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으로 보내는 날들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시 78:32-33)
녹취자: 김유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한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이 진도하시고 그들을 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들을 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범죄 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 행한 악을 두 가지로 성경은 제시하는데, 범죄 한 것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가 탐욕 때문이었다면 이 탐욕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믿고자 하지만 여러 가지 약함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믿지만 그 믿음이 온전하기 않아서 의심과 믿음이 공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약한 믿음 혹은 회의를 가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 자체가 믿지 않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결코 믿지 않겠다는 고집이고 그러한 고집은 하나님을 믿어야한다는 많은 눈앞에 보이는 증거를 기각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떤 하나님의 훌륭한 말씀을 공급받는다 할지라도 마음 안에 믿고자 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없으면 그렇게 우리 앞에 제시된 믿음의 내용들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믿고자하는 성향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믿고자 하는 성향은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과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잘 믿는 길은 사랑하는 길과 일치를 이룹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한 번에 사랑의 성향을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일이 중생시에 일어난다면, 성화의 과정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성경진리를 통해서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정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똑같이 믿음도 하나님이 의지하고 믿을 만한 분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제시받고 마음으로 그것을 붙잡고자 할 때, 하나님을 끊임없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을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로 제시하고 또 하나는 사람의 일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의적이고 다의적인 것이 아니라 일의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믿음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래서 성경은 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정확하게 사실이지만, 이 믿음은 100% 인간의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믿고자 하지 않으면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졌을 때 믿음은 어느 쪽에서 보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어느 쪽에서 보면 우리가 믿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 하나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강조합니다. 첫 번째 믿음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우리에게 심겨지는 믿음이라면, 두 번째 믿음은 그 믿음을 토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믿음으로서 성화로 나아가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매순간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의 활동, 의지의 결단,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지할 분이 되신다는 것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 우리들이 아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성향을 강화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지적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거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지성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믿으라고 제시하는 많은 증거들이 우리의 이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인데, 이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이성의 판단보다는 초자연적인 빛으로 우리의 오성을 통해 수납되는 하나님의 증거에 더 마음을 쏟습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많은 오성의 감각들을 이세상의 욕심들과 표상들이 가득 채우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판단할 때 이성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들을 섭리 속에 행하실 때,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2차적인 원인들을 사용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펑하고 메추라기들을 수십만 마리를 요리하여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식탁으로 채워놓으신 것이 아니라 정말로 메추라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고 동풍이 불어 그들을 한 곳으로 보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발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그 모든 것을 움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사용하신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만 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고 얼마든지 자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의지와 관련해서 생각해보게 되면, 하나님을 안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중립적인 일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옆집에서 화단에 꽃 다섯 그루를 심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늘 시에서 새로운 조례를 발표했는데, 교회 앞 횡단보도를 설치해서 거기로 건너지 않으면 유치장을 보낸다."고 했다고 쳐봅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이미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웃에 꽃을 심은 것은 나의 삶과는 거의 무관하고 사소한 의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건널목은 나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구속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하시고 계시다는 명제는 이웃집 꽃을 심은 것과 같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인생을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고 내가 무엇을 하던지 선악 간에 그분의 판단을 받고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후자의 비유와 같이- 실제적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이런 속박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고 그렇게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단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믿지 아니한 이유입니다. 이 집요한 불순종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삶을 지속하고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져 그 사람의 인격과 함께 역사하며 그 속에서 자라납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떨어질 때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는 않습니다. 한 알의 씨앗이 떨어져 아름드리나무를 만들고 씨앗 하나가 온산과 숲을 형성하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그 씨앗은 땅에 떨어져 드릴처럼 파고들어가 뿌리를 내리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우리의 지성과 의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뿌리를 내려갑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인간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늘 하는 말씀이지만 신앙생활 자기가 하기 싫으면 성립을 안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하려고 하는 자에게만 역사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이웃들, 사랑하는 성도들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 도와달라는 편지가 일주일이면 이만큼 쌓입니다. 