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에서 만나는 하나님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시23:1) 2010.4.25 주일오전 1
2. 인격적인 사랑(시23:1) 2010.5.2 주일오전 11
3.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시23:3) 2010.6.13 주일오전 22
4.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시23:3) 2010.6.20 주일오전 30
5.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시23:3) 2010.6.27 주일오전 39
6.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시23:4) 2010.7.4 주일오전 45
7.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시23:5) 2010.7.18 주일오전 54
8. 기름을 부으실 때(시23:5) 2010.7.25 주일오전 62
9.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시23:6) 2010.8.1 주일오전 69
10. 하나님 사랑의 추격(시23:6) 2010.8.8 주일오전 77
11.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시23:6) 2010.8.15 주일오전 85
2010. 04. 25 주일오전 예배
1.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중년이 되면 이런 저런 질병이 시작이 됩니다. 어떤 신사가 병에 걸렸는데 여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도 특별한 병명이 없어요. 목을 조이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는 때가 자주 발생하고, 식사를 먹으면 도저히 소화가 안 되고 토할 것 같고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방문했지만 신경성 질환이라는 것 이외에 뾰족한 진단이 없었습니다. 진단이 그러니 처방도 없었죠. 시간이 좀 지나가면 나을 듯 했지만 오히려 병세는 더 깊어져서 도저히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잘 나가던 대 기업의 중견 간부였는데 그는 인생의 뜻밖의 복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직장까지 휴직을 하고 그렇게 고통 속에 지내던 어느 날 기독교인 정신과 의사가 하고 있는 용한 병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를 방문해서 진찰을 받기로 했습니다. 장시간 동안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병세를 이야기해 주었을 때 이 젊은 의사는 아주 친절하게 그렇게 자기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이 젊은 의사는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 병을 고쳐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더니 이 의사가 조용히 편지 봉투에다가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는 말이 “여기에 약의 처방이 들어있는데 이 약은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약이 아니니까 혼자 조용히 집에 가셔서 밤에 혼자 열어 보십시오. 그랬대요.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집에 와서 식구들이 모두 자는 밤에 편지봉투를 열어보니까 진짜 병원에서 쓰는 처방전이 들어있었습니다. 처방전, 이름 - 누구누구,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합니다. 약의 종류 : 구약, 약의 이름 :시편 23편, 용법 및 용량 : 매일 공복에 하루에 다섯 번씩 물 없이 천천히 드시오. 특기사항 : 꾸준히 복용하셔야 뚜렷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 편지를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쁜 의사가 내가 병들었다고 조롱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예전의 그 불면증에 시달리며 한 숨도 잠을 못 잤어요. 새벽에 다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면 입원을 시키던지 비싼 약을 지어주든지 아니면 복잡한 치료를 제안해야지만 돈을 벌 텐데, 아무 돈도 못 벌게 이렇게 처방을 해준 게 무슨 뜻일까? 그리고는 조용히 쓰레기통에서 그 꾸겨버렸던 처방전을 펼쳐놓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래전에 이미 읽기를 그만둔 성경을 꺼내놓고 시편 23편이란 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독서카드에다가 6자를 적어놓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복용을 하기 시작했대요. 새벽에 일어나서 공복에 한번, 아침 먹고 식간에 한번, 점심 먹고 식간에 한번, 저녁 먹은 후 한번, 자기 직전에 한번 이렇게 다섯 번을 천천히 그 카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하루면 다섯 번, 일주일이면 서른다섯 번, 한 달이면 140번, 두 달쯤 되니까는 이제 카드 필요 없이 모두 외울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용한 시간에 예전에 하던 대로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시편 23편을 외웠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그날도 조용히 이렇게 성경을 외우고 있는데 예전에는 없었던 특별한 일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흉물스러웠던 콘크리트로 만든 집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금이 가기 시작하다가는 무너지는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뭔가 든든하고 굉장히 크던 것이 힘들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이 먹도록 누구 앞에서 눈물을 별로 보인 적이 없는 냉정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마음속에서 뭐가 무너지는 것 같은 커다란 진동이 있고 나서 그는 어린 아이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옛날 동네 골목에서 다른 아이에게 얻어맞고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엄마 품에서 펑펑 울던 어린 시절처럼 그렇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인생의 불행은 돈이 없거나 지위가 낮거나 혹은 질병이 든 것이 자기의 불행이 아니라 알고 보니까 자기가 목자이신 하나님 없이 방황하면서 인생을 산 것이 불행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를 쓴 다윗이라는 사람은 3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아주 훌륭한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던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원래의 직업은 짐승을 치는 목동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셔서 뛰어나게 높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인생 말년 부귀와 영화는 물론이고, 시련과 고통 그리고 외로움과 깊은 고뇌에 가시밭길을 다 지낸 다음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은 시가 이 시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제일 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여호와’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죠. 다만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름이고, 이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본명은 하나님과 특별한 약속을 맺은 언약 백성들에게 게시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66권으로 된 굉장히 두꺼운 장서입니다. 그런데 그 첫 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말입니다. 이 간단한 선언은 하나님 이외의 이 모든 존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언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계셨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이 우주와 피조세계,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오늘 생각하고 있는 너 자신 인간까지도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존재일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한 사람의 정신과 육체의 힘의 크기는 특별히 그의 능력은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압니다. 이 모든 세계는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그림책과 같습니다. 그래서 1600년 전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무한한 세계는 그 앞에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 파스칼은 자기의 책 속에서 우주의 무한하고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고층 빌딩으로 뒤덮인 도시 속에 살면서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시골에 가서 밤에 들판에 나와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도시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그런 찬란한 별 떨기들이 어두운 밤하늘에 쏟아질 듯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약 6000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 무한한 우주 공간에 별들이 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우주는 얼마나 크고, 그리고 우리 지구는 이 우주에서 어떤 위치일까? 그리고 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나 인간은 어디서 온 존재이고, 그리고 어디로 가는 그런 사람일까? 수많은 상념들이 고개를 들지만 대답하지 못한 채 스스로 우리 속에서 사라지기가 일 수 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 이 끝부터 저 끝까지의 길이가 약 150억년 동안 빛이 달려가야 하는 거리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놀라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팽창한다면 우주 바깥에 무슨 공간이 있어야 할 텐데 도대체 거기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공간이 있다면 우주의 끝은 이 모든 우주의 끝이 아니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끝에서 저 끝이 150억년이라면 아래 위로는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이고 그것이 끝나는 지점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수많은 의문들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과학자들이 우주가 하나일 것이라고 하는 견해에 대해서 점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이 우주는 위, 아래로 또 다른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우주자체가 무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을 합니다. 여러분으로 잘 이해는 안 가시겠지만, 이 우주가 150억 광년씩 달려가야 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우주라도 사실 다른 세계에서 볼 때에는 물방울 하나의 크기일 것이다 라고까지 생각을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평범한 우리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남의 우주 이야기는 그만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별들이 있습니다. 밤하늘에서 여러분이 볼 수 있는 별들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달이나 지구, 토성, 목성과 같은 위성이 아니라 태양처럼 밝게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인 별들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어떤 위성들이 있다면 밤하늘에서 관측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별과 별, 그렇게 많은 별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태양도 바로 그렇게 이글거리고 있는 별들 중의 하나인데 그래서 밤하늘에 보이는 밝은 별은 기체 덩어리에요. 그래서 뜨거운 불덩어리 입니다. 그 중의 하나인 태양의 주위를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이렇게 9개의 별들이 그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500원짜리 동전 크기 안에 들어가는 거리라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대구 에쯤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밤하늘에서 보는 7개의 별들로 이루어지는 북쪽 하늘의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별이 나란히 사이좋게 붙어있는 것 같지만, 빛이 900만년을 달려가야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런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이 일 천억 개 내지 이 천억 개가 모여 있는 것이 그래서 구름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우리 은하계입니다.
긴 타원형으로 생긴 그 지구가 속한 은하계는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빛으로 20만년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인데 그 일 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 모인 별들의 은하가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서 그 은하가 다시 일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 모여 있는 곳이 우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서 태어났다가는 폭발과 함께 사라지고, 사라진 후에는 또 다른 별들이 태어나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공간이 우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우주를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까? 성경은 간단하게 말합니다. ‘있을지어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그 모든 것들은 놀라운 조화와 그리고 아름다움을 이루면서 이 세상에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바로 그 수천 억 개의 은하계, 각각 하나마다 일천억 개 내지 2000억 개로 이루어진 그 은하, 그 속에 있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의 작은 별인 지구, 거기에서 태어나서 어떤 사람은 한 번도 해외여행을 못해보고, 그리고 서울이라는 곳에 혹은 우리나라라는 반토막 난 나라에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거북이도 천년, 천삼백 년을 산다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은 길어야 80~90을 살아야 죽고 100세를 넘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입니다.
이 무한한 우주 공간의 침묵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과 끝없는 광야 그리고 끝없는 벌판, 신비하게 이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신비한 생명의 역사,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보고 당신이 살아계신 것과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을 알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림책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들여다보고는 인간이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고통은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돈이 없기 때문이고,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고, 권세가 없기 때문이고, 재능이 없기 때문이고 이렇게 모든 것이 환경과 처지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다는 판단이 서지만, 더 멀리서 바라보면 살아있는 것도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있는 인간의 존재가, 영원 후까지 있는 인간의 존재가 결국은 영원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삶의 양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영혼과 육체를 창조하시고, 그래서 이 땅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두 개를 결합시켜서 살게 하시고, 죽은 후에는 육체를 떼어놓고 영혼만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니 오래전부터 있는 영혼이 영원하도록 존재할 터인데 살아있는 기간 동안 육신이란 옷을 걸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도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 중 질병에 걸려있는 환우들을 심방했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질병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지체들을 심방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경험했습니다. 의사는 사망선고를 내렸고, 죽음이 친구처럼 자기의 인생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 없으면 두려워 떨고 진저리를 쳤을 그 사람들이 오히려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염려하는 우리들을 도리어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 그 분들을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셔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건강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사람답게 주님을 섬기며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의 영원한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의 품 안에서 놀라운 사랑과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바로 인생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인생을 살 때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속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그 위대한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시라면 그렇게 하나님을 부를 때에 시인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한 마리의 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속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양 또는 양떼로 부르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 인간을 한 마리의 양, 어린 양으로 비유하셨을까요? 이 세상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형형색색의 수많은 동물들은 각기 자기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어의 기능들을 혹은 공격의 기능들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는 백수의 왕이라고 불리웁니다. 빠른 다리와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강한 발톱이 무기입니다. 사자는 그 못지않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뛰어 오르면서 자기를 공격하려고 하는 혹은 자기가 공격하려고 하는 대상을 앞발로 제일 먼저 후려쳐서 그를 공격하고 그 다음에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그 때 내려치는 이 앞발의 힘이 3톤 정도 된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어디에 가서 호랑이가 커다란 소를 죽이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 큰 소가 호랑이가 뛰어들어서 앞발로 차니까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더라구요.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맹수의 이빨은 가공할만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나운 맹수들 뿐 아니라 힘없는 짐승들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멜레온은 날카로운 이빨과 공격할 수 있는 힘은 없지만 순식간에 주위의 색깔과 똑같이 자신을 만들어 은폐합니다. 자기 몸을 은닉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슴도치는 이빨도 없고 지극히 작은 짐승이지만 그가 몸을 오그리고 있으면 사자라도 그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뭐 입안에 가시 박힐 일 있겠습니까?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재미있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옵니다. 가끔 보면서 저게 어떻게 재미있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은 양처럼 순해 보이지만, 염소처럼 뿔이 꽤 길게 난 초식 동물을 사자가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사자가 그런 짐승을 발견하면 달려가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자는 빠르기는 하지만 거의 500kg 되는 거구를 움직이기 때문에 100m, 200m 정도 밖에는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낮은 포복으로 풀숲에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도록 달려갑니다. 눈치를 채지 못하고 풀을 뜯고 있던 이 어린 짐승이 사자가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미친 듯이 도망가지만 결국 사자의 발 앞에 붙들리기 직전이었습니다. 도저히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 어린 염소 같은 미물이 몸을 확 돌려서 사자를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한 번에 물어뜯을 수 있는데 달려오던 속도가 워낙 빠른데 이게 휙 하고 돌아서니까 달려오던 자신의 속도에 의해서 그 뿔에 이 어깨를 찔렸어요. 근데 얼마나 심하게 찔렸는지 화면에 보니까 이 찔린 뿔이 이 등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이 염소 같은 어린 동물은 뿔을 거기서 간신히 몸부림치면서 빼내고 도망을 갔고, 백수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사자는 피를 철철 흘린 채 거기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촬영하던 기자가 마취 총을 쏴서 치료를 해주고 뒤에다가 위치 추적 장치를 붙였는데 두 달 후에 결국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자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가 얼룩말입니다. 그런데 그 얼룩말조차도 자기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더라고요. 사자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도망갈 시간도 없자 무리들은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 순식간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어린 새끼들을 가운데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저 멀리서 사자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잘 아는지 어느 순간이 딱 되자 누가 명령을 내린 것처럼 일제히 뒷발로 흙과 돌멩이 먼지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사자 왼쪽 눈덩이에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갑자기 순식간에 피가 철철 흐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작은 미물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양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기를 보호할 장치가 온 몸에 아무데도 없어요. 이빨은 물어뜯으며 공격하기는커녕 껌이나 씹으면 좋을 넙적한 이빨입니다. 그리고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그리고 살은 쪄서 뒤룩뒤룩 하고, 날렵한 옷이 아니라 두꺼운 털 코트를 사시사철 입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눈은 지독한 근시여서 성경에 보면 길 잃어버린 양 이야기는 나와도 돌아온 양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뿔이 있기는 있는데 그거는 공격하라고 지닌 뿔이 아니라 왜 그게 거기 달렸는지 우리도 모르게끔 만두처럼 동그랗게 말린 것이 머리에 디자인으로 그냥 붙어있을 뿐입니다.
그럼 우리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인간을 양, 혹은 어린 양이라고 비유하셨을까? 이게 어떤 사람은 인간이 하도 착해서 그렇다고 그러는데 제가 양띠입니다. 제가 착합디까? 왜 그렇게 좋아해요? 이게 성경이 기록된 것이 코리안 문맥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맥입니다. 우리 한국사람 입장에서 보면 양은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러나 독사 이런 거는 부정적인 짐승이잖아요, 뱀 이런 거는. 아무리 예쁜 뱀이라도, 물론 이제 뱀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일지 모르지만 그래요. 근데 이게 성경이 쓰여진 팔레스타인에서는 지금도 그래요. 그쪽지방 중동지방에서 가장 험한 욕이 우리말로 말하자면 ‘개 새끼’ 이러는 욕이 ‘양 같은 놈’ 그게 제일 험한 욕이래요. ‘양 같은 놈’ 그러면 그 속에는 뭐가 들어가냐 하면 머리 나쁘고, 욕심 많고, 고집이 세고, 사리 분별도 못하는 놈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나쁜 그림은 그 속에 다 들어가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착하고 순하기 때문에, 여러분 중에 내가 스스로 순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아무도 없어요. 인간의 악함과 독함은 끝이 없어요. 가족들 간에도 원수를 맺고, 평생 안 풀고 살잖아요. 아마 여러분 중에도 형제간에 의절하고 왕래 안하는 사람들, 부모님 찾아뵌 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사람들, 자식하고 거의 의절하다시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걸 보세요. 얼마나 여러분이 악독한지 보세요. 하나님은 그런 거를 고치셔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 그렇게 자기를 보호할 기재가 아무것도 없는 짐승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자는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산 속에 돌아다니면서 짐승을 잡아먹고 살게끔 그렇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이고, 이 양은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 있으면서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돌봄을 받으면서 사랑을 받으면서 사람을 의지하게끔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게끔 만드신 것이 양에 대한 섭리에요.
모든 음식은 재배가 있고, 양식이 있고, 그 다음에 자연산이 있습니다. 자연산 양은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거의 멸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황청심환 할 때 들어가는 게 산양의 배꼽이거든요. 근데 무지무지하게 비쌉니다. 배꼽하나가. 그 배꼽하나 사면 돼지 여러 마리 살 수 있습니다. 비싸요. 북한에서 어떤 사람이 그걸 사는 것을 봤는데 북한이 화폐 가치가 굉장히 낮은 나라잖아요. 그런데 그 산양 배꼽, 그것도 진짜 산양일까? 나는 사실 50%밖에 안 믿어져요. 양 배꼽이나 산양 배꼽이나 우리가 분별할 수 있겠어요? 그거를 딱 하나 잘라서 1500불을 받더라구요, 배꼽하나에. 그러니까 정상적인 가격은 그것보다 훨씬 비싸겠죠.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양이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를 거기에 비유한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얘들아 너희 인간은 이 세상에 모든 짐승들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모든 짐승들을 너희들이 다스리고 통치하고 심지어 잡아서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만들 때부터 독립 형으로 만든 게 아니라 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야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너를 창조하였단다” 이 메시지가 바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돈, 자기 재주, 자기 권력을 믿으면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장 불결하게 여기시고 또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가슴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 가까이 두시고, 당신의 사랑을 많이 받고 또 당신을 많이 사랑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때에 인간이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로 교인이 된 사람들 말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교인이 아닙니다. 개집에 돼지를 넣었다고 개가 되나? 호박에다가 줄 긁는다고 수박이 됩디까? 안 되지. 호박에 노란 칠 하면 참외가 됩니까? 안 되지.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진짜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고 회개한 후에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가 된 사람들, 이 사람 치고 누구도 한 가지 과정을 안 거친 사람이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구나! 그리고 내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불신앙으로 살았더니 나는 찢긴 상처받은, 고통 받는 잃어버린 가시떨기 속에 떨고 있는 양이 되었구나 하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돌아가게 해 달라고 회개하는 경험이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혼자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짧게 보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행인 것처럼 보이지만 더 길게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행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21살 때 회심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정말 고뇌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도 돈을 많이 벌고, 일류대학교를 나오면 행복해 질 거라고 절대 믿지 않았습니다. 세상사람 중 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인간의 행복이 그런 것들 때문에 찾아온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나이에도 주위에 보면 오히려 저 사람에게 권력이 없었더라면 저렇게 불행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고, 돈이 없었더라면 저렇게 불행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사람도 많이 만났기 때문이죠. 돈이 있는 사람은 건강이 부족해서 고통을 받고, 돈도 있고 건강이 있는 사람은 지혜가 없어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매일 마다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커먼 성경책 하나에 인생을 맡기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데 누가 쓴지 모르는 시커먼 책 하나에 인생을 던진단 말인가 하는 무신론자였어요. 그래서 부지런히 책을 잃고 나처럼 고민했던 사람이 어떻게 길을 찾았는지를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철학과 사상, 문학을 넘나들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으니 그 모든 노력은 나의 구원을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길을 찾았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들 가운데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확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 문화부 장관을 지내던 이어령 교수님이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책을 한 권 내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무신론자이었던 그가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고맙게도 친필로 내 이름을 적어 사인을 해서 책을 한 권 저에게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이번 주에 그 책을 집회 가서 읽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참 우리들이 모르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분은 30대 때에 이미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아마 현존하는 한국의 지성인들 가운데 가장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일 것입니다. 70이 훨씬 넘는 고령에도 최신 젊은이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컴퓨터 기계들을 만지면서 문화를 해석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초창기에 쓴 작품이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세상을” 이라는 수필집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상, 종교 이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거부하면서 자기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인생의 길을 찾아간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어요. 내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나를 가장 가까이 알던 많은 사람이 나를 “예수 장이가 되었다며” 하고 놀립니다. 일평생 글을 썼는데 한 번도 그들이 나를 글쟁이이라고 놀린 적이 없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나를 쟁이라고 부르며 놀립니다. 그들은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에서 돌아간 내가 불쌍해 보이는가 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그러나 나도 무신론자이었기 때문에 무신론자를 너무 잘 알지요. 온몸으로 거부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지만 누군가 다가가서 얼마나 힘드니? 외롭지? 하고 금세 울음을 터뜨리는 아주 연약한 무신론자들일 뿐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너무 심각하고 삶을 뿌리 채 흔드는 질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질문을 피합니다. 술이나 먹자, 영화나 보자, 놀러나 가자, 쾌락이나 즐기자, 이렇게 잊고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찾는 모든 행복은 하나의 행복을 본뜬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태양 가까이 다가가 햇빛을 받으면 따뜻한 것처럼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게 되고, 그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미 행복하여 순경 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 편안한 환경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역경 속에 있는 사람들을 그것이 괴로워 평안한 환경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니 이렇게 된들, 저렇게 된들 결국 인간은 불안한 존재일 뿐 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런 고통 속에 살면서도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그 하나님께 세상이 하나님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께 어떻게 돌아가야 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보여주셨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집안의 한 아들로 태어나셨지만, 그는 본질로 하나님이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 예수를 따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33년 동안 살면서 결핍이 많은 이 세상에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무지한 자를 타일러 깨우치시고, 그리고 연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자들이 주님의 품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쉬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를 온전히 버려 이 세상 사람들이 참되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영원히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들의 종처럼 발을 씻기며 섬기셨던 것입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모두 당신 품으로 불러 하나의 사랑의 가족으로 만들기 위하심이었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이 제일 먼저 만드신 것이 이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원한 길을 우리를 위해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당신 스스로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대신 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그 분을 믿을 때 하나님께 용서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이게 바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고 못 박혀 죽으신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이제는 악한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불행과 그리고 고통으로도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고 말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 가까이 오셔서 여러분에게 당신과 함께 살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피 묻은 손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굳게 닫힌 그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 행복하기 때문에 자기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문을 걸어 잠그고, 어떤 사람은 질병과 수많은 고통 속에서 괴로움이 큰 나머지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의 마음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고 계신 주님의 그 손은 여러분을 위하여 생명까지 모두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손입니다.
(찬양)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굳게 닫아 두니 한없는 내 죄라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놀라운 계획 속에서 여러분을 여기에 부르셨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 비참한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너는 나의 어린 양이라고 목자 잃은 길에서 고생하고 방황하지 말고, 그 가시밭에 찔려 피 흘리지 말고 사랑하는 목자인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초청일지 몰라요.
오늘도 주님은 목자의 큰 사랑으로 집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엄마, 아빠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미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주님께 징계를 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환란과 시련이 겹치고 고난과 위기가 찾아와서 혼란스럽고 이제 도저히 내 힘으로 살 수 없을 거 같은 두려움 속에 순간순간 옥죄어오는 위험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잘못했다고 때리시고 계시는 한 그 분은 아직도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분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말로 여러분을 부르시다가 안 되면 때로는 때려서라도 여러분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양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0. 05. 02 주일오전 예배
2.인격적인 사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그렇게 온 천하를 지으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자신의 목자가 되신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통로를 인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지푸라기만도 못한 이 시인의 삶에 간섭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목자라고 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 시인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목동으로서 어린 양떼들을 인도했던 것 같이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목동들이 말 같은 것을 모는 광경을 보셨을 것입니다. 방목해 놓았던 말들을 저녁이 되면 카우보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위협을 주어 말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합니다. 필요하면 총을 쏴서 소리를 냅니다. 이렇게 해서 포위망을 점점 좁히면서 그리고 말떼들을 한 곳에 모아 마사에 들이고 문을 잠그면 목장의 하루가 저뭅니다.
