온 것을 경험했습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경건생활만 하던 이 하나님의 자녀가 어느 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을 들어서 세상살이를 한번 유람을 한 모양입니다. 그 때에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짐승과 같은 악한 인간들이 잘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인의 머릿속에는 어떤 신앙의 공식이 있었느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의 공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짐승과 같이 악랄한 인간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잠시 잘살지만 결국은 흉측한 사고를 만나서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끔찍한 병에 걸려서 하늘의 저주를 받거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보니까 건강하게 사고도 안당하고 잘사는데 날마다 그들의 재물이 늘어나는 것이에요. 그래 죽을 때는 아마 비참하게 혀를 깨물고 죽겠지! 그렇게 되어야지만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주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선을 행하신다는 공식이 맞아들어 가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죽을 때도 웃으면서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하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꽃상여를 만들고 그리고 수많은 조객들의 애도를 받으면서 장지로 가더라는 것이에요.
그 때 이 시인의 마음에 커다란 혼란이 생겼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러면 도대체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선이 무엇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 내가 정말 짐승처럼 막돼먹은 인간들보다 행복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시인이 뭐라고 고백하느냐하면 ‘아침마다 나는 징책을 보고’ 무슨 뜻이냐 하면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깨달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지적하시는 것이에요.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행동은 그럴듯하지만 네 속이 시커멓다! 마음의 동기까지 정결케 하라! 아직 누구를 복수하지는 않았지만 네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지?’ 이런 죄들을 다 지적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자기를 매일 야단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자기가 무슨 복을 받은 것이 있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이게 뭐냐 이거에요. 세상의 열락을 즐겨본 것도 아니고 그런 것들을 다 억제하면서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성경만 보면 늘 하나님이 야단을 치시는 것이에요. 기도만 하면 무엇을 잘못했다고 하나님이 책망하셔요.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주의 시대의 아들들에게 궤휼을 행하였으리라.’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이럴 바에야 내가 막살아버릴 것을…….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가슴을 졸이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려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애를 썼을까? 나는 계속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저 인간들은 저렇게 잘 먹고 잘살고 마음에까지 기름져서 편안하게 살아가는데 아!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았을까? 차라리 막살아 버릴 것을…….’ 하는 후회가 시인의 마음속에 강물처럼 확 밀려오는 것이에요.
여러분에게 그럴 때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인은 ‘아!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담? 아이! 씨! 막살아버릴 것을 왜 그랬을까?’ 그랬는데 그 상황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을 헤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을까요? 이 상황이……. 왜 말을 못해요. 이 시인이 무지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아! 후회스럽다. 내가 이럴 바에야 하나님의 말씀에 가책을 받지 말고 막살아버릴 것을…….’ 하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죄 속에서 깊이 몸부림치며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릴 것 같은 좌절 속에서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시편23편의 주인인 시인 다윗의 상황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심각하느냐 이거에요. 지금 우리가 본 이 73편 이 시인의 영적인 침체가 더 심각한 것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알아요? 다윗은 범죄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깊은 침체에 떨어져서 죽는 것과 같이 자신의 영혼이 잘못된 것은 오직 누구 때문이에요?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야할 지점이 분명해요.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까지는 그 일이 있어서 해결될 수가 없다는 것이 자신도 분명해요. 그러니까 자기는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어디로 가야할지 탈출구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 시편 73편의 이 시인은 문제가 훨씬 심각해요. 왜? 모든 신앙의 기쁨이 다 사라져버리고 그리고 ‘아, 막살아 버릴걸!…….’ 그런 깊은 좌절로 몰고 갔는데 그랬는데 이 시인의 경우에는 문제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르는 것이에요. 무지하니까……. 그러니까 무지는 영적인 침체를 가져다주는데 그래도 죄는 원인을 아는 영적인 침체를 가져다주는데 무지는 원인도 모르는 영적이 침체를 가져다주는 것이에요. 이런 사람이 73편의 이런 사람이 영적이 침체의 원인은 죄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을까? 그리고 자신의 신앙생활의 죄를 면밀하게 살핀다면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찾을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족스러운 해결은 찾을 수가 없어요. 자 보세요. 보라고요. 여러분들이 고매한 신자까지는 못되었다고 치더라도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그래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성도라면 그리고 매일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기도를 하면서 뭔가 잘못을 했을 때는 그날 밤에 마음의 가책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내놓고 큰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해요. 쉽게 얘기해서 죄를 짓되 세상에서 보면 좀도둑일 뿐이지 막가파식의 죄를 짓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은혜 받고 기도생활 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큰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렇거든요. 여러분 가운데 지명수배를 받은 사람이 있어요?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닐 것이라고요. 다윗과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요. 특별한 악에 빠진 것이에요. 대부분이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73편 시인의 경험 같은 것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에요. 그래요. 그렇게 큰 죄를 안 짓고 사소한 죄를 지으면서 살아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는데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주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좋지요. 그런데 세상에 살아가도 막살아도 하나님을 안 믿어도 막사는 것보다야 착하게 사는 것이 낫지요. 그런데 제가 오늘 묻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그렇게 큰 죄는 못 짓고 소심하게 살았는데 그게 영혼에는 어떠냐고요. 이 사람을 보세요. 큰 죄를 짓지 않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춰보면서 정결케 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어때요? 악인의 형통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까 ‘아이! 씨, 나도 막살아버릴걸…….’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딱 보는 순간에 한 순간에 자신의 신앙이 깡그리 날아가 버리고 ‘아이! 씨, 나도 막살아버릴걸…….’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그런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읽어내실 수가 있어요? 쉽게 얘기하면 그렇게 신실하게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던 그 사람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는 그 순간에 신앙이 깡그리 날아가 버리는 것이에요. 그럴듯하게 집을 세워놓았는데 모래위에 세웠기 때문에 바람이 불고 비가 막 쏟아지니까 단숨에 다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가 버린 것이에요.
자, 보세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영혼의 침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깊은 침체에 빠졌는데 원인이 무엇인지도 조차도 모르는 깊은 침체에 빠져버린 것이에요. 원수가 저쪽에서 ‘꼼짝 마라’ 하며 칼 들고 나타나면 나도 칼을 들었는데 죽든지 살든지 싸워볼만하잖아요. 그런데 캄캄한 어두움인데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서 등에 꽂히는 것이에요. ‘아’ 하는데 가슴에 또 꽂히는 것이에요. ‘으아악’ 하는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에요. 원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이 더 심각한 사람인가 생각을 해보라고요. 오늘날 이 조국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얘기에요. 쉽게 얘기하면 무지의 어두움 속에 우리들이 있으면 사단이 내놓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에요. 사단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지식의 빛이에요. 지식의 빛……. 환하게 들어오는 이 진리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지성과 마음을 비추는 것을 사단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에요. 이런 지식이 없이 능력을 받은 사람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최신형 병기를 들려준 것과 같다고요.
요번에 내가 어떤 사람의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병원에 가도 다 대책이 없으니까 기도원에 가면 낫는다고 해서 기도원에 데리고 갔어요. 기도원에 데리고 갔더니 거기의 어떤 전도사님이 그러더래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형제님을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이 자매가 생각하기에는 이제 큰 기적이 일어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여러분은 아무 걱정 말고 기도만 열심히 하십시오. 제가 오늘 고치겠습니다.’ 가슴에서 칼을 꺼내더래요. 세상에 그런 무식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하여 소위 성령수술이라고 하면서……. 그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우리에요. 그게 전부 다 뭐에요? 사랑은 있는데 지식이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깊이 기억해야 되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대책이 없는 깊은 영적인 침체에 빠지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무지에요. 무지……. 무지의 어두움 속에 있으니까 그냥 마음에 충동이 느껴지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충동이 느껴지는 대로 신앙생활을 집어치우고 그리고 자기 생각에 옳으면 옳은 대로 아무렇게나 막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유치원 2년, 그 다음에 초등하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육 4년 하면 18년이에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적응하면서 살기위해서 필요한 생존을 위한 적응력 훈련이 18년이에요. 물론 거기서 먹고, 입고, 자는 것만 배우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쨌든 인간사에 적응하기 위해서 배우는 게 18년이고 짧아도 초등학교까지는 나오니까 8년 이상 교육을 받고 또 살아가면서 교육을 받아요. 그렇게 해도 인간다운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데 이 육적인 세계에서 먹고 살고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사는 세계에서도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면서 그 신령한 교제의 영향이 이 복잡한 세상에까지 미치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이 일에 있어서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배움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죠. 그것을 기억해야 돼요. 이 무지의 어두움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에요.
나는 그래도 여러분들에게 단연코 말할 수 있어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운전면허 시험을 일주일 남겨놓고 문제집을 푸는 것과 같은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은 엄청나게 개선될 것이에요. 그런데 안한다는 것이에요.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아십니까? 통계에 나왔는데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예배당 문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95%가 10분전에 끝난 예배에서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통계가 나왔어요. 이러한 무지함이 있으니까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이 무지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런 식의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딱 닥치면 즉시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주님의 은혜 그런 것들이 모두 깡그리 다 사라져버리고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늘 말씀드리는 이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은 깊은 지식을 기초로 하는 인격적인 관계에요. 보십시오. 인격적인 관계가 깊으면 가까이 있을 때에도 그 사람을 느끼지만 멀리 있을 때에도 느껴요. 아이들이 아빠를 알아요. 아빠가 아이들을 알아요. 인격적인 관계가 있고 서로 사랑해요. 그런데 아빠가 멀리 출장을 갔어요. 태평양을 건너 멀리 미국까지 출장을 갔어요. 이제 보이지도 않고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아요. 그래도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아빠가 살아있어요. 느껴져요. 인식이 된다고요. 경험이 된다는 거예요. 아빠의 마음속에도 느껴져요. 그러나 서로를 깊이 알고 알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인격적인 경험이 없는 사이에서는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의 시야에서 멀어지면 즉시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이에요. 빚쟁이와 꾼 사람의 관계가 그렇잖아요? 빚쟁이가 나타났을 때에는 저 인간이 나타났구나! 내가 꾸었지 내가 빚을 못 갚아서 이런 고생을 하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서 빚을 달라고 막 독촉을 해요. 그 때는 마음에 살아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미국으로 출장 갔어요. 출장 갔지만 여전히 빚쟁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에 메아리쳐요. 밤이나 낮이나 보고 싶어요. 그런 관계가 있어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그러면 그런 그리움 같은 것들이 없는 것이에요. 그것을 여러분들은 깊이 생각해야 되요. 이게 서로를 아는 깊은 지식, 그 위에 기초한 인격적인 경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신앙 수준이 한없이 낮은 것이에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선을 행해주신다는 것은 맞는 것이었지만 그가 신앙의 세계에는 그런 한 공식만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요? 그렇죠? 그런 공식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신앙의 차원은 일층신앙이기 때문에 일층에서는 저 삼층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냥 복닥거리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죠. 이런 영적인 침체는 열렬하게 기도하고 이런 것으로는 해결이 안 돼요. 왜?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서 이미 이것은 무지가 가져다준 침체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것이라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영적인 침체는 회개가 치유방편이라고 했는데 이 무지로 말미암는 영적인 깊은 침체에서는 번뜻 하는 각성이 탁 오는데 그것을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아!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있을 때만 이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인간의 삶과 죽음을 초월한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확 밀려오는 것이에요. 그리고 무엇을 깨닫느냐하면 죽음 이후에 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임마누엘 칸트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글속에서 말하기를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없을까? 있다 혹은 없다고 우리들이 논의하기 전에 그것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이 만약에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삶의 엄청난 모순들…….’ 도덕 철학자였으니까 어떤 의문을 가졌을까요? 이런 것들이죠. 특히 이 사람하고 똑같은 것이에요. ‘어떻게 악인이 저렇게 형통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다가 한을 품고 죽을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죠. 이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되지를 않는 것이죠. 이런 것들에 대한 유일한 답이 무엇이냐 하면 사후의 세계가 있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이 삶속에서 모두 보상받지 못했던 것들을 죽음 이후에 보상받게 하시고 또 삶속에서 징벌 받지 못했던 것들을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정산하게 만드셔서 해결해주신다는 것이죠.
옛날에 정산해보셨죠. 세금을 많이도 떼고 적게도 떼고 막 그러죠. 연말정산의 서류를 다 갖다내면 직장에서건 세무사에서건 다시 정산을 쫙 해요. 그래서 ‘당신은 덜 냈다. 80만원을 내라.’ 그러면 속이 쓰리죠. 그러다가 어떤 때에는 ‘어, 당신 세금을 너무 많이 냈다. 80만원을 돌려준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 것이죠. 그런 정산의 시간이 죽음 이후에 있다는 사실을 이 시인이 깊이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것을 깊이 깨닫는 그 순간에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마음이 산란하여졌다고 했어요. 일시적으로 커다란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무슨 혼동이냐 하면 이제껏 자신은 그런 생각을 미처 못 했었는데 충격과 혼동이 밀려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이따금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가 충격을 받아야 되요. 숨이 멎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아야 해요. ‘아! 내가 이전에 잘못 믿었었구나! 아! 이전의 생각이 틀렸었구나! 아! 이전의 내가 정말 이런 것이 신앙의 정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이게 아니었구나! 그러면 도대체 옛날에 내가 믿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는 와르르 자기가 무너지는 이런 각성 이런 충격적인 깨달음이 있을 때 신앙이 upgrade되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집사, 장로, 권사가 되고 그리고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해도 그러한 일반적인 신앙생활만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upgrade되지 않아요. 이 무지를 깨뜨리는 진리의 빛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아는 이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upgrade되지 않는 것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아세요? 어떤 사람은 티코에다가 스키 캐리어를 매달고 다녀요. 티코 뒤에다가 이동전화 황금빛 안테나 높은 것을 달고 다녀요. 티코에다가 엠블럼을 붙이고 창문에다가 무엇을 막 붙이고 그런다고 티코가 그랜저가 됩니까? 그렇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는 꼴불견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티코에다가 스키캐리어 달고 다니는 것하고 러닝에다가 서울대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라고 해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런다고 티코가 그랜저가 되느냐고요. 티코일 뿐이에요.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그저 익숙해지고 그래도 upgrade는 안 되는 것이에요.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도 뭐 가운을 갈아입고 난리를 쳐도 upgrade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신앙의 upgrade는 반드시 각성,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무지의 어두움이 벗겨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 깨달음으로 이렇게 upgrade 되기 전에 충격이 밀려오는 것이에요.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은 뭐란 말인가?’ 그러면 이전에 알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었죠. 그 순간에 깨달으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다보니까 무엇을 보느냐하면 하나님이 죽음 이후에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것을 깨닫고 나니까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하면 자기는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날마다 마음을 정결케 하고 손을 씻어서 정결케 하고 나를 깨끗이 하고 무죄하게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느냐?’고 그랬잖아요? 그렇죠? 무슨 얘기에요? 꼴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나는 그래도 참 성도답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나는 복을 안주시고 저런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복을 주셨구나! 아, 막살 것을 잘못했구나!’ 자기가 감히 뭐라고 해요? ‘이스라엘 백성 중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만 주인이 아니시고 영원한 세계에서도 주인이라는 사실이 죽음 이후의 진리가 확 밀려온 후에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이여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습니다.’ 조금아까 이 사람보고 ‘그대이름은 짐승’ 그러면 이 사람이 어땠겠어요? 펄펄 뛰었겠지요. ‘내가 얼마나 정숙한 성도이고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고 헌금도 하고 성찬에 참예하고 이런 신실한 성도인데 짐승이라니…….’ 그랬을 그 고백을 깨달음의 빛이 확 들어오니까 그 때에 무엇을 고백해요? ‘내가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사오니…….’ 하면서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땅에서는 주 밖에 누가 있으리요. 하늘에서는 주 밖에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주님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내가 진실로 사랑할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주 밖에 누가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유열이 밀려드는 것이에요. 희열이 밀려들더니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주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아까 그 고백과 상대가 되요? 그러면 여기서 깊이 깨달은 것이 무엇이에요? 그게 복이라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악을 행하면서도 질병하나 앓지 않고 편안하게 살다가 웃으면서 죽는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 이렇게 나의 불결을 발견하고 마음 아파하며 주님의 타이름을 받아서 용서함을 받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날마다 가까이하는 그 세계가 저 인간들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는 순간에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하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악한 인간들이 저렇게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을까? 경건한 나는 매일 이렇게 곤고하고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이 눈에 뵈지 않는 것이에요.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각성하게 되니까
(찬양)
하늘위의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God is everywhere.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신 것이죠. 그 악인의 형통함 속에도 계시고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깊은 가책을 느끼며 아파하며 흐느끼는 자기 속에도 계신 것이에요. 이 세상에도 계시고 하늘 위에도 계시고 그리고 그들의 인생이 끝난 이후에도 하나님이 변함없이 살아계셔서 이 인간의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이 가슴에 확 밀려오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해요?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냥 꽝하고 부딪혀서 계곡 아래로 추락한 것 같은 이 시인의 신앙이 갑자기 하나님의 찬란한 밝은 빛과 같은 깨달음의 빛이 시인의 가슴속에 임하니까 단숨에 하늘을 차고 나르는 날개를 갖은 신앙이 되어서 비상하는 것이에요. 그러고 나서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형통하다고 하나님을 믿어야 될 필요를 못 느끼는 비천한 인간이나 조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주님이 자기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넘어지는 옛날의 자기와 같은 인생이 모두 하찮은 개미처럼 보이는 그런 신앙의 upgrade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어요?
저는 그 우리 어렸을 때에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어렸을 때는 우리 아이들이 놀이에다가 생명을 걸잖아요? 지금은 장난감들이 많은데 옛날에 우리들이 좋아하던 놀이는 땅 따먹기였어요. 그 때 벌써 부동산 투기가 일어날 것이 예고되었어요. 마당에다가 동그라미를 커다랗게 그려놓고 요만한 납작한 돌멩이 같은 것을 놓고 세 번 튕겨서 들어와야 해요. 그러면 작대기를 긋는 것이죠. 그게 자기 땅이에요. 금을 조금 비뚤어지게 그렸다고 코피가 터지도록 싸우는 것이에요. 그러면 부모님들이 그래요. ‘야 그거 아무러면 어떠냐?’ ‘아무러면 이라니요. 엄마는 땅도 모르나봐 이거 내 땅인데 내 땅을 뺏었는데…….’ 그리고 몇 시간을 통곡하고 울어요. 그러다가 친구들이 지우고 지나가면 그 다음에 다시 그 집주인 땅이에요. 그것을 지금 다시 여러분들이 재연할 수 있겠어요. 교회 마당에다가 분필로 동그라미 그려놓고 한번 교역자하고 제직들하고 해볼래요? 그 때도 멱살 잡고 왜 줄 비뚤어지게 그리느냐고 그럴 수 있어요? 왜 그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하던 그것을 지금은 왜 못해요? 사람들이 흉보니까? 아니요 사람들이 아무도 못 보게 해줄게요. 단둘이서만……. 그러면 또 그렇게 멱살 잡고 할 수 있겠어요? 못하지요. 왜? 어른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그런 것 가지고 안 되고 진짜 땅을 가지고 멱살을 잡아야지 수준이 맞거든요.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노라.’ 장성한 후에는 버리는 것이에요. 그게 도를 터득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에요.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것이 신령한 신앙의 세계 속에 인격적인 주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는 말이죠. 어린아이에게는 아무리 이 세상에 땅바닥에서 손을 새까맣게 해서 그 굿을 하면서 그것을 네 땅, 내 땅이라고 친구하고 멱살 잡고 코피 나고 눈물을 흘리고 그게 뭐냐고요.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고 이 세상에 그런 놀이 말고도 즐거운 인생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면서 아무리 가르쳐줘도 그 어린아이들은 무엇을 몰라요? 그런 인생의 세계를 모르는 것이에요. 해결방법은 뭐에요? 철이 드는 것이에요. 그 이외에는 대책이 없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깨닫고 찬란한 지식의 빛이 속으로 들어와야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가운데 주신 가장 소중한 것은 구원의 선물이고 두 번째 소중한 선물은 지식의 선물이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이 경험했던 이 침체, 무지로 말미암았던 깊은 침체를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지 몰라요.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런 주인공인지 몰라요.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런 일의 주인공이 아닙니까? 깊은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에요. 교회 안에 사람들이 모른다는 얘기들 투성이에요. ‘왜 그래?’ ‘모르겠어.’ ‘은혜생활 잘해?’ ‘몰라.’ ‘왜 그런 시련이 닥쳤을까?’ ‘몰라.’ ‘아는 게 뭐야?’ ‘아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희망이 없는 것이에요.
보십시오. 시인이 이것을 깊이 깨닫기 전까지는 아무리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려고 애를 써도 이 침체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이것이 신앙의 수준이라는 것이에요. 교회의 운영에 얼마나 핵심적인 영향을 준 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느냐가 신앙의 수준이 아니라니까요.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이것이 upgrade가 아니라는 얘기에요. 진정한 신앙의 upgrade는 이러한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인생을 보는 지식이 달라지죠. 신앙을 보는 시야가 달라지니까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가 달라지는 것이에요. 지금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이에요. 자 이 사람이 그런 찬란한 지식의 빛이 들어와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도를 깨우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하면 이전에 자기는 정말 경건하게 살았지만 짐승이었고 그리고 이제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만이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할 뿐이며 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나의 복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에 이 사람이 어떤 삶을 그리워하고 꿈꾸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복이라…….’ 그러면서 여전히 뒤를 보면서 ‘아! 그래도 저 인간들이 잘사는 것이 부럽구나!’ 그랬을까요?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자기가 살아야할 인생의 목표나 계획이 희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해요. 다른 가치관속에서 사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교회만 다니면 뭐해요? 인간의 생각이 바뀌지를 않았는데……. 인생을 살면 뭐해요? 인생관이 바뀌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 자체를 진정으로 고치고 새롭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문화현상에 그치고 있는 것이에요. 이런 것들은 참된 회심과 진정한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 오는 심오한 각성이 결핍된 그러한 신앙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죠.
호세아서 6장에서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는데 그래서 백발이 얼룩얼룩하면서도 철이 들지 않아서 그렇게 개판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침 구름과 같아요. 아침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구름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은데 그러나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을 때 잠깐이고 떠나고 나면 잊어버리는 아침 구름과 같은 그런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던 사람들이 결국은 계속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만 내버려 두시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크게 혼내시고 야단을 치시고 그 때에 이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할 것이라는 것이에요. 뭐라고?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자기들을 치셨지만 고쳐주시고 ‘우리가 돌아가자, 돌아가자.’ 이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놀라운 결심이 일어나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세요?
(찬양)
우리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우리 여호와를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
그게 일어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자 보세요. 가난한 집에서 찢어질 것처럼 고통을 받으며 살다가 그 사람이 한 20평 아파트라도 사서 옮겨가는 날에는 목회자의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만날 차도 없어서 걸어 다니고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자가용이라도 훤한 것 사가지고 오면 많이 기쁘다고요. 그런 것 가지고 목회자에게 미안해하고 그럴 필요 없어요.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내가 차를 산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그렇잖아요? 만날 죽는소리하고 지지궁상을 하고 어떻게 교회가 도와주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이나 하게 만들다가 누가 사업이 잘된다더라! 그래서 저녁이라도 대접한다더라! 그러면 저녁 사먹을 돈은 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가난하다가 여유 있게 되어서 참 기쁘다고요. 돈을 많이 벌면 가끔 저녁도 사고 그래요! 그렇게 기뻐요. 이런 것들이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죠.
교육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교육을 많이 받고 그리고 인류가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들을 발견해내고,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고, 그래서 이전에는 꿈속에서나 그릴 수 있었던 일들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지금도 우리교회는 돈만 투자하면 지금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영어로 더빙해서 전 세계에서 클릭해서 인터넷으로 들어가면 동시에 볼 수 있게 만들 수 있어요. 불과 몇 천만 원만 투자하면 그래요. 그게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미국에서 장담하기를 2030년에는 시드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30분 만에 날아가는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장담했거든요. 날짜선이고 뭐고 이제 다 뭉개지는 것이죠. 그러한 변화가 많이 일어나는 게 우리에게 펑펑하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지만 이게 삶의 질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에요. 우리의 진정한 삶의 질이 나아지고 우리의 삶의 질이 정말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렇게 예전에 30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지금 10분에 날아가고 예전에 요만큼밖에 못하던 일을 이제는 이만큼 하며 산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신앙의 질이 진정으로 개선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게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깨닫고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질을 높이는 비결이라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무지와 어두움을 깨치고 참된 지식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것만이 이러한 어두운 침체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깊은 영적인 침체에 들어있고 특별히 자기의 죄를 발견해보려고 애를 써도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끔찍한 죄도 발견되지 않고 뭔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허황 속에서 시간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주님을 만난 것도 같고 하나님이 전혀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은 이러한 오래된 침체 속에서 헤매는 여러분들에게 나는 오늘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구해야할 것은 참다운 지식에 의한 각성의 빛이에요. 그래서 이 시편 73편의 시인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새로운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을 열고 주의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 속에 들어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며 어두운 여러분들의 영혼에 참다운 빛을 주시도록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계속되던 여러분들의 이 밑도 끝도 없는 영혼의 침체를 극복하고 오늘 이 73편의 시인처럼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격하며 주 하나님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사랑할 분이 없다고 하는 전폭적인, 인격적인 신뢰의 고백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인격적인 주님을 붙들고 사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영혼의 침체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上)
빨리 진도가 안 나가니까 조금 초조하기는 한데요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중의 하나가 설악산이죠. 그렇죠? 설악산을 보는 방법이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속초에서 비행기를 타고 20분 만에 태백산맥을 휘이익 넘어와도 설악산을 보았지요. 또 총알같이 빨리 달리는 대절택시를 타고 15분 만에 한계령을 넘어도 설악산을 본 것은 본 것이지요. 그것은 본 것이 아니지요. 친구와 함께 말동무도 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면서 아름다운 산골짜기가 나오면 잠시 다리를 뻗고 쉬기도 하고 약수터를 만나면 한 모금 목을 축이기도 하고 그렇게 걸어서 넘어야지만 그게 정말 설악산을 본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단번에 6절까지 갈수도 있습니다만 이제 천천히 걸어서 우리가 3절 초반부까지 왔습니다.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시인이 경험하고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진정으로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단 말이죠.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이야기는 침체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침체의 대표적인 원인이 이 시편 전체를 통해서 살펴보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개인의 죄이고 두 번째는 무지이고 그리고 세 번째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고통이에요. 그래서 죄에 대한 해결은 무엇이라고 그랬지요? 회개를 통해서 영혼이 소생된다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 무지는 어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 그 무지에서 벗어날 때에만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죠. 그것이 지난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영혼의 침체의 마지막 원인이 되는 이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이 시편은 특별히 풍부하게 수많은 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노래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시편은 여러 곳에서 대적으로 인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침체에 들어갔던 사례들을 풍부하게 보여줍니다. 시편 3편이나 13편, 그리고 22편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 시를 지은 그 시인이 고백하는 것들만 모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의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까?’ 또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특별히 제가 처음 낭독해드린 이 시편 3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그를 피해 도망가며 지은 시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의 무리들과 함께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참담한 상황에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윗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을 저주하는 백성들은 그것이 바로 사울의 집안을 멸한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냐고 떠들어댔습니다. 다윗은 졸지에 닥친 그 참담한 위기 속에서 민심은 이반되었고 법궤도 버려두고 사랑하던 성전도 뒤로한 채 맨발로 재를 무릅쓰고 울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최악의 상황과 수많은 무리들의 도전 속에서 비록 다윗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며 나의 영광이시며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라고 고백했지만 그는 오히려 앞서 살펴본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원수들의 공격 앞에 노출된 자신의 무방비한 상태와 대적들로 말미암아 당하는 수치와 고난 때문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는 시인의 영적인 침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깊은 침체를 가져옵니다. 이 고통은 대부분 우리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오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뿌린 씨를 거두어들이는 고통입니다.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 그리고 우리의 과거와는 상관없이 고통을 당하게도 하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통해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우리에게 커다란 아픔과 그리고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되면 아무리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했던 사람도 그 고통이 너무나 오래 계속되어서 아픔이 지속되면 영혼의 침체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침체되고 그 침체 속에서 벗어나는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그러나 결코 인간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커다란 시련을 만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만나면 그 때 비로소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얼마나 힘이 없고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그 때에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오르규라는 작가는 25시라는 책을 써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24시도 아니고 25시라는 의미는 절망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지극히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세 들고 살아가면서도 왜 자기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미 여러 곳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힘에 있어서도 인간의 힘은 당나귀 한 마리의 힘에 미치지 못합니다. 지식에 있어서 뛰어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인간이 아는 것은 모르는 것들에 비해서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인간에 의해서 밝혀진 진리는 감추어진 진리보다 훨씬 더 소수이고 우주 공간으로 나가면 인간은 인간이 아는 것은 거의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그러한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한 사실과 현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정의를 내린다면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알고 그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에요.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그 감정, 그것이 종교의 감정이에요. 신앙의 감정이라는 것이에요. 한 사람의 신앙이 깊이는 그가 자신을 향해서 얼마나 깊이 깨달았는가와 비례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주관적으로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최대한 보아서 이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그리고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며 그리고 자기를 의지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자기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를 많이 믿고 자기에게 많이 실망을 해도 그 실망을 정직하게 고백을 해서 자기가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곧 신이기 때문에 자기를 그렇게 믿지 못한다고 말하고 나면 한없이 무너져 내려가는 것밖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로라도 자신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살 수 있고 훌륭하게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자기에게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마치 숲속에 버려진 한 마리의 어린양과 같이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 없이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에게는 즉시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주위에는 그렇게 자신만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까? 왜 우리 주위에는 자기는 너무나 연약하니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인격과 삶속에 깊이 배어있는 그런 주님 자신을 향한 갈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으시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정도의 문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못 만났거나 만나도 아주 오래되었거나 아니면 만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 만나는 정도의 깊이가 매우 얕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과 인생 전체를 움직일만한 영향을 그 만남이 못 갖다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혼자서 씩씩하게 잘사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못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자부심이 강하고 씩씩한 사람들이에요. 매사에 실망할 줄 모르는 사람들, 낙심할 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이 깨뜨려진 마음이 있는 그곳에 오셔요.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곳에 오신다는 것이죠. 오늘 여기에 이렇게 여러분들이 가득 모였습니다만 여러분 모두가 이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고 돌아가기를 나는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만나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아오실까요? 돈이 많은 사람이나 권세가 높은 사람, 아니면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시는 것은 아니에요. 외모를 보시고 찾아오시는 것은 더더욱 아니죠. 주님의 관심은 지금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주님은 사면을 두루 살피면서 온 천하 사면을 두루 살피면서 어느 도시, 어느 골짜기, 어느 교회에 그리고 어느 인생의 비탈길에서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찬양)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밖에 나의 맘을 뉘 알아 주리요.
그런 간절한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에요. 찾으시면 그 사람이 돈이 많은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어른이든지, 가장 어린 아이든지,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든지, 죄악의 수렁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이든지, 어떤 것도 찾아오시는 주님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래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이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라는 이 진실한 신앙의 고백을 증진시키시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우리가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도록 만들어야 되는데 우리 인간들이 너무 무지막지해서 그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돈 좀 있으면 수많은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그렇게 행세를 하고 권력이 조금 높아지면 하나님이 안전에 없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에요. 평안하면 고통 받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성과 결합을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에요. 그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때때로 강하게 일깨우셔서 그래서 우리의 참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보게끔 만들어 주셔야만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살아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죠.
제가 어렸을 때에 강원도가 집이었는데 방학 때마다 갈 때 이렇게 보면 길거리에 물이 흐르는 천에 계속 물레방아 같은 것을 돌리면서 흙더미 같은 것을 빻는 것을 보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금을 채취하는 현장이에요. 그래서 광석을 갖다가 그것을 다 부수어서 부유법이라고 그러는데 거품을 일으켜서 그 거품으로 띄우는 것이에요. 그러면 돌멩이나 금이나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밀도가 다르잖아요? 띄우면 각기 분류가 된단 말이에요. 분류가 되면 이제 금가루들을 모아요. 그래도 그 금은 불순물이 많아서 거의 쓸모가 없는 금이에요. 그것을 용광로에다가 넣고 제련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찌꺼기를 걸러내죠. 그래서 대충 걸러낸 것이 14금, 더 걸러낸 것이 18금, 여러 번 되풀이해서 최대한 불순물을 빼버린 것이 99.99%라는 순금이에요. 14금과 순금의 값은 하늘과 땅차이에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신앙의 대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부족을 처절하게 깨닫고 정말 주님 한분만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게 신앙이고 그런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여러 가지로 아까 말씀드린 그런 요인들로 말미암아서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니까 삶이 그런 삶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에요. 주님이 주시는 고통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잘못해서 그 고통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이에요. 고통을 받으니까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 자신의 참모습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나 혼자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에게는 정말 목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목자를 멀리 떠난 인생을 산 것이 자신의 이런 고통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적으로 확인하고 주님의 품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하는 고백을 받아내실 때에 우리들이 정결해지는 것이에요. 그것을 하나님이 늘 하셔야만 우리 일생이 계속되는 동안에 이런 고통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자신의 품으로 더 떠난 우리를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받아내시면서 다시 불러들이시고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에요.
그게 사실 말이죠. 우리는 사고를 칠 능력만 있지 수습할 능력은 없어요. 그렇죠? 죄를 짓고 그리고 목자의 품을 떠날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못 막으셔서가 아니라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놔두시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그것들을 고칠 수 있는 힘은 없어요.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부모가 자기의 자녀를 교육하면서 쓴 어떤 통한의 수기를 봤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는 싸움을 잘하잖아요. 여러분 한번 솔직히 얘기 해봐요. 자기애들이 나가서 맞고 들어오는 것이 기분이 좋아요? 아니면 때리고 들어오는 것이 기분이 좋아요? 이렇게 물어보면 질문이 너무 사악하지요? 맞고 들어올 때의 기분이 속이 더 상해요? 때리고 들어올 때 속이 더 상해요? 대답을 안 해요. 그런데 그 아이는 늘 맞고 들어오는 것이에요. 손톱자국도 나고 두들겨 맞고 울고 들어오는데 국민하고 2학년인가 3학년이 되었는데 1학년 애들한테도 맞고 들어오더래요. 그래 이 부모가 하도 열을 받으니까 ‘너는 손이 없느냐? 발이 없느냐? 왜 맞고만 다니느냐? 때려라, 너도 때려라!’ 그 다음부터는 이 엄마가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시켰는데 열대 맞고 들어오면 열다섯 대를 두드려 패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는 얘가 싸움이 붙었다하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왜? 여기서 많이 맞아도 이기면 집에 가서 안 맞지만 여기서 실컷 두들겨 맞고 지면 이거보다 갑절이나 집에 가서 또 맞는다는 것이에요. 그럴 바에야 이를 악물고 싸우는데 그 다음부터 완전히 싸움돌이로 바뀐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이제 3학년밖에 안되었는데 5학년하고도 싸워서 이기는데 자기보다 덩치가 워낙 큰데 그냥 붙들고 놔주지를 않는 것이에요. 어떤 때는 개가 물은 것처럼 팔을 물어서 그 부모가 애를 데리고 와서 당신 아들은 개냐고 사람을 무느냐고……. 하다가 안 되니까 어느 날은 이 녀석이 벽돌을 들고 5학년의 뒤통수를 내리갈겼어요. 피투성이가 되었어요. 이게 완전히 깡패로 변한 것이에요. 그러니 그런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돼요. 그래도 전에는 어때요? 만날 얻어맞고 들어오면 가서 따지면 상대방 부모들이 정말 죄송하다고, 애들 교육을 잘못시켜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자기가 돈을 싸들고 다니면서 치료비를 대주고 유리창 깨진 것 물어주고 뒤통수 터진 것 꿰매주고 그러는 것이에요. 악한 부모라도 자기의 의사에 반해서 자식이 사고를 쳐도 뒷수습을 해주는 게 이게 악한 부모도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은 누구세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속하신 아버지에요. 그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돼요. 그런 예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모두 자기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이에요. 예를 들면 어때요? 돈 씀씀이가 헤픈 사람들은 항상 물질로 고통을 당해요. 인간관계에 신의가 모자라는 사람들은 늘 인간관계로 고통을 당해요. 그런 것 아니에요? 당연하지요. 그리고 꼼꼼하지 못하고 일을 덜컹덜컹 저지르는 생각이 짧은 사람들은 항상 실수로 인해서 고통을 당해요.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신중하지 못한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해요. 생각 없이 도장을 콱 찍었는데 어느 날 차압통지서가 날아오고 그러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데 그런 하나님이 의를 위해서 당하는 고통은 함께 하시지만 자기의 허물과 죄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 앞에서는 내버려 두시는듯한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아니시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시인들이 시편 전체를 보면 우리에게 이런 의구심이 들어요. 이 도대체 그 시인들은 그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누렸던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시편만 열면 왜 ‘하나님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 이제 어디로 가셨습니까? 귀를 막고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군요!’ 뭐 이런 하나님이 도저히 느껴지지 않고 혼자서 몸부림치는 그 하소연들이 많이 나와요. 왜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해주시던 사람들이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 거기에 대한 답은 이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통 속에서 이제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통 속에서 많이 깨뜨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 고통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안이에요. 특별히 그런 고통 속에서 사단이 흔히 써먹는 낡지도 않는 카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통당하는 성도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다고 속삭이는 것이에요. 너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속삭이고 그리고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죄악들을 모두 생각나게 하면서 ‘봐라 그런 끔찍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데……. 너를 상대해주시겠느냐?’ 속삭여요. 일단 고통 속에서 시련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안계시다 나는 여기에 혼자 버려졌다.’ 이런 상태가 될 때에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하면 자포자기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를 내팽개치는 모습으로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과히 시련 속에서 환락에 빠지고 어떤 타락하는 광경들이 결국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에요. 절망감이 잘못 분출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진실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여러분들 스스로 사고를 쳐서 당하는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결코 버리시지 않으신다고요. 여러분이 부모인데 자식이 단지 사고를 많이 친다는 이유 때문에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이 있겠어요? 우리들이 우리가 잘못해서 스스로 잠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걸어서 깊은 시험과 고통이 있는 어두움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거기서도 우리를 혼자 버려두시지 않는 것이에요.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그게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이 시를 지은 다윗이 뭐라고 고백했어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다윗이 그런 깊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영혼의 침체를 경험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죠. 그런 속에서 우리 자신이 참모습이 무엇인가를 보게 만드시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 우리들이 진실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우리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물론 막 사는 것은 감당 못할 것이 없어요. 막사는데 감당 못할 게 뭐있겠어요? 운전 못하시는 분들 있지요? 아무리 운전을 못하는 분이라도 끝없이 넓은 평지에 자동차를 갖다놓고 시동을 걸어주면 운전 못할 사람은 없어요. 아무데로나 가면 되니까……. 100㎞로는 못 달리겠어요? 아무리 달려도 장애물이 없는데. 그러나 길만 따라가라 그러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능력이 없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막 살아가는데 무슨 힘이 필요하겠어요? 짐승처럼 막 사는데 무슨 능력이 필요하고 무슨 도움이 필요하고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무슨 지식이 필요하겠어요? 그냥 막살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우리 자신도 불행하고 그리고 우리 때문에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잖아요. 더욱이 그렇게 살아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정말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할 때는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막돼먹은 신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요? 아마 거추장스럽기만 할 거에요. 막돼먹은 신자로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어요. 기본적인 철칙 몇 가지만 지키면 되요. 주일날은 교회로, 예배시간에는 반드시 헌금을, 그런 몇 가지만 지키면 누구도 자기를 보고 신자가 아니라고 말을 못한다고요. 그러나 참된 판단은 사람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은혜를 받고나서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 이제껏 까지 생활했던 이런 식의 교회생활이 이게 참 신자의 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
(찬양)
신자 되기 원합니다. 참맘으로…….
그런 고백이 나와요. 그래서 정말 하루를 살다가 가더라도 정말 진정한 신자로서 한번 살고 싶은 것이에요. 왜? 은혜를 받으니까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시는데 내가 정말 주님의 신자답게 살고 싶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까 이게 자기 자신의 힘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하면 ‘아 정말 매순간 매시간 마다 붙드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아니고는 내가 주님 앞에 진실한 신자로 설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사람들이 가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오늘 여기에 여러분들이 많이 모이셨지만 여러분들이 모두 정말 오늘 이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그런 주일은 정말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나온 것만은 아닐 거예요. 그렇죠?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교회에 가다가 시간이 늦으니까 중간에 내려서 쑥 들어오신 사람들도 있으실 것이고 아니면 얼른 빨리 예배가 끝나고 오후에 가서 볼일을 보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에요. 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겉모습이 그 내면에 있는 진실한 마음을 다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의 이 껍질을 벗길 수 있는 그런 신자들이 되어야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지 한참 우리들이 위장을 하고 돌아다니면 그게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한 약점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셔서 그 고통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존하면서 그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고통은 하나님이 주님을 멀미 떠난 우리들을 찾아서 부르시는 지팡이와 같은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침체를 겪을 것을 알면서도 고통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종종 두시는 이유에요.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영혼의 침체가 오고 그리고 영혼의 침체가 오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고통의 주된 원인이 결국은 사람이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실제로 우리들 속에 어떤 고통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거기에는 그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있고 환경도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찾기 어려울 경우에는 뭐라고 말하죠? ‘재수 되게 없다. 팔자소관이다.’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그런 상황에 처해있을 때에 사실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하신 인자하신 아버지이신데 그것이 비록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겪게 만드실 때에는 거기에 뭔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에요.
어느 집에 가서 애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쪼그매요. 몇 개월이나 되었을까요? 그런데 국수를 말아먹은 얼큰한 국물이었는데 그것을 달라고 울고불고 숟가락을 팽개치고 난리를 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먹으면 안 되거든요. 애들이 쪼그만 애들인데 그것을 먹으며 매워서 되겠어요? 하도 울고 난리를 치니까 그 어른들이 한번 먹게 내버려두라고 그래요. 아마 그러면 다시는 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국그릇을 끌어다가 입에 조금 댔어요. 그 다음에 매워서 죽는다고 입을 털면서 난리를 치지요. 그러면 잘 생각해봐요. 그게 불덩어리였으면 그 사람들이 한번 만지게 내버려두라고 그러겠어요? 그게 칼이면 한번 찔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겠느냐고요. 악한 우리들이라도 그렇게 안 해요. 그것은 국물이니까 한번 먹어서 매운맛을 보면 다시는 이런 난리를 안 칠거라는 것을 알고 교육적으로 한번 해보라는 것이지 그 국물이 펄펄 끊는 장국이었으면 그것을 먹어보라고 그랬을까요. 우리가 악한 인간이라도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은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없어요. 감당할 수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을 안 하셔요. 그리고 닥쳤다고 하더라고 즉시 피할 길을 주셔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고통을 극복하고 그것을 이기는데 우리가 바른길을 찾지 않으면 그 고통 속에서 육신도 잃고 영혼도 잃는다고요. 우리는 흔히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마음이 돌멩이처럼 강퍅해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에요. 그게 믿는 사람들 속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끝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그래요. 안 믿는 사람이 그랬던 대표적인 경우는 누구에요? 바로에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대항해야 했던 그 바로에요. 열 번의 재앙이 계속 몰려오는 것이에요. 한번 닥칠 때마다 자기의 왕국은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당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그러라고 모세한테 부탁을 하고는 돌아서면 마음이 다시 강퍅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어디까지 갔어요. 자기의 큰아들이 죽는 상황에까지 가게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모두 겸비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동물하고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고통을 당할 때에 동물과 인간 모두 그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은 같은 마음인데 이 인간에게는 그 위에 하나가 더 있는데 뭐냐 하면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에요. 의미를 생각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에요. 동물들에게는 없지요. 그런데 인간도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고통을 당하면서 처음에는 이 하나님이 이 고통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실까?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를 않아요.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해결이 빠르게 나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한 것이에요. 사업을 하다가 큰 부도가 나고 망하거나 빚보증을 섰는데 누가 떼어먹고 집이 차압을 당하거나 가정에 불화가 나거나 하면 그냥 기도는 안하고 밤새워서 고민을 하는데 결론이 나기를 뭐냐 하면 그 인간을 찾아가서 반쯤 죽이면 해결이 된다. 그리고 이 원인은 결국은 누가 제공을 했는데 그 인간이 죽일 인간이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이것은 어디에서 돈을 빌려다가 빨리 틀어막으면 문제는 깨끗이 해결된다. 그리고 나는 다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어리석은 공식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러나 의미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누가 죽일 놈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게 해결의 길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하는 이것은 마치 뭐냐 하면 주인에게 한 대 얻어맞고 깨갱거리면서 도망가는 강아지와 같은 반응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전이 없고 그 고통 속에서 목자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들도 어렵다는 이야기죠.
