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
(2015년 주일오전설교 모음)
설교기간|2015년 2월 22일 - 4월 1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5년 4월 24일
목 차
1. 그 사랑에 응답하라(시 23:1) 2015.2.22 주일오전 1
2. 영적 침체와 염려(시 23:2) 2015.3.1 주일오전 13
3. 영혼의 회복(1)(시 23:3) 2015.3.8 주일오전 22
4. 영혼의 회복(2)(시 23:3) 2015.3.15 주일오전 31
5.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시 23:4) 2015.3.22 주일오전 40
6. 원수 앞에 차린 밥상(시 23:5) 2015.3.29 주일오전 49
7. 기름을 부어주심(시 23:5) 2015.4.12 주일오전 59
8.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시 23:6) 2015.4.19 65
시편23편 강해 1 (2015.2.22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2 (2015.3.1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3 (2015.3.8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4 (2015.3.15.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5 (2015.3.22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6 (2015.3.29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7 (2015.04.12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8 (2015.04.19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1) 2015. 02. 22 주일오전예배
< 그 사랑에 응답하라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시 23:1)
I. 본문해설
- 시편 23편의 저작 시기와 작시 배경
- 다윗의 생애와 23편의 문학적 구조
- 신앙에 있어 인격적 승복의 중요성
II. ‘여호와’와 목자이심
A.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의 대표적인 두 이름과 의미
- 이성적으로 불가해한 하나님 존재
- 당신 성품을 알리심으로써 교통함
- 우주 크기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큰 사랑
B. 나의 목자이심
- 인간을 '양'이라고 부르시는 이유
-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도록 부르심
- 인간의 탁월성은 하나님을 의존함
- 거룩함과 순종 요구는 인간성 회복
III. 우리를 인도하심
A. 인격으로써
- 양의 약점을 아는 목자가 양을 이끔
- 몰아가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 사랑은 필요를 알기에 획일화 아님
- "공부 못하는 아이 이해할 수 없어"
- 경고하나 노예적 굴종 원치 않으심
- "주일 범하고 관악산을 등산한 날"
- 인격적 부르심 이해와 공감의 응답
B. 사랑으로써
- 눅 15장 잃어버린 양의 비유의 교훈
- 인간 존재 자체가 가치 있음을 알라
- 당신의 형상을 자신처럼 사랑하심
- 신앙은 본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
- 인격적으로 부르는 하나님에 응답
IV. 적용과 결론
-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의미
- 상처뿐인 다윗의 불행한 인생여정
- 부, 아내, 자녀, 부하, 밧세바 불륜
- 쓰레기 같은 인생에서 구원해주심
- 인생 원래 그런 것 누구도 돕지 않음
- 그 사랑에 인격적 신앙으로 응답함
시편23편 강해 (2) 2015. 03. 01 주일오전예배
< 영적침체와 염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시 23:2)
I. 본문해설
- 하나님이 시인에게 목자 되신 근거
- 공급해 주시는 은혜와 인격적 설복
- 양의 필요와 육신적 필요를 이해함
II.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A. 푸른 초장에서
- 육신의 필요 알고 채우시는 하나님
- 전쟁고아 "내일은 무얼 먹나요?"
-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과 같은 인생
- 염려와 불안으로써 실존을 확인함
- "염려 뿌리는 마귀"
- "누이시고" 영육 안식 누리게 하심
- 하나님 안에만 참된 안식 있음 알라
B. 쉴만한 물가로
- me menuhot "움직이지 않는 물"
- 물을 두려워하는 양의 특성 배려함
- 획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인도함
- 필요를 미리 알고 인도하시는 주님
C. 인도하심
- 강제적 힘 아닌 인격적 감화로 하심
- 말씀으로 지성을 설복해 인도하심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목자되심을 인정하여라
- 인격적 승복있는 신앙생활을 하라
- 하나님의 공급에 담긴 사랑을 알라
- 나를 사랑하사 설복하시는 하나님
- 목자되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
시편23편 강해 (3) 2015. 03. 08 주일오전예배
< 영혼의 회복(1)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시 23:3上)
I. 본문해설
- 여호와가 목자이신 두 번째 이유임
- 영적회복 통해 인격적으로 경험함
II. 영혼의 회복
A. 인간 존재의 구성
- 인간 창조에서 발견하는 구성요소
- 육체와 영혼: 지상과 천상의 자원
- 육체와 자연질서 영혼과 영적질서
- 영혼의 생명과 인생을 살아가는 힘
B. 침체와 회개
- 시편 속의 세 이유: 무지, 고통, 죄
- 대책: 무지와 깨달음, 고통과 회복
- 죄에 대한 회개: 지성+감정+의지
- 영적생명과 삶의 사태들을 극복함
- 용서+사랑, 사랑을 받지 않을 용기
III. 적용과 결론
- 침체된 영혼으로 사는 인생의 힘듦
-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살펴 반성함
- 침체는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기회
시편23편 강해 (4) 2015. 03. 15 주일오전예배
< 영혼의 회복(2)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시 23:3上)
I. 본문해설
-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세 번째 이유가 회복임
- 은혜가 자기 소비 아닌 목적을 향해야 함
- 은혜 없이 지속 할 수 없는 신자의 소명의 삶
II. 영적 회복과 하나님의 계획
A. 의의 길로 인도하심
- magele zedeq “의의 궤적 속으로”
- zedeq의 뜻과 그 판단 기준인 율법
- 일상 속에서 의의 길을 걷는 생활임
- 내적 자질로부터 흘러나오는 삶임
- 불의한 세상 한복판을 가로 지르는 삶
- 의로운 삶은 핍박과 고통을 동반함
- 고로 하나님의 영적 은혜가 필요함
- 회복된 영혼은 의의 분투 속에서 보존
B.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이름의 신학
- 자연 사물은 이름이 본체를 지시함
- 하나님은 이름 외에 본체를 볼 수 없음
- 이름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여김
- 이름의 명에 드높임이 곧 그분의 영광
- 주 이름 높인 곳에 신적 경륜 성취됨
- 영적 회복은 주 영광 위한 새 출발임
III. 적용과 결론
- 자신의 영혼의 현 상태를 숙고하라
- 성경, 전기, 지신의 경험등과 비교하라
- 영혼의 회복을 위해 진지하게 애쓰라
- 먼저 말씀의 빛으로 자신을 보이라
- 간절한 기도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
- 회복시켜 주신 의도대로 순종하며 살라
시편23편 강해 (5) 2015. 03. 22 주일오전예배
<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I. 본문해설
- 네 번째 이유 절망 속에서 건지심임
- 시인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지남
- 양떼 이끌고 계곡 사이 지나는 목자
- 시련과 절망을 통과하게 하신 계획
II. 시련과 하나님의 계획
A.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 외적인 시련과 내적인 절망 암시함
- 사망: a. 영혼의 고갈 b. 환경의 위험
- 하나님의 도움을 잊고 사는 우리들
- 시련 속에서 하나님 선하심을 배움
- 인생 골짜기에서 학원수업을 받음
- 시인도 놓친 확신 (시 22:1∼2, 10:1)
- 두 외로움: 타락한 정서+거룩 정서
- 골짜기에서 흐려지는 분별력 조심
- 깊은 개울, 배꼽 보이며 "살려줘!"
B. 안위하시는 하나님
- 양떼들의 약함을 아는 목자의 심정
- 시련과 절망 속에 필요한 신적 위로
- 절망적 언어고집 심리⇒위로 요청
- 사망의 골짜기에서 마지막 위로자
- 상처를 능가한 하나님의 위로 있음
- a "지팡이" 하나님 인도+인격적임
- b "막대기" 용사이심+원수를 치심
- 악발이처럼 다툼이 위로주지 못함
-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위로의 근원
III. 적용과 결론
- 삶의 상황과 영혼의 상태 숙고하라
- 말씀으로 골짜기서 건지시는 주님
- 절망적 상황을 통해 자신을 대면함
- 하나님 만남으로써 자신을 찾게 됨
- 절망의 계곡에서 마른 뼈도 살리심
시편23편 강해 (6) 2015. 03. 29 주일오전예배
< 원수 앞에 차린 밥상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上)
I. 본문해설
- 네 번째 이유 더 넘치는 은혜 때문임
- 기쁨으로 가득찬 잔칫집의 문맥임
- 영혼의 빈잔과 영원에 대한 참 갈망
- 한손에 화투를 움켜쥐고 죽은 시신
- 벅찬 감격‥ a. 상 차려줌 b. 기름부음
II. 밥상을 차려주신 하나님
A. 성경과 “밥상”의 의미
- 동양문맥에서 밥 먹음은 한 가족임
-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만나경험
- 화목제사와 함께 음식 나눔의 의미
-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함께 먹으심
-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과 성찬
B. 밥상을 차리심
- "아라크"의 밥상을 차리신 하나님
- 식탁의 준비는 손님의 중요도 말함
-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과 사랑
- 주를 찾는 자를 후대하시는 하나님
- 고난 속에서 시인을 붙든 진리 말씀
- 영혼과 마음을 부요케한 주의 말씀
- 영혼의 곤고함을 말씀으로 채우심
C. 떡이신 그리스도
-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 6:35)
- 당신께 오는 자들 주리지 않게 하심
- 십자가에서 자신을 양식으로 주심
- 주를 믿고 그 생명에 참여하게 하심
- 단지 생명부지가 아닌 삶을 살아감
- 절망과 시련 속에서 빼앗기는 생명
- 하나님과 관계에서 생명 부어주심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생명 누림
- 시련 속에 주님의 인격적 관계 붙듦
- 말씀에 승복하는 삶 속에 생명 있음
- 우리의 생명위해 당신 자신을 주심
시편23편 강해 (7) 2015. 04. 12 주일오전예배
< 기름을 부어주심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下)
I. 본문해설
- 내 잔이 넘친 두 번째 이유: 기름 부으심
- 여호와를 목자로 받아들여 살 수 있었던 이유
II. 기름 부음의 의미
A. 구약의 삼직과 기름 부음
-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심
- 이를 위한 솥발 같은 세 직임: 왕, 선지자, 제사장
-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서로 다른 성령의 경륜
a. 구약의 성령: 사역을 위한 일시적 임함과 떠남
b. 신약의 성령: 그리스도와 연합 통해 내주하심
B. 성령 충만한 삶의 은혜
- 다윗은 세 차례 기름 부음을 경험하였음
a. 사무엘이 기름을 부음 (삼상 16:13)
b. 유다 사람들이 기름을 부음 (삼하 2:4)
c. 이스라엘 장로들이 기름을 부음 (삼하 5:3)
- 내가 세례를 받던 날의 성령의 체험
- 간절한 기도 속에 성령의 불을 체험함
- 순전한 사랑과 거룩함에 대한 갈망
- 반포대교에서 돈을 뿌리고 달아난 사람
- 생수를 맛 본 사람은 구정물을 먹지 않는다
- 누가 날더러 제왕이 되라고 한다면
III. 적용과 결론
- 당신은 누구십니까? 행복 하십니까?
- 참된 만족이신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라
- 성령 없이 참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 새로운 삶을 위한 힘의 근원이며 사랑의 원천이신 성령님
시편23편 강해 (8) 2015. 04. 19 주일오전예배
< 기름을 부어주심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6)
I. 본문해설
- 시편 23편의 마지막 구절
-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신자의 미래의 결단
- 확신과 미래의 삶의 방식의 고백
II.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A. 선하심
- 모든 피조물을 후히 대하시는 자비
- 악한 자들의 고통을 사하심의 증거
- 선이신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함
- 선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B. 인자하심
- Hesed의 하나님: 자격 없는 인간을 사랑하심
- 그 분의 박애로운 성품에 빚진 우리임
-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III. 여호와의 집에서 살다
A. 여호와의 집
- 성전이 지어지기 전 성막 시대였음
-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신앙을 생각함
- 국가적 위기와 개인적 설움을 주께 토하는 곳
-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누리는 곳
B. 신자의 어머니
- 카프리아누스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 자는”
- 교회와 떨어지지 않는 신자의 신앙
-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VI. 적용과 결론
시편23편 강해 1 (2015.2.22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1 (2015.2.22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2 (2015.3.1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3 (2015.3.8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4 (2015.3.15.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5 (2015.3.22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6 (2015.3.29 주일오전설교)
시편23편 강해 7 (2015.04.12 주일오전설교)
시편 23편 강해 8 (2015.04.19 주일오전설교)
그 사랑에 응답하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시는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고백의 언어로 쓴 시입니다. 이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토막은 1절입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목자라고 하는 선언이 나옵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 근거를 차례대로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은 6절로서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어떤 확신 속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될 것인지를 결단하고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II. ‘여호와’와 목자이심
A. 하나님의 이름
시인은 제일 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존함을 가리키는 여러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세 개가 있습니다.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단어와 ‘하나님’, ‘엘로힘’이라는 단어, ‘주님’으로 번역된 ‘아도나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도나이’는 하나님이 모든 이 세상의 만물들에 대해 주인이시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면, ‘엘로힘’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물론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존함은 하나님의 본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게시된 이름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만 제시된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이해하고 나면 이 시인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이 첫 번째 구절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보다 훨씬 더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름으로써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언약을 따라서 일생동안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돌보아 주셨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호와’라고 하는 분은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뒷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농담 속에서도 그 이름을 들먹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마는 원래 이 ‘여호와’라고 하는 이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부르지 못하던 존귀하고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 차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본명을 가르쳐 준 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그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크기와 부피, 무게와 면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물질에 속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들은 직접 관측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름다운 자연을 보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감동을 주는 것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찾을 때입니다. 그 사람들은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살다가 만날 수 없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건축과 예술,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를 통해서 우리들은 몇 백 년, 몇 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정신의 크기와 철학, 인생관, 세계관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위대한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그 존재에 있어서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배웁니다. 그 대표적인 적이 바로 우리들이 있는 이 우주입니다.
우주는 과학자들의 관측에 의하면 이 끝부터 저 끝까지가 약 150억 광년쯤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결국 관측을 통해서 가능한 볼 수 있는 우주의 끝이라고 하는 것이지 실제 끝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주의 끝에 있는 우주의 맨 끝에 있는 곳에서 빛이 150억년을 달려왔다 그러면 그보다 오랜 빛은 그 보다 오래전에 출발한 빛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크기가 150광년이라고 하는 것은 관측의 한계가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그 끝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위, 아래, 양쪽 끝에 그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지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학자들이 관측한 이 우주의 크기는 어느 정도 될까요? 150억 광년 되는 크기가 관측 범위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우주에는 약 1천억 개의 은하라는 별의 무리들이 있고, 우리는 그 1천억 개가 넘는 은하들 중의 하나인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는 바람개비 모양의 약간 타원형으로 된 별들의 집단인데 이 끝에서 저 끝에까지의 길이가 약 20만 광년 정도 되고, 횡으로 놓고 옆에서 보았을 때에 가장 얇은 두께가 약 900광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바람개비 모양의 원형으로 되어 있는 그 속에 약 2000억 개의 항성들이 있고, 태양은 그 2000억 개들의 항성들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 은하계의 중심으로부터 26000년 내지는 30000광년 떨어진 좌측 하단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이 8개 혹은 9개의 위성이 500원짜리 동전 안에 들어온다면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항성의 거리가 대구쯤 된다고 하니까 그 길이와 넓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밤하늘에 망원경이나 혹은 육안으로 볼 때 아주 크게 보이는 왕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별이 아니라 그렇게 천억 개 이상의 별들이 모여 있는 또 다른 은하계를 본 것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의 항성은 여러 개의 지구와 같은 위성을 거느리고 있고 그 위성들은 또 지구를 돌고 있는 달과 같은 위성의 또 다른 위성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하나이지만 태양계 안에 있는 행성과 위성의 수를 모두 합하면 약 260개 정도 의 별들이 태양을 어머니처럼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학자가 우리 은하계의 별들의 수를 4조 2천억 개 정도 된다고 계산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계산법에 의한 것입니다. 추측을 할 뿐이지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별들, 태양도 우리 은하의 중심이 아니라 그냥 그 속에 있는 약 2천억 개의 반짝이는 별들 중 하나일 뿐인데 약 4조 2천억 개가 되는 그 어마어마한 별들이 우주 공간에 그냥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무리를 지어 초속 230km로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220억년 후에는 안드로메다은하와 만나서 두 개가 춤추듯이 엮어져서 ‘밀코메다’라고 하는 새로운 은하가 형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렇게 4조 2천억 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별들의 집단, 그것도 우주 전체에 관측되고 있는 약 1천억 개의 은하중 하나에 불과한 그 속에서 지구라고 하는 먼지만큼도 안 되는 거기에 어느 한 구석에 태어나 세균처럼 붙어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저는 가글을 합니다. 그때마다 수억 마리의 균들이 죽어서 하수구로 쏟아집니다. 여러분이 두 손을 펴서 한번 박수를 힘차게 치면 한번 짝하는 박수에 약 700만 마리의 균이 죽는다고 하니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이 존재는 그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정말 세균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별들의 나이가 40억년에서 70억년씩 된다고 보면 약 70년 내지 80년을 살다 지나가는 인간은 인간의 입속에 있다가 가글과 함께 사라지는 균만도 못한 존재일지 모릅니다. 신앙은 바로 이렇게 자기 인간이 정말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탁월하신 분인지를 알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는데서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러한 묵상이 없이는 결코 인생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지혜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을 살아도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이 얼마나 드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매일의 현실에 코 박고 욕망에 따라 복닥거리며 살아가지만 정작 자기의 인생이 이 무한한 우주 앞에서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이즈 파스칼은 자신의 팡세라고 하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공간의 침묵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이 세계를 파멸하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수증기 한 방울이라도 충분하다”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높고 위대하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모두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떨 수는 있지만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할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는 당신의 위대한 존재의 크기를 보여주시고, 도덕의 세계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서로 품고 살아가는 모든 좋은 것들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닮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로 본받아 선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악하게 본받음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배반하고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이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부모를 통해, 형제를 통해, 사랑하는 이웃들을 통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높고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티끌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은 창조하셔서 당신을 사랑하듯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당신의 성품을 시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B. 나의 목자이심
시인은 그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이 한때는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인생을 살아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방법이 자기가 젊은 시절에 목동으로서 양떼들을 인도하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그 위대한 하나님과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오늘 자신의 삶 속에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이런 아름다운 삶 사이의 연결 고리가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고 나니까 그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같이 티끌만도 못한 인간의 삶 속에 내려오셔서 자신과 관계를 맺으시고 사랑하시고 또 그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런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기독교 신앙의 세계는 믿음이 없이는 처음부터 진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고 그 분을 온전한 마음으로 믿을 때에 그때 여러분 앞에 이 위대한 신앙의 세계는 펼쳐지는 것입니다.