그러나 이 양은 그런 식으로 양들을 이끌지 않습니다. 이 양들은 눈도 나쁘고 말처럼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힘센 짐승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목동은 자기의 음성을 들려주어서 그래서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이끄는 방식으로 이들을 우리 안에 불러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라고 할 때에 이 시인 속에 있는 그림은 바로 이렇게 자기의 음성을 들려줌으로써 양떼로 하여금 그 목자를 믿고 따르게 하는 인격적인 사랑을 염두에 두고 목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설교에 대해서 이런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실 때도 있고, 징계하실 수도 있는데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십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인격적이라고 하는 그 말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인격을 가진 사람이 인격을 가진 사람의 생각에 호소하고 마음에 감동을 줌으로 의지를 움직여서 이 사람이 원하는 일을 저 사람이 자기 주관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치는 것이 인격적인 설복입니다. 그리고 이런 설복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인격적인 승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경배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의 머리끄덩이를 끌어 잡아 당겨서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바닥에 처박으면서 절하라고 하나님 그렇게 안하십니다. 무릎을 안 꿇겠다는데 하나님이 군화발로 여러분 정강이를 걷어차서 발모가지가 부러져서 무릎을 꿇게 만든다면 그게 무슨 신앙의 영광이겠습니까? 여러분 믿기 싫으면 안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달린 거예요 상당부분. 하나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우리의 마음에도 그것이 원하는 바가 되어서 선택하도록 생각은 지식으로 일깨우고, 정서는 하나님의 정으로 감동시키셔서,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의지 행사를 하게 하시는 것이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죠? 때리실 때도 있는데요. 오죽했으면 때리시겠어요? 그렇게 때리시기도 하지요. 때로는 아주 심하게 때리기도 하시고, 심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근대 때리시는 것을 놓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게 때린다고 비인격적입니까? 우리 인간 부모는 자식을 기르다 보면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마음에 분한 마음이 생겨서 애들을 때릴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나도 부모지만 그러던 때가 옛날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때리시는 적은 없어요. 인간이 뭘 잘못해서 하나님이 화를 파르르 내신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후회하실 만한 매질을 우리에게 하신다면 그게 완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셔서, 우리의 환경을 치셔서, 때로는 우리의 몸을 때리셔서 아프게 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때려주시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때려주시지 않으면 선한 의지가 발동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시려고 우리의 환경도 때리시고 우리의 몸도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마음을 때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환경을 치시기 전에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지루할 정도로 여러 번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말씀을 주시는데,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드리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다 짜증이 나고 귀찮은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텔레비전 드라마나 혹은 인터넷 게임에 깊이 빠져있을 때 부모가 여러분을 불러도 안 들린 적이 있죠.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린 게 아니라 마음의 모든 귀가 그것들에 빼앗겨 있기 때문에 다른 의미를 가진 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지각 구조야.
그러면 그렇게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렇게 때려서라도 마음을 움직여 알아듣게끔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죠. 그렇게 마음으로 알아듣게 하시는 그것이 뭐죠? 인격적으로 그렇게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시대에 태어났죠. 이제는 가전제품을 외국 거를 사야 될 필요를 거의 못 느껴요. 오히려 미국이나 다른데 가서 보면 좀 허접하다라는 느낌이 들어요. 모든 게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가전제품이 너무 잘 나와요. 그래서 나는 할 수 있으면 국산을 사요. 그런데 그거는 최근의 일이고 우리 70년대까지만 해도 무슨 속담이 있냐면 라디오가 잘 안 나올 때 국산은 때려야 소리가 나오고, 미제는 때리면 망가진다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제가 소리가 안 나오면 빨리 전파사로 가져가고, 국산은 때려봐야 됩니다. 그럼 또 나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은혜에서 멀어지면 60년대 국산 라디오가 되는 것입니다. 소리가 안 나와 그러니 하나님이 때리시는 거야. 때리시면 소리가 나와 기도도 막 나와. 못 알아들어, 녹음이 잘 안 돼 때리면 녹음이 돼.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지면 짝퉁이 되는 거야, 짝퉁이. 그래서 그 모든 과정이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기한 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았을 때가 언제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죄짓고 회개할 때가 그래서 용서받을 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깨달아요. 사랑은 모든 사람을 특별하게 다루는 게 사랑입니다. 1번, 2번, 3번, 4번, 50번까지는 설렁탕, 61, 62, 63 곰탕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제가 중등부 전도사할 때 일이었습니다. 거기 교사 중에서 서울대학교 대학원 다니는 형제였어요. 근데 예배가 끝나고 교사회의를 해야 되는데 저 뒤에서 어느 여자 집사님하고 밀담을 많이 길게 나누어. “왜 그래?” 그러니까 “전도사님, 왜 그러긴 왜 그래요? 저 집사님 아들, 아무개 그 녀석 공부못한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 공부 안 해?” “못합니다.” “그래?”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그러는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순진한 청년이었습니다. 얼굴도 예쁘장하고. “근데 전도사님” “왜?” “근데 이상해요” “뭐가?” “애들이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죠?” “못할 수도 있지”. 자기는 이해가 안 간대. 이 형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마지막에 대학원 박사과정 들어갈 때까지 이 세상에 생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응시한 것마다 한 번에 붙었대요. 운전면허도.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게 있다면 떨어졌을 때 어떤 기분인지 그걸 모른대요. 군대도 시험 봐가지고 붙어서 6개월 동안 군대 생활하더니 중위 달고 오더라고. 무슨 석사 장교인가 뭐 그런 거 옛날에 있었어요, 그러더니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저는 요 진짜 고 3때 8시간씩 꼬박꼬박 잤어요. 자기는 그렇게 안자면 정신을 못 차려요”. 그래서 그 다음에 하는 이야기가 “학원은 근처도 안 갔어요.” 나 이거 신문에나 나오는 얘기인줄 알았거든 “학원은 근처도 안 갔어요.” 그래. “근데 어떻게 공부를 잘 했느냐” “아니 전도사님 어떻게 못할 수가 있어요? 선생님이 다 가르쳐 주고, 책에 나오고,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내 속으로 ‘아이고 잘났다 나는 공부 못하는 게 이해가 참 잘되는데’. 그래서 나는 의외로 공부 못하는 애를 핍박을 잘 안했습니다. 그러고 한두 달쯤 흘렀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이 나타났어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그랬더니 “하이 전도사님 놀리지 마요.” “왜?” “나 인생 살맛 정말 안 나요.” 그래서 “왜?” 공부만 하니까 몸이 너무 축나더래요. 그래가지고 그때 한 23년 전이었거든요. 그때 한참 테니스가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배우려고 학교 근처에 있는 테니스장에 가서 등록을 했다는 거야. 그래서 일주일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치가 공을 던져주면 탁 쳐주면 자기가 저쪽에서 받아서 넘기면서 숙달되면서 이제 폼도 가르쳐 주고 그러잖아. 한 일주일을 하더니 어느 날 코치가 공을 확 집어 던지던지 자기한테 오더래요. “어떻게 당신 그렇게 못 하냐 내가 여기서 이 학원 차린 지 7년 되는데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 처음 봤다. 어떻게 그렇게 못할 수가 있느냐? 여기 책에 다 나오고 내가 다 가르쳐 주고”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이해가 되더래요. 공이 날라 오면 꼭 맞을 것같이 휘둘렀는데 공은 뒤로 가거나 귀퉁이에 맞아서 옆으로 튀기는 거야. ‘야, 공부도 그렇겠구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꼭 같이 안 만드시고 다 각기 다르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대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해, 어떤 사람은 느끼는 게 많은 대신 어떤 사람은 쓰는 걸 잘해. 어떤 사람은 과단성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치밀성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다양하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인류 경영이라는 게 뭐냐 하면 회사의 상황에 따라서 항구적으로 최고의 CEO는 없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른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뒤를 잇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맨 바닥에서 개척을 하려면 논리보다도 직관이 있고 진짜 코뿔소처럼 부딪칠 수 있는 이런 사람을 CEO로 세워서 저돌적으로 앞으로 나가게 만들고 공장을 세우는 거야. 경쟁이 붙었어. 이럴 때에는 죽어도 양보하지 않고 한번 물면 끝까지 무는 도사견 같은 사람을 CEO로 세우는 거야. 그리고 이겨, 공사를 따 냈어. 그럼 빨리 이 사람을 빼버리고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사람을 세 번째 CEO로 세우는 거야. 이게 회사가 적자가 나기 시작해. 그럼 완전 짠돌이를 CEO로 세우는 거야. 그래가지고 월급을 줄이고 막 깎아 가지고 그래서 경영에 흑자를 이루도록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이 필요한 거야.
자매들 큰 소리로 대답을 해봐. 예쁘면 좋아, 나빠? 좀 더 큰 소리로 해봐. 또 알아 내가 어떻게 해줄지? 자 큰소리로 얘기해 봐요. 예쁘면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그래 얼굴이 백옥같이 곱고 석고상을 깎아지는 것 같이 정말 예쁘다고 치자. 그게 나 혼자 그래야 예쁜 거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래봐라. 무섭지 않겠냐? 그거. 무섭지 않겠어? 그지. 지금도 압구정동에 가면 자기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을 길거리 걸어가다 만난대. 그 사람이 누구냐면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성형 수술한 사람이야.
어느 형제가 장가를 갔는데 첫 아들을 낳았대. 그림같이 예쁜 자매하고 결혼을 했는데 얘는 굴러도 안 굴러갈 정도로 넙적한 애가 태어난 거야, 얼굴이. 이게 도대체 엄마도 안 닮고 아빠도 안 닮고 어디서 태어났을까? 아무리 해도 의문이 안 풀려요. 근데 그러고 나서 언젠가 처갓집에 큰일이 있어서 놀러 갔는데 뒷방에서 애를 데리고 놀다가 우연히 툭 떨어지는 앨범이 하나 있더래. 그래가지고 보니까 애들 사진이 나오더래. 거기에 자기 애기 언니가 거기 있더래.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첫애라며 언니가 왜 거기 있냐?
하나님은 이 세상은 획일적으로 다루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그렇게 획일적으로 만드시지도 않으셨고 하나님이 그렇게 획일적으로 다루시지도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34살에 신학대학 교수가 됐다 그리고 이제 학교에 들어갔어요. 가보니까 가관이야. 그때는 지금보다 대학 들어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대학 들어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가관이야, 가보니까. 신학교인데 교회 안다니는 애도 있더라고. 그리고 왜 그렇게 싸워? 코피 터졌다고 연락오고, 이빨 부러졌다고 오고, 경찰서에서 당신 학교 애들 싸우다가 경찰서에 붙잡혀왔다고 하고, 목사 된다는 애들이 왜 그렇게 싸우냐고 그러고, 진짜 가보니까 방황하는 애들이야, 애들. 거긴 못된 녀석도 있고, 천성은 안 그런데 진짜 그렇게 다니는 애들도 있고 그래요.
제가 학교 생활하면서 제일 싫어했던 게 부정직이었거든요. 그래서 커닝을 하는 거하고 그 다음에 리포트 베껴 쓰는 데 화를 안 낼 수가 없는 게 리포트를 내는데 어느 녀석은 한 녀석이 써서 누구는 샘물체로 내고, 누구는 명조체로 내고, 또 하나는 고딕체로 내는 것입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요. 그래서 요즘 같아서는 안 그랬을 텐데 수백 장의, 400장의 그 리포트를 펼쳐놓고 조교하고 쭈그리고 앉아가지고 그 중에 비슷한 것끼리 찾아내요. 결국은 찾아내서 방을 붙였어요. 1번 리포트는 4번 리포트하고 비슷함, 8번 리포트는 26번 리포트하고 비슷함, A반 6번 리포트는 B반 82번 리포트하고 비슷함, 누구 리포트는 다음 것을 섞은 거하고 비슷함 세 개씩. 그렇게 해 놓고 관련자들이 모두 와서 해명하지 않으면 낙제임. 필수 과목이었거든. 그 다음에 나하고 한번 걸리면 4학년 말까지 계속 필수과목으로 만나야 하니까 그러니까 무시할 수 없으니까 오는 거야. 잘 가다듬어야 돼. 한 녀석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똑똑” “들어오세요. 뭐야?” “저 리포트보고 썼다고” 그러면서 실실 웃으면서 이제 소파에 앉는 거야. “어딜 앉어? 서 있어. 임마. 너는 리포트를 보고 썼지?” “저 조금.” “나는 이제 지쳤다. 너 같은 인간들하고 이야기하는 게 싫어. 그러니까 나는 너하고는 할 얘기가 없고 네가 우리 학교 와서 목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도장을 찍어준 니 목사님 얼굴 좀 보자. 전화번호 대. 내가 직접 한번 통화를 하면서 도대체 얘를 뭘 보고 신학교를 보냈는지 추천해준 추천자의 의도를 물어보자. 불러. 목사님이 너무 힘들면 장로님 이름이라도 대. 내가 장로하고 한번 통화해 보게. 불러” 그때야 비로소 이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 거야. 막 퍼부어요. “당장 그만두고 가서 메추리알 장사를 하든지 햄버거 가게를 하든지 해. 임마. 니가 목사가 되서 우리 후손들이 너 같은 녀석한테 목양을 받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난다.” 리포트를 얼굴에 휙 집어던지는 것입니다. 한 번에 기선을 제압을 해야 해. 그런 녀석들은 그렇지 않으면 기에서 밀려서 안됩니다. 확 집어던져요. 그러면 이제 밖에 나가요. 밖에 있는 애들이 “야 뭐라고 그래 뭐라고 그래.” “어 말도 마.” 그러면서 가요. 그 다음에 하나씩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와서 삐쭈그리고 밖에서 고함소리도 들었겠다, 이러고 있는 거야. “거기 앉아.” “네” 하고 앉아. 얘는 이제 그렇게 다루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얘는 “그 따위로 하려면 집어치워” 그러면 걔는 바로 내려가다가 자퇴원서 쓸 애거든요. 그럼 이제 가까이 가서 “내 방에 커피, 녹차, 율무차, 생수, 오렌지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는데 뭘 마실래?” “괜찮습니다.” 항상 그래요. “그래도 골라봐.” “아니 괜찮습니다.” 커피를 따뜻하게 한잔 타서 줘. “설탕 넣어줄까?” 그래서 시작을 하는 거야. “왜 리포트 베꼈어?” 물어봐야 걔가 뭐라고 대답을 하겠어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 한다며” “네” “아직도 세차하고 있는 거야” “예” “니 아내는 아직까지도 일해?” “예.” “인쇄소 아직도 다니는 거야?” “예.” “퇴근은 몇 시에 해?” “10시 돼야 들어와요.” “그래?” “애기 가졌다며?” “7개월째입니다.” “힘들겠네.” “권사님은 잘 계셔?” “네.” “요즘도 철야기도 하시냐?” “예.” “야 그럼 너 생각해 봐라. 니 아내가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밤 10시까지 인쇄소에서 일하고, 니 엄마는 철야기도한지가 벌써 몇 달째인데 그 권사님이 아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마지막 소원이 뭐겠냐 그 두 사람이. 너 하나 제대로 공부해서 좋은 목사 되는 게 소원이 아니겠냐?” 그럼.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입니다. 야단을 칠 필요가 없어요. 걔는. 이미 벌써 양심으로 야단을 맞고 있기 때문에 야단을 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완전히 찌그러지는 거야. “그래서 이제는 용서해 줄께. 삼일 여유를 줄 테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빨리 써서 이 밑에다가 집어넣고 가. 점수 줄께.” 그러고 이제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야. 가서 얼른 써 가지와. 그리고 다음부터 기도 많이 해라” “네” 그러고 이제 나가, 그럼 이제 눈물을 씻으면서 “야야 뭐라고 그러니 뭐라고 그러니” 걔도 또 막 머리를 흔들면서 지나가요. 그게 왜 그래요?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해? 열 내고 그냥 보고서 쓰면 전부다 F주고 끝나면 되잖아요.
사랑하면 그렇게 사람들을 잘못한 것을 가지고라도 그 사람을 고치는 기회로 삼고 싶은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항상 잘했어요? 못된 짓도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고치셔서, 그래서 이끄시고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시인이 하나님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사랑을 녹여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21살 때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죽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감격적으로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워낙 희미했기 때문에 한동안 어둠속에서 살았습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까 정말 하나님이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랬을 때에는 뭐 세례 받을 때야 내 인생을 통째로 주님께 드리고 싶었지만 그건 순간의 마음이었고 그냥 내가 인생을 혼자 살아가던 걸 이제 혼자 안 살아가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거였거든. 그렇다고 인생의 계획표를 바꾼다기보다도 내가 인생의 계획표를 짜고 가면 나도 주님한테 잘 할 테니까 주님도 날 좀 잘 하시라고, 서로 좀 잘하자고 그 뜻이었거든. 사실은. 그런데 예수 믿고 나니까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잘 됐으면 주님을 믿었겠어요? 되는 게 없으니까 결국은 주님께 왔는데 그때는 가끔 되는 게 없었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항상 되는 게 없는 거야. 나는 사실은 하나님이 축구로 말한다면 슛은 내가 쏘겠다는 거거든. 센터링만 그림같이 해달라는 거거든요. 근데 그걸 안 해 주셔. 그리고 전체 그림같이 발리슛을 했는데 공은 굴러가고 몸만 공중에 한번 날라서 개구리 같이 엎드려지는 상황만 수시로 연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랬어요. 왜 도대체 내가 인생계획 짜놓으면 하나님은 계속 짜게 내 버려두시고 또 살아보게 내버려 두시다가 어느 순간에 그건 틀렸다는 걸 온 몸으로 깨닫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까? 그러면 남의 인생에 작대기만 긋지 말고 당신이 와서 직접 해 보시라고, 그래서 어린 마음에 사람들한테 그랬어요. 내 인생의 최대 실수는 중학교 2학년 때 주님을 멀리 떠난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21살 때 다시 돌아온 거다. 그러니 인생의 평안이 있을 수 없죠. 인격적인 승복이 없는 신앙생활 속에는 극단적인 자기 의가 있든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이 말하는 길 잃은 양이라고 할 때 우리는 불신자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잃어버린 양들은 많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신앙, 주님의 사랑 앞에 승복하지 않은 비인격적인 신앙, 이 속에서 그의 영혼은 어둠속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품에 돌아올 때까지 그는 안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양)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목자라고 하는 이 말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양을 모두 우리에 넣고 헤아려 보니까 아흔 아홉입니다. 한 마리가 없어요. 항상 군대에서든지 학교에서든지 세어 봐서 없는 애들은 선생님이 다 아는 애들이 없는 거야. 이 양도 자기가 아는 양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양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시간은 이제 뉘엿뉘엿 저녁 해가 지는 때가 아니겠어요? 가다가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져 발목이라도 분질러지면 병원비가 더 들거고, 가다가 강도라도 만나거나 맹수라도 만나면 목숨도 위태로울 텐데 양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호주에 갔을 때 하도 궁금해서 양이 얼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한 15만원, 16만 원 정도 하더라구요 그 당시에. 한 마리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 근대 그럴 수가 없죠. 제가 여기 방배동에 있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였는데, 이제 점심을 먹으러 오전 수업을 끝내고 내려가는데 거기 음식 골목이에요, 쭉. 아주 옷차림도 값비싼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어린 자매, 고등학생쯤 되어 보여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그렇게 되어 보여요. 보기에 돈 있는 집 애들 같아요. 얘네들이 풀 통을 들고 다니면서 뭘 포스터를 붙여요. 뭘 하나 얘네들이, 붙이고 간 자리를 보니까 “현상금 50만원” 이렇게 걸어놨어요. 범인 현상범이면 경찰서에서 붙일 텐데 쟤들이 왜 그러나 그러고 보니까 그 밑에 칼라 사진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근데 그게 뭐냐 하면 주먹보다 좀 큰 강아지가 리본을 꼽고 거기에 있는 거야. 그거를 50만원을 현상금을 걸면서 밑에 적어놓기를 “이 강아지를 보셨거나 보호하고 계신 분들이 전화를 주셔서 그 강아지를 찾게 해 주면 50만원을 드리겠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교수를 하면서 전도사를 했는데 월급이 32만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50만원은 굉장히 큰돈이었지요. 더군다나 그 어린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그 강아지가 그래도 얼마쯤 되는 걸까? 한 70만원은 나가야 될 거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왜 대답을 안 해? 그래도 최소한 70만원이 되어야 되잖아. 그래야지 50만원 주고 20만원은 남지. 다른 예배 시간에는 다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여러분은 약아서 고개를 안 끄떡 거리네. 돈하고 상관이 없어. 그거 발바리 잡종일지도 몰라. 보신탕에서도 안사는 개일지도 모른다 이것입니다. 근데 그 개가 종류가 뭐냐? 그거는 문제가 아니야. 너무 가엽고 불쌍하고 보고 싶은 거야. 엄마가 보고 싶은데 고졸이냐 대졸이냐가 문제가 돼? 문제가 돼? 우리 엄마 배 나왔나, 안 나왔나 그게 문제가 돼? 아빠가 보고 싶은데 대머리냐 가발이냐가 문제가 되냐고?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얘네들은 밤마다 우는 거야. 요맘때면 요게 핀 꼽고 내 옆에서 같이 잤는데 어디로 갔냐는 거야? 가다가 길 건너다가 차에 치였나? 아니면 보신탕집 아저씨가 삼계탕처럼 해 먹으려고 가지고 갔나? 큰개한테 물려서 어디서 피를 흘리면서 추운 골목에서 덜덜 떨리고 있지 않을까? 이게 생각을 하니까 아이들이 마음에 막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게 뭐예요? 관계, 관계입니다. 그런 거를 그리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겠다는데 주님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여러분을 찾으시려고 그래. 찾아서 데려다 놓으면 뭐 주님의 집의 살림에 보탬이 됩디까? 강기갑 씨의 말 따라 “살림 좀 나아지셨습니까?” 주님이 여러분 방황하는 걸 불러다가, 불러다가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주님 집에 살림이 좀 나아집디까? 그런 정도로 헌금을 많이 합니까? 그럴 정도로 무슨 하나님께 모든 영광 자기가 영광 찾아봐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걸 돌려 드립니까? 그러면 또 조금 있다가 또 나갈 거 아니야. 역마살이 끼어서 세상으로 또 나가잖아요. 그럼 남는 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간절히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는 살게 하네 갈보리의 십자가 사랑
무슨 도움이 되서가 아니라 사랑이 잃어버린 자신의 양떼를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주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게끔 말해 줄게요. 여러분이 은혜 많이 받아서 잃어버린 영혼들 너무 불쌍해서 열렬히 전도하잖아요. 그죠? 청년 1부 요새 열심히 전도하던데, 막 전도하잖아. 그게 뭐 살림에 보태 쓰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데리고 오면 청년 2부의 목사님이 돈 좀 준대? 그런 거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랑이 그거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태어나서 어디서 이런 사랑을 받아볼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눈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증언해 주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인생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래요.