그렇게 사람이 억수로 고통을 당할 때에 그 때에 그런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올바르게 권고를 해주는 것이에요.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 풍파가 다 지나가고 한가할 때 찾아오셔서 전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도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보십시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런 식의 처방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에 대한 그 처방치고는 너무 먼 길을 돌아가는 처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이 도저히 그 속에서 자기의 힘으로 그 고통 속에서 헤쳐나 올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때에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죠. 이제껏 까지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인생의 깊은 시련과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를 극적으로 만나주셔서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 여기까지 인도해주셨는지를 회상해요. 그리고 갑자기 설움과 함께 그런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이 있다면 지금 이 고통 속에서도 내가 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똑바른 생각이 어느 시점에 말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죠. 그 때에 비로소 이제껏 까지 자신이 봤던 렌즈와는 전혀 다른 렌즈로 이 자신의 상황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제까지는 저 사람, 저 인간, 이 친구가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인격적으로 승복함이 없이 내 멋대로 살아가는 이 인생을 목자이신 당신의 품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뭐냐 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 사람들을 향한 깊은 미움과 뿌리 깊은 불신과 악감정들이 사라지고 좀 더 대국적인 견지에서 자신의 인생을 보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이제 눈을 뜨는 것이죠. 그전에는 돈만 있으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 딱 보니까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만들어 주시는 기회라고 하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자신의 영혼은 어떠한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 신앙의 태도는 어떠한가? 자기 속에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목양의 그늘아래서 살아가려고 하는 의존의 감정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점검하게 되는 것이에요. 물론 그런 것을 점검할 때마다 이제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사람이냐는 것이 처절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프죠. 아파도 그것은 회복을 위한 아픔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그 고통 속에서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갈망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묵었던 때들을 벗겨버리시고 그리고 우리를 불과 같은 고통을 통해서 정결하게 제련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이제껏 까지 자신의 인생에 크게 보였던 세상, 물질 이런 것들이 막 떠오르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주님이 가장 커다랗게 부각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삶, 생활 여기게 전체적으로 가장 커다란 주제가 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전에는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당에 앉아 있어야지만 겨우 하나님이 생각이 났는데 이제는 ‘ㅎ’ 자만 봐도 하나님이 생각이 나요.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나 주 없이 살 수 없네!
그러면서 이제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풀 몇 움큼 더 먹고 물 몇 모금 더 마시고 어디 그날 아래 제일 좋은 자리 차지해서 앉고 벌렁 눕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의 인생의 참된 기쁨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거든요. 그 핵심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이 있지요? 고통은 항상 견딜만하게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이 밀려오기를 파도와 같이 연속해서 밀려오고 그리고 부딪히는 파도에 바위가 서서히 깎여나가고 오랫동안 떨어지는 빗줄기에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봄날의 따뜻한 햇살에 고드름이 녹듯이 언제부터인지 모르는데 익숙해진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서히 깨뜨려지고 그리고 주님을 향한 깊은 찬양과 경배의 마음이 불평과 원망의 마음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는 그런 고통 속에 있게 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간수하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최고의 소원은 여러분들이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나 무엇을 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의 소유는 여러분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들이 주님 안에 있는 그러한 관계가 되는 것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너의 참된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여러분들이 망설이지 않고 주님 자신이 저에게 행복입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단호하게 주님이 저의 행복의 전부이고 제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숨을 거둘 때 까지 내 인생에 가장 커다란 숙제는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 속에서 잠시 사는 것이 아니라 늘 그런 고백 속에서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양떼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목자와 그 목자가 자신의 인생을 향한 가장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러면서 어디로 이끌던지 그 손에 이끌려서 푸른 풀밭에서 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마시며 그늘진 언덕에서 쉬는 그러한 삶을 택하는 그 양떼 그 결합이 바로 목자와 양의 관계에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에요.
이런 시련과 깊은 고통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침체되기 시작할 때 여지없이 대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크게 대적 셋이 고개를 들고 날뛰기 시작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견고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에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던 그런 대적 셋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이게 첫째는 마귀에요. 마귀가 고개를 들고 이제 신앙이 많이 식어진 우리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이 너를 정말 사랑하시느냐? 하나님이 너를 정말 사랑하서더냐?’ 마침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서글픈 느낌을 받고 있는데 마귀가 와서 아주 다정하게 ‘너는 혼자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더냐?’ 막 서러워해요. 그러면서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분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사단의 품에 안기기를 사단은 원하는 것이에요. 정말 우리들이 우리의 고통을 토로하고 그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장소는 한군데밖에 없어요. 하나님 품이에요. 다른데서는 될 수 있으면 울지 말아야 해요. 영화 보다가 울고 잡지 보다가 울고 그러면 안돼요. 신문에 나오는 소설을 보다가 울고 그러면 안돼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고개를 드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는 또 어때요? 시련의 깊은 고통 속에서 우리의 경건생활이 해이해지게 되면 거침없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이 부패함이 고개를 드는 것이에요. 그 자기 연민에 빠지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너그러워져요. 제가 다니던 교회에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목사가 되려는 형제를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결혼을 목표로 놓고 사귀는데 어느 날 헤어지게 되었어요. 신앙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하던 자매였는데 그런데 하루는 만났는데 그래요. 얼굴이 하도 안쓰러워 보여서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그랬더니 그 때는 제가 전도사였는데 ‘전도사님 저 요새 술로 살아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요. 뭐 한때 주님을 위해서 선교에 자기를 드리겠다고 각오한 자매가 그 형제와 헤어졌다고 술로 산다면 교회는 술 취한 사람들 투성이겠네요. 그래서 충격을 엄청 받았지요.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한참 술을 먹었지만 끊었고 그 후로는 실연도 하고 괴로운 일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어도 술로 살아본 적은 없거든요. 진짜에요. 그런데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제가 전도사니까 목사님이 물어보시는 것이에요. ‘아무개는 어떻게 되었다며……. 어떻게 사느냐?’ 그래서 저는 또 정직한 사람이 아니에요. ‘목사님 그 자매요. 술로 산대요.’ 그러면 나는 목사님이 그럴 줄 알았어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보수적이고 완고한 노인 목사님이 고개를 푹 숙이시더니 ‘예 제가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저는 두 번 충격을 먹었어요. 그게 뭐에요? 고통이 없고 명경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제가 오늘 밖에서 유혹해볼까요? ‘집사님 오늘 끝나고 교인들 다보내고 술 한 잔 하러 갈래요?’ 그럴 때 ‘정말?’ 이런 사람은 없다고요. ‘정말이에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럴 사람은 없다고요. 왜?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오래 계속되면서 신앙적으로 주저앉게 되면 침체가 들어오게 되면 자기에 대해서 굉장히 너그러워지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를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릇된 자기사랑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는 멀리 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어떻게 되요? 그런 너그러운 마음이 우리들에게 자꾸 죄를 불러들이게 되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요? 그러면 고통과 죄가 융합을 일으키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파괴되고 멀리 떠났던 사람이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나게 되는 것이에요. 회복으로부터 그만큼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깊이 고통 하는 사람들을 저는 너무 많이 봤어요. 이 간단한 사실을…….
그리고 또 하나의 대적이 고개를 드는데 그것은 세상이에요. 고통 속에서 깊이 좌절하게 되면 옛날에 거의 죽은 줄 알았던 세상의 입맛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더 큰 시험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랫동안 고통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아요. 해결의 길은 둘 중에 하나인데 하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고통 속에서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속에서 사는 길을 배우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길 수 있잖아요? 그렇지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 비결을 배우는 것이에요.
혹시 여러분 시인이 경험한 것과 같은 이런 깊은 고통 속에서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고 계신 분들은 안계십니까? 오늘 설교를 듣는 이 순간에도 ‘아니야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어. 그리고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은 나를 매우 미워하고 계셔. 주님께 돌아가기에는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에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쌓여진 담이 너무 높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 이 순간도 시험과 고통이 뒤범벅이 되어서 뭔가 알 수도 없는 혼란 속에서 지내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거나 세상의 유혹을 받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이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하고 주님이 나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고 하는 성령이 반복해서 약속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 속에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 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느낌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든지 말든지 하나님은 원래 사랑이십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 부모는 오늘도 집을 나간 자녀를 기다리며 눈물로, 짓무른 눈으로 동구 밖에 서서 멀리 걸어오고 있을 그 아들을 기다리며 오늘 저녁도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을 각자, 각자를 어떻게 해서 오늘 이 자리까지 인도하셨는지 한번 주님과의 만남의 기억을 가지고 회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파도에 떠밀리는 나무 조각처럼 우연히 모아져서 오늘 여기에 이렇게 떠내려 온 것이 아닙니다. 의지도 없이 뒤엉키는 인생의 파도 속에서 어떻게, 어떻게 밀리다보니까 오늘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에 서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 한사람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시고 어떤 복사판도 불가능한 원판으로서 여러분의 존재 그 자체가 한편의 긴 대하소설입니다. 그리고 그 소설의 주인공은 여러분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나는 애절한 관계와 우여곡절이 지속되었지만 그래도 항상 승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끝났습니다. 그 안에는 어둠속에서 불러내시고, 쓴물을 머금어야하는 고통스러운 광야에서 노래 부르게 만드시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적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진을 칠 때에 하루아침에 그 대적의 씨를 말리셔서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매순간, 순간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식들이 한결 같이 부모의 사랑을 받았건만 철이 들기까지는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자식을 낳아서 눈물을 흘려보기 전까지는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이 돌아가서 부모에게 효도할 마음을 갖기 이전에도 부모의 사랑은 항상 있었습니다. 다만 후에 발견했을 뿐이죠. 하나님의 사랑도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인처럼 깊은 죄 가운데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처럼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사실 여러분들을 버리셨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그런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이제는 담대하게 일어나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던 과거를 찬송의 제목으로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지와 어둠속에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무지를 용서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못 만났기 때문에 진리를 알지 못한 것이 어떻게 여러분만의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길이 무엇인지를 바로 듣지 못했기 때문에 살고자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죄가 어떻게 여러분 자신에게만 있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영원히 어둠속에 형벌로 내버려두신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울부짖는 그 음성을 주님이 지나치실 리가 없습니다. 아이를 기르는 아이엄마는 방안에 있으면서도 골목에 나는 울음소리를 듣고 그 아이가 자기 아이라 하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사랑 때문이지요. 엄마가 아이를 알고 아이가 엄마를 알기 때문이지요. 육신의 부모도 그러한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어두움에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이름을 불러내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그 고귀한 십자가의 피로 씻어서 주님의 자녀가 되게끔 만드셨습니다. 그 사랑이 놀랍고 신기했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 걸어온 우리의 인생길에서 나누는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하면 그 십자가와의 만남의 감격은 그 시작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찬양)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백번 양보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그 고통이 여러분들의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당하게 된 형벌과 같은 시련이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와 불화의 담을 허물기 위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절망적인 모든 죄인들이 마귀의 속삭임을 받으면서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오늘 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바와 같이 자신은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향해 속삭이던 모든 마귀를 물러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형상을 보면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실패와 좌절과 낙담과 그리고 절망 속에서 걸어온 우리의 모든 인생의 길들이 아무리 길고 그리고 아무리 깊은 좌절을 안겨주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문득 눈을 떠서 목자 되신 주님을 뵈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우리들의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 잠시 주님을 잊고 살았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우리들이 잊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진정한 회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회복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별것이 아닐 것이에요. 진정한 회복은 그런 고통 속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차서 그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고자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는 진실한 소원이 되는 것, 그런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회복이라는 것이에요.
보십시오. 오늘 이 시인이 한때 자기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조소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맨발로 황급히 눈물을 흘리며 도망쳤고 법궤와 그리고 성전을 버려두고 도망가는 길에 악한 원수들이 침을 뱉고 흙을 뿌리고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런 인생의 쓰디쓴 골짜기에서 벗어나서 지금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고 그분에게 있어서 자신이 전부이며 자신에게 있어서 그분이 전부라는 사실을 감격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고통이 너무 지속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영원히 나의 목자이시기를 거절하시나보다고 생각하십니까?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졌다고요? 맞지요. 그러나 결국 찾아가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찾아오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베푸신 그 큰 사랑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고통 받는 당신의 자녀들을 찾으셔서 한때는 고통을 받았으나 그러나 후일에는 오늘 이 시인과 같이 오히려 그 시련의 고통스러운 벌판을 지난 후에 오히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의 진정한 목자이시고 그리고 이제는 내가 주님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고백을 받아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으로 돌아오는 길이 고통 속에 있는 여러분 앞에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 길로 걸어오십시오. 여러분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침체된 영혼을 소생케 만드셔서 주의 이름과 그의 의를 위해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의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下)
녹취자 : 김세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대우해 주실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에요. 그리고 아무 댓가를 바라지 않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그 선물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의 은혜라 이렇게 말할 때에는 댓가를 주고 구원을 산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선한 것이 없는 그러한 인간들인데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 그것을 하나님이 거저주셨고 우리는 그런 구원을 받을 공로가 없는 인간들이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할 때에 우리가 구원의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영혼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 영혼의 소생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은혜에요.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신앙의 세계, 진리를 보여 주실 때 그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죠. 그리고 또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회복을 경험해요.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춰 주셔서 새로운 지식을 갖게 하시고 그리고 또 고통을 받을 때에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고통 속에서도 영혼의 회복을 경험하게 해줄 그러한 의무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호의에요. 그러나 우리들이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가 우리의 공로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지만 그러나 계획이 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법은 없다 이거죠.
여러분들은 모두 자녀들을 가지고 있죠. 그 자녀들이 부모인 우리에게 양육을 받고 돌봄을 받을 때에 부모인 우리가 그 자식을 양육하면서 그저 잘 먹여서 큰 사람으로 만들면 그것이 끝이다. 그래서 내 평생소원은 네 놈이 1m 80cm에 80kg만 나가는 것이 목표다. 그것까지만 하면 난 부모로서 일은 다 했다. 그러면 뭐 무슨 부모는 무슨 그 돼지 치는 사람이에요? 소 기르는 사람이에요? 그럴 리가 없거든요.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댓가없이 받지만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왜 우리들이 좋아서 죄를 지었는데, 죄 가운데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셔서 깊이 회개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것을 용서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불러들이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무지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않고 열심히 애쓰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무지한 가운데 살게 내버려 두시지 왜 하나님이 그 무지한 영혼들을 진리의 밝은 빛을 비추어서 깨닫게 해주시냐. 무엇 때문이냐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면 그것은 계속해서 고통 가운데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그 고통 가운데서 그 고통보다도 더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셔서 그래서 고통의 벌판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하셔야 하는 그 이유가 뭐냐 이야기에요. 왜 그렇게 하시냐는 거예요. 그것은 단지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보지 못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사죄의 은혜, 그 다음에 지식의 축복, 그 다음에 사랑의 은총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틀린 생각이라 할 수 없지만, 정확한 판단은 아니다 이거죠. 정확한 판단은 아니다. 그러면 뭐냐. 왜 하나님이 그러한 회복의 은혜를 주시느냐. 이 문제를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해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인 회복, 영적인 은혜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들이 대부분 말이죠. 동물적인 침체와 회복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은혜를 받았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은혜를 받았어요. 구체적으로 왜 은혜를 받았고 어떻게 해서 은혜를 받았으며 어떻게 해서 은혜를 잃어 버리게 되었는지 그러한 것은 잘 몰라요. 어떻게 하다보니 은혜를 받았어요. 왜 그런지 교회가면 기쁘고 기도하면 눈물이 나고, 예배드리면 참 주님의 은혜가 기쁘고 주일이 기다려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뭔가 봉사하는 것이 참 즐겁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 교회 자랑하고 예수님 자랑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도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러한 것들이 다 없어졌어요. 교회도 가기 싫고, 그리고 주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더욱이 기도하라고 할 때는 더 힘들고, 주일날 나오면 졸음이 나오고 그냥 애써서 뒷자리에 잠깐 앉다가 축도 끝나기 전에 갈 생각이나 하고 그런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이제 답답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예전에는 은혜를 어떻게 받았고, 지금은 왜 그러한 은혜를 잃어버리고 영혼이 침체에 빠지게 되었는가 이런 것을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데 몇 번은 괜찮아요. 몇 번은. 몇 번은 그저 교회 와서 건성으로 예배드리고 주일도 빠질만 하면 빠지고 그리고 뭐 멋대로 사는 거죠. 그런데 그게 오래 안 가거든요. 한참 그렇게 살다가 보면 그게 자신의 영혼에서 만족이 없어요. 괴로워요. 하나님의 그 옛날에 받았던 하나님의 참 사랑, 하나님의 그러한 놀라운 은혜 그러한 것들이 자꾸 생각이, 향수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부흥회를 참석한다든지 아니면 어느날 또 어느날 갑자기 또 어떻게 또 변화가 일어나가지고 다시 기쁘기 시작하고 신앙생활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이 이렇게 수준이 상승하면서 무엇이 변천하는 것이 아니라 맨날 똑같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그런 생활이 계속 반복되는 거죠. 그런 생활이 계속 반복된다면 결국 우리의 영적인 회복도 어떻게 보면 다음에 주저앉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제 은혜를 받으면서도 은혜를 받아도 결국은 은혜를 잃어버릴 것이고, 또 은혜를 다시 회복해도 곧 그런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런 것 자체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계속 반복되는 삶을 사는데 그게 결국은 신앙의 전진이냐 그러면 전진이 아니라 결국엔 반복일 뿐이에요. 다람쥐 채 바퀴 도는 식으로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돌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결국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런 것들을 완전히 타파해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이 오늘 중요한 주제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회복시켜 주시고 은혜를 부어 주셨는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되찾는 것도 힘들지만, 되찾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삶이 어려우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상황이 벌어지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잘 지키면서 소생된 영혼이 다시 침체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왜 나를 그러한 침체 가운데서 소생시켜 주셨는가를 기억하고 그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지만 그 영혼이 예전과 같은 그러한 깊은 침체에 빠지지 않고 계속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이거죠. 그러면 그 비결이 뭐냐.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침체 속에서 확 소생시켜서 살아나게 하셨는데 그것은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의에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함이고, 그 목표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그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에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3절 하반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중간 결론이 하나 나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의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이라. 그러면 그 의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의로운 길이에요. 그 반대는 불의한 길이죠. 이 의의 길은 정의로운 길이고 올바른 길이에요. 그 정의롭고 올바르다라고 하는 그 관점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로운 길이라는 거죠.
오늘날 우리들은 모두 세상이 썩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이 세상이 이제는 다 썩어서 그래서 사람 사람마다 다 부패하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대로 썩었고, 또 공직 생활하는 사람들은 공직 생활 하는 대로, 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사람대로 사회 구석구석이 부패가 만면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일이에요. 그것이 결국은 이상하지 않냐 이거죠.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래도 아직까지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것은 맞아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을 먼저 말씀하셨죠. 여러분,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양으로 잴 수 없는 역할이에요. 국을 콩나물 국을 한 솥 콩나물과 물을 몇 바케스 물을 붓고 끓여도 거기에다가 소금을 한 바케스씩 집어넣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소금은 이렇게 집어서 한줌 집어넣으면 수백 명이 먹을 아주 먹을 만한 간이 맞는 콩나물국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당연하지 않느냐고. 캄캄한 밤바다를 온통 조명탄을 쏴서 환하게 밝혀야만 겨우 작은 고기잡이 배가 항구로 안전하게 들어오는 것 아니에요.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는 가물거리를 작은 등대 불빛 하나가 산보다 더 큰 엄청난 크기의 배들을 폭풍 이는 바다에서 안전한 포구로 인도한다는 거예요. 문제는 얼마나 많은 빛이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이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양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가 되어요? 질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질이. 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언제나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방법은 소수로부터 시작을 하시고 거기에다가 그 세상을 변화시킬 희망을 거시는 거예요.
(예화) 요즘들어서 뭐 좋은 간식들도 많지만 옛날에야 간식꺼리가 뭐 있어요. 흔하게 애들이 좋아하는 게 집에서 만든 빵이었어요. 그 뭐 아무것도 안 넣어요. 그냥 밀가루에다가 빵에다가 그러면 집에서 어머니가 빵에다가 술 약 딱 한 숟가락 밖에 안 넣어요. 미지근한 물에다가 한 숟가락 개어서 쑥 뿌리고 그리고 버물버물 해서 그래서 덮어가지고 아랫목에다 놔두면, 밀가루는 요만큼 넣고 술약은 요만한 것 찻숟가락으로 하나밖에 안 넣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저녁 자고 나면 그 밀가루 전체가 부풀어서 말이죠. 이만큼 집어넣는데 이만큼 부풀어요. 그것을 가지고 찐빵도 해먹고, 호떡도 해먹고 먹고 싶네요. 더 여유가 있으면 거기에다가 속을 넣어서 팥을 넣어서 찐빵도 해 먹고, 그렇게 하잖아요. 이것은 수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 이거죠.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죠. 어떠한 의미에서 이 질이 안 되는 것은 아무리 집어넣어봐야 소용이 없어요. 짜지 않은 소금, 그런 것이 우리에게는 없지만 만약에 있다고 치면 아무리 집어넣어봐야 소용이 있겠어요? 자, 뭐 그래도 불은 들어오지 않지만 전구 다마만큼은 진짜 외제인데 그리고 그것을 수천개를 걸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불이 안 들어오는데.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 이야기죠. 질의 문제라. 질의 문제라 이거예요. 그런데 그 질의 문제라는 것이 뭐냐 하면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그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된다 이야기에요. 그리고 정도를 걸어가야 해요. 정도를.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뭐 어때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파렴치한 생각이라 이거예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예화) 결혼하고 16년 만에 조그만 집을 하나 샀는데, 그 세금이 700만원이나 되어요. 우리 집사람이 가져와서, 너무 비싸다. 세금이 이렇게 비싸냐 그랬더니 그 법무사의 직원이 그러더래요. 그 반만 내세요. 무슨 세금이 그런 세금이 있냐. 집 주인하고 이야기해서 계약서를 두 장을 써라. 하나는 진짜 계약서와 하나는 가짜 계약서. 가짜 계약서는 집값을 반으로 낮추래요. 그러면 350만원 밖에 안 된다고. 불법 아니냐고 물었어요. 다들 그렇게 한다는 군요. 그런데 집 사는 사람은 목사고 파는 사람은 집사에요. 둘이 앉아서 그것을 쓰고 앉아 있는 거예요. 로마서 13장에 보면 세금을 똑바로 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래서 다 내라. 그래서 거짓말 안 보태고 우리 아이들 저금통까지 털었어요. 그래서 700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가져다가 냈어요. 아줌마, 가짜 계약서 써왔어요? 아니요.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요. 다 내려고 하는데. 거기 법무사에 있는 직원이 뭐라 그러겠어요? 어머, 존경스러워라. 세상에 눈물이 날라 그러네. 어떻게 이런 분들이 계실까 그랬겠어요, 아니면 아이 병신들. 그랬겠어요. 석 달치 생활비였어요. 삼백 몇 십만원이. 석 달치 생활비를 줬더니 그 여자분이 마음 속으로 아이 병신. 그 돈있으면 나나 주지. 어쩌면 하나 더 덧붙였을지도 몰라요. 잘난척하고 있네. 그랬을지 몰라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이에요.
(예화)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저 요즘은 그래도 많이 안 다니는 편인데 옛날에는 집회를 많이 다녔어요. 특히 지방에 많이 다녔어요. 1년에 한 5만 킬로씩 차를 탈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이 집회 시간이 쫓기는 거예요. 워낙 멀다 보니까 시간을 남겨놓고 갔어도 가다보면 별다른 사정이 생겨서 이 시간 내에 도착을 해야 하는데 못 도착을 하니까 과속을 하게 되잖아요. 우리 나라의 도로는 현실성이 없잖아요. 뻥 뚫리고 아무 차도 없는데 60킬로로 걸어가라 그러고 60킬로로 가면 사람들은 다 욕하고 어떤 사람은 창문열고 침 뱉고 간다고요. 손가락질 하고 말이죠. 하여튼 그래요. 그날도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강의를 하러, 특강을 하러 가는데 늦었어요. 막 달리는 거예요. 경찰 단속을 해도 정직하게 단속을 하면 되는데 무슨 숨어서 해요. 숨어서. 그런데 이제 신나게 달렸죠. 과하게 달렸어요. 빨리 도착하려고. 그런데 저기에서 교통 경찰이 요만하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먼저 봤죠. 속도를 딱 줄였죠. 60킬로로 쫙 달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잘못한게 없는데 그래서 이제 어 왜 그러냐고. 나 바쁜데 큰 소리를 쳤죠. 아저씨, 과속 하셨습니다. 무슨 소리냐. 60킬로로 계속 왔는데 그러니까 이 경찰이 하는 말이 여기서 말고요 저 산 너머에서 과속 했어요. 그래서 산 너머에서 과속했는지 어떻게 아냐. 증거를 대라 그랬더니 산 너머에서요 부장이 왔어요. 그래서 이제 그때는 어떻게 했냐 하면 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사정 해야죠. 저기 고생이 많으신데, 내가 사실은 대학에 있는 선생이다. 그런데 이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나를 특별히 강연을 요청해서 가는 길인데 지금 수백명의 학생이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내가 과속한 것은 인정하겠는데 좀 봐달라. 그랬더니 걱정마세요. 싼 것으로 끊어드릴께요. 그럼 뭐 초창기니까 잘 몰랐어요. 그냥 그런 것 관심도 없었어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빨리 가야 되니까. 그래서 이제 위에다가 꽂아놓고 그냥 갔죠. 갔다가 집회를 모두 마치고 서울 올라와서 제가 또 범칙금 하면 착실하게 내거든요. 스티커 가지고 은행에 돈을 내러 갔어요. 그래서 3만원이나 4만원쯤 나왔겠지 그리고 갔는데 은행에 들러서 가보니까 6천원이에요. 6천원. 그래서 고지서를 많이 받아봤지만, 6천원 짜리, 영 하나를 덜 썼나 자세히 보니까 아무리 세어 봐도 6천원이에요. 납기 내에 내면 6천원이고, 납기 내에 안 내면 뭐 7200원이래요. 그 때 얼핏 떠오르는 게 그 의경 생각이 나요. 아저씨 싼 것 끊어 줄께요. 그래서 이렇게 들여다 보니까 위반 사항 그리고 나왔는데 먹지 대고 희미해요. 그래서 이렇게 자세히 보니까 뭐라고 썼냐 하면 금연 장소에서 흡연 했음. 그러니 교인이 그것을 봤으면 그 만약에 그것 교회 직원한테라도 나 대신 좀 내고 와라 그랬더라면 실족했을 거예요. 이 목사라는 인간이 어디 부흥회 간다고 하더니 어디 가서 담배 피다가 걸려가지고. 그런데 그 나도 참 웃긴 사람이지만, 그 경찰은 더 웃기는 짬뽕이에요. 금연 장소에서 흡연 이렇게 써야 할 것을 흡연 장소에서 흡연. 그것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그 때 제가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다행이지 만약에 금지된 장소에서 방뇨하였음 그러면 그 때 제가 그 후에 이제 시편 23편도 보고 그러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 이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러면 안 되겠구나. 그 다음에는 원칙을 정했어요. 어떻게 했냐 하면 위반을 안 하려고 노력을 하자.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위반을 해서 지적이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렇죠. 착각을 잃으킬 수도 있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교통법규를 조금 위반하더라도 빨리 도착을 해서 해야 할 더 큰 경우가 있을 경우에는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잖아요. 상대적으로. 그럴 때 만약에 지적이 되면 봐달라는 말은 하지 말자. 그때 굳게 세웠어요.
(예화) 자꾸 교통 이야기 나와서 그런데 한번은 저쪽에서 심방을 갔는데 이렇게 해서 유턴을 하면 되는데 유턴 차선을 직진하는 차들이 잔뜩 서 있어요. 그것은 잘못 한 거죠. 유턴을 하려고 하는데 차들이 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유턴할 시간이에요. 빨간 불이 켜져서 횡단보도로 사람들이 걸어가니까 그래서 그냥 돌았죠. 그랬더니 조금 아까까지 못 봤는데 어디서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더니 경계를 붙이더니 뭐가 몇 조 몇 항에 뭐뭐 그래요. 나는 잘 모르니까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유턴 하면 안 된대요.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죠. 여기가 유턴 차선인데 비어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차들이 있었느냐. 그리고 이게 내가 유턴해도 아무 차한테도 방해가 안 되지 않느냐. 그리고 봐 주면 안 되냐. 그러니까 법적으로 그것은 안 되게 되어 있대요.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렇게 했는데 경찰이 나를 아주 점잖게 봤던 모양이에요. 이렇게 쳐다보더니 동정 같은 눈빛으로 이렇게 보더니 아저씨 싼 것 끊어줄게요. 그러면서 펜을 들길래 그러지 마. 안 돼. 그러지 마. 내가 위반한 게 얼마짜리야? 6만원에 벌점 10점 짜리래요. 그것으로 끊어 둬. 그러니까 경찰이 뿔이 확 났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적발할 권리만 있지 자기 마음대로 봐주고 그럴 권리가 없거든요. 우리 아는 교수님이 캐나다에서 면허 없이 낚시를 하다가 적발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어디, 산림 경찰이 있다가 자연 경찰이 와 가지고 딱 잡는 거예요. 한번 봐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그 경찰 이야기가 선명해요. 뭐라 그러냐 하면 선생님, 저는 적발할 권리만 있고 봐주는 것은 제 소간이 아니니까 법원에 가셔서 판사한테 사정을 해 보시죠.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딱 자르는 거예요. 뭔가 규칙대로 움직이는 사회는 뭔가 그러한 룰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끊었어요. 덕분에 면허 정지가 되었죠.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뭐냐 하면 지금 예로 든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잖아요. 그리고 또한 뭐 우리가 무슨 목사가 그렇게 엄청난 비리에 연루될 일도 없고 하니까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소한 것으로 예를 들었지만 말하자면 그런 거라는 거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똑바로 원칙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공직생활을 하면 뇌물을 받으면 안 돼요. 그것 가지고 생활하기 힘들면 그것 집어치우고 장사를 해요. 장사한다고 다 돈 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한 꿈이 있으면 하라 이거죠. 우리 교회 선생님들 많은데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든지 그것 촌지 받으면 안 돼요. 생활이 안 되는데요. 그것 가지고 생활이 안 되면 다른 것을 하라고요. 다른 것. 부업을 하든지 아니면 그 교직을 그만 떠나서 장사를 하든지 돈 버는 게 무엇인가 생각을 하고 거기로 가라 이야기에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요. 한번 생각을 해 보라 이야기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하고 살면 이 세상이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이거죠. 맨날 그렇게 자기는 그렇게 조금도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고 의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맨날 푸념처럼 이놈의 세상 말이지. 예수쟁이 많아도 맨 이꼴이라고 맨날 푸념을 늘어 놓아봐야 자기가 그런 세상을 만든 장본인데 드러 누워서 침 뱉기이지,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느냐 이야기에요. 이것은 우리들이 푸념을 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살아가야할 삶의 문제라고 하는 거예요. 편법, 불법, 탈법, 편의주의적인 태도, 이러한 사고방식들이 모두 세상과 야합한 그런 식의 생활의 주범이라 이거죠.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니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맛 잃은 소금이요, 불꺼진 등불과 같은 처지가 되는 거죠.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셨을 때에는 창조된 이 인간들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그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담과 하와는 성경이 필요가 없었어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에요.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게 되잖아요. 죄가 들어오게 되니까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저주를 받은 거예요, 쉽게 이야기 하면. 질적으로 바뀐 거라 이야기에요. 밥으로 이야기 하면 밥 모양을 똑같은 밥인데 쉬었어요. 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예전에 그랬어요. 그런데다가 또 변화가 일어난 게 뭐냐 하면 뭔가를 똑바로 볼 수 있는 그 인식 능력을 잃어버린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졌고 영혼에 죄가 들어오니까 마치 백내장이나 녹내장 낀 사람처럼 우리의 영혼의 지식이 그렇게 되어 버린 거예요. 예전에는 밝게 빛나는 찬란한 태양을 보면서 아침마다 성실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태양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을 갖는 거죠. 제대로 저 태양을 안 섬기면 저 태양이 제때 안 뜨거나 아니면 제때 우리에게 햇빛을 안 주어서 우리가 농사를 못 짓게 할 거야. 실제로 그러한 것을 경험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죠.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그리고 산과 바다와 물과 짐승들을 보면서 두려워하면서 저마다 우상을 만들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게 이 세상 종교의 기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알려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였는데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이제는 자연도 망가졌고 그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도 망가졌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리는 것이 충분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 때 하나님이 당신을 알리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새로운 방법을 택하시는데 그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시는 거예요. 그 백성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주시고 그 백성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그 백성들이 세상 사람과 섞이면서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라 하시는대로 사는 사람들로 바꿔 놓으시는 것입니다. 함께 섞이면서 이렇게 살아가요. 그때는 우리가 모두 섞이면서 이렇게 살아가니까 이게 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나하고 전혀 생각이 다르고 다른 길로 걸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뭐에요. 그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의의 길이에요. 왜, 그들은 세상에서 성령을 따라 살고 그리고 이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거룩한 삶이요. 그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의로운 생활이라는 거죠.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영혼에 놀라운 회복,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는 거죠.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충만한 사랑을 주시고 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많은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똑바로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주님이 나에게 이러한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주셨으니 나는 더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다른 사람들은 걸어가지 않아도 나는 그 의로운 길을 따라서 걸어가리라 하는 그러한 분명한 원칙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지만 주님이 주신 은혜가 우리에게 늘 유지되는 거죠.
이제는 교회가 넓고 사람들이 많으니까 구석 이런 곳에 앉아 있으면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어떤 태도로 예배드리는지 저는 잘 안 보여요. 그러나 안 보여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는 있죠. 하나님 앞에 왜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와서 많은 사람들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감격하고 그리고 그 예배를 기다리면서 일주일을 지내고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교회 다니면서 예배 시간에 졸고 딴 생각하고, 예배 끝날 때나 기다리고 말이죠. 병든 병아리처럼 끄덕거리고 그런 예배의 태도가 왜 나타나냐 이거예요. 그것은 간단해요. 왜냐하면 지난 일주일 동안 진리를 따라서 의로운 삶을 살려고 분투하는 삶의 자세, 순종하는 삶의 자세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에 뭔가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죠.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본 적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결별을 하거나 박해를 받아본 적이 있느냐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들이 지난 일주일 동안을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사랑과 은혜 속에서 의의 길을 살기 위해서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그리고 친구들이 자기를 버리고, 가족들에게 박해를 받는 그러한 삶을 경험했더라면 오늘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우리 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여러분 속에는 사랑과 결합된 어떤 견딜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쳤을 거예요.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아, 맞아. 이세상에 친구들이 다 나를 버려도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해도 오늘 예배당에 나와보니까 다 잃어버려도 내가 아깝지 않은 것은 의의 길을 걷고 순종하면서 다른 것은 잃어버렸지만 온전히 주님을 찾았구나. 주님을 내가 찾았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렇게 분투하면서 은혜 받았으니까 똑바른 길을 걸어가면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살다 온 사람들이니까 하나님이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얼마나 기뻐하셔요. 그러한 순종하는 의로운 삶이 없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은혜를 주시옵소서. 은혜를 받아서 뭐하게, 은혜 받아서 뭐하게. 주일날 은혜 받고 월요일날 현실과 타협하고, 화요일날 돈과 타협하고, 수요일날 권력에 아부하고, 그런 식으로 삶을 살아서 결국은 교회 출석하는 것 이외에는 예수 믿는 사람 자기가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게 되겠느냐고요.
(예화) 지난해에 교사학교 할 때 그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어느 분이 오셔서 간증했어요. 자기가 교인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잘 가르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더니 이 건물을 땅 토지를 감정하는 감정사한테 딱 감정하러 갔더니 쉽게 이야기 하면 재산이 수백억대를 감정하는 거라 하면 한 10% 올려주는 게 허용이 안 되겠어요? 그것 뭐 자로 딱 재는 것처럼 하는 게 아니라 감정사의 재량이니까요. 10%만 올려줘도 수십억이고, 수십억이 올리면 은행 담보 같은 것 들어갈 때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좌우하잖아요. 천오백 만원을 새 돈 만원 짜리로 천오백 만원을 현찰을 묶어다가 딱 갖다놓았대요. 한번 다시 세어 보라고 해요. 그런 것 치우십시오. 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도대체 그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 도대체 그 분이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이 좋은 돈을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마다하는가. 장래가 보장되는 이 탄탄한 출세의 길이 있는데 도대체 예수가 누구 길래 그분 때문에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다 야합하는 그 길을 마다하는가 생각될 때에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순간 일어나는 것은 섬뜩한 두려움이에요. 섬뜩한 두려움. 의롭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불의하고 지저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요. 여러분, 자녀 키우면서 봉투 한두번 들고 안 찾아간 사람 없죠. 찾아 갔어요. 집어넣으면서부터 욕하는 거예요. 아이씨, 제기랄 대게 밝히네 그러면서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고 가서는 어떻개 해요. 뭐 막 선생님 같은 분 없고, 그것 다 쓸데없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딱 줘요. 그 때 받으세요. 이것은 거의 약소해요. 그러면서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손 뻗을적마다 몇 번이나 그러나 보자. 그런 다고요. 그런 다음에 세 번쯤 한 다음에 받았는데 그렇구나, 너두.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러나 단호하게 어머님, 이런 돈이 있으면 불우이웃을 구제 하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모든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이야기할 때, 그 부모가 얼굴에 이 똥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얼굴이 화끈 거리는 거예요. 그리고 이 교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아, 아직까지도 이런 선비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남아있구나.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다른 선생님을 만나도 이것 줬다가 망신당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바꿔 놓는 거예요. 그게 소금의 생활이에요. 전도만 하는 것이 소금의 생활이 아니라 그런 것이 소금의 생활이고 빛의 생활이에요. 그것은 특별히 과시하려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많은 은혜를 깨닫고 보니까 정말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이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심령의 부흥은 항상 우리에게 거룩한 주님을 주님의 그 성품을 발견하고 그 주님의 성품을 쫓아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게 신실한 사람의 삶이에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수백만의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서 흩어져서 관공서에 가든지 사업f을 하든지 그렇게 해가지고 뭔가 이렇게 그러면 불의를 행하고자 할 때 아닙니다라고 차갑게 거절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들이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거죠.
(예화) 특정한 사업을 거론해서 안 됐습니다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제일 창피한 것은 뭐였냐 하면 그 일본 사람들이 신문에다가 글을 낸 거예요. 그래서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하니까 어느 일본 사람이 인터뷰를 하는데 건물이 저절로 무너진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데요. 그게 어떻게 한국에서는 저절로 일어나요. 그게 전부다다 부패한 것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어요. 5층짜리 건물을 지어놓고 부서진 다음에 들여다보니까 2층짜리 연립주택에 넣는 철골에 집어넣고 공사를 했으니 거기에서 깔려죽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누구 한 사람이 했어요? 다 달라붙어서 뜯어 먹어서 그런 수백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거예요. 구청에 있는 사람 누구 하나라도 똑바른 정신을 가지고 무슨 소리야, 이따위 가지고 안 돼 하고 한 사람만 제동을 걸었어도 저런 건물은 성립을 안 해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일본 사람이 말한 것처럼 한국의 건축현장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엄청나게 나아졌어요. 이제 80년대 이야기에요. 전반의 이야기. 그 불법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한참 불법이 성행하던 때는 말이죠. 저는 깜짝 놀랐어요. 골목에서 연립주택 짓는 그 노가다 공사하는 사람들 거기에 뭐 현장 감독이 한달 판공비가 천 만원, 천오백 만원 그래요. 그것 가지고 다 나쁜짓 하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여러분 십원도 매물을 주지 않고 건설한 회사가 준견 건설 업체가 있다고 하면 안 믿겠죠. 있어요. 이름까지는 이야기를 안 하겠어요. 몇 개 회사가 있습니다. 그 회사에서 교회를 짓거나 학교를 짓거나 또한 건물을 지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확실히 비싸대요. 다른 데보다. 그 대신 법대로 지니까 추가로 나중에 땜질을 하면서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죠. 그 회사에서 건물에 들어가는, 그래서 목사이긴 하지만 얼마나 비리가 유행하고 있고 특히 그런 건축에서는 봉투 안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니까 그게 어떻게 합디까 물어봤어요. 그런데 대답이 참 재미있어요. 법대로 짓는 거래요. 그래서 법대로 짓는데 들어가는 돈은 그 건축주에게 부담을 시킨대요. 그것이 비싸서 안 짓는다고 하면 자기는 공사를 안 한 대요. 그리고 짓고 그러면서 허가를 내달라고 그런대요. 준공하고 그래야 하니까요. 그런데 확실히 잘 안 내준다고 하는 거예요. 왜, 뭐가 급하겠어요. 그러면 그냥 매일 직원이 그리로 출근한대요. 해달라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내주면 왜 안 되는지 말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겠고, 건물이 잘못 지었으면 건물 자체를 부수고 다시 짓겠다. 그러니까 내달라. 이제 알아본 거예요. 아무리 까다롭게 해봐야 이 이상 돈을 절대 안 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네들끼리 숙덕숙덕 이야기 하다가도 그 회사 사람ㄷ르이 들어오면 정신이 번쩍 나더래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지 예수 믿는 사람들 조차도 거기에 휩쓸려서 그렇게 살아서는 되겠느냐는 거예요. 모두 그런 것에 일조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니에요. 맨 날 경상도, 전라도, 패갈라서 싸우고 말이지. 그런 것 아니냐는 이야기에요. 정말 복음이 그런 것들을 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죠.
제가 정치하고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지 여러분 저와 6년 동안 목회해왔으니까 알죠. 얘기 하고 싶어요. 또 이번 선거에도 그렇게 할 거예요, 여러분? 갈비탕 한 그릇 얻어먹고 찍어주고 누구 전화오고 그렇게 할 거냐고요. 누구 전라도, 경상도 그렇게 할 거냐고요. 정신들이 다 나갔다 이야기에요.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내가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건내 들은 것이 아니라 내 대놓고 딱 직접 들었다고요, 본인한테.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죽을 때 유언할 거래요. 아무아무 출신들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서 장로로 쓰지 말라고 유언하고 죽겠대요. 그래서 내가 할 일도 대게 없다. 도대체 그게 뭐냐 이야기죠. 복음이 옛날에는 말이죠. 유대인과 헬라인의 벽을 허물어서 그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은 어떤 차이에요. 백인과 흑인의 차이와도 비교가 안 되고 북한 괴로군과 국군 차이도 비교가 안 되는 정도의 차이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의 선민으로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지옥의 뗄감으로 쓰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라고 생각했고 헬라인들은 유대인이야말로 무식하고, 자신들이 전세계에서 제일 지혜로운 민족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리스에서 나왔잖아요. 그게 헬라에요. 그런데 십자가가 전해지니까 그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어요. 이게 교계에서도 보통일이 아니에요. 어느 교회에 가면 실제로 경상도 장로들만 쭉 서요. 그리고 오죽하면 저쪽으로 쭉 서고. 이게 이게 교회냐 이거예요. 이 교회가 의로운 길이냐 이거예요. 그런 식으로 야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의로운 길이냐 이거죠.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줄지어서 떼거지로 몰려다녀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의연하게 그것이 아니다라는 삶을 몸소 실천해야지만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뭔가 자신들이 이런 식으로 처신을 해서 이 세상이 바뀌겠는가 다시 생각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종과 자유인이 상전과 노예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자 마자 함께 얼싸안고 형제자매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이게 기독교의 역사고, 복음의 역사에요. 문제는 말이죠. 이 세상 전부다가 의롭게 살아가면 나도 막차타고 의롭게 살겠다.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욕은 욕대로 해도 하나도 변하는 것이 없는 거예요.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올려다봐요. 그러면 수많은 붉은 십자가가 가득해요. 외국에서는 볼 수도 없는 현상이에요. 지하실 교회, 2층 교회, 뭐 세들어 사는 교회 이런 것들이 미국에서 허가도 안 나요. 얼마나 하나님의 큰 축복이에요. 우리는 정말 큰 축복이에요. 싱가폴 가보고나서 너무 감사했어요. 전도를 못 하게 법으로 막았어요. 전도할 수 있는 날이 딱 하루 있는데 25일 날, 성탄절 날. 그 이외에는 못해요. 그런데 아무리 전도해도 우리 잡아가요? 아파트 경비원이 뭐라고 궁시렁 대기는 하지만, 뭐 무서울 게 있어요? 어디서든지 교회를 개척하면 설 수 있도록 허가가. 허가도 필요없고 그냥 서면 서는 거예요. 지하실이고 옥탑이고 꼭대기고 빈 들판에 텐트를 쳐도 다 교회가 성립해요.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고요. 그러니까 빨간 십자가가 많은 거예요. 그 십자가가 많은 것을 가지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요. 교회는 모자라요. 여러분 생각해봐요. 서울 시내 모두가 다 예수 믿는다고 생각해봐요. 1200명씩만 한 교회당에 들어가도 1만 개의 교회가 필요하고 120명씩만 들어가면 10만 교회가 필요해요. 목사가 10만명이 필요하고 전도사가 30만명은 필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적어요. 이 정도 가지고 성에 안 차. 훨씬 더 많아야 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양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불 켜고 올라가는 십자가, 그 안에서 세워지는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그 아래서 서 있는 교회, 그 교회당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교인이 될 것인가.
