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자의 낙담2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3-14)
녹취자 : 이시내
시인이 낙담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모든 사상에 없다고 하고 실제로 그 마음을 자신의 삶으로 쏟아놓으면서 함부로 사는데 그런데 그들이 심적으로 막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안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재물을 누리면서 살아간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게 됩니다. 그럼 나는 어떤가 그러고 보니까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이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을 행한들 아시기나 하겠느냐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매일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왜 그러겠습니까 기도를 한다던지 제사를 드린다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던지 간에 제일 먼저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하나님 앞에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그릇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 앞에 서면 그렇게 그릇되게 행동하고 잘못한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우리가 이전에 행했던 모든 것들을 우리 앞에 보여주시면서 보아라 이것이 너의 마음이니라 그러시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면 안되지 하고 회개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마음을 깨끗이 씻는 것입니다.
손을 씻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손은 성경에서 모든 행실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서 제유법적으로 제시가 됩니다. 왜 그렇느냐 하면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곡식을 심거나 일 년 동안 무엇을 해서 어떤 결과를 남기거나 하는 이런 모든 우리의 삶을 가리켜서 손의 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께 화목제 제사에서 나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밭에서 농작물을 수확해서 왔으면 손만 수고했겠습니까 발도 수고했지 발로 갔으니까 손으로 김도 매주고 씨도 뿌리고 열매도 따고 그랬을 것 아닙니까 그럼 손만 수고했습니까 머리가 있으니까 눈이 봤으니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의 수고 혹은 손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히브리 사람들의 마음속에 온갖 재료를 가지고 그 재료를 사용해서 그 재료가 궁극적으로 어떤 사물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은 우리 몸 전체가 참여해서 만드는 작업이지만 마지막으로 빚어져 나오는 것은 손입니다. 도기그릇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기를 만들 때 녹로에다가 진흙덩이를 올려놓고 손으로 열심히 빚습니다. 그때에 그 녹로를 돌리는 것을 무엇으로 했냐면 약간 높은 의자에 앉아서 발로 차는 것입니다. 발로 계속 차면서 원반을 발로 차면 그것이 녹로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밑에 동그란 나무로 된 원반이 있어서 발로 계속 차는 것입니다. 그러면 녹로가 계속 돌아갑니다. 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발은 안보입니다. 막 손으로 빚으면 마지막에 탁하고 그릇이 하나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유들이 종합되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 이것이 말하자면 수많은 물건을 낳는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손이 여성형으로 쓰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는데 이게 마치 새끼 낳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칼도 여성명사입니다. 쭉 있으면 떡을 막 썰으면 떡이 새끼를 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이제 여기서 손을 씻었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의 외적인 행실을 정결하게 하였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외적인 행실을 정결하게 하면서 내가 살았는데 아 이게 정말 헛된 것이구나 그런 낙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데 왜 악을 행하실까 악을 허용하실까 혹은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신정론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영어로 쎄오디씨라고 하는데 쎄오는 히랍어에서 하나님을 가리키고 디씨는 디케라는 히랍어 단어인데 이것이 정의입니다. 그래서 희랍신화에서 디케는 정의의 신입니다. 하나님과 정의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쓸 때에는 신정론 바를 정자를 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정의롭지 못한가 라는 문제입니다. 신정론의 문제에 이 사람이 빠진 것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무슨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 신앙이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 마음이 정결한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신앙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언약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그 백성들 중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더 많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사실은 그 복이 팔 복 중에서 사실은 첫 번째 복이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한 그 복이 가장 포괄적인 복이지만 그 포괄적인 복중에서 가장 중심에 와있는 복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 라는 그 복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 복의 개념을 자기 중심적으로 세속적인 의미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을 보니까 너무 잘살고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마음에 평강을 누리는 것까지 확인을 했으니까 이 사람의 복에 대한 관념이 단지 물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의 신앙에는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정신적으로 누리는 평안이 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오히려 성경은 악인의 특징을 마음으로 평안하다 평안하다 걱정할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악인의 특징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엄청난 곡식을 추수했는데 그것을 집어넣어 보관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하고 창고를 짓기로 아이디어를 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것도 평안입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돼지나 짐승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행복한 짐승이 되기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관점에만 맞춰서 세상 사람들을 보니까 전혀 신앙이 없고 심지어는 하나님 훼방하면서 사는 사람들인데도 놀랍게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정론의 문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마음을 정히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헛되다는 히브리말이 말하자면은 비었다 공허하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이렇게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면서 끊임없이 내 욕망과 싸우고 깨끗한 삶을 살려고 했는데 이것이 다 공허한 것이구나 공허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궁극적으로 이것이 가야할 목적이 없는 것이구나 하는 깊은 낙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인의 어떤 신앙의 깊은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럼 이 시인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냐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수준밖에 안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복이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등장하는데 히브리 말로 아쉐르 라는 복이 있고 베라카라 라는 복이 있습니다. 이 두 복은 칼로 자르듯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분은 됩니다. 아쉐르의 복은 오직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복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고난과 시련이 막 밀려오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가 마음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을 느끼면서 어두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대체 어디로 가야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큰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성경을 폈습니다. 성경말씀을 매일 읽듯이 늘 읽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밀려오면서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 시험에 들고 미끌어졌는지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회개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에 평안이 밀려옵니다. 하나님 앞에 낙심되고 힘이 없었는데 교회 와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확신을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나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받을 수 없는 복입니다. 이 다음에는 받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복 죽으면서도 조용히 하늘나라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복락을 사모하며 눈을 감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늘의 자원들입니다.
그러나 아쉐르의 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주 되신 아버지로서 주시는 복이라면 베라카의 복은 창조주로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이 구속주이신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두 가지 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가 일반섭리의 복이고 또 하나가 영적인 복입니다. 이런 것들을 함께 두 개 모두 다 함께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복을 일원론적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저 악인이 저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마음이 평안한데 나는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 저 인간은 돈 많이 벌고 재물이 점점 늘어나는데 나는 가난하게 산다. 결국은 저는 복을 많이 받은 것이고 나는 복을 적게 받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복을 하나로 통털어서 외적인 복 일반적인 복들이 그것이 곧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서 성도는 그것을 더 크게 많이 받는 것이 성도이고 성도가 아닌 악한 자들은 그것을 조금 받거나 주신 것도 박탈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 아주 많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더하고 싶은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제 접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면 실로 헛되구나 아 공허하고 아무 목적이 없는 것이구나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의 마음을 살피고 회개해서 깨끗하게 하고 자기의 손의 행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거두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실을 하려고 한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목적이 없는 것이구나 그런 허무한 마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시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럼 네가 그렇게 마음을 씻어 정결하게 하고 손을 씻어 깨끗하게 하였을 때에 거꾸로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 때 그때에 네가 목적하였던 바가 무엇이냐 그것의 마지막의 결국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느냐 이 사람은 그것이 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관점에서 비춰보면 아주 허망한 세속적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모습은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의 복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그 복됨을 누려보려고 하지만 이 시인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그 복됨을 누려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중심주의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성전주위를 맴돌면서 자기를 중심에 삼고 하나님을 주변에 두며 살아가는 신앙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서는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이렇게 자신의 경건한 삶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 심정적인 깊은 확신과 또 변화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일아침에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