그래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경우에는 우리가 정말 주님을 좋은 분으로 신뢰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나 우리들이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시련을 만나고 위험한 계곡에 있을지라도 두 가지 사실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가슴에 새기면 우리들이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격적인 주님께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났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우리 때에는 질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수시로 죽고 특히 어렸을 때 굉장히 많이 죽었습니다. 어렸을 때에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를 데리고 예방 주사 맞으러 가던 경험이 있습니다. 안 간다고 그러면 딴 때는 져 주시는데 그때는 팔로 확 비틀어서 우리를 끌고 가는 거야. 그러고는 그 아픈 예방 주사를 BCG 같은 것을 한번 맞고 막 며칠씩 앓고 그랬거든요. 잘못 부작용 생기면 또 죽고, 근데 그거를 굳이 마치는 것입니다. 그때 어린아이 마음에 엄마가 선하고 나를 사랑해서 이렇게 하신 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그 예방주사는 맞고 병마에 시달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서 오늘날 사람 노릇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등부 전도사를 할 때인데 수련회를 갔어요. 은혜를 주시기는 주셨는데 흡족하지가 않았습니다. 마지막 헤어지는 날 이제 다 모여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데 보따리를 싸가지고 모두 모였어요. 그래서 마지막 설교도 다 끝나고 마지막 일어나서 찬송을 부르는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우리 모두 다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그러고 기도가 시작이 됐는데, 뜨겁게 기도를 하는데 한 두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으악” 그러고 둘이 꽈당 하고 쓰러졌어요. 둘 다 덩치가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하나는 자매였고 하나는 형제였는데 꽈당 그러고 떨어졌어요. 그러고 이제 일단은 그렇게 해서 예배 끝나고 너희들은 가서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하고 내 보내고 그리고 둘이 들여다보니까 형제 녀석은 그 거구가 쓰러져 가지고 땀을 삘삘 흘리면서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그러고 막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면서 기도를 하는 거야. 자매 얘는 얼굴이 노래가지고 막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정신없이 우는 거야. 그래서 이제 안 되겠다 끌어내라 그래 가지고 두 다리 들고 하나씩 해서 건넌방으로 조용한 방으로 가서 눕혀놨어요. 형제 그 녀석은 하여튼 별명이 계곡이었는데 그렇게 예배 시간마다 정신 사납게 만들고, 공과공부를 방해하던 녀석이었습니다. 거기서 이제 한번 걸린 거야.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자기 혼자서 그 동안에 지은 죄를 회개를 하는 거야. 아무도 걔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너는 제대로 걸렸다.” 우리 모두 그랬어요. “저놈 저거 제대로 걸렸다.” 막 혼자서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막 이래요. “내버려 둬라”. 한참 기도하더니 그 녀석은 그쳤어. “이제 됐으니까 너 회개했으니까 새 사람되라. 예배 시간에 까불지 말고” 데리고 나가라. 근데 이 자매는 계속 우는 거야. 출발해야 되는데 계속 우는 거야. 그래서 야, 문 닫어 내버려 둬라, 울고 싶을 때 실컷 울어야 된다. 말리니까 더 크게 우는 거야. 그래서 안 말려 버렸어요. 그랬더니 막 우는 거야. 마치 날 왜 혼자 두고 문 닫았냐고 그러는 것처럼 막 우는 거야. 그러더니 어느 정도 소리가 떨어져서 기력이 빠졌구나. 그러고 들어가서 “야. 너 하나님 앞에 뭐 죄지은 거 있냐? 뭐 감추는 거 있냐? 왜 그렇게 통곡하며 우냐?” 그랬더니 더 서럽게 우는 거야. 그래서 그러지 말고 전도사님께 얘기를 해봐. 이럴 때는 그냥 고백을 하는 것도 괜찮다. 말해봐라 그랬더니 이제 조금 울먹울먹 하더니 “전도사님” “왜” “난 하나님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야 하나님이 널 용서할 수 없다고 해도 이해를 못할 텐데 니가 뭔데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냐” 그러고 얘기를 들으니까 이게 사연이 있더라구요. 얘가 얼굴은 이쁜데 공부를 잘 안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귀여움을 많이 못 받은 거 같아요. 근데 언니가 시집가서 애를 낳은 거야. 그러니까 이제 첫애를 낳았으니까 너무 힘드니까 동생 방학 때 놀고 있으니까 와서 같이 있자고, 자기 좀 도와달라고 이렇게 해서 얘가 온 거야. 아니 여태까지 애 낳아 놓으면 그저 이렇게 눕혀놓고 길렀잖아요. 근데 신식 엄마라고 애를 이렇게 엎어놓고 기르면 애가 그냥 일어나려고 막 용을 쓰면서 심장이 튼튼해진다고 하는구만. 그래가지고 애를 엎어놓고 기른 거야 그날도 얘는 엎어져 있고 자기는 애기 옆에 누워서 이렇게 아기를 봐 주면서 놀았던 것입니다. 잠이 든 거야. 한참 잤는데 신경이 이상해서 눈을 탁 떴는데 두꺼운 이불에 코를 묻고 엎드려 있는 거야. 그래서 툭 쳐보니까 얘가 완전히 사지가 다 늘어진 거야. 숨을 안 쉬는 거야. 그러니까 얘를 품에 안고 막 이제 병원으로 뛴 거야. 근데 자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본적이 없어요. 하나님 이 아이만 살려주시면 내가 뭐든지 하겠다고 도와달라고. 의사한테 탁 가니까 의사가 진찰 하더니 “야, 얘는 벌써 죽었다.” 그러니 그 후에 집안에서 받을 박해. 또 집안 식구들이 이해를 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얘가 느꼈을 마음의 가책이 하나님을 향한 앙심으로 변한 거야. 그러니까 설교를 하면 벽에다가 공을 던지는 것 같고 기도를 하자고 그러면 완전히 커다란 동굴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이 절대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랬어요. 지금도 나는 그 아이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몰라요. 설명할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그것이 지금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폐기하지는 못한다. 그 뜻은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을 하늘나라에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일이 생기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성경의 명제적 사실과 현실 속에서 그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오히려 일어났기 때문에 주님을 모든 상황을 뛰어 넘어서 믿어야 할 필요가 증대된다는 것, 거기까지는 우리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얘야,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픈데 니 조카가 왜 죽었는지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니 조카가 죽은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란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신단다. 주님께 돌아오거라.” 그리고 한 동안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인격적인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거짓과 가식, 그리고 아무 생각도 없는 생활의 반복 이런 것들이 되기 때문에 그 신앙 속에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받으실 수 있겠어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춤으로 대해 주세요. 이런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격적인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백에서 이 말이 나왔다면 우리는 신뢰할 수 있지만 다윗이 이 말을 했다면 우리는 믿기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는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얘기는 거의 안 나오는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나와요. 이새였어요. 그런데 이 아버지는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편애하던 아버지였어요. 사무엘이 하나님께 분부를 받았습니다. “이새의 집에 내가 세울 왕이 될 아이가 있는데 가서 기름을 붓고 오너라” 그래서 갔어요. 큰 아들부터 차례로 나왔는데 기름을 부으려고만 하면 하나님이 “아니다, 너는 그 아이의 외모를 보지 말아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계속 말씀하시는데 근데 이젠 없어요. 분명히 하나님은 그 집의 아들중의 하나를 기름 부으라고 그랬는데 없어요. 그래서 물었죠. “진짜 이게 아들이 다냐?” 그때에 이새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애가 또 하나 있어. 그게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도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그렇게 훌륭한 왕이 되는 거를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다윗은 형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사랑하지 않고 따돌렸어요.
뿐만 아니죠.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의 깊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로서 교통할 수 없는 여자였어요.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할 수 있으면 다윗은 사울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하나님이 왕으로 기름 부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집요하게 자객을 풀어 그를 추격했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면 사울의 딸이 과부가 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병자처럼 자기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긴 세월을 도망을 다니며 추격자의 신세로 때로는 남의 나라의 더부살이를 하기도 하였어요. 결국은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이 아버지인 자신의 신앙은 티끌만큼도 물려받은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반란이 일어나서 자기를 죽이겠다고 칼을 든 반역의 우두머리가 있는데 그게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강간범이 또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서로 찢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보면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 정말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것을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에 영혼의 어둠속에 헤매며 치열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상처밖에 없는 인생을 산 사람이 오늘 어떻게 해서 "I shall not be in want",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를 하고 있죠? 우리의 모든 침체와 불행이 환경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이 사람의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고백은 좋은 환경이 가져다주는 고백이 아니라, 환경은 끊임없는 상처와 고통과 결핍을 안겨주었지만,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신앙의 힘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경험하는 인격적인 사랑, 마음을 녹이는 하나님의 그 큰 아버지 사랑, 자기도 받아본 적이 없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면서 그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을 그 인격적인 교재 속에서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찬양) 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그래서 상처뿐인 가시밭길 같은 인생이었고, 끊임없는 배반과 복수, 가슴을 찢는 슬픔이 그의 인생에 늘 친구처럼 따라 다녔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혼의 참된 만족을 환경에서 구하지 않고, 그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자기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그 큰 인격적인 사랑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환란이나 시련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정사나 권세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느끼는 여러분의 고통, 영혼의 깊은 침체는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부족 때문이지 환경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살면서 그 분의 인격적인 사랑 앞에 깊이 설복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의 줄에 굳게 붙들려서 주님의 그 은혜에 매여서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의 목자이신 주님을 굳게 붙들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목자되신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0. 06. 13 주일오전 예배
3.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3).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라’고 고백한 이 시는 2절부터 차례대로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 신앙의 경험 속에서 갖게 된 확신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자신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그런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3절 부터는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사실을 보다 더 깊은 영적 관계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소생이라고 한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하야’인데 ‘살아있다’ 그런 뜻입니다. 즉,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시인이 자신의 영혼도 죽은 자와 같았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언젠가 자신의 영혼이 죽은 자와 같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히 자신의 영혼을 살게 하셨을 때 그때에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감격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온 땅과 천지를 창조하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이 죽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혼의 침체’라고 부릅니다. 육체의 죽음은 육체가 자기 밖의 사물들을 향하여 반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살아 있게 하는 신진대사를 멈출 때 이때에 우리는 그 육체가 죽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이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 영혼은 절대로 파멸되거나 죽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의 의미가 영혼의 경우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파멸되거나 멸절될 수 없지만 영혼이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올바른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에 끊임없이 공급되고 전달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이 관계가 사라질 때에 그때에 이러한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적 침체’라고 부릅니다. 이 침체는 영혼의 활기와 원기, 생명력이 현저히 감퇴하고 영혼이 영혼다운 선한 기능을 발휘해서 육체를 장악하여 영혼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가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영혼의 침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런 침체 속에서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영적 회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겠죠?
그러니까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을 그런 침체 상태에서 확 살려내시는 이러한 소생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양떼이며, 목양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특히 시편에서는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죄 때문이고, 둘째는 무지 때문이고, 세 번째는 끊임없이 이유를 모르고 당하게 되는 고통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고통은 시인에게 영적인 침체를 가져 다 주었습니다. 특별히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의미를 모르고 당하게 되는 끊임없는 고난은 영혼의 침체를 가져옵니다. 두 번째 원인은 무지입니다. 이 무지는 죄에 가깝기는 하지만 죄 자체인가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쨌든 시편은 이러한 무지가 영혼의 침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다른 시인은 시편 73편에서 이러한 신앙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약 백성의 경건한 무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언약백성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하였지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고 계실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한 번 눈길을 하나님 안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돌렸습니다. 그들이 커다란 고통 속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는 저렇게 평안하게 살지만 언젠가는 커다란 환란을 만날 거야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렇게 큰 환란을 만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죽을 때도 평화롭게 죽고 꽃상여에 쌓여서 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시인은 커다란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초라한 모습과 그들의 번영을 비교했습니다. 나는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의 삶을 비추고 묵상하는데 하나님은 매일 같이 나를 야단치시고 책망하신다. 에이 그럴 바에 나도 막 살아버릴 걸,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분 앞에 순종하는 것이 내 삶의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하면서 영혼의 침체가 확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수시로 꾸짖으셨습니다. 그가 완전히 정결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회개하여야 할 죄를 발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소가 들어가는 순간 하나님의 선명한 진리의 빛이 섬광처럼 그의 마음에 마음을 가르며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사후의 세계를 주셔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그 일들을 하나님이 영원한 세계에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시인의 마음에는 커다란 빛이 들어왔고, 그 성소에서 찬란한 빛을 받으며 자기 눈에는 형통하고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죽은 하나님 없이 산 사람들이 받을 끔찍한 심판과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사람들이 뵈옵게 될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그 악인들은 마치 길바닥에 패대기쳐서 깨뜨려지는 파기와 같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심판의 종말론적인 운명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회개한 적도 없고, 뉘우친 적도 없고, 자기의 죄를 조사한 적도 없었습니다. 한 줄기 선명한 말씀의 빛이 자신이 아직 알지 못했던 종말 이후에 일어날 영원한 심판과 상급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한 순간에 그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영혼이 새롭게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소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백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 밖에는 이 세상에서 사랑할 뿐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진정한 복이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밖에 사모할 자가 누가 있겠나이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는 복이옵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이렇게 아직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주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든 주권의 비밀들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가장 커다란 의무입니다.
그래서 우리 요새 우리 교리반에서 매일 가르쳐 줘요. ‘스투데오 에르고숨’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 한다’. 그러면 물어요. ‘당신들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공부해야 합니까?’ ‘우리가 공부해야 할 대상은 넷이니 하나님과 이 세계와 그 다음에 인간과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보편적인 인간과 개별적 인간인 나 자신을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을 배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나의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 중요한 신앙의 근본입니다. 이런 잘못에 빠졌을 때에는 회개해도 죄가 발견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밑도 끝도 없는 혼란 속에서 영혼의 침체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영적 침체의 원인은 그것이 바로 죄예요, 죄. 그 죄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방해물이고, 아무리 하나님이 찬란하게 당신의 은총의 햇빛을 비춰 주어도 계시의 빛을 비춰 주어도 인간의 죄악이 먹구름처럼 가득 가리우게 되면 그러면 그는 어두움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죄는 영혼을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는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자기의 죄가 생각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그렇게 큰 죄가 있냐, 신문에 오르내릴 말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법도 잘 지키면서 살았는데,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데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지었느냐 말입니다.
어느 개울가에서 군인들이 돌멩이를 줍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부하 세 사람에게 명령했습니다. 자루 하나씩을 주면서 이 자루에다가 50kg씩 돌멩이를 담아온다. 실시 그랬어요. 한 사람은 50kg짜리 돌멩이를 자루에 하나 담았고, 어떤 사람은 두 개를 담았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이 돌멩이를 지고 얼마까지 갈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천 개의 작은 공깃돌을 모아서 50kg 짜리 돌멩이를 만들었습니다. 근데 그 다음 명령이 사람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이 돌멩이를 제자리에 갔다 둔다. 실시 그랬어요. 그러니까 하나 가져온 사람은 뚜렷하게 기억이 나니까 갖다 놓고, 두 개 가져온 사람도 약간 망설였지만 제 자리에 갖다 두었습니다. 천개를 가져 온 사람은 한 개의 돌멩이도 제자리에 갔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위선과 가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위선이나 가식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에게 있었지 창기나 세리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인가 하는 것을 또렷이 아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죠.
어느 대학에서 실험을 했대요. 그래서 접시처럼 납작한 비커에다가 차가운 물을 붓고 개구리를 큰 거 한 마리를 그 속에다가 담갔어요. 밑에다가 불을 땠는데 1초에 0.02‘C 만 올라가도록 불을 조절했습니다. 물론 개구리는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펄쩍 뛰어서 도망칠 수 있는 조건이었죠. 그런데 1시간 20분 후에 개구리가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한 번에 뜨뜻한 물에 집어넣으려고 했더라면 개구리가 몸부림을 치고 뛰어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따뜻해 오자 그는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삶아져서 죽고 만 것입니다.
죄는 분명히 큰 죄도 있고, 작은 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질 자체는 언제나 똑같은 것입니다.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되고 끓이면 수증기가 되고 내버려 두면 그냥 물로 있지만 사람 보기엔 그것이 각각 다르고, 또 커다란 탱크에 물도 있고, 작은 컵 하나에 담긴 물도 있지만 그 본질 자체는 모두 똑같은 것입니다.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로 이루어진 죄의 종류와 죄의 크기는 각각 달라도 본질은 한결 같아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고 자신의 행복이 하나님의 뜻보다도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가 한 번에 커다란 죄를 지었는지 혹은 조금씩, 조금씩 들어와서 그 죄가 양적으로 많이 쌓이게 되었든지 간에 마지막에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져오는 결과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의 상태로 우리를 데려 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도 생생한 기도의 은혜, 언제든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그 처음 사랑의 때처럼 마음이 부어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향연이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신앙의 연조는 깊어지고 성경 자체에 대해서 아는 것들, 교리적인 지식들은 증진되었지만 맨 처음 회심하였을 때처럼 성경을 펼치면 어디를 읽어도 우리의 마음을 녹이면서 산제사를 드리게 하는 그 달콤한 성경의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여러분 중에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쁜 일이었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무겁게 느껴지고 주님을 섬기면서도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나와 함께 교통하신다는 행복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모든 어려움들을 생활이 곤궁하기 때문에, 일이 바쁘기 때문에, 몸이 피곤하기 때문에,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어서 등등으로 주변적인 환경의 탓으로 돌릴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방해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모든 영적인 무기력의 중심 자리에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문지상에나 오르내릴 어마어마한 형법상의 죄 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께 대들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고분고분 굴복하지 않는 뻣뻣함과 거만함, 그리고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놓아주지 않는 집요한 미움과 불신앙,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죄로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있는 영적인 관계를 가로막아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구약에서 보기 드물게 순결한 신앙을 가진 하나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타락한 인간의 종자인지라 완벽한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높은 진리의 세계를 정말 깊이 깨달은 그러한 거룩한 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도 우리와 꼭 같은 죄인의 뿌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생을 살면서 괄목할 만한 커다란 두 가지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금지한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왕이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행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은 이 일을 끔찍이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구조사는 군대의 수를 헤아리기 위한 인구조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이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여 당신이 지켜주시는 그 능력 안에서 믿음으로 동행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왕국의 강성함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뽐내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 인구조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고 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갔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죄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범죄의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도 거의 받지 못했고, 그리고 결혼했지만 그 아내는 자신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있었지만, 끊임없이 찌르는 칼같이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한 나라의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그는 영혼의 어둠 속에서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구원의 기쁨을 거두시고 자신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하였고, 그는 그래서 밤마다 눈물로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우는 회개 속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침체를 가져오는 이 죄가 쌓여가는 것은 마치 빚을 갚지 않고 계속 돈을 빌리는 것처럼 우리의 죄가 쌓여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죄를 짓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매일 자신을 성찰하고 이렇게 말씀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가 영혼의 침체를 가져온다면 이 죄를 치우는 유일한 방법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용서를 베푸시고 그래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비롯한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이 언약의 유익을 두 가지를 베푸셨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한없는 용서와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능력의 무한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게 될 때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공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이어서 드리는 그 희생의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참회는 다시 그 죄를 용서받게 만들어 주셨고, 그 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금 그들을 사랑하시는 놀라운 자비를 용서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언제든지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주홍과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해 주셔서 다시 그 영혼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만들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몸으로는 주님을 예배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나 마음으로는 주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영혼에는 깊은 어둠과 갈등이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부 중 한 사람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뼛속 깊이 베인 죄 때문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에 주님께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마치 자신의 태어난 목적이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고 참회하는 것,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많은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사랑하는 성도인 그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참회라는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뉘우쳐 본 적이 있습니까? 가장 최근에 여러분이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에 그 분은 나를 사랑하셨는데 나는 그 사랑을 죄로 갚았다는 가책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남몰래 흘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이 벌레 같은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그 사랑을 모질게도 반역하고 악을 행하고 주님의 마음에 칼을 찌르듯이 죄를 지은 것 때문에 자신이 미워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한 적이 언제입니까?
또 다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게을러져서 예배 시간에 못 맞춰 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예배에 대한 관념도 없이 아무 때나 벌컥벌컥 예배당 문 열고 들어와 예배를 드리면서 참회하지 않고 말씀 전하는 시간에 자신이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그 성품을 알고자 하는 절박함도 없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예배드리는 그런 태도 속에서 여러분이 과연 회개라고 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나에게 설교 시간에 왜 그렇게 우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나는 이 시간에 말하고 싶어요. 그대가 나처럼 울면 나는 눈물을 그칠 것입니다. 도대체 오늘날의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돌 가슴, 철 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죄를 공기를 흡입하듯이 먹고 토해내면서도 그것을 쏟아낼 수 있는 참회의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혼은 죽은 자처럼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중생의 생명은 사위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있으나 교회다운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있으나 예수는 그 마음속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 티끌 같은 존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 분을 섬기기 위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조차도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그런 막 되먹은 신앙을 가지고 종교의 위안을 삼으면서 예배당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장난입니까? 우리들의 믿음이 장난입니까? 도대체 진지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좋으면 솔직하게 ‘나 아무개는 당신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절교를 선언하고 세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피터지게 징계를 받고 피눈물 흘리며 돌아와 진실하게 예수를 믿는 그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어둡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횃불처럼 빛나야 하는 교회는 마치 불 꺼진 등불처럼, 맛 잃은 소금처럼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그래서 영혼이 깊은 죽음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어두움이나 이 세상의 어두움이나 일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나는 이번에 미국을 방문하면서 그 얘기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돌아오면 꼭 해주리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방황하는 사람이 있길래 한국에 들어간다고 하기에 열린 교회로 가보라고 신신당부를 한 사람이 있었대요. 그래서 두 부부가 와서 예배를 몇 주 드렸대요. 그리고는 별로 건전하지 않은 교회로 가버렸어요. 이유가 뭔가 했더니 ‘목사님만 열렬하지 내 주위에 있는 교인들은 다 자더라’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장했겠죠. ‘목사님만 열렬하지 성도들은 내 주위에서 다 자더라’. 그러니 영혼의 회복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던 다윗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맨 처음에 그는 자신의 죄를 재물로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수없는 소를 잡아 죽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번제나 소를 잡아 죽이는 것이 아니구나’ 만약에 그 제사를 기뻐하였더면 그는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죄를 지었어도 좋으니 좀 진실해 지세요. 그래서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 속에 자기를 비춰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느껴보세요.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투성이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거짓된 여러분의 마음에 진실하게 충실해지는 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거짓된 여러분의 마음에 충실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이 베풀어 주신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으나 그 모든 죄를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범죄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세계, 자기같이 쓰레기처럼 더러운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그들이 우리들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어찌할 수 없이 밀려오는 죄의 세력 앞에 핍절한 영혼으로 사는 것을 더 보실 수 없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심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주님이 그 뿌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찢으신 옥체를 통해 휘장이 갈라지고, 그 분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가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열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그 핏값으로 지불하신 거룩한 구속의 공로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이 되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죄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우리를 정죄할 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든지 당신에게 참회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 있는 친구들의 사랑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그래서 주님의 그 큰 사랑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분의 사랑을 죄로 갚고, 그 분의 은혜를 악으로 갚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 분 앞에 용서를 빌며 참회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피를 기억하사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은 주님을 끊임없이 버려도 언제나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승복시키시고, 그래서 우리로 돌아온 탕자가 되게 하셔서 그래서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우리를 불러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죄 가운데 있어서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을 타이릅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우리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회개하고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2010. 06. 20 주일오전 예배
4.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3).