금년에 제 목회 목표가 뭐라 그랬어요? 여러분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게 목표에요. 우리 교회는 표어도 없고, 금년 목표도 없어요. 항상 똑같아요. 무슨 목표가 매년마다 그렇게 새롭게 있어요? 보세요. 이 십자가 모자라요. 어림도 없어요. 숫자는 어림도 없어요. 훨씬 더 많아져야 해요. 문제는 뭐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니라 진실한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오는 나라에요. 올라와서 쭉 봐요. 교회의 희망은 그 십자가에 있고, 세상의 희망은 그 교회 속에서 오늘도 모여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희망이 있는데 그런데 그 속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 안 믿는 인간들과 똑같은 거예요. 다른 것이라고는 주일날 교회 예배당 오는 것말고는 다른 것이 없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냐고요. 가장 사소한 불법과 불의부터 털어버리라고요. 그리고 말이지 맨 정치인들 욕하고 말이지. 돈 많은 사람들 욕하고, 아무리 그래봐야 세상이 변했어요? 젊은이들이 그렇게 돌맹이들고 광화문을 누비고 체류탄이 서울 시내를 뒤덮고 그래도 세상이 변했냐고요. 삶이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가르쳐주는 대로 살고자 하는 단호한 실천적인 결의가 필요하다 이거예요. 수많은 붉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들었을 거예요. 십자가는 많이 있는데, 그말부터 틀렸다고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많지가 않다 이야기에요. 골목에 교회가 한 두 개 서 있는 게 뭐가 많으냐 이야기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열 집이면 한집도 될까 말까인데. 더 많이 서야지요. 더 많이. 많은데, 교회는 이렇게 많은데 도대체 뭐 주님의 빛을 발하는 교회가 어디 있는가. 그런 횡설수설은 강아지도 할 줄 아는 횡설수설이에요. 그것 말만하지 말고 자기가 똑바로 살아야죠. 불의를 버리고 원칙대로 살려고 애를 써야 할 것아니에요.
(예화) 비행기를 타고 어느 도시에 공항에 내렸더니 누가 그냥 차를 몰고 탁 왔어요. 영접한다고. 아카디아를 몰고 왔어요. 이렇게 보니까 랜트카에요. 무슨 랜트카를 빌려서 강사를 면접하러 왔나. 보니까 돈도 많고 큰 사업하는 사람이에요. 저 분 차가 망가졌나 보구나 그리고 갔죠. 궁금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요. 집사님, 왜 랜트카에요? 그러니까 아이 목사님 랜트카 아닙니다. 아, 자기 친구가 랜트카 하는데 거기에다가 세금도 싸고 가스통도 달 수 있고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 앞에 자기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연합회 일을 돕고 영혼들을 위해서 돈도 바치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처음 그런 것을 타고 교회 나오는 사람들한테도 그러면 안 된다라고 가르쳐 줘야 하는데 그렇게 헌신적이라며, 그렇게 물질도 많이 쓴다며. 그러면 물질을 교회에 쓰지 말고 그것이나 자기 차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라고. 물론 그것은 속으로 이야기 했어요. 그렇게 해서 살겠느냐고요. 지지부지 하게 사는 거예요. 그 다 죄에요. 죄. 죄 짓는 거라고요. 왜 그렇게 사냐고요. 그렇게 사니까 사람들이 보고 다 욕을 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사기 치고 말이지. 뭐가 틀린게 있냐 이거죠. 자기 이익으로 다 밟고 말이지,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의의 길이냐 이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서 교회와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자기가 주님의 뜻 거스리고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래요? 저 사람들이 주님을 모르고 자기처럼 알아서 뭐하게요. 그러니까 말이죠. 자 보세요. 아이들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 앞에서 배워요. 이거 안 돼. 네. 그 다음에 어떻게 돼요? 뒤에서 배운데요. 뒤에서. 뒷모습을 보면서. 좀 사람들이 예수를 좀 믿어볼까 하고 들어올 때 세상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들어와보니까 달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업을 해도 자기처럼 그렇게 술집으로 단란주점으로 세무 공무원들 끌고 다니면서 말이지, 뇌물주고 그래가지고 세금 조정하고 그러지 않드라 이거죠. 깨끗하게 하더라는 거죠. 그리고 적게 벌고. 공직 생활 하는 사람들은 까듯이 공직 생활하고, 교직에 있는 사람들은 일체 그런 사사로운 정에 매이지 않고, 모든 아이들을 공정하게 사랑하면서 말이지. 그렇게 진짜 사람 만들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교육을 하더라 이거죠. 그것을 보면서 안 믿었고 세상의 돈이 제일인 줄로 알던 사람이 아, 이 인간의 참 도리가 이런 게 아니구나 그런 것을 깨닫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당신은 목사이니까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나 받으면서 사는데 뭘 알겠어. 그리고 묻지 말라 이야기에요. 성경에서 어디에서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 증거를 대면 내가 다음 주에도 취소할 용의가 있다고요. 그렇게 상황이 이런데, 상황이 이런데, 이러면서 계속 성경을 덮어서 이제껏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죄로 가득하고 패역한 삶이 되어온 거예요. 그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거예요. 정말 우리들이 원칙대로 살아야 되겠다. 그리고 세상에서 내가 박해를 받거나 시련을 당해도 주님이 살아라 하시는대로 양심을 따라서 살겠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냐 이거죠.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화) 제가 실제로 다니던 교회 어느 집사님이 아주 신실하신 분이었는데 큰 대기업체 중견 간부였어요. 그런데 고지식하게 살았죠. 그러다가 그 양반이 그 아주 좋은 자리로 갔어요. 세상 말로. 그 뭐냐 하면 그 회사에서 쓰는 모든 물건을 구입하는 책임자로 간 거예요. 가니까 어머 굉장한 거예요. 사람도 만나는 사람이 많고 퇴근할 때 서랍을 열어보면 돈 봉투가 가득한 거예요. 그러니 강직한 사람이 그러한 것을 받을 리가 있나. 직원들 시켜서 다 돌려주고. 그러니까 직원들이 왕따 시키더래요. 직원들이.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보니까 뭐냐 하면 너무 비싸게 들어오는 거예요. 그 돈 안주고도 얼마든지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 했죠. 입찰을 해라. 그 입찰이라고 하는 것도 얼마나 우스운지 알아요? 제가 있어봐서 아는데 얼마나 우스운지 알아요? 한 사람한테 이것을 주고 싶어요. 물건을 사고 싶어요. 천만 원이래. 이거 얼마야? 천만 원인데요. 조금 깎으면 안 돼? 술 값이라도 줄테니까 그냥 좀 납품 받아. 그래? 견적서 두 개만 더 가지고 와. 그러면 뭐에요? 자기는 천만 원 받아야 되겠다고 하고 내고 자기 친구 사업하는 사람들한테는 천백 만원 짜리 계약 견적서와 천삼 백만원짜리 견적서 가져 오는 거예요. 그리고 갖다 주는 거예요. 그게 입찰이에요. 세 개 갖다 놓고 이렇게 세 개를 받았는데 이 사람이 제일 싸서 그래서 이 사람으로 했다. 물론 큰 공사는 이렇게 안 되는데 작은 것은 그런 식으로 한다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돈을 더 줘야 되잖아요. 그런 것을 다 마다 한 거예요. 어떻게 했냐 하면 여기에다가 늘 돈이 있으면 물건 값을 깎아라. 그리고 안 깎아주려면 그 돈 보태서 제대로 만들어가지고 와라. 그런 커미션 필요없다 그랬더니 기존에 들어오던 납품 가격에서 많이 차이나는 것은 30%이고, 적게 차이나는 것은 10%가 차이나게 싸게 들어오더래요. 그러니까 어때요. 자제들이 싸게 들어오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생산비가 줄어들잖아요. 좋은 제품을 만들 것 아니에요. 아니면 그 몫이 회사로 들어오든지, 아니면 소비자에게 돌아가든지 그럴 것 아니에요. 그 사람 표창장 받았겠죠? 표창장이 아니라 일 년이 못 되어서 쫓겨났어요. 왜, 그 자리를 거쳐간 모든 전임자들이 단합을 해가지고 죽여 버린 거예요. 이게 세상이라고요.
여러분, 정말 믿음을 따라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어려워요. 그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그것을 다 양보하면서 사니까 이 세상에 변화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오를 해야 해요. 그래서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요. 너는 돈 벌러 직장 가는게 아니라 의의 길을 걸으려고 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네가 해라. 그래서 세상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는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힘들어요. 그래서 뭐가 필요해요? 이렇게, 그냥 깡다구 하나 가지고는 안 돼요. 그러니까 어떻게, 뭐가 필요해요?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래서 정말 이 세상이 나의 영원한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영원한 집이고 그리고 내가 이 올바른 이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에게 박해를 당하고 고난을 당해도 주님이 자기의 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과 특별히 함께 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복 주시는 거예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이렇게 예배로 모였을 때,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서 자신의 영혼이 소생하는 놀라운 회복의 기쁨을 누려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때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크게 보이면 세상이 조그맣게 보이는 법이에요.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감격이 크면 내가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해도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아, 그래. 박해를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할 때, 우리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지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아, 내가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고 그렇게 사업을 하고 마지막에 떠날 때에는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의 싸움을 다 싸웠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예화) 제가 가르쳤던 제자 가운데 하나가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는 중앙정보부에 고위 간부로 근무를 하던 형제가 하나 있었어요. 그가 말년에 이제 그 직장에 아직도 다니고 있을텐데 나한테 한번은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교수님. 네. 제가 이곳을 15년을 넘게 다녔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권력도 손에 넣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끄러움 없이 직장생활 했습니다. 그 말은 짤막하지만, 15년 후에 그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직장생활을 했었는가 여러분 상상이 가잖아요.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았겠는가 상상이 가잖아요. 그런 식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에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런 식으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영혼에 소생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의 영혼을 막 소생시켜서 찬란한 기쁨 속에서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셔요.
(찬양)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 없네
그러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받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즉시 아, 주님이 나에게 똑바로 살라고 이러한 남이 모르는 놀라운 은혜의 감격을 주시는구나. 그리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똑바르게 살아가는 거예요. 유혹이 와도 시련이 와도 협박이 와도. 똑바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다가도 약하기 때문에 죄지을 수 있어요. 그죠. 너무 약하기 때문에 핍박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다시 일어나서 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해요. 그리고 회개해요. 그리고 주님께 새 힘을 얻어요. 그리고 이제는 지난 주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이번에는 더 온전한 삶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배 두드릴 것이다. 그리 생각하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성경은 그렇게 생각 안한다는 거예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복을 많이 주실 수 있어요. 그리고 큰 권력을 주실 수도 있죠. 그리고 그 사람들의 진정한 기쁨은 그 자체가 아니에요.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정직하고 의롭게 불의와 싸우면서 올바른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그게 그게 올바른 삶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수많은 대적들이 모이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말하기를 일평생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손톱자국만 가득할 뿐이지 우리를 쓰러뜨릴 수는 없어요. 그런 대적들이 많아요. 그 대신 그런 대적들로 상처를 안 받아요. 왜, 육신의 상처는 받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상처는 안 받아요. 왜, 그렇게 의롭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시인도 그렇게 온통 얼굴이 악마의 손톱자국으로 가득한 그러한 인생을 살았는데도 결국은 마지막에 뭐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감격속에서 이런 고백을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짐승처럼 이 세상에서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갈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인간의 도리도 못한 채 죽어갈 수밖에 없는 여러분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어요. 깨닫지 못하기가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야만인 같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진리의 참된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춰서 마치 부모가 이제 방금 일어나는 어린 아이의 걸음마를 배우게 하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쓰러지면서도 성도의 삶이 무엇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삶과 기뻐하시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며 힘이 없을 때, 성령의 은혜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여기까지 오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 거예요. 주님의 마음에 불붙는 소원은 여러분들이 이 어그러지고 거스러지는 세대 가운데서 참 빛인 빛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나타나고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누구든지 여러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과 동행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렇게 불러 주시고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여태까지 인도해 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런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까 그런 특별한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 한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고난을 받는 그것이 무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한줌의 작은 불꽃이 모여서 커다란 불기둥을 이루게 되는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빛이 되어서 불을 비췰 때, 그 때 이 어두운 세상에 환해지는 거예요.
(예화) 어느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이 오늘 저녁 예배, 오늘 밤 예배 나올 때 모두 촛불을 하나씩 가지고 나오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전깃불을 다 껐어요. 그리고 이제 앞에서 먼저 오는 사람부터 앞에서 성냥불로 촛불에 불을 붙여 주었어요. 그것이 꺼질세라 잘 들고 와서 각자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은 거예요. 처음에 두 사람이 들어왔을 때에는 캄캄했어요. 그런데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들어와서 예배가 시작될 때에는 교인들이 교회당에 꽉 차니까 환한 교회당이 된 거예요.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교회당과 같은 어두운 세상에 촛불 하나 들고 우리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참된 신앙에 대해서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게 신앙이 아닐꺼야라고 만들고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을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 정말 저 속에는 뭔가가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서 그들을 참 신앙으로 돌아오게 할 때 그것은 마치 오늘 우리들이 무모하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 혼자 고난을 받으면서도 의로운 길을 걸어가겠다라고 하는 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 삶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촛불을 나누어 주는 삶과 같은 것이에요. 그렇게 살 때에 결국은 이 죄악으로 가득한 이 도시, 부패와 부정으로 얼룩진 이 땅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물같이 흐르고 공법과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러한 세상이 오지 않겠어요. 우리가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늘 흐느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니냐 이야기에요. 그러면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영혼의 소생함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녹취자 : 김세나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아느냐에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신앙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차가운 이성적인 지식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경험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늘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이 이제껏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에 부합하는 지식만이 그것이 자신의 신앙에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구약시대 의미에서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우상을 섬길 위험은 우리에게는 별로 없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 속에서 만들어 낸 하나님을 섬길 위험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감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일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종종 충격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이 알고 있었던 신앙적인 상식을 뒤엎는 하나님을 깨닫는 새로운 진리와 각성,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깊어지게 되고 그래서 참된 신앙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미 4주에 걸쳐서 3절을 해설했습니다만, 오늘 다섯 번째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는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함으로써 3절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이 듣게 되는 이 설교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성경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면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제게는 오늘 이 말씀이 자칫하면 여러분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진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3절에 오도록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셨으니 오늘도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들이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성경 사상의 진수중 하나를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3절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죄나 무지, 혹은 고통 이런 것들로 인해서 영혼이 깊이 침체되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은혜로 다가오셔서 죄의 용서와 혹은 깨달음과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영혼의 회복을 경험하게 하시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셔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보다 궁극적인 목적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목적이 오늘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려우면, 여러분들이 흔히 잘 쓰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이 평범하게 알고 있고 익숙해져 있던 신앙의 상식 하나를 뒤엎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가장 뛰어난 주제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껏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최고의 목적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죠. 해 왔습니다. 또한 그런 것들을 입증해 주는 성경 구절도 많이 있어요. 지금 제가 찬송으로 부른 요한복음 3장 16절은 물론이거니와 요한일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많은 곳에서 성경 어느 장을 펴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성경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 바로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보다도 더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의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인간의 모든 총체합계도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의 영광만은 못하다 이거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우리를 향한 견딜 수 없는 사랑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하신 그 사건을 우리의 입장에서 해석을 한 것이지,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에요. 그런 일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만약에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제 이야기를 조금도 의아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한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죠? 이렇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오시는 그 때에는 우리를 향한 견딜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안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와 함께 사시며 버림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시다가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 주어 못 박혀 죽으셨지만 그러나 두 번째 오실 때는 어떻게 오십니까. 바로 당신이 한 때, 생명을 버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던 그 세상, 그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거예요. 왜, 그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갑자기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썰렁해지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필요는 없어요. 왜, 그것이 성경의 진실된 사상이기 때문에 그렇죠.
제가 한 12년 전에 요한복음 마지막 장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뭐, 펴보실 필요도 없고 이런 스토리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 다시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는 이 질문이 매우 특이했겠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고 그리고는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였기 때문이었죠. 그 예수님이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셨었어요. 세 번 부인했는데, 세 번을 물으셨어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대답을 했는데 나중에는 울고 싶을 정도에요.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 물어보는 상대방이 같은 인간이라면 네가 날 사랑하냐 이렇게 물어보면 사랑하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진심 없이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대답한 적도 우리 없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물어보시는 분은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이 진짜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을 하신 그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이셔요. 그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시느냐 물어 보시는 거예요. 그런 물음 앞에서 이 베드로가 세 번이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은 이것은 진실한 내면의 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인생 전체를 실은 고백이었어요. 그렇게 사랑한다고 고백할 사람이 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냐 그렇게 물으면 베드로도 할 말이 없겠지만, 그런데 우리도 할 말 없어지는 적은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보통 그 실존적인 고백이 아니란 말이요. 그렇게 주님을 깊이 사랑한다고 그렇게 세 번이나 고백을 했으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셔야지만 말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시느냐 하면 그렇게 세 번이나 사랑한다는 고백을 다 받으신 후에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은 뭐냐 하면 네가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다녔으나 네가 나중에는 사람들이 너를 띠 띄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 결국은 성경 속에서도 이미 해설이 나와요. 이것은 베드로가 죽는 것을 암시하는 거다. 그러면 다 거두절미하고 예수님이 네가 날 사랑하냐. 네. 정말 사랑하냐. 네.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냐. 진짜 사랑합니다. 그래? 그러면 죽어라. 그게 이해가 되느냐고요. 그 대목이. 여러분들이 여기 처녀총각도 많이 있는데 열렬히 사랑한다고 상대방이 와서 고백을 하는데, 자매가 와서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해요? 네,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해요? 네. 정말 나 없이 살 수 없어요? 네. 우리 집에 가서 식모해. 그게 말이 되냐고요. 그것보다도 더 심한 거죠.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거기까지만 읽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거기 바로 뒤에 어떠한 해설이 붙어있냐 하면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거기까지는 이해가 안 되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것을 미리 말씀하심이라. 그것을 볼 때 죽는다는 이야기를 크게 읽으면 안 돼요.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그게 아니라,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를 미리 말씀하심이라. 그런데 그것은 이루어졌어요, 안 이루어졌어요? 그대로 이루어졌죠.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을 하면 무리는 있을지 모르지만 거두절미하고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건만 가지고 연결을 해버리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주님은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그 전설에 의하면 그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서 비참하게 죽이신 거예요. 뭘 위해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을 단순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다라고 하는 이 구도 하나만을 가지고는 설명이 잘 안 되는 거예요.물론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그래요. 일반적으로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요. 그리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물붓듯이 물질을 주시지 않으셔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면 밥은 안 굶어요. 맨날 노름하고 술먹고 담배피우고 말이지, 쓸 데 없는 데서 낭비하고 그러는 사람들이 단정하게 주님을 잘 믿어봐요. 그것 변화받으면 삶이 달라지잖아요.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거예요. 주위의 사람들에게 칭찬하고. 맨날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면서 헛소리나 하고 누가 돈 10원이라도 빌려주려고 하는가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신다라고 하는 이것이 커다란 성경의 흐름이지만, 이것이 유일한 공식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운수대통한다. 이런 식으로 공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거죠. 그렇게 이야기하면 베드로나 사도바울이나 선지지나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삶이 이게 대답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뭘 누렸어요? 뭘 누렸느냐고요. 자기 가족과 문벌과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사도바울은 땅을 얻었어요, 뭘 얻을 수 있었느냐고요. 다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고난이 넘치는 삶이었고 다 순교해버렸어요.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하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마치 성경의 최고의 가치라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오늘날 어떠한 사고 방식이 있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너무나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자신을 그 사랑이 제한을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러한 이상한 사랑의 교리가 나와서 하나님도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히셔서 어떻게 하실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훼방하고 악하게 살아가도 그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을 붙들고 눈물만 흘리시면서 얘들아 너네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인간들이 돌아와서 이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있는 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잘 살아 줄 때까지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는 것 같은 그런 분이신 것처럼 묘사를 하는 사랑의 교리가 유행한 거예요.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란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에요.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의 자비를 의지하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한 아가페, 위대한 자비를 보이시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로 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엄위함을 보이셔요.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그런 사랑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상당히 과장된 것이 많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그 사랑의 교리로 묶어 두어서 우리들이 원하는대로 길들여진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그러한 그 무의식속의 잠재되어 있는 의도들이 많다 이거죠.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베드로를 예수님이 깊이 사랑하신 것은 사실이죠. 그리고 베드로가 비록 이 세상에서 좋은 집으로 축복으로 받지 못하고 그리고 넓은 땅을 댓가로 받지 못하고 일평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교제하면서 나누었던 그 탁월한 영광스러운 기쁨과 산 소망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할 수 없죠. 그렇게 놀라운 것을 받았죠. 그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결국은 냉정하게 말하면 베드로의 목숨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더 깊이 중요하게 생각하신 거예요.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너희의 최고의 영광은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계신 거예요. 참된 신앙은 주님의 그러한 부르심을 받으면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밖에 몰라 그렇게 말하지 않고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너희의 최고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아멘 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이라고요. 역시 신앙이 있으시네. 아멘 하는 것 보니까. 그것이 신앙이에요.
우리는 오늘날 그 하나님을, 하나님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과시하는 것이 마치 자기 신앙의 깊이를 반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뭐 이렇게 늘 가까이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친구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과 가까운 것을 과시하고 그러는 것이 마치 신앙의 표지처럼 생각하는데 잘 생각을 해야 해요.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두려움을 몰아내지 않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참된 영성이에요.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느끼는 것만을 가지고는 그의 영성이 깊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좋아하는 모든 감정이 다 인격적인 사랑은 아니에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멋있게 생긴 남자를 보면 어쩜 멋있어. 그럴 수 있다 이거죠. 그것도 사랑의 감정일 수 있죠.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그렇게 중요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그 바바리코트보다 그 영화배우보다 훨씬 못 생겼어도 오랫동안 사귀고 그리고 결혼을 하기로 하고 그리고 뭔가 자신의 인생을 위탁하면서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결심한 그 사람이 좋은 바바리코트 없고 그 사람처럼 콧날 오똑하지 않고 떡판 같이 생겼어도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뭔가 인격적이고 뭔가 담긴 사랑이지, 그런 것 아니에요? 이해가 전혀 안 가는 눈초리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경외하다라는 말을 할 때, 히브리말로 야레. 야레는 두려워하다에요. 두려워하다. 희랍어로 경건이라는 말이 유세베이아 인데 유는 good, good, 좋다. 세베이아 fear, 두려움이에요.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좋은 두려움이라는 거예요. 나쁜 두려움이 아니라 좋은 두려움. 이처럼 말이죠. 성경에 나타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대할 때, 아무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넘쳐도 떨쳐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감정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냐 하면 두려움이에요. 그런데 그 두려움의 감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겸비하게 엎드리게 만드는 그러한 인격적인 두려움이었단 말이죠.
여러분들은 그러한 사람 만난 적 없어요? 뭔가 그분 앞에 마주해서 탁 서면 그 사람이 뭔가 그 사람을 너무 존경하고 거룩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 앞에 서면 뭔가 말을 안해도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 속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고 그리고 일주일이나 살았던 삶이 그 사람 앞에 다 드러나는 것 같은 그러한 신령한 영향력을 주는 것 같은 그러한 사람을 만난 적 없으세요? 만약에 인간이 만났을 때에도 그러한 경험을 한다고 했을 것 같으면 그러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할 때를 생각해 보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에게 유행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이 그 성경에 의해서 손봐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 이름 가지고 농담하고 말이죠. 하나님을 마치 뒷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말이죠. 아무렇게나 막 떠들고, 이런 것들은 전부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천박한 것이에요.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미스테리가 하나 있어요. 하나님의 본능이 뭐냐. 그것은 몰라요, 사람들은. 네 글자로 되어 있거든요. 네 글자. 히브리말은 자음이 되어있고, 자음 위나 옆이나 아래에 모음이 붙어서 그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서 글자를 읽어요. 우리나라 말과 똑같죠. 그러나 쓸데는 대체로 모음을 안 쓰고 자음만 쓰거든요. 네 글자에요. 그 당시에는 다 네 글자 이거든요. 이름이 네 글자에요. 동사에서 유래하는 네 글자에요. 그런데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네 글자인데, 이게 이것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왜 성경을 쓴 사람들도 이스라엘 민족이고, 보존해 온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왜 그 네 글자를 못 읽느냐. 안 읽었기 때문이에요. 왜, 그것을 읽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읽느냐 생각한 거예요. 쉽게 이야기 하면 김남준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는 책을 우리 집안의 후손들이 그 감히 읽을 수가 없어서 목사님 그리고 읽은 것이라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사람들이 주님이라고 읽었어요. 주님은 그것 보다는 훨씬 덜 두려운 이름이었기 때문에 주님, 그렇게 읽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자음,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인데 밑에부터 읽는 모음이 주님이라는 모음이 붙은 거예요. 그것을 결합시켜서 결합될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결합시켜서 만든 이름이 여호와에요. 이 여호와는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잘못 읽은 이름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야훼라는 이름인데, 그것도 그럴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추측할 뿐이지, 누구도 그것이 정확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는 단정하지 못하는 거예요. 지금도 히브리 사람들은 1년에 딱 한번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네 글자를 써놓고 야훼 한 번 읽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자식들에게 들려 주는 거예요. 왜. 그 이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나서 그날 회개하는 거예요. 왜, 우리 이 미천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컬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이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러한 탁월한 두려움은 이것이 신앙심에서 비롯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신앙심은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다른 분이라는 거예요. 비교가 안 되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분이시라는 거예요.
(예화) 최근에 제가 잡지에서 태양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어요. 참 대단합니다. 그 태양에서 1초 동안에 생성되는 에너지가 온 인류가 200만년 동안을 쓸 수 있는 에너지에요. 상상도 안 가죠. 그러면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그것 하나만 1초 분량의 에너지만 있으면 주님 오시는 날까지는 물론이고 충분히 쓸 수 있는 분량이에요. 그렇게 빛이 8분 30초 동안을 달려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데도 거기에서 1분 동안 비추는 빛의 연량이 트럭 4천 만대의 분량에다가 가득 석탄을 싫은 것을 불로 다 때우는 것과 똑같은 연량을 지구에다가 전달을 해주는 거예요. 상상할 수 없죠. 이 태양 한 가운데서 폭발이 일어나는데 그 폭발할 때 온도가 1백만 도. 그리고 그것이 지표면에 올라오면 6천도 정도로 오는데, 올라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1백만 년이래요. 상상할 수 없는 미스테리인데, 그러한 항성이 옛날에는 온 우주위에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러한 항성이 많다는 사실이 발견 된 거예요. 그리고 수없이 많은 그 수천억 개의 별들이 모여서 은하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거죠. 태양계가 있고, 그것이 모여서 은하계가 그리고 그러한 은하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러한 이 우주를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거예요. 그 하나님을 인간과, 인간이 그 하나님을 뵐 때, 그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을 친구처럼 맞 먹을 수 있겠냐는 거예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 세상의 피조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뭔가 인간과 무엇과 비교하면 그렇게 되겠다,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인간과 개미의 차이와도 아무리 연장시켜도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정도의 그러한 질적인 차이에요.
신앙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시고 우리는 그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 가세요? 하나님 안 믿으면 인간도 아니에요. 그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냐고요. 이렇게 말하는 저 본인도 옛날에는 안 믿었거든요. 그 때 인간이 아니었나보죠. 그러니까 선교적인 사명이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안 전해 주면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무지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러한 사상에 상당히 동화되어 있어서 그래서 참된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단 말이에요. 이게 이제 문제에요.
그러면 말이죠. 그러한 하나님의 그러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보여주시는 탁월함이 무엇이냐 하면 찬란한 영광이에요. 찬란한 영4광. 그러면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 사실 잘 쓰는 말일수록 우리는 그 의미를 모르거든요. 그런데 제가 어젯 밤에 눈 오는 관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면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겠다라고 찾아냈어요. 어제 밤에 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그런데 온 동네가 다 캄캄하잖아요. 네온싸인도 다 꺼졌고, 차도 별로 없고 그러니까 눈이 펑펑 내리는데 잘 안 보여요. 그런데 교회 옆에서 이렇게 보니까 이 교회 옆의 간판이 있잖아요. 거기에서 형광등이 130개 정도 불빛을 비추는데 저는 진짜 멋있었어요. 빛이 환하게 비취니까 그 열린교회 옆 벽 쪽으로 떨어지는 눈은 눈알 한 알갱이까지 다 보이는 거예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게 거기에서 찬란한 빛이 비추면서 비취는 거예요. 그런데 벽 쪽에 바짝 붙어서 보니까 간판은 안 보여요. 형광등도 안 보여요. 다만 뭐만 보여요?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만 보이고 그 빛에 작은 눈꽃송이 하나하나까지 모두 비취는 거예요. 하나님은 안 보이죠.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하면 그 하나님에게서 뿜어져 나옴으로써, 무엇인가 그 하나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그래서 이 이제까지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가 깊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준 사람은 아무도 발견을 못 했어요. 저도 지금 저 자신의 이 설명에 만족스럽지 않아요. 그래서 웨슬리 같은 사람은 뭐라, 퍼키제는 뭐라 그랬냐 하면, 퍼키제나 웨슬리와 같은 사람은 뭐라 그랬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엇인데 어둠을 모두 몰아내서 다 보여주는 그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듣고 나면 배가 고프죠. 충분하지 않아요.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여튼 하나님은 볼 수 없는데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력한 그 무엇인가 영향력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만들어 주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의 영향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로 비추는 찬란한 영광을 빛을 받더니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본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오, 나는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구나. 그리고 자기가 전체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한 거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자기 입술이 가장 더럽다고 하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그 입에서 무슨 진실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는데 본 거예요. 그러니까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을 만났어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까지 깊이 신앙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 분이 바로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에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존중심이 담긴 그 신앙이 뭐냐 하면 구약에 나타나는 혹은 신약에 나타나는 이름 신앙이에요. 이름 신앙. 그리고 이 이름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신앙사상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름 신앙이 뭐냐.
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이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버님,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인격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너희 아버지 이름이 뭐냐. 그것은 벌써 사람이 인격적으로 잘못된 사람이에요. 남의 아버지를 물어 볼 때에는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냐. 아니면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냐. 이렇게 다른 말로 물어보는 거예요. 이름이라고 안 물어본다고요. 주민등록에는 이름이라고 나오지만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에요. 아버님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물어보면 자식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무슨 자, 무슨 자, 무슨 자입니다. 왜, 그 아버지에 대한 깊은 존중심 때문에, 뭐 여기에서 아버지 이름 주루룩 이름 붙인다고 해서 부산에 있는 아버지가 그것 알겠어요. 그리고 안들 내 이름을 한꺼번에 불렀냐고 죽여버린다고 하는 그런 아버지가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가 어떤 태도를 갖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이 아버지를 존중하는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가 거기에 있건 말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짜르륵 그렇게 붙여 부를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아버지가 진짜 잘난 아버지냐. 대통령 이름도 세 자 붙여서 막 부르면서 자기 아버지는 통장도 못 지내고, 반장 한번 못 지내봤는데 그런데도 대통령 이름은 아무렇게나 부르고, 그리고 기분 나쁘면 대통령 이름 뒤에다가 막 욕도 붙여서 부른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는 무슨 자, 무슨 자, 무슨 자. 걔네 아버지는 술 주정 뱅이 일수도 있어요. 그리고 교도소를 제집 들 듯이 드나들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그것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자식으로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 부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한 이름에 대해서 강한 것을 가지고 있죠. 그렇죠. 또 더 정곡을 찌르는 속담 중에 하나가 뭐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죽어도 남아있는 내 이름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살아있을 때 중요한 관심사란 이야기죠. 이런 심성이 한국인 사이에 흐르고 있다고요. 그것 때문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명예를 굉장히 존중하며 생각한 거예요. 그게 허세와 연결되면 순 뻥튀기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정직하고 진솔할 때에는 말하자면 하나의 정신으로서 흐르는 거예요. 선비는 선비다운 정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하는 사람들로서의 정신, 그런 것들을 유지하면서 산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어요. 그런데 어쨌든지 그런 사상이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와 똑같은 생각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요. 자, 우리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뭐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 그러는데 하나님이 언제 내려 오셨어요? 뭘 높여 드려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렇게 돌리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잖아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면 뭐 대학 합격 했겠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사업이 잘 됐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옵시고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 야, 영광을 조금씩 내놔라. 사업하는 사람은 또 사업하는 사람대로, 직장다니는 사람은 직장 다니는 사람대로 영광을 다 모아서 바구니에 담아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부어드리면 하나님이 영광스러워 지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밑에서 그 전쟁이 일어나고 그리고 수많은 범죄자들이 날뛰어도 태양은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요.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해요. 만약에 인간에 의해서 영광스러워졌다, 비전해졌다, 그러시는 분이라면 그 분이 어떻게 완전하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자충하신 하나님이셔요. 자기 스스로 충분하시고 자기 스스로 완전하시고 자기 스스로 만족하신 하나님이에요. 그 뭔가 모자라는 것이 있고, 인간이 보태 드려야 하는 분이 아니라는 거죠. 그렇잖아요.
(예화)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봄방학 쯤 되었을까요. 왜 이렇게 고드름도 녹고 겨울이 오면서 봄이 따뜻하게 오는 그 때, 정확하게 생각은 안 나는데 그 때 그러니까 애들이 뭐 다 이렇게 마당에 병든 병아리들 마냥, 먹지도 못하고 장난감도 없을 때니까. 쪼르륵 앉아서 햇빛을 쬐면서 있었는데, 개 한 마리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그러고 길게 뻗고 한숨 자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뭐라 그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라고요. 그러더니 막 짓는 거예요. 태양을 보고. 그런데 개가 그렇게 태양을 보고 짓었기 때문에 태양의 빛이 사라지겠어요? 이렇게 물으면 바보같은 질문이죠. 그죠. 이 개가 자다가 개꿈을 꾼 거예요. 뭐 본 거예요, 지금. 태양 속에서 어떤 이상한 개 한 마리가 나와서 자기가 물고 있는 뼈 한 마리를 빼앗아 갈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태양을 향해서 너 왜 그런 개 보냈어? 그리고 막 짖는 거죠. 태양이 그 개가 짖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거죠. 인간들이 여기에서 전인류가 모여서 하나님은 지구를 떠나라고 어느 실존 철학자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이 지구를 떠나라고 투표를 해서 만장일치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그렇게 선포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냐 이거죠. 다 개짓는 소리에 불과하다 이거죠. 강아지 짓는 소리에요. 뭐 사람들이 신문에다가 교회를 모욕하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모욕하고 뭐 하나님이 만약에 있다면 모순 덩어리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생각의 산물에 불과하고 아무리 글을 쓰고 난리를 치고 예수님의 생애를 모욕하는 영화를 만들고 뭐 그렇게 만든다고 해서 그 하나님께 영향이 있냐 이거죠. 다, 할 일 없는 개 짓는 소리라 이거죠. 사실이에요. 우리가 이 인류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이를 갈고, 아 죽어도 당신 안 믿을 거라고 다 쥐약 먹고 자살해 버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거기 계시잖아요. 무슨 영향을 받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도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자, 그런데 그런데 하나님 자신은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살든지 아무 영향을 안 받으면서 사시는 분이에요. 손해 나실 것도 없고 보태질 것도 없는 분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데 자기 이름은 이 세상에 두신 거예요. 자, 예를 들어 보십시다.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를 다니다가 여기 양평이나 수원, 이런 정도를 이사가면 될 수 있으면 이사가지 말고 열심히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그러겠지만 만약에 부산이나 제주도로 가버리면 제가 스스로 부산의 어느 교회가 은혜롭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교회니까 가라. 제가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죠. 물론 거기에서도 비행기타고 오겠다고 하면 말릴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하여튼 보낼 것 아니에요. 그래서 갔어요. 부산에 있는 사람은 여기 열린 교회 와 본 일도 없거든요. 어느 교회 딱 갔어요. 여러분이 여기에서 진짜 말씀의 사람이었어요. 진리의 사람이고 진실 그 자체였어요. 그러니까 거기 가서 특별히 잘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신앙생활 하던대로 같은 하나님을 섬기며 산 거예요. 그런데 그 교회에서 별종이 된 거예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이 없는데 너무 진실하고 훌륭한 거예요.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 해요. 그래, 신앙생활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1년 밖에 안 됐습니다. 더 놀래는 거죠. 서울에 있을 때 어느 교회 다녔습니까. 열린 교회에서 처음 예수 믿고 1년 만에 여기에 왔습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 열린 교회를 본 적도 없고, 와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또 그 쪽에서 사람들이 열린 교회 막 욕을 한다고 해서 무슨 교회가 기둥이 하나 빠지거나 뭐 땅이 가라앉거나 2층이 3층 되는 것 아니거든요.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거기에서 열린 교회의 이름은 높아졌다 내려갔다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거기에서 신앙생활을 확실히 하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아무도 열린 교회 보지도 않은 사람이 누가 서울로 이사 간다 그러면 야, 다른 데 가지 말고 열린 교회로 가라. 왜, 너는 어떻게 열린 교회를 아냐 그러면 나는 열린 교회는 가 본적은 없는데 저 인간을 보니까 진짜 확실하더라. 1년 예수 믿었다고 하는데 30년 믿은 나보다 낫더라. 그러니까 너는 거기 가면 정말 좋을 거다. 그게 결국 뭐에요. 교회는 여기 있는데 부산에서 열린 교회의 이름이 높아지는 거예요.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신 거예요.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셔서 당신의 이름이 당신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수시로 변해요. 찬란하게 영광스럽게 떠오르는가 하면 어떤 때는 막 잔뜩 오물이 묻어서 사람들의 발 아래 짓밟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누구한테 달린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달린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리들이 흔히 이렇게 생각을 해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 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정말 우리가 필요해요?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필요하냐고요. 문학적으로 잘 이해를 해보라고요. 아, 오늘 목사님이 하나님이 우리 아무도 필요없다고 그러더라 하지 말고 잘 이해해 보라고요.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안 살고 다 세상을 위해서 살았다고 칩시다. 하나님에게 무슨 영향이 있느냐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영향이에요. 영향.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열린 교회를 별로 사랑하지 않고 등록도 안 하고 오락가락 하고 이런저런 결정을 발견하면서 아이씨, 내가 진짜 솔직히 말해서 집만 가깝지만 않으면 정말 이 교회를 나올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부산에 갔을 때, 막 사람들이 열린 교회를 오해하고 욕하고 그래도 하나도 화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 나도 저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이상한 교회라고 옛날부터 생각을 했어.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구나. 그러면 만약에 아까 그 사람처럼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못도 모르고 막 그렇게 욕하고 그러지 않겠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할 때, 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껴요. 안 그런데. 저 사람들은 열린 교회 신자들이 개판인 것처럼 거기도 사람 판인데 왜 저렇게 이야기를 할까. 절대 안 그렇다. 그리고 그것을 변화하려고 그리고 아니라고 말하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거예요, 왜, 사랑이 그것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요약을 해서 이야기 하자면 이거예요. 성경이 이야기 하는 이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말은 뒤집으면 그 말의 진실된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의미에요. 우리가 뭘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하나님 이름 위해서 안 산다면 하나님 뭐 모자라신 분이에요?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 인간들을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살아있을 때 주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말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이름 신앙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이 되는지 그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으면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스럽게 여김을 받고 주님이 존귀하게 이름이 존귀해지면 자기의 생명을 드려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기 보기를 원하는 마음, 그게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마음이에요. 사랑에서 비롯된 마음이에요. 비롯된 마음이라고요.
그러한 일에 대표적인 케이스가 누구냐 하면 다윗이에요. 다윗. 다윗이 블레셋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공을 당했을 때, 아버지가 형들이 어떻게 있는지를 보고 오라고 분부를 내립니다. 이 착한 다윗이 전쟁터로 가 본 거예요. 쳐들어온 사람들은 블레셋이에요.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그 남왕국 유다의 아래쪽, 그래서 애굽으로 통하는 그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에요. 이 나라가 민족이 말이죠. 한 2천년 넘게 망하지 않고 자리를 차지해요. 그것은 보통 연구 대상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나라는 아주 강력한 국민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기름진 위쪽 팔레스타인 지방을 약탈해서 먹고 사는게 직업이었어요. 농사지어서 다 거둬들일 때가 되면 추수하는 것을 보면서 돌격하는 거예요. 싹 쓸어오고, 농사 잘 지어놔 그리고 내려가는 거예요. 이듬해 풍년을 기원하다가 또 치러 올라가고. 이 블레셋이 늘 이러한 그 하나님의 어떠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내키시는 도구였어요. 쳐들어왔어요. 싸움이 벌어지면 대게 칼과 칼이 맞부딪히면서 불꽃이 튀고 이런 함성이 있을줄 알았는데 뭐 양쪽에 줄로 쭉 서 있고 3미터도 넘는 꺽다리 같은 사람 하나 나와가지고 소리 소리 지르는데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가만히 지켜 보는 거예요. 무슨 소리 하는가 들어봤더니 하나님을 모욕한 것도 아니고 엄밀하게 성경대로 보자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 한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마음 속에서 확 끌어 오르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도 싸울 사람이 없는 거예요. 왜 저렇게 개처럼 떠들게 내버려 두냐는 거예요. 왜, 개가 그렇게 부르짖는다고 해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떠드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은 그 사람들 가운데 전부다 모욕꺼리가 되고 있는 거예요. 막 욕을 하니까 자기네들끼리 낄낄 거리면서 그래 맞아 하나님의 군대 아무것도 형편없는 녀석들이야. 그러면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욕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나가겠다고 하는 거죠. 어린 소년이 나간다고 하니까 뭐 갑옷을 입혀 봤는데 무슨 주니어 사이즈가 없었어요. 도저히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 벗어 버리고 그리고 막대기와 물맷돌 가지고 갔는데, 막대기, 이 차림새가 뭐냐 하면 양 떼를 지키는 목동의 차림이에요. 이 막대기는 맹수를 무찌르는 무기이고 물맷돌은 원거리에서 접근하는 이 맹수들을 때려눕히기 위한 말하자면 무기였거든요. 그것을 들고 애가 목동 차림으로 막대기 하나 들고 나오니까 얼마나 뱃살을 잡고 사람들이 웃었겠어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가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그런 애를 내 보내냐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나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다윗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고 나가도 그 힘센 장수한테 절대 안 죽으리라고 확신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런 암시는 안 해요. 그러면 뭐냐 죽을 줄 알고 갔냐. 아니. 죽고 안 죽는 것은 지금 이 다윗이 거기를 뛰어 나갈 때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아니에요. 죽을까, 살까. 하나님이 산다 그러면 갈께요, 그게 아니라 이거죠. 그런 것을 초월했어요. 그러면 뭐냐.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 살아서 숨을 쉬는데 이 눈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광경을 내가 어떻게 보고 있을 수 있느냐. 그러니까 뛰어 나간 거예요. 이런 마음이 아니었어요. 이런 마음. 예를 들자면 이런 종류의 마음은 아니었어요. 어떤 마음이 아니었느냐 하면,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법이지. 여기에서 한 건 올리면 다음 대선의 표몰이를 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뛰어 나간 것 아니에요. 아니란 거죠.
