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찾는 자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 : 4)
녹취자 : 정은숙B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찾는 자, 그리고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 두 가지가 나오는데 모두 같은 말의 평행법적인 반복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곧 환란과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시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뜻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속에서도 환란과 시련을 만났을 때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를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찾는 대신 자신의 힘으로 이 어려움을 해결해보려고 하거나 혹은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구원을 앙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찾는다’ 라고 나오는데 찾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벌써 오래전인데 여권을 만들어서 미국 비자까지 받은 다음 잘 둔다고 어느 책갈피 속에 끼워놨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책이 한 두 권이 아닌데 그걸 다 뒤지면서 찾아보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미국 비자 받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까다로웠습니다. 서류를 꽤 많이 만들어서 가서 받았는데 다시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집사람이 포기하고 다시 발급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도 마음속에서 일주일 동안 사라지지를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아니 두 주 정도는 밥을 먹으나 누워있으나 겉모습이 푸르스름한 책 사이에 끼워놓은 것 같은데, 밤중에라도 내려가서 불을 켜고 푸르스름한 책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이렇게 한 일주일 정도 집중적으로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는데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게 바로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이 정도 마음이 꽂힌 거구나, 아니 그 이상이겠지요.
우리는 대개 의지결핍입니다. 뭘 찾는다, 그러다가 에이, 없으면 그만이지 포기해버리고 간단하게 그러듯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도 대개 그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될 필요,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할 필요를 안 느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만나고자 하는 의지의 올곧음과 크기가 그렇게 크지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일들에 대한 생각이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엔 당신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생각하시는 그런 판단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으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이 그 환란 속에서 자기를 도와주시는 것을 통해서 아, 하나님이 내 편이시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해주시는 방법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높은 사람이나 존귀한 사람으로부터 작은 선물을 받거나 혹은 칭찬을 들을 때 그 선물이나 칭찬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저분이 나를 마음에 깊이 생각하는구나, 사랑하는구나,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통해서 깊이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듯이 하나님이 시련 속에서 우리는 도와주시면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잊혀진 사람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나를 긍휼이 여기시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고 원하시는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주시면 그것을 통해서 이 시인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십니다 라고 말하게 하소서’ 여기서 하나님의 광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광대성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장소적으로 무한한 것, 이것을 편재성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대상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끝이 없이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것, 전지하심이겠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한 시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에 걸쳐 계신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심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은 배경이 있습니다. 시인이 다윗이 살던 이 시대 사람들은 대개 신들에 대한 생각들이 영역 신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local God의 개념인데 신들이 너무 많으니까 사람들은 신들이 각각 자신의 지역과 관할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그것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그랬거든요. 아마 그 관할을 벗어나면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랬을 것이다 라고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에게 있어서 예를 들자면 ‘내가 여호와를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의로운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이런 고백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었던 지역신의 개념을 깨뜨리고 하나님 여호와가 온 땅과 만물 위에 가장 뛰어나시고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아주 새로운 인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이 세상에 모든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이 시인은 이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서 모든 만물을 주관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에 대해 적절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인가 호주인가를 갔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목사님 얼굴 하고 당사자 얼굴은 또렸이 기억이 납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서 그 사람을 굉장히 칭찬을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고 아주 훌륭하다고 하면서 칭찬을 했습니다. 안수집사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한다고 여기저기 다 흩어지고 단 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담임 목사님도 자리를 비우시고 그랬는데 “목사님 늘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는데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라고해서 해보라고 했더니 황당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불교 천주교 모슬렘 힌두교 수 없이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 기독교를 진리라고 믿고 살아가는데 만약에 마지막 우리가 죽어서 주님 앞에 갔을 때 기독교가 전부 가짜고 이슬람교가 진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는 거다, 당신은 신자가 되는 신앙부터 다시 배워야한다고 까칠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황당한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사람들의 믿음을 잴 때 함부로 잴 수는 없지만 그 기준이 교회 나오고 목사님께 협조를 잘하고 헌금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목사님이 뭘 보고 저 사람을 그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하고 조만간 장로를 시킬 그런 마음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결국은 한 번도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있는가 이런 데에 기준이 맞춰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 아예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아는 빛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고 그것을 능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데 하나님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잘 알지는 못하던 사람들이 시련과 환란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 응답해주심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해주시되 결국은 ‘어떠한 악인도 하나님께서 지켜보시고 고난을 당하는 의로운 사람들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줄 알고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자기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긍정적으로 우리 인생을 보면 우리가 아무리 바이올린이나 혹은 현악기를 잘 만들었다하더라도, 건반악기도 마찬가지지만 두드리거나 켜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모든 지식들은 두드리거나 켜거나 하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다양한 환경, 고난, 시련, 아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배신, 그런 모든 것들이, 그런 부정적인 것들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감사, 영광, 기쁨,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하나의 활이 되어서 그 현들을 건드리면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큰 축복을 통해서만 배우는 게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시다, 아름다운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데 단, 그런 시련과 환란 자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아름다운 가락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들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들을 읽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항상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에 매몰되어서 거기에서 번영하고, 잘 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많은 물질들을 소비하고 하면서 사는 데에서만 인생의 행복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보이지 않는 성품을 연주하셔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가락을 들려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가고,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도록 살아간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