III. 우리를 인도하심
A. 인격으로써
시인은 오늘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자이시라면 시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한 마리의 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실제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혹은 넓은 의미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 하고 많은 짐승과 동물들 중에서 하필이면 양이라고 부르시는 것일까요? 가만히 동물들을 관찰해 보면 어떠한 미물들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소정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를 가진 짐승부터 시작해서 사나운 이빨을 가진 짐승, 혹은 발톱, 혹은 뿔, 혹은 자기를 주위의 색깔에 따라서 변신 시키는 카멜레온과 같은 기술을 가지고서 자기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양은 그런 방어 기재가 전혀 없는 짐승입니다. 뿔이 있지만 상대방을 받아서 넘어뜨리기에 적합한 뿔이 아니라 왜 달렸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만두 모양의 뿔이 달려있습니다. 이빨은 채소를 씹기에 적합하도록 어금니가 발달했을 뿐이지 그것으로서 벌레 하나 물을 수 있는 이빨이 아닙니다. 눈은 지독한 근시안이어서 먼데 있는 사물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에는 길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은 양은 있지만 양이 스스로 자신의 집을 찾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물을 매우 무서워하는 짐승입니다. 이런 짐승에다가 우리 인간을 비교하신 것은 “보아라, 양이 창조될 때부터 인간 곁에서 살고 그렇게 돌봄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너희 인간은 모든 만물위에 탁월하게 창조되었지만 창조될 때부터 나 여호와를 의지하며 살라고 창조되었느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를 양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만물위에 뛰어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보다 힘 센 모든 피조물들을 누르고 심지어 자연까지 정복해 나가며 오늘날의 문명을 일구어 냈습니다. 그러나 인간처럼 힘들게 자기의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도 없습니다. 모든 짐승들은 먹고 누울 수 있고, 마실 수 있는 물만 있으면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은 인간은 모든 만물위에 탁월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 불행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야생하는 양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야생 양은 멸종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에 800마리밖에 없습니다. 오래전서부터 정부는 그 양을 번식시켜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 성과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들이 인간을 떠나서 살아갈 때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결국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안 해도 되는 어떤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참된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는 움직임입니다. 마치 젊은 시절에는 답답한 고향이 싫어서 객기로 부모를 떠나 먼 땅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았지만 나이가 들고 자식을 낳고 철이 들고 보니 고향이라는 뿌리가 그리워지고 부모 생각이 나서 그래서 고향을 찾고 돌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이 철이 들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결국은 독립적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은혜의 날개 그늘아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것이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 목자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또한 보여줍니다. 제일 먼저 이 목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체로서 대해주시고 그 인격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들이 말이나 소를 모는 것처럼 그렇게 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그런 협박이나 위협에 의해서 그렇게 몰아지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사용해서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관계를 그림처럼 그려 내셨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알고 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어느 여행가의 기록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약 1천여마리의 양들이 이쪽 풀밭에서 저쪽 풀밭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가운데는 도로가 나있었습니다. 양들이 도로를 건너서 이쪽 풀밭에서 저쪽으로 이동하는데 도중에 목동이 소변이 마려웠습니다. 그래서 멀리 뛰어가서 소변을 보고 있는 동안 양떼들은 이동을 멈추더랍니다. 운전수들은 경적을 울리고 라이트를 깜박거리며 양을 좀 비껴보려고 하였지만 양들은 요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목동이 돌아와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내니까 앞에 있는 양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 양무리들이 그 길을 비켜주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급할 때는 우리들을 빨리 인도하시고, 여유가 있을 때에는 천천히 인도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가시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몰아가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의 정죄 혹은 이것들을 사용하는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들을 인격으로써 설복하여 그 마음에 은혜로써 감화를 끼치심으로써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향해 살게끔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은 필요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만 다루실 분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중 가장 쓸모없는 사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치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인류인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쟁 속에서 생활하게 되고 부모로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그 경쟁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 경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사회의 부적응자, 그리고 접합하지 않은 사람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고 그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결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곳이 바로 교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적인 성숙도는 자기가 대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기존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식, 외모나 권력, 물질의 유무, 혹은 그의 학식의 크고 적음, 심지어는 인격의 고매함과 비참함에 얽매이지 않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존귀한 자인지 그렇게 바라보는 것, 거기에 그 한 사람의 영적인 성숙도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교회에 와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할 때 같이 교사를 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교수가 됐는데 이 친구는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 태어나면서부터 이제껏 모든 시험에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답니다. 운전면허까지. 그래서 시험에 떨어졌을 때 어떤 비참한 마음이 드는지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공부를 잘 해서 서울대를 갔지만 자기는 하루에 8시간씩 꼬박꼬박 자고 피곤한 날은 10시간을 잤답니다. 학원은 근처도 안 가봤답니다. 신문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정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형제가 예배실 저 뒤쪽에서 어느 여자 집사님과 심각한 대화를 나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가 불러서 “무슨 일이야?” 그랬더니 “무슨 일이겠어요. 그 아들 아무아무개가 하도 공부를 못하니까 집사님이 속이 상해서 저한테 하소연을 한 것입니다.” “그래?” “그런데 전도사님.” “왜?”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할까요?”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공부를 못할 수가 있겠어요.” 전 공부 못하는 게 너무 이해가 잘됐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을 학교 다녔는데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엄청난 지진아이고 열등생인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나라의 교육이 나한테 안 맞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안 믿는데 그래서 대학 과정에 가서 공부를 했더니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대학원 가서 공부했더니 더 재미있었습니다.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교회 개척하면서 혼자 공부 하니까 공부가 더 잘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제가 우리나라 교육의 희생양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해가 잘되는데”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잘할 수가 있겠느냐 그랬더니 아니 어떻게 못할 수가 있습니까, 책에 다 나오고 모르는 거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가르쳐 주는데. 내가 속으로 ‘잘났다’ 그러고는 두 달쯤 지난 다음에 굉장히 낙심한 표정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래?” 그랬더니 “아 전도사님 살맛 안 납니다.” “왜?” 공부만 하도 하니까 체력이 떨어져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테니스가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테니스장에 가서 테니스를 배우는데 한 이주일쯤 지났는데 코치가 막 신경질을 내면서 자기를 야단을 치더랍니다. “어쩜 그렇게 못하느냐. 내가 여기에서 7년을 가르쳤는데 당신처럼 못 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 책에 다 나오고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는데 그때 처음으로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이해하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획일적인 잣대를 놓고 우등생과 열등생,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예쁜 사람과 안 예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인격이 뛰어난 사람과 지저분한 인간으로 나누지만 누구도 우리가 사람이라는 그 사실 자체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일하게 우리가 그 존재 자체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존재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은 바로 이렇게 인격으로써 다가오셔서 우리를 존재 자체로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모든 계명이 자신도 살고 싶은 삶이 되도록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남이 강요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부모님의 성화 때문에, 아내의 강권함 때문에 억지로 나와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소용없습니다. 백날을 그렇게 다니셔도 저절로 신앙이 들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이제 그런 일은 그만 두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주일은 꼬박꼬박 지키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주일날 어디를 가야합니까?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죠? 만약에 안 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큰일난다. 두 번째, 괜찮다. 1번이예요? 2번이예요? 큰일 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지만 우리가 공포에 가득 찬 가운데 노예적으로 거기에 복종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고하시고 또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강권하시는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 인격적인 부르심에 대해서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 예배 시간이 다 되었을 때에 택시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리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미이라처럼 깁스를 한 사람이 목발을 짚고 내렸습니다. 예배 위원들이 깜짝 놀라서 “누구세요? 어떻게 이런 몸으로 예배에 나오셨어요?” 예배 위원들은 어마어마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내리면서 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몰라보시는데 저 박 아무개 자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다쳤어요?” “간증시간에 얘기할게요.” 그러고 예배에 들어갔습니다. 이 자매는 간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가려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주일날은 유난히 피로가 밀려와서 11시 예배인데 10시 30분까지 자다가 자명종 한 번 더 누르는 바람에 눈 뜨니까 11시 10분전이었습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화장도 못한 체 성경 찬송을 들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야, 너 왜 안 나와?” “어딜 나가?”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우리 오늘 등산가기로 했잖아 관악산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한두 달 전에 동창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답했습니다. “안 돼. 나 오늘 교회 가야돼” “야, 새털같이 많은 날 왜 하필이면 우리하고 약속한 날 교회를 가냐? 다른 날 가고 오늘은 놀러가자.” “안 돼. 가야돼.” “왜?” “주일날은 교회에 가야 된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놀러가자” “안 돼” “야, 그러면 너 저녁 예배 없냐?” 그러니까 “있지” “너 저녁 예배 나가냐?” “아니” “그럼 됐네. 우리하고 놀고 너는 저녁 때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면 되잖아.” “안 돼. 그래도 낮 예배에 가야지.” “너네 하나님 정말 이상하다. 낮에는 오시고 밤에는 안 오시냐? 어쨌든 빨리나와. 이 기집애야. 너 오늘 안 나오면 다시 안 본다.” 딸각 끊었습니다. 순간 생각을 했습니다. 늦은 시간 지각을 했지만 교회로 달려가서 대머리 벗어진 목사님의 지루한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친구들과 자연의 공기를 마시면서 봄날에 등산을 할 것인가, 그러다가 그는 둘 다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방 밑에다가 성경 찬송을 넣고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에 예배를 드려야지 그러고는 관악산에 올라갔습니다. 중턱 쯤 올라가니까 너무 좋습니다. 새들이 노래하고 알록달록한 등산객들이 시냇물 소리가 흐르는 계곡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평평한 곳을 찾아 앉아서 이제 도시락을 먹기로 했는데 한참 올라왔더니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물 좀 달라고 그랬더니 얘들이 물은 없고 음료수만 있다고 합니다. “나도 음료수 하나 줘.” 그랬더니 맥주를 주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 말고 나는 교회 다니니까 음료수로 줘.” 그랬더니 거기 모인 여덟 명의 친구들이 다수결로 해서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라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먹었더니 세월은 많이 지났지만 입맛은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알싸한 맛이 너무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도시락을 먹고 이 얘기, 저 얘기, 지난 얘기를 하면서 오후 내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내려올 때쯤 보니까 자기 앞에 빈 깡통이 아홉 개가 쌓여 있었습니다. 취기가 도는 가운데 친구들과 함께 농담을 하면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다가 그만 바나나 껍질을 밟는 바람에 몸이 허공으로 붕 떴고, 그리고 계단을 수없이 굴렀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 자기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의사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들렸습니다. “야, 이 여자 600만 불의 아가씨가 되겠는데 어쩜 이렇게 아작이 났을까? 안 부러진 데가 없구만.” 그러고 나와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저는 이번 사건을 통해 정말 깊이 깨달았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저처럼 됩니다. 꼭 주일을 지키세요.” 여기저기서 아멘 소리가 튀어 나오고 옆에 있는 한 교인은 아내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습니다. “그 봐 여보. 졸더라도 주일날은 교회에 와야 해.” 이게 복음일까요?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월요일은 교회가 엄청나게 바빠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날 결석한 사람이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불순종하고 아주 명백하게 주님을 거스르며 사는데도 하나님은 내버려 두십니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도덕심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우리를 노예와 같이 그렇게 비굴하게 굴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깨닫고 승복함으로써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이렇게 인격으로써 우리를 설복하여 당신께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정말 신앙을 갖고 싶으시다면 인격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하기 위에서는 듣고 말하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전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설복을 받게 되고 또,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고통과 시련들을 주님이 이해해 주시는 것 같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분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으면서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의뢰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인생 전체를 맡기며 그 분의 인도를 따라 사는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B. 사랑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또 하나의 사실을 목자라는 말이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으로써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목동이 집에 돌아와 양들을 우리에 넣고 헤아려 보니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그 한 마리를 목자가 찾아 나설 때 그 양을 팔면 얼마쯤 될지, 잡아서 가죽은 얼마고, 고기는 얼마가 될지를 계산했기 때문에 그 양을 찾아 나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목자는 그렇게 가다가 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어두운 길에 넘어져 다리가 삐기라도 하면 양 한 마디 값보다 더 큰 돈으로 자신을 치료해야 될 지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 목자의 마음을 잃은 양 찾지 않을 수 없도록 움직였던 것은 양이 얼마인지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 그렇게 어디선가 목자를 잃어버리고 슬피 울며 고통을 받고 있을 그 양의 불쌍한 처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랑의 성품이 그 목자로 하여금 양을 찾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러분이 살아온 삶이 하나님 섬기고 영광 돌리는 것도 있고, 하나님 속 썩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픔을 주고, 주님의 성령을 근심케 해 드리고 그런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대차대조표를 만든다면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반드시 이익이 되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손해와 이익에 대한 상관이 없이 끊임없이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존재, 그 자체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마구 자신을 굴리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연이은 명절 연휴에 작은 한 사건에 대한 뉴스가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어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아이가 발견되었습니다. 아주 갓난아이는 아니고 제가 이렇게 보니까 그저 한 8개월에서 10개월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습니다. 어느 부모가 버리고 간 것입니다. 아파트 주민 하나가 그 아이를 보니까 언청이였습니다. 아마 가난한 집 부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달을 길렀는데 언청이를 보면서 낙심했을 것이고, 그 아이를 의과적인 치료를 통해서 정상 아이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버려졌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그 아이를 데려다가 십시일반으로 돌아가면서 아이를 돌봐주어 기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주민들이 돈을 모아서 치료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병원도 그 사연을 듣고 상당히 많이 헌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수술이 끝나고 나니까 아이의 이 모습이 정상인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수술은 한번 가지고 안 되고 세 번 , 네 번, 다섯 번까지 수술을 하면서 이제 정상인으로 고쳐지는 건데 첫 번째 수술을 잘 끝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자, 이 아이는 태어나서 엄마 한 사람밖에 모르는데 그 엄마가 이 아이를 버렸습니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표현에 의하면 엄마는 이 세상에서 첫 번째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자신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면에서는 상처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고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하면 ‘야, 정말 놀라운 일이다.’ 감격하고 상처를 주거나 이해를 못하고 자신을 버리거나 배신하면 그게 마땅히 늘 일어나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생각을 하고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엄마처럼 가난하고 아이가 언청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아이를 버리고 나면 자신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완전한 사랑은 바로 우리의 어떤 장점 때문에 시작되는 사랑이 아니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품 안에 있는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당신의 형상을 가장 빼어나게 닮은 우리 인간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에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목자가 결국 그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는 아마 저녁때였을 것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여보게. 동네 사람들” 사람들이 전부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것입니다. “왜?” “저녁들 하셨는가?” “아니 아직 못했는데.” “좀 있다 우리 집으로 모두 모여,” “왜?”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일어났어.” “그게 뭔데? 왜 갑자기 좋은 일이야?”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양을 다시 찾았거든. 집에 도착하자마자 잔치를 준비할거야. 내려와서 우리 모두 배불리 먹고 즐기고 기뻐합시다.” 양 한 마리가 몇 푼어치나 된다고 그래서 한 12~3년 전에 호주에 갔을 때 하도 궁금해서 양 한 마리가 얼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그 당시에 200불이라고 했습니다. 양 한 마리에 16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잔치를 하면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나오지 않겠어요? 설마 그 양을 잡아 준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 아닙니까? 너무 기쁘니까 잡아먹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일생을 살아왔어도 내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던 삶이, 하나님께 준 이익이 주님을 가슴 아프게 하고 주님을 힘들게 만들었던 단점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고 그리고 이렇게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면서도 일이 나에게 딱 맞는 일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목회는 언제나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이고 설교는 매일 하러 올라와도 언제나 낯선 이국의 언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는 혹시 주님을 믿은 것을 후회하는 때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선택한 당신의 구원을 한 번도 후회함이 없으십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불순종하고 하나님 거스르며 살지만 주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우리 자신에게서 깨어나서 하나님 안에 있었던 참된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렇게 인격적으로 부르시는 주님 앞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살아온 모든 날들이 이렇게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에 덕을 입은 삶이었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회고해 보면 모질게 하나님을 대적했던 우리의 패역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처럼 우리를 안고 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조였습니다.
