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것들을 사랑하심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녹취자: 김복녀
징계가운데 큰 고난과 시련을 만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반응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기가 지은 죄의 본질을 깨닫고 그 궁극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계명을 준행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준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러저러한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그것을 행하는 궁극적인 동기와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국 자기 사랑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둘 중의 하나이지 제삼은 없습니다. 혹시 만약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둘 중의 하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데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좋아하는 자신을 만족시키는 길이 세상 사랑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극단적인 자기 사랑과 극단적인 하나님 사랑은 놀라운 일치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극단적으로 사랑해도 자기에게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고 시시해 보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극단적으로 사랑해도 우리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동떨어져서는 아무 의미가 없듯이,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것에 동떨어져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하듯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본뜨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올바르게 본뜨면 최고의 아름다운 생활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생활이 아주 비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악은 하나님을 잘못 본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 사랑이 가져온 죄를 회개하고 중심축 자체를 옮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간절히 부르짖는 것 자체가 자기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자신이 징계를 받아 멸망을 당하여 자신에게 큰 고통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기도의 외형을 보고 그 기도가 가식인가 진심인가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가 거짓이었고 그 이유는 그들이 언약에 성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죄악을 덮어주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분을 다 쏟아내지 아니하셨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단어는 ‘그러나’로 번역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는 죄악을 덮어주셨습니다. ‘덮다’는 히브리어 ‘카파르’라는 단어인데, 어디에 등장하냐하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배의 표면에 역청을 발라서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거기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어떤 물건 위에 무엇을 발라서 밖에 있는 것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도포하는 것이 덮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는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명명백백하게 확연히 드러나서 벌 받을 사람은 벌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죄악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이 죄악을 덮어준다.’는 말은 첫째는 하나님이 죄를 구속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진정으로 용서하시고 죄의 허물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넘어가십니다. 넘어가실 때 그 죄를 없다고 여기거나 사라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영광과 섭리 때문에 그 죄를 가리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죄를 없애고 용서해 주셨다기보다 죄에 대한 해결을 미루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73편에 나오는 악인들의 죄입니다. 멸망 받을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며 번영할 때 그들을 내버려 두시다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크심을 보여주셔서 그들을 심판하셔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 “지속적으로 악에 빠지느냐 아니면 후에 돌이키느냐” 다양한 변수들을 죄를 다루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우리들이 올바르게 살고 정직한 길을 살아가도록 훈련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그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거짓이라고 하셨고 진정으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언약에 불성실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죄를 진정으로 모두 용서해주시고 덮어주셨다면 앞뒤가 안 맞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덮어준다는 말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멸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멸망시키고자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멸하고 너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이루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세가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모세의 기도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멸하시면 많은 이방 나라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신이 저들을 광야로 인도하였으나 그들을 끝까지 데려가 약속을 지킬 능이 없으므로 광야에서 멸망 시켰도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명예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세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뜻을 돌이켰다기보다는 교화적인 진술입니다. 당신께 매달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의 뜻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로 하여금 자신의 민족을 위해 더 헌신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을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은 가나안 땅에서 번영하다가 소멸하고 왕성하다가 소멸하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라지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실현되는 그것이 구약에서의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하고 못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표로 삼으셔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도입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몇 번 돌이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불순종할 때,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셔서 그들을 향한 징벌을 경감시키셨습니다. “그 분을 모두 쏟아내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내는 날이 여호와의 진노의 날입니다.
이렇게 하신 궁극적이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의 충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성품 때문입니다. 그 성품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은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성품의 효과입니다. 둘째는 이들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그 원인과 연결하여 보지 않고 결과와 연결하여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있는데 까불다가 부딪혔을 때, 거의 안 다치면 “잘했다 까불더니 싸다 싸!”라고 합니다. 그런데 크게 다쳐 피가 낭자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시키는데 나타난 비참한 결과들을 원인과 결부시키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의 궁극적인 원인은 대부분 자신의 죄 때문에 있습니다. 애매하게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문에 나오는 것처럼 가만히 집에 있는데 문 열고 들어와 죽이든지 하는 것은 원인이 별로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비참함은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자기 자신의 과오나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강력하게 개입시키면 긍휼이 작동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긍휼의 마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원인과는 상관없이 매우 불행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실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은 사랑의 한 요소입니다.
사랑 안엣 삼각형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오래 참음, 자비, 긍휼이 여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다른 국면들입니다. 다이아몬드가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게 까불더니 다친다.”라는 원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는데, 그가 비참함을 당한다는 그 자체를 직시하면서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하면 사랑이 있으니까 나오는 마음입니다. 이 긍휼은 전적으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심지어 자기에게 악을 행하고 고통을 준 사람을 비참함을 보면서 아파할 수 있다면 그것을 사랑의 힘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 작동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을 기억하십니까? 아이를 가르라고 했을 때, 가짜 부모는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했지만 진짜 부모는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닙니다. 가져가세요.”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이것을 결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들려진 공의의 칼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조금밖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질병이 걸리면 사랑이 없는 사람은 저런 쓸모없는 사람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히틀러가 그런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히틀러가 그런 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인이나 열등한 존재는 죽이고, 아이도 못 낳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등한 종자들을 퍼트려야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비극은 헤로도토스라는 사람의 역사책의 “게르만족의 우승”에 과한 한 줄의 글을 읽고서 나치즘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긍휼이 있으셨기 때문에 이 모든 혜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긍휼은 39절 “저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도다” 여기서 육체 ‘바사르’는 고기 덩어리를 가리키는데 육체는 유한한 물질로 되어있고 그것은 쉽게 사라집니다. 육체는 시간적이고 사리지고 변하는 것으로 영혼과 대조됩니다.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화나 영광이 바람과 같아서 사라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들을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을 하찮 것으로 여깁니다. 하찮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비록 육체는 바람일 뿐이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택된 하나님의 형상 닮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을 지극히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받고 주님 앞에 생존을 계속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더 많은 자비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알고 계시지만 당신 자신의 성품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몰랐던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렇게 찬송하고 경배하고 그분의 성품을 기리는 기도자의 마음속에서 당신을 닮은 성품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