그중에 어떤 것은 진실성이 있고 어떤 것은 밑져야 본전인 것도 있습니다. 모두 도와주면 좋겠지만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꼼꼼히 읽어보면서 여기는 좀 통화해서, 직접 가서 알아봐야할 때가 있습니다. 하도 많으니까 선별적으로 보냅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회가 가난하다고 해서 여러 해를 도왔습니다. 나중에 담임 목사님이 직접 자신들이 돕는 시골교회를 방문했는데 5-6년을 도왔는데, 3년 전에 문을 닫았답니다. 옛날 재정집사가 받아서 쓰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도 일어나니까 조심스럽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행정적으로 제대로 확인을 안 해서 한사람이 범죄 한 것이 아닙니까! 이번에 우리교회가 이웃리치를 간 교회가 교회는 남아있는데 태풍이 불어 사택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장로님이 그 보고를 하는데 그렇게 마음이 안 좋아서 지워주자고 했습니다. 사택이 조금 망가진 것이 아니라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모두 완공이 되면 내가 직접 가서 예배를 드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장로님들이 그 교회 목사님이 정말 기도 많이 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고자하면 우리에게 그 소원을 품게 만들어서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주목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위탁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순종하던 사람이 내일 불순종할 수 있고, 오늘 성결하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 내일은 하나님을 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계속해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불신앙한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무슨 유익을 얻었는가? 33절은 놀랍게도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 그들이 그들의 날을 헛되이 보낸 것이고, 둘째, 두려움으로 보낸 것입니다.
첫 번째, "헛되이"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어로 헛되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공허한, 가치가 없는'이란 뜻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어떤 식으로든지 일시의 쾌락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목적이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실현하며 살아갈 때 그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도 유익을 얻고 자신도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적인 의미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제 나온 말씀이 탐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죄가 들어오고 나서는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정화되어야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안 되면 그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뼈 속까지 부패한 죄가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선을 갈망하고 원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스키선수가 하늘 높이 날아서 새처럼 날아가는 광경을 보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똑같은 운동복을 입고 활강대에 오른다면 솟구치기는 하겠지만 착지를 잘할 수는 없지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정화되어야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무엇인가 창조적인 행위를 보태어서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이바지해야지 행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도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안정감 있는 삶을 삽니다. 그런 보람이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2장에서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바로 보람 있게 사는 삶입니다. 한번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우리가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기쁨으로 가득차고, 큰 즐거움을 느리고 가슴 벅차게 행복해도 내가 느끼는 그 감정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이바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선을 가지지 않으면 그 순간은 가슴 터질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허망하기 그지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진리 이외에서 기쁨을 찾으면 인간의 영혼을 부패하고 더럽혀집니다.
종종 우리는 "열심히 일했으니 쉬어야겠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 진정한 쉼이 어디에 있습니다. 만약 쉼이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이라면 부패밖에 나올 것이 있습니까? 진정한 쉼은 육체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진리에 다가가고 영혼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 이외에는 어디에도 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합당한 것을 위해서 부지런히 노동할 때 거기에 진정한 쉼이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두 번째,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한 마음들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치셔서 엎드러지게 하는 자들을 보면서도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과의 불화로 말미암는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깊은 두려움 속에 살아갔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마음으로 당신을 떠난 자들을 합당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지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실제적으로 형벌하여 그에게 죽음이나 커다란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그 마음과 영혼에 커다란 번뇌와 두려움 그리고 양심의 가책들로 말미암아 충분히 고통을 받습니다.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해 존 오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산 결과가 무엇인지 스스로 깊이 깨달아 주님께만 붙어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 불순종하고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의 날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 불신앙하고 불순종하면서도 여유롭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을 때뿐입니다. 빈방에서 홀로 자는 밤에 홀로 일어나는 아침에 두려움에 눈을 감고 눈을 뜰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 소망을 주님께 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커다란 시련이 몰려와도 때로는 비난과 모함을 받아도 그의 마음에는 평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도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면서 그들을 긍휼해 여기면서 우리의 신앙의 길을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평탄한 길을 걷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당신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같이 마음으로 그분의 손에 붙잡혀 살고자 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과 능력과 기회를 주셨지만 그것들은 사용할 뿐 의지할 분이 주님 한분뿐임을 믿으면서 그분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됩니까? 하나님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아버지 앞에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이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과 보호하심 속에서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