시인은 죽은 자와 방불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분이 어떻게 자신의 목자이신지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주님이 그렇게 죽은 자 같은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계획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것은 그로 하여금 의의 길로 걸어가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이죠.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체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은혜일 수가 없죠. 우리의 영적인 회복도 역시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자, 영적 침체의 원인인 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결국은 영적인 침체가 오게 된 것입니다. 무지 때문에 영적 침체가 온다고 할 때 그것 역시 우리가 알지 않기로 한 선택이니 그것도 우리 책임이겠죠. 자, 고통 때문에 영적인 침체가 온다고 했는데 그 고통도 대부분 우리의 잘못 때문에 온 것이고, 백번 양보해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인데, 주님은 믿음을 주시길 원하고 믿음을 잃어버린 것은 우리지 주님이 뺏어간 것이 아니죠.
결국은 하나님이 살려주신 영혼이 죽음과 방불한 침체에 빠지는 모든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 있는 자는 용서해 주심으로써, 또 무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깨닫게 하심으로써, 또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심으로서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십니까? 모든 것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영적인 회복을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기는 하지만, 그것은 목적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시킬 때 이 아이들을 열심히 잘 길러야지만 노후에 내 의식주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를 기르는 부모는 우리 중 거의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이들을 기르기만 하면 어떻게 살아가든지 우리는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도 또 없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은 없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소망과 기대가 없다면 그것은 참 사랑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소명을 내포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사람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 그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 가지셨던 그 뜻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은혜가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도 불순종하며 살아가면 그 은혜는 금세 부패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 속에 담긴 소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과연 그 은혜가 참된 하나님의 은혜였는지 우리는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고 소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혹은 무지 때문에, 혹은 고통 때문에 그렇게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에 주님은 거저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생된 영혼으로 그에게 걸어갈 길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히브리말로 ‘쩨댁’ 이라고 되어 있는 이 ‘의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마음과 정신, 영혼의 상태이며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상태 전체를 포괄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면 그것은 의고, 부합하지 않으면 불의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율법이며 율법 속에 담겨있는 계명인 것입니다. 그 계명, 그 계명을 기준으로 그 계명에 합치하는 삶은 의의 삶이고, 그 계명에 합치하지 않는 삶은 불의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또 자기 같은 인간을 지으신 계획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인간들이 모두 이해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서 그 높은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록 철학적으로는 그 모든 이치를 터득하여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계명을 주셔서 그 계명을 토대로 주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뭐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 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런 탁월한 지성이 모자라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배려를 자신의 삶 속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이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율법과 계명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언약 백성들 속에도 여전히 죄의 요소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본성들이 존재합니다. 그 본성이 마음껏 사람 속에 융성해서 가득 차게 될 때에 그것이 불의가 되는 것이고, 그 불의한 것이 삶으로 표출 될 때 그것이 불의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일관성 있게 한 길로 계속 나오게 될 때 그것은 불의한 길을 걷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부패하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요즘 같은 때에 음식을 그저 공기 상태에 노출하기만 하면 저절로 부패합니다. 그리고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성 자체가 여전히 부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부패하고 불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노력할 것이 필요 없지만,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침체 가운데 두지 마시고 진리의 빛으로, 은혜의 불로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 주셔야지만 우리들이 소생된 영혼으로 의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창조주의 영광스러운 광휘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그 빛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모든 자연의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영광스러운 창조의 광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 속에서 회수되었고,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올바로 감상할 수 있는 인간의 영적인 알력도 부패하게 되어서 올바로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눈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밝은 태양빛이 사물을 보는데 도움이 되지만, 안질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태양의 밝은 빛이 눈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처럼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에 밝은 진리의 빛은 안질 걸린 사람의 눈에 들어오는 햇빛처럼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 탁월하신 구원의 길을 보여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가정을 택하시고, 한 민족을 택하시고 나라를 택하시고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언약 백성들의 의로운 삶을 통해서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충분히 보여주는 삶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통해서 미래에 보여주실 찬란한 영광을 한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부터 살아가야할 한 인간으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모본을 이 세상에 끼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참된 인간과 사람으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이렇게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언약의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소생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길입니다. 누구도 침체된 영혼으로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고, 침체된 영혼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의의 길을 따라 걸어갈 때에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항상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불의한 세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의로운 길을 걸어갈 때에 불의한 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되고, 핍박을 받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경건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경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복음적인 영성은 언제든지 필요한 때에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경건이라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도 2년 동안 학교에서 신학교의 선생으로 계속 재직을 했습니다. 그때에는 그걸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지만, 전국을 다니면서 집회하는 일에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특히 여름과 겨울에는 거의 집에 붙어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너무 지쳐서 기운이 없는데도 가서 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회심을 보게 하셨어요.
그러던 언제였습니다. 충청도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 놓을 테니까 나보고 강연을 해 달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아침 일찌감치, 아침은 아니죠. 오후에 일찌감치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어요. 그래서 차가 꽉 막혀있었습니다. 가까스로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고 지방도로로 들어섰을 때에는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좀 과속을 했습니다. 한 100km 정도 달린 거 같아요. 멀리서 파란 옷 입은 경찰이 손을 들어요. 그래서 즉시 속도를 70km쯤 줄이고 천천히 가서 섰어요. 경례를 하더니 면허증을 달래요. 그래서 ‘왜요?’ 그랬더니 ‘과속하셨습니다.’ ‘뭐 언제 과속을 했습니까? 70km로 왔는데’ ‘여기서는 과속을 안 하셨는데 산 너머에서 과속을 하셨습니다.’ ‘산 너머에서 내가 과속한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 그랬더니 ‘거기 내 친구가 감시를 하고 있는데 딱지 떼라고 무전이 왔습니다.’ 그래서 “뭐하시는 분입니까?” 그래요. 그래서 “ 내 대학의 선생인데, 요 앞에 있는 학교에서 강연을 하라고 날더러 오라고 해서 시간이 늦어서 과속을 했는데 잘못을 했으니까 딱지를 떼는데 어쨌든 빨리 좀 도착할 수 있게 해 달라”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우 교수님이시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싼 걸로 끊어 드릴게요.” 그래요. 그래 이제 아주 정신이 없어서 받아서 햇빛가리개 속에 꾸겨 넣고 그리고 부지런히 가서 아주 아슬아슬하게 도착을 해서 은혜롭게 집회 잘하고 밤중에 올라왔어요. 그 다음날 아침인데 이제 과태료를 납부해야 하는데, 범칙금을 납부해야 되겠는데 교회 직원을 시킬까 그러다가 ‘아이고, 그래도 마침 은행 갈일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갖다 내자’ 그러고 그거를 가지고 은행에 갔어요. 펼쳐보니까 그 당시에 고속도로나 일반도로에서 딱지를 떼면 그래도 한 20000원은 벌금이 나왔거든요. 근데 6000원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다시 들여다보니까 정말 6000원입니다. 그리고 납기 후에는 20% 가산금이 붙어서 7200원을 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전 차를 몰고 다녀도 딱지를 끊어도 이렇게 싼 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꾸겨진 범칙금 통지서를 똑바로 펴놓고 어떻게 해서 이런가 해서 다시 들여다봤더니 옆에 범칙사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이 사람은 금연 장소에서 담배 폈음’ 그렇게 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냈어요. 내고 그리고 은행에서 그거를 들고 한 참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그거 만약에 직원보고 갖다 내라고 그랬으면, 얼마나 실족했겠어요. 목사님이 어디 가서 담배 피다 걸려가지고, 그 교통경찰도 조금 이렇게 지능 지수가 떨어지는 사람이야. 뭐라고 써 놨냐면 ‘흡연구역에서 담배 피다 걸렸음’ 흡연 구역이 아니라 금연 구역이지. 그래 하여튼 우리 둘 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었어. 그래 그 직원이 들고 가서 냈다고 그러면 그 직원이 설마 나보고 ‘목사님, 담배 피다 걸리셨어요?’ 그런 직원이 없었지만, 그 직원이 약간 개념이 없어서 교인들 중에 이사람 저사람 붙들고 목사님이 담배 피다 걸렸대 그랬어 봐요. 그게 얼마나 그렇겠어요. 끝나고 나서 창가에 펼쳐 놓고 들여다보면서 정신없이 주님 섬긴다고 살아왔던 나의 삶에 대해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건 아니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 원칙을 세웠어요. ‘할 수 있으면 법을 지킨다’. 그러나 법을 지키지 않아서 교통경찰에게 적발되었을 때에는 법대로 처벌을 받는다.
그 후에 한번 사실은 나는 그걸 위반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했는데 교통경찰은 그걸 위반이라고 우기더라구요. 그래서 딱지를 떼야 된대. 그리고 또 똑같이 그러는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싼 걸로 끊어 드릴게요. 이리 와요. ‘안 된다. 너는 거기서 잘못한 것을 지적해 낼 수 있는 권한만 있는 거지. 봐 주는 거는 니 권한이 아니다’. 그랬더니 교통경찰이 뿔이 팍 났어요. 그러더니 ‘알았습니다. 떼 주면 될 거 아닙니다.’ 벌금 60,000원 벌점 15점. 쫙 찢어줬어요. 그래서 내가 ‘앞으로 항상 그렇게 하거라.’ 그랬어요.
뭐 교회를 건축하고 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없어져 버렸지만 언젠가 그냥 계속 셋방살이를 하다가 집을 한 채 사게 됐어요. 빌라였는데, 근데 그것도 사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세 들어 살고 있는데 그 앞집에 있는 사람이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에게 ‘사모님 제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이 목사님 집에다가 우리 집을 팔라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목사인 나한테 직접 말씀하시지 왜 그 사람한테 얘기 하셨을까’ 그러고 어쨌든 그렇게 돼서 집을 사고팔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쪼그만 집이었는데 세금이 그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그랬더니 주위에서 얘기하는데 뭐냐 하면 그것 다 낼 필요가 없고 가짜 계약서를 써가지고 제출을 하면 그러면 세금이 절반정도로 줄어든대요. 그러면서 우리 집사람이 와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물어봤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집을 파는 사람은 집사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성도의 교제를 할 일이 있냐, 로마서 13장에 보면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했는데 내야 된다.’ 그래 진짜 우리 아들 저금통까지 털어서 돈을 마련해서 갖다가 냈어요. 그때에 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볼 때에 그런 우리의 행동을 보면서 ‘아 정말 신실하시네요. 우리가 세금 덜 내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 부끄럽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러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거의 그렇게 하는데, ‘아이고 병신, 그 돈 있으면 나나 주지’ 그렇게 생각을 했겠죠. 그래도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었죠.
꼭 10년 전에 방배동 예배당에 있을 때에 교인들이 와서 꽉 찼어요. 그땐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고 의자라도 놓으면 더 수용은 할 수 있는데 더 큰 문제는 애들을 교육시킬 장소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차장이 없어서 예배만 드리고 나면 차가 10대씩 끌려가는데 어쩜 교통경찰이 꼭 새 신자 차만 끌어가는지 그래가지고 전도한 사람들이 잠실까지 가서 그 차를 범칙금을 내고 찾아주고 용서를 빌었는데 도저히 어떻게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제 교회 제직들을 통해서 기도하면서 우리 이사 갈 곳을 찾아보자. 그리고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정말 갈 데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찾은 데가 여기였어요. 이 땅도 사실은 팔겠다는 땅이 아니라 안 팔겠다는 땅인데 주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서 그 주인에게 간곡히 땅을 좀 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안 판다는데 왜 와서 자꾸 그러냐. 우리가 하도 집요하게 땅을 팔라고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집 주인이, 이 땅 주인이 할아버지였는데 물어보셨어요. ‘내가 땅을 주면 당신은 거기다가 뭘 하려고 그러우?’ 교회를 지려고 한다고 그러니까 ‘교회를 진다고?’ ‘일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딱 갔더니 ‘내 땅을 가져가시오’ 그래요. 그 분이 장로님이었습니다. 여기가 그 분이 30년, 40년 전에부터 가발공장을 하고 그랬는데 그때에 이 직원들이 여기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때에 와서 성경공부를 가르쳐 주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한 경직 목사님이셨어요. 한 경직 목사님이 여기서 1년 6개월 동안 그 직원들 성경공부를 시켜주신 장소입니다. 여기가.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얼마나 믿음이 좋으셨는지 한 경직 목사님에게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셨는데 26살에 장로가 되셨어요. 여러분은 ‘장가도 안 갔는데’ 그러죠.
근데 그땐 이미 팔순이 넘으셔서 현직에서 은퇴하시려고 할 때였어요. 이 땅을 자기가 놓고 생각하면서 ‘내가 정리한 후에는 여기에 교회가 섰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었죠. 그래서 밤새도록 해도 다 못할 그런 에피소드들이 무지하게 많아요.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이. 근데 그 분이 절대 나쁜 분이 아니라고 내가 얘길 하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이걸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그랬더니 ‘36억에 가지고 가라.’ 근데 사실은 가만히 안 팔고 놔두면 땅이 계속 올라가는 땅입니다. 보면 알잖아요. 이게 처음 살 때보다 3배 올랐거든요. 한 9년 동안에. 그 할아버지도 아는 거야. 그런데 교회가 들어온다고 하니까 ‘가지고 가라’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을 하려고 가보니까 이 할아버지가 그러시더래요. ‘36억에 팔지만 계약서에는 30억이라고 써라. 그리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다오.’ 우린 뜻밖이었죠. 그래서 ‘왜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 대냐?’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의 의견도 또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을 담보로 대출을 많이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땅이 팔리면 다 갚아야 하잖아요. 근데 다 갚고 36억에 팔아서 갚고, 세금을 내고 청산을 다하면 2억이 모자란대요. 그러면서 이 할아버지 하는 말이 ‘내가 내버려두면 오를 땅을 당신들 주는 거는 교회를 세운다고 해서 주는데 내가 그냥 줄 수는 있지만, 내 돈을 2억을 보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제 아까 얘기한데로 이중계약서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이런 부동산을 모르니까 교회의 재직들을 모아 놓고 건축 위원들을 모아놓고 물어보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이 95%는 다 그렇게 한다는 거야.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한 이틀 동안 고민을 하다가 그리고 이제 몇몇 금융계통에 있는, 세무 계통에 있는 사람들하고 자문을 좀 받았습니다. 그리고 딱 결심을 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우리 믿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재직들을 모아 놓고 ‘가서 할아버지께 전해라.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거래한 대로 계약서를 써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할아버지한테 물어봤어요. ‘세금이 얼마나 됩니까?’ ‘3억 이래요’ 그래서 사람을 보냈어요. ‘그러면 그 3억 세금을 우리가 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이 팔 사람은 36억만 달라고 그런 땅인데 살 사람은 우리가 39억을 주고 산거예요, 자진해서. 지금 3억은 그리 큰돈이 아닌 거 같지만 10년 전의 3억은 상상 할 수 없는 돈이었고, 이 36억 짜리 사려고 할 때 교회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다 해 왔는지 아직도 실감이 안나요. 어쩌면 그 3억을 아직 못 갚았는지도 몰라. 아직도 남아있으니까 그랬어요. 그때에 나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이제 우리가 예배당 속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배우는 의로운 생활과 실제 이 교회당 바깥을 나가서 불의한 사람들이 규칙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성공을 하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한 번 올바르게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어마어마한 피 흘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현실을 아주 똑바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중의 어떤 분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들도 그렇게 한다는 거야. 아주 양심적인 정도 경영을 하는 몇몇 그룹을 제외하고는 다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당이 꼭 필요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해서 교회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당을 질뻔하다가 짓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후손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럽겠냐, 항상 후손들 손을 잡고 이 마당을 지나면서 사실 여기가 옛날에 우리가 교회를 지으려던 땅인데 이중 계약서 쓰자고 그래서 우리가 못쓰겠다고 그랬더니 팔지 않는 땅이었단다. 보이는 성전은 못 지어졌어도 보이지 않는 교회당이 성도들의 마음에 지어지지 않겠느냐, 한 10분 동안 연설을 했는데 내가 성도들의 마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어요. 그래서 일치한 마음으로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실 거래라는 게 더 달라고 하는 것을 깎아서 사는 거지 덜 달라고 하는 거를 더 주고 사는 거래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거래를 했습니다.
이런 거는 아주 사소한 예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가 개인적인 삶의 지평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적인 지평에서, 국가적인 지평에서 옳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소주병에다가 휘발유를 채워서 불을 붙여서 들고 나가서 던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옳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불의한 것은 불의하다고 말하고 그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불의하다고 욕하고 그리고 뒤에서는 거래를 하고 타협을 하면 그럼 그 지적이 위선이죠. 그렇죠? 그래서 그런 모든 삶이 힘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사는 두 개를 양손에 함께 얻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경건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의 지조를 굽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외곡하고 타협할 때마다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언제 현실이 우리 예수 잘 믿도록 도와준 적이 있어요? 만약에 그렇게 현실이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현실이라면 예수님이 못 박히실 수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 주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언자로서 불러 주셨어요. 그래서 이 세상이 잘못될 때에 그 이 세상의 권위보다는 우리를 이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의지해서 그것이 잘못 됐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항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이제까지 쌓아올린 모든 평판을 한꺼번에 상실할 위험도 있습니다. 그 삶이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 때는 순교자들의 기록들을 탐독한 적이 있거든요. 거기에 보면 아주 공통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순교할 때가 되면 하나님이 죽을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이 막 행복하고 기분 좋아지면 뭐가 많이 나온다고 그러죠? 엔돌핀이 나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인체가 자기 몸에 남아있는 엔돌핀을 다 쏟아버리는 분출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게 죽음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타락하고 죄 때문에 죽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이 배려가 놀라우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의 순간에 고통이 아니라 놀라운 희열을 경험하게 하셔요.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면 그러면 할 수 있는 많은 일인데 자기도 살고자 하면 그 일이 거의 불가능해 질 정도로 어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99% 헌신된 1만 명의 사람의 힘 보다는 100%헌신하는 사람의 힘이 더 큰 것입니다. 그런 원리로 의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진리의 빛,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은혜의 힘을 주셔서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주 어마어마한 힘으로 우리를 협박하고 위협하면서 이 세상의 가치를 강요하며 우리를 억압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에 항거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허무한 일처럼 보이고 밀려들어오는 어마어마한 해일 앞에서 바가지를 들고 물을 퍼내는 것처럼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항상 에스더의 고백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리다 외치며 사나니
담대하게 외치며. 한 때 미국이 멕시코를 침공하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은 침략 전쟁을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그때 복음성가처럼 불렀던 노래가 이 찬송이었습니다. 결국은 좌절 시켰어요.
그래서 공정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보면 정말 소생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자기의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 세상을 지내는 순례자요 나그네요 라고 자처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더 나은 하늘 본향집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영적으로 다시 살려주신 충만한 사랑으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이나 괴로움, 시련이나 그리고 외로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부터 받는 따돌림이나 그런 고난을 당할 때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고난 속에서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남이 모르는 하나님의 진리를 내게 주셨고, 남에게 알지 않게 하신 은혜의 세계를 나에게 보여주셨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래서 그 진리와 그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그리고 무지 속에 살면서 더러운 인생을 이어가던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려주셨고, 그 놀라운 은혜로 나를 건져주셨기 때문에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 모든 것을 다 버려서라도 당신의 뜻을 따르라고 하실 때 나는 그럴 수 있습니다 라고 준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신 이유에요. 그래서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침체된 영혼으로 핍절한 상태에 있는 모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리의 빛을 주시고,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무지한 영혼의 빛을 비추어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주심으로써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이 모두 그 은혜를 간직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리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강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길처럼 그 은혜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까 말까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의무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회복된 영혼이 아니고는 누구도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와 진리를 연료 삼아서 확 타오르게 하시려고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이 남산을 조선시대 때에는 목멱산이라고 불렀어요. 이 목멱산은 우리로 말하자면 레이더 본부였어요. 그래서 저 변방에서 저 북방의 오랑캐, 남쪽에 왜구들이 있잖아요. 일단 침범을 하려는 조짐이 보이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 하나로 알렸어요. 그러면 그것은 경계경보입니다. 그러다가 적이 침입을 하면 세 개씩 올라가면서 계속 불길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봉우리에서 불꽃을 보고 이 봉우리에서 다시 봉화를 올리고, 저 봉우리에서 이 봉우리를 보면서 봉화를 올려서 순식간에 남산까지 전파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산에 불꽃이 크게 올라가기 시작하면 이거는 변방에서 오랑캐가 혹은 남쪽 해안에서 왜구가 말하자면 침략하기 시작했다는 사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전 군이 비상상태로 들어가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캄캄한 어두움이 한반도에 가득 내렸지만 그 불꽃 몇 개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땅 전부에게 위험을 경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이 보편적인 시대는 없었습니다. 마지막 그리스도 왕국이 임할 때까지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불의한 사람이 다수였고, 어두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진리의 빛과 은혜의 불을 주어서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심으로 당신의 임박한 심판과 때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일깨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많은 인격적인 은혜들은 바로 여러분이 어두운 이 세상에서 횃불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두움에 또 하나의 어두움을 더하는 사람들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취직 될 때에 돈 벌러 간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의의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사회 속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좋은 신랑을 만나서 시집간다고 말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의의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복된 영혼으로 이렇게 꼭 필요한 불꽃같은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0. 06. 27 주일오전 예배
5.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3).
하나님이 혹은 죄 때문에, 혹은 무지 때문에, 혹은 고통 때문에 죽은 자와 같았던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로 하여금 불의한 이 세상에서 의의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세상에서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혹은 박해를 당하면서까지 의로운 길을 걷게 하신 것일까요? 그 정답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리는 구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름 신앙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만물들에게 섞이시는 분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 만물들을 초월해 계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상기시킬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하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그러나 이 모든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이 모든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셔도 자기의 이름을 이 피조세계 속에 특별히 인간들 속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을 하고 그러는데 구약 같으면 전부다 다 돌에 맞아서 사형 당합니다. 신앙의 가장 첫 출발은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 앞에서 자신은 티끌과 같은 존재이고 그 분 앞에서 자신은 아주 가치가 없는 더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써 신앙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날 교회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시작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게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이 교회에 많이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하고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그래서 신앙의 기본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의 처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가치 없고 무능하고 아무 소용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그 마음속에 있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하나님이시지만 이름은 이 세상에 두셨어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은 똑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태도는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주 쉬운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여러분이 이제 이렇게 열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고 칩시다. 부산으로 갔는데 어느 교회에 등록을 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당신은 어디서 이사왔냐?” “나는 시골에서 이사 왔는데 평촌이라는데 아냐?” “그러냐? 어디서 신앙생활 했냐?”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다” “아 그래? 당신은 참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부산 우리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는 것 보니까 그 교회는 참 좋은 교회구나!” 그래서 열린교회는 여기에 있는데 열린교회 이름은 부산에도 있습니다. 열린교회는 높아질 수 없지만 열린 교회 이름이 부산에서 높아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또 어떤 사람이 왔는데 열린교회에서 왔다 그러더라 이거야. 그러면 사람들 마음속에는 “야 저 사람은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거야. 일꾼이 왔구나, 정말 올바른 교리를 잘 배운 아름다운 지체가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반대는? 기분 나쁘니까 말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름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고 구원 얻게 하신 이유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계속 태어났겠죠? 그리고 함께 살아가겠죠? 거기도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더 아름다운 사랑의 삶을 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노동으로, 섬김으로, 각각 다 봉사해서 더 아름답게 문화를 건설하고 문명을 건설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그 세계가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실 거 아니에요?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서로서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보람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예 몰라, 혹은 알아도 그 하나님의 뜻대로 그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이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인 줄을 몰라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사는 거야. 이것이 슬픈 현실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더 놀랍게 나타내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면 부산에 여러분이 갔는데 아까 그 얘기에요. 근데 신앙생활을 아주 잘해. 그런데 거기 원래 있는 교인은 두 배쯤 더 신앙생활을 잘해. 그러면 여러분은 빛나지 않는 거야. 왜요? 거기 있는 사람이 워낙 더 잘사니까. 근데 교회가 좀 문제가 있어가지고 교인들이 개념이 없어 그래가지고 올바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런데 여러분이 가서 좋은 신앙생활을 보여주면 그 교회에서는 열린 교회의 이름이 아주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워낙 여러분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가득 차 있으면 열린 교회의 이름이 높아질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요?