시편 23편 강해 2 (2015.3.1 주일오전설교)
오늘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더라면 나는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에 뛰어난 신앙의 인물이요, 위대한 시인이요 정치가요, 군인이었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한 인간 다윗으로서는 상처뿐인 인생을 살아온 불행한 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편애 속에서 아버지께 사랑을 받지 못한 소외된 아들이었고, 형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던 외로운 아이였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지만 그 아내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에 대해 전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부부로서의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친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못 받았으니 장인으로부터 사랑을 기대했을 텐데 그는 미치광이처럼 자기를 죽이면 딸이 과부가 되는데도 자객을 풀어 집요하게 목숨을 노렸습니다. 많은 자녀들이 있었지만 그 중 어느 자식도 자기의 신앙은 물려받지 않고 불신앙적인 면만을 물려받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에 놀랍게도 그 강간범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놈이었습니다. 반역이 일어나 황망하게 요단강 건너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반역의 괴수는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일생동안 함께 고생하며 피붙이처럼 함께 나라를 일구었던 부하들이 무엇 때문인지 자신에게 등을 돌렸고 자기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결국은 반란이 토벌되었다는 기쁜 소식 속에서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사랑하는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과 함께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지할 것 없는 상처로 얼룩진 인생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정말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어둠과 고통 속에서 보내고 결국은 하나님의 용서를 얻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그렇지만 이 사랑은 그 어마어마한 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 전체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에게서 이 위대한 승리의 고백이 가능했던 것은 이 세상의 환경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도 아버지가 용서를 빌었다는 내용도 없고 그렇게 자기를 버린 아내가 돌아와 자기를 뜨겁게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불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자녀들이 깊이 회심하고 다윗을 기쁘게 한 신앙생활로 인생을 살았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상처는 상처로 남겨둔 채 “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생에서 그의 생애 전체는 상처와 배신, 고통으로 얼룩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한 번에 이 모든 것들을 보상해 주었습니다. 그가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그 모든 배신과 상처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아는 계기가 되었고, 인생 앞에서 주님께 피할 때마다 그 날개 그늘 아래서 베풀어 주신 비밀스러운 은혜는 그 모든 슬픔을 능히 이기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인생의 수많은 사태들을 만나면서 인생에 기대를 거는 대신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뼈저린 언어로 고백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시련과 고통을 어찌 피할 수가 있겠으며 그런 쓴 물을 머금는 고통이 없다면 왜 우리의 인생이 고달픈 길이라고 했겠습니까? 신앙은 이런 인생의 근본적인 고통과 시련들을 완전히 사라지게 해서 그래서 우리를 황금 길로 인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끊임없이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나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거나 신뢰했던 사람들로부터 받는 뼈아픈 배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서 겪는 그 뼈아픈 실망 같은 것들을 그대로 경험하면서 삽니다. 예수 믿어도 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배반하는 사람이 있고, 정말 선의로 대했는데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낙심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약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안 될 거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뭔가 하나 잘됐을 때 감격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내 앞에 삶이 어떻게 내 뜻대로 전개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를 사랑하신 그 분을 의지하며 능히 이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삶의 불행한 사태들이 불행할지라도 그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때문에 결국 내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 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고독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고독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외톨이인지를 배우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우리의 인생에 어떻게 희망이 되는지를 공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인생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처럼 여겨졌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심지어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도 꼭 필요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그는 나에게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사용해서 내 인생을 바꾸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목자로서 여러분을 사랑하시지만 여러분이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한 주님을 믿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에,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짓되고 형식적인 신앙의 세계를 탈출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인격적인 사랑에 응답하는 진실한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이, 인격적인 사랑의 힘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격적인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영적침체와 염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시인은 2절부터 5절까지 어째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는지를 차례대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보호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분을 자신의 인생의 목자로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A. 푸른 초장에서
오늘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게 되었던 가장 초보적인 신앙의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제일 먼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말합니다. 푸른 풀밭이 우리들에게는 놀이터나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가 될 수 있겠지만 양떼들에게는 그 자체가 식탁이고 도시락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다윗은 어린 시절 양떼를 돌보았고 그 속에서 양떼를 어떻게 먹이고, 또 돌보고 지켜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양떼들을 가만히 보면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어 먹거나 아니면 자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저 하루 종일 풀을 뜯어서 먹는 것이 양떼의 일입니다. 양떼는 아무 생각 없이 이 풀밭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이 풀밭에서 꼴을 다 먹고 나면 자신의 양떼를 어디로 인도해야 될 지를 미리 생각합니다.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동안 선한 목자는 동산에 올라 사면을 두루 살피며 이 양떼들을 데리고 가기에 좋을 그 다음 풀밭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떼들은 미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는 양들인 자신들의 필요를 가장 잘 알고 있고 사랑으로 그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염려와 결별하지 못한 체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나의 이 염려와 걱정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모자라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자란 것들이 다 채워지고 나면 근심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그런 생각은 근심이 많은 부자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낮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염려하고 근심하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원인은 자유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자 꿈꾸면 꿈꿀수록 인간은 무시무시한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단한 자신의 모든 영혼의 방황을 끝내고 주님께로 회심한 후에 자신의 경험을 고백록 첫 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품에 안기기까지는 나의 마음은 쉼이 없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불안과 염려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미국의 어느 짓궂은 사회 심리학자가 미국의 저명한 인사 20명에게 전보를 보냈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선생님 모든 것이 탄로 났습니다. 빨리 피하십시오. 선생님을 염려하는 사람으로부터” 24시간 안에 20명 중 8명이 미국을 떠나 출국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안과 염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오늘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시인은 아주 고차원적인 염려와 근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양떼나 치는 아주 가난한 목동이었고, 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기름 부음을 받고 나서는 더더욱 더 고통에 넘치는 연단의 과정을 지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고 놀라우신 섭리 속에서 이 사람을 그렇게 연단하심으로써 앞으로 한 나라를 통치해 갈 수 있는 인격과 심성을 갖추게끔 만드셨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다음날 황금빛 카페트가 깔려있는 왕위로 직행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시간동안 연단을 받으면서 그는 왕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훈련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훈련의 과정 속에서 그가 받았던 중요한 연단 중 하나는 가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사울이 풀어놓은 자객에 쫓겨 끊임없는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였고, 그리하여 급기야는 굶주린 나머지 제사장 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까지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에게 먹고, 입고, 마실 필요한 것들을 은혜로서 공급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이 현재적으로 느끼고 있는 모든 불안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미래의 불안에서 오는 근심과 염려는 역설적으로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충만히 누리면서 살지 못하는 신앙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내가 염려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알고 계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마음, 이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6.25때 미군들이 많은 우리나라의 고아들을 미국으로 입양 시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여러 명의 고아들이 미군들에게 이끌려 군부대로 가게 되었고, 때가 쫄쫄 흐르는 아이들을 따뜻한 물에 깨끗이 씻기고 구제품으로 가져온 깨끗한 옷을 입히고 맛난 저녁을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안전한 곳에서 충분히 음식을 먹고 아이들은 편안한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잠을 자기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군 병사가 찬송도 불러주고 주기도문도 외워 주었지만 아이들은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통역을 세워서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너희 왜 그렇게 잠을 못자냐 그랬더니 그 중의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우리 내일은 무엇을 먹죠?” 전쟁터에서 늘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에 오늘은 모든 먹을 것들이 해결되었지만 내일 또 굶주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배부른 이 아이들을 잠들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 병사는 급히 연락을 해서 아이들에게 다음날 먹을 빵을 미리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빵을 품에 안고서야 새근새근 잠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염려와 결별하지 못하고 사는 인간의 끊임없는 염려의 성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현재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끓이면서 가슴이 아프도록 염려하는 어떤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절한 기도 제목이 되기만 하면 기도를 해도 염려와 근심은 사라집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도 속에서 경험하면서 그 인격적인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든지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기만 하면 나빠 보이는 현재의 일을 통해서도 미래에 선으로 바꾸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염려, 피를 말리는 근심과 사람의 마음속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그 모든 고통스러운 걱정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부실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몸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때에도 있었고 가장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조차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오직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근심과 염려 이런 것들과 결별하지 못한 체 영혼의 힘을 잃어버리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과 그리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모든 미래를 향한 오늘의 염려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때도 평안함을 누리고 하나님 사랑하며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충분히 느끼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주리던 때에는 공급해주시는 작은 떡 한 덩어리, 그리고 적은 액수의 돈 하나에도 가슴 저려하며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살았고, 그래서 식탁 앞에서의 기도가 긴 감사의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가난하고 궁핍할 때만큼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오히려 더 많은 욕망 때문에 염려와 근심을 사서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안에서 부족한 것이 없사옵니다.’라는 이 고백이 모자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주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많은 물질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그러나 결국 그 많은 물질과 그리고 소중한 하나님의 자원들은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되지 못하고 염려와 근심 속에서 무질서하게 낭비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베풀어 주시는 많은 은혜는 하나님을 위해 실제적으로 살게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우리의 마음속에 어두운 염려와 근심들의 그 불길을 끄느라고 거의 소모되어 버려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그 은혜가 사용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그런 종류의 허접한 삶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희생하셨을까요?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을 알고 이번에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해 주신 그 은혜와 은총 속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에게 자기의 아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꿈을 꾸었는데 커다란 망태를 등에 지고 끊임없이 뭔가를 주우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앞에는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끊임없이 검은 천 조각을 던지고 그것을 끊임없이 자신의 망태에 담는 동안에 등에 맨 그 망태가 얼마나 무거운지 거기에 깔려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지경이 되어서 숨이 넘어가는데도 오른손으로 집은 집게를 가지고 끊임없이 그 검은 천을 주워서 자기 망태에 담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지 말라고 속삭이고 그래서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시는 것,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온 마음을 썩여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의 욕망을 한껏 부풀어 오르게 만들어서 주님이 모든 것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커다란 결핍과 슬픔 속에 사는 처량한 인간인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비성경적인 연민에 빠지게 하는 것이 마귀의 계교입니다. 종종 근심과 염려로 한숨을 쉬고 마음 힘들어하던 지체들을 심방할 때마다 저는 가끔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얼 그렇게 근심 하냐? 당신에게 없는 게 무어냐? 모든 게 있지 않느냐?’ ‘목사님, 제가 뭐가 있습니까?’ ‘신앙이 있지, 교회가 있지, 네 영혼을 돌보아주는 목자들이 있지, 너를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지, 경제적으로 좀 궁핍하고 하는 일이 뜻대로 안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신앙이 그대에게 있지 않느냐. 그러면 성경을 봐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되고 평탄한 길만을 걸어갔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이 소중하게 사용하시는 사람일수록 남들이 걷지 않는 고통의 길을, 남들이 걷지 않는 시련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전도사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제가 첫 번째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 아주 유별난 목사님 밑에서 연단을 많이 받았는데 성도들은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지식이 풍부하고 그런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사랑이 많았습니다. 어찌어찌한 연유로 교회에 들어가서 사찰처럼 생활을 하면서 전도사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3개월 안에 사찰을 구할 테니 잠깐만 들어가서 교회를 봐주면 안 되겠니?” 그렇게 하시고 석 달이 3년이 지나가도 사찰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너무 좋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찰 따로 월급을 안 주어도 되고, 집사가 교회에 있는 것보다는 전도사가 있는 게 마음 든든하지 하니까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창세기를 새벽시간에 설교하면서 매일 한 장씩 설교를 하셨는데 석 달 후에 구해준다고 그러면 창세기가 끝나기 전에 사찰이 와야 하는데 예레미야 애가 할 때까지도 오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거기에서 참 많은 눈물을 흘렸고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물론 목사님은 그런 것을 의도하면서 저에게 연단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림이 많이 있지만 이런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형으로 말하자면 여기가 본당이고 제가 사랑부실 정도 되는 쯤에 살았습니다. 늦게까지 새벽기도를 하고 그리고 이제 사택으로 들어가면 그저 창호지 하나밖에 없는 그리고 바로 교회 마당인 그런 곳에서 살았습니다. 비가 오면 그릇을 9개나 받쳐놓아야만 되는 곳이었고, 그리고 겨울이면 머리맡에 떠 놓은 물이 돌덩이처럼 얼어버리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특히 금요일 철야 기도를 하고 그리고 새벽 기도를 한 다음에 바로 들어와서 잡니다. 그리고 이렇게 문을 열고 아침에 나가보면 눈이 하얗게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신발 자국이 나 있습니다. 왔다가 간 흔적이 나 있고 그리고 문을 열어서 보면 댓돌 위에 까만 비닐봉지에 싸인 두부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콩나물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생선도 한두 마리 갖다 놓고, 어떤 때는 김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돼지고기도 있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나는 누가 그것을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참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항상 내가 이렇게 성도들이 주는 거나 받아먹고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들풀을 입히시는 것처럼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래서 결핍 속에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항상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핍한 상태 속에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제나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생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매순간마다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시인은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혼과 육체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 그런 깊은 신앙심이 있었더라면 86세 먹은 형과 형수를 유산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결하여 인생을 마치는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탐욕과 거침없는 그런 욕망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푸른 풀밭도 없고 자신의 고단한 영혼과 육체가 뉘여서 쉼을 얻는 안식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목자 되신 주님이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이시지 않느냐. 하나님이 무엇을 아끼시겠느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 주셨으니 다른 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위대한 로마서 8장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무리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스러웠던 때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는지 한 끼의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을 앞에 놓고 얼마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긴 기도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인격적인 신앙으로, 그 감사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쉴만한 물가로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이고 왜 이 새 번역에서 이것이 고쳐지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쉴만한 물가는 ‘메 메누호트’라는 단어입니다. ‘메’는 물이고 ‘메누호트’는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그런 뜻입니다. ‘누후’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온 분사인데 이것은 노아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움직임이 없는 평정한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짐승들이 대부분이 물과 친숙합니다. 옛날에 한 4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 나무가 없었습니다. 온 국토가 모두 민둥산이었습니다. 아주 높은 산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민둥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를 잘라다가 불을 때고 연료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나라의 산이라도 허물어서 하다못해 감자라도 심어서 먹고 살아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게 비가 쏟아지면 산이 물을 저장하지 못하고 모두 쏟아 내리는데 토사와 함께 쓸어 내려서 삽시간에 마을이 쓸려 내려가는 홍수를 겪었습니다. 지금도 어렸을 때 기억이 납니다. 뚝방에 높이 올라 큰 개울이 흘러가는 물을 보면 정말 무섭게 흘러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물에 짐승들이, 가축들이 함께 떠내려 올 때가 많았습니다. 소는 헤엄 잘 칩니다. 돼지는 여러분 무겁기 때문에 가라앉을 것 같지만 잘 헤엄칩니다. 소리를 계속 지르면서 떠내려갑니다. 개는 개헤엄도 있다시피 잘 칩니다. 고양이도 제법 수영을 합니다. 닭도 물에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오리는 물 만나면 제 세상입니다. 염소 빠진 것도 봤는데 그렇게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지 않습니다. 상반신이 뒤에 다 뜹니다. 떠내려갑니다. 계속 떠내려가다가 지치니까 빠져 죽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처음부터 물을 두려워하는 짐승입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길이의 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털 사이에 물이 베이면 그 중력에 이끌려서 물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이 양은 물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목이 말라도 흘러가는 물은 마시지를 못합니다. 자작자작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착한 목자들은 양이 풀을 뜯고 있는 사이에 돌멩이나 큰 풀뿌리 같은 것들을 캐어서 둑을 싸고, 댐을 쌓아서 자작자작하게 흐르던 물들이 그 댐에 막혀서 고여서 흐름이 없는 정지된 상태가 되게 하는데 그 정지된 물의 상태를 ‘메 메누호트’라고 히브리말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지만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모난 우리들을 끊임없이 다듬어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지문만큼이나 서로서로가 다른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지만 이 사람에게는 이런 방법으로, 저 사람에게는 저런 방법으로, 이 사람에게는 기적을 보여주셔서, 저 사람에게는 끔찍한 징계를 통해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잔잔한 인격적인 설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은 그 하나님의 깊이와 사랑의 넓이를 알고 그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스스로 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획일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고 우리 각자, 각자의 본성과 취향, 그리고 우리의 정신과 능력의 한계 같은 것들을 깊이 이해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서른네 살에 제가 신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가니까 제일 젊다고 1학년 지도 교수를 맡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서 보니까 이것은 신학교가 아니라 신학교라고 말하기보다는 신앙적으로 방황하는 애들을 모아놓은 학교입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되려고 깊은 신앙 속에서 들어온 아이들도 있지만 이과 저과 지망을 해서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신학과로 오는 애들도 상당수였습니다. 1학년 때보니까 애들이 개판입니다. 뒷골목에서 싸우다가 경찰서 불려가는 애들, 술집에 드나들다 경찰서에 구류되었다고 연락이 오는 애들, 학교 뒤에서 누가 맞았다고 투서하는 애들,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돌보면서 경험을 한 것입니다. 때는 처음 교수가 되었으니까 젊었고 패기도 넘치고 자신감도 있고 그리고 어쨌든 뭐가 올바르지 않는 것을 보면 못 참는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리포트를 냅니다. 많은 클래스는 한 400명씩 제 강의를 수강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리포트를 냈으면 요즘 같았으면 그냥 채점해서 끝냈을 텐데 그 400장을 연구실에다가 차례대로 펴 놓고 조교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누가 누구 것을 베꼈는지를 다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 커다란 게시판에다가 방을 붙였습니다. ‘몇 번은 몇 번, 몇 번은 몇 번과 레포트가 같은데 왜 그런지 와서 해명하지 않으면 둘 다 낙제다.’ 학생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심지어는 똑같은 리포트인데 한 사람은 필기체로 내고 한 사람은 샘물체로 냈습니다. 그렇게 옵니다. 와서 딱 문을 열고 들어오면 대부분은 아는 학생입니다. 껄렁껄렁한 녀석입니다. 걔네들은 초장에 기를 확 꺾어 놓지 않으면 지도가 안 됩니다.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리포트를 냅다 얼굴에다가 집어 던지면서 막 퍼부어야 됩니다. “나쁜 놈 말이지. 네가 그러고도 신학생이냐고. 남의 것이나 다 베껴 쓰고 말이지. 나는 너 같은 녀석하고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너 신학교 가도 된다고 도장 찍어준 네 목사님 전화번호 대라”고 그러고 이제 내가 당회에다가 연락할 거라고 그러면 이제 실컷 혼나고 그러고 이제 다시 리포트를 내라고 하고 나갑니다. 그 다음 들어오는 학생이 있습니다. 얘는 굉장히 얌전한 애입니다. 그런데 게을러서 리포트 낼 시간이 다가오니까 친구 것을 다 베껴서 낸 것입니다. 이 아이는 그 따위로 하려면 집어치워 그러면 얘는 내려가다 바로 자퇴할 아이입니다. 들어옵니다. 그래서 앉습니다. ‘여기 앉아라.’ ‘네’ 물어보는 것입니다. ‘차 한 잔 마실래?’ ‘아, 괜찮습니다.’ ‘녹차, 커피, 주스, 생수 있는데 뭘 줄까?’ ‘괜찮습니다.’ ‘그래도 한 잔 마셔라’ 그러고 줍니다. 그리고 숨을 고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래 요즘도 권사님이 기도 많이 하시냐?’ 어머니에 대해 묻습니다. ‘네 아내는 네 학비 댄다고 인쇄소 다닌다고 했는데 아기 낳을 때가 됐지?’ ‘네’ ‘요즘도 학과 끝나면 아파트에서 세차 하니?’ ‘네’ ‘네 아내나 엄마가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너 정말 착하고 훌륭한 하나님의 종 되라고 그러잖아.’ 그러면 눈물을 주르르 흘립니다. 그러면 충분히 교육이 된 것입니다. ‘가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3일 안에 얼른 다시 써서 가져오너라. 점수 줄 테니까’
사람도 사람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혼내고 야단치고 어떤 사람은 타이르고 이렇게 하면서 사람을 인도하는데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마음에 깊은 곳에 영혼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가 누구이신지를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과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심으로써 주님의 그 사랑을 알고 인격적으로 그 분께 승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선하신 손길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해 오시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결핍 속에 시달릴 때도 우리는 하루 속히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의 전부이지만 하나님은 그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가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 가난 속에서 교만을 꺾고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주님을 의지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 줄을 아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23편 강해 3 (2015.3.8 주일오전설교)
C. 인도하심
마지막으로 시인은 주님이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강제적인 힘이나 폭력, 완력, 이런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판에 의한 무서운 경고, 이런 것들에 의해서 우리를 노예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조잡한 인격 속에 우리의 부족함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내가 나를 염려하며 사는 것보다는 나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고백을 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과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시고 주님의 마음에 있는 그 말씀으로 우리를 설득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껏 살아온 날들이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배고프고 굶주리고 고통 받던 가난한 시절에서 이만큼 살 수 있을 때까지 목자로서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오셨고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오셨던 것입니다.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제, 억압, 그리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통해서 신앙이 강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껏 그런 인생의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굽이굽이 지나면서도 주님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도록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염려하고 안타까워하는 많은 세상적인 염려들도 사실 욕망을 버리고 나면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은 것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공급에 담긴 목자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설복시키셔서 주님을 향해 살게 하시는 그 은혜를 인격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와 사랑의 연합 속에서 미래의 모든 염려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영혼의 회복(1)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上)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이신 근거를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리고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렇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이 3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고백한 대목입니다. 이 대목은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당신이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인의 영혼도 언젠가는 생명을 잃고 죽은 것과 같은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더욱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한 마리의 양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II. 영혼의 회복
A. 인간 존재의 구성
여기에서 시인이 얘기하는 것은 영혼의 회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침체 가운데 있었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그 생명과 은혜를 얻게 된 인격적인 그리고 영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 이 문제를 살펴보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인간 존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거의 유물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인간일 뿐이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무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매우 물질과 꼭 같은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인간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왔고, 특히 성경은 인간의 존재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산된 어떤 물건을 보고 그것이 어떤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지 잘 알 수 없을 때 그것을 제작하고 있는 공장에 가 보면 분명하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맨 처음 창조된 창세기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장면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흙은 히브리말로 ‘아파르’인데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인간을 먼지로 묘사한 이유는 성경 전체에 나오는 티끌이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티끌은 성경에서 언급된 모든 물질 중 가장 가치가 없고 허무한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먼지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래서 인간의 존재, 그 육체는 물질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그 육체에 영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일부를 인간에게 넣어주신 것이 아니라 ‘후’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동작이고 이로써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아우러져서 살아있는 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올바른 지도를 받을 때에 비로소 참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고 또 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의존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그 영혼이 영혼다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존재가 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각각 다른 자원들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티끌로부터 창조되어 생겨났기 때문에 끊임없이 지상의 자원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자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단 몇 끼만 굶주려도 기운을 잃어버리고 활동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그리고 불과 몇 십일만 굶으면 인간은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우리의 육체가 끊임없이 필요로 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공급해 줄 때에 육체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생명을 잘 보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육체의 필요에 대해서 매우 민감합니다. 굳이 먹어야 되겠다는 결단이나 물을 마셔야 되겠다는 각오 없이도 목이 마르면 물을 찾게 되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게 되고 추우면 따뜻한 옷을 찾게 되고 더우면 시원한 옷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의 영혼의 필요에 대해서는 그다지 민감하지 못한데 이는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죄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육체를 위한 자원들이 충분히 있어도 우리의 영혼을 위한 자원이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또 설사 우리의 삶을 지탱해 나간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일은 더더욱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며”라고 하는 이 경험의 중요성인 것입니다.
