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시78편 34-35절
녹취자: 김복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 중에 하나님 앞에 계속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어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젊은 청년들을 엎드러지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실 뿐 아니라 몸으로써의 이스라엘을 고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간섭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반응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게 되는 커다란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에서 용서해주시도록 하는 간구를 보여줍니다. 둘째, 삶의 개혁도 있었습니다. "돌이켰다"고 했는데 히브리말로 "수브"인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삶의 개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던 것들의 개혁이 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추구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한 평가는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데, 정상적인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받은 형벌을 면하기 위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평안하려고 하지 실연이나 고통을 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 당하는 고난이든, 그렇지 않은 고난이든 괴롭고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난은 달콤하고 어떤 고난은 쓰라리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간혹 성경이 고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난을 통해 데려가려는 목적 그리고 실제로 큰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도 그 때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달콤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달콤함은 고난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고난에 대한 묘사는 정확한 묘사가 아니고 금욕주의적인 사고가 많이 지배한 해석들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시는 영혼의 변화가 우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고난을 사용해서 우리를 고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옳은 일로 말미암든 그른 일로 말미암든 일단 고통 받으면 고통을 피하려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 이러한 인간은 얼마든지 종교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구하며 돌이키며 간절히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면 참다운 회개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베실레아 슈링크라는 사람이 진정한 회개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저지를 잘못에 대해 똑같은 심판을 받을지라도 심판 없이 평안함 없이 행복해지기보다는 차라리 심판을 다 받고라도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라고 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좀 더 가혹하게 "한 신자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것은 그 죄를 싫어하는 것이고 그 죄를 싫어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적용을 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탐욕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시니까 두려움에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동물적인 종교심입니다. 이런 종류의 회개는 자기중심성을 못 버린 회개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단강변에서 세례요한이 말씀을 선포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마음을 간파했습니다. 이 세례를 받는 것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 요한의 메시지의 핵심이었는데,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교도 하고 살인도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회개하다는 단어는 "메타 노에오"인데, 메타는 "후에", 노에오는 "다시"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희랍어 의미에는 "회개하다"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단어가 신을 상정하기 않았기 때문에 이 중심적인 뜻은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과 회개한 후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의 가장 중요한 것을 결핍한 것입니다. 저는 이 회개가 지정의의 회개인 것을 인정하지만 지정의의 전인격적인 표가 지성에 남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미국 출장 중에 어느 목사님 집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사모님이 의사였습니다. 사모님의 자기 병원에서 검사를 해주면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니 새우를 드시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새우가 콜레스테롤 수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의사에게 경고를 받은 후에는 새우를 보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새우를 좋아하는데 그 이후로 새우를 전혀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회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절히 찾고 돌이키고 구했지만, 회개의 가장 중요한 중심성의 이동이 없었습니다. 즉,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중심적이었던 사람이 회개한 후에는 하나님 중심이 되는 중심의 이동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아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거나 희생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회개하면 잃어버릴 것과 회개를 통해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유아적인 방법으로 다루시기도 하십니다. "양치하면 먹을 것 줄께"라는 식의 유아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런 정도의 회개에 만족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보다 더 진실한 기도로 나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받을 심판이 두렵고 무섭다는 이유로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회개를 가리켜 율법적 회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심판, 공의, 두려움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율법적 회개인데 이는 회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인간이 죄에 대해 진실하게 죄에 대하 자각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고 인간이 죄에 대해 진정으로 자각하게 하는 요소는 율법입니다. 율법의 기준에 자신의 삶이나 성품을 비춰볼 때, 율법의 빛이 "너는 잘 못된 사람이라" 말하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확신(conviction)이 도입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꼭 필요합니다.