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자의 낙담 3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4)
녹취자: 박지성
시인이 지금 낙담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낙담은 악인의 번영 때문이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과 번영,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의 평안함과 번영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낙담의 요인은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며 자기의 경건한 도덕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앞에 있는 두 가지 낙담을 결합한 것과 같은 묘사입니다.
우리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라는 구절에서 반문하고 싶어집니다. 자신이 재앙을 당했다면 여기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화) 불평 없이 잘 살았는데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는 자기보다 공부도 훨씬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었지만 엄청나게 대박이 터진 신랑을 만나서 외제 승용차를 타고 기사를 거느리며 모임 장소에 나온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됐겠습니까? 갑자기 강력한 박탈감이 느껴져서 남편은 눈에 안차고 나만 엄청나게 고생하는 것 같은 슬픈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재앙은 무슨 재앙입니까? 재앙을 만났다면 자기가 죽든지 어디가 부러지든지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지 어떻게 여기서 너불거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며 투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랑”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강해하면서 제가 시종일관 계속 이야기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투기하지 않으며 산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투기하지 않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성경에 있는데, 우선 투기는 대부분 한 대상을 여러 사람이 같은 목적으로 할 때 일어나는 갈등을 투기라고 묘사합니다. 예를 들면 “나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너희가 나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느냐?’라는 뜻으로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하나님도 인간을 바라보고 있고 우상도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균열이 생기면서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투기 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아주 직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인간수준으로 당신을 낮추어 인간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코모다치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쉽게 설복되고 가슴에 아주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예화)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좋아하거나 한 여자를 두 남자가 좋아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둘 사이에 흥정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는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다 필요 없고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이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그것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면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절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예화)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때, 심지어 부모에게 자식이 사랑을 받을 때에도 큰아이를 엄마가 예뻐하면 작은 아이는 ‘엄마는 나만 미워해’라고 합니다. 작은 아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큰아이를 약간 더 사랑한 것뿐인데 큰 아이도 작은 아이를 예뻐하면 ‘아빠는 나만 미워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사랑해도 하나님이 저 사람을 아무리 많이 사랑해주셔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분할하여 나를 사랑하신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각자 모든 사람이 자기만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보면 “재앙을 당하며”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박탈감에서 나오는 상대적인 표현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일단 신자가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 한분께 고정되어 있는 것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면 생각도 미끄러지고, 감정도 미끄러지고, 의지도 미끄러져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간이 부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껏 보호해 주시고 여태까지 인도해 주셨더니 “종일 재앙을 당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충격적인 대조를 해보고 싶습니다.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봤던 사람입니다. 진짜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완전히 싹 쓸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진짜 재앙을 당한 사람이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며 찬송을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주의 인자는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무한합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하며 감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돌봐 주셨는데도 ‘나는 재앙만 당합니다. 하나님은 왜 나만 미워하십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신앙의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한국 교회의 교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전 세계의 교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누림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하나님 이외에 모든 사물들이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세상에는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아주 정확하게 둘로 나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레스오텐디”인 사용해야할 사물들과 “레스프리엔디”인 누려야 할, 우리가 향유한다고 말하는 사물들로 나뉘는 것입니다. 사용해야 하는 사물들의 목적은 그것을 이용해서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함에 있습니다.
(예화) 건강을 위해서는 계단을 걷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무릎에는 좀 무리가 가지만 계단을 만나면 ‘계단아 반갑다’ 하면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엊그저께도 학교에서 7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집이 7층이었습니다. 7층으로 올라가는데 어느 계단을 아주 예쁘게 치장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앉아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밟고 올라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물질, 명예, 건강, 아름다움, 사랑하는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도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레스오텐디” 곧 사용하여야 할 사물들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도달하게 하고자하시는 곳을 가는데 이바지하도록 사용해야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도움을 주지 만약에 그것 자체와 사랑에 빠지고 거기에 매몰되면 시련과 어려움이 왔을 때 이 시인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반기감, 자신은 버림받았다는 반기감과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뿌리째 흔들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사물은, 하나님도 사물이라고 부르지만 존재니까 “레스”라고 하는데 하나님 한분만이 누려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가끔 예화를 드는데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날 사랑해?”라고 물을 때 “너희 아버지가 돈이 많잖아.”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물질은 구별되는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초창기에 사람도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차 깊어지면서 자신의 의견을 바꿉니다. 사람도 누림의 대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리는 종류를 다시 나눕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빠져서 누리는 것 말고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 성도들,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 그들을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안에 형제들 외에 누가 있습니까? 사람이 형제를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계십니까?” 그는 인간의 영혼과 인간을 영적으로, 진정으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요한1서와 같은 구절을 가지고 논증합니다. 이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귐과 교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우리의 마음에 소외되고 고통 받는 도움과 섬김이 필요한 지체들과 이웃의 얼굴이 떠오르는 그런 사랑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하고 자신도 감당 할 수 없는 말을 쏟아 놓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면 그 마음은 하수도처럼 할 말 못할 말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실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아침마다”는 복수고 “징책”은 단수이므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는 구약에서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아침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던 것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예레미아 선지자도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와 자비를 경험했을 것이고 오늘 이 사람도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항상 혼내시는 것입니다. “야! 너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 똑 바로 살아라. 너는 행동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마음이 순수하지 않구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나온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하나님 앞에 드러나 보이게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야단을 맞는데 그 징책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시인이 낙담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설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복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부유하게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남들을 지배하고, 약탈해서라도 자기가 쓸 자원들을 모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행복이고 기쁨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은 “에쉐르”의 복입니다. 이것은 요약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하는 관계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엉망으로 살고 마음이 불결해도 하나님이 야단치지 않으신다는 것은 최고의 재앙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타락하고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며 살아가는 방탕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형벌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진노의 표현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이 그를 폐기하신 증거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를 좋은 대들보로 쓰려고 한다면 끊임없이 가지를 잘라주고 소독해주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땔감으로나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내버려둘 것입니다. 어차피 톱으로 켜서 토막을 내어 불속에 던져서 화력이나 불꽃을 일으키다가 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아침마다 징책을 본 것은 이 시인이 하나님이 버린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혼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책망 받지 않고 올바르게 될 가능성이 인간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기 위한 목적으로서 때리고 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도 자신의 책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중 하나가 “징계”라고 했습니다. 징계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 자녀의 큰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은 자신의 경건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아픔을 느끼고 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기쁨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신앙의 즐거움과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투기하기 시작하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옳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들이 받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복이 아니며 정말 본질적인 복은 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이 세상이 흉내 낼 수도 없고, 이 세상이 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이 세상이 투기할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복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