육체는 자연적인 질서 속에서 있을 때에 육체는 가장 건강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질병이 걸린 사람도 오히려 의학도 포기한 사람이 깊은 산 속에서 자연과 함께 하면서 기적적인 육체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인간의 영혼은 자연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 은혜, 사랑, 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자원들을, 하늘의 자원들을 영혼이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갈 때에 이것이 바로 영적인 생명이 충만한 삶이고, 이로써 인생에서 만나는 다양한 삶의 사태들을 헤치고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늘의 자원이 결핍되어서 사실상 죽은 것 같은 영혼이 다시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양식으로 삼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이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원들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이런 영적인 하늘의 자원이 언제나 충만하게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우리의 지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에 접붙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고, 그를 통하여 모든 하늘의 생명과 은혜를 공급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생명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지만 그 생명이 얼마나 풍성하게 우리 안에 역사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게끔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며 기쁨의 삶을 살 때에 이런 하늘의 자원들을 풍족히 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는 영적인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살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혹은 사랑받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강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그렇게 믿음으로 산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침체의 때를 겪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B. 침체와 회개
시편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는 세 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무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심각한 무지가 사람을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시편 73편에 보면 경건하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경건하게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번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큰 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던 사람들은 비참하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는데 현실은 매우 달랐습니다. 자신은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회개하지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번영 가운데 사는 형통한 죄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죽을 때에는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죽을 때조차도 평안하게 죽고 꽃상여에 쌓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문을 받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이 시인은 깊은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그는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 자신이 이렇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온전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도 이렇게 살지 말고 막 살아 버릴 걸 하는 후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회개하려해도 자신의 죄가 심각하게 시인의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혼란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던 경건한 삶을 접을 위기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소에 들어갈 때에 어두운 그의 지성을 찢고 한 줄기 찬란한 말씀의 빛이 비췄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죽은 후에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때에도 평안하게 죽던 형통한 죄인들이 죽음의 휘장 저편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지식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자 어둡던 마음의 그늘들이 모두 사라지고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단박에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자기가 사모할 자가 없다고 고백을 하며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이라고까지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특히 시편이 제시하고 있는 영혼의 깊은 침체의 또 한 가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끊임없는 고통입니다. 여러분은 의로운 사람 요셉이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당하게 된 그 끔찍한 환란과 고통을 통해서 그의 영혼이 얼마나 바닥에 떨어졌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유는 자신이 고난을 당한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고통이 끝나든지 또, 그 고통에 담겨진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 큰 시련과 고난이 겹치면서 영혼의 어두운 눈을 서서히 뜨게 되었고 그러면서 욥은 자기가 왜 고난을 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정금과 같이 만드신다는 사실, 보좌 우편에 계신 그 중보자께서 자신을 이 고난 속에서 붙들고 계시며 이렇게 죽은 이후에는 이 육체의 껍질을 깨고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미래의 전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의 영혼에 깊은 침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혹은 그 고통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추구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신뢰할 때에 그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결국은 무지, 혹은 지식의 부족이 영혼의 깊은 침체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보다도 더 본질적인 영혼의 침체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을 시편은 죄라고 꼽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까지 다윗은 구약의 모든 인물 중 매우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으로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친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후에 모든 이스라엘의 임금의 행적들은 다윗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랐던 사람들은 다윗의 뒤를 따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 다윗이었지만 그에게도 하나님 앞에 심각하게 죄를 지은 경력이 있었습니다. 다른 작은 많은 죄들도 있었지만 특히 이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두 가지의 대표적인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사건은 행정적으로 정치적으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국왕의 고유한 권한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인 동기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인구 조사는 오늘날의 인구 조사와는 달리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사의 수를 헤아리는 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자기의 나라의 강성함을 의지하는 대신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단의 충동을 받은 다윗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왕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오는 교만의 죄에 빠졌습니다. 인구 조사는 실시되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은 온 나라의 온역을 징벌로 내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의 길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보다도 심각한 죄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의 이 간음 사건은 이해해줄만한 것들이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고 자기가 사랑하는 형제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심각한 편견 속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고, 자기를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공감할 수 없는 수준의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왕이 된 후에는 자기와 그렇게 형제애를 나누며 함께 나라를 건국했던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나라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있었고 이 우두머리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강간당했을 때 놀랍게도 그 강간범은 자기 뱃속으로 낳은 또 다른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고 자신과 함께 몸을 섞었던 후궁들을 자기의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 동침하여 욕을 보이는 끔찍한 경험까지 했습니다. 일생동안 그는 마음 둘 곳이 없는 외로운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랑에 붙들려 살 때에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이 이 시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교만해지고 신앙생활이 태만해지면서 그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사랑과 교제를 잃어버렸고 그러자 이 시인의 영혼은 깊은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가슴 아픈 상처로 얼룩진 인생을 사는 동안 한 눈에 반한 한 여자를 만납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간음을 하게 되고 그 이후로 그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던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는 율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오핸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지고, 주님이 자신을 기름 부을 때 부어주셨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전임자 사울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보내신 영을 거두셨을 때 악신에게 사로잡혀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는지를 보았던 다윗이었기에 두려움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오직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그 요를 적시며 전대미문의 회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이 시인을 용서하시고 모든 악한 사슬에서 끌러주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보다 깊은 복음과 은혜의 세계의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시인은 이 죄의 경험을 통해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 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침체 속에서 죄로 말미암아 들어간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회개의 경험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있는가, 나는 죄 때문에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적도 없고, 검찰에 가서 조사를 받은 적도 없는데 나에게 왜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가 떠나질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 실험식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접시처럼 납작한 비커에 차가운 물을 붓고 그 위에 개구리를 올려놓고 밑에 불을 붙였습니다. 1초에 0.02도씩만 올라가도록 불꽃이 조정이 되었고 그리고 개구리는 마음만 먹으면 물론 언제든지 깡충 뛰어서 도망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1시간 40분 후 개구리는 푹 삶아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커다란 죄, 기억에 남는 커다란 죄를 지었을 때에는 오히려 문제가 간단합니다. 매일 매일 그 죄에 대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도 느끼고, 회개할 기회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없이 서서히 습관화되어서 지어온 많은 죄들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너그럽습니다. 집안에도 아이들이 흙탕물을 하고 와서 어지러 놓은 것들은 걸레질 한번 하면 지워지지만 몇 년 동안 작은 먼지들이 쌓여서 떡이 지어진 때는 이사 갈 때에야 그것이 그렇게 더럽다는 사실을 싱크대 밑에서, 옮긴 장롱 뒤에서, 혹은 꺼낸 침대 아래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군인들이 계곡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관처럼 보이는 지휘관이 자루 3개씩을 주면서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자루에 돌멩이 50kg씩 담아오너라 실시했습니다. 한 병사는 미련하게 50kg 돌멩이를 찾아서 한 개를 자루에 집어넣었습니다. 두 번째 병사는 30kg와 20kg 짜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세 번째 병사는 지혜로웠습니다. 이 돌멩이를 메고 어디까지 갈지도 모르는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큰 돌멩이를 찾을까 공기돌처럼 자잘한 것을 1000개를 골라서 부대에 채웠습니다. 모두 지휘관 앞으로 갖고 지휘관이 각각의 무게를 달아보니 정확하게 50kg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명령은 군인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 이 돌멩이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실시” 하나를 가져온 병사는 오직 하나만을 가져왔기 때문에 정확하게 자기가 어디에서 그것을 가져왔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 걸음도 떼어놓지 못하는 병사가 있었는데 1000개의 공기 돌을 모아 가지고 온 사병이었습니다.
죄의 크기는 물론 있습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큰 죄나 작은 죄나 크기의 차이이지 본질 그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하나님을 원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존 오웬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큰 죄는 크게 뱉는 것이고, 작은 죄는 작게 뱉는 것이지만 그 죄의 본질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지만 죄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수가 없고 그것은 파괴되고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그 죄를 자기 자신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가지 말고 그 죄를 객관화시켜서 그 죄를 그 죄인이 미워하여 자신도 그것을 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 가운데서 영혼의 깊은 침체가 온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의지적으로 그 죄를 버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영혼에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채워 주시고 그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이런 비유를 듭니다. 남녀가 아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둘이 서로 만나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길거리를 차를 몰고 가던 중 이 남자가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토끼를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토끼는 도로를 횡단하다가 급히 달려오는 차에 밟혀서 죽은 토끼였습니다. 큰 차가 밟고 지나가서 내장이 모두 다 뛰쳐나온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 이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토끼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그 토끼를 보는 순간 토끼가 끔찍하게 죽었다는 생각보다는 ‘아 이 구하기 어려운 토끼를 가지고 가서 이렇게 내버려두지 말고 깨끗이 가죽은 벗겨서 가죽은 털모자를 만들어서 애인에게 선물하고, 고기는 탕을 끓여서 먹으면 참 맛있겠다.’ 생각하고 아주 기쁨으로 그 토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만나기로 한 애인이 올 시간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 여자는 애인에게 가까이 달려오기 시작했는데 뜻밖에 그 손에는 내장이 모두 튀어나와 피투성이가 된 토끼 한 마리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 멋있는 옷차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토끼 시체였습니다. 끔찍한 생각에 외마디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발 그 토끼 좀 치우라고 말입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향한 애정이 식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은 토끼를 차마 보지 못하는 여성의 착한 심성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무엇일까요? 남자가 깨끗이 그 토끼를 버리고 그리고 깨끗이 씻고 다시 나타나면 사랑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바라보시는 죄와 죄인에 대한 시각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23편 강해 4 (2015.3.15. 주일오전설교)
III. 적용과 결론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은 깊은 소외감과 거리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한 미움 때문이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로 말미암는 영혼의 침체에 대한 해결의 길이 무엇인지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것을 슬퍼하며 진지하게 회개하고 거기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이런 영적인 생명이 고갈된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는 영혼의 침체라고 부릅니다. 영혼이 침체 되면 우선 자기 자신을 지탱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는 이 세상에 대한 욕망으로 펄펄 타오르고 어느 한 순간에는 이 세상을 죽음으로 등지고 싶은 절망이 한 순간에 밀려옵니다. 그런가 하면 예전에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모든 것들을 지탱하며 살아갔었는데 침체에 빠지게 되면 이럴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거운 힘이 되고, 짐이 된다는 사실을 겪습니다.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담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신의 무게조차도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에서 어떤 사태들을 만나게 될 때에 그때 그 삶의 사태들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용서했던 사람들을 다시 미워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용서해야 마땅한 사람도 용서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불러 주셨는데도 사랑할 수가 없고 그리고 예전에는 사람들을 향해 오래 참을 수 있었던 사람도 이제는 참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지탱할 수 있는 모든 힘들을 잃어버릴 때 놀랍게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 속에서도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파괴된 가운데 살아감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원대한 계획 속에서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여러분은 인생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후회하고 혹은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삶을 보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사람들은 나만 싫어할까? 왜 나는 저 사람을 이렇게 신실하게 대해줬는데 저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부당하게 대할까? 내가 저 사람들에게 이렇게 개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될까? 이런 고민을 그냥 평범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심지어는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립니다. 언제나 힘주어 말씀 드리지 않습니까? 원래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예외적인 일들이 여러분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래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마음먹어도 되는 것보다는 안 되는 것이 더 많고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리고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나를 죽도록 싫어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기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럴 뿐만 아니라 나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 때문에 불완전해진 이 세상의 민낯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 세상의 민낯과 마주하기를 싫어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스스로 끊임없이 암시를 줍니다. 그런 거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인생에 그리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구나.’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의 세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그런 모든 삶의 현실이 한 번에 뒤바뀝니까? 나는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순간 나와 관계를 맺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모두 새사람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집에 돌아가도 여러분에게 상처 주었던 부모들,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었던 자녀들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대로 있고 고통을 주는 일을 오늘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모릅니다. 또 사단의 충동을 받아서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여러분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게 세상입니다. 그리고 원래 인생의 묘미는 그렇게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인생의 묘미를 느끼면서 살아갈 여유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뭔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그래 저 사람도 힘드니까 혹은 얼마나 괴로우면 저러겠어? 그 사람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이런 힘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그 사람들 저렇게 나를 괴롭히다가 제 풀에 나가떨어지겠지.’ 그게 아니라 ‘저렇게 나를 괴롭히면서 살 수밖에 없는 저 사람은 얼마나 곤고하고 아플까?’ 그러면서 그 불쌍한 영혼, 하늘의 양식이 거의 끊어진 곤고한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자원은 어디에서 오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다 고갈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회개시켜 주시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죄의 크기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기갈이 아니고 양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의 영혼의 생명이신 하나님의 사랑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침체된 영혼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힘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끊임없이 소망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펼쳐진 미래는 오늘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영혼의 회복을 꿈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늘 경험하면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그렇게 상처뿐인 인생을 살았지만 매일매일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늘에 가득차고 궁창에까지 이른 주님의 그 인자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상처로 얼룩진 그의 과거는 오히려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며 고난과 시련의 길을 헤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잘 살펴 깊이 반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여러분을 용서와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셔서 예전에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이전에 받았던 모든 상처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영혼의 회복(2)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시 23:3上)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왜 소생시키셨는지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체된 시인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신 것은 전적인 은혜였지만 그 은혜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시인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그 분의 영원한 계획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대가없이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대가가 있고 그 대가에 대한 보답으로서 베풀어 주는 것이라면 은혜는 은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십니다. 침체된 영혼으로 인생을 사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지만 그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는 영적 소생의 경험을 통해서 이 시인은 더욱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학교를 가면서 엄마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간 다음에 엄마가 편지를 열어보니까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엄마에게 보내는 청구서. 다음과 같이 청구하니 속히 지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1번 엄마 없을 때 동생 봐준 것 두 번 900원, 아빠 구두 닦아준 것 세 번 900원. 이상 1800원을 청구합니다.’ 엄마가 그 다음날 아들 도시락을 싸주었습니다. 아들은 학교 가서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펴 놓고 먹으려고 하는데 도시락 주머니를 열었더니 예쁜 편지 한 장이 떨어졌습니다. 도시락 편지였습니다. 친구들이 야 그게 뭐냐 그러고 보니까 편지 봉투에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써있었습니다. ‘야, 너네 엄마 정말 멋쟁이다.’ 펴 보니까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네놈 뱃속에 넣고 9달 반 동안 고생한 것 공짜, 네 놈 아파서 병원으로 달려간 것 공짜, 여태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 공짜, 아들아 엄마는 너한테 청구할게 없단다. 사랑해.’ 그게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그 애 엄마가 아들을 그렇게 사랑해서 모든 것을 공짜로 베풀어 주었지만 그날 밤에 집에 와서 숙제 안하고 싸돌아다닌다고 뒈지게 맞았습니다. 엄마 마음속에 모든 것을 베풀어 주어도 이 아이를 향한 사랑의 크기만큼이나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거저 구원해 주신 것이지만 그렇게 구원해 놓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을 따라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려고 할 때에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불화가 생겨나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의도와 우리가 살아가는 의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단연코 말할 수 있는데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안 하면 믿음 없이 사는 것만큼 힘듭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내가 여러분이 누구인지 다 아는데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II. 영적 회복과 하나님의 계획
A. 의의 길로 인도하심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의도가 무엇인가? 그게 바로 ‘의의 길’입니다. ‘마겔레 체데크’라고 되어 있는 이 표현은 ‘마겔라’라는 단어인데 ‘쩨데크’는 의입니다. 그런데 그 ‘마겔라’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이렇게 보드라운 흙 위로 마차 같은 게 지나가는데 자국이 생깁니다. 그것을 ‘마겔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이렇게 길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똑바른 길입니다. 그런 길인데 그 길이 의의길입니다. 의의 길이 뭐냐 하면 불의의 길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의 길이 뭐냐 하면 의의 길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와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 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거기에 맞는 것이 의이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이 불의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그 의도를 그 당시에 율법을 통해서 게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 되어서 그 율법에 부합하는 삶은 의로운 삶이고, 그 율법에 어긋나는 삶이 불의한 삶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기준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진 이 시인을 구원해 주셨을 때 그 구원해 주시고 나니까 시인의 마음속에서 기쁨과 그리고 소망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믿음의 감격이 심령 속에 가득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만을 위해서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왜 은혜를 받으려고 해요?” 하고 물으면 사람들은 “힘들어서요.” “은혜 받으시면 뭐하려고 그래요?” “은혜 받으면 좋지요. 기쁘고 감사가 넘치지요.” 그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은혜를 주셔서는 그런 생명과 영적인 은혜의 힘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난관들을 극복하며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영혼의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는 삶이고, 그 율법은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복음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그 의로운 삶이 무엇이냐 하는 그 기준이 십계명을 아주 구체화해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신약 시대 백성이 삶이 무엇이냐 그게 주기도문의 삶입니다. 주기도문의 삶입니다. 이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는 이 시인의 고백은 이 세상이 불의하다는 밑그림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남이 알지 못하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또 그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얻은 후에는 그 자원을 가지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그렇게 집회를 많이 다니지 않습니다마는 옛날에는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그때 일인데 교수 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저 충청도에 있는 어느 학교에서 강연을 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부지런히 가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도로가 꽉 막혔습니다. 그리고 이제 간신히 빠져 나와서 지방 도로로 들어서고 났더니 시간이 빠듯합니다. 그래서 좀 속도를 냈습니다. 지방 도로를 80km를 달리게 되어 있는 것을 한 100km쯤 달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파란 옷을 입은 경찰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섰습니다. “교통 위반 하셨습니다. 면허증을 보십시다.” 그래서 “왜요?” “속도 위반하셨습니다.” “나는 속도위반하지 않았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보는 데서는 속도위반을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요?” “저 산 너머에서 속도위반 하셨습니다.” 아니 내가 산 너머에서 속도위반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아냐고 그러니까 거기 경찰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선생님 차에 스피드건을 쏴서 104km를 달린다고 나한테 통보를 했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알았다고 하고 “뭐 하는 분이세요?” 그럽니다. “저 대학의 선생인데 여기 앞에 있는 학교에서 나를 강연에 불러서 지금 급히 가는 길인데 속도위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티커를 끊어 주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활짝 웃으면서 “아,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끊어서 탁 줍니다. 그러면서 경례를 하면서 “안녕히 가십시오. 싼 걸로 끊어드렸습니다.” 그럽니다. 나는 관심도 없고 어쨌든 빨리 가야 하니까 가서 집회를 하고 그리고 밤중에 올라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새벽기도 끝나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과태료 낼 것이 있습니다. 범칙금, 그것을 교회 직원이 그때 하나 있었는데 시킬까 하다가 아유 뭐 그런 걸 또 시키나 내가 가야지 그러고 다른 볼일도 있어서 은행에 갔습니다. 그리고 스티커를 꺼냈는데 보니까 너무 쌉니다. 그 당시에도 속도위반하면 한 2만 원정도 벌금을 냈습니다. 1999년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6000원입니다. 아니 그렇게 너무 비싸게 60000원씩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그러고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쓴 다음에 원본은 자기네가 가져가고 이게 먹지대고 쓴 복사된 것을 주는데 이렇게 보니까 6000원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 비고란에 보니까 ‘금연 구역에서 담배 피다 걸렸음’ 그러니 그것을 만약 교회 직원을 주었으면 얼마나 시험에 들었겠습니까? 목사님이 어디 갔다가 그것도 금연 구역에서 담배 피다가 걸려가지고 이 스티커를 끊어왔나. 은행 창구에서 그 스티커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각이 납니다. “활짝 웃으면서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결론이 뭐냐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까지 이렇게 산다면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 다음서부터 결심을 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교통 법규를 지키자. 그런데 위반했을 때에는 그대로 처분을 받자.’
