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71:10-12)
녹취자:장형주
이 시인은 자기를 둘러싼 악인들의 도모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헤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시인을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은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이 시인의 관계가 끊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보호는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해서 그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그렇게 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방법은 시인이 신앙적으로 미끄러지거나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기를 기대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악인들은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라고 했는데 이것이 원수들과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수라는 말이 원래 히브리어에서 오헤브(?)라는 것인데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미워하는 자와 영혼을 엿보는 자가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워하는 자, 영혼을 엿보는 자 훨씬 더 힘이 강력해서 무엇에든지 굴복함이 없거나 혹은 도덕적으로도 자신만만하고 떳떳하면 숨어서 엿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힘이 약하거나 정당성이 결여될 때에 자기를 감추고 남을 엿보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시인들에 대해서 하는 행동의 방식이 바로 그렇게 엿보고 그리고 그를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을 하면서 서로 꾀하였다고 하니까 악인이 하나, 둘이 아니라 자기를 에워싼 많은 악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따라잡는다는 것은 전쟁에서 패전한 군대를 추격하는 것을 염두해 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사실 이 판단이 옳은 판단이었다고는 생각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에는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고 번성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이 버리셨는데도 이 세상에서는 번성할 수 있고 하나님이 강하게 함께 하고 계신대도 고난의 풀무불 한 가운데를 통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에게는 이것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신앙의 지식이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지식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외롭게 거하고 있는 것만을 보고 ‘별볼일 없다. 하나님이 저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다. 저에게는 번영이 없고 저에게는 영광이 없고 저에게는 힘이 없구나. 저는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 끊어졌으니 패전병의 신세다. 군대를 추격하여 패전병들을 따라잡아 괴멸하는 것처럼 이 시인을 공격하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옳은 판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이 시인을 붙들고 계셔서 주님 자신의 무시로(?) 피할 바위가 되셨고 또 주님 자신이 반석이며 산성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아뢰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고 원수들을 파멸해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는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는 결국 뒤집으면 자신을 친근히 해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누렸던 최고의 영광은 가까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가르치기를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복 받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처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고 친근히 하셨던 백성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이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는 사실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아서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안주셔도 사람을 통해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고 친근히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니 누가 하나님을 강요하여 우리에게 친근히 하도록 재촉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가까이 있고 친근함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언약 백성의 가장 커다란 특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 가까이에서 은혜를 입고 하나님 가까이에서 사랑을 입는 이것이야말로 언약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요 또 기쁨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속히 나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시인은 언약백성들의 가장 큰 특권이 친근함과 도우심이라는 것을 12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께 도움을 입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서도 도움이 있지만 이것은 인생의 결정적인 도움이 아니요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우심만이 결정적인 도움이고 최상의 도움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섭리 속에 도움이 넘쳐도 하나님의 면전에서 직접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야 할 필요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은혜를 베풀면 베풀수록 더 주님을 의지하고 교만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섭리 속에서 복을 주실라 치면 그 복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커다란 두 가지 특권, 친근히 함과 도우심 이 두 가지를 누리면서 어떤 시련과 고난도 헤치고 수많은 원수들이 자신을 에워싸도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자들이고 이 세상에서 보호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친근히 하심과 도우심을 의존하며 사는 언약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