그래서 이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아주 흡족한 기회로 하나님이 삼으시도록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그 타락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광을 돌린다 그러잖아요? 뭘 돌려요? 영광을 이렇게 돌려요? 그렇게 돌리는 게 아니라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아니었으면 그랬을 리가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며 무릎을 꿇게 되는 것. 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찬양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으실 때 참된 인간의 행복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티끌 같고 불과 80년만 살면 흙으로 변할 이 미력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자기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목적대로 살아가는 거기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가든지 그 인간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복음을 전하던지 사업을 하던지 신실한 언어생활을 하던지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베풀던지 무엇을 하든지간에 하나님은 안보이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와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일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고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불행이 어디에서 생겨났냐 하면 그런 것을 통해서는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행복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나 누리도록 되어있는 인간의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찾아보려고 하는 거기에서 인생의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찾아요? 영적으로 이렇게 소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찾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있을 때에는 그런 걸 몰라요.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생명이 부어져 죽은 영혼이 살아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광은 헛된 것이고 금방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가장 커다란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이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시인도 한때는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의 분부를 받아서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다윗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형들이 전쟁 중에 무사한지 살펴보기 위해서 전쟁터로 달려왔어요. 블레셋이라는 나라의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칼과 칼이 맞부딪히고 전쟁의 고함소리가 전투를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갔더니 의외로 전쟁터는 고요했습니다. 양쪽에 군대들이 서로 대치해있고, 왠 꺽다리같은 거인 하나가 나와서 뭐라고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택된 이스라엘과 그 군대들을 모욕하는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설이었습니다. 근데 아무도 그 인간과 겨루려고 하는 군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에게 “내가 가서 저놈을 처단하겠습니다.” 보니까 얼굴이 발그레한 청년입니다. 소년입니다. 장수들이 입는 놋투구와 갑옷을 입혀주었더니 이게 무거워가지고 커서 헐렁헐렁한 것입니다. 다 집어 던져버리고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그리고 물매를 돌리며 그에게로 나아갔어요. 그러면 왜 그 꺽다리같은 거인 골리앗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데 다윗 한사람만 목숨을 걸고 나갈 수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면 다윗 한사람만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갈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남을 위해서 혹은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어쨌든 자기가 아닌 다른 대상을 위해서 가슴 아프도록 기도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죠? 그것은 결국은 그들 속에서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갈망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모함의 크기가 컸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여러분 마음 속에 많았을 때이고 그런 갈망이 없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 때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시인도 그렇게 전쟁터에 나가서 물맷돌을 던지며 골리앗에게로 다가갔어요. 나는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사진에서만 봤는데 기다란 줄이 되어있고 거기 가죽이 달려 있어요, 거기다 돌멩이를 얹어서 돌리는 것입니다. 끈을 딱 풀면 그 돌멩이가 새총처럼, 새총하고는 좀 틀리지만 튕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내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중동지방에서 일하다 온 사람이 있어서 얘기하는데, 지금도 물매를 던지는 습관이 중동에 있답니다. 그런데 여섯 살 일곱 살 된 애들이 50미터 바깥에다가 담배를 세워놓고 맞춘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그러한 물매 던지는 기술로 양을 지켰던 사람이죠. 그러니까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던진 것입니다. 그래서 팍 던지니까 그 돌멩이가 성경에 상세하게는 안 나오지만 하여튼 쏜살같이 날아가요. 투구를 아마 이렇게 모양을 내느라고 디자인을 이렇게 팠던 모양입니다. 딱 깨고 두개골을 깨고 순두부 속으로 쑥 들어간 것입니다. 절명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달려가서 칼을 빼서 골리앗의 목을 따서 높이 쳐들었습니다. 그건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을 처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탁월한 열심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조차도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음의 상태로 들어갔을 때에는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그런 죄악의 어두움 속에서 예전에 가슴 깊이 치밀어 오르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 사라진 침체의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확 영혼을 사랑하게 하시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시니까 다시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이 끔찍한 죄악 속에서 건져 내어 용서해 주신 하나님, 나를 이렇게 구원하셔서 주님의 자녀 삼으셨는데 이제는 내가 이 세상에 짓밟히고 있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확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겠노라 다짐하는 그러한 놀라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소생한 영혼이어야지만 그 일이 가능해져요. 만약에 오늘이라도 우리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회복이 되어서 교회가 이 세상에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 때문에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아파하면서 그렇게 갈망한다면 아마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것을 지금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셔서 당신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신 다음에는 이 어두운 세상에 파송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주님이 깊은 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은 당신의 영달과 행복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기도하신 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인데도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꿈꾸는 참된 행복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임을 믿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짖밟히는 세상을 위해서 그분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그 삶의 두 가지 핵심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에게 죄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의도적으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일은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죄가 가득하고 악이 창궐한 세상입니다. 안 그런 때가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던지 그 때가 구약 때이던지 신약 때이던지 사도들의 시대이든지 언제든지 참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은 항상 힘든 일이었습니다. 좋은 신앙,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대중적인 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어두운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빛으로 살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별은 언제나 있지만 캄캄한 밤하늘이 되니까 별이 더욱 또렷이 나타나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이 세상이 어둡고 캄캄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 한사람을 불러서 침체가운데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복음의 빛으로 돌아오고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사랑해 주시고 당신의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셔요. 무지하다면 하나님이 빛을 비쳐주셔서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실 것이니 진리의 빛을 간절히 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시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횃불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010. 07. 04 주일오전 예배
6.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하나님께서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자기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시인을 의의 길로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시인은 주님을 목자로 모시며 산 가운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었던 경험을 4절에서 특이한 방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푸른 풀밭, 잔잔한 물 가장자리에서만 하나님이 자신의 주님인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라고 번역된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재앙을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새로운 형태의 번영 신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60년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번영신앙이 먹고 살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전 도상에서의 번영 신학이었다면 오늘 날에 재현되는 이 번영신앙은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그러한 번영신학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건강과 재물과 명예와 성공이 보장된다고 하는 이런 방식의 사탕발림 같은 교훈들이 복음의 탈을 쓰고 교회 안에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보다는 하나님이 정신 차리고 회심하여야 할 존재로 보는 이러한 번영 신앙은 복음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쓰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점에서 이 번영 신앙을 혐오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분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된 신앙을 그렇게 가르쳐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격적인 승복을 지나서 관계를 체험하고 영혼의 소생까지 경험한 사람이 무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재앙을 만나지 않을 것을 재앙을 만날 까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라는 이 고백은 너무 유치한 고백이 아닐까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승복한 시인을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 보내지 않는 일은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입니까? 겨우 거기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라는 정도로 밖에 시인을 보호하실 능력이 하나님에게는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그런 식으로 번영 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해 버리고 난다면 이후에 생겨날 많은 문제들은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며 죽어간 그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한 성도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땅 끝까지 전파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이러한 신앙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게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는 이 신앙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새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이 시인이 때로는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으며 영혼의 어두운 골짜기 속에 들어왔습니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커다란 시련과 어두움의 계곡 속에서 도처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자신의 영혼도 죽는 것 같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항상 들어섰던 것은 아닙니다. 왕이 되기 이전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김이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단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집요하게 미워하며 자객을 풀어 놓은 사울로 인해서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지나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만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목숨을 걸고 함께 나라를 세운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었을 때에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마저 그를 버렸고 자신이 존경하고 공경하려고 했던 임금마저도 그를 죽이고자 자객을 풀었습니다. 더욱이 함께 피를 나눈 형제처럼 나라를 세웠던 수많은 장군들이 등을 돌리고 자기를 존경했던 백성들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정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아무 친구도 없이 광야와 같은 어두운 계곡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캄캄한 죽음의 계곡에서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하나님께 자신을 구해달라고 탄원하기도 하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주님 앞에 울부짖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생의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한 가지 중요한 복음적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백성들과 아내, 그리고 심지어 자신과 피를 함께 나눈 것처럼 나라를 함께 세웠던 장군들도 자신을 버렸지만 그래서 자신이 홀로 버려진 자처럼 이 어두운 계곡에 내동댕이쳐졌지만 하나님이 거기서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죄 때문이든지 혹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스런 섭리 속에서 이런 음침한 골짜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마저 모두 떠나고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러한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 줄 깨닫게 되지만, 그것은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비참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비참한 존재인데, 평소에는 교만과 이기심으로 그것을 보지 못하다가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그를 던져 그의 육신을 때리시고 나니까 그의 마음도 함께 때림을 당하여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라고 했죠? 씩씩하게 사는 것,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잘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양을 창조하실 때 강력한 이빨, 날카로운 발톱, 뾰족한 뿔 그리고 어둠속에서 볼 수 있는 표범이나 고양이 같은 눈을 주지 않으신 것은 결국 자신을 인간들 가까이에 살면서 자신을 의탁하도록, 인간에 의해 돌봄을 받으며 살아야 할 의존적인 짐승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연약한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올바로 말하자면 주님께로부터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능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시인은 바로 이 인생의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에서 이러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우리에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동행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고마움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당신의 도움을 거두실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홀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중에는 아마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절망 속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어떻게 하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에 던져졌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이고 나오는 길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기로부터 나오는 그 유일한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버린 존재이기 때문에 이 속에 옳지 않는 독립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 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접어들었을 때에 즉시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상당 기간 혼자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공을 휘젓는 것과 같고 자신의 힘을 어떻게 올바로 사용해야 할 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신의 힘으로 몸부림을 치는 동안은 알지 못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 때면 항상 시골집에 내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커다란 강이 있어서 강보다는 좀 작고 개울보다는 훨씬 큰 하천입니다. 맑은 물이 많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미역을 감으러 거기에 이제 갑니다. 그 여름에도 아이들이 많이 거기에서 헤엄을 치며 놀고 있었는데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한 지점이 있습니다. 거기는 얼마나 깊은지 물이 시퍼래요. 그리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거기 들어가면 소용돌이가 쳐서 밑에서 잡아 댕긴다고 귀신이 있다고 아이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영도 못 치는 아이가 그 옆에서 놀다가 쭉 미끄러지면서 깊은 데로 쑥 들어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얘는 헤엄도 못 치는데 시퍼런 물속으로 들어가니까 막 살려달라고 막 헤엄을 치면서 물장구를 치면서 살려달라고 막 소리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근데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보니까 저걸 어떻게 살려야 되는데 뭐 우리도 헤엄을 못 치니까 어른이 와서 결국은 구해 줬는데 살려 달라고 막 헤엄을 치는데 내가 이렇게 보니까 배꼽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 위로 올라와서 헤엄도 못 치는데 온 힘을 다해서 살려달라고 하니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살려달라는 기운으로 팔로 헤엄치면 나올 텐데, 왜 그럴까?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혼의 어둠 속에 있게 되면 그러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되면 살기위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어떻게 거기로부터 벗어나서 옳은 길로 돌아와야 할지는 몰라요. 그래서 너무나 많은 힘들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을 명심하면 그러면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다 라는 확신을 갖는 것, 그걸 굳게 믿어야 합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찌라
그래서 고난을 당하든지 혹은 영혼의 어두움이 들어오든지 간에 절대로 하나님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다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떤 실수나 잘못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은 모두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고, 나쁜 것은 그 분께로 온 것이 없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다,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다 그 사실을 마음속으로 굳게 믿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걸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좋게 생각되지 않을 적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지요.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여러분이 특히 1~2학년 그때쯤에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가 가난했습니다. 여러분은 본 적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소말리아보다 더 가난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길거리에 거지가 즐비했습니다. 그러던 시절에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에는 너무 많이 먹어가지고 배가 나오고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도 안수 집사처럼 배가 나와 가지고 말이지, 자매들도 너무 많이 먹어서 권사님처럼 배가 나오고, 어디 배뿐이야? 목이 없어져 버리기도 하고,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러니까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요. 절제를 해야 됩니다. 근데 전 참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참 좋아했어요, 고기를. 한 두 세 점 먹으면 못 먹었는데 근데 집이 가난하니 그걸 사줄 때가 있나? 마트 같은 것도 없고, 냉장고도 없으니까 아침에 고기 파는 아줌마가 이만한 다라니에 고기를 이고 얼음 덩어리 몇 개 이렇게 비닐봉지에 넣어 가지고 재어 가지고 고기 사려~ 고기 사려~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그 아줌마를 불러서 그렇게 가난한데 어디서 돈이 있는지 하여튼 한 근을 사요. 사서 그래서 그것을 볶아주고 그럴 수 없으니까 얇게 채를 썰어서 고기보다 한 서 너배 무를 많이 집어넣고 볶아요. 그래서 줘요. 굉장히 맛있는 고기인데 그걸 꼭 사줄 때는 언제냐 하면 지독한 독감에 걸렸을 때만 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살이 나고 감기에 걸리면 입맛이 싹 가잖아요. 그렇게 맛있던 고기가 씹으니까 나무토막 씹는 거 같아요. 맛이 없어요. 건강할 때는 절대 안 사주시고 입맛이 완전히 갔을 때만 사줘요.
여러분 밝은 햇빛이 우리의 몸에 얼마나 좋아요. 근데 안질에 걸린 사람이었다고 쳐봐요. 그러면 밝은 빛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빛이 들어와서 그래서 안대를 하고 다니잖아요.
그러니까 선하신 하나님이신데 여러분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는 것같이 느껴질 때에는 내 영혼과 인생이 안질에 걸린 것처럼 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미각이 독감 걸린 어린 아이처럼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안 느껴지는 것이구나! 그렇게 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지 반대로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1, 2, 3부에서만 안한 얘기인데 여기서만 해 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들의 의문이 풀리는 거야. 아, 그렇게 절대로 선하신 하나님이 절대로 선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가? 우리의 영혼의 미각이 많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해야지 자신의 망가진 미각을 신뢰하면 안 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라.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지실 때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건져내신다. 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창에 빠진 것처럼 그런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삶의 기반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에 이끌려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그렇게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암벽이나 빙벽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잘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자면 K2봉을 오른다든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다고 하면 그러면 올라가는 그 무슨 사다리를 누가 쳐 놓은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올라갈 때 그냥 빙벽을 집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줄을 잡고 올라가잖아요. 그러면 줄을 헬기가 올라가서 줄을 거기다 걸어놨다면 그건 사기지 등반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누구냐 하면 누군가 맨 앞에 간 사람은 아무 도움도 없이 그 픽 하나에 의존해 가지고 올라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발서는 사람이 최고로 능숙한 사람이 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거 하나하나 박으면서 그거를 붙들고 빙벽을 오르거나 암벽을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 등반가는 그거를 박는 총을 가지고 등반을 하잖아요. 그렇게 해 가지고 하나하나 올라가고 그 밧줄을 거기에 묶으면 밑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적은 노력으로 암벽이나 빙벽을 오르면서 그 등반에 성공을 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은 대신 걸어가 주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 스스로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 아버지가 살았던 인생을 내가 보면서 교훈은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올랐던 빙벽이고 내 인생의 빙벽은 내가 오르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올라가서 줄을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올라갈 때 그 사람 발끝에 달린 이 미끄러지지 않는 아이젠과 벽을 치는 이 도구, 그리고 망치로 박고 하나하나 집고 올라가는 이 네 개의 붙잡는 이 지점은 그의 목숨이 달린 것입니다. 그거 하나하나를 의지해서 올라가는 것처럼 신자의 삶은 삶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를 붙들고 깨닫고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내가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내 뜻을 포기하고 하면서 하나하나 붙들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가지 않고 멈추고 서 있으면 항상 거기에 멈추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렇게 붙들고 올라갔던 것들을 교만한 마음으로 던져 버릴 때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과 등반과 같은 이유 중의 하나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 말씀도 없고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그렇게 자기의 마음대로 살고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가면 들어갔나 보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의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끊임없이 방황하고 원망하고 몸부림치며 짐승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죽지 않겠어요? 우리는 종종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징계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아니죠. 그 징계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치료하고 건져주신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신앙생활은 말로하면 듣는 신앙생활입니다. 그게 바로 인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시련을 만난 것은 그 자체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 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이 주어져도 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이고, 돌짝과 같은 마음의 밭이기 때문에 결코 결실할 수 없기에 주님이 그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데, 마음을 굳게 먹고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환경을 때려 주셔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도록 하나님이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하나님이 때려 마음을 부드럽게 한 후에 말씀이 떨어질 때에 그 말씀은 그 마음을 옥토가 씨앗을 붙들듯이 굳게 붙들고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종종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신앙의 인물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그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올바릅니까? 우리가 항상 똑바릅니까? 우리가 항상 모든 것을 잘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조정이 필요해, 고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길을 질주할 때에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잘 영향을 받고 날마다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 앞에 바른 길로 돌아서는 사람은 조양 장치가 잘 갖추어진 차량과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 운전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운전 할 때 차를 관리를 안 하면 차가 핸들이 한쪽으로 막 쏠려요. 얼라인먼트가 안 맞거나 바퀴가 균형을 잃게 마모가 되면 한쪽으로 막 이렇게 쏠리는 것입니다. 평소에 갈 때에는 모르는데 사고가 나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바퀴가 잘 정렬이 되어 있고, 조양 장치가 언제든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정비를 하고 자동차를 운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수시로 방향을 바꾸어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방향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재앙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시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의 한 지팡이와 한 막대기가 나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런 뜻입니다. 위로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당시에 이스라엘 목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 도구가 양들을 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어요. 그래서 이 지팡이는 똑바로 된 나무가 끝이 이렇게 둥그렇게 휜 지팡입니다. 꽤 긴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성화에 보면 이 지팡이의 키가 목자의 키 정도로 될 정도로 굉장히 커다란 지팡이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목자들이 자기가 길을 걸으면서 자신을 보호하는데도 사용했지만, 양이 눈이 나쁘고 어리석어서 대열을 이탈하려고 할 때에 이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쭉 뻗으면 이 둥그런 부분이 양의 목에 딱 걸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걸 이렇게 잡아끄는 것입니다. 그런 용도로 이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이 시인이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항상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이 시인의 목을 걸어 당신 가까이에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를 인격적으로 설복시키셨고 그래도 듣지 않을 때는 때리셔서라도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이 시인은 미끄러졌으나 영혼이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 안개 속을 지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5m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고속도로를 100km로 질주하는 무지막지한 운전수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속도를 낮추고 비상등을 켜고 심하면 계속 클락션을 울리면서 서서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운전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셔서 아직 삶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을 그 말씀의 빛으로 밝혀 우리 속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위험한 것을 깨닫고, 우리 속에 올바로 심겨진 것들을 북돋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 비출 때 우리는 맑은 날에 운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안심하고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여 가던 길을 바꾸게 만들고 여러분의 삶의 태도를 고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이 언제 여러분 속에 있었습니까? 잘못 가던 길을 참회하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능력이 여러분에게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는 삶, 그것이 바로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 하나의 도구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막대기입니다. 이 막대기는 지팡이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다란 그야말로 막대기이고 잘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나무들을 골라서 이 막대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끝은 매우 뾰족하게 되어 있어서 양떼를 습격하는 맹수들로 더불어 이 목동들이 싸울 때 그들을 내쫓을 때 사용하는 무기였습니다. 지팡이가 양떼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도구였다면, 막대기는 이 맹수들을 처치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용감한 군사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우고 우리의 대적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영혼을 돌볼 때에도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자비와 용기 말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려고 하는 자들을 결국은 사랑으로 붙들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승복시키는 말씀의 사역이 필요하고, 그들을 해치기 위해서 다가오는 영적인 세력들을 처단할 수 있는 그런 영적인 파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고,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을 때에는 친구도 많았고 충성스런 부하들도 헤아릴 수 없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혼이 어둠속에 들어가게 되고 삶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던져졌을 때 사랑하는 아내도 떠나고, 목숨을 함께 나눈 것처럼 나라를 세웠던 장수들도 자기를 배신했습니다. 자기를 존경하고 흠모하던 백성들은 자신에게 비난의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시인은 복수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자신의 인생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고, 그리고 믿음을 점검했습니다. 그랬더니 시인은 보복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친히 다윗의 원수들을 처단해 주셨습니다. 그가 잘못해서 당신은 다윗을 때릴 지라도 대적들이 다윗을 함부로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구도 죄 없다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징벌하셨던 것입니다.
