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을 따른 탄원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시 74:21)
녹취자: 박세원
21절은 그러한 언약사상을 기초로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의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말씀 드린바와 같이 이 언약 안에는 쌍방적인 개념과 일방적인 개념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는 은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쌍방성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그 언약을 위반하실 일은 없습니다.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신실이라는 말 자체가 언약관계를 기초로 한 진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고 당신 자신이 노력이 없어도 진실하시고 따라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그 언약에 충실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언약을 배반한다든지 그 언약을 당신 스스로 어긴다던지 하는 일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일방성을 가지고 쌍방성을 폐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불안정하고 또 인간이 가변적이고 하나님 앞에 그 언약을 파기할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어기신적이 없어도 인간에 의해서 얼마든지 이 약속이 언약이 파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언약관계를 만약에 인간에게만 맡겨둔다면 벌써 깨졌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하나님이 이 일방성을 가지고 여전히 당신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 자비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맺은 당사자인 언약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언약을 파기했다고 하더라도 공의로 본다면 한쪽이 파기했으니까 하나님도 파기해서 버리면 하나님을 비난할만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정당한 분이시지만은 이 일방성에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이 일방성이 하나님의 주권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비이기도 한데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하면서 은총을 구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언약의 쌍방성의 표현이 아니라 일방성의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냥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참회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용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공로 있다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순 없는 것입니다. 회계가 공로가 된다. 라고는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이 나에게 커다란 손해를 입혔는데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사과를 했더니 그래 사람 살면서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용서할게 이렇게 일이 이루어 졌는데 그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내가 그 사람한테 용서받은 것은 내 사과가 진실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자비심과 너그러운 도량 때문에 내가 용서를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인자하심으로써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두 가지가 있는데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순종을 위한 무한한 능력의 공급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려고만 하면 하나님은 순종 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죄를 짓고 언약관계를 파괴했다면 진실하게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선택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해서 그 언약관계가 하나님의 의해 파기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당연한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파멸되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들에 언약에 대한 집착은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오늘날 오히려 우리는 안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자면 사실은 그리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던지 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사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오히려 이 계시들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던 구약시대에 이 시인들이 그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신실하고 열심히 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탄원에 내용이 뭐냐 하면 학대받은 자로 부끄럽게 돌아가게 하지 마십시오. 이 학대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바벨론으로부터 그리고 바벨론과 내통하여 친 바벨론파로부터 당하는 능욕과 괴로움으로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 부끄럽게 돌아가지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옵소서. 그들이 학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자체가 언약에 대한 중대한 침범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구약에 언약 이 자체가 진정한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을 단순히 하나님이 억압하고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언약관계 안에서 나 하나만 묶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묶어서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이 땅에 펼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이 구약 야훼의 종교가 진정한 휴머니즘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대로 내버려 두면 반드시 사회에는 학대받는 계층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을 학대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국가를 영위해가고 사회를 존속시켜 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하는 것. 그런데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금지하셔서 언약 맺은 백성들끼리 누구를 지배하고 누구를 억압하고 하는 일이 불가능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은 좀 뜸해졌습니다. 토지개혁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헨리조지의 그 영향을 이야기 하면서 그러면서 이 나라의 땅 전체를 국유화 하고 누구도 이 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지배받고 지배하는 그러한 구조에 묶이지 않도록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은 구약의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을 잃어버려도 그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돈을 가지고 와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년에는 그런 것 없이 모두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땅 때문에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이러는 일이 없도록 학대받는 일이 없도록 균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높낮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높낮이가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이 기본적인 인간존재로서의 존엄과 가치 이점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고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는 백성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언약백성들에게 행한 악은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 행한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죄로 취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백성 아닌 사람들에게는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우리들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많은 돈을 주시고 혹은 능력을 주시고 남다른 재능을 주셨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세우는데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짓밟고 지배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학대받은 자들로 부끄럽게 돌아가지 말게 해주십시오. 이건 하나의 명예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라가 거의 멸망할 상태가 되고 성소가 짓밟히고 유린되는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말하자면 명예와 존엄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구약에 이 여호와의 종교가 정말 휴머니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짓밟히고 학대받는 자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명예나 존귀함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시인이 이걸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이렇게 대접해 주시는 그 속에서 이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학대받는 사람들조차도 이 명예를 회복시켜서 그래서 이 수치 속에서 돌아가게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이 가난한자 궁핍한자 두 번이나 유사한 말이 반복이 되는데 아주 반복이 됩니다. 다윗의 시에서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이게 제가보기에는 다윗 한사람의 문체가 아니라 당시의 그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흐르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는 하나의 그 기도의 보편적이 표현이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도 자주 나옵니다. 근데 이것은 결국은 한편으로는 외적인 환경에서의 그 무조력 한 상태,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은 누가 상대를 안 해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디에 가서 기대거나 의지하거나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누구를 기대거나 의지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제 간절히 기도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외적이 상태와 내적으로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를 신뢰하던 마음이 다 깨뜨려지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 진실하고 그 간절한 의존의 마음을 함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지금 이 기도를 올릴 때 그 마음이 자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가난한자 한사람이 짓밟히고 버림받고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을 상실하고 비참해질 때 그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면서 우리 언약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남의 돈을 뺏었을 때는 죄의식을 느끼는데 남의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혹은 그의 좋은 평판을 근거 없이 훼손했을 때에는 가책을 거의 안 느낍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가지고 있는 물질을 훔치고 빼앗은 것도 죄로 여기지만 근거 없이 그 사람의 평판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게 하고 수치를 알리고 하는 이런 것들을 아주 커다란 잘못으로 성경은 규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물건을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명예를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커다란 잘못이고 죄일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소문은 몇 번 흘러가다 마는데 어떤 사람이 무슨 무슨 잘못을 했다더라 하는 소문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 갑니다. 근거가 있던지 없던 지와는 상관이 없이 퍼져갑니다. 그러면 그것은 한번 훔친 것은 자기의 죄로 끝나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평판을 허물고 명예를 훼손했을 때에는 다른 사람도 그 말을 옮기면서 계속해서 그 죄에 동참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교육이 현저히 안 돼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것은 성경의 정신보다는 이 세상의 정신에 저급한 민주주의 내지는 표현의 자유 같은데 훨씬 더 많이 영향을 받으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런 가치들을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어떤 한나라와 공동체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을 베푸시고 싶을 때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경건하고 기도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부어주셔서 당신의 마음에 꼭 맞는 탄원을 올리게 하셔서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그게 부흥회의 역사에서 보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 시인이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에 교회를 품고 나에 사랑하는 공동체를 품고 이렇게 기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오겠습니까? 이게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