(예화) 여러분들에게는 잊혀졌을지 모르지만 여러해 전에 그 금융회사 빌딩에 수류탄을 들고 이 탈영병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안전핀까지 뽑은 거예요. 그리고 다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 명이 붙잡혀 있어요. 자기가 그것을 들고 어떻게 하겠어요. 나중에 손들고 투항하거나 그것 뻔한 것 아니에요. 엄마가 와가지고 얘야 내려오너라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 있는 젊은 대리 한 사람이 걔를 덮쳤어요.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터져서 뭐 자기도 죽고 그 범인도 죽고 여러 사람 죽었죠.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게 있어요. 왜 그 사람이 덮쳤을까가 그 범인 죽은 것보다도 더 중요한 관심사였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분석을 한 결과 한 건 올리려고 그랬었다. 뭔가 영웅심리가 작용을 한 거죠. 그것을 들고 어디를 가겠어요. 빌딩 안에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자기가. 내버려 두면 다 구출 받는 것인데 그래서 딱 두드려 눞여서 대리에서 부장쯤 올라가 보려고 했나,
그러한 마음이 다윗에 작용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후일 이 사건 이후에 어떤 동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행을 했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그게 무슨 이야기에요? 사울이 우리의 왕이지만 진짜 지도자는 우리 다윗이다. 그 이야기 아니에요? 그러한 민심을 얻기 위해서라도 내가 이 상황에서라도 뭔가 한 건을 해야지,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체면을 세워야지 그러한 동기가 전혀 아니에요. 살고 죽는 문제를 초월했고 자기가 왕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그러한 문제를 초월한 거예요. 그리고 오직 하나, 자기가 지금 안 보았다라고 하면 몰랐을텐데 지금 자기가 목격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저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그렇게 참을 수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참을 수 있었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 안 했고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면 또 이렇게 묻고 싶겠죠. 아무리 상상을 해도 자기가 다윗 같아질 리가 없고 생각을 안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있었죠. 있었는데 없는 거나 다름 없을 정도로 조금 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모욕받는 하나님의 군대의 이름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모욕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서 그 하나님의 이름의 불명예 보다도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더 사랑한 거예요. 뛰어 나간 거예요. 그리고 퓩 하고 던졌죠. 그게 성경에는 뚜렷하게 안 나오지만 투구를 만들 때, 모양을 만들려고 팠는데 여기와서 딱 맞은 거예요. 그리고 머리 그것을 코 위의 뼈를 딱 깨고 뇌 속으로 깊이 박힌 거예요. 그리고 쓰러진 거죠. 그리고 달려와서 자기는 칼도 없으니까 그 큰 칼을 빼내어서 목을 쳐서 끼어서 높이 단 거예요. 그 때에 높이 달린 그 목은 사람의 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하나님의 원수의 목이에요. 그것을 높이 든 거예요. 그것을 어떤 다윗의 어떤 그 자체를 말이죠.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본 거예요. 믿음.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그러면서 입다와 삼손과 막 이야기 하다가 다윗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였다 이거죠.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향한 갈망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 자신이 불의한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불의한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마음아파하지 않는 것이 정말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거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깊은 갈망이 그것을 시킨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이 그것을 시킨 거예요. 그래서 모든 모든 그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삶이 다 같지는 않잖아요.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나가고 나면 직업도 다르고 사는 집도 다르고, 관계도 다르고 또 관심사도 여러 가지에요. 그런데 공통적으로 합의되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디에 있든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종사하면서 살든지 궁극적인 목표 그 자체는 그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우리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겨지는 그러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 이거예요. 그리고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그 존재의 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고 창조되고 주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토록 사랑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 내리고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창조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깨우쳐서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창조의 참다운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선교하는 거예요. 선교하는 거라고. 그런 동기를 가리켜서 뭐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 사랑이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무슨 사랑.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나누어지지 않는 거예요. 나누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지난주에도 쭉 교회에서 공사를 했어요. 누전이 많이 돼요. 이렇게 만지면 전기가 올라요. 언제 사고가 여태까지는 안 났지만 날수도 있잖아요. 지하서부터 천천히 다 잡아간 거예요. 그리고 들어오셔서 보지만 조명을 많이 늘렸어요. 저쪽 뒷부분에, 복도도 쭉 갈고. 그것은 왜, 쾌적하게, 쾌적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입니까. 아니에요. 누구든지 이곳에 와서 그 영혼을 진심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지만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할 수는 있어요. 우리가 능력있는 범위 안에서. 그래서 그렇게 환경을 조성해서 이제껏까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데 신앙이 어리거나 처음 찾는 사람들이 방해를 받던 것들을 우리가 노력을 해서 치워서 이렇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뭔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진실되게 변화를 받아서 그래서 결국은 주님을 진실되게 몰랐더라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없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진실되게 주님을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바로 교회고, 그래서 교회는 그런 일에 충실해야 해요.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최종적인 일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영혼들이 진실되게 변화를 받아서 그러한 열망에 불타는 사람들로 만드는 거예요. 어떻게든.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주님의 이름에 영예를 위해서 자신의 삶의 모든 가치를 건 사람.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높이면서 살려고 마음을 먹을 때에만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섬김을 행하고 심지어는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지탱해 나가게 만드는 큰 힘이 된 거예요. 다윗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건축 준비를 끝내요.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성전을 짓고 거기에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경배하고 신령한 그 제사, 예배에서 오는 거룩한 영향을 받고 그들이 바뀌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평판이 달라지리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평판을 하든 우리는 가끔 그럴 수 있어. 뭐 어때 나만 안 그러면 돼지. 그러면 베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죠. 그죠. 그런데 우리는 아니에요. 오해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던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가르쳐서 오해를 풀어줘야 해요.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사람들은 뭐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면 됐지 그러면 안 된다 이거지.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요. 진리가 없는 곳은 진리가 비추어 오해가 있는 곳에는 변증을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맛 보지 못한 곳에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나타나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해야 할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예요. 나 아니면 누가 지키랴. 하나님의 그 이름을 말이에요.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어떤 사람들은 큰 절망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큰 용기와 힘을 얻은 거예요. 잘 들어봐요. 눈에 보일 때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관계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에요. 자기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생각을 해도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요.
(예화) 아들 낳아서 장성하면 요즘 군대는 좋아졌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옛날에는 군대 가면 고생 억수로 했잖아요. 지금도 고생을 하지만 그렇지만 많이 좋아졌다 이거죠. 그런데 보낼 때, 엄마 세 번 울어요. 언제, 갈 때, 잘 가라. 그리고 펑펑 울고, 아니 그 전에 영장 나왔을 때 먼저 울죠. 몇 월 며칠까지 영장 나왔으니까 들어와라. 네가 군대를 가냐. 곱게 자라던 애가 그러면서 한 번 울고, 그러면서 군대 갈 때 본격적으로 울죠. 막. 그 다음 또 언제 울어요? 영장 받고 나서 자는 놈 보면서 이게 곱게 자란 놈이 군대 가서, 군대에 사고도 많이 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 밥은 제대로 먹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군대 갈 때 얼굴 보면서 울어요. 그거야 실물이 있으니까 울수 있죠. 그런데 그 다음에 한 일주일 있다가 또 울어. 왜, 옷 붙여 올 때, 그 때 옷 보고 만지면서 울어요. 왜 울어요? 사람도 없는데.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비로소 목격을 하고 대면함으로써만 그때에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에요. 진짜 사랑하는 사이는 존재가 없을 때에도 그 존재를 생각나게 하는 그 무엇을 보면 그가 옆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거예요.
(예화) 이런 이야기 하면 웃긴다 하고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 이번에 구정 때도 남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요. 뭐냐 하면 제가 할머니를 참 사랑했는데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음식이 녹두로 부친 빈대떡이었어요. 저는 사실 그것을 안 좋아하거든요. 하나도 안 먹었어요. 그것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왜, 12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할머니가 그것을 좋아하셨는데 느끼니까 12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그 전날 생각이 쭉 나는 거예요. 빈대떡에 얽힌 사연이 쭉 말이에요. 그리고 그 사연 한 복판에는 할머님이 계시는 거예요. 백화점에서 팜플릿을 하나 얻었는데 이렇게 넘겨 보니까 조기가 나와요. 그 분이 살아계실 때 조기국을 참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조기를 몇 번 사다드렸어요. 쑥갓 넣고 토장 걸러 넣고 끓인 국을 참 좋아하셨어요. 조기와 할머니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다 조기를 볼 때마다 누구를 생각하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보는데 그게 뭐예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상이 있고 없고 가까이 있고 멀리 있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리 그 사이에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없는 것처럼 훌쩍 뛰어 넘어 버리는 것이 이게 바로 사랑의 감정이에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죠. 당연하죠. 그런데 지금 내가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보는 그 순간마다 하나님이 생각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니까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내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거예요. 이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에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지금은 너희들이 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혹은 알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며 살지만 그러나 사실은 너희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없이 살 수 없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당신의 이름을 모욕하는 인간들을 우리는 다 쓸어버리고 싶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고 오늘도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를 어두운 세상에 보내셔서 빛에 대해서 증거하게 하신다. 그러한 간절한 언어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어떠한 환경과 처지도 막을 수 없듯이 주님의 이름을 향해서 신실한 열망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이런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뭐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별로 적용이 안 된다든지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없다든지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오래된 케케묵은 핑계 거리에요. 정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느 삶의 자리에 갔다 놓든지 간에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자기가 모르는 것, 자신의 영향이 도저히 미치지 않는 곳, 그것은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자기의 영향이 미치고 자기가 아는 모든 곳에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다는 현실을 보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아, 옆에 있는 교회 요새 진리의 말씀이 터져 나오면서 수많은 영혼들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더라. 그러면 옆에 있는 교회가 좋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을 하면서 저 교회에서 사는구나.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 아니에요. 목표는 뭐예요. 목표는 이 교회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영광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 우리들의 교제가 아니에요. 정말 우리의 이러한 교회, 이러한 성도의 연합, 우리의 이러한 애정, 이렇게 서로 나누는 삶, 이러한 섬김 이런 것들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지 않는다 할 것 같으면 또 모여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러한 것들을 열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교 집단이에요. 그러한 집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속히 망하게 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모든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속에 명백하게 흐르고 있는 이러한 관점과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일치하지 않는데서 모든 불순종들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의 일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의 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고도 어둠 속의 죄 가운데 고난 속에 있다가 소생시켜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성도들, 그런 사람들이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그렇게 의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이름에다가 두는 거예요.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예전에는 유명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살다가 보니까 내가 점점 사람들에게 잊혀진바 되고 나는 잊혀져도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잊혀지면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전에는 내가 돈도 많은 부자였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위해서 살다보니까 가난하게 되었어도 우리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그 분이 부요해 지실 수 있다면 저희가 가난해 지는 것이 아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이 세상 어디에선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북극 에스키모 가운데서라도 복음이 전파되어서 주님을 모르고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미개한 인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얼음판위에서 높아지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며 사는 생활, 이게 신자의 생활이에요. 좋은 집에 훌륭한 지위에 없는 것 없이 누리며 살아도 자신의 진정한 만족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믿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면 우리가 한 없이 기뻐하고 마치 우리가 그 사람에게 빚은 진 것처럼 그를 사랑해주고.
(찬양)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우리들이 지체를 향해서 오래 참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거예요. 우리도 한 때는 그러한 인간이었는데 정말 오래참고 섬기노라면 저 무지한 사람이 변화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높여 드리는 주님 앞에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지금은 당장 열매가 없어도 우리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세우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을 세우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의 궁극적인 꿈은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거예요. 삼천리 방방곳곳 어느 마을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곳에서 주님을 향한 경배의 찬송 소리가 땅 이 끝으로부터, 저 땅 끝까지 가득 울려 퍼지는 그러한 세상을 꿈꾸면서 오늘도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에요. 한편으로는 거친 세상과 싸우고 한편으로는 부패한 자신의 본성과 싸우고,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려고 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과 싸우면서 우리들은 수시로 주님께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하고 목자 되신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러한 비록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하지만, 우리를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그 찬란한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위해 불러주신 것에 감격하면서 나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지만, 그러나 나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주님이 세워주신 그 곳에서 주님의 이름이 높아질 때 감격하고 주님의 이름이 짓밟힐 때 함께 통곡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그 일에 자기를 다 바치면서 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시23:4)
1. 본문 해설
모든 사람들이 축복 된 삶을 원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날들보다는 평탄하고 평화로운 날들이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날들을 주시는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많이 받고 형통한 삶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신들의 믿음이 깊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목자 되신 주님과의 관계가 돈독해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편 23편 속에서 분명 신앙의 아름다운 고백을 남기고 있는 이 시인 다윗도 결국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베풀어 주시는 그 공급해 주시는 은혜,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시시때때로 공급해 주시고 고단한 삶에 안식을 주시고, 연약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도하셔서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침체 된 영혼에 소생을 주시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의로운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면서 자기가 목자 되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4절에서는 시인이 1,2,3절에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그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 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계곡을 행한다 할지라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바로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 지팡이와 한 막대기 그것들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옵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평탄한 길, 끝없이 펼쳐진 푸른 풀밭, 그리고 맑고 푸른 하늘, 언제든지 가까이 다가가 마실 수 있는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에서만 하나님이 자기 목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인은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그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자기가 더더욱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고 거기에서 자기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한 지팡이와 막대기를 위로로 삼으면서 그 사망의 골짜기를 노래 부르면서 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하기에 앞서서 다윗의 생애를 우리들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계시의 비밀에 있어서 하늘의 영광을 본 사람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풍부한 신앙처럼 평탄한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상처와 고난과 아픔이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특별한 사랑을 못 받았고, 장성한 후에는 동기간들의 깊은 사랑과 괴임을 받지 못했으며, 결혼한 후에는 아내가 모르는 신앙의 세계를 외롭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한 여인을 만났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때에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자기 몸으로 낳은 딸이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로부터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고 왕자들이 서로 칼을 들고 싸우는 왕자의 난을 보아야 했습니다. 급기야는 자기의 큰아들 압살롬이 자기를 향해 칼을 디밀고 자기의 생명을 노려 반역을 일으키는 가운데 이방의 땅으로 정처 없는 망명을 떠나야 했던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무수히 지나온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지난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의 골짜기는 죄로 말미암아 지나야 했던 골짜기였습니다. 우레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후에 그 여인을 사랑한 그 이유로 인해서 그는 금보다 더 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찬송하던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쳤고, 주님 앞에 율동을 하던 그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던 몸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바뀌었습니다. 언제나 그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아름다운 가락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던 그 악기는 그 줄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처절한 그 사망의 골짜기로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와 불순종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언제나 죽음의 위협이 있고 또 죽음의 유혹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의 영혼의 모습이 죽은 자와 방불하게 되는 그런 골짜기를 죄와 불순종 가운데서 지날 때가 다윗에게도 있었고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진리의 빛에 많은 비추임을 얻은 사람들은 때로는 이런 죄와 불순종을 저질렀을 때에 가혹하리만치 혹독하고도 길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고통가운데 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복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하나님과의 사랑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몰랐지만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깊은 어두움 속으로 사망의 골짜기로 들어갔을 때에 자기가 앉아있는 왕위도 자기를 기쁘게 할 수 없었고 자기가 온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쓰고 있는 황금 면류관과 손에 드리워 진 홀도 그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윗은 이 하나님의 사랑, 주님과의 이 관계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관계이고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처절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들이 범죄하고 불순종 할 때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아이를 때릴 때 ‘나는 진짜 때리고 싶지 않지만 이 아이가 제대로 사람이 되려면 때려야지’라고 하며 때리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홧김에 패는 것입니다. 성질나니까 패는 것입니다. 악한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런 진노와 성질의 상태를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에게 적용을 시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막심한 오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비록 부모이지만 애가 뭔가 잘못했는데 성질에 못 이겨서 막 두들겨 팰 때 그 부모의 수준은 아이의 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뭔가를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성질이 나셔서 복수를 하신다’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 속에서 경험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은 하나님께 적용이 되지만 어떤 것들은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과 도덕적인 불완전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신성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접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아침마다 그런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자비를 향한 성실하신 은혜, 이런 것들을 늘 경험하던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거절하고 계시다는 차가운 거절감을 느낍니다. 어디에서?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환난과 시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복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해서 복수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복수가 아니면 우리들이 죄를 짓고 불순종해서 사망의 골짜기에서 경험하는 차가운 거절감과 영혼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은 때로 우리들이 죄와 불순종을 통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도록 버려두시는데 우리들이 죄와 불순종의 궁극적인 이유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과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만들고 범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 때문이라고 그러지만 우리 속에 사랑과 집착이 없으면 유혹이 유혹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부패한 사랑, 부패한 집착이 유혹이 왔을 때 거기에 반응을 하고 손을 잡으니까 타락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산책을 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여자가 목욕을 했다’ 목욕을 하는 여자가 세상에 하나뿐입니까? 신하들에게 명령해서 ‘풍기가 문란하니 집에 들어가서 목욕하라고 해라’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미 벌써 우레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장면을 보기 전에 이미 그 마음속에서 그런 유혹이 생겨나면 그것과 함께 손잡고자 하는 강한 이 죄의 본성이 승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죄의 본성을 누른 상태가 아니라 죄의 본성이 은혜를 이긴 상태가 이미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것입니다. 그 순간에 유혹과 딱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가게 만드셔서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거기에서 주님을 버리고 택한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하시고 거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 같은 죽음을 벗 삼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 음침한 골짜기에서 고통스런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그 느낌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다윗도 그렇게 생각했느냐? 아닙니다. 다윗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 22편 그리고 51편 그런 고백들을 죽 읽어보게 되면 다윗 자신도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섰을 때에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내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시며 내 음성을 듣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었고 주님이 자신을 외면한 것 같은 그런 처절한 고독과 고통을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다 살고 인생의 말년에 자기의 신양생활을 한 번 죽 회고합니다. 인생을 살아온 것을 회고해보니까 그 때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고 자기가 죄 지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복수하고 계신다고 두려워 떨던 그 때가 지나고 그 때를 돌아보니까 오히려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하시려고 택한 백성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라도 사망의 골짜기 그 어두움 속을 자기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처절한 상처받은 가슴을 부여안고 고통과 눈물 그리고 탄식 속에서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 것입니다. 단지 그가 아직 믿음이 없고 신앙의 눈이 없기 때문에 그 골짜기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막상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인생의 막판으로 내몰리고 캄캄하고 어두운 골짜기 속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도 다 떠납니다. 진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위로가 필요하고, 돈이 없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진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곁에 없고 다 떠납니다. 이미 시편에서도 다 나옵니다. 형통할 때는 많은 친구들이 곁에 있지만 불통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힘든 고난 속으로 들어가면 심지어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도 발뒤꿈치를 딛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그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낄 때 끝까지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들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 막 자살하고 그렇잖아요? 그들 중에는 부모가 그 아이들을 전혀 돌보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아이들도 있지만 사실은 부모가 그 애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과는 상관없이 그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들을 그렇게 사랑해 주기는 하지만 부모는 자기의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처절한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래서 신앙에는 외로움의 정서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조지 스윈록이라는 청교도가 ‘외로움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풀어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외로움도 두 종류입니다.
한 종류의 외로움은 속된 외로움이고 또 하나의 외로움은 거룩한 외로움입니다. 속된 외로움은 우리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향락에 빠지게 만들고 미친 듯이 무엇인가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요즘 번창하는 향락사업이나 이런 것들은 결국은 이 사회가 얼마나 외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룩한 외로움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게 하는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인간 홀로 외롭게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한 분만을 의식하면서 그 의식의 빛 아래서 자기를 보고 자기의 인생을 보는 것, 이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이 시인은 그런 사실들을 뼈저리게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기약도 없는 캄캄한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갔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셔서 자기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후에 이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자기의 지나온 골짜기를 보니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사망의 골짜기를 접어드는 이유는 다윗의 생애에서 그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사선을 지났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었습니다. 잘못이 있었다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인데 기름부음을 받겠다고 다윗이 원한 것도 아니고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받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그저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착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신실한 신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다윗이 아닙니다. 그를 기름 부으신 분도 하나님 자신이시지 누가 그에게 기름부으라고 지시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이 다윗은 한 나라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그 때의 왕은 오늘날 대통령이나 전제국가의 왕이 아니라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대신해서 그 백성을 다스리고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목자요 유모요 동시에 아버지요 왕이요 군주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기 위해서는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는 단지 이 다윗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고 착한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앙과는 상관이 없이 크게 쓰시기 위해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련의 모진 비바람을 맞으면서 좋은 하나님의 제목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특수하게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사울이 누구입니까? 다윗의 장인인데 자기가 죽으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데 이 정신 나간 장인이 사위인 자기를 죽이겠다고 현상수배를 내려서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마음에는 이 원수 사울을 향한 미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뭘 잘못했으면 바지가랑이라도 붙들고 잘못했다고 사정을 할 것이고, 그렇게 추격을 받으면서 미운 마음이라도 생기면 단숨에 쫓아가서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겠는데 자기는 그런 미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저희를 사랑하나 저희는 나를 미워 하는도다’ 사랑을 원수로 갚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처절하게 지나는 골짜기, 이상하게 왜 하나님이 기적도 잘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쫓아올 때에 단숨에 ‘사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더라’ 그런 소문이 퍼지게 만들어서 모든 상황을 끝나게 만드시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러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이 고통 받는 골짜기를 지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의 시 가운데 ‘제왕시’가 있고 ‘제왕이 되기 전에 지은 시’가 있습니다. 제왕이 지은 시를 보면 하나님 앞에 원통한 자가 가슴을 토하면서 부르짖는 것 같은 그런 슬픔이 가득합니다. 왜? 자기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데 그렇게 처절한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죄와 불순종은 없지만 큰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그런 처절한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젊은이들이 많이 있지만 같은 시대에 태어난 한 평범한 사람이 한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문벌이나 줄타기로 올라가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많고 권력 쥐고 흔들면 지도자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그 사람이 죽은 후에라도 남아있는 후대의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지도자가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백성들을 향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안 됩니다. 풍부한 인생의 경험, 그리고 잘 연단된 강인함, 그리고 거룩한 인격, 하나님을 향한 이 불굴의 단호함,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살려고 하는 지극히 충성된 마음, 이런 것들이 한 인격 속에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지도자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 잘 모르지만 ‘장한나’라고 첼리스트가 그 악기 살 돈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니까 한국의 유명한 재벌 회장이 그것을 사줬다고 합니다. 제가 얼핏 듣기로는 9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큰 돈이 아니죠? 이렇게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게 비싼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요즘 세계 명품 바이올린 같은 것 좋은 것은 200만 불까지 가는 것들이 허다하게 있다고 합니다. 200년 30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연주회를 하는데 쟁쟁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느냐? 문제는 장인의 뛰어난 기술인데 중요한 것은 나무라고 합니다. 저는 교역자 수련회 할 때 설악산에 가끔 가는데 설악산 꼭대기에 올라가보면 꼭대기에 올라갈수록 나무가 모두 작습니다. 그 산은 수천 년 전부터 있었을텐데 나무가 아주 작습니다. 나무가 옆으로 다 휘었습니다. 왜냐하면 습기가 없고, 뙤약볕은 내리 쬐고, 바람은 많고 흙은 많지가 않고 돌들이 많으니까 분재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무들을 특수하게 관리를 하고 가공을 해서 악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다윗을 이러한 불후의 역사를 창조해 가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고자 했을 때 하나님이 그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는 하나님 앞에 정말 죄와 불순종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마치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것 속에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거기에서 이 하나님 밖에는 자기에게 진정한 도움이 없으며 자기가 붙들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체험하도록 만드셔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피난처이시며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물론 마찬가지로 후자와 같이 아무 죄도 흠도 없는데 단지 하나님의 은혜만 많이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자, 즉 다윗과 같이 무언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런 침체와 하나님 앞에 자기 혼자 있는 것 같은 처절한 외로움으로 가득 찬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도 골짜기를 들어가 본 적이 있고 저런 이유로도 골짜기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어느 골짜기 구별할 필요도 없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인은 어떻게 무슨 이유 때문에 들어가게 된 골짜기였든지 간에 그 골짜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골짜기에 들어가게 되었느냐?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골짜기에서 여러분들이 올바로 하나님을 찾으면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이 진리를 깊이 터득하는 신앙의 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서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면 해를 당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 골짜기는 장난이 아닙니다.
지금은 놀이기구도 점점 과격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희 초등학교 때 봄이면 제일 들뜨는 것이 창경원에 벚꽃놀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거기에 소풍을 가장 많이 갔습니다. 밤이면 야사구라고 해서 캄캄한 밤중에 거기에 모여서 보트도 타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창경원에 갔는데 유령의 집이라고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것을 태워주면 모두 잠을 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유령의 집에 들어갔는데 천정이 낮고 어두컴컴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거기에 기차 레일을 깔아놓고 기차 레일을 밟고 가면 갑자기 유령 여자가 벌떡 일어나곤 하고 녹음기를 군데군데 틀어놓아서 히히히히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곤했는데 그 땐 정말 무서웠습니다. 앞에는 ‘임산부와 노약자는 책임질 수 없으니 들어가지 마십시오’라고 써붙여 놓았습니다.
언젠가 개척하고 얼마 안 되어서 용인에 갔습니다. 빙빙 돌아가는 기구가 있어서 태워주겠다고 하며 함께 탔는데 30초도 되기 전에 후회를 했습니다. 숲속을 정신없이 빙빙 도는데 거기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3분 동안을 참느라고 혼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다가 여기에서 심장마비로 죽으면 이다음에 후손들이 ‘너의 아버지는 어떻게 죽었느냐?’라고 누군가 물어볼 때 ‘우리 아버지는 26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이 열리는 은혜를 체험을 하고 진리의 사람으로 목사가 되었는데 진리와 늘 싸우다가 놀이기구를 타다가 숨졌다’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 것입니까? 차라리 심방가다가 죽었다면 순교라고 하지...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데도 아이들은 그것을 타면서 까불면서 타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데도 아이들은 그것을 타고 그 다음날 다시 줄을 서는 것입니다. 왜? 보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포는 있지만 해는 없다’라는 보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을 뻔 하는데 절대 죽지 않는 것, 그것이 스릴입니다.
그런데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장난이 아닙니다. 스릴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러분들 눈을 들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시험 들었다가 악에 떨어지고 해를 당해서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때는 주님 신실하게 믿으려고 애쓰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골짜기에 들어가서 약탈당하고 비참하게 찢겨서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많은 선배들이 예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을 천로역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긴 순례자의 길입니다. 어제 승리했지만 그것이 오늘 승리하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오늘 승리했지만 내일 저절로 승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껏 까지 경험을 많이 쌓아오면서 걸어왔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 이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 의지하고, 매순간 하나님 의뢰하고, 매순간마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주시고 지켜주시리라고 하는 간절한 고백 속에서만 우리가 하루하루를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확신은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두 가지 중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이 오늘 여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 소망이 모두 끊어지고 나를 돕는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밤바다에서 별빛 하나 없는 파도 위에 떠서 어디로 가야할지 망망대해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매 순간 자기를 삼킬 듯이 밀려오는 파도와 사투하는 그러한 처절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여기 왜 왔겠습니까?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이제는 자신을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위로해 줄만한 쾌락과 즐거움도 모두 다 해 버려서 이제 곧 아무도 돕는 사람도 없이 스스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 인생의 어두운 밤이 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 밤을 지내시렵니까? 살 소망이 끊어지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도저히 발견할 수 없을 것 같고 이제껏까지 믿고 살아왔던 많은 가치들이 모두 상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 골짜기에서 여러분들은 인생의 밤을 어떻게 지내시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골짜기는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지켜주실 하나님의 간곡한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일수록 여러분들이 주님을 더욱 굳게 붙들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신실한 고백으로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만나는 골짜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도우시는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드러내 보여주시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당신의 한 지팡이와 한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팡이와 막대기는 둘 다 나무로 만들었는데 용도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는 그림에서 보시면 아시다시피 우리 한국 영화에서 나오는 산신령이 짚고 다니는 나무뿌리로 만든 그런 지팡이가 아닙니다. 그 지팡이는 똑바로 되어서 휘어있고 짧지 않고 깁니다. 짚고 서 있으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옵니다. 이 지팡이는 산길을 올라갈 때도 사용하지만 이 지팡이는 목자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조하기도 하지만 이 지팡이로 양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멀리 가면 지팡이를 쭉 뻗어서 목에 걸어 잡아 끌어당깁니다. 여기에도 그런 지팡이에 꿰어서 온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남녀 공용, 노소 공용, 프리 사이즈입니다. 딱 걸면 맞게 되어 있습니다. 걸어서 목자가 목에 걸어서 확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은근하게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양을 칠 때 사용하는데 맹수들의 공격을 막는 목자들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끝이 뾰족해서 찌르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양은 잘못 된 길로 가도 은근히 목을 걸어서 인도를 하고 원수는 오면 한 번에 찔러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당시에 이 목자는 양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진 사람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자는 모두 용사여야지만 목양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끔 목자가 모질어보여도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만 좋으면 목회가 안 됩니다. 뭔가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메소포타미아 밧단아람에 가가지고 라반의 집에 가서 양을 치잖습니까? 그런데 삼촌한테 막 대들면서 항의를 하는 장면에 ‘내가 눈을 붙일 겨를이 없이 당신의 가축을 지켰다, 그러다가 맹수가 와서 그것을 움켜 가면 내가 그것을 지키다가 못 지켜서 빼앗기면 내가 물어냈다’ 그렇게 맹수들을 향해서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삯군 목자와 참된 목자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평상시에는 잘 안 나타나는데 참된 목자는 맹수가 다가오면 양들보고 ‘내 뒤로 와라’ 그리고 ‘나를 쓰러뜨리기 전에는 이 양 중의 한 마리라도 못 물어갈 줄 알아라’하면서 물맷돌과 막대기로 싸우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경험이 있잖습니까? 물어 가면 쫓아가서 반쯤 죽이고 아가리를 벌려서 양을 꺼내옵니다. 그런 용맹스러움이 없이는 목자의 사역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라는 사실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사상이 ‘하나님은 우리의 용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는 훌륭한 장면이 ‘전쟁’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전쟁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이 승리한 후에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빼 낸 바 된 이스라엘 백성의 축복됨에 대한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모본을 보여주십니다.
그 장수 누구뇨 주예수 그리스도
만유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불가불 이기시리라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부른 찬송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대장되신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진리의 편에 선 사람들을 위해 친히 싸우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이 두 가지가 시인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동이 만약에 이 두 가지를 잘못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양떼를 따라서 목자의 뒤를 따라오다가 곁길로 나가는 양은 단칼에 찔러 죽이고, 양떼를 해치기 위해서 다가오는 짐승은 목을 걸어서 선하게 인도하고 인간의 목자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도 그런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 놀라운 것입니다. 제가 이 시편 23편은 사실 저에게 있어서 목회에 있어서 인격적인 신앙을 부르짖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먼 길로 갔는데 나쁜 놈 아닙니까? 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영적인 회복도 주고 용서해 주었는데 왜 목자 되신 주님 따라오지 왜 곁길로 가냐구요? 그래서 만약에 목을 걸었다하면 단번에 부러뜨려 기브스라도 하게 만들지 그 나쁜 놈을 ‘이리 오너라’ 연약해서 떠났다구요? 뭐가 연약합니까? 신앙생활 똑바로 안하고 죄를 지어거 그렇게 된 거지, 두들겨 팼으면 목장에는 피 묻은 지팡이와 머리 터진 양들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정말 억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아해야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실 때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제 친구 목사가 있었는데 경상도에 가서 약 7명 모이는 교회에 보따리 싸들고 가서 목회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시간만 되면 동네 깡패 한 놈이 와가지고 ‘야, 예배를 드릴려면 내 배를 드려라’ 꼭 예배 시간에 술 먹고 나타나서 그 날도 ‘야, 전도사 나와 봐, 자식들 말이지 나와 봐, 나와 봐’ 바깥에서 오줌을 싸놓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그래서 그 날도 꾹 참고 예배를 드리고 주기도문 끝나기도 전에 교인들 기도하는데 저벅저벅 걸어가서 앞에 서서 ‘왔다 이 자식아’ 그리고는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후려차기 하면서 반쯤 죽여 놨더니 교회 대문 앞에서 ‘아이구 형님’하면서 무릎을 꿇더랍니다. 그래서 자기 방에 데리고 가서 수건으로 피를 닦아주면서 ‘야, 내가 합기도가 4단이고, 태권도가 4단이다 내가 너 죽였으면 옛날에 죽였을텐데 내가 예수 믿는 사람 아니냐’라고 했더니 ‘잘못했습니다. 형님’ 하더랍니다. ‘너 누구 밑에서 노니? 라고 족보를 좍 읊었더니 대 선배여서 이야기가 안 되었습니다.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믿겠습니다 형님’ ‘다음 주에 나올거야?’ ‘네, 제가 어떻게 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나왔을까요? 안 나왔을까요? 그렇게 해서 나올 것 같으면 난 내일부터 태권도 학원 다닐 것입니다. 도복 입고 설교할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됩니다. 그렇게 안 되니까 이 목회라는 것이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 주먹거리 밖에는 안 되는데 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지팡이를 걸어서 인도하실 만큼 인격적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양이면 느낌이 목에 와서 닿으면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 내가 양떼를 멀리 떠났구나, 그리고 주님이 그 지팡이를 뻗어 내 목에 거시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곧 회개 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어디 가셨는데 아이들과 싸우는데 아이들이 막 때려요. 그런데 저 쪽에서 엄마가 와요. 그러니까 ‘엄마’ 하면서 치마폭에 쌓여서 펑펑 웁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한없이 상처받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뜨려지고 자기의 인격 속에는 가슴 아픈 기억들이 남고 자신의 심령에는 피멍이 들고 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자신의 혼자의 힘으로는 이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처절한 괴로움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의 목에 돌아오라고 걸어주시는 그 지팡이의 느낌을 받으면서 뭘 특별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끄는 대로 돌아와서 양떼들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오고 목자 되신 주님께로 돌아와서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한 자기의 목자로 모시는 삶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이 자기 깐에는 혼자서 살아온 것 같고 그 인생의 산전수전을 혼자 겪어온 것 같지만 그러나 아닙니다. 절대 혼자 살아온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기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붙드셔서 결국은 그 골짜기를 지나 오늘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내 인생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 분이 그 골짜기부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그렇게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우리를 불러내어서 여기까지 데려오신 그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일은 그 분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품 안에서 그 분께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우리가 그 지팡이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분을 떠나지 않고 그 막대기로 우리의 대적들을 물리쳐주신 그 분의 품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이렇게 신앙생활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이유이고 그 분이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해 내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비록 시인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많이 통과했어도 자랑스럽게 고백할 수 있고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으며 이제는 내가 주의 지팡이로 말미암아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며 내가 이제 그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주님이 나의 원수들과 싸우시고 나를 그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건지셔서 주님 찬송하는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인생을 살게 해 달라고 주님 이름으로 바랍니다.
12. 밥상 앞에서 아무는 상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5上)
녹취자: 김경애
밤하늘을 수놓는 찬란한 불꽃놀이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지상에서 ‘탕’ 하고 쏘면 그러면 가느다란 연기를 그리면서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그리고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난 다음에 빨강, 파랑, 초록, 보라, 영롱한 불꽃을 작렬하듯이 토해내고 그리고 다시 실연기를 그리면서 떨어지는 그런 불꽃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말, 글 속에는 이 절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편 23편도 시의 형식을 빌은 일종의 신앙문학이기 때문에 절정이 있어요. 그 절정이 바로 5절과 오늘 그리고 다음 주에 걸쳐서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5절입니다.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목자이신지를 고백하고, 6절에서는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2절에서 공급해주시고 휴식을 주시고 약점을 알면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살게 하시고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힘주심으로 인해서 주님이 목자라는 사실을 찬양했고, 지난주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자기의 목자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5절에서는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잔이 넘친다는 것의 의미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 희열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만으로도 주님을 목자로 모시면서 살아가기에 충분한데 그 위에 더 특별하고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사랑을 부어주셨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데 그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베푸신 것과 그리고 두 번째는 기름을 그 머리에 발라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는 한 가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라고 했는데 저도 옛날에는 그런 적이 있었지만 이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나올 때 사람들이 이 상을 다 잘못 알고 있더라는 것이에요. 한글성경을 잘 읽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아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제가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은 아직도 여기에 나오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의 이 ‘상’을 상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졸업식 때가 되면 개근한 사람, 성적이 우수한 사람, 공부를 못하면 하다못해 청소라도 잘하는 사람, 다 골라내서 봉사상을 주잖아요. 그렇게 해서 상을 줄 때에는 밀실에서 주는 법은 없어요. 그까짓 거 상장과 상품이 문제가 아니고 명예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준단 말이에요. 여러분 중에도 아직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이에요. 그런데 뭐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의 이 상은 그런 상이 아니에요. 히브리말로 ‘슐한’ 이라고 되어있는 단어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밥상이에요. 이것을 번역하자면 밥상이라고 그랬으면 진짜 제대로 된 번역인데 상이 뭐에요? 상이... 오해를 만들어 내잖아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한 상을 베푸시고’ ‘한 밥상을 베푸시고’의 뜻이거든요. 물론 다윗이 예전의 도망 다니던 시절에 배고파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던 떡을 먹기도 한 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후에는 제왕이 되었고 배를 곯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뭐 하나님이 그렇게 밥상을 차려주셨다는 사실도 이해가 안가지만 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밥상을 한번 차려주신 것 때문에 이렇게 감격을 하는가?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것의 의미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동양문화와 성경문화 속에 흐르고 있는 이 밥상 신앙을 좀 이해해야 되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이제부터 잘 설명을 할 테니까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꼭 아주 지체 높은 대갓집이 아니더라도 제 기억에도 납니다. 옛날에 친척집이나 여러 식구들이 모여 사는 집에 가면 한상에 모든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법이 없어요. ‘그것은 대가족이니까 그렇지!’ 물론 그렇지만 그러나 대가족이니까 그때는 집이 컸어요. 그러니까 마루도 크고 안방도 컸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 별로 적절한 설명이 안 돼요. 하여튼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무리 날이 더워도 이 집안의 높은 어른들은 밖에 나와서 밥을 먹는 적이 없어요. 안방에 항상 차리지요. 안방에 차려지고 거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자기 부인도 못가고 자기 정도가 가지요. 반찬도 달라요. 자기를 중심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정도가 거기에 가서 드시죠. 그리고 거기에 상이 있고 그 다음에 이쪽으로 내려와서 곁방이든지 마루에 또 상이 있어요. 거기에는 어머니, 나도 있고 그 다음에 우리 형제들도 있고 삼촌, 고모, 이렇게 모여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고 그리고 저 아래 부엌으로 내려가든지 마당으로 내려가면 멍석을 깔아놓고 거기에는 하인들이 식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어요. 그러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셔요. 그러면 이제 어머니가 올라가시고 그 다음에 내가 가요. 자기 부인은 놔두죠. 말하자면 그렇게 식탁을 옮기는 것이에요.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권이 서양이 아니라 동양문화권이에요. 그래서 심정적으로 우리와 통하는 것이 굉장히 많아요. 우리 옛날에 양반들은 말이죠. 먼 길을 가다가 혹시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상민들하고 함께 남의 집 사랑채에서 꼬부리고 새우잠을 잘 수는 있어요. 그런데 절대로 안하는 것은 무엇이에요?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법은 없어요.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문화하고 상당히 유사한 것이에요. 왜 그렇게 안하느냐하면 그것은 그 나라 사람이나 우리나라 사람이나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냥 밥을 먹고 생명을 보존하는 그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양반이 어떻게 상민과 공동체가 되겠어요? 그들의 소유인데 말이에요.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함께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형제 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족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요즘의 세상에서 이해를 하면 안 돼요. 그때로 돌아가서 이해를 해야지요.
제가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할 때 같이 있던 교수님 가운데 선교 역사를 가르치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언젠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옛날의 중국문화를 모르고 서양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많이 죽었다는 것이에요. 왜 그러느냐하면 이제 중국도 오지로 가면 언어가 문자화 되지 않아서 의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말이 달라서 말이에요. 옛날이야기지요. 초기에 그런 오지로 들어가서 이제 바디 랭귀지로 손짓, 발짓을 하면 의사가 통하게 되어있거든요. 자기가 여기에 예수님이라는 분을 전하러 왔는데 지도를 펴놓고 나는 이렇게 먼데서 왔고 여기서 당신과 함께 살면서 당신들을 섬기고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어떤 사람이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니까 그 사람이 다시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그 다음에는 혼자 결정을 하지 않고 ‘뭐라고, 뭐라고’ 그러니까 그 마을에서 수염이 기다랗게 난 할아버지들이 속속 모이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향수회의 즉 촌장회의가 열린 것이에요. 그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서 말하자면 어른들이 장시간동안 이 이방인을 우리들이 받아주어도 될 것인가 토론을 하는 것이에요.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나오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팔을 벌리면서 끌어안는 것이에요. 우리가 당신을 받아주기로 했으니까 당신 뜻대로 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뭐라고, 뭐라고’ 지시를 하니까 마을 사람 전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가자고 그래서 자기를 데리고 가는데 어디냐 하면 연회장이에요. 연회를 벌인 것이에요. 넓은 공간에서 식탁을 마련한 것이죠. 그런데 동양 사람들은 좀 싫어도 꾹 참는 것이 많아요. 요즘에 와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절대 안 참지만 그래도 참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마음에 안 내켜도 그냥 꾹 참고 그냥 하고 그런 경우가 많은데 서양 사람들은 합리적이잖아요. 예스와 노가 아주 분명한 사람들이라고요. 그런데 식탁을 차렸는데 밥을 준다는 것은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다 호의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들이 나오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구더기나 아니면 이상하게 생긴 도마뱀 같은 것을 볶은 요리들이 나오는 것이에요. 지금도 만주 쪽에 가면 시집, 장가가는 날이면 절대 빠지지 않는 요리가 있는데 뱀 국이에요. 뱀 국……. 뱀을 갈비를 치듯이 툭툭 쳐서 큰솥에 집어넣고 푹 끊이는 것이에요. 그렇게 고아서 밥하고 여러 가지 반찬하고 식탁에 그 국이 꼭 들어가야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무리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준다고 해도 그래도 시집, 장가가는 날은 무엇을 먹어야 해요? 빨리 말해 봐요. 무엇을 먹어야 되요? 국수! 그래서 뭐라고 그래요? ‘언제 국수 먹어?’ 그렇게 물어보는 것은 진짜 국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장가 언제 가느냐 하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혼한 사람에게는 그런 말을 안 해요. ‘언제 국수 먹어?’ 그렇게 물어보지 않는다고요. 그 사람들의 문맥에서는 어때요? ‘너는 그래 이렇게 나이가 먹었는데 언제나 뱀 국을 먹느냐?’ 그럴 것 아니에요? 올봄에 어떻게 뱀 국을 많이 먹어야 될 텐데 걱정이에요. 목회를 하다보니까 별것이 다 걱정이에요. 나이든 사람만 봐도 걱정이에요. 빨리 치워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 그런 것이거든요. 이 사람은 아주 냉랭하게 ‘싫습니다.’ 그랬어요.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전체 연회장의 분위기가 아주 차갑게 식으면서 침묵이 흐르는 것이에요. 그런데 살기가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잖아요. 한쪽에선 갑자기 고함이 터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끌려가서 죽는 것이에요. 그분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그 선교사는 죽는 순간에도 왜 죽는지를 몰랐을 것이래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동양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에요. 같이 살겠다고 그러면 형제이외에 누가 같이 살겠어요? 눈 색깔도 틀리고 머리 색깔도 틀린 인간이 와서 같이 살겠다고 그러니까 의논하다가 우리가 받아주자고 하고 우리는 형제라는 표시로 식탁을 차리는데 그것을 안 먹겠다고 하니까 같이 살고는 싶은데 너희들하고 형제는 아니라고 그러면 스파이지 뭐냐는 것이에요. 그러니 스파이라고 생각하고 죽이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런 사상이 성경 전체 속에 흘러요. 그래서 오늘 내가 밥상신앙을 가르쳐 드릴 테니까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여러분들이 의미가 상당히 살아날 것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바리새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셨던 가장 커다란 비난의 제목이 무엇이었어요? 너희 선생님은 어째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시느냐? 그것은 성경이니까 그렇게 점잖게 쓴 것이고 진짜 몰라서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의 맥락에서 보면 ‘죄인과 세리 같은 인간들하고 너희 선생님이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까 네 선생도 그 수준이구나!’ 그 이야기에요. 유유상종이 아니겠느냐? 너희 선생님이 아무리 근엄한 표정으로 말씀을 가르치신다고 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친다고 하지만 그러나 밥을 누구하고 먹는지 한번 보아라. 누구하고 포도주를 마시는지 보아라. 그것이 비천한 창녀, 기생, 그리고 세리들, 죄인들, 이런 인간들하고 그 일을 하시지 않느냐? 그들과 형제와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다. 너희 선생이 바로 그 인간들하고 한 패거리가 아니냐? 그런 선생의 제자가 된 것이 창피하지 않느냐? 그게 이런 식으로 비꼬는 질문이에요.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더 재미있지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가만히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 아니에요? 아니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시느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다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그게 그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지만 성경에는 아주 익숙한 답변이에요. 왜냐하면 이 식사라는 것이 바로 이렇게 그 식탁을 제공하는 사람과 식탁을 받는 사람, 아니면 함께 식탁을 나누는 사람들끼리 가족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고 형제 됨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한솥밥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같은 구내식당에서 쿠폰을 주고 식사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공동체란 말이에요. 운명공동체란 말이에요. 아무나보고 한솥밥을 먹는다고 말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상을 예수님께서 다 배경으로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내가 한 패거리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줄 형제와 같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그들을 위해서 온 이유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 비참하고 불행한 상황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자기는 아주 화려하고 높고 근엄한 곳에 있으면서 ‘어유 왜 거기서 고생을 해? 이리 나와. 거기 죄악 된 곳에서 그렇게 고생하는 게 아니야! 이리 나와! 착하지 이리 나와!’ 몇 번을 해보다가 ‘그래도 안 나와?’ ‘저 인간들은 우리들하고는 틀린 인간들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요? 낮고 천한 이 죄악 된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이에요. 보좌에 앉아서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다가가신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가톨릭에서는 성찬을 나와서 받잖아요? 우리는 어떻게 해요? 가지고 돌잖아요. 그게 폼으로 말하자면 가톨릭이 훨씬 더 폼이 난다구요. 멀리서부터 나와서 한사람씩 무릎을 꿇고 받아요. 그런데 그게 성경의 정신에 의하면 이 성찬이 사람을 찾아서 내려가는 것이 훨씬 더 복음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란 말이에요.