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들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많은 내용들 속에 이미 율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회개하기 충분한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한 절도 읽어보지 않아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복음적 사실을 가르쳐주기만 해도 그 빛 아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 충분한 율법의 빛을 가지고 회개하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런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복음적 감각을 가질 때, 인간의 마음이 녹아져 내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되지만, 성경의 빛으로 정확하게 해석하면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마음이 녹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실은 율법이 주는 심판 때문에 마음이 녹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가나한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엄위와 공포에 대한 것으로 엄청나게 두려움으로 떠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지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으며 통회하는 그런 의미의 녹아내리는 마음(melting heart)이 아닙니다. 공포 속에서 녹아내리는 마음은 새롭게 형성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마음은 새롭게 형성이 됩니다. 종모양의 쇠를 용광로에 녹이면 바가지에 담아 평평하게 부으면 철판, 병에다 넣으면 병모양이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녹는 마음은 그런 식으로 재형성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회개를 거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깊이 회개하고 고통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내가 이 큰 하나님의 사랑 앞에 불순종 했구나, 불순종하고 악을 행했구나'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다는 인식 그리고 그렇게 배반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인식이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을 경험하는데 나는 그것을 마음의 "피의 펌프질"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마음이 오그라들면서 펌프질 같은 기도를 하면서 죄가 죽고 자기 사랑이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피의 펌프질 같은 기도를 일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주는 진정한 영적 생활의 깊이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플라스틱이나 쇠를 필요가 없어서 녹인다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녹이는 것은 그것을 다른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율법으로 떨게 하시고 복음으로 녹게 하시는 것은 이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으로 우리를 빚으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 청결하고 더 이상 다시 형성하실 필요가 없도록 굳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죄인 이외에는 누구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불결하고 잘못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어떻게 깨닫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단번에 보시지 우리에게 가장 감춰진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남의 마음을 보는 것이 더 쉬울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보여주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이 그린 궤적입니다. 그 궤적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자기가 행한 많은 행실이나 말, 마음의 움직임들을 객관적으로 놓고 성찰하여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는지 판단하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글짓기를 해놓고 스스로 교정하라면 잘 보입니까? 자기는 잘 볼 수 없습니다. 남이 봐주어야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행실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면서 병적인 징후들을 찾아내야하는데, 자기를 두둔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나를 그 진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확고한 의식과 분명한 존재감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A를 잘못했을 때, A를 징계해서 깨닫게 하시기도 하지만, A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B라는 것을 지적하셔서 고통이나 시련을 당하게 해서 진정한 우리의 문제가 또 다른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사업의 위기가 와서 하나님께 돈 달라고 했는데 응답이 안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여태까지 살아온 내가 불순종하고 아무리 축복해주셔서 물질을 주셔도 이기적인 탐욕 속에 살았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것을 회개하게 하기 위해 그것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로 고치시고 연단하십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간절히 찾았더라도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자기 보호를 위한 거짓 회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주 쓸데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35절에 보면 그들이 무엇인가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구속자임을 기억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반석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추르'라는 말인데 이는 구약성경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반석이라는 말은 언제나 구원과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행했던 애굽을 살펴보면, 바위가 있는데 자연적인 바위가 잘 형성되고 바위에 구멍이 파져 있어서 바위에 숨으면 찾을 수도 없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도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석이 그 사람들에게 구원을 상징하는 최고의 단어입니다. 지금과 같이 현대전이 아닌 과거의 전쟁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요새는 병기가 발달했습니다. 미국에서 무인병기를 사용해면, 탈레반이 굴 뚫어진 곳에 숨어 있으면 거기로만 들어가 쾅하고 떠지는 폭탄의 음파 때문에 고막이나 귀가 찢어져서 죽습니다. 그러한 현재와 달리, 고대의 전쟁에서는 최고였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완벽한 구원입니다. 발견할 수도 없고 화살이 비 오듯이 떨어져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것도 다 구원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구원이며 구속자이심을 그들이 부분적으로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징계로 말미암는 각성은 잠자기로 운명이 지워진 거인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가 다시 어려움이 끝나자 깊은 잠속에 빠져는 것과 같은 회개요, 각성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는 길을 근본적으로 돌이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정말 어려움을 당하고 징계를 당할 때, 그 고난을 면하기 위한 아첨적인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를 돌아보며 아버지 앞에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에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