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 대한 탄원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시 69:21-22)
녹취자: 백지영
자신이 그렇게 고통을 받는 가운데 악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청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부분뿐만 아니라 시편에 나오는 악인에 대해서 저주하는 기도,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시편에서 악인을 향해 탄원하는 그런 모든 탄원들이 영적인 미성숙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첫째는,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 찬란하게 드러난 후에 터득하게 된 그런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죄인에 대한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의 개념을 예수님 오시기 전에 1000년 정도 되는 다윗시대로 끌고 가서 그것이 왜 그때에 그렇게 없었느냐고 그렇게 묻는 것은 학문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맥의 원칙에 위반이 되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자기를 해치는 원수까지도 긍휼히 대하는 모든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지금 우리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처지에서, 저 위로 천년이나 거꾸로 올라가서, 여기서부터 따지면 3000년을 거꾸로 올라가서 그때는 왜 시인이 혹은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용서하지 않았느냐고, 악인을 위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았느냐고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시대를 너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것들이다 이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는 ‘아나크로니즘’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누가 글을 썼는데, “김삿갓이 스포츠카를 타고 대관령을 넘더라.” 그러면 김삿갓이라는 인물은 그 당시에 있는데 스포츠카는 20세기에 빌려온 것이니, 분명히 그런 것을 썼으면 김삿갓 시대 때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20세기를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거꾸로 20세기 것 하고 짝이 안 맞는 김삿갓하고를 연결을 시켜서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아나크로니즘’이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순서가,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한 가족, 한 족속, 한 나라를 택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독점적으로 그 나라를 사랑하신 것을 보여주시면서, 열방들을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우주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해치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을 저주하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핵심을 나를 해치는 사람들에 대한 앙심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를 해치는 사람들에 대한 앙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모든 인간 사는 질서를 훼손시켜서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가지 점에서 이러한 악인을 향한 시인들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영적인 미성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똑같이 그렇게 이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이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참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울러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원수들로부터 받은 대접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식물이라고 하는 것은 배가 고프니까 배가 부르기 위해서 먹고, 그렇게 배부르도록 먹으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있어야지만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마음속에서 옮기도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원수들은 자기가 배가 고파서 식물을 구할 때 쓸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쓸개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안 먹는 것입니다. 곰쓸개나 되면 모를까, 그것도 식물이 아니라 약입니다. 곧, 쓸개를 주었다는 것은 먹을 수 없는 아주 쓰디쓴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목이 갈할 때에는 물을 주어야 하는데 초로 마시게 하였습니다. 진저리처지는 그런 초는 음식에다가 약간씩 치는 것인데 초를 물을 대신해서 마셨으니, 진저리가 처지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악인에게 이 모든 보응을 갚아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밥상이 어떻게 올무가 되는 것입니까? 여기 21절에 나오는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포로가 된 상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밥상이 올무가 된다는 것은 밥상을 받는데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조건부로 받는 것입니다. “자, 이 밥을 먹으려면 자백을 해야 된다.” 범죄자의 경우 그럴 것입니다. 아니면 “너는 이 밥을 먹고 모두 털어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밥상 한 번 한 번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부로 주어져서 밥을 먹고 난 후에는 더 커다란 부담의 올무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평안을 누리는데 그 평안이 저 사람들에는 커다란 덫이 되어서 그래서 자신의 평안을 누린 그것 자체가 하나의 덫이 되어서 그래서 그 자체가 더욱 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짐승들에게 있어서 덫에 한번 걸린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서 걸렸든지, 아니면 지나가다가 틀을 탁 건드리니까 위에서 커다란 망이 떨어지면서 그 망에 갇히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창에 끼이게 되었다든지 어떤 경우든지 간에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상태가 덫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저희들이 자유롭게 나를 박해하고 언약백성들에게 악을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갚아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탄원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보복을 당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법도가 올바르게 서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이 시인들의 간절한 갈망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더 충만한 사랑과 하나님의 속성이 계시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내용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서 살아갈 때는 우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세계 안에 많은 악들과 죄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은 사랑하고 용서를 해도, 주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많은 죄와 악들에 대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단호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때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얘기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