성경에 보면 이 식사를 나누는 것이 이런 형제 됨의 언약과 관계된 것이 성경에는 굉장히 많이 나와요. 구약에서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구약의 예를 들어보면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오지요?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14년 동안을 뼈 빠지게 일했는데 장가가느라고 14년 동안 품을 팔았어요. 왜? 레아와 라헬이 있었는데 라헬을 너무나 사랑했어요. 라헬은 동생이었어요. 그래서 7년 동안을 뼈 빠지게 일하면서 결국은 그 라헬과 결혼을 할 찰라가 되었는데 이 외삼촌 라반이 장난을 쳤어요. 실컷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해가 뜨고 얼굴을 보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어요. 왜 그랬느냐고 그랬더니 ‘우리 동네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은 없다. 그래서 언니 먼저 시집을 보낸 것이다.’ 진작 말하지……. 그리고 실망을 해서 낙심을 하니까 ‘라헬도 줄 테니까 7년을 더 일해라.’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은품 하나 받느라고 7년을 더 봉사했어요. 원하지도 않는 사은품 끼워 팔기에 14년 청춘을 다 거덜 내고 그리고 이제 작별을 하려고 하는데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가난과 그리고 주렁주렁 딸린 애들 밖에는 없어요. 그때 삼촌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일하는 것은 네가 가져라.’ 그러면서 약조를 맺었는데 6년을 일한 다음에 야곱의 재산이 불어나니까 그 외삼촌 아들들의 안색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까 도망을 가는 것이에요. 도망을 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놈을 죽여 버려야겠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지고 도망간 놈!’ 하고 그러면서 외사촌들이 라반과 함께 말을 휘몰아서 달려오는데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리가 없지요. 주님이 오셔서 ‘절대 야곱에게 손대지 마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라.’ 그리고 엄중하게 경고를 하십니다. 그것을 받고나서 이 라반이 마음을 돌이키고 이제 그에게 화해를 청합니다. ‘야, 인마 가려면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가지……. 그러면 내가 나팔도 불어주고 환송을 해줄 터인데…….’ 물론 다 거짓말이죠. 그러면서 이제 서로 다시는 서로에게 대해서 적대행위를 하지 않기로 작심을 하고 결정을 한 다음에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함께 밥을 끊여서 같이 먹는 것이에요. 식사를 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이 두 사람 사이에 적대관계가 청산되었고 형제라고 하는 언약을 맺는 것이에요.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베드로의 경우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간 후에 실패했는데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실패했지요. 예수님이 그 베드로를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시 불러서 회복시켜주셔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는 그 배경이 요한복음 마지막장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심으로써 많은 양떼를 너에게 맡겨주신다고 말씀하시죠. 어린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시잖아요?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수많은 양떼를 거느리는 목자가 되었을 때에 그것은 사실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지만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그런 마음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모든 제자들을 향한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한 대표로서 이 베드로가 개인적인 영적인 회복을 거기서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가 어디였어요? 새벽인데 어떤 때였어요? 식사하시는 자리였어요. 조반을 드시는 자리였어요. 그리고 식탁을 누가 베푸셨어요? 예수님이 친히 떡을 굽고 불을 피우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에요. 그 식사하신 후에 그 식사자리에서 요한에게 일생 잊을 수 없는 질문, 완전히 실패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으로써 그를 신앙적으로 회복시켜주시는 것이에요. 그렇게 식사를 준비하셨다는 그 의미 자체가 벌써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나는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너희는 아직까지도 내 친구요, 내 형제요, 내 가족이요, 내 자녀라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속내를 그 식사자리를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에요.
더 그림과 같은 기록에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라오디게아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라오디게아 지방에 세워진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였어요. 그게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로마시대 때에 이 라오디게아는 안약의 명산지였어요. 그래서 당시 로마사람들의 속담에는 장님이라도 라오디게아산 안약만 눈에 바르면 눈을 번쩍 뜬다고 하더라.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라오디게아산 안약 그러면 개성 인삼이나 중국의 호랑이표 고약같이 그렇게 대단한 약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러니까 도시 전체가 부유해지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부유한데 그런 영향을 그리스도인도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신앙을 그렇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스스로 부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만 너희들은 벌거벗은 자들이다.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들이라고 그랬어요. 영적으로 볼 때 말이죠. 그리고 너희들이 로마제국 최고의 고약을 만드는 명산지라고 그러는데 너희나 발라라. 너희나 그 약을 발라서 영적인 눈을 좀 떠라! 누구 눈을 고치겠느냐? 너희 눈을 고쳐라. 이게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거든요.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문밖에 계신 것이에요. 교회는 있는데 교회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하면 장엄한 사건이지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린다.’ 예수님이 교회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두드리시는데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거기에서도 밥 먹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럼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회적으로 볼 때에 주님이 밖에 계시고 교회 안에 못 들어오시도록 차단된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인격적으로 그 문을 열어서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주시는 이런 것들이 정말 쉬운 것이겠어요? 개인적으로 이제껏 까지 주님을 문밖에 세워놓은 것 같은 그런 생활을 했지만 진짜 자기의 인격의 문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어서 그 예수님이 자기 속에 오셔서 진짜 자기와 함께 먹고 마시고 하는 이런 관계 속에서 자기를 다스려주시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교회에 나오기도 쉽지 않지만 끌려나오고 싶지 않고 끌려나오는 것은 쉽지만 진심으로 나오는 것은 힘들지 않느냐는 이야기에요. 나와서 출석해주는 것은 쉽지만 진짜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 전체의 주인이 되셔서 자기를 다스려주시는 그런 인생을 살려고 마음을 먹는 것은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상급이 있는데 그게 먹고 마신다는 것이에요. 그게 얼마나 싱거워요. 그렇잖아요? 그렇게 주님이 내 인생에 오셔서 이제 나의 주인 그리고 나의 왕으로서 내 인생을 다스리고 나는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라고 인격적으로 그런 결단을 내리고 나면 세상의 축복들을 주님이 쏟아부어주셔야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기껏해야 ‘우리 밥 먹자.’ 그게 나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가족관계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에요. 생명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살다가 보면 다른 사람에게 물질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너무나 아는 것이 없을 때에는 지식의 도움도 필요하지요. 옳은 일을 위해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주위에서 누가 권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꼭 불법은 안 행하더라도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때에 잘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이 가끔 도와주는 것이 더 축복된 것이에요? 아니면 그 집안에 들어가서 그 집안의 자녀가 되는 것이 더 큰 축복이에요.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예수님이 너희들이 마음의 문을 진심으로 열면 내가 너희에게로 들어가서 나와 너와 같이 함께 먹고 살아가는 관계가 되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주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의미에요. 주님이 그런 생명적인 관계를 우리와 더불어서 누리면서 살아가시겠다는 그런 뜻이라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정도 이야기를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이제야 비로소 ‘아, 시인이 진짜 감격할만하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내 원수의 목전에서’ 라는 말이 ‘레게드쪼레이’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에요. ‘나의 많은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게 한 상을 하나님이 베푸셨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당연하잖아요. 시인의 생각을 가만히 보면 이 다윗처럼 인복이 없는 사람도 없어요. 진짜 지지리 없어요. 어려서는 부모를 썩 잘 만났다고 보기 힘들지요. 아버지가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을 안했으니까 말이에요. 형들은 또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이었지요. 그리고 또 부인이라고 장가를 갔는데 이것은 한때 사랑은 했는지 모르지만 자기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 부부사이에 어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이 안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또 누군가 진짜 뜨겁게 한 여자를 사랑해요. 하필이면 벌써 시집간 여자에요. 그런데다가 자식이라고 주렁주렁 낳아놨는데 이 인간들이 연구대상이에요. 아버지 왕위를 빼앗겠다고 칼을 빼어들지 않나?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는 고아가 되는데 말이에요. 그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겠다는 놈이 없나? 또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 하나는 말이죠. 여자를 겁탈했는데 그게 자기 동생이에요. 그냥 아버지 눈에 피눈물이 나지 않겠어요? 여태까지 얘기한 사건 중에 하나만 일어났어도 여러분은 피눈물이 났을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윗보다는 훨씬 더 인복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사는 것이에요. 그렇게 가슴 아픈 인생을 사는 동안에 더군다나 또 누구에요? 사울이라는 인간은 말이죠. 자기를 죽이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데 그것을 죽이겠다고 덤벼드니까 자기 자식 압살롬하고 똑같은 인간이란 말이죠. 아버지를 죽이고 고아가 되어서라도 왕위를 차지하겠다는 인간이나 사위를 죽여서 자기 딸을 과부를 만들어도 왕위를 보전하겠다는 인간이나 똑같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다윗의 생애 전체가 그 얼마나 수많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있겠어요? 그렇죠? 원래 정치판, 권력판이라는 것이 더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는 생애를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잘 보면 우리의 신앙의 경험도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친구도 많지만 대적들도 참 많아요. 그런 대적들에게 둘러싸여서 그 고통으로 가득한 생애를 살아온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 감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수많은 원수들이 보는 그 앞에서 하나님이 상을 차려주셨다는 것이에요. 그 보는 면전에서 말이에요.
제가 한 7년 전에 히브리 성경으로 이 시편을 읽어 내려가다가 이 23편에 와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성경을 머리에 이고 방안을 뱅글뱅글 돌 정도로 그렇게 감격했어요. 그렇게 나를 감격시킨 단어가 무엇이냐 하면 ‘베푸시고’ 입니다. 이게 우리나라에는 ‘베푸시고’ 그렇게 되어있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아라크’ 라고 되어있어요. 동사인데 ‘아라크’ 라는 동사에요. 이 동사가 원래 어디에 쓰이는 것이냐 하면 성경의 용례가 싸움에 나갈 때 군인들이 많이 있는데 그 군인들을 쭉 정돈시킬 때 줄을 세우고 항오를 늘어뜨리고 그럴 때 그때에 사용되는 단어에요. 뭔가 이렇게 쭉 늘어놓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식탁은 어떤 식탁이에요? 그냥 간단한 식탁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식탁이에요. 그런 식탁을 차리는 엄마의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잠시 후에 그 식탁을 받으러오는 그 사람이 자기 집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진짜 중요한 사람은 3일전,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어쩌다가 딱 한 끼를 대접하려고 말이지요. 주님까지 부를 거는 없고 하여튼 우리들이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제 지금도 생각이 나요.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잘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너나없이 가나했잖아요. 어느 날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리고 그냥 공부가 끝나고 나면 소망이 뭐냐 하면 도시락을 안 싸갈 때니까 한 4학년쯤 되었나? 소망이 뭐냐 하면 빨리 집에 가서 밥을 먹는 것이에요.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요. 할머니! 불러도 아무도 없어요. 밥을 먹고 싶은데 이렇게 보니까 찬장을 막 열어보는 것이에요. 열어보니까 이빨 빠진 사기 사발에 밥이 2/3쯤 담겨있는데 보리쌀이 섞인 밥이고... 밥을 먹어야하니까 반찬을 보니까 김치도 없어요. 하나가 있어서 보니까 고추장이에요. 그래도 상은 펴야 되잖아요. 상을 꺼냈더니 상 귀퉁이가 무엇에 맞았는지 깨지고 거기에 때가 새카맣게 끼었어요. 그것을 놓고 이것을 먹어야하는데 물이 어디 있어요? 정수기? 정수기가 그때 어디 있어요? 밖에 나가면 펌프가 있잖아요. 펌프를 폭폭 한참 푸면 시원한 물이 나오잖아요? 그것을 받아서 놓고 숟가락 하나 딱 꽂고 젓가락도 필요 없어요. 고추장밖에 없으니까 고추장을 갖다놓고 투덜거릴 것도 없지요. 다들 가난할 때니까 그것 한 숟갈을 떠먹고 숟갈 뒤편으로 고추장을 찍어서 빠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쩜 그렇게 맛있어요. 국물까지 다 마셨는데 밥이 더 있어야지요? 없잖아요. 그것도 식탁이에요? 아니에요? 그것도 식탁은 식탁이지요. 밥이 올라가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식탁은 그런 식탁이 아니에요.
여러분 자매들이 이제 시집을 가면 신랑을 데리고 처음 집을 방문하잖아요? 집을 방문하는데 ‘엄마 그 사람하고 내일 갈 거야?’ ‘그래 와라.’ ‘우리 밥 안 먹고 갈게.’ ‘그래 와라.’ 그리고 갔는데 대낮인데도 온 식구가 잠만 자는 것이에요. ‘엄마 나 왔어.’ ‘그래 왔니?’ ‘밥 안 먹었는데 우리 김 서방도 밥 안 먹었어.’ ‘그래 잠깐 기다려 금방 차려주마.’ 들고 왔는데 그것이에요. 쪼개진 소반에 이빨 빠진 사기 사발에 그 다음에 반쯤 먹다 남은 밥에 제삿밥처럼 숟갈 꽂아서 찬물 부어서 고추장 그것도 깨끗이 떠먹은 것이 아니라 지저분하게 떠먹은 고추장을 갖다놓고 ‘먹어라!’ 그러면 아마 요즘 자매들은 웬만하면 뒤집어엎고 나올 것이에요. 그것은 밥을 못 먹어서가 아니라 자기 신랑을 얼마나 떡같이 생각했으면 그렇게 상을 차려놓을 수가 있겠어요? 하루 전부터 상을 준비해서 암탉이라도 잡아 놓아야지요. 그것은 먹어서가 맛이 아니에요. 그렇지요? 자매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잖아요? 그래도 엎지는 마요.
전라도 쪽이 먹는 것은 상당히 강하잖아요? 그만큼 옛날에 잘살았다는 것이죠. 그쪽으로 집회를 갔는데 강사니까 한정식 집으로 데리고 가겠대요. 좋아하니까 ‘가자.’ 그랬어요. 그리고 갔어요. 그런데 나중에 돈을 낼 때 보니까 나는 어마어마한 곳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조금 비싸기는 했는데 뭐 그렇게 기절할 정도는 아니에요. 갔는데 얼마나 많이 주는지 다 먹다가 꽉 찼어요. 얼마나 남았느냐고 하니까 1/3이 진척된 것이래요. 그래서 나중에는 항복을 했는데 그냥 계속 나오게 내버려두면서 하도 궁금해서 그 그릇의 수를 세었어요. 8명이 앉아서 먹었는데 4명이 한상씩 먹었는데 저쪽은 신경을 안 쓰고 이쪽만 신경 썼는데 이런 것을 하나, 요것도 하나, 숟가락도 하나라고 치고 개수가 몇 개인가 세었더니 200개 가까이 되요. 4명이 밥을 먹는데 그래요. 그게 순서적으로 서너 개가 나오고 또 가지고 가고 또 서너 개 나오고 그러니까 그렇지 한꺼번에 벌려놓으면 식탁에다가 놓을 수가 없어요. 200개를 벌려놓으면 식탁 저 끝까지 놓게 될 거에요.
그런 식탁을 이 시인이 받은 것이에요. 이 식탁은 그냥 식탁이 아니라 잔칫상의 식탁이에요. 그런 식탁일 경우에는 어때요. 거기에 혼자 앉아서 아니 혼자가 아니죠. 주님과 함께 겸상을 한다고 보자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혼자 할 수 있겠느냐고요. 그것을 누가 옆에서 두 사람이 깨끗하고 예쁜 한복을 입고 서서 그래서 시중을 들어주어야 해요. 왜? 저쪽 반찬이 사정거리 바깥으로 벗어나잖아요. 손을 아무리 뻗어도 사정거리 안에 안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 ‘식탁’ 이라는 의미를 이 ‘아라크’라는 ‘베푸시고’라는 동사가 말해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것을 이고 방안을 뱅글뱅글 돌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요. 얼마나 놀라워요.
시인이 이렇게 하고 보니까 ‘아! 그 정도라면 정말 감격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또 뒤집어 보자고요. 이것이 진짜 맞는 이야기인지 말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도 광야에서 무엇을 먹었지요? 만나를 먹었어요. 그것은 육신을 위한 음식이었지요. 누가 주신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직접 손수 내려주신 것이었거든요. 우리들이 오늘날 월급을 타가지고 양식을 사다먹어도 우리들이 말할 때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만나는 그런 개념으로가 아니라 진짜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런데 시인이 그런 경험이 있느냐고요. 그런 경험은 없어요. 그런데 오늘 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와 희열에 가득한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나의 많은 원수들이 보는 그 면전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커다란 잔치밥상을 벌여놓으셨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하나의 비유지요. 비유. 그렇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대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공급되었던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과 행복 그것을 이런 식으로 비유로 표현한 것이란 말이죠.
여러분도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잖아요. 선물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닌데 그 선물에 담긴 마음이 너무나 감사해서 복받쳐 오르는 기쁨이나 행복이 있었잖아요. 그렇죠?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잖아요? 제가 싫어하는 음식중의 하나가 계란이에요.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데 즐겨먹지를 않아요. 그런데 언젠가 어느 부흥회로 어디를 갔는데 그때는 막 소리를 지르면서 설교를 했어요. 처음부터 악을 쓰면서 시작해서 악을 쓰면서 끝이 났는데 며칠만 집회를 하게 되면 목이 터져가서 그렁그렁했어요. 그런데 누가 계란 하나를 들고 왔어요. 대개 할머니들이 그러시잖아요. 들고 와서 이 계란을 드시라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먹었어요. 날계란은 더 싫어해요. 보시는 앞에서 깨뜨려 먹었거든요. 그 계란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분이 장시간동안 설교를 들으시면서 그 그렁그렁한 쉰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 안타까운 마음이 그 계란에 표현되어 있단 말이에요.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시골교회를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헌금을 했더래요. 교인이 7명인가 모이는 교회가 헌금이 얼마나 나왔겠어요. 겨울철에 유리창을 못해달아서 바람이 막 황소바람이 들어오는데 종이로 싸서 헌금을 했더래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 앞에 만 배나 축복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나중에 까보니까 10환짜리 4개 그러니까 1원짜리 4개를 종이로 말아서 냈더래요. 목사님 말씀이 만 배나 축복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래봐야 4만원밖에 안되는데……. 워낙 돈이 없으니까 10환짜리 4개를 신문지에 싸서 그렇게 낸 것이에요. 그런 마음이 전해지는 것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탁이 뭐냐? 반찬이 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 보여주셨던 인격적이고 영적인 관계에요. 그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을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에게 보여주셨고 그랬기 때문에 이 다윗은 그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에서 오는 교제, 거기로부터 비롯되는 놀라운 사랑을 받으면서 그 힘으로 그 수많은 원수들로부터 받은 수모와 아픔들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 식탁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원수들에게…….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곤고하고 시련이 많이 겹치면 ‘아! 진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이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런 것을 보여주시면 우리들이 즉시 회개하게 되요. ‘아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있는데 내가 그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살았구나!’ 아니면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그런 사랑을 내가 도외시하면서 살았구나!’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오는 힘을 공급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우리들이 갖게 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시인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희열, 그 견딜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의 근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로서 자기를 양인데도 그냥 양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족처럼 생각하시고 자기의 친구, 자기의 자녀처럼 생각하시면서 자기를 그렇게 대우해주시는 것을 보니까 마치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나 밖에는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그렇게 감격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원수들앞에서 보여주셨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격하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솟아오르는 이 기쁨과 감격을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에요.
실화에요. 실화인데 어느 의사가 칼럼을 썼는데 수유리에서 병원을 하는 어느 의사인데 새벽에 어떤 남자들이 쓰러진 사람을 하나 싣고 병원에 왔답니다. 보니까 중년 남자인데 쓰러졌어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고 그랬더니 그냥 장사 집에서 같이 있다가 갑자기 툭 쓰러지더니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고 그러더래요. 그런데 진찰을 해보니까 이미 죽은 것이에요. 그래서 쇼크사라고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그러고 빨리 가족들에게 연락하라고 그러고 냉장실에 넣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조금 있다가 아침이 되니까 난리가 나지 않았겠어요? 생때같은 남편이 문상 간다고 가서는 죽었다고 연락이 오고 그러니까 가족들이 새카맣게 달려왔고 난리가 난 것이지요.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시체를 보여 달라고 그래서 꺼내는데 자기가 의사생활을 그렇게 오래했는데 이렇게 이상하게 죽은 시체는 처음 보았대요. 대개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아이들이 손을 오그리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이렇게 죽잖아요? 영화 같은데서 보면 사람이 죽었다는 표시로 손만 보여주면서 이러면 죽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 손은 이렇게 하고 죽었고 이 손은 꽉 쥐고 죽었더래요. 그래서 어떻게 저렇게 죽을 수 있을까? 의사야 뭐 그 사람하고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식구들은 막 통곡하고 우는데 이 의사는 궁금한 것이에요. 왜 저러고 죽었을까? 도대체 저 손에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폈는데 화투 2장이 떨어지더래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두 개가 펴진 것이에요. 의사가 자기도 모르게 ‘삼팔광땡이네!’ 그제야 왜 죽었는지 감이 잡히는 것이에요. 그 사람들이 말은 안하는데 그냥 장사 집에서 그냥 문상하다가 죽었다고 그랬는데 문상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장사 집에 가서 화투를 친 것이에요. 계속 화투를 친 것이에요. 저는 민화투밖에 못 치는데 여러분들은 상당히 그쪽 방면으로 식견이 있으신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물어보았어요. 그분한테 어디를 보니까 칼럼에 화투를 치다가 삼팔이 나오고 죽었다는데 그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게 뭐냐 하면 화투 중에 그런 것이 있대요. 두 장 가지고 승부를 내는 것이 있대요. 일등서부터 쭉 랭킹이 있는데 그중에서 그게 최고 높은 삼팔광땡이래요. 그래서 그것은 돈을 댔으면 삼팔광땡이 딱 나오면 그 사람이 이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약정하기에 따라 다른데 돈을 댄 것의 세배 내지 많으면 다섯 배를 자기가 낸 돈의 세배 내지 다섯 배를 더 내놓아야한대요. 배팅한 돈에다가 말이에요. 여기에 백만 원이 올라가 있으면 삼팔광땡을 딱 쥐었으면 삼백만원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밤새도록 뭔지 모르지만 화투를 치다가 다 잃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벽에 기운도 없어지는데 보니까 삼팔광땡이에요. ‘너 뭐 나왔냐?’ ‘나 삼 삼 삼 …….’ 그러다가 죽은 것이에요.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것은 딱 쥐고 죽는 것이에요.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 화투 두 장’ 그러면서 꽉 쥐고 죽은 것이에요. 나는 참 걱정이 그것이에요. 걔네들이 언젠가는 자라서 ‘엄마 우리 아빠 어떻게 죽었어?’ 그렇게 물어볼 텐데 그때 뭐라고 대답할 것이에요? ‘너희 아빠는 동양화 공부를 하다가 죽었단다.’ ‘화투 치다가 삼팔광땡 나오는 바람에 죽었단다. 얘들아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꼭 그 삼팔광땡에게 복수를 하고 죽어라.’
그런데 말이죠. 가만히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면서 그렇게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에요. 그렇죠? 살 때는 그렇게 살았어도 죽을 때는 좀 더 멋있게 죽고 싶잖아요? 하도 못해 정 죽을 일이 없으면 회사를 위해 순직을 하든지 아니면 건널목에서 다치는 아이를 밀어내고 대신 죽었다든지 그러면 잘하면 몇 년 후에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라도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죽은 것을 보고 우리는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에 화투 두 장을 들고 ‘삼팔, 삼팔’ 하다가 죽은 놈이나 땅문서 두 장 들고 ‘내 땅, 네 땅’ 하다가 ‘땅’ 하고 죽은 사람이나 무슨 졸업장 몇 개를 들고 ‘내가 누군데...’ 그러면서 죽은 사람이나 하늘 높은 곳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차이가 나겠느냐는 것이에요. 무슨 차이가 나겠어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에요. 애들이 싸우는 이유도 다양하잖아요. 어렸을 때는 딸랑이 가지고 울고불고 막 싸워요. 그런데 조금 더 크고 나면 구슬치기 하다가 싸워요. 또 딱지치기 하다가 싸워요. 요즘은 스티커 가지고 싸워요.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어떻게 되요? 컴퓨터에 매달려서 자기가 게임을 한다고 마우스를 붙들고 코피 터지게 싸워요. 여러분들이 볼 때 그것이 틀리냐고요. 그 수준이 다 그 수준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 다 그런 방식이에요. 여러 가지로 가장을 하고 여러 가지로 포장은 되어 있지만 결국은 궁극적인 핵심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결국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요.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고요. 모르기 때문에 마치 화투 두 장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다가 쇼크사하고, 그런 마음으로 그저 재산을 모으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미친 듯이 몰두하면서 살다가 오늘날 죽는 것이에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여러분들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정말 풍족한 경제생활, 많은 돈, 높은 지위, 넓은 집, 그리고 인기 좋은 땅 덩이 그런 것에 여러분들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에요. 시인을 보세요. 시인이 후에는 한나라의 제왕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뭐가 있었습니까? 결핍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았어요. 사랑하는 부모도, 사랑하는 동기간도, 그리고 자기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여인도 없었어요. 아버지를 깊이 존경하는 자식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랑하면서 살아야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의 가슴에 칼을 꽂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 시인이 ‘내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이 내게 부어주시는 이 은혜가 나로서는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가슴에 가득 찹니다.’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비밀이 무엇이냐는 것이에요. 정말 이 세상의 물질이나 아니면 재산이나 그런 것들이냐는 것이에요.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을 뵈옵고 그 주님으로부터 부어지는 매우 특별한 사랑...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간절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오늘 시인을 감격시키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는 흔히 이 결핍, 그리고 고통스러운 환경,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어떤 자기의 사랑을 몰라주는 상처 주는 행동,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가 상처로 가득한 인생을 살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게 아니라고요. 상처로 말하자면 다윗 같은 사람이 없어요. 정말 그의 생애를 다시 살겠느냐고 하면 나는 절대 아니에요. 사실 솔직히 말해서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참 진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다 자기 인생이 매워 보이는 법이에요. ‘저 사람은 낫겠지!’ 겉만 보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제가 젊은 나이에 대학의 선생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까 신학교 동창들이 몇 사람이 찾아왔어요. 너무 부러워하는 것이에요. 자기는 지금 전도사생활을 하면서 간신히 밥이나 먹을까 말까하는데 자기 친구는 학교 교수라고 교수실에 앉아서 그러고 있으니 정말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어요. 그때마다 ‘참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나는 말이죠. 대학에 젊은 나이에 교수도 들어가서 첫 번째 대학에서 4년을 있었는데 그 4년 동안 흘린 눈물이 개척교회에서 4년 동안 흘린 눈물의 3배가 넘어요. 왜? 물론 거기서 내가 흘리는 눈물은 자기가 배가 고파서 흘리는 눈물이나 교회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고 서러워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누구나 다 상처가 있는 것이에요. 요즘도 그래요.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온 후배가 몇 사람들이 찾아왔었는데 엊그제도 와서 그래요. ‘목사님! 얼마나 행복하세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진짜 내가 행복해 보이냐?’ 정말 그렇대요. 부럽대요. 물론 행복하지요. 뭐 할 일없어서 이리저리 빙빙 도는 그런 사람들보다야 행복하지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니까 말이죠.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아요. 너무 아파요. 주일날 나타나서 설교나 하는 것 같은데 그 설교가 일주일 내내 살아가는 통증에서 나올 때 그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에요. 너무 아파요.
(찬양)
걱정과 슬픔 어디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다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옛날에 544장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것도 옛날 찬송이에요. ‘눈물흘림을 며칠 더 당하고 행할 길 다 가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실 때 영광중에 나아가리.’ 아파요. 그런데 나만 아프겠어요? 아니에요. 내가 나 같은 목회자 밑에서 목회를 받는 여러분과 같은 양떼가 되었어도 또 나도 아팠을 것이에요. 다 그런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픔과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다 있지만 그것밖에 없는 사람들은 마음 전체가 가시로 가득한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격의 속에 말이죠. 가시나무가 가득한 사람처럼 때로는 우리보다도 더 아프고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의 인격 안에서 어떻게 좀 쉼을 얻을까하고 새처럼 날아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하지만 잠사 앉았다가는 그 가시에 더 많이 찔려서 피를 흘리면서 날아가요. 그런 것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상처가 말아도 말이죠. 상처가 많고 괴로움이 많아도 상처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살면 그 상처와 고통이 그 가시로 남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 남의 아픔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고통 속에서 찾은 그 참된 평안이기 때문에 그 평안을 지키기 위해서 더 간절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 오늘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바꿔야 되요. 상처와 고통이 여러분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상처보다 그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 고통보다도 더 뛰어난 하나님의 은혜, 오늘 이 시인이 ‘원수들이 보는 그 면전에서 나에게 이 큰 상을 베풀어주심으로써 내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내게도 주님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라는 이 놀라운 사랑과 교제의 감격을 우리들이 지니고 살면 우리들이 상처와 아픔이 있어도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꽃을 참 좋아하거든요. 사람은 못생긴 사람도 좋아하지만 저는 꽃은 예쁜 꽃을 좋아해요. 이렇게 해서 ‘흠’ 하고 냄새를 맡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향기가 인간의 코를 즐겁게 하려고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해충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발산해내는 자기 방어용 향기에요. 봐요. 고통은 그런 것들을 오히려 만들어 내주는 것이에요. 그 수많은 시련과 상처와 아픔이 있어도 그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거기로부터 부어지는 특별한 은혜가 있으면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이러한 교제의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좌절을 경험하고 그리고 비참하게 삶의 희망이 꺾여서 자신의 인생을 내동댕이치는 자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들이 몇 년 동안이 이 사회에서 보아왔어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누군가로부터 받는 사랑의 기쁨,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진실한 사랑의 즐거움을 가슴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죽는 법이 없어요. 왜? 그것이 삶의 희망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이런 완전한 사랑, 원수들이 보는 목전에서 잔치밥상을 베풀어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불행한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상처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에요.
시인은 하나님이 차려주는 물리적인 밥상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이 시인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고 비탄의 계곡을 지나고 슬픔의 빈 들을 지나고 나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어야하는 이 고통스러운 광야와 같은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지나면서 자기의 심장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들의 아우성속에서 산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차려주시는 이 진리의 식탁이에요. 풍성한 식탁이에요. 그것을 맛본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서 이 모질고 고통스러운 이 원수들로 가득 에워싸인 이 세상을 노래하면서 살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한 것이에요. 우리들이 몸이 너무 쇠약해질 때에는 진짜 한 끼만 누가 잘 대접해주어도 원기가 회복되어요. 혈색이 달라지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한 끼가 중요하다고요. 인생을 살다가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분이 있어요. 인생을 살다가 완전히 막장까지 내려왔어요. ‘이제는 인생의 마지막이다. 아, 정말 살아야할 희망이 없다.’ 그러다가 어떻게 누구 손에 이끌려서 교회에 나와요. 그래서 딱 한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껏 까지 먹어보지 못했던 말씀의 성대한 식탁을 대하면서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말씀을 퍼먹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자신으로 하여금 도저히 인생을 살 수 없게 만들었던 그 고통스럽고 괴로운 이 마음들이 빠져나가고 그리고 그 잠시 동안에 퍼부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에게 살 희망을 주는 것이에요. 이 세상 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고요. 세상 속에는 그런 고통과 이 영혼의 메마름을 잠시 잊어버리게 만들어주는 마취제들은 많이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의 굶주리고 핍절해서 쓰러질 것 같은 우리의 영혼들, 상처로 가득한 인생을 치료해서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인생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제공해주는 것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에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말씀의 식탁 앞에서 그 하나님의 진리를 먹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충만한 인격적이고 신령한 사랑, 그것을 경험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에요.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인함이로다.
우리는 앞으로도 인생을 살되 미래에는 뭔가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인생을 살면 안 돼요. 죽음의 위협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달려와요. 내가 사랑하고 정을 쏟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에 상처의 칼을 꽂고 돌아서요. 인생살이가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어려운 날들도 있으리라는 것은 우리들이 이미 계산에 넣은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이나 상처나 슬픔을 보면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아니라 상처와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이 인격적인 놀라운 사랑,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이런 사랑, 이 시인이 오늘 지금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인격적이고 신령한 사랑, 그런 것들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사는 것이에요.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다해서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행복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세상은 마치 바닷물과 같아서 아무리 목말라도 그것을 떠먹고는 살수가 없어요. 그 위에 떠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속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세상과 함께 있으나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을 떠날 수는 없으나 그러나 또 세상 안에 있는 자들은 아니에요. 세상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에게는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해요. 신령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쏟아지는 세계,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가 필요해요. 그리고 이런 놀라운 사랑들은 여러분이 모르고 있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모두 보여준 사랑의 세계에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인간을 상처와 죄와 슬픔 속에서 고통을 되씹으면서 살아야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 그리스도 예수의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지상의 생애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죄인들을 위해서,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등지고 원수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서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의 몸을 값없이 대속 제물로 주셔서 생명주고 우리를 구하시려고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메마른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잠시 마취시킬 수 있는 것은 있지만 여러분들의 영혼에 진정하고 참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요. 오로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식탁, 죄인중의 괴수와 같은 쓸모없는 인간들을 향해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그 화려한 식탁을 대하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고 거기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왜 그 좋은 사랑의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을 불러주시는가 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마음 전부 속에 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리고 이제는 내가 잠시 사는 이 인생이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서 숨 쉬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만족이 되듯이 내 인생이 하나님께 만족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러한 사랑을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다윗이 어떠했기에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희열과 감격 속에서 수많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형통한 삶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즐거운 인생 때문이었습니까? 수많은 친구들 때문이었습니까? 많은 물질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었어요. 인격적으로 승복했기 때문이에요. 억지로 주님을 믿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내 온 인격으로 승복하고 ‘내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만이 내 인생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것을 고백했기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벅찬 희열, 가슴이 벅찬 감격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목자로서 나의 심정을 짜내는 심정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합니다. 진실한 신자……. 모든 허위와 가식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적당하게 살려고 하는 한 발을 교회에 한 발을 세상에 두고 누가 자기의 인생에 유익을 줄까? 언제든지 한쪽을 배반할 수 있다는 식의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신앙생활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어요. 교회를 떠나라고요. 세상으로 가요. 그리고 온몸으로 체험하라고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라는 것이에요. 진실한 신자. 비록 허물도 많고 죄 가운데 살아온 날도 많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받은 아픔과 생채기도 많지만 그러나
(찬양)
치료하시는 주의 은혜 임하네.
그랬으니까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것이에요. 그렇게 살아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기고 주님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그 의도를 구현하지 못하고 불행 중에 가시로 가득한 삶을 살다가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이 그런 인간들을 불러 모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고치게 하시려고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라도 오히려 내게 부어주시는 이 사랑과 은혜가 감당할 수 없이 놀랍습니다.’ 하는 그런 고백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여기에 불러모아주신 것이에요. 이것은 이렇게 가슴이 터지는 것과 같은 행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값지고 소중한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을 다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에요.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이전에는 누구의 강요나 억지에 못 이겨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런 옛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에요. 정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입속에 넣어준 수천마디의 아주 아름답고 현란한 고백보다는 투박하고 깨어진 질그릇과 같은 고백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영혼에서 우러나온 여러분들의 영혼의 피와 눈물이 묻은 진실한 고백, 그 투박한 고백 하나가 하나님의 마음에 진정한 제사가 되는 것이에요. 오늘 이 시간에도 고백을 해보라고요. ‘하나님, 이제까지는 주님만 저 없이 사실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이제 저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가장 커다란 즐거움은 주님입니다.’ 오늘 이 시인에게 주셨던 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희열과 행복을 내게도 주십사하고 인격적으로 주님께 간절히 고백하는 마음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있기는 있습니까? 억누를 수 없는 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의 근원은 어디에서 옵니까?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목자 되신 그분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이 감격했던 것처럼 그 은혜로운 말씀의 식탁 앞에서 마음껏 먹고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생의 행복을 고백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격적으로 깊이 결단하고 이제는 주님의 목양의 그늘아래에서만 살겠노라고 고백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3. 말할 수 없는 기쁨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녹취자 : 김세나
이제 여러분들이 선택을 해야 될 차례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그 풍성한 식탁을 받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거워하면서 인생을 사느냐. 아니면 옛날의 누군가로부터 받은 그 가슴 아픈 상처들을 부여안고 고통을 곱씹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원망하고 한을 품은 삶을 살다가 눈을 부릅뜨고 인생을 마칠 것인가. 이는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는 안된다 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전자를 택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상처와 슬픔이 많은 비탄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는 상처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그 풍성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를 상을 베푸셔서 특별한 관계임을 보여주시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일생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시련을 딛고 오히려 그 시련과 상처와 고통을 인해서 오늘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두 번째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이유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이라는 그 말씀입니다.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을 바른다고 하는 이 말은 여자들이 화장을 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예식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중요한 종이 세 종류가 있었는데 첫째는 선지자, 왕, 제사장 이렇게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이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계시의 전달자요. 제사장은 죄를 지고 어찌할 바 모르는 비참한 인생들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래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신앙이 있어야 했고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과 지혜, 권능, 그리고 지도력,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 이런 것들이 있어야 했던 거죠. 그런 것들을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름을 부으시는 사건이었어요. 기름을 부으시는 사건. 구약시대에는 이 성령님이 그런 기름 부음을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 속에 오셔서 강하게 함께 하셔서 특출한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신 거죠.
오늘 이 시를 기록하고 있는 다윗은 일평생 세 번의 기름부음을 경험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마 다윗의 마음에 잊혀 지지 않는 기름부음의 사건은 처음 이새의 집에 아들로 있을 때 선지자 사무엘이 와서 그를 사울을 이어 왕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주면서 기름을 부었던 그 사건, 그것이 아마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서 어린 소년 다윗을 발견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충만하게 이 어린 소년 다윗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는 매우 특별한 생애를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한번 주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해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성령께서 오시고 그 성령이 떠나가지 않으시지만,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오셔서 자기가 원하시는 일을 하시다가는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떠나가시기도 했어요. 다윗이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의 신령한 권능으로 충만하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던 바로 그 때 즈음에 다윗보다 먼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되었던 사울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사울에게 임하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마음에 합하지 않으니까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이미 주셨던 성령을 거두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악신이 그에게 임해서 귀신들린 사람처럼 변해버렸다고 하는 것이죠. 예전에 사울이 가졌던 놀라운 지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 탁월한 지도력,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 함께 거두어 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다윗이 오늘 여기에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라고 할 때에 다윗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자신이 왕으로 부름을 받으면서 기름 부음을 받았던 때를 추억하셨을 것입니다. 그 충만한 성령의 능력의 부으심과 그 후에 생겨나게 된 자신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면서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을 생각을 하니까 내가 너무나 기뻐서 그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기쁨을 내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다윗을 비롯해서 이러한 기름부음을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의 사건을 통해서 큰 권능이나 능력과 지혜 이런 것들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기름부음의 더 놀라운 진수는, 이 기름부음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이 임하는 것을 통해서 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경험하게 되는 매우 특별한 영적인 관계,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 이런 것이 오히려 중요한 거라 이야기죠.
성경을 읽을 때마다 다윗만큼 하나님을 풍부하게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는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 3천년 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우리보다 3천년을 앞서 살았던 인물이 하나님의 충만하고 신령한 은혜를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수많은 성품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 시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가운데 거의 반 가까이 그 다윗의 작품입니다. 이 시편은 객관적인 하나님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노래하고 고백한 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문학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에 대해서 아주 잘 알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러한 훌륭한 자료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 시편 속에서 그러한 자신의 경험을 충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다윗의 시가 성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신앙의 경험이 기록된 시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다윗의 경험이 기록된 이 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악기를 잘 다루는 그러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그 가락에 맞혀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잘 지을 수 있는 시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 그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참되고 진실한 인격적인 만남,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풍부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노래할 수밖에 없었고 그 노래에 맞는 시를 쓸 수 밖에 없었어요. 그것은 하나의 창작 활동이었다고 하기 보다는 신앙고백을 위한 활동이었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못생긴 인간 하나를 사랑해도 졸지에 시인이 되는 법인데,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졌는데 밤새워서 그 하나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던 마음이 없고 가슴에 벅찬 이 하나님의 감격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간절함이 없다면 그게 어떻게 정상적인 사랑일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이 시인이 지은 다른 시에서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찬송)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위에 주는
시인은 하늘 가득한 하나님의 인자를 보았어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까 하늘에 가득차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리고 이 궁창, 궁창은 특별히 파란 하늘을 의미해요. 여기에 이 파란 하늘에 가득찬 것이 있는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에요. 진리라고 하는 말이 히브리말로 에메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오히려 신실함이라고 번역되어야지 맞습니다. 에메트, 이것은 faithfulness 이죠. 그래서 신실함. 믿을만함. 그래서 시인이 이 파란 하늘을 보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하늘에 가득한 거예요. 이런 것을 시인이 경험한 거죠.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뭐냐 하면 성령 체험이에요. 성령 체험.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교회에 보면 모범생이 있어요. 하라는 대로 하는 모범생. 성경 공부 하라면 꼬박꼬박 하고 말이죠.
여러분 교회 등록하고 새가족반 안 하시는 분 있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오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자수해서 광명 찾아요. 빨리 들어가요. 속히 들어가요. 가서 새가족반 하라고 하면 새가족반 하고, 복음반 하라고 하면 복음반 하고. 외우라 하면 외우고 설교 시간에도 열심히 듣고, 그래서 이제 성경 지식은 많이 배웠는데 왠지 이렇게 신앙에 있어서 그냥 그러한 감격이 없는 것, 지식은 있는데 지식이 뭔가 이렇게 살아서 역사하는 지식이 안 돼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뭐냐 하면 성령의 체험의 결핍이에요. 이 성령의 체험은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게 만들어줘요. 그리고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해 주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겨우 들을 수 있었던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실제로 맛보게 해주는 힘이 거기 있다 이거죠.