그러고 얼마 있다가 또 한 번 위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억울한 것이었습니다. 유턴을 하는데 유턴 차선에 차들이 직진할 차들이 쭉 서서 유턴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하얀 실선을 밟고 유턴을 해야 되는데 차가 막고 있으니까 노란선을 밟고 유턴을 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지하도에서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왜 경찰들은 그럽니까? 경찰이 지하도에 숨어 있다가 뛰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경례를 붙이더니 또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도로 교통법을 위반하셨습니다.” 그때는 나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도로 교통법 1조에 봐라. 이 법은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이라고 그랬다. 내가 유턴할 차선이 저 사람들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지 않냐?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밟았는데 이게 위반이냐?” 그랬더니 “노란 선을 밟아서 위반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애들 땅따먹기냐.” “그래도 교통 위반입니다.” “나는 너무 억울하다.” 그랬더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교통경찰이 그러면 대게 고맙다고 하는데 황당해 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해 줄 권한 있냐? 그것은 법원에서 하는 것이지. 그대로 끊어라.” 그랬더니 경찰이 “알았어요.” 하고 확 긁어가지고 “중앙선 침범해서 벌점 15점에 6만원” 그러고 확 끊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 사회를 이렇게 보면서 진짜 부정직합니다. 건물 조그마한 것 하나 지어도 뇌물 없이는 안 되고 이러는 세상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가슴이 터지는데 우리 중국의 시진핑, 그 분은 연일 한국을 바라보면서 “한국 좀 봐라. 한국 좀 봐라.” 그러신대요. 참 기가 막힙니다. 우리는 이렇게 갑갑해 하고 있는 나라를 또 본받으라고 하는 나라도 있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진짜 심각하기는 심각합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중국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사람도 중국 사람인데 아주 분통을 터트리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네 나라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이야기하는데 군 간부인가를 덮쳤는데 집에서 금이 2톤이 나왔답니다. 금만 2톤을 그것을 어떻게 보관했는지 난 모르겠습니다. 요즘 중국 사람들 사이에 자기끼리 유행하고 있는 말하자면 농담이 있답니다. “내가 금년에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를 다 망쳤어. 알고 보니까 시장에서 사온 씨앗이 짝퉁이었대. 나는 너무 열을 받았지. 그래서 죽어버리려고 농약을 마셔버렸어. 그런데 안 죽었어. 그 농약도 짝퉁이었대.”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웃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회가 그랬고 지금도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자잘한 부패는 나아졌지만 큰 부패들은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입니다. 그런 불의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얼마 전에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 사건은 우리 한국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사회를 보면서 시진핑 주석은 “한국 좀 보라.” 그러십니다. 그런데 진짜 최근에 본 신문에 의하면 대령에서 장군이 되는데 뇌물의 평균이 18억이랍니다. 그리고 대령에서 장군 될 때에는 9억, 거기는 군대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방군을 제대하면 사회에서 대접을 많이 해줍니다. 그러니까 그 군대에 사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바치는 뇌물이 180만원입니다. 심지어는 중대장 되는데도 3600만원, 4000만원을 가져다 뇌물로 바쳐야 된다고 하니 그렇게 뇌물로 해서 진급을 한 사람들이 벌충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지르겠으며 또 별 하나 달았으면 두 개 달기 위해서 그것을 또 비축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서 사회 전체가 썩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러나 옛날에는 그 보다 심하면 심했고 지금도 그런 잔재들이 수없이 남아 있어서 아마 OECD 국가 중에서 나라의 청렴도가 거의 바닥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신 이유는 바로 그렇게 남이 못 받은 사랑과 은혜를 받아 영혼의 생명을 누리고 있으니 이 불의한 세상에서 의로운 백성으로써 살아라, 한 줄기 빛처럼 살아라 그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금 내는 것만 해도 그럽니다. 나는 속에서 이렇게 울화 같은 것들이 치미는 것이 뭐냐 하면 왜 이렇게 하느냐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은 길거리에서 빈대떡을 팔건, 혹은 야채상을 하건 소득이 있는 사람은 모두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세금을 훨씬 낮춰야 합니다. 그렇게 성형 수술 하고 그 다음에 변호사일 하고 해가지고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이 한 달에 100만원을 벌었으니, 200만원을 벌었느니 그렇게 소득 신고하고 탈세하는 것을 보면서 그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입니다. 그런 탈로를 세액을 추적하지 못하겠으니까 이게 유리알처럼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월급 생활자만을 가지고 쥐어짜고 그 연말 정산의 그거 10~20만원 돌려받는 것도 안 주겠다고 해서 지금 역풍을 맞은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 사회가 정말 희망 있는 세상이 되려면 정직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에나 부패가 있게 마련이지만 사회적인 정직함이 없이 선진국이 된 나라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 불의한 세상에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길이 의의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금도 침체에 빠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의 소생을 주신 이유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이 공직자라면 뇌물 받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여러분이 학교 선생이면 학부형들한테 봉투 받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탈세하면 안 됩니다. 물론 지혜가 부족하고 올바르게 하지 못해서 과한 세금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법을 어기면서 불법적으로 탈세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법 자체가 잘못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세금 내면서 투쟁을 하셔야 됩니다. 목숨 걸고 필요하면 정치 자금을 대줘서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을 당선 시키고 안 된 사람을 떨어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옛날에 짐바브웨라는 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엄청나게 부패하고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뇌물을 받지 않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관청에 그리스도인들이 뇌물을 받지 않겠다고 서명을 한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거기다 표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가서 창구가 쭉 있으면 그 창구에 표시를 보면 여기는 정직하게 하는데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운동을 펼쳤습니다. 물론 강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어서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선교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아무개 권사님이 있었는데 기도 많이 하고 교회를 열심으로 섬겼더니 큰 아들은 하버드, 둘째 아들은 예일, 셋째는 프린스턴을 들어갔답니다. 그 설교를 듣는데 속이 다 뒤집힙니다. 우리 교회에 그 권사님보다 더 많이 헌금하고 열심히 섬겨도 하버드 못 들어간 애들 많습니다. 그게 복음입니까? 나라가 정말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었던 때에는 그런 식의 복음 전도가 우리도 한번 예수를 믿어서라도 잘 살아 보자라고 하는 선교의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릅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내가 성공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고 나도 저렇게 한번 부자가 되어 보고 싶다는 것은 의의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은 이런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인 앞에 서면 왜 그런지 인간으로서 내가 부끄럽다. 저 사람은 행복한 것 같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행복하지도 않고 잘 살지도 못하는 구나.’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있는 이 공간을 마련한 게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 분은 여러분 거의 없겠지만 지하실에서 있다가 도저히 좁아서 할 수가 없어서 지상으로 올라와서 교회를 하던 건물이었는데 그 교회가 건축업자한테 그것을 팔고 이사를 갔습니다. 건축업자는 그 교회 건물을 사서 그것을 부숴버리고 빌딩을 지으려고 했는데 IMF가 터졌습니다. 있는 빌딩도 지금 다 팔리고 하는 세상인데 그 빌딩을 지으면 누가 들어오겠습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니까 그것을 월세를 놨습니다. 지하실에서 나와서 그래서 우리가 월세로 들어갔습니다. 한 900명 정도 들어가는 예배당인데 200명이 올라왔으니 어디 사람이 보이기나 하겠습니까? 한 달 월세가 4주 헌금을 다 걷어도 모자랄 정도의 1100만원이었습니다. 무슨 배짱으로 갔느냐 그 이외에는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어차피 옮긴다고 하니까 성도들이 건축헌금 약속한 게 한 2~3억 있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내서 5억 보증금을 내고 그리고 이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열심히 전도하고 했는데 놀랍게도 3년 반 만에 장년 100명이 1000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그 빌딩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 예배드리고 나면 차가 7~8대씩 잠실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국은 우리도 이사를 가자. 그런데 그렇게 큰 빌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를 져야지 그래서 땅을 먼저 사자 그러고 왔는데 다 돌아다녀 봤는데 땅이 없습니다. 있는데 있는 것은 너무 비싼 거고 또 가격이 맞는 것은 위치가 영 아니고 그런데 돈도 없었습니다. 돈이라고는 보증금 5억 들어있는 것하고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습니다. 여기를 왔습니다. 복덕방을 하는 사람이 이 땅을 누가 내놨었는데 안 팔겠다고 도로 집어넣은 땅이랍니다. 그래도 한번 알아보자 그리고 건축 위원들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이 빌딩 주인이 할아버지였는데 “파십시오.” 그랬더니 “안팝니다.” “파십시오.” “안 팔겠다는데 왜 그럽니까?”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내가 이 땅을 팔면 당신들이 여기다 뭐하려고 그래요?” “교회를 지으려고 그럽니다.” 그랬더니 “교회?” 그러더니 이 할아버지가 “일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그러더랍니다. 돌아와서 “야, 여기는 분명히 뭔가 사연이 있구나. 우리 열심히 기도하자.” 정말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땅을 가져가라. 그 할아버지가 26살 때 장로가 되신 분입니다. 근데 그 장로 안수해주신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었습니다. 이 건물이 유서 깊은 건물인 것이 그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여기 2층에 가발 공장을 하고 나중에는 전자제품 공장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1년 6개월을 매주 오셔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신 건물입니다. 이 할아버지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접으려고 하는데 접고 난 다음에는 여기 교회가 들어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가져가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냐고 하니까 36억이라고 그래서 깎을 생각도 못하고 돌아와서 돈은 없으면서도 무조건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는구나.’
돈 5억 밖에 없는데 좋다고 3억을 어디에서 빌려서 계약금을 가지고 갔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36억이면 싸게 해 주는 거다 그 대신 계약서는 30억으로 쓰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고 그래서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집에서 계산해 보니까 대출한 돈 갚고 세금내고 하면 2억이 모자라답니다. 그래서 30억으로 이중 계약서를 써서 세금을 줄이고 이렇게 해야지 되겠다. 내가 이 땅을 그냥 줄 수는 있지만 내 돈을 보테서 청산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경험이 없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나 건축 위원들 불러 놓고 물어보니까 아무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다 요새 85%이상 그렇게 거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확신이 안 서서 회계사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자고 그러는데 이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장부 가짜 장부 두 개를 쓰셔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거는 아니다. 교회가 그렇게 가짜 장부를 써서 세무서에 내고 진짜 장부는 교회가 가지고 있고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이겠느냐? 관 둬라. 안 한다.”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세금이 얼마냐고 물어 봤더니 3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39억을 주고 삽시다. 그 대신 계약서는 정직하게 씁시다.” 그래서 이것을 36억을 달라고 그러는 땅을 우리가 39억을 일부러 주고 산 땅입니다. 여러분 이 얘기 들으니까 뭐 그렇게 크게 웃기는 이야기도 아니고 충격도 아니죠? 왜냐하면 지금은 이제 넉넉해졌구요. 아직도 그때 빌린 돈 다 못 갚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교회 살림살이가 어렵지 않습니다. 빚이 좀 있어도 여러분이 교인이 여기 와 가지고 세배, 세배 반 늘었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때에는 그 3억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기적이 일어났는지 계약금은 줬는데 중도금 낼 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못 내고 있으니까 이 할아버지가 왜 중도금 안 가져오냐 그래서 “돈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가. 난 그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 등기하고 인감 증명하고 다 주면서 “그냥 교회가 가져가라. 교회로 명의 이전하고 그 다음에 대출해서 다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 가지고 계약금 주고 이 땅이 교회 명의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대출해 가지고 주고 나중에 1억 끝까지 못 갚으니까 나중에는 이 할아버지가 하도 화가 나셨는지 내가 그렇게 봐 줬는데도 1억 안 갚냐고 그래서 “정말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전화를 해서 “통장 번호 불러라” 통장 번호 부르니까 할아버지가 1억을 우리한테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네 회사에 가서 갚으라고 이거 회사에서 산거니까 그 대신 자기가 빌려준 거라고 하면 직원들이 자기 바보라고 하니까 절대 자기한테 빌렸다고 그러지 말고 그렇게 고마우신 분입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의롭게 삽시다.” 하고 이 불의한 세상을 욕하는 것은 혀에다가 침만 바르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올바르게 사는 것은 피를 흘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그렇게 의로운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서 우리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불의한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때로는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는 사람과 결별하기도 해야 하고 혹은 목숨을 걸어서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희생이 뒤따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을 기꺼이 감당해 가야할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놀라운 영적인 은혜의 자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기 위해서 분투 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주님께 기도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위로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불의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 불의하게 살아도 진리가 살아있고 이 모든 인간의 불의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직접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생활입니다. 여러분이 공직자라면 몇 사람의 뇌물만 정직하게 거절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가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 삶이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손해를 많이 보는데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이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서 살 때에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은 불의하지만 그러나 세상은 개혁될 것입니다. 조금씩 변화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분투하는 삶입니다.
B.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오늘 성경은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런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런 모든 사물들은 보이는 물질이기 때문에 이름이 있으면 형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질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이름은 있어도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십니다. 여러분이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민도 하고 또 지방에도 내려갑니다. 그 교회 어디든지 가서 신실하게 섬기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열린 교회는 여기 평촌에 있는데 열린 교회 이름은 부산에서, 미국에서, 영국에서, 대구에서, 대전에서, 광주에서 높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러분이 열린 교회 출신이라는 게 다 알려졌는데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평생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을 다해 눈물로 기도하셨던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기도가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이 시를 보면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열심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열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는 말과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똑같은 말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고 있는 싸움터에 형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버지가 형들의 소식을 궁금해 했기 때문에 다윗을 보낸 것입니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며 아주 시끄러운 전쟁터일 줄 알았는데 양쪽에 군인들이 줄지어 서있고 조용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군대 중에서 키가 크고 등치가 큰 무식한 장군 하나가 나와서 고래고래 혼자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평생 짐승만 치면서 살아왔던 목동 다윗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례도 받지 못한 저 짐승 같은 놈이 저 입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저렇게 모욕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 전투를 하도록 훈련받은 적은 없었지만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 이때 한번 내가 골리앗을 때려 눕혀서 차세대 지도자가 되어야지 그런 정치적인 야망이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너무 사랑하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가 사랑하는데 그 하나님의 이름이 저 더러운 인간에 의해서 할례 받지 못한 저 짐승 인간의 입을 통해서 모욕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이 솟구치는 의로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싸움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충분히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했기 때문에,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하나님을 능욕하는 발언을 했을 때에 잠잠하고 있었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그랬을까요? 그 군인들은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 시인은 물맷돌을 들고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블레셋과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뜨겁게 사랑하는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시편 23편 강해 5 (2015.3.22 주일오전설교)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존재의 울림이 있는 의로운 삶을 살면 여러분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 저렇게 고난 속에서도 행복해하는 삶을 살고 있는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행복해하는 것일까? 저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시구나.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저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복된 삶인가?’ 이게 바로 선교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면 의로운 길을 따라서 살면 어쩌면 사업에 성공을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도 아니고 이름 없는 한 사람으로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이 가치를 어디에다 두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령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매일매일 그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어둡고 불의하기 때문에 이것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의롭게 살아도, 조금만 정직하고, 그리고 남들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도 정말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렇게 예배드리러 나온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고 곤고한 이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면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게 충만한 은혜를 주시면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자신이 최종적인 소비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신 것은 어떻게 하든지 시련과 고난 속에 있는 우리의 인생이 불의와 악에 에워 쌓여 살아가고 있는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입니다. 이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면 주실수록 의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 다윗이 인생의 말년에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오늘 고백하고 있는 이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인격적인 승복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시인이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시련과 절망의 때를 겪었습니다. 시인은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때로는 양떼들에게 좋은 꼴을 오래도록 먹이기 위해서 먼 길을 여행해야 하는 적도 있었습니다. 원래 유목 생활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어디를 가든지 풍부한 물과 그리고 풀밭으로 뒤덮인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때로는 상당한 거리를 지나야 했습니다. 종종 풀 한 포기, 흐르는 시냇물 하나 없는 그런 깎아지는 듯한 계곡 사이를 양떼들을 이끌고 지나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맹수의 위험이 있고 도적으로부터 습격을 받을 위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목자는 바로 그런 계곡을 지날 때에 충분히 자기의 양떼들을 보호할 수 있을만한 실력을 갖추고 지혜롭게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지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웬 시련과 절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 맘대로 안 되던 이 세상과 나의 인생살이를 내 맘대로 되게끔 만드는 것이 신앙을 갖는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이 세상에 살면서 기쁠 때는 웃고 시련을 당할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도대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자신의 인생에서 만나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시련, 그리고 그 모든 행복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워해도 이유 있게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고통을 겪어도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서 그 길을 지나게 하는 것이 신앙의 힘이고 이럴 수 있는 힘들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공급되는 것입니다.
