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백성을 보존하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시 79:11)
녹취자 : 김세나
10절에서는 이방나라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복수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11절에서는 이제 시인이 눈길을 돌려서 원수들이 아니라 고난 받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합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 향해서는 하나님이 보복을 하시고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존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 수많은 핍박이 뒤따랐을 것이고, 또 나라가 망하고 나면 그 나라를 위해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은 모두 체포가 됩니다. 자신의 왕국에 반항했던 사람들이라고 정죄를 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언제나 하는 일들입니다. 여기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전에도 이미 조종에서는 바벨론에게 내통하며 그들이 나라를 정복하는 것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이미 망국의 징조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느 날 일본이 불시에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정복하고 합병시킨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접근하였고 그리고 이미 거기에서 이 나라가 일본과 겨루어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항거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혹은 안전을 위해서 일본에 협력하는 친일파들이 자진해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나라가 망하기 전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나라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나라가 망하고 나자 이제 본격적으로 바벨론에 합병되기를 정복되기를 저항했던 많은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오늘 갇힌 자의 탄식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나라가 망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그 자체가 갇힌 자였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탄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잃고 자유를 상실하게 된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 갇힌 자의 탄식을 주 앞에 이르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모순된 탄식입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자유로운 사람들을 갇히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어도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인 자신이 이미 앞에서 고백한 바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갇힌 자의 탄식, 자기의 죄 때문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사람들이 체포되고 구금되어 탄식하게 된 그것을 주님 앞에 이르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무엇을 기초로 이러한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너무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갇힌 자 된 것이 부당하다거나, 탄식하는 것이 억울하다거나, 주님 앞에 이 기도가 이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렇게 갇혀서 탄식하고 울부짖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의하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도 용납해 주셔야 한다고 하는 믿음에 근거한 탄식이고 몸부림인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고 적용을 하겠습니다.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이 죽이기로 정해진 자는 사람이 죽이기로 정한 자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체포된 많은 사람들에게는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극렬분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버려 두면 바벨론을 위태롭게 하고 이 남겨진 이스라엘에서 반란을 회책할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꿈꾸는 것은 괴뢰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괴뢰라고 하는 것은 꼭두각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왕도 있고 대신도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바벨론이 움직이면 그 명령 하나에 수족처럼 움직이게 될 그러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바벨론의 궁극적인 통치방법이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나라를 이민족이 가서 통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자기네 나라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것처럼 왕도 놔두고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실질적인 권한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일 때 움직이는 정부가 괴뢰정부입니다. 이렇게 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선고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여기에서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 하였어도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심판하여 죽이기로 정하신 때조차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 때문에 뜻을 바꾸시기도 하시는 분으로 성경에 나오시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우상을 만들고 범죄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모두 쓸어버리고 너를 통하여 새 민족을 만들리라고 하십니다. 이에 모세가 생명책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용서를 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이러한 것을 이 시인이 염두해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이기로 정하신 자도 하나님이 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우리의 인간의 자비는 자비심이 넘쳐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실 그 자비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냥 함께 불쌍히 여기고 가슴아파하는 것까지 하지, 실제로 그 자비를 실행할 능력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으시면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능력을 따라서 보존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신 능력을 따라서 보존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교회를 개척하기 전이었습니다. 서른 다섯, 여섯 이 때에 정말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정말 기도도 많이 하였고 말씀을 보는 눈도 열려서 정말 열렬하게 설교하였습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뭐냐 하면 이 부패한 세상, 그리고 부패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위해서 기도도 많이 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열매도 물론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과거를 한번 돌아보면 결국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서 일평생을 사는 동안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큰 산에 올라간다기 보다는 큰 산을 돌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은 백두산을 올라가려면 중국으로 해서 올라갑니다. 중국으로 올라가는 루트가 몇 개 있는데 장백으로 해서 이렇게 올라갑니다. 올라가는데 다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천지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보고 있으면서 이게 환상이지 하는 느낌입니다. 보고 있는데도. 사진을 찍었는데도 이것은 합성이지 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하면 북한쪽으로 백두산을 올라가는 것은 처녀의 앞모습이고, 중국 쪽으로 올라가는 것은 뒤통수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 올라가기까지는 별로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전면에서 보는 광경의 수려함과 신비함은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백두산 같은 산을 돌면서 보는 것입니다. 일평생. 그러니까 세월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도 세월과 나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처음엔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서 참 많이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한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고 많은 것들을 겪고 나니까 물론 어떤 면에서는 내가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고 마음이 부패해져서 그러한 부분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산을 돌면서 보면서 하나님의 성품이 내가 본 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다양한 성품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분노하고 진노하시고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해서 그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갇힌 자의 탄식을 주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죽이기로 정해놓은 자도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보존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면에 있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일에 균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도 역시 이렇게 균형을 잡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자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떤 권리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 모든 행동과 그리고 자세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 이러한 심판을 받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과 은혜 때문에 그 성품과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당신의 그 성품 하나로 우리를 통치하신다면 시인이 여러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누가 주 앞에 서리이까. 그 선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아마드’인데, 선다는 것도 되지만 견딘다는 것도 됩니다. 누가 주님 앞에서 견딜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 찬란한 정의의 빛,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탁월한 공의의 빛 앞에서 누가 감히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비천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의 빛을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호소해서 하나님의 두렵고 엄위로우신 임재 앞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렇게 당신의 자비에 호소하여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비를 베푸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