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9
목 차
주를 의지하는 자(시 9:1-10) 103
시온에 계신 하나님(시 9:11-20) 107
시온에서 만나는 하나님(시 9:10-14) 111
악인의 종말과 의인의 소망(시 9:15-20) 115
주를 의지하는 자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10)
본문해설
시편 9편은 감사의 찬송시입니다. 시인이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심심치 않게 논란이 되는 것은 이것이 정말 옳은 태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무너지고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영성이 깊은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올바른 신앙관이냐는 문제가 종종 제기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크게 두 가지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가 구약 시대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펼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셨지만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처럼 찬란하고 명백하게 사랑의 정신과 계명이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오히려 복음보다는 율법에 가까웠습니다. 아직 사랑에 관한 계명이 충만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인이 원수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분명하고 명료한 계시를 나타내셔서 마지막에 찬란한 신약의 시대의 계명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찬란하게 보여주었던 영광스러운 계명을 가지고 구약으로 거꾸로 들어가서 시인이 왜 이 정도의 사랑을 갖지 못했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여기에서 원수의 멸망을 인하여서 시인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들을 모두 개인감정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압제하고 핍박하고 파멸시키려고 했던 수많은 도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일이라기보다는 시인이 하나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받는 고난입니다. 시인이 원수의 무너짐을 하나님 앞에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대적이 무너지고 멸망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있는 자신도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적하던 사람들이 무너져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주님의 말씀이 서게 되었으니 그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인이 원수의 멸망을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향한 영광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나오는 시인들이 원수의 멸망을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우리가 경솔하게 개인적인 감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함
시인은 오늘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파멸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원수들이 일어나 시인을 박해하고 공격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자신들에게 일어난 것이었지만 그들이 무너지고 넘어지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원리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통치아래 두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8편을 기억해보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창조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만물들을 다스리시고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비교해서 조금 모자란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격차는 이루 말할 수 없고 인간도 그러하지만, 인간이 모든 만물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다스리게 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그런 일을 수종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격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파멸되는 원수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높아지신 이름을 감사하며 찬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를 알게 될 때
10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주를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를 안다, 하나님을 안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런 뜻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랑하고 있으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원수들을 무너뜨린 위대한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로 행하면 자신도 그렇게 파멸할 것이요, 만약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원수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의 압제에서 자신을 건져내실 것이라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간섭하고 통치하시는 세상 질서들의 추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인간의 죄악된 행동과 하나님을 거스르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질서 있게 통치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인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할수록 의지하게 되고, 의지할수록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따르는 자의 편에 설 때 당장은 고난이 오는 것 같고 악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악인들의 박해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에 계신 하나님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셀라)”(시 9:11-20)
본문해설
11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들을 악인들에게서 건지시고 그 악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무엇인가 질서가 흐트러진 것 같고 혼란스럽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나 모순, 상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무엇인가 제대로 안되고 있다고 불평하고 한탄하지만 좀 더 깊이 세상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통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잠시 동안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번영하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때에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악인이 잠시 번성하는 것 같지만 조금 기다려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을 반드시 멸하시고 당신 편에 선 사람들을 주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건지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을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어서 음부에 가는 것을 뜻합니다.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악인들에게 패배하고 져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에도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는데 하나는 섭리가운데 주어지는 고통 속에서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건지심으로써 이것을 보여주십니다. 잠시는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고 악인이 번성하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믿음의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반드시 멸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을 거기에서 건져내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악인은 번성하는 것 같지만 위기가 오면 하나님께 호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삶이 하나님을 향해 등 돌린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거나 위기가 오면 하나님께 호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영혼을 쇄신시키고 많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들을 건져내셔서 주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영혼들을 건져내시는 방법 중 하나는 영적으로 그들을 소생시키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보다 무서운 것이 영혼의 패배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볼 힘이 없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위기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심으로써 환경은 아직 변하지 않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고, 고난 속에서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죄 때문에 찌들었던 영혼, 고난 속에서 잠들었던 영혼, 안락 속에서 나태해졌던 영혼들을 일깨우시고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시인은 찬송하며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에 계신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시온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온’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원래 ‘시온’이라는 말은 ‘마른 땅’이란 뜻입니다. 마른땅, 혹은 요새, 이런 뜻입니다. 시온산이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인생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이 세상을 이기며 원수들의 압제와 악인들의 고통을 견디면서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 만난 하나님이고, 도우시는 하나님은 시온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 살든지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시온에서만 원수를 만나겠습니까? 고난이 올 때 어떻게 그 일이 시온에서만 일어나겠습니까? 영혼의 핍절해질 때 그 일이 어떻게 시온에서만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은 교회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공동체로 만나주십니다. 어디에 살든지 거기서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어 주셔서 주님 앞에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결론과 적용
어느 곳에서 고난을 만나고 영혼의 고통을 경험하든지 거기에서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고난 속에서 자기를 건지시고 원수들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거기서 자기를 만나주신 시온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꿈과 소망,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모든 것들이 시온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며 나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삶은 단지 교회에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인생 전체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진실한 삶, 그것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생활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고난을 만나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것이고, 영혼의 침체를 만나면 거기에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은 시온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고 살아가지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가운데 인생을 허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주께 나아가는 삶을 삽니다.