II. 시련과 하나님의 계획
A.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결국 여기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하는 이 그림 언어는 시인이 지나야 했던 시련과 절망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는 그 시련과 절망의 때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시련이나 혹은 내적인 절망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생명이 고갈되어서 그래서 영적으로 죽음과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을 비롯해서 외적으로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게 되는 위험을 함께 아울러서 여기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우리의 인생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건강을 잃기 전까지는 내 힘으로 일어나고 내 힘으로 활동하고 내 힘으로 밥을 먹고 자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에 시련과 고통 같은 것들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생에 대한 견해와 사상은 달라도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인간의 공통된 심리가 아니겠습니까? 선한 사람만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도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 앞에 전개되는 모든 일들이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물이 나도록 꿈을 가져라,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라,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라, 그렇게 암시를 받아왔지만 그런다고 우리의 인생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지혜는 이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것을 그 현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그 현실과 싸우면서 이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 현실을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적응력과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제 고난 주간 다다음주에 지나고 부활절에 이르고 나면 가정의 달이 다가옵니다. 금년에도 가정에 관해서 한동안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부터 저는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합니다. 종종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에 집착하면서 그래서 인생이 한발자국도 앞에 못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진흙에 빠진 자동차가 아무리 엑셀레이터를 밟아서 바퀴를 돌려도 단 1m도 앞으로 못 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의 망가진 삶은 추적해 들어가 보면 이유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비롯된 것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삶이 그렇게 망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망가진 가정에서 상처를 받고 자란 사람들,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가정을 자기가 무슨 가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어른들이 폭력을 행사하듯이 가정에서 수많은 상처를 남기고 자녀들은 그 속에서 피해자가 됩니다. 그래서 용케 찾아냈습니다. ‘내 인생의 문제는 가정에 있다, 내가 왜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찾아내고 발견한 게 내 인생을 사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 나 때문이 아니라 내 부모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그리고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부모가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뭐가 나아지는 게 있습니까? 그런 사람하고는 결혼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런 남자하고는 혼인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씌었습니다. 그래서 10년 전에 결정을 해서 만났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 같은 짓밟히는 날들이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내었습니다. 찾아내고 보니까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싫은 것입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전개되어서는 안 되었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아무리 그런 생각을 해도 눈 뜨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해는 떠오르고 하루는 펼쳐집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일이 나에게 있었든지,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내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너무나 분명한 명제는 오늘 전개된 하루를 내가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 이외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면 내가 오늘 내 앞에 전개되어 있는 현실을 누군가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매일매일 펼쳐지는 하루하루의 삶은 임자 없이 내동댕이쳐진 삶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의 주체성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자기가 자기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 명제에 모순된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피면 하나님이 인간인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다부수어 버리고 없애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로봇과 같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뭐냐 하면 진정으로 자기가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경이 동의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삶에 자유로운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모르고 인생을 살았을 때에는 뭐 찬송을 부를 때에는 내가 나를 주인 삼은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주인 삼은 삶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있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너는 이런 사람이 되라. 그래서 자신의 재능이고 뭐고 다 버리고 미친 듯이 공부해서 치열하게 경쟁해’,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야박한 세상입니까? 사람이 성품이 좀 모자라고 그래도 좀 나쁘고 그래도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들은 다 장가갑니다. 여자들도 교회 안에 교인들이 남녀의 성비가 없어서 시집을 못 간다고 그러는데 예쁘면 다 갑니다. 이런 더러운 세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 갑니다.
그래서 하다가하다가 안되니까 ‘렛미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조금은 그럴 수도 있다 생각을 합니다. 지난번에 설교에서 얘기했던 남성 호르몬에 문제가 생겨서 가슴도 털 나고 그래서 완전히 남성처럼 된 자매들을 고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미용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조금은 동정이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못 생긴 아줌마가 자기가 옛날에 얼마나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었는데 예수 믿고 새사람 됐는지 눈물 흘리며 간증하는 게 훨씬 더 ‘렛미인’입니다.
그런 세상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그게 자기가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이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주인삼은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참된 휴머니즘은 신분주의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있어야 할 자리, 되어야 할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후회 없는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게 탁월한 휴머니즘입니다. 제가 기독교 사상에 접하면서 가장 가슴 벅찼던 부분이 그거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상은 우리를 밟고 찌그려 트립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우리 인간을 펴고 고쳐서 온전한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휴머니즘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자기 앞에 직면하고 있는 이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매일매일 전개되는 자기 앞에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삶이 자신의 인생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팽개쳐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일생을 사니까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고 한 순간도 감사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상처로 얼룩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 다윗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 집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됐습니다. 다음에 태어날 때는 그런 집에 태어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 그것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 내가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았어.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어. 그래서 그게 어땠는데.’ 그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게 물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내 인생에 무슨 문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여러분이 직면하게 되어 있는 이 모든 삶의 상황을 맞닥뜨려야 됩니다. 신앙은 그럴 용기를 무한히 공급해 주는 데에 신앙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꼽추에게서 굽은 등의 혹을 떼어 내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없애는 것이다” 얼핏 들어보면 장애가 있어서 꼽추가 됐다면 그냥 살아라 그 뜻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그 현실적인 고통, 그 모든 실존적인 한계가 그 사람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것과는 결별할 수 없다 그 얘기입니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특히 젊은이들을 수없이 이렇게 만나고 대화하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힘이 없습니다. 자신이 직면한 이 현실을 헤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환경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젠가도 네 명의 젊은 남녀가 차 안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이면서 죽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잘 될 거다, 잘 풀릴 거야, 이러한 근거도 없는 암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술 같은 암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삶이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 먹은 대로 참 안되는구나, 그리고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살아내야 된다. 이렇게 훈련 받는 것이 훨씬 더 훌륭한 것입니다.
서커스 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떨어지는 것부터 연습합니다. 밑에다가 그물을 쳐 놓고 한 10m씩 되는 곳에서 그네를 타다가 일부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떨어져도 절대 안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습득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서커스 연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하고 그러면 ‘뭘 그렇게 생각해? 인생이 다 그런 거야.’ 그게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그러니까 포기하고 체념하라 그런 뜻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것,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나에게 주어진 상황, 이것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그걸 버티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그게 어떤 변화도 도입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어마어마한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기 때문에 매일 눈 뜨며 살아가야 할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남의 인생처럼 내팽개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세월이 흘러가면 나중에 지금 그렇게 흘려보낸 날들로 인해서 또 그런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평생 계속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 속에서 그 어마어마한 삶의 에너지를 다 낭비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소진해 가니까 긴 인생을 살아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산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삶, 나의 나 됨, 그리고 내 앞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 이런 것들은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말고 다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 받아들이면서 바라보면서 ‘아, 이건 참 잘못됐구나.’ 그래서 수시로 치열하게 전투하듯이 인생을 울고, 웃고, 속고, 속이면서 인생을 살다가도 수시로 거기에서 이탈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체 이탈 하듯이 자신의 삶에서 이탈해서 나의 삶을 3자의 시각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나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그게 자신의 인생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밤하늘에 찬란하게 장렬하듯 뿜어 퍼지는 불꽃놀이는 밤하늘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류에 빠져서 고통 받아본 사람들은 진리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갈등과 미움 속에서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야 말로 사랑과 화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2차 방정식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선하신 하나님과 그 선에 저항하는 인간의 악들이 미묘하게 섞이며 우리 앞에 어떤 삶의 상황들을 만들어 낼 때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 오는지 판단을 못 내릴 때가 많습니다.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만 항상 그런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22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주님은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것이 시인의 경험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분별력을 잃어버린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독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섬기고 열심히 헌신하며 살았는데 언제부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허무함이 가슴을 후벼 파고 지나갔습니다. 기도를 해도 말씀을 봐도 도대체 이 끝없는 공허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450페이지 정도 됩니다. 읽으면서 하나님의 인생을 향한 계획에 대해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에 제가 살던 시골 동네에는 폭이 한 200m 정도 되는 커다란 하천이 있었습니다. 강이라고 그래야 맞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물이 거의 없는데 그 당시에 물이 굉장히 많이 흘렀습니다. 사시사철 물이 많았고 겨울에야 물론 얼지만 그래서 늘 물이 많았습니다. 미역을 감다가 일이었으니까 여름이었던 같습니다. 저는 방학 때 시골을 갔고 동네 애들하고 같이 미역을 감는데 초등학교 한 4학년, 5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헤엄을 치다가 깊은 데로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습니다. 물이 수로에서 꽤 많은 물이 나와서 휘돌면서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커다란 웅덩이가 파져 있고 굉장히 깊어 보였습니다. 시퍼렇게 보이는 물이었습니다. 까불며 수영을 하다가 거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물살이 세서 못 나오는 것입니다. 수영을 잘 못하는 아이였는데 그나마도 놀래서 자기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수영 자세고 뭐고 다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막 살려달라고 입술이 새파래져서 물로 치면서 그러면서 소리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놀래가지고 막 함께 소리를 지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물에 빠져 죽을 것 같다고 살려달라고 막 소리치면서 물장구를 치는데 이 아이의 몸이 위로 올라와서 배꼽이 보이는 것입니다. 한번 살려 달라고 그럴 때마다 막 점프 하다시피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잘 떠오르면 이렇게 해서 나오면 될 텐데 그랬는데 못 나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평소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들이 다 하얗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만드십니다. 그렇지만 어떤 인생의 시련, 어떤 인생의 절망의 계곡을 지난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 놓지 않으면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나빠 보여도 좋게 만드실 수 있다는 확신,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믿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절망의 시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신 사실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는지는 우리에게 드러날 때도 있고 아직은 안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이냐 하면 내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좋으신 주님,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당신의 선하심을 의지하면 그 분이 나를 배신할리가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그 현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굳게 신뢰하면서 살 때 오늘 여러분이 지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먼 훗날에 평지를 지났더라면 전혀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유익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떠한 삶의 위기 속에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 그 사실을 굳게 믿으며 어떻게 하든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울음소리, 두려운 어떤 소리들을 듣는 대신 선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양떼들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처럼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을 굳게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 때 그 말씀으로 나를 건져줄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을 때 우리는 그 골짜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고 또 우리들이 예기치 못한 영혼의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저 착하게 하나님 믿으면서 아버지의 집에 품꾼처럼 양이나 몇 마리 기르던 목동이 이렇게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는 그런 위대한 철학자, 신학자, 사상가, 그리고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목자 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안위하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 두 그림이 나오는데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목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매우 긴 그리고 끝이 둥그렇게 휘어있는 그런 종류의 지팡이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림에서 흔히 보는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목동들이 걸음을 걸을 때에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양떼들이 대열을 이탈하거나 할 때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쭉 뻗어서 그 휘어진 고리로 양의 목을 걸어서 대열로 다시 인도하기도 하고 또 양떼들이 꼴을 먹는 풀밭에서 돌멩이들을 제거하거나 하기 위해서도 쓰는 것입니다.
골프가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목동들이 골프가 유래됐던 그 지역에 가보니까 풀밭이 지금도 쭉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목동들이 양떼들을 데리고 그곳에서 먹입니다. 아주 쭉 경치가 좋은 평지입니다. 양떼들이 풀을 먹으니까 편안하게 잘 먹게 하기 위해서 돌멩이를 치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심심하니까 돌멩이를 탁 하고 한번 때려 보는 것입니다. 누가 멀리 보내나 혹은 누가 정확하게 보내나 이렇게 하면서 막대기로 골프공을 치는 골프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 용도로도 사용을 합니다.
이에 비해서 막대기는 끝이 뾰족하게 생긴 긴 막대기인데 무기입니다. 그래서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것인데 맹수들이 공격을 하면 목자들은 용감하게 자기의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막대기를 가지고 맹수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그림 언어는 이런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하나님이 사랑으로서 인격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인도해 주신다는 그림을 보여주고, 막대기는 시인을 헤치려는 원수에 맞서 싸우는 하나님의 용사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시인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시련과 절망 속에 있을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그 위로가 절망에 사로잡히던 그 사람의 생각을 돌리게끔 만들어 주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초대 교회 때부터 사람을 잘 위로하는 것은 아주 커다란 은사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 가운데 사도 바울의 회심에 진실성을 입증하였던 바나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위로의 아들입니다. 얼마나 사람을 잘 위로했으면 그 사람을 가리켜서 위로자, 혹은 권위자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삶의 상황에 처했을 때 쉽게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과 상담을 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를 해도 계속해서 뭐라고 그러냐면 절망적인 언어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아, 난 아무 희망이 없어.’ 그게 아니다 라고 설명을 하면 그것을 부정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희망이 없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한참 이야기하다 답답하니까 ‘그래 너는 희망이 없어’ 그러면 그날 죽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도 약한 존재이고 자기 한계 안에 있을 때까지는 굉장히 강한 존재이지만 그 한계를 탁 넘어서고 나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게 인간입니다.
그게 무슨 심리냐 하면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언어를 계속 고집하면서 자기가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희망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 심리가 뭐냐 하면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되고 더 강력하게 자기를 뒤집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고 ‘그래, 니 맘대로 생각해’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너는 절대 앞으로 그런 일이 없어’ 그 정도 강도 가지고는 안 되고 더 강력하게 엎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나를 제발 내버려둬. 그냥 죽고 싶어 라고 하는 이야기는 너무너무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발 나 좀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언어를 읽어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깊이 사랑하면서 그 언어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기르리라
III. 적용과 결론
시편23편 강해 6 (2015.3.29 주일오전설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희망이 사라지는 그 지점이 절망의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의 근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자신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상황 속에 처하고 매일매일 마주하던 자신의 삶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지점에 도달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기에서 인간에게서 찾던 선에 대한 모든 희망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절망하는 대신 하나님 한분께 소망을 두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제껏 까지 자신의 인생 속에서 어떻게 당신의 선하심을 보이고 그리고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셨는지를 이 시인처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자원들 때문에 받게 되는 위로는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위로도 끝나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은 언제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목자의 손을 꼭 붙들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을 악바리처럼 산다고 해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맞서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고통으로 복수를 하고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에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피할 바위요,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절망적인 질병에 걸렸을 때 도대체 뭐라고 충고할 수도 없는 그런 위기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받은 상처와 손해가 너무 커서 무엇으로도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께 그 사람의 인생을 부탁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들을 지내며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사도의 담대한 선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즉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버려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 우리의 인생에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 그 모든 한계를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라는 사실을 대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계곡에서 모든 생기가 사라진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을 살려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이제껏 평탄한 길을 걸으며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위대한 만남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잡고 믿음으로 살 때에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고, 그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망의 골짜기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환희의 계곡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원수 앞에 차린 밥상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上)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4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지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한 시인은 5절에서는 자신의 잔을 가득하게 채워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목자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5절의 이 문맥은 아주 명백하게 잔칫집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하고 많은 일가친척들이 그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나오고 주인은 오래도록 간직했던 질이 좋은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대접합니다. 술잔 가득히 채워진 그 양질의 포도주잔을 서로 부딪치며 축배를 들고 있는 모습이 바로 5절의 광경입니다. 이 시인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슴 벅찬 환희와 기쁨,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데서 경험하는 희열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빈 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잔이 그 마음속에 가득 차 있을 때 그는 사랑과 활기에 넘치는 자기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자원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들이 많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한 시대를 풍비했던 위대한 스타들을 기억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자신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불행한 죽음을 맞았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마이클 잭슨, 엘비스 프레슬리, 휘트니 휴스턴, 마릴린 먼로, 이런 사람들 말입니다.
얼마 전 마이클 잭슨의 누이인가 하는 사람이 자기 동생을 회고하면서 인터뷰를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아주 앳된 목소리의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의 노래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불행히도 마이클 잭슨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의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이 세상에서 엄청난 인기와 재물을 모았지만 불행한 최후를 마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육체를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육체의 생명은 영혼에 있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무언가 그 삶을 영위해 나가게 할 수 있는 영혼과 정신의 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들이 그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슬기로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도대체 그 영혼과 정신의 힘이라는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일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불신자들 속에서 나름대로 훌륭하게 자신의 인생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나가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모든 영적이고 정신적인 죽음에 항거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생명 혹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라 등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유한 의미의 이런 생명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비록 하나님을 몰라도 하나님의 법도에 맞게끔 진리 가까이에서 진리로 가까이 다가가서 살아간다면 그 어떤 정신의 힘과 그리고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도 그들이 심지어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동물들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빈 잔을 우리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을 때에는 그 정체가 무엇이고 또 무엇으로 그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수 있는지를 인식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영혼의 그 빈 잔을 채우는 노력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한다든지, 쾌락을 찾는 일에 몰두한다든지, 의미 없는 헛된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 같은 일들이 바로 무지와 오류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갈증을 채우는 노력의 반로입니다.
한 25년 전에 어느 의사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수유리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쓴 글인데 어느 날 병원에서 당직을 서는데 새벽에 급히 택시에 어느 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친구로 보이는 양복 입은 신사들이 환자를 업고 왔는데 병원에 눕혀놓고 진찰을 해보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됐냐?’ 그랬더니 그냥 같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심장마비인 것처럼 쓰러지더라는 것입니다. 의사가 더 할 일이 없으니까 이제 하얀 천으로 덮어놓고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서 가족들이 울며불며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20여년이 넘게 의사생활을 하지만 이렇게 기묘한 폼으로 죽은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대게 태어날 때는 두 손을 움켜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두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한 손은 움켜쥐고 한 손은 펴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가족들이 그렇게 울고 있는데도 그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이상한 폼으로 죽었을까?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나간 다음에 그 시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보았습니다. 화투 두 장이 떨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삼팔광땡이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까 직장에 다니는 이 사람이 동료가 상을 당하니까 문상을 왔고, 밤새도록 동료들과 함께 화투를 쳤습니다. 돈을 많이 잃었고 새벽에 끗발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잔뜩 쌓였는데 화투 두 장이 패로 들어왔는데 그걸 펴보니까 삼팔광땡이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가 문제가 안 되지만 죽을 때는 장소를 잘 골라서 죽어야 됩니다. 자식이 “엄마, 우리 아빠 어떻게 돌아가셨어?” 라고 물으면 그 엄마가 뭐라고 대답을 할까요? “화투 치다 삼팔광땡 들어와서 충격 받아서 심장 마비로 죽었단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웃어 넘겼지만 뭐가 다를까요? 그 사람은 패 한번 돌리면 끝날 화투 두 장을 들고 삼팔광땡을 노래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지만 우리는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집문서, 땅문서, 주식, 증권, 이런 것을 들고 있다가 그거 쳐다보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요? 이것은 모두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이 시인은 자신의 빈 영혼을 고난 속에서도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환희, 희열, 기쁨, 가슴 벅찬 감격,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단어입니까? 최근에 환희라는 단어를 사용해 보신 적 있습니까? 가슴 벅찬 희열이라는 단어를 누군가에게 얘기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 때문에, 그 생명의 사랑 때문에 넘치는 희열이 있다고 고백해 본 적이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빈 영혼을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환희, 기쁨, 희열이 있었기 때문에 배고프고 원수들에게 쫓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목자로 붙들고 일생을 승리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부터 오는 힘이 아닙니다.