미아리에 가면 점집이 많아요. 내가 그 동네에 살아봐서 아는데, 어마어마합니다. 근데 나는 사실 그 집에 들어간 본적은 없지만, 앞을 수없이 많이 지나다녔는데 근데 내가 아는 어느 자매가 친구들 따라 점집에 갔대요. 그랬더니 통에다가 뭘 넣고 흔들면서 점을 치더래요. 쌀알 같은 거 넣고 흔들기도 하고 이쑤시개 넣고 흔들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막 흔들더니 그러더니 짜증을 팍 내면서 ‘너희들 중에 예수 믿는 년이 있지?’ 그러더래요. 반말로 해서 기세를 확 꺾어버리려고. 그때 좀 대센 사람이 가서 ‘있다 이년아’ 이래야 되는데. 대부분 그런 담력을 가진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질 않지. 갈 때는 병원에 가는 환자의 태도로 그러고 가는 거야. 친구들이 일제히 다 자기를 쳐다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점쟁이가 얘기하는데 ‘야 이년아, 네가 여기에 왜 오냐? 가서 예수나 잘 믿지. 이런 데는 왜 오냐? 예수 믿는 년들은 팔자대로 살지 않으니까 이런데 오지 말고 가서 예수나 잘 믿어라 이년아’. 이 사람이 막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할 때에는 전혀 은혜가 안 되고 졸았었는데 점쟁이가 말이지 예수 잘 믿으라고 하니까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 후로 변화됐는지 안됐는지는 모르지만 필요 없어요. 제가 회심하기 전에 손금을 꽤 잘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아예 책을 사 놓고 연구를 해서 공부를 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사람들 많이 봐 줬죠. 복채도 좀 받은 거 같아요.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선하신 분이고, 언제나 선하신 분이고, 그리고 추호도 악하실 수 없는 분이시고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래서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의 길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내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주님의 손을 붙들고 그분께 이끌려 살면 내 인생의 실수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어떤 성도는 외쳤어요. 주님이 없이 천국의 황금 길을 걷기보다는 우리 주님과 함께 지옥의 불길을 한 가운데를 지나길 원하노라 하고 말이죠.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주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 주님이 나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 그분에게도 기쁨이 되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주님의 모든 자비한 사랑을 마음에 가득히 담아 그대들에게 권면을 하는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내일도 말고 오늘 당장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이것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실수도 없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내개 쓰게 느껴지는 것은 말씀이 쓰기 때문이 아니요. 내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고 선하신 주님이 내게 괴로움이 되는 것은 내 눈이 안질에 걸렸기 때문에 진리의 빛이 싫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옳고 저는 항상 틀렸습니다. 그렇게 마음 깊이 고백을 하고 나면 기도가 터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찬양) 내 안에 것들아 다 찬양하라
하나님 원망하지 말고 주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고 내가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도 세상의 친구들은 다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말씀의 지팡이로 어둠 속에서 헤어 나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0. 07. 18 주일오전 예배
7.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푸른 초장에서 먹이시고,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시고, 죽은 자와 방불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자기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목자 되신 사랑에 시인에 감격한 것도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절에서는 그보다 더 넘치는 은혜를 하나님 앞에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받은 더 넘치는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하게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신랑 신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그리고 잔과 잔이 부딪치며 질 좋은 포도주로 넘쳐나는 그 기쁨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 자신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그 잔이 하나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찰 때에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 수 있게끔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감각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고 그리고 쾌락을 찾고 명예를 갈구하지만 결코 그것들로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이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실제 있었던 일인데 수유리에서 병원을 하고 있는 어느 의사가 새벽에 환자를 받았습니다. 진료를 해 보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몇 시간 후에 이제 가족들이 달려와서 새벽에 울고불고 난리를 하는데, 의사가 20년 가까이 의사생활을 했는데 저렇게 기묘한 폼으로 죽은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대게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왼쪽 손을 꽉 쥐고 오른 손은 펴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의사가 ‘도대체 저 손엔 뭘 저렇게 쥐고 죽었을까’ 하고 손가락을 하나씩 펴봤더니 화투 두 장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삼팔 광땡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를 들어보니까 친구들하고 같이 장사 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쳤는데 돈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막판에 끗발이 붙었는데 돈이 잔뜩 쌓여있는데 삼팔광땡이 들어왔어요. 그걸 붙들고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쇼크사를 한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아무렇게나 태어나도 상관없는데 죽을 때에는 잘 죽어야 됩니다. 이 다음에 후손이 “엄마 아빠 어떻게 돌아가셨어?”. 뭐라고 답을 하겠어요? “너희 아빠는 삼팔 광땡을 잡고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었단다.
우리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었지만 작은 동양화 두 개 들고 가슴이 벅차서 쇼크로 죽은 것이나, 집문서 땅문서, 학위 그보다 좀 더 작은 통장 이런 것들을 들고 아등바등하다가 충격을 받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무슨 그렇게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 안에 주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 잔을 주셨어요. 그래서 인간이 이 잔이 가득차면 참 사람답게 살 수 있지만 이 잔이 비어버리면 인간은 짐승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러면 어떨 때 이런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기쁨을 경험했을까요? 환희, 기쁨, 희열, 이런 단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서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요?
오늘 성경은 이러한 벅찬 희열에 사무치는 이 시인의 경험을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기름으로 그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하였는데 그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이 상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 말로 ‘슐한’인데 히브리어에서 이 슐한이라는 단어로 상 중에서도 밥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들의 목전에서 시인에게 베풀어주신 밥상이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웠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인의 식사 관습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동양인에게 있어서의 식사는 가족 또는 형제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선교역사를 공부한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인데 중국 선교가 이루어지던 초창기에는 언어를 미리 배우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중국에 그 당시에 수많은 방언들이 있었는데 내륙지방에 들어가면 말이 통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인류학적으로 세 시간만 같은 장소에 있어서 바디 랭귀지를 하면 그러면 서로 의사가 소통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 선교사가 지도를 가지고 나는 이렇게, 이렇게 먼 나라에서 왔는데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의사가 피력되고 나니까 이제 마을에 지도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염이 긴 원로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그리고 촌장이 사회를 보고 장시간의 회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얼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 이 촌장이 활짝 웃는 얼굴로 이 선교사들을 향해서 팔을 벌리며 다가왔습니다. 그들을 자신의 동네에서 살도록 허락해 준 것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 사람들은 지금으로 치면 마을 회관으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이들을 환영하는 만찬이 이루어집니다.
알다시피 중국은 자신들의 말로 날아다니는 것들 중에서는 비행기를 빼놓고, 지상에 있는 다리 달린 것들 중에는 책상 빼고,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은 잠수함만 빼고 모두 먹는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식재료들로 만든 요리들이 등장을 하게 되죠. 요즘도 만주 쪽에서는 결혼식 때 꼭 등장하는 음식이 있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국수 같은 것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팔뚝만한 뱀들을 토막내서 끓인 뱀국이래요. 그래서 결혼식을 하고는 그 뱀국을 한 그릇씩 먹어야지만 진짜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든 형제자매를 보면 아직 국수 먹을 때가 됐는데 그러지만 거기서는 뱀국 먹일 때가 됐는데 그러죠.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은 솔직하죠.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이런 음식 안 먹습니다 하죠. 음식을 거절하자 갑자기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결국은 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자신들이 이 사람들에게 왜 갑자가 죽임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면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차이죠. 이런 의미죠. 같이 살겠다고 해서 같이 살도록 허락을 했고, 그래서 식탁을 제시한 것은 이제 너희는 우리와 한 가족이고 형제다 그런 뜻입니다. 그걸 거절한다고 하는 것은 같이 살고는 싶지만 너희들과 한 가족이 될 수 없다, 형제일 수 없다 라는 거부의 뜻입니다. 같이 있고는 싶지만 가족일 수 없고 형제일 수 없다면 그는 간첩이죠. 그렇지 않겠어요? 그걸 거절하죠.
이제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쭉 훑으면서 성경에서 나온 식사와 관련된 영적인 의미들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야곱은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유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었지만 시기하는 외삼촌의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고, 이제 이 외삼촌 라반은 자식들과 함께 말을 달려 야곱을 추격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날 밤 나타나셔서 라반에게 경고하지 않으셨다면 그 가족들을 몰살하고 재산을 빼앗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이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선악간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고 그래서 라반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모두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한 다음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증거의 돌무더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이 이 경계를 넘어서 야곱을 추격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함께 약속을 나눈 후에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낸 화목 제사는 그 제물을 모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들이 함께 나눔으로 그들이 한 밥상 공동체임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내리는 만나는 바로 수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풀어진 거대한 하나의 식탁이었습니다. 그 한 식탁에서 먹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매일 아침마다 그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식탁을 나누면서 여러분이 영적으로 한 가족임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유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제일 큰 이유 중 하나는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죄인, 곧 창기와 세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이렇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시면 예수님이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는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한데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왔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들의 눈에는 죄인이요, 쓰레기 같은 창기와 세리로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당신이 구원하여 아버지 품으로 인도해야 할 하늘 가족으로 비추어졌기에 그들과 더불어 식탁을 나누심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인격 안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실패하였던 베드로를 주님이 부르셔서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리더십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담임 목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그러한 지도력을 회복시켜 주신 자리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는데 그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바로 거기가 아침 식사를 나누시던 갈릴리 해변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예수님은 그 갈릴리 해변에서 몸소 생선과 떡을 구우며 제자들의 식탁을 준비하셨으니 이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제자들이 여전히 형제요, 하늘 가족임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계시록으로 달려오게 되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교회는 덥지도 차지도 않은 교회였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주님이 교회 바깥에 계신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를 향해 주님은 간절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문을 열면 예수님이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들은 또 예수님과 더불어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또 식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과 영적인 온전한 연합 속에서 생명적인 연결을 이루며 살아가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고 한 그 관계의 언약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식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바로 원수들이 보는 눈앞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식탁을 베풀어주신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단수로 나오는 이 원수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쪼레라이’ 라고 하는 복수 분사로 등장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많은 자들의 면전에서 주님은 나에게 한 밥상을 베푸시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다윗이 궁지에 몰렸을 때에 없애버리기 위해서 격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윗 앞에 큰 밥상을 베푸시고, 그와 함께 마주하시며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렇게 식탁에서 함께 밥을 나누시는 가운데 원수들은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시인을 헤치려는 마음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잘못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때리시며 그를 징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코 악한 것들이 이 시인을 공격하는 것을 참고 보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때리실 찌라도 원수들이 시인을 헤치는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서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의 악에 대해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응보적 공의인데 이것들은 불택자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로운 성품을 따라서 징벌을 하시는 응보적 공의를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는 교정적 사랑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당신의 자녀들을 때리시고 어루만지면서 그들을 올바르게 교정해 주시기 위한 사랑의 표현으로 그렇게 징계의 매를 드셨던 것입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시인을 에워쌓으나 그들은 이 시인에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약했지만 약한 이 시인과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은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1년이 좀 안되던 날에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읽었지만 그때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이 5절에 왔을 때에 아주 벅찬 감격을 누렸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베푸시고’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라크’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원래 전쟁할 때 군인들이 대열을 짓는 모습을 가리키는 단어에요. 여러 개의 물건을 줄을 맞추거나, 대열을 하는 동작을 의미하는 동사에요. 이 시인이 바로 하나님 앞에 받은 밥상은 아라크의 밥상이었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모두 자매가 되어서 시집을 갔다고 칩시다. 그래서 이제 친정에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친정에다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3일 후에 인사하러 갈께” “와라” “박 서방하고 같이 갈께” “와라” “점심 꼭 줘야 돼” “걱정마라”. 그래서 3일 뒤에 이제 아침이 되었습니다. 신랑에게 말해 “여보 아침 먹지 말고 우리 굶자.” 남편이 “왜?” “우리 가서 엄마가 분명히 맛있는 거 많이 해 놨을 텐데, 당신 주려고 많이 차려 놨을 텐데 그때 가서 맛있게 먹자.” 그래서 이제 남편하고 같이 인사를 갔어요. 장모님 집에 문을 열었는데 식구들도 별로 없고 음식 냄새도 안나요. 그래서 인사를 하고 앉았습니다. “엄마, 우리 배고파, 밥 줘.” “그래” 그러더니 5분 만에 밥상을 채려왔어요. 밥상 한쪽 동그란 소반 한쪽은 깨지고, 아침에 먹은 밥풀이 말라붙어져 있는데다가, 그런데다가 누가 먹던 밥인지 사기그릇에 담겨있는 밥에다가 찬물을 여러 번 헹궈서 그래서 제사상 오르듯이 숟가락 하나를 꽂아서 그리고 반찬 하나를 들고 왔는데, 딱 내려놓는 바람에 그 사발에 물이 찍하고 엎질러졌어요. 유일하게 올라가 있는 이 반찬은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딱 하나였어요. 그 식탁을 채려 놓으면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 사위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왜 태어나서 우리 딸을 데리고 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 딸과 결혼한 것을 매우 불행하게 생각한다.” 그런 뜻이 밥상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을런지 모르지만 제 취미 가운데 하나가 요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제가 점심이나 저녁때 요리를 해서 가족들을 즐겁게 해 주는데 바빠서 잘 못합니다. 근데 지금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2만 원짜리 뷔페 정도는 다 만들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한 5만 원짜리는 모르지만. 근데 어쨌든 음식을 보면 만들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습니다. 설교하고 비슷합니다. 원재료만 맛있으면 재주가 별로 필요 없다. 예를 들면 한우고기가 아주 좋은 것을 구했다 그러면 재주 부릴 필요 없어요. 그냥 숯불 피워서 구워서 소금 찍어 먹으면 최고입니다. 설교도 똑같아요. 설교도 자신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게 좋은 재료에요. 올바르게 해석을 해서 그거를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만 해도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런 유사성이 있습니다.
근데 그래서 가정주부들이 집에서 이 밥을 하고 이런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저는 잘 알아요. 그래서 결혼한 지 30년이 됐는데 내 기억으로는 아직 한 번도 반찬 투정을 한 적이 없어요. 교회를 시작하고 나니까 많은 집에 심방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밥을 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거 내가 무언데 그거를 한번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데 그걸 하냐! 그래서 항상 하지 말라고 내가 당부를 합니다. 갈비탕으로 한 그릇 먹으면 되고 하니까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러더니 그래도 목사님 따뜻한 밥 해드리고, 따뜻한 밥 식당에도 많다 그러니까 아무 상관없다.
지금부터 한 8년 9년 전인데 어느 여 집사님의 가족이 나오는 그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교구 교역자에게 그랬어요. “집에서 밥하지 말라고 그래라 힘들다.” “그래도 한답니다.” “그래도 하지 말라고 해라” 그래도 한대요. 그래서 드디어 이제 그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 심방하게 잘 마치고 식탁을 차려 나오는데 둘이서 큰 상에다가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상을 탁 갖다 놨는데 내가 앉아서 젓가락을 들고 이렇게 해도 대부분의 반찬이 사정권 바깥에 있습니다. 식탁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냐?” 그랬어요. 이 시간에 일주일 전에 계획을 세우고 3일 동안 장을 보고, 3일 동안 만들었대요. 그래서 “그럴 필요가 뭐가 있냐? 나 같은 사람이 와서 심방을 하고 가는데 뭐 하러 이렇게 정성을 드리냐? 차라리 이 시간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지” 그랬더니 자매가 정색을 하고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그러면서 기도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 식탁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러한 이 시인이 받았던 밥상은 바로 그러한 성대한 정탁의 식사에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혹시 ‘아, 시인이 너무 배고프던 어느 날에 하나님이 온갖 산해진미로 이루어진 커다란 교자상 네 귀퉁이에 줄을 매달아서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내려 보내서 그래서 시인이 배부르게 밥을 먹은 적이 있구나’ 나는 여러분이 열린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문학적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아요. 웃지를 않는 거 보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 적 없어요. 오히려 시인은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제사장 이외에 먹지 않는 그 진설병을 먹고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은유죠.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매일 만나로 먹이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떡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기적의 밥상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은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 쌓이고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고, 고통의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한 원수들이 바라보는 그 면전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성대한 진리의 식탁을 이 시인을 위해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바로 그 식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먹으면서 굶주린 자신의 영혼의 큰 배부름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났던 시인이 이기는 방법이었고,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던 이 시인이 그 상처 속에 넘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성대한 말씀의 잔치 앞에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직 버림받지 아니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환경이 자신을 저주할지라도 주님이 여전히 자신을 하늘 가족으로 여기시고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짧은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우리도 한때는 시인처럼 이렇게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곤고한 인생의 시련의 강가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을 살리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물러날 수도 없는 인생의 벼랑 끝에서 마지막 하나님이 우리의 어깨위에 날개를 날아 그 절망의 계곡을 날아 건너편 언덕에 이르게 하셨던 그 놀라운 승리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승리였습니까? 모두 곤고한 우리의 영혼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진리의 말씀으로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오류에 눈먼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찬양)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삼천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곤고한 영혼들을 건지시고 사망의 건조한 땅을 지나는 언약백성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의 식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풍성한 식탁 앞에서 경험하면서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에 승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건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길 때에만 우리 가까이 계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가장 비참한 지경에 있고 심지어는 스스로 주님을 멀리 떠날 때조차도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그 큰 목자의 사랑을 베풀어 주시나니 그 사랑은 이렇게 누구도 볼 수 있도록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 주시는 말씀의 성대한 식탁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식탁 앞에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큰 사랑의 성품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도 주님은 자신을 따라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 만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늘 평탄한 풀밭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신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인생을 지나며 자기의 인생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 이름 위에 살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고 시어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비바람이 부는 광야를 지나게도 하시고, 폭풍가운데를 거치게도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혼자 있는 좌절과 외로움을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말씀의 식탁으로 이끄십니다. 거기에서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말씀의 식탁 속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인간의 허물을 능가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보석과 같은 성품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한 마리의 어린양처럼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시인은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남긴 80여 편의 시 속에서 대부분을 가장 고통스러운 인생의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며 아름다운 찬양으로 꽃 피웠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좌절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길을 걷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 한숨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그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원수 앞에서 베푸시는 그 풍성한 말씀의 식탁,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녹이시며 인격적으로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진리의 말씀 앞에서 그의 영혼을 살리셨기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여러분을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으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초청하시는 음성입니다. 바로 그 말씀의 그 정찬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쓰레기 같은 죄인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 어머니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은 바로 그 큰 사랑 앞에서 감화를 받고 인격적으로 승복한 것입니다. 모든 삶을 다 살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내 의지로 행할 수 있지만,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 앞에서 승복을 당해서 무릎을 꿇고 그래서 스스로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주님의 모든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호소하는, 여러분의 어떤 삶의 자리에 놓여있든지 이 말씀의 식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 앞에서 영원히 새 생명을 얻고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 죽음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비는 바입니다.
2010. 07. 25 주일오전 예배
8.기름을 부으실 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빈 잔과 같던 시인의 영혼이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진 그 이유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의 이유는 오늘 설교 하려는 바 원수의 목전에서 시인에게 상을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름으로 그의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소위 삼직에 대한 기름 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이룬 이후에 세 가지 직임을 주어서 솥발과 같이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셨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아와서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죄 사함을 얻게 하고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왕이었는데 이 사람은 종교적으로 선지자와 제사장의 섬김과 함께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라 전체를 통치함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일군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들은 모두 각각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었고, 그래서 이 시인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자처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 직분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만듦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직임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능력만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직분으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을 임직시키실 때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셨는데 이 기름 부음은 의식적인 단지 상징이 아니라 이 기름부음을 통해 실제로 각각 이 세 직임의 사람들이 자기의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생동안에 세 번의 기름 부으심을 받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시인의 가슴에 남겼던 것은 첫 번째 기름 부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와서 이 시인을 찾아내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베풀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에 성경은 기름을 부으매 여호와의 성신이 그에게 크게 감동하여 임하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구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과 신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분을 구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들마다 주님께서 그의 안에 성령이 내주하게 하십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가운데 충만한 내주가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 시대에 신자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경륜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 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 중심이기 보다는 일을 중심으로 성령이 역사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주님께 부름을 받아서 특별한 일에 봉사하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그 성령이 그에게 임함으로 예전에 없던 탁월한 지혜를 갖게 되거나 혹은 순결한 마음이 되거나, 혹은 담대한 용기와 능력을 부여받게 되어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일을 수종드는 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거두시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심각하게 파기하였을 때 주님은 징벌로서 그 영을 거두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도 한때 범죄 하였을 때에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시지 말라고 간절히 매달릴 정도의 영적인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더욱이 다윗의 선임자는 사울이었고, 한때 성령을 부어주셨던 그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때에 어떻게 비참하게 되었는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성신을 거두시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였을 때 그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는 다윗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생동안에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 안에서 살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바랬고, 이러한 그의 염원은 다양하게 흩어진 그의 시편 속에서 잘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그런 성령의 충만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에 그는 예전에도 주님을 잘 믿는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그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인간의 언어와 묘사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우주에까지 가득 찬 영광과 현존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속에서 아마 다윗만큼 우주에 가득 찬 위대한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이 다윗이 자신의 철학과 신학의 최고의 모델이 되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이 시인은 자기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자신뿐만 아니라 이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고 우주와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커서,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넓은 궁창에 이르나니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온 땅과 하늘과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현존을 보았고, 그러한 탁월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에게 충만히 임한 성령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코 박고, 자신을 끊임없이 썩이고, 죽이는 욕망과 죄 속에 얽매여 사는 이유는 이렇게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의 참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이 시인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음을 통해 그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탁월한 은혜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당신을 가장 닮도록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격차를 가진 피조물 중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 무한한 존재의 격차를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고 탁월하게 잘 깨달아 집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지루할 수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생활하는 것이 그렇게 무료하고 실증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5년 전에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번 가을에 세례를 받도록 하거라” 고 말입니다. “목사님 저는 학습도 받지 않았고 이제 주님께 돌아온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 다녔고 그리고 이제 믿음도 돈독해졌으니 세례를 받아도 괜찮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밤 교회까지 걸어서 한 30분 가는 거리였는데 20분에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매일 밤 교회에 나가서 불 꺼진 예배당에서 기도했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과 짝하고 악독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모든 사상에 주님이 없다고 생각하던 이 더러운 인간이 이제 세례를 받고 주님의 신부가 된다고 하니 두렵기도 하고 신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해도 내 자신이 주님의 그 거룩한 세례의 부름에 다가오기에는 너무나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못 박히신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 하나를 꼭 붙들고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1975년 11월 어느 날 날이 꽤 추운 추수 감사절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내게 오셔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물을 머리에 바르시면서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 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할 때 저는 생전 처음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아주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머리 위로부터 발끝까지 포근하게 감싸왔습니다. 몸과 그리고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 졌습니다. 그 경험이 끝나자 눈에서는 빗물처럼 눈물이 쏟아져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예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세상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매우 약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야망도 많고, 꿈도 있었지만 그 세례를 받는 순간만큼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과 주님이 그렇게 자기를 버려 이 쓸모없는 인간을 당신의 신부로 삼으셨으니, 이제는 내 인생의 날이 얼마가 되든지 또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 분의 신실한 하나의 신부가 되어서 그 분을 섬기고 봉사하며 사는 것, 그리고 언제든지 그분의 부르시면 그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그렇게 순결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마음속에 가득하였습니다.