그런데 이제 다윗이 이것을 항상 유지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에요. 그런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의 사건을 통해서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 기름부음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주의 성신이 자기 안에 부어진 이 놀라운 그 은혜를 잃어 버릴 것 같은 그러한 위기를 느끼게 된 거예요. 그때 지은 뼈아픈 시가 시편 51편이에요. 그래서 그 시편 51편에서 그는 뭘 이야기 하냐 하면 이러한 이야기를 해요.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나를 주의 목전에서 쫓아내지 마옵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쫓아내는 것과 주의 성신을 거두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에요. 히브리 시의 작법 가운데 평행법이라는 것이 있어요.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강조를 하면서도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방법, 이제 이것이 수사학에 있어서 평행법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주의 목전에서 쫓아내시는 것이 곧, 성령을 거두시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지금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를 목전에서 쫓아내시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셔타를 내리실 것 같은 위기를 느낀 거예요. 예전에 이 다윗이 그렇게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이었어요. 하나님 때문에 사는 즐거움 때문이었어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 때문에 이 시인이 그렇게 행복하고 좋았던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을 뵈올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이 기쁨 때문에 살았는데 하나님이 이런 기쁨을 단숨에 거두어 버리시는 것 같은 강한 위기를 이 시인이 뼈저리게 느낀 거예요. 그것이 뭐에요?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그러한 위기를 느낀 거예요. 시인이.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거예요. 이 일은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일어났어요.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참된 기쁨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것 같고 주님이 자기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 속에서 살아오게 하셨던 그 성령의 참다운 이 동행하는 기쁨을 거두어 버릴 것 같은 위기에 있었을 때 만약에 제왕의 면류관을 주고 그것을 바꿀 수 있다라고 할 것 같으면 다윗이 바꿨겠어요, 안 바꿨겠어요? 얼마든지 얼마든지. 그렇기 때문에 이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그 특별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이것이 왕국보다도 더 소중하고 그 무엇보다도 생명과 같이 가장 고귀하고 소중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거예요.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재물은 잃어버렸다가도 다시 찾을 수가 있어요. 깨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맛보는 인격적인 충만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 풍부한 체험,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이 행복, 이것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주님의 사랑을 상실하고난 다음에 우리가 무엇으로서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보상으로 받을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도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면 행복해질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고 은 30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 30은 노예 한 명의 몸 값이었습니다. 막상 그 예수님을 팔고나서 그 돈을 손에 넣었는데 그가 정말 누리가 그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결국엔 그 자신도 돈을 쓰지 못하고 던져 버리고 목 매어 죽고 말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하물며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고 나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고 그 충만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았던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깊은 교제를 잃어버리고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이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들을 버리고도 무엇인가 그것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찾아보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하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들이 여기에서 가슴에 새겨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가장 소중합니까.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고집대로 죽을 더러운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왜 좋으신 예수님이 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순결한 피로 우리를 닦아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디에 있든지 또 어떻게 살든지 우리들에게 마지막까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그러한 관계의 행복속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 그것 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성령 달라고 기도를 참 많이 합니다. 그리고 많이 해야 합니다. 성령을 주십사 하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의 심리가 어떠한지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섬겨도 성과가 별로 없을 때 힘만 들기만 하고 열매가 없는 현실을 보면서 성령의 은혜를 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주시면 조금만 노력하고도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어려운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도 성령을 받으면 이런 것 쉽게 이긴다는데,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만병통치약처럼 구합니다. 그러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그러한 특별한 기름부으심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과연 우리로 하여금 편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인가.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거죠. 만약에 이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를 노리는 원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양이나 치면서 이름없는 목부로 그저 평온한 인생을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받고 나니까 이제 이 다윗의 신앙은 역사와 관계된 신앙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느냐,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느냐가 이제는 자기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된 문제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고 나니까 수많은 원수들이 다윗을 시기하는 대적들이 애워쌌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수많은 원수들에게 추격을 받으며 수많은 대적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찬 모험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의 참된 가치가 무엇입니까.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평안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행복과 평안을 누리면서 우리 혼자 아 내 인생은 참 만족한 인생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도 우리의 인생을 보실 때 그러한 마음이 들어야지만 진짜 행복한 인생이다 그거죠.
(예화) 이 잘 사는 외국을 여행한 사람들은 참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사실은 부러운 면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내릴적마다 드는 마음이 답답하다 느낍니다. 집이 덕지덕지 달라붙고 지붕이 왜 이렇게 드러운게 많아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제가 그랬어요. 지붕 전기법을 만들어가지고 지붕에 아무거나 못 올려 놓게 해야 되겠다. 작대기, 걸레 부러진 것, 이런 것들이 비행기 타고 오면 다 보이잖아요. 높은 것들은 왜 이렇게 많아요. 답답하게. 잘 사는 나라 미국이나 구라파나 호주 보세요. 그냥 집이 그냥 듬성듬성. 전부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널찍널찍하게 땅을 쓰고 살아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으니까 사람들이 돈도 많아요. 그러니까 직업을 놓고 정년퇴직을 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찬밥이에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안 그래요. 왜 그러냐 하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돈이 제일 많거든. 어디 가든지 그 쌈짓돈 노리는 서비스가 말이죠. 화려해요. 그렇게 돈이 있으니까 어떻게 해요. 걸어다닐 때 차 타고 다니고, 차 타고 다닐 때 더 좋은 차 타고, 비행기도 아주 고급석에 앉아서 가고 말이죠. 더 좋은 것 먹고 그렇게 사는 거예요. 조금만 아프면 병원에 가니까 얼마나 오래 사는지 몰라요. 그게 모든 사회가 그 사람을 잘 행복하게 보호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곳 가면서 먹고 싶은 것 먹고 그러면서 평안하게 살아요. 그런데 그 뿐이에요. 그것 뿐이라고요. 좋은 환경,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문화가 있는 곳에서 그저 자기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곳 먹고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데 그런데 그것 뿐이라 이거죠. 백발은 점점 더 희어져 가고 옛 시의 이름대로 가는 홍한을 누가 잡겠으며, 오는 백발을 누가 막겠어요? 그렇게 점점점점 노쇠해져 가는 거예요. 물론 그들의 삶이 평안해요. 그런데 뭔가 형헌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어요. 좋은 자연환경, 평안하고 안락한 삶이 있는데 그 이상이 없어요. 이제는 쾌락을 즐기려고 해도 기운이 없어요. 그들이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사람을 버렸어요. 그렇게 평안하게 살다가 죽는 거예요. 사실 그러한 그러한 노년의 인생보다도 더 행복한 인생은 뭐냐 하면 하다못해 다리 밑에서 군고구마를 팔면서 살고 겨울이면 언 손을 호호 불면서 몸배를 입고 털신을 신고 난전에서 콩나물을 펼쳐놓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팔아서 한푼 두푼 벌어먹는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하고 목표가 있다 이야기에요. 그렇다고 해서 다 콩나물 장수를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먹고 편안하게 살고 그러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필요하기는 하죠. 여러분 취직하거나 아니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제가 그렇게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는 아니잖아요. 그러한 하나님 없이 살아가니까 환경이 넉넉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도 삶 자체가 공허하기 그지 얺는 거예요. 그런 속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이러한 공허한 삶을 종식시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고 하나님을 소망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거기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을 발견하고 이것이 인생의 참된 기쁨이라 이러한 말이에요. 그리고 이 시인이 기름부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거예요.
(예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니다가 제발로 교회를 떠났어요. 이유는 계속 다니다가는 사람 버리겠다. 그리고는 교회를 떠났죠. 하나님을 못 만났죠. 그러다가 5-6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밤마다 공부를 하는데 새벽이면 저 밖에 한 가운데 감리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그런 종 있잖아요. 댕그렁 댕그렁 치는 새벽 종, 그게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 공부하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밖을 나가요. 그러면 넓은 밭이 있고 안개가 살포시 끼어 있는 넓은 들판에서 그 종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댕그렁 댕그렁 들려요. 그게 꼭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처럼 들렸어요. 6개월 동안을 그 종소리와 씨름을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제가 내 발로 찾아간 교회가 이 교회 본당의 20분의 1쯤 될까. 손바닥만한 교회당이에요. 콘크리트 바닥에 싸구려 비닐장판을 깔고 그 위에 성도들이 양말 쪼가리 같은 것을 모아서 기워가지고 온 그 방석 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이제 톳밥 난로를 피워놓고 예배를 드리는 그 손바닥만한 교회를 내 발로 찾았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처음 그 교회에 들어왔을 때 풍금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는데,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어요.
(찬양) 나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설교는 듣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성령의 은혜죠. 그래서 거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인이 30명 밖에 안 되는데 그래도 사지 멀쩡한 젊은 청년이 예수를 믿겠다고 왔으니 그 할아버지 목사님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눈에 넣어도 안 아팠겠죠. 그러다가 이제 시간이 흘러서 드디어 세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자네는 오래 교회를 다녔으니까 그 학습은 안 받고 세례를 받아도 되겠다고, 그래서 세례문답을 통과하고 그리고 이제 세례를 받는 날이에요. 그런데 그 날 그 떨리는 마음이 사실 장가갈 때도 그렇게 안 떨렸어요. 개척교회 할 때도 그렇게 안 떨리고, 일주일전서부터 막 설레는 거예요. 내가 이제 드디어 하늘나라에 주민등록 하는 날이구나. 내가 이제 정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구나. 그래서 일주일동안을 막 저녁때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서 세례를 잘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 세례를 통해서 내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마지막날에는 목욕을 하고 그리고 내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고, 그때는 너무 가난해서 옷도 없었어요. 뒤져 보니까 제일 좋은 옷이 하얀 추리닝이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바지는 그저 양복바지 하나 입고, 그리고 하얀 추리닝을 깨끗이 빨아서 그래서 이제 입고 그리고 이제 세례를 받게 되었어요. 풍금 소리가 울려 나오는 가운데 이제 그 손바닥 만한 교회당에서 세례 받을 사람들이 이렇게 앉았어요. 목사님이 이제 어느 장로님의 도움을 받으셔서, 이제 세례기를 가지고 나오셔서 손을 담그신 다음에 제 머리에 대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바로 그 순간 이 목사님이 손을 댄 끝에서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이 온 몸 전체가 그 마치 감전된 것처럼 말이죠. 막 새로운 느낌이 확 밀려 오면서 꼭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그 이 혀까지 느껴졌어요. 그러더니 그러한 느낌이 딱 오는 그 순간에 갑자기 그 수많은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거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 없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냈던 수많은 어린 날들,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면서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던 인생의 젊은 시절, 그리고 알고보니까 내 자신이 가장 쓸모없는 쓰레기와 같은 더러운 인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이 놀라운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왔어요. 그러면서 왜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처럼 사랑하실까. 그래서 어쨌든 세례를 받으면서 하여튼 한없이 울었어요. 한없이. 그 눈물이 흐르면서 눈물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마음의 더러움들이 씻겨 나가는 것 같고 마지막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목표가 또렷해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제껏 까지의 인생은 바로 나를 위한 인생이었으나 이제 남은 인생은 주님을 위한 인생이어야 하리라. 내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이 사랑을 일평생 배반하지 않고 나도 주님처럼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게 제가 경험한 첫 번째 성령의 체험이었어요. 그 후에도 그 체험을 수없이 했는데 그런데 그게 그렇게 또렷하게 가장 새겨진 이유는 그게 첫 번째 체험이었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거죠. 그러다가 더 극적인 체험을 한 5년 후에 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그것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 했어요. 결혼을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그 때도 무슨 가을이었어요. 이게 뭔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어서 새벽마다 이제 직장 다닐 때 인데 교회당에 나가서 근처에 있는 교회당에서 기도를 했어요. 그 교회도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교회처럼 손바닥만한 교회였어요. 무슨 뭐 가정집을 개조를 해가지고 사랑채를 교회당처럼 만든 집이었거든요. 여러분들이 건물이 후진 교회라 그래서 우습게 보는 것은 그게 안 돼요.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다고요. 그런데 거기를 갔어요. 새벽예배가 끝나고나서 한참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눈을 떠보니까 다 가고 나만 남았어요. 그런데 그냥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너무 서러운거야.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야 할텐데 왜 응답이 없을까. 그런데 순간에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야 내가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 편하게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혹시 이 바닥을 보니까 이렇게 좋은 바닥이 아니야. 그냥 쌩 콘크리트 바닥이에요. 저기가 저기 엎드려서 기도를 하면 그 하나님 보기에 안쓰러워서라도 좀 그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 그러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의자에서 내려와서 11월 말쯤 되었던 것 같아요. 추웠어요. 그래서 찬 바닥에 무릎을 꿇으니까 냉기가 확 치고 올라와요. 거기 얼굴을 묻고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도와달라고 말이죠. 바로 그 때인데, 생전 처음 경험이었어요. 그런 경험을 그 후에도 몇 번 했는데 이것도 처음이니까 기억에 남는 거예요. 그런데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강대가 보이는 거예요. 저 앞에. 그런데 거기에서 배구공보다는 작고 애들이 가지고 노는 그 보통 야구공이나 이런 것들보다는 훨씬 커요. 이 정도 크기쯤 될까. 그런데 시뻘건 불덩어리인데 이글이글 거리는 태양과 같아요. 그런데 꼭 태양 같기도 하고, 꼭 손 방망이에 그 불을 이글이글 붙어 놓은 것 같은데 더 강도가 심하게 타는 것 같은 것이 하나가 딱 뜨더라고요. 물론 눈을 감고 지금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빠르지도 않아요. 흉 이정도 속도로 정면 날을 향하여 날라 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두렵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가서 붙들 용기는 더더욱 안 나고. 그리고 가만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이게 점점점점 가까이 오더니 나의 시야를 가득채우더니 이게 머리에 와서 쾅 하고 맞는 거예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지난번 체험하고는 전혀 다르게 딱 머리에 맞는 그 순간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불이 이마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입까지 해가지고 온 몸을 확 번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막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기도를 했죠. 사실은 저는 옛날서부터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별로 썩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때도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기도는 아니었는데, 그날은 기도가 터지면서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혀가 말리기 시작하면서 도대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알고보니까 그게 방언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방언을 빈 교회당에서 혼자 기도하다가 받았어요. 그런데 그 성령의 불이 확 쏟아져서 들어오고 나니까 온 몸을 혀끝까지 꽉 채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 정신없이 기도가 쏟아졌죠. 그리고 나서 기도가 딱 끝나고 나니까 온 몸에 땀이 쫙 흘렀어요. 그리고 눈을 약간 떠서 보니까 그 교회당은 유리도 없어서 비닐 종이로 이렇게 했는데 얼마나 추운지 비닐 종이가 얼었어요. 성해가 끼었는데 거기에서 붉으스름한 아침 햇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거기에서 차가운 바닥에서 기도하는데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폭풍이 지나가고 나니까 무슨 마음이 들었느냐 하면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이제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과 생각과 내 몸 그리고 내 인생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나중에 이제 깨닫고 나서 보니까 거룩의 열망이에요. 거룩.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해져서 내 모든 삶과 생각 모든 것이 이 하나님에게 통째로 기쁨이 되는 그러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밀려 오는 거예요. 그리고 차가운 새면 바닥에 엎드려서 한 없이 울었어요. 왜 하나님은 나같이 아무 쓸데 없는 인간을 이처럼 사랑해주시고 그 순간 만큼은 마치 이 세상에서 아무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나만 있는 것처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막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면서 마음 속으로 깊은 다짐이 생겼어요.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리고 나니까 이것은 말이죠. 몰라요. 누구한테 얘기를 해 줄수는 있지만 뭐 그런가 보다. 신앙이 그럴수도 있지 생각해요. 그게 뭐가 되었느냐 하면 그게 내 마음속의 비밀이 된 거예요. 그래서 그 때 지금도 그래요. 그때 한참 좋아하던 찬송이 뭐냐 하면 그 찬송.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신앙의 비밀은 기쁨의 비밀이에요. 그리고 기쁨의 비밀은 사랑의 비밀이라고요. 그런 것을 깊이 간직하고 그렇게 살아요. 그 때 비로소 이제 신앙의 세계가 얼마나 기쁜 세계인가. 그리고 보니까 이전에 내가 만났던 많은 유별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생각나기 시작했어요. 가게가 다 불타버리고 쪽박을 찼는데도 그렇게 기뻐하는 거예요. 맨날 교회에 나간다고 남편에게 피멍이 들도록 맞으면서도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하면서 그렇게 기쁨이 충만하게 살던 사람들이 나는 그 때 미친 사람들인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종교를 가져도 적절하게 가져야지. 약물도, 보약도 많이 먹으면 해로운 데 예수를 믿어도 적절하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믿어야지, 저렇게 유별나게 믿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던 그것이 바로 바보 같은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냥 그 만나는 사람마다 외치고 싶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그리고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이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인생이 얼마나 척박하고 쓸쓸한 인생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단 말이죠. 여러분의 참된 기쁨이 무엇입니까. 있어요? 바보통 앞에 앉아서 그 한시간에 몇 푼 받고 웃기는 그 코미디언들이 보여주는 장끼를 보고 웃는 것 말고 한참 웃고 나면 다음에 웃음의 기쁨보다도 훨씬 더 큰 공허함이 가슴에 밀려와요. 그것 말고 여러분들에게 정말 기쁜 날이 있었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이 있느냐고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가 사람으로서 이 땅에 견딜 수 없는 기쁨, 그리고 내가 아무리 기뻐해도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원한 것 때문에 후회하고 아프게 할 일이 없는 그 참된 기쁨.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 이야기에요. 신앙의 세계, 하나님과의 관계. 그 분과 나눈 아름다운 교제, 그 사랑속에서 오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는 이런 기쁨이 오지 않는 거죠. 우리의 인생의 참된 만족이 무엇입니까. 주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만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행복 아닙니까.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행복 아니에요?
(예화) 언젠가 반포대교에서 차들이 서고 난리가 났어요. 사람들이 뛰어나오고. 왜냐하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반포대교를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100만원 다발을 두 권을 뿌렸어요. 그러니까 강에는 원래 바람이 부는대다가 차가 달리면서 그것을 막 뿌리니까 하늘에 막 흩어졌죠. 그러니까 여러분 차를 타고 가는데 그 윈도우에 만원짜리가 달라붙는다고 그러면 여러분들 어떻게 하겠어요? 윈도우 블로셔로 닦아 내면서 운전하겠어요? 아니면 스톱하고 내려와서 건지겠어요, 떼겠어요. 솔직히 말해봐요. 몇 장만 떼면 일당인데. 떼죠. 그런데 우리 교회에 지금은 이제 다른 곳에 가셨는데 그 집사님이 주일 아침에 교회를 오는데 하늘에서 초록색 비가 내리더래요. 만원짜리가 한없이 떨어지는 거예요. 머리에도 옷에도 구두에도, 열린교회 교인이었어요. 어떻게 했겠어요? 빨리 주서다가 어떻게 해서든지 감사헌금이라도 해야지 했겠죠. 어땠어요?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떨어지니까. 열린교회 교인이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런데 왜 이 사람이 23편 설교를 들었거든. 그러니까 만약에 사람들이 매달려서 새카맣게 엎드려서 주술 때 그 사람은 누가 이렇게 더러운 것을. 뭐 그 분이 억수로 부자였느냐 그렇지도 않아요. 그것 주술 려고 뛰어다니는 사람도 불쌍하고 불쌍하고. 더 불쌍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뿌린 사람이에요. 뿌린 놈. 왜, 사는 게 얼마나 시시하면 사는 게 얼마나 시시하면 그것을 뿌리고 빽미러로 보고 자기가 돈을 뿌렸는데 사람들이 양복입고 나와서 줍기위해 엎드려거 기다리는 거예요. 뿌린 놈이나 줍기 위해서 뛰어다니는 그러한 사람들이나 다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에요. 사는 게 얼마나 시시하면 어떻게 그렇게라도 해서 뭔가 마음에 이것을 달래보고 싶은 거예요. 공허함을 달래 보고 싶은 거예요. 오늘날 말이죠. 미친 듯이 치닫는 세상의 타락의 풍조,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이 쾌락을 위한 장소, 이런 것들이 전부다 뭐냐 하면 목마른 영혼의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에요.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추는 춤을 보면 그 춤이라는게 뭐 춤 자체를 싫어하지만 뭐 이렇게 좀 무드가 있고, 우아한 옷을 입고 그리고 뭐 치마도 쫙 펼쳐지고 아름다운 소리도 나오고 서로 마주보기도 하고 손도 잡고 그러는 거지. 이것은 춤이 아니라 머리에 헬멧을 써서 물구나무를 서서 뱅글뱅글 팽이처럼 도는 것 봤죠. 그게 춤이에요, 발광이에요? 불속에 들어가 벌레들이 튀는 것처럼. 앞으로 보세요. 점점 그러한 문화들이 유행되어 가는 거예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인간 속에 이 산업화되어 가고 사람들이 점점 공허함을 많이 느낄수록 인간속에 있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들은 말이죠. 처절한 몸부림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에요.
(예화) 제가 잡지사에 부탁을 받고 서갑숙 씨의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그것 서평을 써가지고 인터넷에 올려났더니 난리 바가지가 났어요. 뭐 보고 나서 뭐 펑펑 울었다는 사람, 서평을 보고, 책은 용기가 없어서 못 보고. 서평을 보고 울었다는 사람, 깨달았다는 사람, 뭐 목사님 어쩌고 편지쓴 사람,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너도 목사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뭐 아수라장이에요. 다 바보들이에요. 바보들이라고. 그게 그 오늘날 이 쾌락으로 치닫는 이것들은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그 눈빛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고요.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인간의 영원속에 흐르고 있는 그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 밑도 끝도 없는 허기짐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을 봐야 되는 거죠. 그래서 죄를 향해 분노하는 것과 죄인을 향해 분노하는 것을 혼돈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혼돈하면. 그것을 혼돈한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다고요. 그러니 그러한 상황이 결국 뭐냐 하면 처절한 몸부림이, 그러한 향락을 향한 그 미친 듯이 덤벼드는 불을 보고 달려드는 그 나방의 몸부림과 같은 것이에요. 전부다 뭐냐 하면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이 없는 인생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 몸부림 칠 때 그것이 얼마나 범죄로 빗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에서 그러한 만족과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많이 돈 벌고 사업이 잘 되고, 높이 승진을 하고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이제 세월이 지나가면 토마스 청교도 설교자 토마스가 말한 대로 때가 되면 당신들이 죄를 버리지 않아도 죄가 당신을 버린다. 이제는 타락을 하려고 해도 기운이 없고 죄를 지으려고 해도 너무 늙어요. 향락에 빠지려고 해도 돈이 없어요. 자기가 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죄가 그 사람을 버린 거죠. 죄 조차도 버린 사람이에요. 그런 속에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냐 이거예요. 뭔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그래도 동물과 다른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뭔가 이러한 인간의 세상의 만사에 이 흔들리면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라면 이게 동물적인 삶의 다름이 아니라는 거죠. 무엇인가 영원한 가치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후패하여도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져서 우리의 인생이 저물어갈 때에 오히려 우리의 눈빛이 인생에서 맛본 허무가 아니라 소망 때문에 더욱 빛나는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그게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냐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러한 행복속에서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기름을 붓듯이 풍부하게 성령의 은혜를 한번 부어주시는 거예요. 이러한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5절을 이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무슨 뜻이에요? 그렇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신 그 분이 주님이시다. 다른 분이 아니라. 물론 히브리 성경에는 이것이 2인칭 단수로 나와 있습니다만, 주님을 그렇게 부른 거죠. 그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그 충만한 인격적인 사랑,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사람들 만이 주님을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예화)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다가 가슴 벅차는 감격으로 청중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졌어요. 만약에 여러분들 중의 누가 나보고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라고 말한ㄴ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하겠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그 사랑에 사무쳐서 복음을 전파하는 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까 자기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 맡기신 일들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다가 죽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기쁨이지, 한 나라의 제왕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경배를 받으면서 사는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 사소한 일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스펄전의 고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안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면서 살 때에 비로소 기쁨이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요 모욕이란 거예요. 고통이요 모욕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환경을 제압해 버리면 병에 걸려서 돌아버리죠. 그렇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에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거예요. 주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구주로 승복하고 난 다음과 그 전이 차이가 나는게 뭐냐 하면,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되 항상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는 거예요. 교회는 나가드리지. 십일조 까지는 드려야 되겠지. 아니면 뭐 내가 봉사는 조금 해야 되겠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나도 좋아하는 일이라면 해 드리지, 이러한 식이었거든요. 진짜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변하냐 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아까 말씀 드렸던 저의 경험처럼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그러한 소망이 생겨나는 거예요.
우리는 인생을 사는 모습이 참 여러 가지입니다. 벌써 한 10년 전에 미국의 어느 사회학자가 조사한 이야기에 의하면 인류가 가지고 있는 직업이 3400가지라 그래요. 그런데 그 직업 중에는 유명 스타, 유명한 스타의 초상화를 길거리에다가 걸어놨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쓰고 간 그 콧수염 지워 버리는 직업도 있다고 하잖아요. 어쨌든지 간에 수많은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요. 때로는 여러분들은 보통 사업을 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아주 작은 구멍가게를 하시는 분일수도 있어요. 한번 싸인하고 일을 하면 평범한 직장 생활하는 사람, 수십년 치의 봉급이 오고가는 그러한 큰 거래를 하는 상인일수도 있고, 하루 품 팔아서 하루 품 먹고 사는 그러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일수도 있어요. 학생일 수도 있고 이미 벌써 공부를 끝내고 돈을 버는 분일수도 있어요.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취하게 된 한 모습에 지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종사하다 왔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면서 살아온 인생이었느냐 하는 것이에요.
이점에 있어서는 아무리 인용해도 인용해도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다니엘이에요. 그 중에서 특별히 다니엘은 말이죠. 바빌론 포로로 끌려 갈 때에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끌려갔고 끌려간 그 곳에서 마지막에 바빌론이라고 하는 강대국의 국무총리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서 무소불이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왕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여전히 이 사람의 정치적인 가치, 행정적인 관료로서의 가치는 쇠퇴하지 않았어요. 젊은 청년이 끌려와서 백발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바빌론은 다니엘을 필요로 하고 있었어요. 그만큼 그는 뛰어난 관리였고 뛰어난 정치가였습니다. 그런데 다리오라고 하는 사람 왕이 뭔가 다니엘을 모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꾀에 빠져서 그만 잘못 싸인을 하는 바람에 다니엘이 졸지에 오해를 받고 사자굴에 던지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밤새 가슴을 졸인 왕이 이 다니엘이 갇혀있는 사자 굴속에 와서 다니엘을 부르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아 다니엘아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그 섬기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정치적으로 보면 자기의 신하였고 그의 목숨도 알고보면 자기의 손 하나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집에서 월급쟁이 생활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니엘은 성심성의껏 겸손하게 그 다리오를 왕으로 받들면서 충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오가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다니엘이 누구냐라고 할 때 감히 자기의 종 자기의 집에서 직장생활하고 있는 고용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는 비록 자기의 명령을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한 관리에 불과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섬기는 분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다니엘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국무총리로 지냈지만 안 믿는 다리오 왕이 보기에도 이 다니엘의 일생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온 일생이지 정치판에서 비자금이나 빨아먹고 살던 그 인생이 아니었다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세월이 흘러가서 다니엘은 죽었고 국무총리의 자리도 다 떠나갔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국무총리 였기 때문에 다니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국무총리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던 하루하루의 삶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화와 교훈을 주는 것 아니에요.
보십시오. 요한사도가 요한일서에서 말한 것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그래서 사업을 하는 분들은 열심히 하세요. 직장 다니는 사람은 성실하게 다니시고요. 그리고 승진도 하고 좋은 계획을 잘 이루세요. 제가 왜 이렇게 말씀 드리는지 아세요?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그 모든 것들은 단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기 위한 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직장 생활도 열심히 해요. 직장에 가서 주보 만들지 말고 교회에서 오랜다고 직장 집어 치우고 달려오고 그래서 낙인 찍히지 말고 주께 하듯이 성실하게 하라고요. 그러되 단지 직장 생활이 직장 생활로 끝나고 사업이 사업으로 끝나면 안 돼요. 그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 때에 오늘 이 다윗과 같이 일평생 그가 왕이었지만 그리고 장군이었지만, 시인이었지만, 음악가였지만 훌륭한 정치가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주목하지 않아요.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는지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인생도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그 기름 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주인으로 모시고 일평생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인생이 끝난 후에는 나를 섬긴 나의 자녀였다라고 하는 칭찬을 받는 그러한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의 인생이 끝나도 우리는 전혀 허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도 오히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14. 빈 잔에 넘치는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 김세나
(예화) 1992년도로 기억이 되는데 아직 교회를 개척하기 전이었고 저는 신학대학의 선생으로 있을 때였는데 연구실에 벨이 울렸어요. 그래서 이제 전화를 받아보니까 정말 그 성우 뺨 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여성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흘러 나왔어요. 그래서 누구냐 그랬더니 교수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교수님을 잘 압니까. 누구입니까 그랬더니, 그 책이 이제 피 묻은 복음에 빠져라는 책이 되었는데 그 때는 그게 십자가라는 책이었어요. 이제 피 묻은 복음에 빠져라 그 책을 읽은 독자래요. 그래서 그 때도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는 상황이었는데 의외였어요. 독자인데 그 책을 읽고 너무 큰 감화를 받고 신앙의 도움을 받아서 저를 좀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뭐 바쁜 세상에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 그랬더니 그래도 꼭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가 될 것 같다고. 그 말도 참 고마운데 하나 더 붙여서 점심을 꼭 한번 사주고 싶대요. 그래서 그럼 그렇게 하라고. 그래서 이제 바빠서 못 만나고 두 주 후에 토요일날 이었어요. 그 때 이제 연구실로 찾아왔어요. 누가 한 사람과 같이 왔는데 마침 보니까 그 사람은 제가 공부를 가르친 제자예요. 그 제자와 같은 교회 다니는 집사님인데 이제 이 자매가 책을 하나 줬더니 그것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서 온 거죠. 그런데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해요. 꽃다발을 큰 것을 하나 사 들고 그리고 왔는데 저 40대 초반쯤 되었을까요. 그런 부인이에요. 그래서 이제 앉아서 차를 한잔 끌여 주고 대화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참 그 인상 깊었어요. 자매가 먼저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다 저를 부러워요. 얼마나 잘 살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합니까. 이제 이 부인은 미대 출신의 여성인데 연애 끝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우리나라 아주 굴지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벽지를 만드는 큰 회사의 회장이에요. 대게 돈이 많고 큰 사업을 하면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많잖아요. 남편은 신앙생활도 착실하게 해요. 저녁 되면 부부가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같이 앉아서 큐티를 한 대니까 사업하면서 그 정도만 되어도 우리 자매들한테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지 않겠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또 교회에서 봉사도 그렇게 열심히 해요. 신혼부부들을 가리키는 부부교사로 교회에서 임명을 받아서 그래서 이제 갓 결혼한 동생 같은 부부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그러한 일도 하고, 더 좋은 것은 부인이 미대를 나왔으니까 남편이 최근 세계적인 디자인의 추세가 어떠한지 이태리, 프랑스 이런 나라들을 출장갈 때 부인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같이 돌아보고, 샘플도 채집하고, 그리고 부인이 조언도 하고 돌아오면 다시 제품에 대해서 미술적인 조언도 주고 그러는 거였어요. 그러니 아직 나이 젊죠. 신앙 있지요. 돈 있지요. 남편 가정적이죠. 그렇게 해외 여해도 자주 하지요. 이러니까 사업에 열심히 빠지면 부인들이 소외되기 쉬운데 그렇지도 않고 뭐 참 인상적인 대죠. 요즘 자매들은 그런 대로만 시집간다고 하면 괜찮을텐데. 또 결혼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있어요. 한번 갔으면 됐지. 결혼 안 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 거려야죠. 그렇게 해서 이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참 하나님은 공평하신지 저에게는 남이 알 수 없는 아픔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무슨 체질인지 병명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3년이면 한번씩 온 몸에 혹이 돋아난대요. 그래서 배를 가르고 혹을 막 그 한 바가지씩 뜯어내야 된대요. 왜 그런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긴대요. 암은 아닌데 그러니 아무리 암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그 배를 가르는 게 쉽겠어요? 그것을 혹을 떼어내고 나면 몇 달씩 입원을 하고 그러는데 그게 늘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그래서 이제 이번에도 혹을 떼어낼 때가 되었는데 그러니까 남편이 아무리 잘 해주고 교회에서 자기를 인정해 주고 그래도 너무 사는 게 곤고하고 괴로운 거예요. 그러던 차에 피 묻은 복음에 빠져라 라는 책을 읽고 그리고 이제 큰 은혜를 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수술할 때가 되어서 마음을 다 잡아 먹고 그리고 이제 은혜 속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이제 마취를 했대요. 마취를 했는데 아직 정신이 가지 않은 상태에서 마취가 막 들어오는데 자기가 전에는 이 맘 때쯤 되면 인생을 원망하고 하나님 원망하면서 울었는데 이번엔 울음의 의미가 다른 거예요. 예수님이 이리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까짓 배 한번 가르는 게 무슨 대수랴. 그러면서 십자가의 사랑에 한 없이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뒷전에서 아련하게 소리가 들리더래요. 저것 봐. 저것 봐. 최 집사가 얼마나 힘이 들고 아프면 울겠어. 그런데 자기는 말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우는 것이 아파서 우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제가 우는 거예요.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 마취가 서서히 들어오면서 자기가 말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인생을 살 힘을 얻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그 속에서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부러운 것 없이 그렇게 살았는데 그 교회를 다니는데 목사님이 600-700명정도 모이는 교회라 그랬으니까 아마 우리 교회정도 되었겠죠. 그래도 그래도 그 정도만 되어도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그리고 목사님이 옛날 목사님이라 얼마나 엄격하고 야단을 잘 치시는지 목사님 앞에만 가면 온 교인이 오금을 못 핀대요. 여러분들은 안 그러죠? 전혀 뭐 안 그래요. 그랬대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께 못하는 거예요. 그래도 가서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에요. 목사님을 사랑하니까.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을 온 교인이 다 알아. 그런데 이제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대요. 심방을 오셔서 그냥 그렇게 사랑하는 목사님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겠어요. 젊은 사람들이 사업도 크게 하죠. 그러면서 십일조를 많이 하는데 그게 무슨 목사님 입장에서 기분 나쁠 게 아니거든요. 십일조도 많이 하죠. 봉사도 열심히 하죠. 그렇게 성도들 섬기죠. 그러니까 목사님이 뭐 야단을 칠 일이 있나. 심방을 가서 그 날도 성경을 펼쳐들고 예배를 드리면서 한없는 축복의 말씀을 이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예배를 다 마치고 그리고 이제 목사님도 일어서셔서 가시려고 하는 차인데 그 때 이제 자매가 자기도 진짜 모르는 사이에 우발적으로 이 솟아오른 거예요. 잠재 되어 있던 감정이, 심방을 마치고 심방 대원들과 일어나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목사님한테 인사 하려고 왔다가 여기를 딱 붙들고 목사님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대요.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막 쏟아 져 나오더래요. 무슨 말이 나오냐, 목사님 그래봐야 소용 없어요. 심방을 했는데 그래봐야 소용이 없대요.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목사님이 저를 아무리 아끼고 우리 가정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이처럼 축복의 말씀을 많이 해 주셔도 목사님, 저는 너무 죽을 것 같아요. 너무 곤고하고 너무 괴로워요. 목사님 나 좀 어떻게 좀 해주세요. 그리고 막 엉엉 울었대요. 그러니까 심방 대원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심방 대원들이 가고 난 다음에 남편이 그러더래요. 여보, 내가 그렇게 사랑해 주는데 당신 왜 외로워? 여보,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잘 해주는데 당신 왜 그렇게 곤고해? 그러더래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말이죠. 그 여자처럼 여성처럼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주고 그리고 환경적으로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이 그렇게 많은 것을 갖추고 있어도 그래도 사람 속에는 그런 것들로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공간이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 만으로써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에요. 그것을 여기에서 오늘 시인이 잔 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내 자신이 넘치나이다. 이 문맥 잔치가 잔치집이거든요. 잔치집이에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진 잔치집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포도주는 물이 안 좋기 때문에 잘못 먹으면 풍토병에 걸려요. 그래서 늘 이 포도주를 물 대신 먹거든요. 그렇기도 하고 이 포도주는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잔치집에서 포도주는 큰 기쁨이에요. 기쁨. 예수님이 맨 처음 베푸셨던 이적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가서 포도주가 떨어진 집에 포도주를 만드시는 장면이잖아요. 왜 그렇게 하필이면 주님이 오셔서 맨 처음에 하신 일이 술을 제조하시는 일이었을까. 그렇게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잔치집에 술이 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잔치집에 국수가 떨어졌다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었단 말이죠. 그리고 떨어지고 나면 그 잔치집에서는 아마 큰 부끄러움을 당할 위기에 있는 거죠. 그 때에 그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오셨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더군다나 그 잔이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넘치도록 부워서 흘러넘치게끔 잔을 부워주는 것은 잔치를 베푼 주인의 후한 인심과 그리고 그 자리에 가득한 기쁨의 정도를 보여주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고백을 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그러한 빈 잔이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 충만하게 차서 흘러넘치기 까지 복되게 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것을 간단한 말로 표현하면 환희, 기쁨, 희열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거죠.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이렇게 주님께 진정으로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나면 이러한 기쁨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저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그저 헤어지지 못해서 마지 못해서 사는 살기 싫은 부부생활 같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런 생활을 우리들이 흔히 정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저 죽지 못해서 마지 못해 주일날 나오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일날 나올 때 그저 내 평생소원 이것뿐, 빨리 끝나고 집에 가는 것. 그리고 그리고 교회 나오는 신앙생활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 없이 굳이 살아야 할 필요도 못 느끼지만, 또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면서 살 마음은 더더욱 없는 그런 생활. 그런 생활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이 있는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것을 기억을 해야 된다고요.
우리들은 흔히 인생에 있어서 참된 만족과 기쁨이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물론 그것도 우리들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는 말하기 힘들죠. 너무 가난하거나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리거나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하거나 너무나 아끼던 사람이 자신의 곁에 떠나거나 하게 될 때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행복감의 영향을 안 받는다 그러면 거짓말이거든요.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그런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해서 인간이 저절로 이렇게 내 자신이 넘치나이다 라는 이러한 고백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된다고요.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것들을 증명해주듯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하는 이 그 환희에 찬 희열에 가득찬 고백을 언제 하게 되었는가 하면, 4절 후에 5절에서 하게 된 거예요. 4절에 뭐라고 나와 있느냐 하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다시 말하면 이 시인이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그 처절한 그 어두운 계곡을 통과하고 난 후에 이렇게 가슴이 벅찬 환희의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시인의 경험을 보면 이것은 단지 환경의 영향만은 아니라는 거거든요. 그렇죠. 환경의 영향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 또한 두 번째 실례로서 이 다윗이 지은 시편이 아주 많은데 그 중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탄원시에요. 탄원시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그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기도로 토해 놓은 것들을 모은 시를 가리켜서 탄원시라 그렇게 분류를 해요. 탄원시에 보면 이 시인이 처절하게 그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안타까운 고백이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곤고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토해놓고 피눈물을 흘리던 때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 환경을 뛰어넘는 이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뭔가 분명한 것들이 있어야지만 이런 고백이 가능해진다 이거죠. 그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다 쫓기다 그 도망을 가죠. 이웃 나라로. 그러면서 이웃 나라로 도망을 갔더니 수소문을 해가지고 거기까지 사람을 보내서 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윗이 미친척 하면서 침을 흘리고 정신병자 행동을 하면서 그 위기를 빠져 나오면서 다윗이 어려움을 모면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그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고 자기는 사울을 미워하지 않는데 사울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자객을 풀고 지명수배를 내려가지고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데, 그래서 그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침을 흘리고 정신나간 침해걸린 노인 행세를 하면서 도망 나올 때 그게 인생이 진짜 살고 싶겠어요? 그런데 놀랍게 바로 그 때에 시인이 생애적인 고백을 하나님께 찬송으로 드리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그 유명한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런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환경이 주는 그러한 만족이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에서 오는 만족이라 이거죠.
이제 그러면 제가 이제 중간에 결론을 내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하나님을 정말 목자로 모시고 사는 성도의 삶. 그래서 그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온전히 승복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 목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삶은 이렇게 환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어야 된다는 거죠. 이 기쁨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즐거워할까. 즐겁게 해 볼까. 그러는데 그런 것은 사실 가치가 적어요. 그것보다도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에 의해서 기쁨으로 가득찬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단어나 글 같은 것도 우리가 계속 경험을 해야지만, 계속해서 살아있지 경험을 안 하면 단어의 의미 자체가 사라져 가요. 그런 단어 중의 하나가 환희라는 단어에요. 환희. 그런 말 최근에 써본적 있어요? 아마 없을 거예요. 몇 년 만에 처음 듣는 단어일 거예요. 그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이 행복한 순간이 여러분들에게 있었어요?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행복이 진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행복인적이 있었냐고요. 그런 환희가 있었느냐고요. 그런데 기억하세요.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이런 환희가 있는 삶이에요.
그러면 왜 우리가 그러한 삶을 거의 못 사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인식의 문제에요. 이 말을 잘 기억하세요. 인식. 인식. 뭔가를 이제 똑바로 안다 이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기억할 때 이 신앙생활은 말이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새는 정반대죠.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차요. 머리는 뜨거워서 부글부글 끓어요. 뭘 집어넣어도 죽 통이 되는 거예요. 가슴은 차가워요. 뭘 말해도 감동을 안 받아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안 되는 거예요. 인식을 해야 해요. 인식. 인식이 뭐냐 하면 왜 왜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난 왜 안 행복할까. 그런 것을 정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그 실체를 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인식이에요. 인식이라고.
예를 들자면 말이죠.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허랑방탕하고 나중에는 벌어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 치는데 취직을 했어요. 그리고 그다음에 그나마도 흉년이 들으니까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먹을 게 없으니까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먹으려고 그리고 엎드려서 돼지 우릿간을 찾아보니까 그나마도 없어요. 그 때 생각을 한 거예요. 뭘 생각했냐 하면 나는 이제 돼지 우릿간에서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먹어보려고 찾아봤는데 없다. 이것을 본 거예요. 내가 누군가. 내 아버지 집이 있지 않은가.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품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배불리 먹고 잘 사는가. 나보다 훨씬 나은데. 그 생각을 딱 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집은 이런데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자녀로 있었더라면 이랬을텐데. 그런데 지금 나는 이렇게 굶어 죽는구나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자식으로 받아 줄 수는 없을 거고 그저 품이라도 팔아서 아버지 집에서 살면 이렇게 죽지는 않겠는가 하는 결론을 얻게 된 거예요. 인식이 중요하다고요. 여러분,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감격이 있어요? 신앙생활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여러분도 오늘 아침에도 벌써 여러번 찬송했잖아요. 진짜 좋아요? 진짜 좋냐고. 그러면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왜 그런지 생각을 해봐야 하잖아요. 왜 그런지 생각해 봐야 하잖아요.
(예화) 부산에 한번 내려가 봤는데 젊은이를 위한 세미나를 끝내고 막 내려와서 나가는데 젊은 남녀 둘이서 걸어와요. 그래서 이제 누굽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모르시겠지만 목사님 잘 압니다. 그러냐고. 그러더니 목사님 오늘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선물을 주고 가요. 꽃 한송이와 포장지로 싼 선물을 주고 가요. 그래서 호텔에 가서 자기 전에 펴봤어요. 그랬더니 넥타이야. 색깔은 별로 맘에 안 들더라고요. 그런데 편지가 그 속에서 나와요. 편지가 나오는데 그 편지가 내게는 더 큰 선물이더라고요. 이렇게 썼어요. 목사님, 이렇게 해 놓고 환희, 기쁨, 승리, 영광, 은혜, 이런 단어들은 저는 그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멀리 바라보면서 흠모하면서 죽어야 할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그것이 성큼 내게 다가와서 내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아멘이 안 나와요? 그것 얼마나 재밌는 거예요. 참 대단해요. 여러분, 그 글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죠. 이 진실한 감동을 받으면 누구나 문학가에요. 누구나. 여러분들도 말이죠. 진실한 감동을 받기만 하면 진짜 여러분들도 대단한 사람들이 되었어요. 요즘 열린신문을 보면 작가로서의 제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해요. 굉장해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게 문학이에요. 그렇게 감동이 되더라고요. 한동안 그 편지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니까요. 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것을 바라만 보다가 죽을 운명인 줄 알았던 사람이 그 벽을 뛰어넘고 그렇게 승리하고 환희를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다니 하나님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무엇보다도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거예요. 생각을 하라고요.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되겠는가. 정말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목자인가. 그리고 정말 나는 그 목자의 그늘 아래서 순종하며 그 분의 목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인가 생각하라는 거죠.
혹시 이 설교를 듣는 동안에 벌써 시편 23편 설교가 이토록 길게 진행되었는데, 오늘 12번째인가로 제가 알고 있는데 이렇게 길게 진행되었는데도 여전히 흐리멍텅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남의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뭔가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나 나간 것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공로가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은 천국에 가면 두 번 놀라게 될 것입니다. 저런 인간이 여기 오다니, 그렇게 열심히 교회 다닌 사람이 여기 없다니 하고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한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과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었다라고 하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니에요.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생각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그런 경험이 있다. 진짜 누구도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쁨으로 가득찬 환희가 있다. 난 없다. 그러면 왜 없는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거죠. 그래서 이제 그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 적절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해답을. 장사를 하다가 밑져도 밤이 새도록 장부를 갖다 놓고 외 밑졌을까 생각하는 인생들이 신앙에 있어서 그렇게 밑지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하고 매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20년에 걸쳐서 입증이 되었는대도 그것을 계속 하냐는 거예요. 장사를 해도 하다가 안 되면 집어치우고 새 장사를 해보는데 그렇게 해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이거예요. 교회는 말이죠. 여러분들의 더러운 양심을 달래주는 곳이 아니에요. 정확한 인식이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여러분들이 이 영적인 가난함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 시간에 나와서 설교를 제대로 듣는 것이 집에 가서 성경 열심히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요. 그것을 기억을 하라고요. 정확한 인식이 필요해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주님의 자녀인데 왜 내 마음속에는 주님이 느껴지지 않는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이 계속되고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해야 해요. 인식이에요. 말씀을 정확히 깨닫지 않고는 인식이 생겨날 수 없는 거예요.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말씀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줘요. 답을 주면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할지를 알게 되는 거죠.