오늘 시인은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환희와 희열로 가득 넘치게 된 이유를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 원수들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그 첫 번째를 말씀드리고 부활절 지난 다음날 그 두 번째 이유를 말씀 드림으로써 5절을 모두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이 원수라는 말이 복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를 위하여 한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을 괴롭히는 원수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다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집요하게 시인을 괴롭히며 악을 행하고 고통을 주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을 목자로 사는 시인에게 왜 이렇게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인을 괴롭히고 그에게 고통을 주었을까? 왜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했을까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우리 인생에 닥칠 어려움과 시련들을 요리조리 피해가게 만드는 요행수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지혜를 좇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많은 시련들을 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의 불완전함, 인간의 내면의 깊이 깃든 죄와 그리고 이 세상의 무질서 때문에 당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은 어차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언제나 잔잔한 바다 위에 요트를 띄우고 술이나 마시면서 파티 하는 삶처럼 이어지기를 원하고, 또 잔디밭을 걸으며 그 풀밭에서 산책이나 하기를 원합니다마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고 그 분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은혜와 함께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을 그의 인생의 위대한 소명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 삶의 이유를 가지고 주님 앞에 살 때에 그 인생은 선한 목적을 지향하는 인생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뜻을 세우고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전함을, 악한 세상에서 선을 추구하며 살려고 할 때에 도처에 그러한 세상을 원하지 않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나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선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존재가 거침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기면서 자신의 인생에 고유한 목적을 추구하면서 지탱해 갈 수 있게 하는 정신과 영혼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들이 사랑, 생명, 은혜라고 부르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집에서 그저 양이나 치고 목동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그렇게 지독하게 이 시인을 괴롭히는 원수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셔서 기름을 부으셨을 뿐입니다. 그 후로부터는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야 했습니다. 자신은 사랑했지만 그들은 시인을 사랑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이고자 그를 추격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을 지나면서 그는 수시로 자신의 인생의 한계를 경험했고, 그래서 종종 죽음을 구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모두 지나고 말년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길을 회상해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시련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생명이 이 시인을 붙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II. 밥상을 차려주신 하나님
A. 성경과 “밥상”의 의미
25년 전쯤 혼자 제 방에서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 23편을 읽다가 이 5절을 읽으면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태어나서 아무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놀라운 진리를 23편 5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차려 주시고’라는 단어였습니다. 옛날 우리말 성경에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니까 ‘아라크’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군인들이 항렬을 짓거나 대오를 구성하는 것, 전투에 적합하도록 군대를 배치하는데 사용하는 동사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물건 같은 것들을 정렬해 놓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였습니다. 이 단어를 발견하고 제가 가슴이 터질 듯이 감격했던 이유를 여러분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에게 어떤 손님의 중요성은 그를 위해 차리는 밥상에서 나타납니다.
교인이 1100명이 모일 때까지는 등록한 모든 교인을 찾아가서 심방을 했습니다. 1100명이 넘고 나니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심방을 해도 등록한 사람들을 다 심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등록하신 분들에게는 제가 정말 미안하고 우리 교회 꽤 다녔는데도 얼굴을 익히지 못했을 때에는 제가 정말 더 미안합니다. 저는 가사에 헌신하면서 사는 주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조금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형제들에게 좀 많이 도와주라고 늘 충고를 합니다. 심방을 가면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그냥 심방하면 가슴이 왠지 허전해 하고 밥을 같이 먹어줘야지 심방이 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정말 싫은 것이 그 집에 가서 심방하는 것은 괜찮은데 그 집에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먹고 오는 사람은 너무 쉬운데 주부는 그것을 차리기 위해서 너무 고생을 합니다. 그래서 늘 하지 말아라, 식사 시간을 피하든지 꼭 밥을 먹고 싶으면 그냥 갈비탕이나 뭐하나 먹고 너무 그렇게 호사스러운 음식점을 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집에서 밥을 하겠다면 저는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50대 된 자매님 한 분이 교회 나오셔서 정말 은혜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이분 집을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교구 전도사님이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11시쯤 예배를 드리시고 식사를 하시겠답니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라고 그런데 어디에서 식사를 하냐고 그랬더니 “집에서 차리겠답니다.” “하지 말라고 그래라, 절대 하지 말라고 그래라” 그래서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래도 한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래도 안 된다고 그래 봐라.” 그래서 안 된다고 했더니 그래도 하겠다고 해서 뭐 그렇게까지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이 그리고 그 날짜가 돼서 심방에 갔습니다. 정말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 식탁을 차려 왔는데 제가 태어나서 60평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밥을 먹어봤겠습니까? 그런데 잊을 수 없는 식탁입니다. 세 사람이 교자상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반찬이 가득 차려져 있는데 손을 뻗어도 반찬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차렸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확 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반찬을 차리냐? 이 시간에 차라리 기도를 한 시간 더 하고 성경을 한 장을 더 읽지. 한 끼 먹고 가면 그만인 이것을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냐?” 그랬더니 이 자매님의 마음이 좀 상하셨습니다.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먹으세요.” 한 달 전에 그 식탁을 계획했답니다. 열흘 전에 김치를 담그기 시작하고 일주일 전서부터 밑반찬을 만들고 3일전에 본격적으로 장을 보고 그 전날 밤부터 요리를 만들기 시작해서 새벽에 언니, 동생까지 와서 본격적으로 요리를 만들어서 그래서 놓은 것입니다. 한 12~3년이 지나갔고 그 자매님도 이제는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는지 떠나가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생 동안 그 식탁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한테서도 그런 식탁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딸이라고는 달랑 하나가 있는데 과년해서 늘 걱정을 했는데 어느 날 엄마 아빠한테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저 시집 갈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님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 한번 데려와 봐라” 데려왔습니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30분이 지나지 않아서 부모님들은 금방 알았습니다. ‘저 자식은 아니다’ 결론이었습니다. 단순히 직업이나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안됐다는 것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얘야, 그 자식은 정말 아닌 거 같다. 마음을 고쳐봐라” 그랬는데 이미 콩꺼풀이 씌웠습니다. 계속 반대를 하고 설득을 하니까 이게 가출을 해 가지고 동거라도 할 기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 하고 마지못해서 결혼을 허락해 줬지만 부모님 마음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녁때 딸이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어요.” 왠지 엄마 목소리가 힘이 없습니다. “그래 애썼다.” “엄마 우리 내일 인사갈게.” “그래 와라.” “엄마 우리 점심 때 시간 맞춰서 가려고.” “그래라.” “엄마 우리 가면 밥 줄 거지?” “그래.” “그럼 내일 봬요.” “그래” 그리고 툭 끊었습니다. 그날은 고단해서 자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신랑이 “우리 아침 먹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을 설득했습니다. “좀 참아. 우유 한잔 먹고.” “왜?” “엄마한테 인사가면 엄마가 맛있는 거 엄청 많이 차려 놓았을 거야. 우리 가.” 그래서 이제 결국은 남편은 아침도 못 먹고 우유 한 잔 마신 다음에 선물하나 들고 이제 친정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대문을 열면서 기쁜 마음에 “엄마 우리 왔어요.” 그리고 들어가는데 왠지 조용합니다. 전을 부치고 막 그냥 냄새가 나고 막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조용합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는데도 조용합니다. 가보니까 아빠는 어디 외출했는지 없고 엄마 혼자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엄마 우리 왔어요. “어, 그래 왔니?”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아유 절은 뭘.” 그리고 절을 하고 났는데 배가 고픕니다. “엄마 우리 점심 준다고 그랬지? 우리 맛있는 거 해 놨어?” “그래.” “우리 점심 줄 거야?” “그래 곧 차려주마.” 그러더니 엄마가 부엌에 가더니 2분 만에 밥상을 차려가지고 오셨습니다. 엄마 손에 들려진 밥상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다 낡은 팔각 선반에 누가 퍼먹었는지 모르는 찬밥을 사기그릇에 담겨진 밥에다가 냉수를 잔뜩 부어서 차례 지내는 것처럼 숟가락 두 개를 꽂았습니다. 그리고는 반찬이라고는 달랑 하나,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였습니다. 그걸 내려놓으면서 “시장한데 들게.” 너무 세게 놓는 바람에 밥그릇에서 물이 찍하고 찌끄려져 버렸습니다. 엄마는 말없이 윗목에 조용히 앉아 있지만 밥상은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너 왜 왔니? 왜 네가 하필이면 우리 딸하고 엮어졌니? 난 정말 네가 싫다.’ 밥상이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받은 밥상과 지금 예화에 나오는 이 사람이 받은 그 밥상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밥상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밥상을 채려주신 것이 이 시인에게 왜 그렇게 가슴이 벅찰 정도의 감격이 되었을까요? 아마 시인이 배가 고파서 그랬을 거야.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가슴 벅찬 감격의 원인이 되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밥상에 담긴 성경적인 관점을 이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엄밀하게 말하면 서양이 아니고 동양입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관습과 사상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서구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친숙하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밥상 신앙입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뭐 감추어진 것이라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 언어든지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이 학습을 하고 선교를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게 만만하지 않았고요. 중국만 해도 중국어가 통일된 표준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엄청나게 많은 방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곳은 미리 공부하고 가기가 어려우니까 사람들이 선교사들이 일단 그 지역으로 먼저 갑니다. 가고 이제 바디랭귀지를 사용하면 한 3시간 정도 만에 말문이 열린다고 합니다.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때의 일입니다. 선교사 부부가 가서 지도를 펼쳐 놓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왔고 이렇게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렇게 의사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을 이해한 중국 사람이 전달을 해주면 수염이 기다란 할아버지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촌장 회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장시간의 회의 끝에 활짝 웃으면서 할아버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당신들이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도 좋다’ 허락을 해줍니다. 그리고 서로 얼싸안고 기뻐합니다. 그리고는 마을 회관 같은 곳으로 인도되어 간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제 식탁이 차려지는데 그 문명한 사회의 서구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음식들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만주 쪽에 가면 결혼식에 꼭 빠지지 않는 음식이 뱀국이랍니다. 그래서 팔뚝만한 긴 뱀을 토막을 툭툭 쳐서 무를 넣고 동태국처럼 푹 끓여서 먹여야지만 그게 말하자면 잔치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년한 처자들을 보면서 국수 먹을 때가 됐다 그러지만 거기서는 뱀국 먹을 때가 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으니까 안 먹겠다고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침묵이 흐르고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끌려 나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왜 죽는지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동양의 문맥에서는 이제 이 사람들을 위해서 식탁을 베풀어 주는 그 첫 식탁이 'initiation', 말하자면 입회식입니다. 그래서 이 식탁을 나눔으로써 한 생명을 나눈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고 같이 살고는 싶은데 한 형제는 되기 싫다 그러면 그것은 스파이입니다.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을 때 하나님이 그들 모두 양식이 떨어졌을 때에 똑같은 방법으로 밥을 먹이셨습니다. 그게 만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그 만나를 똑같이 먹음으로써 함께 만나를 먹는 광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임을 매일매일 확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처럼 그들의 영혼을 지탱하게 만든 생명의 말씀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밧단 아람에서 부자가 되어서 도망을 치던 야곱의 집안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라반이 그 소식을 듣고 아들들과 함께 말을 휘몰아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그 재산을 모두 빼앗고 박살을 낼 예정이었는데 그날 밤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절대로 야곱의 집안에 악을 행하지 마라’ 하나님이 준엄하게 경고하셨고 라반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모두 화해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한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증거의 돌무더기라고 하는 돌무덤 옆에서 이 경계를 표준으로 침범하거나 침범해 오지 않도록 약조를 하고 그들과 모두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서 헤어지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식사의 관습은 신약 시대에 와서 아주 영적인 것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너희 선생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세리들과 함께 마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랍비요 선지자라고 치면 거룩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 세리,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 그들과 한 동아리가 될 수 있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이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을 해석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은 저희들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일단 형제들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을 녹여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제 신약의 교회로 넘어와서는 성찬으로 완성이 됩니다. 오늘날은 조그만 잔에 포도주 몇 방울과 그리고 조그만 빵 한 쪼가리를 먹는 것이 성찬이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정상적인 식사였습니다. 충분한 빵과 충분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덩어리의 빵에서 뜯어 나누어 먹고 한 컵에서 모두 그 잔을 마심으로써 자신들이 한 가족이요, 생명의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계시록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데 그 중의 라오디게아교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면서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그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그 교회에서 밥을 드시겠습니까? 이것은 그렇게 인격적으로 주님을 모셔 들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오셔서 결코 배반하지 않으시며 가족처럼 함께 생명을 나누고 사신다고 하는 생명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B. 밥상을 차리심
자, 그렇다면 이 시인이 오늘 원수의 목전에서 한 밥상을 나를 위해 차려 주시고 라고 했을 때에 이것이 왜 그렇게 감격스럽게 다가오는지를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을 해설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인은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입지전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상처투성이의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 어머니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슴 아프게도 “내 부모는 나를 버렸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파고들며 일생을 그의 품에 기대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했지만 형제들은 그를 미워했고 자신을 사랑하던 여자는 자신의 심오한 신앙의 세계를 공유할 수 없는 세속적인 여자였습니다. 허허로운 인생의 가슴 아픈 날에 한 시선에 사랑을 빼앗긴 여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불행히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런 인생길을 지나면서 수많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고 버렸지만 그러나 그 많은 상처들을 모두 덮고도 남는 무한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 앞에 그 풍성한 말씀의 식탁을 차려 주시는 그 은혜의 감격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식탁이 바로 ‘아라크’의 밥상이었습니다.
목포로 집회를 하러 내려갔는데 얼마나 많이 부려먹는지 너무 힘들었습니다. 새벽에 설교하고 나면 또 아침 먹고 가서 설교를 하고 끝나고 나면 저녁때 가서 집회를 해야 되고 정말 그때는 젊었는데도 체력이 감당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어쨌든 아침 집회가 끝나고 나면 빨리 숙소에 데려다 주면 좋겠는데 점심을 대접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피곤한 사람을 봉고에 싣고 아무데서나 먹지 40분~ 45분을 달려갑니다. 한정식 유명한데 도착을 했답니다. 어마어마하게 호사스러운 식당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15000정도 주는 식당이었으니까 그렇게 싸구려 식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호사스러운 식당도 아닙니다. 원래 그 삼남이 음식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밥이 나오는데 언제까지 나오는지 알아야지 이게 양을 조절을 하는데 몇 코스 먹고 나니까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러나서 가만히 있는데 너무 심심해서 8명이 밥을 먹는 상의 그릇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200개까지 세다가 포기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뚜껑과 앞접시까지 모두 다 포함해서 센 숫자였습니다. 그게 바로 ‘아라크’의 밥상이었습니다.