더 극적인 경험을 5년 후에 하게 되었는데 결혼을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에 매일 새벽마다 무엇인가 간절한 간구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아직 직장을 다니던 때였기 때문에 새벽시간 말고는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에 그날도 11월의 날이었습니다. 매우 추운 새벽이었습니다. 얼마를 기도했는지 눈을 떠보니까 성도들도 모두 가고, 목사님도 가시고 그리고 차가운 예배당에서 저 혼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마음에 뜨거운 확신이 없고, 왠지 내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교회 바닥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두꺼운 코트를 입고 이렇게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나보다, 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면 주님이 그래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까,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내려왔고 무릎을 꿇고 손등을 땅에 대고 얼굴을 그 손바닥에 묻었습니다. 차가운 콘크리트의 한기가 온 몸에 스며들어 뼈까지 차가워져 왔습니다. 그래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원래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분명히 엎드려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교회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한복판에서 핸드볼보다 조금 작은 불덩어리가 아주 천천히 천천히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저게 계속 오면 나한테 부딪칠 텐데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그 불덩이가 내 머리에 부딪쳤고, 온 몸이 이번에는 따뜻해지는 게 아니라 불같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억제할 수 없는 커다란 기도소리가 내 자신의 마음과 정신뿐만 아니라 목구멍 속에서도 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그렇게 혼자 기도하면서 방언의 은사를 경험했습니다. 얼마를 기도했을까? 이제는 내 마음을 주님 앞에 거의 쏟아 놓았다고 믿었을 때 세례 받을 때처럼 똑같이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가 가지고 온 기도의 제목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경험은 달랐지만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었고 나라고 하는 이 존재는 이 우주 속에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고 싶었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에 아침 해가 훤하게 밝아오고 유리창도 없어서 비닐로 유리창을 대신한 성에 가득한 창문을 아침 햇살이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참된 만족이 어디서 올까요? 오늘도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은 이 세상에서 물질의 부족 때문이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었던 한 나라의 제왕들조차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만족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 위에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는 어마어마한 물 위를 떠다니지만, 그러나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바다의 물을 먹고 해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리는 그런 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우리의 진정한 만족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더럽고 구접스러운 이 세상의 욕망에 자신의 육체를 쑤셔 넣고 여기에서 어떤 일시적인 행복감을 맛봄으로써 죄를 짓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입니까? 생수를 먹고 진정으로 해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결코 구정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원하고 자신의 진정한 만족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금욕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은혜의 생수,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탁월하고도 신령한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때 그는 스스로 그렇게 더럽고 구접스러운 이 세상의 욕망의 자기를 쑤셔 넣을 마음을 접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 분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충만하신 성령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어주시고 싶어 하시고, 이미 성령의 그러한 내주하심 속에 있는 신자들이 융성한 죄를 버리고 이 충만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속에서 신령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를 단지 이 세상의 유형적인 물질과 환경 속에서만 찾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것보다 더 탁월하고 놀라운 것은 주님의 물 붓듯 부어지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충만한 사랑과 성령의 임재 속에서 사는 것만큼 참된 행복이 인간에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나더러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맛스러운 사랑, 진리이신 하나님의 참 진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성령의 임재 속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질그릇같이 연약했던 사람들이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연약한 성도였지만 그들은 맹수처럼 용감하게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았고, 진리를 위해 외톨이가 되거나 참된 것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얻을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성령의 탁월한 인재가 그들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담대하게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그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서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넘치는 기쁨 속에 살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피 바르고 당신의 진리를 우리의 가슴에 부어 우리를 주님의 자녀 되게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 속에서 악과 가깝고 이 아름답고 참되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의 환경이나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는 담대하게 부르짖었습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담대히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그 큰 성령의 내주하심의 특권을 입었음에도 이 시인이 경험한 것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서처럼 그렇게 충만한 성령의 신령한 임재 속에서 그 탁월한 기쁨 속에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환희 안에서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악한 의지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범죄와 악한 생각과 마음의 분요함으로 근심시켜 드리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분을 근심시켜 드리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리면서 그 분으로 말미암는 참다운 만족이 자신 안에 성령의 임재로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것은 마치 피 묻은 칼을 들고 원수를 사랑한다고 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악한 의지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시인도 한때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듯이 범죄하고 주님의 마음의 못을 박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구절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하였더라 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기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솔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은 다시 이 사람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넘치게 하셨고, 처음 기름 부음을 베풀어 주셨을 때에 이 시인의 마음속에 차고 넘치던 그 거룩하고 신령한 환희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드십시오. 여러분의 진정한 소망은 이 썩어질 세상 나라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소명을 주셔서 살아가는 세상이고 여러분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회자들이 그대를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그렇게 여러분을 다그쳐서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단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자기를 주님의 진리 앞에 굴복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 그런 마음으로 하나의 집중된 심령으로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실 성령의 은혜 안에 여러분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어떤 때 우리에게 있었는지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저는 이후에도 이러한 성령의 체험을 여러 번 했지만 저는 그때가 가장 행복하던 때였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성도들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널리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고 수많은 독자들을 거느린 저술가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알고 신학을 아는 지식은 거의 백치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나의 마음속에 주님의 성령이 충만히 임재 하셨을 때, 학식이 많아지고 그리고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해 주는 지금의 마음속에도 간직하지 못했던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마당에서 이 설교를 준비하며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유명해지는 것은 또 무엇이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또 무엇이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큰일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또 무엇이고, 더군다나 사람에게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죽도록 그렇게 산후에 마지막에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주님의 오늘도 당신께 목마른 사람들, 이 썩어질 세상에서 구접스러운 모든 욕망으로부터 몸부림치며 벗어나기를 원하고 주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목마른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내어 달리고 처음 회심할 때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욕심이 가득 붙은 우리의 허위와 거짓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세상에 붙은 욕심들을 털어냅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도록 주님께 사랑을 받도록 이러한 은혜를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가득 부어주셔서 이 마당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마다 그 충만한 임재 속에서 주님을 뵈올 수 있도록 이런 영적인 은혜를 부어달라고 우리 기도합시다.
2010. 08. 01 주일오전 예배
9.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6).
이 6절은 시편 23편의 마지막 세 번째 토막입니다. 1절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총론적 선언이라면, 2절부터 5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이유, 그리고 마지막 6절은 그렇게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모신 자신이 미래에 대해서 갖는 확신과 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 때문에 미래에 어떠한 일들이 닥칠지라도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선하심’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거의 모든 날 동안 빠짐없이 나오는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보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구절입니다. ‘그 좋았더라’가 바로 ‘토브’입니다. 이 말은 변하기 쉬운 인간의 심리 속에 나온 판단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판단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세계를 이렇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실제로 창조하셨을 때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계획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완전히 합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것이 좋았더라, 혹은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선이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쁘다던 지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준다던지 하는 인간 편에서의 판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한 조화와 질서, 균형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루고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충만한 신성의 영광을 영적인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보이는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서 펼쳐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한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이고,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로 이 전체적인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에 이바지 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보람은 하나님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한 인간의 보람이고 기쁨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이 그 목적과 부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선한 사람, 선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속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갈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선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우리는 각각 다른 관점에서 선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중심으로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대만을 여행하던 어느 선교사가 그것을 보았답니다. 어떤 대만 사람이 손바닥 위에다가 금빛 모양으로 만든 우상을 들고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작은 회초리로 계속 때리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아, 이놈의 우상이 요새 나에게 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좀 맞아야 된다”고 하면서 계속 때리더랍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악입니다. 그 악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고 자기를 섬겨야지만 좋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삼은 것을 회개하고, 온 세계와 우주와 행복의 중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참으로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일 수 있고, 사실은 행복해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모든 세계는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사람들의 선과 악을 모두 사용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즘은 사라진 말이 있지요 “야 시계 얼른 밥 주고 자자” 외국 사람이 들으면 참 얼마나 번역하기 어려운 말일까요? 그래서 옛날에는 시계 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태엽을 돌려놓으면 하루 동안 시계가 가는 것입니다. 시계 뒤 뚜껑을 열어보면 굉장히 복잡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하나는 오른 쪽으로, 또 어떤 것들은 왼쪽으로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아래에서는 똑딱똑딱하고 움직이는 어떤 추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여요. 그렇게 복잡해 보이는 시계의 수많은 부속들이 함께 어울려 작용을 하는 것은 한 가지 목적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두 개의 바늘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합력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가 희랍어로 ‘순 에르고’라는 단어인데 ‘순’이라는 단어는 ‘함께’라는 뜻이고 ‘에르고’라는 단어는 일하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영어의 에너지라는 말이 온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선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누구든지 다 행복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 긴 여름 장마가 계속 되고, 온 집안에 곰팡이가 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날이 밝았는지 아직 어두웠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침침한 날들이 여러 날 우중충하게 계속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장마가 끝나고 아침에 맑게 게인 하늘에 찬란한 햇빛이 내리비췹니다. 굿모닝입니까? 아닙니까? 굿모닝이죠.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아침의 찬란한 햇살이 즐거운 것은 아니죠. 만약에 여러분에게 안질이 있다면 햇살이 확 비칠 때 다른 사람은 굿모닝이라고 소리를 쳐도 여러분은 눈이 쓰리고 따갑고 고통스러워서 캄캄한 새까만 안대를 써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햇빛이 잘못한 거예요? 안질이 잘못된 거예요? 당연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고통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잘 들어보면 아주 쉬워요.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악하고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고 고집대로 살 때 여러분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자녀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자녀들이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을 때 그 아이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고, 그래서 아이를 꾸중하거나 때려 줄 것입니다. 그거는 여러분 마음속에 그 아이를 향해 선하다는 증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자식을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그러면 자식들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버려 두겠죠.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뭐냐 하면 로마서 1장에 의하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진노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잘했을 때도 야단을 치시다가 도저히 너무 화가 나시면 ‘니 마음대로 해라’ 진짜 맘대로 하는 거라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선하심이 여러분이 고통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시간에도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와요.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선하시고 불변하도록 그 선을 빛처럼 방사시키시는 분이신데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마음이 병들고 악을 행하여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주님의 선하심이 확 비췰 때에 그때에 여러분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한 처방도 마련하셨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여러분이 잘못해서 고통을 받을 때에 회개함으로써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의 궁극적인 질병을 고쳐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빛을 받으며 고통 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때리신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선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평생을 두고 자신을 따라 오리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이 선은 미래에 대한 자기만족이나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보증하는 그런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기를 바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축구를 연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인생의 슛은 내가 쏩니다. 패스만 환상적으로 해 주십시오. 골인이 되면 이것은 화려한 나의 슛 솜씨 때문이고 만약에 노골이 되면 당신의 패스가 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내버려 두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등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가장 큰 은혜의 본질은 자기를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인생의 자리에서 도망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종종 우리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눈에 아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맞닥뜨려 싸우려고 할 때 그 분의 선하심의 빛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는 더 많이 고통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둘러싼 환경을 깨뜨리기 전에 나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나의 아집과 교만과 사랑의 집착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나를 당신의 진리로 정결케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며 살겠습니다’.
언젠가 토기를 만드는 공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진흙 덩어리를 가지고 농로위에 놓고 돌리면서 손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뜻대로 잘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진흙을 웅덩이 같은데 버려요. 거기에 다 한군데 모여요. 거기에 물이 있습니다. 모이면 그거를 장화 같은 걸로 밟아서 다시 흙덩어리로 만들어서 다시 올려요. 그러니까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을 때 가장 좋은 진흙은 어떤 거냐하면 자기 나름대로 무엇이 되겠다고 성질이 있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흙이 되어서 그 주인이 의도대로, 제작자의 의도대로 진흙을 만질 때에 빚어지는 진흙이 제일 좋은 진흙입니다. 그래서 에디엡 에스피노사라는 사람은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찬양)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깨뜨려져야 합니다. 잘못 만들어진 토기와 같은 우리 인생에 대한 잘못된 우리들의 설계와 사고방식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해체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새롭게 빚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불만족은 모두 일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잘 모르지만 그 분은 아시고 나는 또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나에게 해 줄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있으시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자기를 주님께 복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식어지고 나면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왠지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가장 선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몸부림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뿌리에요.
제가 아는 어느 교인이 있었습니다. 하던 사업에 실패하고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불안이 더 컸습니다.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에 남편은 점점 더 낙심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집안에서 불평과 불만이 늘어갔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인이 꿈을 꿨답니다. 남편이 꿈에 나타났는데 평소에 하던 대로 꿈에 온갖 인상을 쓰면서 투덜거리고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벌러덩 드러누워서 그리고 잠을 청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기력 없이 누워있는 남편은 배가 푹 꺼져서 피죽도 못 먹은 사람같이 말라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평의 내용이 뭔가 하고 들어보니 먹을 밥도 없다는 불평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불평 속에 잠을 청하는 남편 옆에는 깨끗이 쌀을 씻어서 담은 큰 가마솥이 놓여있었고, 가마솥 밑에 아궁이에는 바짝 말라 잘 타게 생긴 장작들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그 장작 한 가운데에는 불쏘시개까지 넣어져 있더랍니다. 부뚜막에는 뚜껑이 열린 성냥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인상을 쓰며 끼니거리가 없다고 원망하고 투덜거리면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자기를 의지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제 삼의 선택은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책망을 받았던 주요한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우상 숭배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우상을 통해서 자기를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은 곧 우상숭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이라고 하는 한 마디를 통해서 우리는 통념적으로 생각하던 우리 중심의 선의 개념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변덕이 심한 존재들입니다. 추운 겨울 날 온 몸이 얼었을 때 그렇게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던 뜨거운 국은 먹으면서도 우리들이 말하기를 ‘야 참 시원하다’ 그렇게 시원한 추운 겨울에 한 사발의 뜨거운 국물이 더위 속에 더위를 먹어가는 가운데서도 그 뜨거운 여름철에도 여전히 시원한 국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요. 어떤 때는 이것이 선했지만 또 어떤 때는 저것이 선하고 이것이 악한가 하면 이것이 싫고 저것이 좋은가 하면 이것이 싫도록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살면 그는 결국 그렇게 변덕스러운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앙이 존재하는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통해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여러분이 말합니다. ‘하나님 왜 당신의 뜻을 제 삶을 통해 이루십니까? 제 삶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내 뜻대로 살겠다고 한 그 고백은 무엇이냐?’ 그러면 여러분은 말합니다. ‘아 그건 그때고’ 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싸구려로 생각을 합니다.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떠난 가장 훌륭한 증거는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졸렬한 방식으로 복음을 재해석하면서 자신의 엉터리 신앙생활을 정당화 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무지는 이기적인 자기 욕망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껍질로 덮은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이런 삶에 박수를 치는 사단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잘못 심겨진 것들이 무너지고 뽑혀지지 않으면 올바르게 좋은 것이 심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지하다고 고백하는 것이 겸손의 미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교묘한 죄악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고 있는 참된 의미를 알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 아주 훌륭해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모든 일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적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온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생이별을 하고 노예로 팔려갈 정도로 악을 행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고 거기서 신실하게 살려고 했지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힙니다. 이렇게 우여 곡절을 다 겪으면서 그는 파란만장한 고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선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주신 그 위대한 꿈,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을 하는 그 꿈을 이뤄주실 분이시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겪는 끔찍한 불행과 고통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이 커다란 비전이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이바지하게 될지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고통스러웠지만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은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참고 시련을 이기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두루마리가 펼쳐지듯이 모든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위대한 계획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판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용서를 비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나를 종으로 판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향해 무슨 악을 행하시는 분이십니까? 그 분이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억울한 일을 행하시거나 부당한 대접을 해 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께 불만족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을까요? 더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기의 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선물로 내어주신 그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선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또 다른 선을 찾아 그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하시면 선할수록 그렇게 악을 품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세요. 태양은 언제나 하나이고 찬란한 빛을 지구에 비취잖아요. 그런데 그 빛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물들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햇빛은 아주 위대한 태양의 힘을 보여주어요. 균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햇빛이 비취면 어떻게 되죠? 살균 작용이 일어나요. 그래서 태양의 찬란한 빛이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요. 햇빛을 못 받아서 다 시들어가던 화초들이 햇빛을 받으면 푸른빛을 띠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또 추운 겨울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얼음들이 햇빛을 받으면서 서서히 녹아 얼음 속으로 봄의 시냇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항상 당신의 선한 빛을 우리 인간에게 환하게 비추셔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 때에 그 선한 하나님의 햇빛은 인간에게 고통으로 나타나 징계를 가져와요. 한 인간이 핍박 속에서도 진실한 삶을 살려고 애쓸 때 선하신 그 햇빛은 고난 속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기도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게 신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시엄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양)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치 않고 날 지키시니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거듭 자신의 고백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을 하라는 것입니다. 억압과 억눌림으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안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누구도 여러분을 믿음을 갖게 할 수 없습니다. 자유입니다. 시인은 때로는 결핍의 빈들을 지나기도 했고, 때로는 폭풍과 같은 바다를 건너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두려움 속에 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역경을 헤치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선하신 분이시며 마치 양떼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처럼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채찍과 칼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여러분 목에 분노하시는 얼굴로 칼끝을 겨누며 나를 믿으면 살려주고 믿지 않으면 이 칼끝으로 네 목을 따겠다 라고 그렇게 여러분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심지어는 우리가 현저하게 주님께 욕을 보이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불순종의 악을 행할 때조차도 주님은 언제나 목자처럼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피 묻은 당신의 손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말을 건네십니다. 우리의 지성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의지의 방향을 악한 데서 선한 데로,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게 만들어 주십니다.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그렇게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신앙의 여정을 지나면서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분이셨다는 것,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나 그리고 평탄한 풀밭 위를 지날 때나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셨고, 우리의 일생 사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신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요, 하나님의 악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 좋은 일들이 있었고 행복한 일들이 있었다면 우리의 악을 능가 하셔서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고 주님을 멀리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올라치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존심도 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한번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가면 우리가 그 분의 마음에 박았던 수많은 못 자국들이 아직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한 번도 미워하거나 주님이 우리로 인하여 욕을 당하신 적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따라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그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서 우리 같이 죄인 중의 괴수인 사람에까지 미치고 그 손길은 우리를 치료하여 우리의 눈의 안질을 낫게 해 주셔서 진리의 찬란한 빛이 이제는 눈 시고 따갑지 않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빛이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의 입맛을 변하게 하여 이제 주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쓰디쓰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속한 것들이 우리에게 쓰게 느껴지도록 우리를 변하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수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인생에 있어서 일어나는 모든 악하고 고통스러운 일 중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할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우리의 악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입니다. 만약에 그 악이 다른 사람의 악을 인하여 당하고 있는 고통이라면 주님은 그 고난 받는 자들을 지켜주실 것이고,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들은 하나님이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타지 않은 색락(?)의 양초로 있게 하지 아니하시고 그 삶을 다 태워 하나님의 선하신 영광의 빛을 비추게 하시며 사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당신의 선하심 안에 삶을 영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맞짱을 뜨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 때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자기가 자신의 삶의 주인 된 삶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 안에서 행복해 지려고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0. 08. 08 주일오전 예배
10.하나님 사랑의 추격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6)
시인이 자신의 평생의 끝까지 자기를 따라 오리라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인의 모든 삶 속에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다니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시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믿음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주님의 선하심이 느껴지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다시 회복하여 자신의 과거를 회고해 보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던 그때도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에게 적합하도록 작용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창조의 목적,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 그리고 그 한 지체로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계획을 이해하고 선으로 돌아갈 때에만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풍부하게 경험하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쏟아지는 봄날의 햇볕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안질에 걸린 사람에게는 그것이 쓰라린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등지고 살 때에 우리가 겪는 아픔과 고통 그것 자체도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선의 효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선과 함께 성경에서 거의 함께 따라다니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함께 노래했습니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시인은 노래했고 이것은 개인의 찬양이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공동체적 송가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따라다니는데 이 선하심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선을 보여준다면 이 인자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의 선함이 하나님과 언약관계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말로 이 인자는 ‘헷세드’인데 이 ‘헷세드’는 바로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관계 안에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헷세드’의 정체입니다. 헷세드라고 하는 이 명사는 ‘핫사드’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이것은 자비를 베풀다, 인자를 베풀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의 피동 명사가 ‘핫시드’ 인데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나오는 성도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의 이 ‘헷세드’의 사랑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경험한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은 마음이 끌리는 사랑입니다. 보다 더 탁월한 사랑은 그 사랑 자신 안에 사랑의 충만한 성향이 있어서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 별로 없는 인간인데도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강한 사랑의 성향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는 이 사랑이 더 훌륭한 종류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유용한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이 세상에 흔히 있는 사랑입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런 훌륭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막된 사람들과 비교할 때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아름다운 흔적이 남아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타락하여 그 하나님의 형상을 거의 잃어버리게 된 지금에도 여전히 그 추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분명히 사람들 안에 있는 어떤 좋은 점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워낙 충만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힘입어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당신에게 강요한 사랑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충만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하나님의 이 특별한 인자한 사랑을 안 사람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선하실 뿐만 아니라 인자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선이 창조주의 영역이라면 인자는 구속주의 영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언약 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시인은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그 모든 인자하심을 하나님께 찬송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언약 백성을 향한 탁월한 인자하심은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는 언약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성경에는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 번에 심판 해 버리신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는 유독 오래 참으시고 그리고 견뎌주셨습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악을 행해도 오래도록 그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어머니와 같이 주님은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며 그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 관계를 통해서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을 맺으셨다고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약속을 체결할만한 무슨 권한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과 약속하신 것이 어찌 보면 언약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언약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도 꾸짖을 자가 없었지만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탁월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언약 관계에 자신을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소속되게 하셔서 그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맺으신 언약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자를 베푸셨으니 이는 무한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은혜 주시는 능력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이 살아온 구비치는 그 수많은 인생길 속에서 한 번도 이 시인을 놓지 않고 굳게 붙드셨습니다. 원수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반을 받을 때뿐만 아니라 스스로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주님 앞에 심히 악한 자가 되었을 때조차도 시인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시인을 버리지 아니하고 당신을 굳게 의지하도록 시인을 사랑으로 추적하셨던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자신의 고백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한 때 언약의 파기자였으나 하나님은 일체의 자비하심으로 나를 다시 언약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탁월한 당신의 인자하심을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한 번도 이런 인자하심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풀지 않으신 적이 없었건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경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느 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와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대답을 못하나? 사랑하셨죠.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같이 출렁거리는 정동이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저 사람 뭐, 있으나 마나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 그러다가 뭔가 좋은 점을 발견하고 자신을 굉장히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보여주고 선물이라도 갖다 주고 그러면 마음이 출렁거리죠. 정동이 일어나 무슨 정동이에요?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감동을 받으면서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 출렁거리는 감동이 뭐냐 하면 애호의 정동입니다. 좋아하는 정동이 출렁거리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까지는 별로였는데 금년서부터 이제 그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항상 그 사람 옆에서 먹고, 수련회 갈 때도 같이 차타고 가자고 그러고, 될 수 있으면 전도사님한테 졸라서 같은 방에 넣어 달라고 그러고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주 뭐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좋은 사람도 아니었는데 개념이 없는 행동을 나한테 하는 것입니다. 나한테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돈도 꿔 가고 안 갚고 그런 거 절대 하지 말라고 그랬죠. 하기만 하면 진짜 그 다음에는 아주 혼나요 그 후로는 한 건도 거래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돈도 안 갚아요. 이 속에서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이게 뭐예요? 혐오의 정동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정동이 막 출렁거리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같이 밥을 먹기는커녕 그 사람하고 앉았던 밥상도 보기 싫어요. 차를 같이 타고 가? 차라리 안가고 말지, 방을 같이 써? 차라리 여관에서 자지. 이런 마음이 막 생기는 것입니다. 너 앞에 앉으면 난 뒤에 가, 니가 뒤로 오면 난 앞으로 가. 이런 마음이 생겨요. 그래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변하신다면 신뢰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은 바위덩어리 같은 분이시냐? 그건 또 아니지. 그러면 말도 안 되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 필요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들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은 그렇게 출렁거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선함과 인자하심을 쭉 비춰주셔요. 그래서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의 모든 삶 속에, 마음속에 놀라운 감격으로 다가오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신비하도록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으시면 서도 모든 것들을 움직이시고 당신 자신은 변하시지 않으면서도 모든 변화의 원인이시며, 당신 자신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시면 서도 우리에게 바치라고 하시며 또 하나님 자신은 ~ ” 그러면서 쭉 아름답게 서술해 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하지만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에는 자비의 당신을 뵈옵지만 주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날 때에는 진노하시는 당신을 만날 뿐 우리는 당신을 떠나 아무데도 갈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피할 수가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가면서 살 때에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찬란한 사랑의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도 정말 사랑하시는 구나라는 것을 아주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하는 때가 언제냐 하면 나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거지 라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라,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회개할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막 아주 찬란하게 하나님 자신이 언약 백성들에게 얼마나 무한한 용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지를 찬란한 빛깔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환경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 민족은 망한다 그런데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이 부서지고 성전을 공격을 받고 그 좋은 보물과 기명들은 탈취 당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겁탈 당한 아녀자처럼 힘없이 초라하게 비참한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커다란 징벌이 임했는데도 회개하고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집안에 숨겨뒀던 돈들을 가지고 난리 통에 곡식을 서로 사기 위해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그 추잡한 양태를 만들어 냈어요. 거기 어디에 좋은 흔적이 남아있으며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은 것처럼 다 부서져버린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버려 이제는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된 그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도대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노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아우슈비츠라는 독일 나치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곳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견뎠던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일을 겪으면서 유대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신앙을 버렸어요. 그래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져야 되는 이 짐이 가볍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치고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모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무게보다는 가볍다 그리고 유대교 신앙을 버렸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어요. 그런데 어떠한 희망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는 멸망당한 예루살렘의 그 폐허 위에서 믿음의 사람 예레미야는 노래했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깊이 노래했습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과 부서진 성전, 짓밟힌 성전의 뜰을 보며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묻던 시대에 믿음의 사람 예레미야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며, 그렇게 자기의 백성들을 치시고 그것이 파괴당하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의 표현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있어서 오히려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 예레미야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슬픔의 눈물을 능가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자비의 송가가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질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오 예수님, 내가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렇게 돌아오게 될 때 비로소 예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 당했던 그 큰 고통이 사실은 나를 당신께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 적 없어요? 상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쓰라리고 아팠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상처가 그렇게 감사하고, 오히려 그 상처가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그런 고백을 한 적 없어요? 누구나 그런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시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어떻게? 그 하나님의 자비를 그 하나님의 ‘헷세드’를 우리가 오늘 충만히 경험하면서 그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면서 우리가 의의 길을 걸어감으로 주님의 이름을 빛내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태양을 등지고 있는 동안에는 길든지 짧든지 그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오늘 저녁도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봐요. 그러면 어느 한 순간 굳게 닫혔던 수문이 열리면서 물이 막 쏟아지는 것처럼 그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을 향한 이 탁월한 인자하심은 다윗이 정말 풍부히 경험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깨어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그가 쓴 80여 편이 되는 그 시편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쏟아 부어지는 그 탁월한 인자의 폭포수 속에서 살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 수시로 깨뜨려지는 깨어짐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에 살면서 그는 매 순간마다 예전에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헷세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일평생 헷세드만 연구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30년을 연구한 다음에 말하기를 “나는 30년 동안 이 헷세드를 연구했지만 나는 아직도 이 큰 산이 앞에 있는 작은 언덕에도 이루지 못했다” 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는 단어에요. 이러한 하나님의 헷세드의 사랑은 이 시인이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이 헷세드의 사랑은 신약 시대에 와서는 더 찬란한 방식으로 드러나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헷세드의 정수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이 헷세드는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곧 자기 아들인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쏟아부어주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이 초월적인 사랑을 한없이 쏟아 부어주셔서 그 몸의 지체된 우리들이 그 헷세드를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정점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은 여러 곳에서 사랑을 찾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헷세드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이러한 목자의 사랑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스스로 목자라고 말씀하시며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은 하나님의 헷세드의 가장 정수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헷세드를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이 헷세드를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양은 하나이지만 이 세상에는 태양의 빛을 닮은 수많은 또 다른 빛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빛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조해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셔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죄 가운데 고통을 받고, 영적인 침체 가운데 고생하는 것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인자하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가장 큰 형벌은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백성들을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당신과의 언약 관계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곤고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인자하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침체 속에서 곤고한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매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꾸짖으시는 그 진리의 교통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우리는 영혼의 침체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시련의 때를 지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확신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사는 비결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이러 저러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여주기 위한 시험 재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방황하는 인생을 통해서 아무리 저렇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사는 동안에는 잘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을 위한 예증으로서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충만한 행복을 누리며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높고 교만한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자리를 비우시고 낮은 자리에서 울며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오려는 사람들 그 울음 속에 가까이 계십니다. 스스로 선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의 선을 등지고 살던 자신의 삶을 회개하며 주님의 선으로 돌이키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고 당신 자신의 인자하신 헷세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사랑을 많이 받은 언약 백성들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될 텐데 무엇을 가지고 갈까? 내가 많은 소떼나 양떼를 몰고 가서 죽여서 그것을 재물로 바칠까? 아니면 우리 자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까? 주님이 원하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찬양)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찬양)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나에게 악을 행하던 원수들까지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주님이 그 사람들을 향해서 베푸시는 사랑의 통로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한없이 용서하신 것은 너희도 이웃을 용서하라는 표였고, 주님이 자기의 아들까지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 흘려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은 너희도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렇게 몸 찢고, 피 흘리기까지 자비를 베풀라는 하나님이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주인 삼은 추루한 삶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사랑이 흘러가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가 흘러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가장 커다란 삶의 보람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고, 수많은 사람들은 인간에게 박수를 치지만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어느 인간에게 좋은 장점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그것을 지니고 있는 그 사람을 찬송하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그것을 주신 여호와를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로 부르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인격적으로 설복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앎이 있기 때문에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위로로 삼습니다.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무지로부터, 죄로부터, 고통으로부터 살아나게 하시는 그 은혜를 통해서 목자 되신 주님의 그 큰 사랑을 자신이 목자를 향한 사랑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누가 우리를 먹이고 입히셨습니까?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누가 주십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 중 주님께로 오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 전체가 그 분에게 빚진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빚진 인생인 이유는 하나님이 또다시 당신에게 사람들을 빚 지우게 하기 위한 도구로 우리를 쓰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빚을 지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가시밭길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도 원수들이 에워쌓으나 억눌리지 아니하고 짓밟혔으나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추격하고야 말리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의, 우리의 공로와 우리의 자랑을 의지해서 여기에 지금 서서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이런 목자의 사랑으로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오만한 자들에게는 떨어지는 아픔을,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행복을 찾는 자들에게는 배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물질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허무의 고통을 받게 하시지만 그것은 마치 부패를 일으키는 균들에게 따뜻한 햇살이 살균의 작용을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덧난 곳을 치료하시고 고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미친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참된 행복은 주님의 이 사랑을 알고 이 사랑 안에서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을 나의 선으로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서 아니고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행복을 찾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지키시고 붙드실 것입니다.