두 번째는 가난한 마음이 문제에요. 가난한 마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아니면 내게는 소용없습니다라고 하는 하나님께 집중된 가난한 마음이 있어야 된다 이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애통하는 자들, 하나님의 나라와 죄를 인해서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위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어서 이 땅을 정복해 나가는 그러한 감화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 그 자체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에서 이 가난하다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푸토코스 라는 단어인데 파산선고를 받은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파산선고 받아보셨어요? 파산선고를 받고 빋에 있는 모든 물건은 솥단지, 냄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 빨간 딱지가 붙은 거예요. 자기 물건이었는데 오늘부터는 내 물건이 아니라 손대지 못해요. 자기 명의로 통장하나를 개설할 수가 없어요. 카드 하나 발급을 안 해주고 금융기관에서 돈 거래를 안 해줘요. 모든 물건은 자기가 현찰을 주고 사지 않고는 거래가 안 되는 거예요. 신용사회에서 외톨박이가 된 그 파산선고 받은 사람, 그나마라고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도 없는 사람, 그게 푸토코스의 사람이에요. 그러한 파산선고 받은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떤 마음이겠는지 생각해 보라고요. 이런 생각을 해봐요. 빚보증을 잘못 서서 아버지가 도장하나 잘못 찍는 바람에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을 저는 많이 알고 있어요. 한때는 떵떵 거리고 잘 살았는데 도장 몇 번 잘못 찍은 길에 다 날려 버리고 알거지가 된 거예요. 그리고 쌀 포대 자루 같은 곳에 냄비 몇 개 숟가락 집어넣고 그것을 둘러매고 밤중에 빚쟁이들에 의해서 거리고 쫓겨나는 거예요. 상상력을 발휘해 보라고요. 그래서 이제 눈 오는 밤에 쫓겨났어요. 겨울에 그래서 남편 아이, 막상 밤중에 오밤중에 쫓겨났는데 아무대도 갈 데가 없어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고 인심을 다 잃어버려서 이제 누구도 자기를 마지 해주는 사람이 없고 일가 친척도 없고 근처 여관에 들어가서 잘 여관비도 없어요.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쫓겨나서 캄캄한 거리를 눈을 펑펑 맞으면서 걸어오다가 가로등 옆에 쭈구리고 이제 식구들이 앉아있는데 그저 한없이 눈이 퍼부어요. 그리고 모진 바람이 후 하고 불면서 그 가로등 뚜껑이 덜렁덜렁 흔들려요. 조금 있더니 견디다 못한 아이들이 꿀꺽 그러면서 울기 시작해요. 아빠, 추워. 엄마, 배고파. 엄마, 우리 어디서 자. 이게 진짜 부모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거예요. 그 때 저 멀리서 달구지 오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달그락 달그락 와요. 그런데 보니까 저 멀리 위에 사는 옛날에 자기가 살았을 때는 상대도 안 해 주었던 어느 가난한 그렇지만 마음씨 착한 농부가 지나가고 있어요. 그 농부가 내리더니만, 아이고 그 아무개네 집 식구들이 아닙니까. 뭐 어쩐 일로 이러고 있어요? 이만저만 해서 쫓겨나서 여기 이러고 있습니다. 안 되지, 안 되지, 여기 있으면 얼어 죽어요. 오늘 밤에 얼마나 날이 추운데 이렇게 바람이 부는데 갑시다. 우리 집이 누추하지만 갑시다. 가서 따뜻한 방에서 자고 그리고 내일 생각합시다. 해뜨면 생각합시다. 얘들아 얼른 달구지에 타라. 할아버지가 집에 가서 재워줄 테니까 가자. 그렇게 말하면 따라가겠어요, 안 따라가겠어요? 따라가겠어요, 안 따라가겠어요? 혹시 이렇게 물어보지는 않겠어요? 그래도 따라가지도 않고 하는 말이 글쎄, 갑시다, 갑시다 하니까 글쎄, 생각을 좀 해 봐야 되겠는데요. 방은 있수? 불은 들어와요? 그리고 또 너무 뜨거운 온돌방 아니요? 보일러는 눴어요? 욕실에 물은 잘 나오고? 수세식 화장실이요, 재래식 화장실이요. 나는 밤중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데 밖에 있는 화장실은 나는 못쓰는데, 아침은 줍니까. 설렁탕이요, 해장국이요? 그렇게 물어보겠냐고요. 그러한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얼른 그것을 붙잡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에요. 그게 가난한 마음이에요. 가끔 병원에 가면 참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많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의사의 손을 붙들고 안 놓는거야. 펑펑 울면서. 선생님, 저좀 살려 주세요. 살고 싶어요. 의사가 살리기가 싫겠어요? 그런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에요. 그런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넘치는 잔으로 표현된 신령한 기쁨, 거룩한 놀라운 환희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감격이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만나 주시냐 하면 그렇게 일반적으로 그렇게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거예요. 그러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참된 신자의 표지가 뭐냐. 매주일 교회 나오는 것도 참된 교회의 표지가 아니에요. 안 나오는 것은 더 아니죠. 그리고 열심히 헌금 하는 것도 참된 신자의 표지가 아니에요. 반듯하게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참된 신자의 표지가 아니에요. 참된 신자의 표지 중에서 중요한 것 한가지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깨뜨려진 마음이에요. 어떻게, 너무나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기 때문에 깨뜨려지는 마음.
(찬양)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버림받고 깨진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갑니다
그런 마음이에요.
(예화) 이것은 그 참 제가 여러해 전에 중고등학교 애들 가르칠 때 겨울이면 사경회를 해요. 5박6일씩 사경회를 하는데 애들이 새벽 시간에 가방을 매고 새벽에 와서 이 찬송을 불러요. 험한 세상에 날 혼자 있게 마옵시고 주여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 그 16, 17살 조그마한 아이들이 말이죠. 펑펑 울어요. 우리 어른들은 그러잖아요. 야 임마 네가 고민이 뭐가 있냐. 밥 다 주지, 운동화 사주지, 옷 사주지, 애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짐승처럼 생각해요. 제발 그러한 점수 못 딸 생각이 하지 말라고요. 인생이 뭔지를 알면 그렇게 말 안한다고요. 그 아이들이 그 찬송을 부르면서 엉엉 우는 거예요. 엉엉 우는 거예요. 그 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 나의 이 상하고 깨어진 마음을 주님 아니면 고쳐 주실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향하는 간절한 마음이 되는 거예요. 이게 가난한 마음이에요.
사실 그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이 가난한 마음이 없으면 죄인이에요. 죄 가운데 살아도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으면 하나님 찾아가서 용서해 주신다는 거예요. 은혜를 주신다고요. 정말 그게 그게 가난한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정말 우리들이 이 가난한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 그러한 가난한 마음이 없이 성경을 배우는 것은 이게 성경 지식 장난이에요. 이러한 가난한 마음 없이 영혼을 섬기는 것은 직업, 이러한 가난한 마음이 없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노래, 이러한 가난한 마음이 없이 교회 일 한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예수님이 외식을 그렇게 심하게 탄핵하셨는데 그게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사람을 구제하고 그러는 것을 그렇게 탄핵하시고 기도하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비난하시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구제하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행위와 딱 붙어 있지를 않는 거예요. 그게 전부 다 위선이고 거짓이고 가식이에요. 그게 제가 늘 이야기하듯이 진실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늘 행위와 감정이 일치되어 있는데 그 전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된 상태의 신앙생활을 진실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실하다 그래도 뭐 높은 지휘에 올라가고 말이지. 그러한 게 아니라고요, 여러분들. 그 진실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학식이나 나이나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요. 그거예요. 그러한 가난한 마음이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있어요. 참된 신자의 표지는 뭐냐 하면 깨뜨려진 마음이에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적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희망이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고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그래서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그 마음, 하나님께 순종할 때도 있고 불순종할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그 마음, 그게 바로 상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안 되고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안 되고 진짜 그 참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마음, 그것이 진짜 가난한 마음이에요. 가난한 마음. 그게 진짜 가난한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가난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동기는 다양할 수 있어요. 사업이 어려워서 한동안 무관심하게 되었던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갖을 수도 있고 건강이 나빠져서 한동안 아무렇게나 생각하면서 살았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애들이 속을 썩여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매달리다 보니까 이게 다 내탓이구나 하는 마음을 가질수도 있는 거죠. 그런 것들은 모두 다 그런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도구일 뿐이죠.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주목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란 말이죠. 여러분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 자리에서 대게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잖아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앉은 자리가 지금 여러주째 와서 예배 드리는 자리인데 한번 여러분 어때요. 정말 가난한 마음이에요? 아 정말 나는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이구나. 잘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늘 실패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무슨 희망이 있을까. 하나님, 다른 사람만 도와주지 말고 하나님 나도 좀 도와주세요. 하나님 저는 주님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하나님, 나를 그냥 돌려 보내지 마시고 나를 꼭 만나 주십시오.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애절한 나머지 진짜 주님 밖에는 생각나는 분이 없는 상태에서 예배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느냐는 거예요. 왜 그렇게 맨날 예배를 늦어요? 그렇게 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겠느냐는 거예요. 하나님,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의 은혜를 구해 봤어요? 그럼 하나님의 감격적인 사랑 속으로 나는 왜 못 들어갈까요? 하나님, 주님이 차별대우 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왜 이렇게 매마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나에게도 그러한 승리, 그러한 환희, 그러한 기쁨, 그렇게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이러한 참된 신앙생활의 진수를 한번 맛보게 해 주십시오. 진짜 이러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이제 청산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마음 때문에 오늘은 주님을 만나고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한번 엎드려서 여러분들이 그 앉은 자리를 눈물로 적셔 본 적이 있느냐고요. 그 마음이 없는게 하나님에게는 큰 슬픔이에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없이 그렇게 건조한 신앙생활을 계속 하면서 자기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거란 말이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저 세상에서 칼 들고 설치는 살인범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은 저 혼자 씩씩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에요. 주체성이 강한 사람들, 얼마나 주체성이 강한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에요.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기 싫어하셔요. 그러한 자신 만만함이 여러분들을 인격적인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그러한 방해물들이 되고 있는 거예요. 보십시오. 오늘 이 시인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고 있어요. 하나님,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우시고 주님의 자비로 내 영혼을 가득채우셔서 나를 시기하고 멸시하던 수많은 원수들이 보는 면전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자녀인 것을 확인시키시듯이 아라크의 잔치상을 내게 베푸시고 그리고 수많은 원수들이 보는 그 눈앞에서 그 상을 베푸실 뿐 아니라 성령의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셔서 나로 하여금 이 견딜 수 없는 충만한 기쁨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이제는 주님, 저는 주님 때문에 정말 행복합니다. 이 고백이 있느냐는 거예요. 이 고백이 있다면 겨우 주일날 와서 주보 한 장 얻어 가는게 그게 신앙생활이라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예요. 무슨 면목에 생활 기록부에 종교를 기독교라고 써요. 그렇게 신앙생활하면서. 낯이 뜨겁지도 않아요?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 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채워진 이 기쁨, 이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러한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인 것을 여러분들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부러우십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 부러워 할 만한 사람이 아주 많아요. 돈 많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죠. 힘이 없어서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고통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권세있는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일 수 있어요. 그리고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은 삶이 돈이나 권력보다도 더 부러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완전한 행복은 아니에요.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갖기 위해서 애를 써요.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애 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할 거예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완전한 조건은 아니에요.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완전한 조건은 하나님 자신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이 없어도 하나님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이미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고 세상 즐거움에 취해서 살아가고 싶어하는지 아세요? 그것은 정말 세상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더 크고 완전한 사랑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 다른 것으로 나타난 거예요. 다른 것으로 나타난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뭔가에 지나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병적 현상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자기의 행복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더 향락적인 데 자신을 내어 던져서 자신의 영혼에 곤고함을 잊어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해요.
아는 어느 목사님이 지체가 마약을 하도 하길래, 그거 왜 하냐 하면서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더니 그 하는 말이 재밌어요. 목사님, 목사님은 이 세상을 맨 정신으로 사는게 얼마나 무서운건지 모르죠? 그래요. 그렇게 자신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잊어 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러나 꼭 그렇게 나쁜 것 말고 사람들이 볼 때 좋은 것을 추구하면서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행복을 찾아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학문, 어떤 사람은 스포츠, 이런 것들 말이죠. 예술. 그러나 사실은 그것도 비교적 상대적으로 이 세상에서 폭력이나 향락, 오락 보다는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도 역시 다 지나가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에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영원한 것은 아니에요. 모두 세상과 함께 지나가는 거예요. 나라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들, 비교적 보람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죠. 그렇죠. 그 나라가 망하고 나면 새로운 한 나라가 오는데 거스렸던 사람이 되어요. 그리고 한 나라에 충성했던 사람은 그 다음 나라가 오고 나면 잊혀져요. 그렇게 모두 그렇단 말이죠. 30년 전에 젊은이들이 총칼을 들고 월남으로 전선에 파병될 때에는 그들이 자유를 지키는 투사라고 온 국민이 찬사를 했고 그리고 그들이 애국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그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이제는 자기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하노이에 있었던 그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악수를 나누고 무역을 해서 달러를 벌어오는 사람들이 애국자로 기억이 되고 있어요. 모두 세상과 함께 세월과 함께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고 세상이 지나가도 사라지지 않는 만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참된 만족이에요. 그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만족, 환희와 희열과 기쁨, 그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혼의 빈잔을 가득히 채우는 비결이에요. 하나님 아니면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거죠. 이 대치할 수 없는 영혼의 간절한 갈망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으로 나를 충만하게 해달라고 부르짖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그 탄식을 기억해 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떻게 삽니까? 그럭저럭 살아갑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격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 것이에요. 우리 교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목회자에게 목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기쁜 신앙의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마지못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그런 갈등과 고민으로만 가득차고 삶에 있어서는 어떤 기쁨도 없는 그러한 신앙생활과 세상생활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그런 인생을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처럼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이렇게 빈 잔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는 한없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약속을 주셨는데도 우리들이 그러한 영혼을 가득히 채우는 기쁨과 환희를 모르는 채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형식적인 교회 생활, 아무렇게나 매주 매주 때우고 지나가는 그런 생활,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진리를 등지고 살아가는 그러한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배은망덕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그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안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흠없고 순결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자기를 비워 깨뜨려버리신 것은 자기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고 자기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으심으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어요. 우리를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감격 속에서 인생을 기쁨과 환희 속에서 살고 그래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늘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을 드리는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승복이 없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이 가난한 마음이 결핍된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계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마치 하나님 없는 자처럼 주님께 도움이 끊어진 자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처럼 기쁨과 사랑과 희열과 화평과 영광과 거룩과 이런 것들은 그저 바라보고만 살다가 그저 파리한 채로 죽어가는 이 운명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너무 힘이 들어서 어제 그저께 저녁때 강원도 쪽에 가서 기도를 했다기 보다는 푹 쉬었어요. 그리고 숨을 좀 돌리고 그리고 이제 서울로 들어오는데 너무 싫어요. 진짜 싫어요. 난 진짜 목회가 아니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서울을 떠났을 거예요. 교회 하나 빼놓고는 서울에서 보고 싶은 게 없어요. 서울 사람들도 별로 싫어요. 여러분들 빼놓고, 이제 싫어요. 그런데 고속도로가 끝나서 들어오는데 벌써 새카만 매연이 보여요. 저기를 또 들어가야 되는구나 그리고 들어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살기 싫은 서울에 사는데 이렇게 살기 싫은 서울에 제가 억지로 사는데 그런데 이 속에서 살아가는 저의 모습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제 인생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찬양)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의 기쁨이 되는 것
정말 성경과 역사를 다 들쳐보면 어떤 사람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느냐. 주님 때문에 기쁜 사람이 주님을 기쁘게 한 거예요. 주님 때문에 기쁜 사람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요. 울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어요. 가슴을 활짝 펼치고 두 손을 높이 쳐들며 당당하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적이 있는가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엎드려서 피 눈물을 흘리는 때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의 시련과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작별, 그리고 익숙해진 것들과의 이별을 경험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은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입니다. 주님이 있음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주님께도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넘치는 환희와 기쁨 속에서 이 세상 거친 세상에서 수시로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의 눈물을 환희의 눈물로 닦아 내면서 고난과 박해의 슬픔을 거룩한 나라의 영광의 기쁨으로 쓸어내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이제 여러분들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되어야 해요. 이제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체면에 의해서, 전통을 따라서, 그저 가정의 식구들의 소원을 따라서 이 교회 나와 주는 이런 신앙생활 속에서는 이러한 환희와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어요. 그런 낡은 신앙의 동기들을 다 버리고 나는 비록 부족하고 죄로 가득찬 인간이지만 주님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기 원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우리 주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면서 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바로 이러한 거룩한 환희의 고백이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서도 울려 퍼지게 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5. 끊을 수 없는 선하심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시 23:6上)
녹취자 : 김세나
시편 23편 1절을 들어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들은 거의 종점에 와 닿았습니다. 1절에서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고백한 후에 우리는 그 고백을 따라서 푸른 초장에 우리를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으로 우리를 인도하심으로 우리를 공급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맛보고 이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무지, 고통 때문에 침체 속에서 빠지기 쉬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게 하시는지를 우리들이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지를 경험했고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대적들 앞에서 상을 베푸시고 우리와 하나님이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실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름으로 우리의 머리에 바르시는 것처럼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주님을 즐거워하고 찬송하고 섬기도록 만들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이 6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이 시인이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살펴 볼 이 위대한 시편 23편의 마지막 절은 두 문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령 나를 따르리라 하는 문장과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두 문장입니다. 앞에 있는 문장이 미래에 대한 시인의 확신을 보여준다면 뒤에 있는 문장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말합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히심이 자기를 끝까지 따라올 것이라는 그러한 표현입니다. 미래를 시인이 아직 살아본 것도 아닙니다. 미래에 대해서 시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아직 미래는 살아보지 않았고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는 알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어떠한 일들이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지만 이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나니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분명한 확신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따라올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의 모든 날 동안에 선과 인자가 기필코 나를 추격하고야 말리니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비행기가 미사일의 공격을 받고 공중에서 장렬하게 폭발하는 광경을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보셨을 것입니다. 요즘은 미사일이 하도 발달해서 이제는 왠만하는 비행기는 걸렸다 하면 그것으로 끝날 정도로 그렇게 정교한 미사일들이 많이 발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비행 전투기는 얼마나 빨리 날아가고 얼마나 정확하게 총을 쏘고 폭탄을 퍼 붓느냐도 기술 개발의 관건이겠지만 이렇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서 정밀하게 개발되는 최첨단 미사일로부터 어떻게 격추당하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느냐에 말하자면 개발의 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날라가는 쪽으로 미사일을 쏘면 비행기가 그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서 좌우로 방향을 돌리고 공중에 높이 솟아 오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미사일이 아주 뛰어난 미사일일 경우는 끝까지 그 꽁무니를 쫓아가서 결국은 격추 시키고 마는 것처럼 시인이 다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든지 또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이 있는 그러한 평탄한 길로 가든지 영적인 침체에 들든지, 가슴 벅차는 희열을 느끼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선과 자비하심이, 인자하심이 기필코 그 시인이 어디에 가든지 쫓아가서 그를 사로잡고야 말리라고 하는 불같은 확신을 오늘 필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사회학자 한 사람이 자기네 나라에서 상당히 이름난 저명한 사람들에게 24통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저는 귀하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빨리 피하십시오. 그랬더니 24시간 안에 그 전보를 받은 사람 24명 가운데 9명이 미국을 떠났습니다. 그 편지를 전보를 받고 떠났는지 아니면 떠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떠났는지 거기까지 우리들이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우리들이 바쁘게 인생을 살아가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일수록 미래에 있는 불안은 날마다 가중되는 것 같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돈을 더 모으고 또 원없이 가진 사람들은 그 돈을 지키기 위해서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은 불안할게 없죠. 주식이 막 떨어진다고 그러면 남의 일처럼 그 자꾸 떨어지면 안좋다고 남들이 그러던데 그냥 그 정도이지, 그렇게 위장병까지 생길 일은 없어요. 미래에 대해서 우리들이 불안한 것이 이게 인간의 모습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 불안을 통해서 인간은 오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지도 몰라요.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가르쳐주신 삶의 대치할 수 없는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삶의 대치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의 가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부를 누리고 권력을 손에 넣는가.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박수와 갈채를 받는가. 그런 것들이 인생의 성공의 표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면서 거기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인생의 성패의 관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심지어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지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삶을 사는 경우도 있고,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그 일을 가로막는 데 일생을 수고하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 일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못 살게 된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그 고귀한 교훈을 주신 그 문맥에서 우리들이 살펴본다면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때문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이 주어진 말씀의 문맥은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데 거기에는 너희를 위하여 땅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너희를 위하여 이 땅의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오히려 하늘나라를 위해서 너희의 보물을 쌓아두라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그러한 부탁을 저버리고 끊임없이 이 세상의 재물을 쌓아두고 마치 이 세상 밖에는 우리의 삶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이 세상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염려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는 백합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백합이 스스로 길쌈 수고를 하지 아니하여도 화려한 옷을 입은 것이 마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 보다도 더 아름답고, 공중에 나는 새가 매일 먹을 양식을 곡간 안에 쌓아 둔 적이 없건만, 어제 날아다니던 새가 오늘도 하늘을 날아 다니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어찌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지 않겠느냐고 가르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속에서 살아갈 정력을 가지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염려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지 않습니까. 염려와 근심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물론 염려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하고 신령한 염려이고 또 하나는 속되고 가치 없는 염려입니다. 이런 염려는 아주 좋은 염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주님이 부흥을 주실까. 내가 맡고 있는 돌보고 있는 영혼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잘 자라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열심히 내 딴에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성경 말씀에 비춰볼 때 내가 참 신자인가.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는 고민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맛보도록 만들어 주는 영생에 이르는 근심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리고 내일의 염려와 모레의 수고에 대한 모든 염려는 우리의 심신을 썩게 하고 우리의 영혼의 신령한 은혜를 모두 고갈시키는 속된 염려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거둘 수 있는 것은 썩어지는 사망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염려합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러한 피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가 아무 쓸데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믿음이 들어가면 이제 그 염려를 적으로 생각하고 물리치면서 믿음으로 그것을 싸우려고 합니다. 그러는데도 그것은 내일의 문제이고 오늘은 당장 그 염려를 끌어안고 살려고 합니다. 마치 동이 트고 날이 밝으면 총 뿌리를 겨누고 싸워야 할 적을 잠시 하루 저녁의 즐거움을 위해서 동침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모습이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깊은 만남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선 첫째, 우리들이 그러한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는 그 사람이 무엇을 염려하는 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염려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예화) 저는 글을 쓰니까 그리고 집회나 여러 가지로 늘 장소 이동을 하기 때문에 노트북 컴퓨터가 늘 필수품입니다. 그런데 그 무슨 역사인지 몰라도 말이죠. 꼭 중요한 시간에 글을 써서 뭔가 이 핵심을 꽤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늘 컴퓨터가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렇게 해가지고 쓴 게 날라가 버리기도 하고 그래요. 부분적으로는 저의 미숙이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그 컴퓨터를 생산한 회사의 책임이다 이거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금년에 컴퓨터를 그래도 꽤 투자를 한다 그리고 헌금하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이게 담임 목사실을 나갈 때마다 이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것도 몰래 들어와서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하나. 창문을 열고 혹시 이리로 사람 안 들어올까. 그래서 하도 불안해서 몇 만원 주고 도난 경보장치를 샀어요. 노트북에 걸어놓고 끈을 의자에 묶어 놓으면 쇠줄이니까 못 가져가고 그리고 가져가려고 손을 대면 비상벨이 울리게끔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놓고도 문은 잘 잠궜나. 잘 때는 그것을 가지고 사택에 가지고 가서 침대 옆에다가 놓고 잠을 자고 자동차에 갈 때는 혹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안전벨트로 묶고 갔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요.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 컴퓨터의 가치도 많이 떨어졌어요. 똥 값이 되었어요. 그런 거예요.
여러분들이 뭘 염려하는지 보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어요. 염려에요. 내가 가르치는 어린 영혼들이 일주일 동안 잘 살았을까. 주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서 살았을까. 그런 염려를 하면 그 영혼을 사랑하는 거예요. 지난 주간에 우리 목사님이 말씀 전하느라고 기운을 많이 쓰는 것 같았는데, 일주일 내내 별 것 없었을까. 건강해야 될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절 사랑하는 거예요. 주일날 와서 어, 이번 주에도 살았네. 그러면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사랑꺼리는 염려꺼리에요. 사랑하면 늘 염려해요. 어떤 때에는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그 염려가 가슴 깊이 베이는 거예요. 그렇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그래. 뭐 있는 대로 입고, 주어진 곳에서 살고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아무러면 어떠랴. 그것 말고 다른 것들을 생각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갑자기 염려들이 사라져요.
(찬양)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 염려와 내 근심이 아니라 이제껏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뭘.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로 살겠지. 그러면 마음 편해져요. 그리고 걱정이 떨어져요. 그런데 집착하고 사랑하면 그 염려의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아등바등 하면서 사람이 이 뼈와 살이 막 썩어 들어가는 거예요. 마음에 근심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한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 평안은 없어요.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주님을 모를 때에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이제 주님을 믿고 나서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게 중요하다라고 하는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가 없이는 삶의 평안이 없어요. 예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세상에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서슴없이 나쁜 짓 하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런 식으로 할 수가 없잖아요. 양심에 걸려서라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서 그것을 얻는데 나는 그것을 못하면서도 그것을 얻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더 크게 갈등이 더 커지는 거죠. 예수님을 믿고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으면 거기에서 맛보는 갈등과 고민이 하나님 전혀 모르고 짐승처럼 살아갈 때에 맛보았던 고민과 갈등보다 더 클 수가 있는 거예요. 평안이 없다고요. 평안이.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신자가 안 되려면 되려고 마음을 먹지 않으려면 신앙생활을 집어 치워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저 하나의 독선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해서 제가 그것을 말씀 드리는 거예요. 참된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참된 신자가 되고자 하는 그러한 거룩한 욕구를 갖고 그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갈등과 고민과 번민을 맛보는 거예요.
(예화) 제가 20살에 주님을 영접 했거든요. 20살인가 21살에 주님을 영접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 한 6개월 동안은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 다음에는 엉망진창이 되는 거예요. 그 전에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내 인생에 있어서 최대 실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하나님 믿은 거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진짜 하나님 안 믿었다. 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이 있는데 하나님이 자꾸 허락을 안 하시는 거예요. 나는 여전히 그것을 사랑해. 주님을 믿었어요. 주님도 사랑해요. 그 사랑이 시시한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여튼 사랑해요. 그리고 주님도 포기할 수 없고 그리고 세상도 포기할 수 없는. 그런데 내가 뭘 살고자 하면 하나님이 자꾸만 안 된다고만 그러시는 거예요. 그 자꾸 안 된다고만 그러시냐. 원망을 많이 했어요. 심지어 내가 이러한 모독적인 기도도 했어요. 하나님이 뭔데 아니 내 인생 내가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뭔데 자꾸 안 된다고 가위표만 자꾸 칩니까. 그렇게 사시고 싶으시면 당신이 직접 내려와서 살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주님을 믿었을 리가 없죠. 물러 주세요. 물러 줘요. 일수불퇴. 절대 안 물러줘요. 끝난 거예요. 그러니 어때요. 행복이 없어요. 더 고민이에요. 주님께로 더 멀리 도망가려고 하다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끄는 거죠. 이러다가 다시 돌아오면 주님이 계셔요. 가책을 느껴요. 또 도망가다가 저기 주님 생각, 여기 오면 세상 생각. 이게 사랑이에요. 이런 식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정리하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진정한 행복이 없다 이야기죠. 여러분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우울한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에요.
또 하나 이 그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래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인데 현재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이 관계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설명을 할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신앙을 갖고 나면 사실 과거도 미래도 별로 문제가 안 돼요. 왜, 과거에 주님을 몰랐을 때는 그냥 상처뿐인 과거가 있어요. 그리고 그 과거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내 인생에 그러한 일들을 하며 살아온 것이 진짜 나를 너무나 괴롭혀. 그런데 오늘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하고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삶을 살면 과거의 불행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된 거예요. 그래서 어때요.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내 찬송이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미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미래에 좋은 날만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없고 만약에 미래에 큰 난관과 어려움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문제가 안 돼요. 왜, 오늘 내가 현재적으로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거기서오는 진정한 감동과 기쁨이 있으면 그 어려움이 저렇게 큰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크게 도와주시리라고 하는 그러한 기대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미래에 예고되는 그 어려움은 우리에게 어떠한 아직 야릇한 모험심을 자극 하는 거예요. 야, 이 어려움이 닥치는데 야 진짜 하나님이 분명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해결을 해 주실 텐데 어떻게 해결해 주실까. 야, 진짜 흥미진진하다. 기대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것을 가리켜서 뭐라 그래요? 믿음이라고 그래요. 믿음. 다른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것을 쌍 시옷자만 세게 발음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믿음이에요. 어디에서 오는 거예요? 과거에 대한 고통이 변하여 감사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변하여 기대감으로 이렇게 바뀌는 것이 무엇 때문에, 오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이시고 정말 놀라운 분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이 인격적인 관계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참된 이 행복,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리고 내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못박혀 죽으셨고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그 관계가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오늘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 사람들만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문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거죠.
그런데 오늘 이제 이 시인은 우리에게 무엇과 무엇이 나를 정녕 따르리니라고 말합니까. 선하심과 인자히심, 두 가지에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에요. 그런데 이 선은 선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예쁘다. 즐겁게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히브리말로 토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좋다에요. 좋다. 좋다. 그리고 아름답다라는 말로도 쓰일 수 있어요.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이 좋다, 아름답다는 그 감각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설명하면 여러분들이 알 것 같아요. 우리들이 오늘날 이제 여성들을 보면서 아, 정말 아름답다. 그렇게 그 여러분들을 보면서 이제 누군가가 정말 저 사람 참 아름답다 그렇게 말하잖아요.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 좀 봐요. 그래요. 착각도 행복이에요. 그 아름답다고 할 때에 그 여성들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기준은 어떤 거예요? 주먹코 미인 그런 것 없죠. 그죠. 우선 8등신에다가 얼굴이 그 메주 같지 않고 갸름하고 그리고 하여튼 모든 게 제대로 붙어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 아니에요. 선과 이 곡선과 직선이 분명하잖아요. 그런데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서 아름답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자다운 게 아름다움이에요. 그냥 뭐 날씬하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러한 환상적인 미인은 히브리 사람들로 보면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아름답다고 표현 안 해요. 어떤 게 아름다워요. 여자다운 사람. 그래서 어떻게 해요. 얌전하고 그리고 애도 잘 낳고, 그리고 하여튼 여자로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그러한 모습의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똑같이 남자도 아름답다 그럴 때에는 기생 오라비 같이 반지르르 한 사람이 아니에요. 밭을 갈고 전쟁을 하고 한 가족을 힘으로 지킬 수 있을만한 남성다움이 흐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요.
이 선하다가 그러한 맥락이에요. 그래서 이 토브. 선하다라고 하는 단어가 제일 먼저 쓰인 게 창세기 1장이에요.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뭐라고 말씀하시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에 토브라고 하는 단어가 반복해서 계속 쓰여요. 뭘 말씀드리고자 하냐 하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선하심이라고 하는 단어는 조화와 균정을 이룬 상태에서, 조화와 균정을 이룬 상태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베스트인 최선의 것인 그러한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 선은 인간이 생각하기에 좋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실 때에 완벽한 조화와 균정을 이룬 아주 선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이거예요.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우리가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것이 일치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다른 거예요, 상당히.
(예화) 제가 맨 처음에 목사 되라는 이야기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었던 게 중학교 2학년 때였거든요. 그 사람 얼굴도 보기 싫었어요. 왜냐하면 세상에 뭐 할 일이 없어서 젊은 사람이 목사가 되어서 그래서 2층 교회해서, 그 때는 2층 교회도 많지 않고 천막 교회가 많았어요. 그 미군 텐트치고 천막 교회해서 그 코 묻은 돈을 받아서 그래서 밥을 사 먹고 사나. 그게 만약에 사실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나는 콱 죽어 버릴 거야. 리어카를 끌면서 사는 게 낫지, 인생을 그렇게 사나. 그랬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당장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래에 그러한 목사가 될 것이라고 상상만 해도 저렇게 끔찍해요. 베스트 타임이에요. 정말 구역질나는 일이었어요. 진짜 싫었어요. 왜 그렇게 사나. 정말 싫다. 그런 갈등을 여러 해 동안 했어요. 마음속으로 저도 그것이 좋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은 그 후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어요. 일주일동안을 금식기도를 하면서 결국 목사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너무 억울해서.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하나님이 결국 그렇게 가져가셔야 하나.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데 하여튼 나는 너무 슬퍼요. 그러니까 그때도 사실은 마음 깊은 속에서 원칙적인 동의는 되었지만, 온전히 나도 그것을 기뻐하는 단계까지는 못 갔던 거죠.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어때요.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고 다시 태어날 리도 없겠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무엇을 해서 내가 하나님께 그래도 너 있을자리에 있다고 인정을 받을 것이며 내가 무슨 일을 해서 여러분들과 같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겠으며 내가 무엇을 해서 이나마 이런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겠어요. 이제는 거의 받아 진 것이거든요. 문제는 그것은 받아들여졌지만, 아직까지 안 받아들여진 것 많잖아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겠다. 평생 교회는 안 떠나겠다고 이제 여러분들은 받아들였죠. 그렇지만 안 받아들여지는 것 아직 많잖아요. 그렇죠. 예배 시간마다 찔리기는 찔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이 무엇인가는 확인은 했는데 그대로 내가 살아보려고 하니까 뼈를 깎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거죠.
(예화) 제가 건강 진단을 받을 때마다 의사에게 경고 받은 것이 과체중이래요. 과체중. 그것은 점잖은 말이고 살 쪘다. 그 이야기거든요. 한번은 건강 진단을 받는데 그 의사가 무례하게 배를 쿡쿡 찌르면서 좀 빼세요. 그러는 거예요. 목사 되고 그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간강을 좀 돌보세요. 간에 지방이 많이 끼었습니다. 사실 그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도 몇 번은 시도를 했어요. 그게 안 되더라고요. 제가 하루에 한 갑 반씩 담배를 피우다가 끊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먹고 싶은 이 욕망을 절제할 수가 없어요. 아니 왜 웃어요. 심각한 이야기 하는데 눈물이 날라고 하는데, 진짜 절제할 수 없어요. 그러다가 2년, 2년 아니다. 재작년 겨울 12월에 기도하러 갔을 때인데 아주 강렬하게 내 마음에 살 찐 것 재차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살찌신 분 괜히 오해하지 마시고요. 살찌신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하나님이 강력하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너는 너무 너 좋은대로 사는 경향이 있다. 그거였어요. 그래서 그 때 강한 자극을 받고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자극은 잠깐이고, 그러다가 조나단 에드워드 책이 나와서 그것을 읽으면서 놀란 게, 100개인가 그 결심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 8개가 먹는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안 됐으면 그렇게 여러 번 결심을 했겠어요. 절대 그러지 말자. 절대 그러지 말자. 잘 되는데 꼭 파티가 있는 날에는 잘 안 된다. 그 영적인 거물이 그것을 가지고 씨름을 한 거예요. 조나단 에드워드의 실물은 우리들은 보지는 못했지만, 옛날 사람이니까 그런데 사진을 볼 때는 그렇게 뚱뚱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문제가 아니라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 마음대로 살아가는 그 무언가를 본 거죠. 뚱뚱한 사람들 가운데도 신령한 사람 많아요. 스펄전 같은 사람, 무디 같은 사람, 그러니까 절대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곡해 하시면 안 돼요. 고백으로 들어주세요. 제게 있어서는 그랬다 이거죠. 그래서 이러면 안 되겠다, 그래서 강한 싸인이 있어가지고 그리고 어느 정도로 심각했느냐 하면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자유함이 없는 정도까지 갔어요. 그것은 저에게만 특별히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모두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결심을 했는데 두 달 만에 10킬로그램을 뺐어요. 그런데 지금도 지금도 어떤 때는 저녁 때가 되면 에이씨, 체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한번 거하게 먹고 자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어제 밤에도 그런 유혹을 받았어요. 어제 밤에도. 그러면서 저는 뭘 하나 깊이 느꼈냐 하면 자기 맘대로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 인간의 골수까지 배어 있다는 거예요. 아주 뼈속 깊이 골수까지 배어 있는 거예요. 이게 단지 식습관이나 수면습관에서도 이렇게 이 뭔가를 고치려 할 때 내 몸이 이렇게 미친 듯이 저항을 하는데, 하물며 내 영적인 삶,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제시해 주시는 길을 안 가고 내 맘대로 살려고 하는 이 뼈속 깊이 배어있는 그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방종한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지 생각을 해보라고요. 여러분 굉장히 힘들어요. 보통 힘든게 아니라고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를 하고 있었다라는 말씀이 나오죠. 그렇죠. 습관화 되어 있는 것은 비교적 쉬운데 습관화 되어서 몸에 배고 뼈속에 깊이 스며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은 삶을 살려고 애를 쓸 때 그것은 강한 물결을 거슬러서 헤엄을 치는 것처럼 고통 스러운 일이에요. 새벽기도 습관이 안 된 사람들이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오려고 결심을 해 봐요. 오늘 펑펑 울면서 하나님 약속해요. 그러면서도 아침에 일어나면 6시에요. 그렇게 힘든 거예요. 그렇게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선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그런 데서 나온 거예요. 그렇게 생각과 생활 습관 그 다음에 영적인 삶, 그러한 모든 것들이 뼈 속 깊이 배어 들어가서 제 멋대로 살고 싶은 것이 배어 들어가 있는데 그 배어있는 그 성품의 좋은 것이 내게 좋은 거라 이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거죠. 그래서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을 내 선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복의 과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성화된 정도는 하나님의 선과 내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그 선 사이에 격차가 가장 좁혀진 그 상태가 곧 성화의 정도라고 보는 것이 틀림이 없다 이거죠.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잖아요. 순종하면,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 순종의 삶을 살아야지만 우리들이 주님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그 친밀하고도 생명적인 연합이 실제적으로 우리 속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들이 계속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대로 계속 살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좋은 대로 살고 싶은 거예요. 어떤 것은 우리가 선하다는 것 그 자체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도 있지만, 어떤 때는 다 잘 알아요. 우리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이것이 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에, 우리의 선을 하나님의 선보다 더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항상 그런 갈등을 버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우리가 진짜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움직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마음보다도 하나님이 내가 필요하다 생각될 때 주님이 나타나 주시는 것, 그런 것을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꼭 뭐와 같으냐 하면 농구할 때 보면 이 슛을 쏘잖아요. 그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 보고 그런다고요. 하나님, 슛은 내가 쏠테니까 패스나 좀 잘 해줘요. 골인이 되면 내 화려한 슛 솜씨 때문이고, 노 골이 되면 당신의 패스가 후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적절히 자기가 원하는 때에 불러서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구도의 인생에 살아가는 데 자신이 살고 싶은 구도대로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면서 간월적으로 주님의 도움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계속 하는 기도도 까놓고 보면 날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는 기도보다도 주님, 팍팍 밀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라고요, 대부분. 팍팍 밀어 주시옵소서. 그런데 너무 팍팍 밀어주면 벼랑으로 떨어져요. 그러지 말라고 설교 하는 거예요.
(예화) 도자기 만드는 공장에 못 가 보셨죠? 전 한번 가 봤거든요. 참 재미있어요. 흙을 갔다가 농로, 전에는 발로 했는데 이제는 모터로 돌아가더라고요. 그 위에다가 올려놓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신비한 도자기를 빚는 거예요. 우선 빚는 것을 잘 빚어야 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칠을 잘 하고 그 다음에 굽기를 잘 구워야 해요. 3박자가 잘 맞아야 하는데 현란한 손놀림으로 이것을 빚어요. 그런데 빚다가 실패를 하더라고요. 실패를 하니까 그것을 갖다가 연못처럼 구덩이를 파 놓은 곳에다가 물도 좀 있는데다가 휙 던져요. 그게 뭐냐고 그랬더니만 망친 것만 던져 모아놓는 흙더미래요. 그러면 그러니까 들여다보니까 어떤 것은 뭐 오강같이 생긴 것도 들어가 있고 어떤 것은 술병같이 생긴 것도 들어가 있고 그래요. 어떤 큰 것도 있고 조그마한 것도 있고 그래요. 집어넣었더니 사람들이 맨발 밟고 들어가서 막 밟아요. 그러니까 이제 진흙으로 만들어요. 그 진흙을 다시 갖다가 이렇게 빚어서 새로운 그릇들을 만드는 거예요.
(찬양) 주님을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그렇게 진흙처럼 되어서 하나님의 선을 나에게 있어서도 선으로 생각하고 감격적으로 그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부서져야 해요. 부서져야 해. 깨어져야 한다고요. 더 깨뜨려지고 더 부스러져서 그래서 주님이 이것이 내 뜻이고, 나는 네가 이 모습이 되는 것이 좋다라고 말씀하실 때 아멘 할 수 있게 된다 이거죠. 잘 이해가 안 돼죠?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릴게요.
아주 여러분들에게 생생한 경험을 들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교회에 나왔어요. 처음에 교회당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았을 때는 뭐 이래 이거. 11시인 줄 알았는데 11시 15분 이잖아. 아이씨 괜히 15분 일찍 왔네. 어 주보도 없네. 어 성가대는 어디 갔나. 아이씨 설교는 왜 이렇게 길어? 못 생긴 사람이 말만 많네. 별 생각을 다 하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이 은혜 받고 울면 초상났나, 울긴 제길. 그러는 거예요. 그대로 자기가 살아있어요. 그런 사람이 예배드리나 마나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10년 20년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날 예배당에 들어와요. 어디에서 저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갑자기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자기의 피범벅이 되는 땀을 느끼는 거예요. 그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았구나. 정말 참다운 쉼은 십자가 그늘 아래 밖에 없구나를 느끼는 거예요. 찬송을 부르는데 하필이면 자기 들으라고 부르는 찬송 같아요. 설교를 하는데 오늘 진짜 그날이 그날이에요. 그러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요. 그리고 말씀을 듣고 보니까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삶이 정말 짐승 같은 삶이었고 하나님 원망하면서 살았지만 알고 보니까 자기가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면서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것으로 받는 고통이었어요. 그것을 깊이 깨닫고 나서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러한 사랑을 마다하면서도 탕자처럼 일생을 살았구나. 그러면서 이제껏 까지는 자기가 상처받고 고통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한을 품으며 살았는데 그런데 이제부터는 삶의 모습이 주님을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을까 생각하면서 통곡하며 아파하는 거예요. 그때 이제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하여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거예요. 그게 깨뜨려지는 마음이에요. 얘야, 네가 이제껏까지 산 삶은 다 헛된 것이었다. 이렇게 말할 때 그렇게 깨어진 마음으로 있을 때에는 내가 뭘,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일생을 헛살았습니다.
(찬양)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이전에는 저 잘난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는 주님 없이는 한걸음도 떼어낼 수 없는 길 잃어버린 양의 신세가 되어서 가시에 찔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는 거예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게 부서진 마음이에요. 그 마음에만 하나님의 선이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저는 목회자로서 목회하면서 보람을 느낄 땐, 교회가 크게 되었을 때 뭐 그런 것도 하나의 보람이 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보람 있게 느껴지는 때는 어느 때냐 하면, 사람들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을 때, 무슨 의미이냐 하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할 때 그것은 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거라고요. 하나님을 목자로 받아들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을 볼 때, 그 때 내가 보람을 느껴요. 하나님도 그런 마음일 거예요. 그죠.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나는 죽고 주님은 사시옵소서.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주님만이 내 안에 사십시오. 하나님, 나는 진흙이고 주님은 토기장이입니다. 무엇으로 나를 빚으시든지 주님의 뜻대로 나를 빚으시옵소서. 저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는 대로 인생을 살겠습니다. 그렇게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선이라면 그것을 내 선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노라고 주님을 향해서 그렇게 부서지듯이 녹아질 때가 시간으로 보면 몇 시간 쯤 되어요? 생겨먹기가 돌 같이 굳고 휘어진 나무처럼 잘못 살아온 이 인간들이 그러한 시간이 아주 많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깎이는 아픔, 주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지기 위해서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버리는 마음. 그러한, 그러한 자기 부서짐, 자기 깨뜨려짐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선을 내 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참다운 신앙의 행복,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은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내 선이 되는 거예요. 내가 간절히 살고 싶은 삶이 주님이 살게 하시고 싶은 삶이에요. 주님이 간절히 나에게 이러한 존재가 되어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모습이 나도 오늘 그렇게 닮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며 고민을 하는 그 모습일 때에 그 때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한줄기 불꽃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라고요. 그게 자신이 깊이 깨뜨려지는 거예요.