C. 떡이신 그리스도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정말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친구의 따뜻한 위로, 사랑하는 가족들의 격려, 그리고 은혜 받은 교인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힘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졌습니다. 인생의 시련과 고난이 많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면 언제나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주님의 위대한 말씀으로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통이 가득할 때일수록 말씀 앞에 무릎을 꿇으면 그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대한 만찬장으로 저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는 유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내가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찬양)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고난의 계곡을 지날 때 그런 시련과 고통이 아니었으면 결코 받을 수 없었을 주님의 말씀의 성대한 식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식탁에서 핍절한 자신의 영혼이 원기를 얻는 귀한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고,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 진리와 성령 때문에 채워지는 그 환희와 희열, 가슴 벅찬 진리로 말미암는 감격 때문에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시편23편 강해 7 (2015.04.12 주일오전설교)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이 세상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이 비밀스러운 생명,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오묘한 비밀들이 있기 때문에 시인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삶의 사태를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원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삶의 사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 역경보다 위대합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난관이 어떤 가슴 아픈 비극적인 난관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 모든 난관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싶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리고 싶은 사람들을 살리고, 강하게 하시고 싶은 사람들을 강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자기를 구름처럼 에워싼 원수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넘치도록 채우시는 생명의 비밀이 있었기에 상처투성이 뿐인 인생길을 찬송하며 걸을 수 있었고 그리고 인생의 말년에는 “나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충만히 누리며 여러분의 인생을 능력 있게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름을 부어주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下)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인이 자신의 영혼에 빈 잔이 넘친다고 고백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자신에게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기름을 그의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밥상을 차려주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이번 시간에는 기름을 시인의 머리에 바르신 것이 무엇이기에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고난과 시련으로 찬 인생길을 지나며 힘과 위로, 그리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고달픈 인생길에서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환희와 기쁨을 경험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II. 기름 부음의 의미
A. 구약의 삼직과 기름 부음
그러면 시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 구약에 나오는 삼직과 기름부음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특한 목적을 위해서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한 나라가 되게 하신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보존하고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진 온 인류를 주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아주 특별한 민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아주 고유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이스라엘의 특별한 특징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직접 다스리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 세 가지 특별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삼직이라고 하는데 마치 솥발처럼 이스라엘 국가를 떠받들고 있는 세 개의 직임이었습니다. 왕과 선지자, 제사장이 바로 그 직분이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이 계시해 주신 의지를 따라 그의 통치의 질서를 자기의 나라에 세우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법을 만들고, 제도를 수립하며 백성들을 그 법과 제도에 맞게끔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나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직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모세의 율법을 그 시대에 맞게 해석함으로써 그들이 자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가르쳐 주는 임무가 바로 선지자의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선지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백성들 편에서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범죄한 백성들이 불결하였지만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교제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열어주는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고 이것은 율법에 게시된 제사의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직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없는 독특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국가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왕으로 부름을 받았고,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부으신 실제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감람유가 사용되었고, 이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올리브기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그들이 받을 성령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람유를 붓는 기름 부음의 형식적인 상징은 바로 그것과 함께 실제로 삼직에 취임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실제적인 임재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과 관련한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 시대에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님이 임하시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임하시는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명을 주시면 기름 부음을 통해 성령이 임하고 그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지혜와 능력, 사랑, 용기, 이런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모두 끝나면 다시 성령은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은 사뭇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리고는 영원히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연합을 이루게 되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핵심이 바로 성령의 내주입니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성령님의 역사는 구약 시대와는 사뭇 다르고 이를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결합을 위해서 오셔서 영원히 내주하시는 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세례 요한을 높이면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아이라도 세례 요한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는 천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임하게 될 성령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 영적인 유익을 누렸지만 신약 시대의 성령이 내주 하실 때에 받는 가장 어린 아이의 그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세례 요한을 능가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성령 충만한 삶과 그 은혜라고 하는 주제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B. 성령 충만한 삶의 은혜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시인 다윗은 기름 부음의 경험을 통해 성령 충만한 삶의 행복과 그 은혜의 비결에 대해서 눈을 떴던 것입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세 번의 기름 부음을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 기름 부음의 경험은 사무엘상 16장에 나오는데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새의 집에 있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성령은 충만하게 임하셨고 그에게는 하나님이 놀라운 권능을 주셨습니다. 권능과 함께 지혜와 순전한 사랑과 용기 같은 통치자로서 꼭 필요한 영혼과 정신의 힘도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 후 사무엘하 2장에 나오는데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 기름을 부어 그를 지도자로 삼은 사건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사무엘하 5장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윗에게로 나아와 기름을 부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때였습니다. 다윗은 모두 세 번의 기름부음을 경험했고 그때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있었지만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강력한 기름 부음의 경험은 첫 번째였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의 기름 부음은 첫 번째 기름 부음과 함께 경험했던 성령의 충만한 은혜 안에 있는 소명을 이루어가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충만한 성령의 기름 부음을 경험했고 성령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께로부터 위로와 용기,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고 살해하려고 했던 사울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은혜와 감격을 회상하면서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게 만드셨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환희와 감격을 5절에서 노래한 것입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논두렁에 엎드려 인생의 허무함을 자각하고 통곡하던 15살 시절부터 6년 동안 교회와 발길을 끊었습니다. 매일매일 눈을 뜨면 만나는 무서운 현실 속에서 단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두려운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제게는 사는 것이었고 그래서 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 많은 독서들이 저를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철저한 무신론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평안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저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6년 만에 찾아오셔서 제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사로잡힌 끝자락에서 읽은 몇 권의 기독교 작가들의 책의 도움이기도 하였습니다. 밤새워 공부하고 새벽이면 뒤뜰에 나아가 드넓은 밭 한 가운데서 새벽안개를 찢으며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를 마주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님은 제 마음을 녹이셨고 그렇게 6개월 내지 8개월 정도의 진통의 기간이 있고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75년 9월 어느 날 저는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아주 작은 교회를 찾았고 제가 갔을 때에는 한 2~30명의 교인이 누덕누덕 기운 방석위에 앉아서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삐그덕 거리면서 연주하는 풍금을 통해서 울려 퍼지는 찬송가를 들으며 저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짓말로라도 이런 평화를 내가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속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던 어느 날 목사님은 저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학습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교회당을 다니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쳐도 세례를 받고 주님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표독스럽게 주님께 대적하고 그 더러운 무신론에 빠져서 주님을 모욕했던 내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주님과 혼인하고 그 분의 신부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세례받기 1주일 전 30분 정도 떨어진 길을 걸어 밤마다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강대에 촛불을 켜놓고 매일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정말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저는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을 내 머리에 바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목사님의 손이 내 머리에 닿았을 때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주 특이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머리 위로부터 천천히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운이 내 몸을 완전히 채운 후에는 마치 제가 깃털처럼 가벼워져 공중에 뜬 것 같았고, 나의 몸의 어떠한 무게도 감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줌의 구름이 되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예배드린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는데도 제 마음속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이 제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말씀하시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살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5년 후에 저는 결혼을 했고 결혼과 함께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새벽마다 집 가까운 교회당에 나아가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12월 매우 추운 엄동설한이었습니다. 한참을 새벽에 기도하고 보니 너무 춥고 주위가 고요했습니다. 함께 기도하던 성도들도 모두 돌아가고 목사님도 사택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추운 예배당에서 저는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면서 내가 이렇게 긴 시간을 눈물로 기도하는데도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배당 통로 밑바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편안하게 기도하니까 나의 정성이 하나님의 마음에 차지 않았나보다. 내가 만약 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면 주님이 불쌍해서라도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무릎을 꿇었고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체 바닥에 그 손을 대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차가운 냉기가 얼어붙은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뼛속까지 사무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다리에 감각이 사라져 가고 있을 때 저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발이 얼어서 동상에 걸리거나 다리가 저려서 끊어져도 내가 여기에서 일어나나 봐라.’ 그러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5년 전에 경험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제게 임했고 그리고 저의 온 몸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는 잔잔한 평화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온 몸은 펄펄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며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거기서 저는 방언을 경험했습니다. 얼마를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큰 목소리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눈을 떠보니 찬란한 아침 햇살이 교회 예배당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직장에 갈 시간이었습니다. 일어나 예배당을 걸어올 때 체험은 달랐지만 효과는 꼭 같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 인간 말종과 같은 무신론에 빠졌던 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숨 쉬고 살아있는 날 동안 주님처럼 순전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언제나 그때의 기억은 새롭습니다. 이후로도 그런 신비한 성령의 체험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 신앙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다윗의 첫 번째 기름부음처럼 강렬한 첫 사랑의 인식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반포대교를 지나며 고액권 화폐 다발을 두 다발이나 뿌렸습니다. 바람과 함께 돈들은 다리 위에 휘날렸고 지나가던 버스며 자가용이며 할 것 없이 차를 세우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 바람에 날리는 돈을 줍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비웃고 있었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 돈 다발을 뿌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유유히 차를 몰고 미사리 쪽으로 계속 달렸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시시하면 그런 짓을 하였겠습니까? 그렇게 돈을 뿌린 사람도 불쌍하고 그거 몇 장을 주워 보겠다고 차에서 내려서 이리 저리 다리 위를 뛰어다니던 사람들도 가엾습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인은 결코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시련, 역경과 환란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삶의 사태들을 이기며 자신의 영혼의 닿을 하나님께 깊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붙들고 목자 되신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을 신령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심으로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그에게 공급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이 그에게 공급해 주시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서 그 모든 역경들을 헤치고 믿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행복하십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여러분의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가는데 보탬이 되시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곤고하게 사는 것은 크게 보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죄도 나오고 방황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나더러 황금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제왕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아마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된 구원의 행복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 써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참된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만이 여러분의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 없이는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후히 주시고 아끼지 아니하시는 것이 바로 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줄 부모가 없고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전갈을 줄 부모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가 결국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면 모든 삶의 사태가 우리의 마음 먹은 대로 된다고 할지라도 핍절한 영혼으로 누릴 수 있는 그 행복이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유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영혼을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의 기쁨,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말미암는 환희가 있었기에 오늘 이 시인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구원의 노래를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부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의 근원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하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이 주님을 의지하고 이 말씀을 따라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드디어 우리는 시편 23편에 끝 절에 도착했습니다. 푸른 풀밭에서 꼴을 먹고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이 소생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이제껏 받아본 적이 없는 화려한 식탁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시인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시인은 이 모든 고백을 토대로 이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미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자신의 결단을 적고 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함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였습니다.
II.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A. 선하심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심으로 그 모든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것이었는데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기를 따라오리라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따라오다’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말로 ‘라다프’라는 동사인데 이것은 추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범죄자를 추격하는 수사관,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를 향해 미사일을 쏘면 비행기가 어디 쪽으로 가든지 반드시 따라가서 그 비행기를 부딪치고 마는 미사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런 굳센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쫓아가서 잡고야 마는 그런 동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인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함과 인자하심으로 자기를 추적하시고야 만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을 관대하게 대해주시는 호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신 분이시면 왜 이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그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세상은 선하고 그리고 평안해야 한다고 하는 당위의 명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왜 당신은 이 세상이 원래 아주 평화롭고 아주 선해야 된다, 꼭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생각 자체가 종교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알빈 플랜팅가라는 기독교 철학자가 지금 바로 말한 이 논리를 가지고 무신론을 성공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신자들의 철학자들도 상당 부분 수긍하는 논리입니다. 만약 하나님도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 어떤 질서도 없다고 생각하면 이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게 왜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왜 나쁜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 와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의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 사람이 악하게 살고 죄를 지으면 그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가 잘못 행했을 때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셔서 결국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함께 있는 자녀가 정말 사랑하는 자녀라면 그가 잘못했을 때에 여러분은 그들을 괴롭히지 않습니까? 고통을 주어서라도 그 길이 아닌 것을 알게 하지 않습니까?
지난주가 세월호 1주기였습니다. 우리 중에는 아무도 우리 자식을 그 바다에 묻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인 3자일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에 따라서 그 고통에 동참할 수는 있습니다. 세월호 사태가 나고 얼마 안 되어서 아모스서를 가지고 제가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 속에서 제가 과격한 표현을 한번 썼습니다. 이 그지 같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몇 성도님들이 이 설교를 듣고 충격을 받고 시험에 드셨답니다. 그래서 제가 시험에 들일도 정말 많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실수하신 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저 실수 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권세에 복종하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읽어드리겠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 13장 1절입니다. 근데 왜 그 다음 다음에 있는 구절은 못 읽습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이런 국가에 대해서 순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국가가 국가이기 때문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쳐 준 교육이 아니라 독재 정권들이 가르쳐준 교육입니다. 적어도 우리 나이 60대 70대까지 되신 분들은 이미 벌써 다 그런 교육에 오염된 사람들입니다. 아주 특별한 노력으로 거기서 극복한 사람들이 아니고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쳐준 태도도 아니고 기독교의 주류가 가르쳐주는 국가관도 전혀 아닙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한참 고민하면서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시리즈를 설교하고 싶습니다. 충분히 설교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리석은 비늘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아니 교회의 영광스러운 권세에는 쉽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말도 되지 않는 잘못된 국가의 권세에는 왜 그렇게 쉽게 굴복할 마음을 가집니까?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할 때 93%의 국민의 지지율을 받았는데 역대로 근대 이후에 어느 나라의 국가도 어떤 지도자도 도달하지 못한 환상적인 지지율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국민은 자신의 모든 자연적인 권리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존엄성의 권리를 국가에 위탁했고 마지막에 괴물 같은 나치 정권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런 정권의 괴롭힘을 받은 흔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일본 군국주의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세월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어떤 문맥에서 이 그지 같은 나라라고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물에 빠져서 죽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물에 빠져 죽었습니까? 물론 그 아이들도 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몇 명쯤 될까요? 나는 목사지만 그 아이들보다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회의 만연한 욕망과 더러운 부정직과 불의한 구조들이 그 끔찍한 사고를 만들어 낸 거고 그 사고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국가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나라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국가가 할 수 없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문재인이라는 개인을 욕합디까? 아니면 박근혜라고 하는 한 사람을 내가 비난을 합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 자리는 내일이라도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자리입니다. 나는 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권력이 그런 식으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피 끓는 분노를 느낄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설령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수많은 사회의 악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흉측한 열매로 나타난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1년이 지나고 나서 전문가들이 다 조사를 했는데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답니다. 제 2, 제 3의 사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상당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좋아하는 로마서 13장 1절 권세 가진 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교인들을 잠들게 했던 교회 지도자들이 바로 나치에 동조하던 그 사람들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복종하던 그 보수파의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일제 때에는 일제에 아부하고 그것을 원하십니까? 국가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이 하겠다고 하니까 허락을 해주신 것입니다. 교회와 같은 권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갖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국가가 괴물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백성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지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며 잘못했을 때에는 회초리를 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국가란 무엇인가 시리즈에서 듣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이시니까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고통해지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깨우쳐 당신께 돌아오게 하고자 함입니다.
B. 인자하심
시인은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가치 없는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모든 성도로서의 일생, 인간으로서의 삶은 하나님의 박애로운 성품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보고 그리스도인인데 하나님이 있는 것을 10분 안에 증명해 보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없다는 걸 10분 안에 증명해 보여주마” 그리고 입을 열고 하늘을 향해서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부었습니다. 10분 동안 퍼부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봐라 하나님은 없다.’ 그때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란다.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네가 그 신에 대해서 그렇게 개 거품을 물고 욕을 하는 이유가 뭐가 있니?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 봐라 참지 않으시냐?’
로마가 한참 강성했을 때 아주 정확한 통계는 아닌데 기억 속에 있으니까 로마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로마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지요. 폼페이가 5만 정도였고 제가 기억으로는 로마가 1세기 인구가 50만 명쯤 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전 세계 인구가 10억이 안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확신할 수 없지만 7억인가로 기억을 합니다. 로마가 1억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도시에 아침마다 수백 대의 마차에 맛있게 만든 빵을 가득 싣고 온 거리에서 빵을 나눠주었습니다. 대상은 누구냐 하면 너무 가난해서 굶주린 사람입니다. 매일 나눠주는 것입니다. 아무 대가 없이 왜 그랬을까요? 로마의 시민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도시 로마의 성 안에서 누군가가 굶주린다는 것은 로마의 수치다 나눠주었습니다. 빵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누구냐, 착한 사람이냐, 남자냐, 여자냐, 노예냐 그게 아니라 로마가 가지고 있는 자기 도시에 대한 자부심과 그리고 굶주린 사람에 대한 애정이 그들로 하여금 빵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관련해서 설명하자면 우리가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인자하시기 때문에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 것이 바로 이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무리 끔찍한 죄인이라도 주님께 피하면 하나님은 사람은 그들을 버렸어도 주님은 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 시인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을 붙들고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일평생 자기를 추격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모든 불안과 염려는 현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임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III. 여호와의 집에서 살다
A. 여호와의 집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집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때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집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 시대 때에 이동식 성전인 성막이 계시됩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따라서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시 받은 대로 성막을 짓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를 가든지 그 성막이 먼저 펼쳐지고 열두 지파가 진을 칩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았어도 성막은 하나였습니다. 거기서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전 신앙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동식 성전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는 이제 돌아다니지를 않고 한 곳에 머물게 됩니다. 물론 약간 이동하지만 그러나 한 곳에 있으면서 그러면서 이 성소의 중앙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성전 신앙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슬픔과 기쁨, 영광과 수치, 태어나고 죽는 것, 모든 것들의 슬픔과 기쁨을 가지고 성전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왕들은 국가의 재난이나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 하나님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나라가 벼랑 끝에 서게 됐을 때에도 왕은 이렇게 성전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이 그렇게 커다란 기도 제목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열려진 곳은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시절에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같이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기나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나 다윗의 왕권을 바라보며 기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첩으로부터 받는 구박이 너무 서러워서 그 서러움을 안고 찾은 곳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런 거기서 한 여자의 슬픈 사연을 토해 놓으며 눈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바로 이렇게 교회 속에서 가장 충만히 누려집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노래방에서 유행가를 부르다가 회심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이 일생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가슴이 터질 것처럼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다짐하는 일이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며 일평생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 시대의 교회가 신자에게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신자의 어머니
그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입니다.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요즘은 교회를 헬스클럽처럼 여기고 교회 옮기는 것을 자기 아들 과외 공부 옮기는 거보다, 학원 옮기는 것보다 더 쉽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니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그러니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는다는 게 뭔지, 교회가 뭔지, 그 일원이 된 것이 무엇인지, 세계와 교회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속에서 무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떨어질 수 없는 신약 시대의 신자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미 있는 교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몸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팔, 다리 아무것도 없이 예수께 그냥 붙은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몸과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을 때 거기에 교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지평에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입증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아시는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 교회와 접붙여져서 일생을 그 교회의 한 지체로서 기쁨과 서러움을 교회와 함께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기억의 맨 끝자락은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그때의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보여도 그 옛날 시절에 유치원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다행히 시골에 사는 집 앞에 감리교회가 있었고 부모님은 교회에 절대 다니지 않으셨지만 그 감리교회는 선교사가 세운 교회였고 선교사가 하는 유치원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집입니다. 지금은 그 선교사님 얼굴도, 교인들의 얼굴도 모두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약간 어두운 색칠을 한 그 어린이집의 마루, 그 위에 굴러다니고 가지고 놀던 빨갛고 파랗고 노란 나무 블록들, 친구들과 함께 마당에서 즐겁게 뛰어놀던 기어고가 그 소리, 우리 집 바로 뒷집에 꽤 큰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아주 예쁜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엄마를 제외하고 내가 만난 첫 번째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사이좋았고 늘 손을 잡고 신작로 길을 길어서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이 끝나고 나면 노란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 담장 밑에 난 이름 모를 풀들을 뜯어서 가방에 담으며 이거 가지고 가서 떡을 해먹자고 했습니다. 겨울이면 바로 동네 뒤에 있는 꽤 넓은 개울에서 형들이 신나게 얼음을 지쳤습니다. 너무 타고 싶었지만 그 강둑에 앉아서 형들이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신기하게도 형들이 채찍질을 하면 춤을 추듯이 팽이들이 얼음 위에서 돌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꼬리가 긴 연은 하루 종일 바라봐도 신기했고 그렇게 줄 하나를 가지고 흔들면서 높이 떠오르는 연을 조정하는 형들은 나에게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유치원의 그 마루, 친구들과 떠들던 음성,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귀엽고 예뻤던 그 여자 친구, 그리고 개울에 흐르는 물소리, 어린 아이들의 함성소리, 모두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신작로 길을 걸으면 작은 도랑이 나오고 그것을 건너면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젖히면 우리 집 마당이 나왔고 그리고 방의 모습도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게 55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손을 뻗으면 만질 것 같고 지금도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지금도 그 아이들과 함께 뛰놀던 기억들이 생생해서 한 두주 전에 경험했던 일들 같은데 55년,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교회를 세울 때 저의 나이, 만으로는 37살이었고 우리 나이로는 39살이었습니다. 혈기 충천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 지하실에서 한 시간 반씩 피를 토하듯이 설교를 하고 나면 착한 성도들은 한 시간씩, 두 시간씩 앉아서 울었습니다. 지금도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때 성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모두 은박지를 깔고 않아서 둥그렇게 앉아서 금요 기도를 하면서 눈물 흘리면 그때 한 살밖에 안됐던 우리 딸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크리넥스 티슈를 뜯어서 교인 하나 하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 바스락 거리는 크리넥스 소리, 성도들의 울음소리, 아이의 그 앙증맞은 행동, 심지어는 그 교회당의 냄새까지도 아직 코끝에 느껴지는데 그게 횟수로 23년이 지났고 저는 목회 사역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 것입니까? 바람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바람같이 스치듯 살다가 지나가는 것이 마치 아침에 들풀에 맺혔다가 햇빛이 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VI. 적용과 결론
할 말이 마음에 꽉차있지만 설교를 맺겠습니다. 잘 사십시오. 그리고 바람같이 지나는 인생의 끝에 여러분이 피땀을 흘리고 몸부림을 쳤던 모든 것들이 죽는 순간에 여러분과 함께 지났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엄마아빠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어떤 분들은 그 분들이 좋은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그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태어났을 때 그 어머니는 교회였고 그 아버지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거짓된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고 여러분을 버렸을 수도 있지만 참 교회는 한 번도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은 적도 없고 버린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아닌 것들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해서 참 교회인 어머니를 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언제나 거기 계셔서 선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행한 악도 선하게 바꾸어 주셨습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고통을 받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미운 물건처럼 새기고 생각하고 떠나갔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공로 때문에 우리의 죄는 기억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께서 덧입혀준 의만을 기억하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지나온 우리의 인생만 빨리 지나 간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우리의 인생의 날들도 언젠가는 우리 앞에 있었던 날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날들은 지나간 그 날들처럼 속히 사라지는 날들입니다. 그러므로 잘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마지막에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 주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에 남은 고난을 자신 안에 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