11.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6).
시편 23편은 이제 이 6절 중 마지막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시인의 결단으로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에 계신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이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히 교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특한 백성들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는 임재의 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집이 지시하는 바는 곧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정해 주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자신을 향한 신앙은 반드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경건했던 구약의 성도들과 그리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의 한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이런 목표를 위해서 그들은 혼자 살아간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꿈과 희망을 이스라엘 공동체와 그리고 교회에 묻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나타났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마음을 바쳐 사랑하던 교회가 성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 분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잘 만날 수 있는 한 장소를 정하시고 그곳을 성소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또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작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있으리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이때는 아직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가장 위대한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이 마지막 구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라” 하는 이 집은 성전이 아니라 성막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동식으로 만들어서 그리고 가지고 다니던 성막이 이제는 고정된 장소에 텐트로 쳐져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간이식 성막 같은 곳에 여호와의 법궤를 안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하나님의 궤가 휘장 가운데 있다고 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 성막은 덮개가 물 돼지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성막은 결코 화려한 성막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광야를 지났고 그래서 그 짐승의 가죽은 볕에 찌들고 색깔이 바래서 우중충한 텐트의 모양이었을 것입니다. 이 성막의 외관은 결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할 정도로 화려한 집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초라한 텐트에 불과했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보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이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죄가 있든지 그곳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이 사랑했던 성막의 겉모습은 아주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청색, 홍색, 자색 실 그리고 금붙이들로 치장해 있는 아주 아름다운 성막이었습니다. 그 속에 들어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칙칙한 물 돼지의 가죽 속에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그러한 장소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를 믿으며 교회 생활하는 우리에게 신앙의 겉모습과 그리고 그 속이 어떻게 다른지를 예표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매주 반복되는 우리의 교회생활이라는 것이 뭐 그렇게 남들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매주 반복되는 우리의 교회 생활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지도 모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으며 살고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공휴일도 교회에 헌납하고, 그리고 예배와 섬김과 봉사로 교회에서 지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우리의 지루하게 반복되는 어떠한 화려함도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그 당시 물 돼지의 칙칙한 가죽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성전을 하찮게 생각하던 이방인들의 그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달콤한 성도의 교재,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인하여 안식하는 평안, 그 속에서 만나는 가슴시릴 정도의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속성들에 대한 계시와 경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성품의 찬란한 빛깔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주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을 체험해 본 사람들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과 환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 분의 성품의 아름다우심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고, 하나님과의 축복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풍성한 은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가장 잘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그 크기나 규모와는 상관없이 교회 안에 있는 이 영적인 생명의 구조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처럼 아주 신비하고 오묘합니다. 한 사람 한사람 자기 인생의 사연을 같지 않고 주님을 믿었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신비적인 몸을 이루며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그들이 계시는 신비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 생활은 곧 자신의 삶의 일부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그런 사연을 안고 모인 다른 많은 지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서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좋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슬퍼하고 아파하며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삶에 있어서 성전과 그들의 신앙은 나뉘지 아니하였습니다. 경건했던 여인 한나가 성전을 찾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출가한 여인으로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끄러움과 자신을 격동하여 번민케 하는 첩 브닌나로 말미암아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웠을 때 그가 찾은 곳이 어디였습니까?
또 다른 시인은 악한 사람들의 형통함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며 신앙생활에서 실족할 뻔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진리를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사오니’ 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은 또 어디였습니까? 고라의 자손에 의해서 전해 내려오는 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한량없이 체험했던 시인이 악인의 장막보다 더 좋아하고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성소에서 한나를 더 그리워했던 곳은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된 지 70년 만에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타락했을 때 가슴 아파하던 순결한 지도자 에스라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슴을 찢으며 통회하면서 엎드려 슬피 울었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그곳은 모두 다 하나님의 성전, 혹은 성소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삶은 교회와 분리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곧 신앙이었고, 신앙은 인생이었고 신앙과 인생은 곧 성전에서의 삶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체적인 교회 신앙과 연결이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통해 이 사실을 개인적으로 체험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구약의 성도들과는 비교될 수 없이 선명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의 모든 보편 교회가 그 분께 접붙여진 영적인 한 몸이라는 사실을 계시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도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일평생 교회를 세우는 생애가 되었습니다. 무엇에도 자유로웠던 그 사람이 교회에 묶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악마를 향해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던 그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마음의 눌림을 경험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그들을 위하여, 영혼을 위하여 기쁨으로 허비하고 자신까지도 허비할 수 있었다고 만들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고난의 증인으로서 아시아에 흩어진 교회들을 향하여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삶은 교회와 결코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부흥의 시대에 교회는 결코 자신의 지체를 보험회사에서 고객을 관리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관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가 자신을 그런 세속적인 방식으로 돌봐줘야 할 필요가 있으리만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고,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을 했고,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이 바로 교회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같은 죄인이 이 거룩한 교회의 한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 것을 한 없이 감격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아버지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이 치열하게 살아가며 때로는 고난과 박해를 받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만났을 때에 제일 먼저 어디로 달려옵니까? 남편이 승진했다는 소식, 아들이 군에서 무사히 돌아온다는 기별을 받았을 때, 사랑하는 딸이 하나님의 은혜로 입시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복음을 거부하던 시골의 부모님들이 예수를 믿고 기적처럼 구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이 기쁜 감격을 제일 먼저 누구와 나눕니까? 경건한 영적 삶을 이어가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아버지의 집에 달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쁜 일을 하나님께 고하며 주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에 자신을 묶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노래할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심령이 곤고할 때, 위기를 만났을 때, 자녀들이 부모인 우리의 마음대로 자라주지 않아 매를 들었지만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플 때, 화급을 다투는 결단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분별하며 내려야 할 때, 우리는 어디서 그 위로와 응답을 구합니까?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맛보고 새로운 용기를 얻습니다. 다른 곳이 아닌 그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는 자신의 곤고한 때를 위하여 눈물로 중보해 주는 믿음의 가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약할 때 내가 붙들어 주었던 것처럼 내가 약할 때 그들의 섬김을 받습니다. 기쁨과 설움도 함께 하며 한간의 초가를 낙원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작은 성자들을 보게 되는 것도 바로 우리의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식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우리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변함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저 형제들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인생의 길을 걷도록 결심을 하게 됩니다.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도 바로 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범죄와 허물로 인해 영적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나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 그렇게 상한 몸으로 쓰러져 있을 때 우리가 실려 오는 곳은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다시 우리 상처에 포도주를 부으시고 말씀의 기름으로 우리를 고쳐 한때는 쓰러졌으나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다윗 자신이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에 그는 이 위대한 시의 마지막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고백한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까? 그래서 이 말은 ‘내가 하나님 자신을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므로 내가 항상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누리며 당신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구체적으로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이 펼쳐질 한 장소를 주님이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교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느낍니다. 그 성도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예수의 생명을 나누면서 우리는 살아가게 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교회가 인간의 영혼이라면 보이는 이 교회는 그 인간의 영혼을 닮는 사랑의 육체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영혼을 가진 사람의 육체도 함께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포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회를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하고 언제든지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거기에 붙어있지만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리기를 마치 헬스클럽을 옮겨 다니는 것처럼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으로부터 찢어지고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몸에 끊임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그를 구해주실 때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붙어 그 교회를 충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거기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이뤘을 그 일들을 이루며 살라고 하나님이 교회에 남겨주신 것인데 그는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교회 없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벌써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쯤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전주에 있는 어느 기독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중년 남자가 병원에 와서 의사선생님과 뭔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신사 손에는 지방 신문이 들려 있었고 의사는 무엇인가 자꾸 거절하는 듯한 태도로 손을 내어저었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병원을 찾은 이 중년 신사는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집사님이었습니다. 열 댓명의 교인과 함께 예수님을 믿으며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너무 교회가 가난하니까 목회자의 생활을 책임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섬기던 목회자를 생활 하실 수 있는 도회지로 보내드리고 이 집사님이 본의 아니게 예배도 인도하고 목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그에게 늘 마음에 아픔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스팔트에서 콜타르를 종이에 먹여서 만든 루삠을 지붕에 얹은 가건물 상태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주일에 헌금이 얼마 몇 천원도 안 나오는 교회의 형편으로 예배당을 짓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품을 팔아서 푼푼히 돈을 모으고 틈틈이 개울에 모레를 져 날라다가 벽돌을 찍고 그래서 교인을 잘 설득해서 함께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블록으로 교회의 담을 쌓고 그 위에 슬레트 지붕을 얹어서 제법 초라하지만 아담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이제 여력이 생기면 교회 내부의 미장도 하고 그리고 잘 발라서 칠해서 완전한 교회당으로 만들 차례였습니다.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큰 태풍을 동반한 비바람이 불었고, 허름하게나마 건축되고 있던 교회당 건물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새벽에 나가보니 지붕은 바람에 날려 밭에 흉하게 쪼개진 채 나뒹굴고 있었고 벽을 때리며 쓰러지는 나무 때문에 쌓은 담벼락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물까지 들어와서 교회당은 논바닥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사님은 물먹은 채 기울어져버린 교회를 허물고 다시 텐트를 치고 이제 교인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이 분은 이상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면 벽을 돌아누운 채 밤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따뜻한 위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내가 만약에 눈이 한쪽이 없어도 나와 함께 살아줄 수 있겠소?” 영문을 모르는 체 눈만 깜빡거리던 아내 앞에 이 남편이 내민 것은 구겨진 지방 신문 한 장이었습니다. 이때는 워낙 옛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장기를 사고 팔수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가리키는 신문 광고란에는 ‘장기를 구함, 실명해 가는 환자에게 이식한 눈을 구합니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의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짓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내가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 간청하는 남편, 애걸하다 못해 절규처럼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결국은 몇 주간을 기다리다 아내의 허락을 받았고, 집사님은 그 길로 이 병원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의사의 보고를 받고 이 분과 자초지종을 이야기 나누던 원장님은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연신 눈물을 훔치면서 그 분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 교회 장로인데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일개 집사로서 어떻게 당신의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지을 생각을 합니까?”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예수 믿는 전 직원을 모아서 이 같은 감동적인 사실을 전해주고 즉석에서 모금을 했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다시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50만원이었는데 200만원이 모금이 되었답니다.
교회가 일제 시대에 큰 박해를 받았을 때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투옥 당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공산당에 항거하다가 투옥된 성도들의 옥중 서신 속에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그리워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담아 있습니다. 그들은 칠흑같이 잔인한 시련과 박해의 밤을 이전에 나누었던 성도들과의 교제, 고난을 견디고 승리한 신앙의 선배들과 만나게 될 천상 교회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겨내었던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고, 그 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지를 안 사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자기에게 직접 주어진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주신 사랑의 분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 경건했던 성도들은 자기의 영적인 가정인 교회를 먼저 정하고, 그리고 거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거처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교회가 큰 교회면 무슨 상관이 있고, 작은 교회면 어떻습니까? 그 목회자가 유명한 사람이면 어떻고, 무명한 사람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은 교회당을 오랜만에 방문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 혹은 가장 바쁜 중년 시절을 한 교회에서 보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했던 그 교회는 방문하는 우리에게 그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곳이 비록 예전에 알던 성도들은 모두 사라져버린 교회당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들어서서 예배 시간마다 우리들이 앉곤 하던 그 의자에 말없이 만져봅니다. 마치 조지 휫필드가 주님의 사랑이 식는 것 같을 때 자기가 회심했던 예배당을 찾아 그 의자에 입을 맞추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나 예배 시간이면 그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곤 했던 그 자리, 눈물로 감사하던 그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오늘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믿음으로 살아가 수 있도록 자기를 도와준 목회자와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의 보이지 않는 많은 섬김을 반추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지금 그 교회에 남아있지 않는 여러 지체들의 얼굴도 함께 떠올려 봅니다.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며 한 상에 둘러 먹고 마시며 기도하고 서로 기도해주며 섬기며 한 세월을 보냈던 사랑하는 지체들의 얼굴을 회상해 봅니다. 이미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성도들도 있고 남아있는 성도들과의 추억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비록 우리의 일생동안에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걸어왔지만 이 길이 우리 홀로 걸어온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소망도 하나님과 교회의 한 지체로서 살아가는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유아세례를 축하받던 아이들이 어느 덧 자라서 청년이 된 것을 봅니다. 우리들이 만났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나이가 되어가는 모습 속에서 살같이 빠른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그토록 긴 세월동안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에서 경험하며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교만과 아집 속에서 세상을 사랑하고 죄악된 길로 걸어갈 경향성을 가진 우리들의 속사람이 매 주일마다 예배 속에서 때로는 우리를 찢으시고 때로는 무너뜨리고 때로는 우리를 어루만지고 때로는 감싸시는 하나님의 그 큰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매일 매일 마음을 다하여 자신을 이처럼 돌보고 사랑하는 목회자와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를 위해서 자녀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이 죄악된 세상에서 수시로 맞닥뜨려야 하는 이 현실의 어려움을 놓고 우리는 계수의 몸의 분신인 것처럼 기도하고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그 마음으로 이 시대를 부여 앉고 하나님의 그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혀 예수를 믿을 리 없던 완악한 이웃들이 주님께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크고 작은 섬김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말씀을 선포하며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성도의 풍성한 삶을 갈망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며 교회를 섬기고 그러면서 우리들은 점점 늙어갑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별다른 무엇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바람처럼 속히 지나가는 신자의 일생은 이렇게 짧은 세월 동안 교회와 함께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며 섬기고 또 주님의 이름과 함께 모욕을 받고 주님의 이름과 함께 영광을 받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속히 미끄러지듯이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바로 정들었던 이 지상의 교회, 우리의 꿈과 사랑과 신앙고백을 묻었던 교회와 이별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이 같은 삶에 대해 지난 세기에 은혜 받았던 성도 파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설교하고 있는 저의 기억의 맨 끝은 네, 다섯 살 시절, 그리고 여섯 일곱 살 시절 유치원입니다. 선교사가 세운 어느 교회의 유치원에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들이 모두 이어지지는 않고 토막토막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는 기억들은 저들을 오랜 과거로 추억 여행을 떠나게 만들어 줍니다. 얼어붙은 눈 위에서 썰매를 타던 일도 생각이 나고, 물고기를 잡으러 도랑에서 뛰어다니던 철없던 때도 생각이 납니다.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하고 그 추운 겨울에 동네 형들과 함께 눈밭에서 연을 날리던 일도 아스라한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계집애와 유치원을 다녀오는 길에 판자로 세워진 유치원 담장에서 뜯은 이름 모를 잡초들을 쑥이라고 우기며 노란 유치원 가방에 담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때인데 이 설교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장면이 또렷이 다가옵니다. 마치 지난주에 혹은, 바로 몇 주일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말입니다. 잠깐 스치고 지나간 며칠 전의 일인 것 같은데 저는 이미 벌써 흰 머리가 돋아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처럼 느껴지는 그 기억이 50여 년 전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니 믿겨 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지나온 세월만 그렇게 빨리 흘러갔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월도 정말 빠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우리는 또 다시 오늘을 회상하며 살같이 빠른 광음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겉 사람은 나날이 후패하여 죽음의 기운에 삼키며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이러한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했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또 다른 시인이 노래했습니다.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또 다른 곳에서 시인이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의 위대한 시인이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그토록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알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이 세상의 영광만으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와 하나 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임종을 맞이한 사람은 죽음을 통해서라도 남아있는 교회의 후손들에게 감화를 끼칩니다. 마음을 바쳐 일생을 섬기던 교회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드리는 영결 예배로 성도들과 작별하는 고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 임종을 한 후에 경건한 성도들의 흐느낌 속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정들었던 교회를 그 관에 누워 방문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언제나 은혜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오늘날과 같은 영광스러운 믿음의 임종을 맞이하게 도와주었던 영혼의 아버지와 같은 목자의 손에 눈이 감겨집니다. 그의 집례로 이 땅에서 마지막 예배를 정들었던 성도들과 함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마지막 예배가 끝나고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기까지 잠시 뭍여야 할 매장지로 교회당을 떠날 때 사랑하는 성도들은 어떻게 그를 작별할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교인들은 장례 행렬을 좌우에 도열할 것이며 한 평생 믿음을 지키며 살아온 한 성도가 운구 되어 가는 동안 그들은 뺨 위에 흐르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도 저분처럼 하나님을 섬기다가 교회를 사랑하다가 가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땅 위의 성도들은 속절없이 흐느껴 울어도 하늘에서는 믿음을 따라 살아온 한 위대한 성도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가 들릴 것이며, 그를 사랑하시던 주님은 그의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 보좌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아벨과 함께 손잡고, 모세와 함께 어깨를 마주하며 사도들과 함께 웃으며 가장 최근에 소천한 교우들을 얼싸안은 채 기쁨으로 하늘나라에서 모든 교회식구들이 만나게 될 것을 기다리며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도 쉼 없이 기도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시로 우리의 마음을 자주 녹이던 이 시인 다윗과 함께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는 이제 이 유서 깊은 영광스러운 시편 23편 강해를 마무리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도의 본분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을 지극히 사랑하고, 그리고 자신의 몸처럼 돌보며 온 마음을 다해 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도록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이바지하며 살다가 여러분도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주님의 나라에서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 중 한 사람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23편에서 만난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