만약에 오늘 이 시인이 아직까지도 여전히 자기의 선이 살아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선과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선이 엄청난 격차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 같은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거예요.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목자 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목양을 받으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목사가 그렇게 참다운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를 마음을 다해서 가르쳐줘도 거기에 복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그게 결국은 하나님이 아무리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셔도 그것은 하나님 당신 생각이고, 난 나 좋은 것 따로 있다 이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갈등이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정한 행복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하나님의 선을 자기의 선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겉껍데기의 삶 정도는 흉내 낼 수 있는데 그 내면의 내용 자체가 그렇게 진실로 채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핀트 안 맞는 사진처럼 하나는 하나님의 선에 대한 초점, 하나는 나에 대한 초점. 삶의 목적과 방향이 흐릿한 거예요. 미친 듯이 돈만 벌면 된다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말이지, 고통 가운데 몰아넣고 사기와 협박과 살인, 공갈 이런 것을 하면서 담대하게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 각오도 안 되어 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일 각오도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세상과 하나님, 교회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세상가면 교회생각, 교회가면 세상생각. 주님께 순종하려고 마음먹으면 세상에서 손해 보는 것 같고, 세상에 순종하려고 보면 영생은 있지 않고 이런 식으로 계속 살다가 어떻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할 텐데, 주님께 순종할까. 세상에 순종할까. 인격적으로 승복해야 될 텐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흰 머리 늘어나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이러고 있는데 불연 듯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는 거예요. 됐네 이 사람아 이제 그만 올라오게. 그리고 초상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인생을 살고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겨우 그런 식의 갈등하는 삶을 우리에게 안겨주시려고 좋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요?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환영하는 사람 없고 사랑하는 사람 없는 이 거칠고 죄와 슬픔이 많은 어두운 땅에 보내셔서 육체를 갈라 피 뿌려 죽게 하신 그 구속의 사건이 겨우 이렇게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세상에서는 교회 때문에, 교회에서는 세상 때문에 범민하다가 죽는 인생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면 우리의 주님의 죽음이 너무나도 초라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런 식의 삶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깊이 죽어야 해요. 내가 죽고 내 생각이 부서지고 그리고 내 인생의 목표가 깨뜨려지고 그리고 내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자아 중심적인 이 욕구가 다 부서져야 해요. 뭔가를 여러분들은 빚고 있었겠죠. 그런데 망가진 거예요. 속히 연못에 집어 던지고 발로 밟아서 그래서 어떤 토기장이의 손에 의해서도 잘 빚어질 수 있는 한 덩어리의 진흙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의 농로위에 놓여 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손이 무엇으로 빚으시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나를 통해 빚어지면 그것이 가장 선한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면 나 보기에도 좋은 것이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를 주님의 손에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맡겨드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겠어요? 간단해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해요. 만나고 있다고요? 더 깊이, 더 깊이. 그래서 하나님 밖에는 우리의 인생의 참된 목자가 없고 어디로 이끄시든지 주님의 손에 이끌려 그 목자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대치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그 확신 속에서 주님 자신의 품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행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변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해도 여러분들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해도 세상은 여러분들,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신앙을 버리고 참다운 믿음의 맛을 잃어버린 맛 잃은 소금이 되고, 여러분들의 믿음으로 타오르는 그 불꽃이 꺼져서 빛을 잃은 등불이 될 때까지만 세상이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신실해요. 언제나 자기대로 자기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선을 포기하고 그 하나님의 선으로 살고자 하는 이 진실한 기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의 선은 깨뜨리고 주님의 선을 선으로 받아들여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주님이 만드시고 싶어 하셨던 그런 사람들 되고 주님이 살게 하시고 싶어 하셨던 그러한 삶을 살아서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기쁘고 주님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는 그러한 목양의 관계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16.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라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6)
녹취자 : 김세나
훌륭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시, 불후의 아름다운 문학작품의 성패는 그 마지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가 지은 불후의 명작, 무기여 잘 있거라 마지막 부분을 17번이나 고쳐 썼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름다운 작품의 마지막을 어떻게 훌륭하게 장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빛나기도 하고 빛을 잃기도 합니다. 불후의 아름다운 시편 23편도 그 마지막이 그렇게 아름다워야 할 텐데, 우리들이 얼핏 보기에는 그 아름다운 시편 23편의 마지막의 장면이 너무나 시시한 것 같다 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히리로다 라고 말 힙니다. 저는 이 시편 23편 마지막 절에 광대한 의미에 눈 뜨기 전까지만 해도 이 시편 23편의 마지막 절은 그저 시편 여러 곳에서 흩어져 나오는 후렴구 같은 것 중의 하나로 마무리 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말이죠. 그러나 사실 어느 한 순간 이 23편이 가지고 있는 진실한 의미의 눈을 뜨게 되는 그 순간에 저는 시편 23편의 마지막 절이야 말로 이 시편 전체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고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1절에서 여호와가 자기의 인생의 목자가 되어 주신 다라고 고백하고 2절서부터 5절에 오기까지 그는 공급하시고 약점을 알며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영적인 침체로부터 자기를 회복시켜주시는 회복의 은혜와 그리고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이름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열심을 터득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홀로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를 경험했고 드디어 5절에 와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시는 견딜 수 없는 기쁨과 말할 수 없는 가슴 벅찬 환희를 고백한 후에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추격하고야 말리라고 하는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결단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히리로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의 장엄한 마지막 장면을 이제 이 23편 강해의 마지막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언제 이 시인이 이러한 아름다운 고백을 하게 되었느냐, 시기의 문제와 그리고 구약에서 여호와의 집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하는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시인이 이러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영광스러운 고백을 남겼을 때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한 후였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인은 주님이 목자 되신다는 사실을 단지 형식적으로 구태의연한 어투로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뼈 속 깊이 자신의 인격 속에서 주님이 자기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전 포괄적으로 경험하고 그리고 오늘 그 억누를 수 없는 가슴 벅찬 감격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는 이 고백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평범하면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한 교리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는 인격적인 승복과 감화된 신앙이 있는 그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집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뒤따른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신앙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집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리움들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의 인격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체험하고 난 후에는 그들은 예외 없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교회 속에서 구체화 하고 싶어 했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동일하게 고백하는 성도들과 함께 그 교회에서 경배하는 시간을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기의 지체들을 교회 속에서 섬기는 일에 커다란 보람을 느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만약에 우리들이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방향이 없는 신앙생활에서 돌이켜서 진정으로 주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모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감화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그 십자가의 사랑안에 살아간다고 할 것같으면, 우리는 반드시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한 교회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교회속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일이 그 성도의 마음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이 평범한 복음의 교리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그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있겠다고 하는 이 고백이 바로 이 시인이 이러한 모든 인생 속에서 주님의 목자 되심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고백을 했다는 것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은 도대체 여호와의 집이 어떤 것이길래, 또 여호와의 집에 대한 신앙이 어떤 것이길래 오늘 시인이 이 아름다운 23편의 위대한 시를 하나님의 집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평범한 고백으로 마무리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시편 23편 속에는 두 개의 유비, 즉 아날로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3절을 강해하면서 말씀 드렸던 여호와와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 이름은 이 땅에 두셨고 하나님이 이름을 이 땅에 두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이름을 향한 충성심으로 입증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질 때, 기뻐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 깊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마련입니다. 동일하게 구약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하나님의 집을 인해서 나타났다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넘어서서 자기의 백성들이 당신을 부르실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특별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 주시는 한 장소를 이미 오래전에 예비하고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 가나안에 이르게 되면 한 장소를 주님이 정하셔서 거기서 거룩한 성소를 삼으시고 주의 백성들을 만나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도착하기 전, 유리하는 광야의 생활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편의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것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이동식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움직일 때에 제일 앞서서 움직였고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지시하시는 장소가 정해지면 제일 먼저 텐트로 지어진 성막이 펼쳐지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놓고 열 두 지파들이 각각 둘러서 진을 침으로 이제 잠시 동안의 야영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동식 성전인 그 성막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도 지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시는 계시의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성막을 중심으로 타오르는 불기둥을 밤에는 지켜 보았고, 그리고 낮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뜨거운 태양 볕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구름기둥의 가리움을 받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특별히 깃든 곳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지만 매우 특별하게 나타나 강림하시는 지정된 장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과 신앙에 수많은 희망을 하나님의 성전에다가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알고 싶으면 성전에 관한 그들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면 그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일부터 시작해서 국가적인 중차대한 일까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과 진지한 하나님의 왕들은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집을 찾았고 그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찼던 여인, 한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엘가나의 아내이기도 한, 그 여인은 시집을 갔지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슬픈 여인이었습니다. 첩인 브닌나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 열 아들보다도 더 나의 사랑이 낫지 않느냐고 위로하는 사랑하는 남편 엘가나의 위로를 뒤로 하고 슬픔으로 가득찬 이 여인이 평범한 가정의 문제인 아이 낳는 문제를 가지고 찾아 올라간 곳은 하나님의 성소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미친 듯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서러움의 오열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고,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를 움직인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일들 뿐만이 아닙니다. 또 여러분들은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갔던 죄인인 한 세리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나의 고민꺼리는 자식의 문제였지만, 이 죄인인 세리의 고통스러운 문제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는 문제였습니다. 죄의식 때문에 어쩔줄 모르는 이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가슴을 쳐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흐느끼며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 주신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성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종종 이스라엘은 외적의 침입을 받아서 인간적인 방법적으로는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때에 왕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아버지 앞에 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호소했고, 주님은 거기에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심으로 이스라엘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건져 내기도 하셨습니다. 선지자나 또는 학사 에스라와 같은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주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질 때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강팍한 마음을 부여잡고 성전에서 엎드려지며 주의 도우심과 그 백성들의 마음을 녹이고 치료하시는 여호와의 치료의 빛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함께 울고 성전과 함께 웃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그들의 성전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의 이러한 아름다운 성전 신앙은 신약으로도 이어지는데 신약에 와서는 성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이 성전이 이제는 교회로 바뀌게 되고 그 교회는 장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함께 모인 영적인 연합이 성전의 중요한 모습이 됩니다. 신약의 사명을 받았던 사도들은 항상 교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백성들의 도시 속에 하나님의 교회가 우뚝 서는 그것이 그들의 가장 커다란 갈망이었고 핍박과 고난과 견딜 수 없는 아픔 속에서도 그들에게 눌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염려였습니다. 핍박과 그리고 그 핍박에 대한 위협으로 모든 사람들이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성도들은 지하교회에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제 이 핍박과 시련을 때를 지나가고 나면 도래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찬란한 축복의 때를 기다리면서 서로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가 되었음은 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의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말하기를 아직 여호와의 궤가 휘장 가운데 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는 아름다운 궁전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궤가 초라한 휘장 가운데 있는 것을 가슴아파하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쓸 때, 성전은 집이라기보다는 성막이었고, 그 성막은 밖에서 보면 볼품이 없는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성막이 쳐진 그 주위에는 하얀 천으로 테두리가 둘렀고 그리고 그 한 가운데는 성막이 있었는데, 그 성막은 해달이라고 하는 물돼지의 가죽으로 만든 그러한 집이었습니다. 그 물돼지로 만든 가죽이 햇빛을 맞고 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그리고 광야의 모래 바람을 맞았을 터이니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거무틱틱한 가죽은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아름답고 현란한 모습의 성전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겉 볼품이 없는 그러한 성전이 바로 오늘 이 시인이 영원히 거하겠다고 고백하는 성막이었다는 사실에서 오늘은 또 다른 감동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의 이 교회생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생활은 아닙니다. 일주일 내내 힘들게 일했으면 주일은 한번 늦잠도 자고 가족들과 함께 야외에 나가서 휴가의 시간을 갖을만 한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일찍 일어나서 가방을 챙기고 그리고 혹은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혹은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혹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아침 일찍서부터 서둘러 교회로 나갑니다. 오전예배, 구역공부, 오후예배를 마치고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회의와 그리고 모임들에 참석하고 깊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피곤한 발걸음을 한 그리스도인들의 주일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종종 있는 공휴일은 교회의 행사의 밥이 된지 이미 오래이고 여름에는 여름수련회를 가느라고 여름휴가를 반납한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돈을 쓸 시간도 없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물돼지 가죽으로 만든 그러한 텐트를 모래 벌판 한 가운데서 보는 것처럼 재미없고 시시한 생활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 성막이 겉으로는 그렇게 후진데, 그 문을 열면 속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완전히 최상급입니다. 청색, 자색, 홍색 길, 짠 아름다운 옷감, 아름다운 천 같은 것, 금으로 만든 그러한 성구들 이러한 아름다운 것들이 그 속에 가득했습니다. 밖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주 희한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아름다운 성전이 바로 이 성막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보기에는 재미도 하나도 없는 술도, 담배도 먹을 줄 모르고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고 노래방과 단란주점을 드나들 줄 모르는 샌님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찬란한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고 주님이 자신들의 인생의 진정한 목자가 되시는 것이 어떤 행복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님과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의 미러들과 주님께 인격적으로 승복한 성도들의 가슴에 밀려오는 신앙적인 기쁨과 환희를 설명해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습니까. 그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부러워하지 않지만, 우리들도 그 사람들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두신 이 신앙생활, 아름다운 교회생활에서 맛보는 그 기쁨이 이 세상에서 얻는 잠시 즐거움과 쾌락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이렇게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 같은 신앙생활도 내면의 세계 속에는 정말 진실하고 아름다운 주님으로 말미암는 큰 기쁨은 주님께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 진실한 신자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억지로 끌려 다니듯이 교회 나오고 일주일동안 그래도 주일을 지켰는데 라고 하는 자기 양심이나 달래기 위한 동기에서 출석하기 위한 그러한 교회생활로는 영원히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러한 아주 은밀한 기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세속적인 즐거움과 쾌락에 빠져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부럽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진실한 신자. 그 생각 없이 교회에 드나들면 안 돼요. 생각 없이 교회에 드나들면 마지막에 심판받을 일만 커져요. 다 알았으니까. 그래서 무엇보다도 기억해야 될 것은 여러분들이 좋아서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여러분들이 기뻐서 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지만, 이것이 참된 신앙생활이지 어거지로 끌려나오는 것 같은 교회생활을 해서는 전혀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간절히 부탁하는데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인가 생각을 해보라고요. 나는 누가 시켜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내가 정말 그 주님의 양떼니까 그 주님의 품안에서 목양을 받으면서 사는 것 말고, 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이 고백이 교회생활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렇게 되면 그 우리의 인간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신앙을 갖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신령한 행복과 기쁨,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고 그 분의 마음에 맞게 살아가며 순종하며 사는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되는 이러한 축복들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데 말을 끌어다가 물가까지 데려갈 수는 없지만, 물 마시기 싫다는 말을 먹게 할 수는 없어요. 신앙생활도 여러분들 하기 싫으면 그만이에요. 전도를 하고 심방을 해서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은 강제로 할 수 있는데 진짜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가 없어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의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의 동기가 무엇이에요? 정말 그냥 구름처럼 떠돌다가 아무 교회나 돌아와서 아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에요? 정말 여러분들에게도 이 시인의 고백처럼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있기는 있는거냐 하는 거예요. 있기는 있는 거냐 이야기에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체험하고 나면 반드시 혼자 떠돌아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어요. 정말 진정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돼요.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깊은 그리움들을 갖게 돼요.
여러분들이 한번 여러분들의 짧은 신앙의 이력을 돌아보세요. 여러분들의 인생 가운데서 아마 여러분들은 언젠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껴지던 은혜의 때가 있을 거예요. 들판을 거닐면서 혼자 그런 때를 경험했나요? 술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술을 먹다가 그런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나요? 교회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동안에 그런 체험을 하게 되었나요? 아니에요. 반드시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교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랑하는 교회와 존경하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메이커가 없이 유통되는 믿을 수 없는 식품과 비슷해요. 아무리 자기는 훌륭한 제품이라고 말하면서 전시대 위에 올라도 이상하게 포장지를 보니까 유통기한도 없고 생산된 날짜도 있지 않고 메이커도 없잖아요. 그냥 누런 봉투에 혹은 하얀 비닐봉투에 쌓여져 있어요. 제품은 그럴 듯 해 보이는데 어느 나라에서 수입을 해 왔는지 어느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언제 생산되어서 언제가 유효기간인지 아무것도 표시가 되지 않은 식품을 여러분들이 성큼 사서 식탁에 올려놓을 수 있겠느냐고요. 그럴 수 없는 것이에요. 저는 이 점에 있어서는 단호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긍지를 가져도 저는 여러분들이 영향을 받은 교회와 존경하는 목사님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혹시 신학생들을 만나거나 동역자들을 고를 때, 종종 물어보는 것이 당신이 어느 책을 읽고 가장 큰 감격을 받았느냐. 당신이 만난 사람들 가운데 깊이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 어느 교회에서 훈련을 받았느냐. 이 세 가지 질문을 해요. 그러면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라고 선전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저는 파악이 됩니다.
(예화) 강남에서 한 2천명 정도 되는 교회 목회하는 목회자가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네 교인 가운데 20%, 400명 정도가 등록을 안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라. 물론 그 중에는 출장을 와서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에 등록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두 주 다니고 등록을 해보려고 결심하고 있는 분도 계실것이고, 혹은 친척집에 다녀왔다가 할 수 없이 본교회에 가지 못하고 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래토록 아무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또한 그 교회에 소속은 되었는데도 소속된 교회에는 행사 있을 때나 가끔 나가고 이리저리로 떠도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설교는 이 교회에서 듣고 찬양은 저 교회에서 배우고, 상담은 그 교회에서 하고 성경공부는 또 다른 교회에서 하고 그리고 기도회는 또 엉뚱한 교회에 참석하고 이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정말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한 교회에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한 목회자에게서 목양을 받으며 인격적인 승복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패한 자신의 본성과 더불어서 싸우고 매순간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를 굳히는 진지하고 꾸준히 계속되는 불굴의 의지를 동반한 노력이 없이는 거룩한 성도의 삶은 그렇게 학원을 다니는 식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만약에 여러분들 가운데 있다면 여러분들은 속히 이 시인의 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이고 주님의 목자되신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면, 이 시인처럼 속히 여러분들의 교회를 정하고 그 교회에서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목회자의 목양을 받는 진실한 신앙생활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내 인생의 목자이고 내가 그 분을 진실로 사랑한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없으면 없기 때문에 속히 교회를 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과 교제하며 목회자의 목양을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올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서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깊이 기쁨을 드렸던 우리의 신앙생활의 한 복판에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 우리가 사랑했던 교회가 있습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하고나서 여러 교회는 아니지만, 그저 너 댓 교회 정도를 다닌 것 같아요. 길게 다닌 교회는 8-9년 다닌 교회도 있고, 짧은 교회는 교회 개척하기 전에 잠시 부교역자로 생활을 하던 한 1년 반 정도 있었던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서 그 모든 교회들은 항상 제 마음의 그리움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 교회에서 복음을 들었으며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들을 터득해 나갔습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경험했고 좌가 있을 때에는 그 교회에서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의 죄가를 고백하며 사죄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에 인생은 굽이굽이마다 저는 교회를 떠나서는 제 인생을 생각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완벽한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그 때마다 적절한 목회자들을 보내주어서 신앙의 영향을 받게 해 주시고 섬길 영혼들과 봉사할 자리들을 만들어 주셔서 그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기쁨을 알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시때때로 성도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의 부족을 보게 한 동시에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들을 섬기며 보람을 느끼게도 만들어 주었던 것도 역시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 어른 들 틈에서 껴서 가마니 깔고 천막친 교회당에서 호롱불 걸어놓고 박수치며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라고 찬송을 부르던 그 천막교회도 저는 생각이 납니다. 주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나고 내 인생을 주님 앞에 드리던 사명을 받았던 그 교회도 기억을 합니다. 평신도였지만 변하지 않던 어린 영혼들을 쓰러 안고 아버지 앞에 눈물로 기도하던 지하의 기도실도 생각이 나고, 심지어는 신학교 다니던 때에는 주님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본성과 쉽게 허락되지 않는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던 신학교의 채플실을 저는 하나님의 집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적절하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때로는 용기와 위로, 때로는 책망과 격려, 때로는 하나님의 교훈과 바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오늘 여러분들 앞에 목자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나날들, 주님과 인격적으로 나누었던 감격스러운 교제의 나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아름다운 고백이 교회당에 묻어있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다녔던 옛 교회를 종종 방문하는 기회를 얻곤 합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방문하게 되는 우리의 옛 추억이 잠겨있는 교회당은 우리에게 얼마나 아련한 그리움을 안겨 줍니까. 그 교회가 크고 화려한 교회면 어떻고,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교회이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또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이름없는 목회자가 돌보고 있는 지하실의 교회이면 어떻고, 2층에 있는 교회이면 어떻습니까. 공터에 쳐진 천막교회이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교회들을 통해 들어설 때마다 우리가 즐겨하였던 그 자리를 걸어가 봅니다. 텅빈 교회당에 들어서서 내가 즐겨 앉았던 그 교회당에 들어가 그 의자에 앉았을 때, 수많은 성도들의 손 때 묻은 그 의자위에 손을 앉고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며 쏟았던 수많은 눈물들에 담긴 추억들을 떠 올립니다. 우리의 죄와 강팍함을 회개하며 주 앞에 눈물 짖던 참회의 시간들과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갈길을 몰라 울부짖던 그 절망의 날들에 하늘로부터 펼쳐져 내게 뻗쳐진 주님의 구원과 은혜의 손길들은 얼마나 커다란 감동이었습니까. 그곳에서 우리보다 곤고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기도 했고 하나님의 교회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성도들의 연합을 주시도록 눈물로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해 중보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떠났고, 지금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연대의식을 갖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섬긴 수많은 날들이 한 사람의 목회자나 한 교회를 위한 섬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한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교회를 어머니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다고 잘라서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인격적인 사랑은 항상 어머니의 품과 같은 그리운 교회들을 가슴에 남겨 둡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곳에서 우리가 만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져다준 행복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충성하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한 신실한 기쁨을 누리는 것을 말할 수 없는 특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 바로 그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특별히 무지하고 불순종하지 않는한 그 교회를 필연적으로 사랑하고 그 교회에서 함께 길 잃은 양들이었다가 주님을 만나고 한 목장 안에 양 무리가 된 지체들을 한 없이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예화) 제가 알고 있는 한국 교회의 존경스러운 한 목사님은 한때 신의주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성도들이 열심히 섬기던 때에 이미 공산당이 북한을 점령하고 이제 서서히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란 핍박의 위험이 매일매일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여기에서는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눈물을 흘리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래도 남아있는 성도들을 돌보며 목양을 하는 이 목사님에게 어느날 그 교회의 장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는 제가 지킬테니 목사님은 남한으로 내려가십시오. 그래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양 떼들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내가 어떻게 나 한 사람의 목숨을 건지고자 이 교회를 버려두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남아있는 양 떼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습니다. 그 때에 장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여기에 있는 남아있는 양 떼들은 소수입니다. 그리고 이 양 떼들은 목숨을 다하고 돌보겠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은 여기에 있는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성도들이 남한으로 내려가서 유리 방황하고 있으니 거기에 가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장로님에게 등을 떠밀려서 눈물을 흘리며 정든 교회를 떠나온 그 목사님은 남한에 와서 훌륭한 목회사역을 감당하셨지만, 장로님과의 만남은 그 것이 마지막이었고 얼마뒤에 그 분은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일평생 자기는 그때 이미 순교했고 이제 남은 이 목회사역에서의 생명은 그 장로님 때문에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목양의 길을 걸어갔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 장로님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교회를 떠난 그 때에 남아있는 양 떼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고 순교의 길을 후회하지 않는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던 그 힘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단지 자기의 직분에 대한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단지 하여튼 핍박을 이기겠다고 하는 인간적인 각오도 아닙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그러한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던 것은 거기에서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맛보고 그래서 남아있는 소수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아는 참다운 인격적인 승복과 신앙의 감화가 그 장로님을 그러한 인생으로 마치도록 시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교회가 없는 사람은 아주 딱 잘라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생활이 한 두주나 한 두달이 아니라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결코 광명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 옮겨 다니는 것을 헬스클럽 옮겨 다니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의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안 진실한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이 있고 그 교회에서 성도들과 만나는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아는 지식이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에 정말 사랑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그것도 그냥 어린 시절부터 다녔기 때문에 추억 때문에 사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오늘 내 주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주님을 만난 신앙에 깊은 감격과 인격적인 감화가 나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아름다운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화) 동구권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다가 공산화 되면서 2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 감옥생활을 하던 어느 목사님이 석방이 되었습니다. 석방되었을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지하 감방에서 수십년의 세월을 지내셨는데 외롭고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너무나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외로운 날들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라고 물었더니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서 혼자 캄캄한 방에 있는 것이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지상에서 내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나누던 교제를 생각하면서 외로움을 이겼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던 사랑스러운 교제, 성찬을 나누고 기쁨과 서러움을 함께하던 그 지체들과의 교제를 생각하면서 그 목사님은 20여년이 넘는 처절한 지하 감옥생활을 견뎌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이 광야 같은 세상을 늘 방황 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자기만 찾았어요? 아니에요. 자기만 찾은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렇게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쉴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 사랑만을 바라보면서 살고 싶어 하는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고 서로 사랑하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앙생활인 것이에요. 교회는 성도의 신앙생활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모시고 인생을 살아갑니다만, 항상 밝은 날만 있고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먹구름이 가득한 벌판을 지날 때가 있고 천둥과 번개가 떨어지고 낙뢰가 먼 산 기슭에 나무들을 부러뜨리는 두려움과 무시무시한 공포로 가득한 길을 지나는 인생의 길도 없지 않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큰 위기가 닥쳐서 곧 쓰러져 죽어버릴 것 같은 위험이 엄습할 때 여러분들은 어디를 찾으십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찾아 거기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와 시련의 부피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무엇인가 인생을 살면서 결단을 해야 될 때, 그러나 지혜가 부족하여 그 결단이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단인지를 알지 못할 때에도 여러분들은 어디를 찾으십니까. 누구와 의논하십니까. 교회를 찾아서 교회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주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구하며 주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남편이 건강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문턱에 넘나드는 위기에 놓였을 때, 여러분들이 찾을 곳이 교회가 아니면 어디이겠습니까. 왜 사람은 아프기만 하면 기도원으로 가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찾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교회에서 다시 한번 히스기야가 면벽을 하고 자기의 생명의 연장을 구했었던 것처럼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사업의 위기를 만났을 때, 여러분들이 찾아야 할 곳도 교회입니다.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일들 뿐만 아니라 기쁜 일들도 우리의 인생에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공부를 잘 해서 훌륭한 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여러분 그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제일 먼저 교회로 달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사업이 훌륭하게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을 때도 여러분들은 그 감사의 기도를 세상 사람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마시는 술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자기를 복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는 눈물이 베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는 항상 기쁨과 서러움 속에서 흘린 눈물과 감격과 회개 속에서 흘린 눈물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성도의 교회생활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상심하고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견딜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들어올 때에도 우리는 교회와서 기도하고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만나면서 우리들이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시민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속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 사랑하는 교회, 정든 교회, 언제든지 성도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고 나를 위한 기도의 소리가 늘 있고 나를 염려하고 나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가 없이 어떻게 여러분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그러한 교회가 없다면 이번 주에 여러분들은 결단을 하고 그러한 교회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태 속에서 여러분들이 적당하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신앙생활을 편의롭게 해나가는 기회로 삼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반쯤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가출한 청소년들의 가정생활과 같이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전에는 세상에서 돈 벌고 먹고 마셨어요. 일도 세상에서 하고 기쁨도 세상에서 맛 보았어요. 그러나 그곳은 또한 동시에 주님을 잃어버린 곳이기도 했지요. 이제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서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다른 점은 이제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 나가지만 영혼의 진정한 안식처는 세상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고 성도들과 함께 위로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마치 춥고 모진 바람이 부는 겨울날에 우리의 모여있는 양들이 서로의 목을 부비며 서로의 체온으로 서로를 덥히고 그렇게 서로 기대면서 살 듯이 그 지체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보고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이 교회 생활이 이게 성도의 진정한 행복인 것이에요. 남편이나 아내가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맛보고자 하고 자녀들이 밥 먹을 때와 잠 잘 때 이외에는 가정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살기는 하지만 가족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도의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우리의 참된 소망이 하나님이며 우리의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결국 아름다운 영원한 세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로부터는 이제 우리의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거예요. 참다운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루 돈푼이나 벌면 그 돈 주머니로 기뻐하고 하루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 때문에 눈물을 짓던 변덕스러운 그러한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열심히 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세상이 잠시 머무는 대합실과 같은 인생임을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참된 기쁨을 교회에다 두고 교회에서 어떤 성도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졌다고 하면 우리들이 기뻐하고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할 때 박수갈채를 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렇게 기쁨과 서러움을 함께하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이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있든지 그 교회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예화) 20년은 됐어요. 1980년대의 일인데 전주에 있는 기독병원에서 그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어떤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의사보고 자기 눈을 빼서 환자에게 이식을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의사는 그것은 죽은 사람 눈을 빼는 것이지, 산 사람 눈을 빼는 것은 아니다 하면서 거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의사가 자기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으니까 원장 선생님에게로 데려갔어요. 그 원장 선생님이 물었어요. 이 장기 기증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하는 것이지 살아있는 사람을 장기를 이렇게 하는 법은 없고, 더더군다나 눈은 당신도 써야 되는 눈인데 그 하나를 빼면 어떻게 될 수 있겠냐. 도대체 왜 그러느냐. 그리고 물었더니 이제 이 남자분이 사연을 고백하기 시작했어요. 이 사람은 집사님이었는데 시골에 가면 교인이 너무나 적고 또 교인이 적어도 도시에서 후원하는 교회들이 있으면 목회자를 둘 수 있는데 너무 교인도 적고 도저히 그 교회를 목회자를 서포트 할 수 없기 때문에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종종 있어요. 그러면 이제 장로님이 목회를 하시는 경우가 있죠. 이 교회는 장로님마저 돌아가시고 엉겁결에 자기가 집사인데 나이도 제일 많고 교회에 제일 오래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그 교회에서 할 수 없이 목사님이 없으니까 주일 예배 설교를 하고 새벽기도를 인도하게 되었으니 안수 받지 않은 목회자가 된 셈이었죠. 그런데 이 집사님에게 마음의 늘 고통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기는 이러한 좋은 집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집은 여전히 천막이라 이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집을 지어서 하나님께 바쳤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도시에서도 교회를 짓는게 쉽지 않는데 시골 그 가난한 교회에서 교회를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이 집사님은 여기저기를 수소문해서 도움을 받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도 바치고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청년들과 함께 낮이면 품팔이를 해서 벌어먹고 밤이면 강변에 있는 모래를 퍼다가 시멘트를 섞어서 블록을 찍어서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청년들과 함께 블록을 짓고 블록으로 벽을 쌓고 그 위에 루핑으로 친 집을 지붕을 둘렀습니다. 말이 성전이지 그저 학고방 같이 지어 놓았죠. 그리고 거기에 비닐장판을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들이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어려운 일이 생겨났는데 큰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이 불어서 어느날 가보니까 교회 지붕이 날라 가서 저 밭에 쪼개진 채 떨어지고 그리고 물이 들어오고 해가지고 결국 그 교회당이 다 무너져 버렸어요. 할 수 없이 다시 천막을 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온 교인들이 실망에 차 있을 때 이 집사님이 밤마다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면서 다시 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그 사람 부인에게 이 집사님이 질문을 했어요. 부인이 가만히 보니까 남편이 잠을 못 이루는데 무슨 걱정 있수, 여보. 물었더니 이 남편이 하는 말이 심상치 않아요. 여보, 당신 내가 불구가 되어도 날 안 버리고 살 수 있겠어? 그러면 내가 당신 아내인데 당신이 불구가 된다고 해서 당신을 버릴 리가 있소? 내 눈이 하나 없는 애꾸눈인데도 나와 함께 살 수 있소? 그야 물론이지. 그랬더니 신문 한 장을 갔다가 내밀면서 이것을 읽어보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안구 하나를 구합니다. 안구를 기증해 주시는 분에게는 후사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연락처가 쓰여져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얼마를 이 사람들이 주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50만원이면 되니까 내 눈을 그 불쌍한 사람에게 끼어주고 50만원을 받아서 교회를 다시 짓고 싶다. 어느 부인이 아이고, 그러세요? 하나만 빼서 되겠어요, 둘다 빼지. 그러면 100만원인데 그럴 부인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말도 되지 않는다고 빗을 얻어서 헌금을 했다는 사람은 봤지만 눈을 빼서 헌금을 했다는 사람은 못 봤는데 당신은 신앙생활을 해도 그렇게 유별나게 하냐. 좀 남들만큼만 하라고 말이죠. 그리고나서 밤마다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베갯닢을 적시는 거예요. 이게 하루 이틀이지. 매일 남편이 이렇게 우는 거라. 견디다 못한 이 부인이 여보,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 하고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남편은 뛸 듯이 기뻐하듯이 그 병원에 가게 된 것이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원장은 그 도시 큰 교회의 장로님이셨는데 안경을 벗고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몇 대 째 예수를 믿고 젊은 나아에 장로가 되어서 일평생 교회를 섬기면서 그러한 생각을 꿈에도 해 본적이 없는데 나는 장로이지만 이 장로가 집사인 당신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소. 그러더니 점심시간이 마치 되자 필수 요원만 남겨두고 모든 의사와 직원들을 강당으로 모았어요. 그리고 장로님이 설명을 했어요. 우리 모두 기독교인들인데 우리가 이렇게 대충대충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이 어려운 교회를 짓기 위해서 이렇게 눈물로 헌신하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 분을 그냥 돌려보내면 하나님이 슬퍼하실 것입니다. 즉석에서 헌금을 했는데 500만원이 넘게 나왔대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몸 바쳐서 사랑하고 싶은 교회가 있는 거예요. 멀리서 종탑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러한 교회가 있어요. 멀리서 교회 창가로 흘러나오는 교회의 찬송소리만 들어도 가슴 저미듯 그리움이 되는 그러한 교회가 있어요. 출장을 가거나 외국을 떠났을 때 주일이면 말할 수 없이 그리워지는 그 교회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교회를 가진 성도들이 정말 주님을 만난 성도들이지 아무 대나 가서 예배드릴 수 있고 아무렇게나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러한 교회생활을 하는 그러한 성도들이 정말 건강한 성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정말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정말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화) 어제 우리 김희철 집사님 형님이 돌아가셔서 의정부 쪽으로 문상을 갔는데 가다가 제가 40년 전에 다니던 초등학교 옆을 스쳐 지나갔어요. 이미 그 인근지역은 너무나 많이 변했어요.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하던 미아리 공동묘지는 집들이 빼곡이 들어섰고 그리고 넓은 논밭이던 자리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빌딩들이 들어섰습니다. 이제는 그 골목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요. 옛날에 정들었던 교사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새로운 신입교사들이 키 재기를 하듯이 우뚝우뚝 서 있어서 그렇게 넓어 보이던 운동장이 이제는 건물에 가려서 손바닥만하게 보일 정도로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잠시 40년 전에 다녔던 초등학교를 스쳐 지나가면서 40년 전의 아련한 추억들이 마치 빛이 바랜 필름처럼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요. 제가 어렸을 때 들어갔던 그 학교는 블록으로 지은 신축건물이 하나 있고 그리고 대부분의 교사는 아마 미 군정 시대에 탐하고 기름을 먹인 판자로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 판잣집이 그 교사의 전부였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삐걱거리는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춰서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르면서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모두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초등학교 2학년 다닐 때의 그 선생님, 얼굴은 동그랗고 마음씨 좋은 아줌마처럼 생긴 그 선생님이 저를 유난히 사랑하셨습니다. 저도 그 선생님을 무척 따랐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판잣집 교사에서 선생님 교무실이 있는 신축 교사까지는 어린 아이의 걸음으로는 단숨에 달려가기 힘들 정도로 멀리 떨어진 운동장을 가로질러야 하는 그러한 거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일찍 가기만 하면 창문으로 선생님이 나오시는 그 출구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선생님이 파란 까운을 입고 그리고 커다란 출석부를 들고 그 계단을 내려오시면서 운동장으로 들어오실 때만 되면 저는 누가 시키는 사람도 없는 교실을 뛰쳐나와서 그 선생님께로 그 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갔습니다. 그때마다 인사를 하며 선생님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거나 혹은 가볍게 안아 주시곤 했습니다. 그 선생님 손에서 억지로 출석부를 빼앗아 들고 앞장 가서 걸어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그렇게 행복했는지 몰라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어느 봄날에 똑같이 계단을 내려오시는 선생님을 발견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서 선생님께 인사를 했을 때 그 선생님을 저를 꼭 안아주시면서 뭔가 종이를 내게 내미셨습니다. 시험지로 된 위에 빨간 줄로 인쇄된 원고지에 가득 쓴 삐뚤빼뚤한 제 글씨였습니다. 그 글씨 위에는 선생님이 쓴 빨간 잉크로 고친 자국이 가득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나에게 말하기를 남준아, 지난 주에 네가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쓴 이 글이 가장 잘 쓴 글로 뽑혀서 네가 이제 우리 반이 아니라 우리 학교를 대표해서 서울 시내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단다. 내일처럼 그렇게 기뻐해 주시면서 활짝 웃으시던 선생님 그 이마에는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의 빛이 반짝 거리고 있던 그 기억이 여전히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발걸음도 들리고 그리고 그 카랑카랑하시던 목소리도 들리고 심지어는 학생들이 모두 운동장에 들어가 버리고 비둘기 몇 마리 날아다니던 횡한 운동장의 그 공허한 그 분위기가 그대로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선생님은 아마 지금 살아계시면 팔순이 넘으셔서 아마 구순 가까이 되셨을 것이고 저는 이제 그 어리던 초등학생이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속히 빨리 지나가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잠깐 지나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찌 지나온 인생만 빨리 지나가고 앞으로 남은 인생이 길겠으며 이렇게 인생이 덧없이 속히 지나가는 것이 어찌 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인생의 허무에 대해서 노래하며 그래서 더더욱 엄마의 가슴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품을 사모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아름다운 시로 하나님을 찬송했던 시인들의 노래 속에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이러한 실체를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육체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 풀에 메달린 꽃과 같도다고 고백을 하면서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른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시인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우리의 날은 너무나도 속히 지나간다고 고백을 하게 만드셨고 그리고 또 다른 시인들은 주께서 우리의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느냐고 하나님 앞에 흐느끼면서 매달리는 그러한 시를 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쉽게 지나가는지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술김에 토해내는 인생은 일장춘몽일 뿐이라고 하는 수많은 노래들은 장난이 아닙니다. 잠시 지나는 인생, 덧없는 인연, 그리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슬과 같다고 한 표현,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날들은 살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하는 표현은 문학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작품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만든 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도 그렇게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꼭 하루를 사는 생활인과 같습니다. 하루를 허랑방탕하게 보내고 나면 취한 몸으로 잠자리에 드는 그 몸이 한 없이 무겁고 피곤합니다. 눈을 뜨는 아침은 지옥과 같습니다. 그러나 선하게 살고 보람 있는 일을 위해서 힘껏 일하고 난 후에는 잠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밀려오는 피로감은 행복한 피로감입니다. 수면을 실컷 취하고 이른 아침 찬란한 햇살과 함께 눈뜨는 아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줍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잠시 머물 이 세상의 것들에 연연을 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에 미쳐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날 진실한 신앙의 시기가 없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마치고 나면 여러분들은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처럼 여러분들은 죽음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울 것이고 눈뜨는 그 아침에 여러분들의 인생은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없이 인생을 사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이대로 살면 여러분들의 삶이 어디로 가는 인생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 앞에서 순종하며 하나님의, 목자인 하나님께 목양을 받으며 살아가는 한 교회 소속된 진실한 신자의 길을 걷기를 거부하면 여러분들의 인생의 마지막은 얼마나 쓸쓸하고 고단한 인생이 될까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생의 남은 날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참 사랑을 안 후에 이제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과 함께 사귀며 주님을 섬기는 보람있는 인생을 보내는 것이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여러분들을 향한 마음이 아닐까요? 한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그 교회에서 매일매일 진리의 말씀으로 목양을 받으며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있을 때에 사랑하는 지체들의 위로를 받고 그리고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거기에서 용기를 얻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행복한 신앙생활이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회 생활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은 힘껏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주님을 처음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주님이 거기에서 사랑하는 자매와 형제를 만나게 해 주셔서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낳아서 그곳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청소년이 되어가고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에 우리는 점점 늙어갑니다. 예전에 우리가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유아세례를 받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우리의 자식들이 거기에서 목회자에게 결혼주례를 받고 결혼식을 올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손자와 손녀들을 낳아서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는 부모가 되어서 한 목회자에게서 문답을 받고 유아세례를 받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황혼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늘 승복하고 사랑하면서 우리들이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같이 부족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종종 주님을 떠나도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까지 끝까지 우리를 추적하고야 마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힘 입어서 우리는 종종 흔들릴 때가 있지만 교회에서 변함없이 교회를 섬기는 자로 남는 그러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점점 나이가 들고 그래서 우리는 한 교회에서 영혼들을 섬기는 교회의 어른들이 되어서 예전의 우리의 신앙생활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직도 우리는 부족하고 어린데도 우리의 날개아래 우리의 신앙의 감화의 그늘아래 모여드는 어린아이들을 우리들은 보게 됩니다. 깃털이 나는 것 같은 어린 새와 같은 영혼들이 우리의 인격과 신앙의 그늘아래 깃들여서 우리의 어눌한 가르침을 받으며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갑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의 변화를 보면서 저분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고백을 하게 하는 그러한 거룩한 성도들로 빚어져 갑니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를 자랑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알고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 만드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유일한 자랑거리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남아서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지만 언젠가 우리의 교회를 우리의 후배,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이제 너는 땅의 수고를 끝내고 이제는 영원한 안식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 그날에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정든 목회자의 품에서 우리의 인생의 눈을 마지막으로 감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던 사랑하는 성도들은 우리의 시신을 떠매고 일평생 떠날 수 없었던 정든 교회를 마지막으로 들르는 장례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몸은 죽었으나 우리의 영혼은 이미 천사들의 손에 받들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올려가면서 우리를 사랑했던 수많은 성도들이 나를 기념하여 아버지 앞에 드리는 이 천국 환송예배의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주님이 주시는 위로로 인간적인 슬픔을 억누르고자 하는 수많은 사랑하는 자녀들과 우리의 믿음의 동료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식구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마지막 영결 예배를 드리며 사랑하는 지체들이 우리를 떠매고 정든 교회당을 마지막으로 떠날 때 우리는 눈물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랑하는 성도들은 우리의 그 떠나가는 그 모습을 보며 오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이 뺨에 흐르는 눈물을 흠치며 우리를 운구해 가면서 하나님, 우리의 인생의 남은 날도 지금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이 분처럼 그렇게 주님만을 사랑하고 이 교회에서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한 신앙의 인격이 있는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한 성도는 살아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서도 그 영혼들을 섬기는 감화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편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잠시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서 우리의 인생을 낙사하듯이 마치기에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을 무지의 어둠속에서 방황하던 인간들, 선과 인자하심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에게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신 십자가의 사랑이 믿어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없이 살았던 수많은 날들을 뼈아프게 후회하면서 주님을 거스리고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은 예전의 날들로 족하고 이제는 일평생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말고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고 일깨워주신 분도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너무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보다도 더 큰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은혜로 건져내셔서 주님의 자녀 삼으셨으니 이제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러한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영원히 목자로 모시고 그리고 이 교회에서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매순간마다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며 그 분 앞에 여러분들의 부족한 모습들을 늘 말씀을 깨뜨리고 주의 은혜로 새롭게 되어져서 이전에는 이 세상 사람과 같이 짐승처럼 살다 죽을 인생이 변화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들이 이러한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과 목자의 사랑을 베푸신 우리 하나님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그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러한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께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여러분들의 작은 불꽃과 같은 신앙으로 어두운 세상이 밝혀지고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만 주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는 그 무지 목매한 그리스도인들과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아직도 광야와 같은 세상을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등대의 불빛과 같은 인생이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편23편 강해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