시온에서 만나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9:10-14)
주를 의지하는 자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도록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지만,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많은 성품들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때 위로가 되는데 그 대부분의 위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남에게 알려줄 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효과적으로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의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의지하는 감정입니다. 의지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사랑의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은 아무도 의지하실 필요가 없지만 나머지 인간들은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안에 원천적으로는 하나님 향한 의지하는 마음을 주셨고 또 그 외에 실제적으로는 우리 인간들에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창조되지 않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서로 의지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사랑의 존재요,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고 그 마음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던 때이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때가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매우 약해집니다. 그래서 수시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시온에서 만나는 하나님
여기서 시인은 우리들이 의지하며 사랑해야할 하나님이 시온에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굉장히 거룩하고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루살렘 혹은 시온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교회입니다. 택하신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바로 그 시온과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시온에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성도들의 온 삶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 시온은 교회인데 하나님의 모든 통치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면서 살아갑니다.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주권에 깊이 복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교회 바깥에서의 모든 삶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성품을 좇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삶은 주님의 통치를 나타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원리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시온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능가하는 또 다른 삶도 없고, 또 그가 시온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는 삶의 질 만큼 사실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통치를 맛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것이 더 깊고 풍부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게 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시온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이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피 흘린 자를 국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인류역사에서 맨 처음 피를 흘린 사람이 가인이었습니다.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죽였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아우의 피소리가 들린다. 네가 어찌해서 그렇게 했느냐?” 인간들은 자신이 악을 행하고 잘못을 행해도 “그것은 묻힐 것이다. 아는 자가 없을 것이다. 나만 알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을 느끼는 깊이, 하나님을 아는 깊이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공평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공평한 하나님의 성품은 누구에게 위안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박해를 당하고 고생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이 됩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주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이 아주 커다란 도전이 되고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둘째는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뒤에 보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사람들은 특별히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입니다. 그들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자식을 불쌍히 여기시는 아비와 같이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돌아보십니다. 또한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 압제를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지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반면에 당신을 거슬러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의를 베푸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수 있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다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돌아오게 되는 선교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당할 때나 고난을 당할 때나 당신의 백성들에게 정말 유일한 피난처요, 의지할 바위요, 산성이 되십니다.
악인의 종말과 의인의 소망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 인줄 알게 하소서 (셀라)”(시 9:15-20)
악인들의 결말
첫째로, 시인은 악한 자들의 결말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둘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행복과 소망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탄원을 올리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거스르고 의로운 자들을 박해하는 악인의 받을 형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웅덩이를 판다는 것은 한 비유입니다. 사람들을 모함하거나 유혹하는 것을 마치 웅덩이를 파 놓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거기에 빠뜨리기를 도모했는데, 도리어 자신들이 거기에 빠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부라고 나온 것은 희망이 없고 생기가 없는 절망의 상태에 대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빠뜨리기 위해서 이들이 온갖 애를 썼는데 결국은 자신들이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모든 도모, 경건한 사람들의 모든 삶을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어져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섭리로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비유를 하자면 물을 붓는 것은 붓는 사람 마음일지 모르지만 흘러가는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물길에 따라서 흘러가듯이, 악을 행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악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움직이셔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악인이 행한 악은 섭리 속에서 스스로 악인에게 돌아가도록 만드시고, 선인이 행한 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도록 섭리 속에서 조정하고 계십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판 웅덩이에 스스로 빠지려고 계획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경건한 사람들이 웅덩이에 빠지게 만들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역사하셔서 그 악한 물길을 돌리사 악인들에게 돌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오늘 시인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커다란 낭패를 만나고 위기를 만났지만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한 자들의 소망에 관하여
두 번째는 선한 자들의 소망인데, 궁핍한 자 혹은 가난한 자들이 반드시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궁핍한 자, 가난한 자는 문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서 박해와 핍박을 받음으로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약자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약자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건한 사람이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배역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완고한 죄인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힘이 없는 사람들이 받을 분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자기를 박해하고 공격할 때에 악인보다 더 큰 힘이 있다면 그런 일이 물론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혹시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을 별로 의지할 일이 없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눌러 버리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힘은 매우 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은 부족해서 도저히 그 힘에 맞설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모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기도하고 목말라하게 됩니다. 그런 목마름과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그 가난한 자들을 당신께 은혜 입은 자들로 여기시고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탄원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소원의 간구가 나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 인줄 알게 하소서” 맨 끝부분에 “저희는 인생뿐임”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보면, 시인은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악인이 많은 권력을 가지고 경건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제 멋대로 힘을 남용하지만, 이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자기가 너무나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아주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고 다만 죽을 몸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큰 힘이 엄청나게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능력이 엄청나게 강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저들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아마 저들은 겸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저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자인지 깨닫는 것에 비례해서 삶을 살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으면 하나님을 정확하게 섬길 수가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맨 앞부분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는 단언이 나옵니다. 이것은 종국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악인은 사라지고 고난을 받던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짧은 시간을 놓고 보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악인은 번성하고 의로운 사람은 고통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조차도 하나님이 개입해주셔서 악인의 번성함을 속히 종식시키시고 의인의 고난 받는 것을 구원해달라는 탄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통 받는 사람들을 건져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공평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당신의 통치를 펼쳐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도와달라고 간구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9편 강해 1
시편9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