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집에서 누리는 복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시 84:3-4)
녹취자 : 유동식
1절과 2절에서는 하나님의 궁전을 사모하는 시인의 심경을 피력을 했다면 3절과 4절은 그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이 누리는 그 복의 신실한 복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렬한 사모함은 결국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임재의 삶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을 원하는데 이 시인이 어떤 이유로든지간에 어쨌든 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고 물리적으로 차단되어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이 생겨났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는 이제 자신이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떨어져 있도록 강요되었지만 그 집에 함께 거하면서 누리는 신자의 진정한 복에 대해서 그리워하며 더욱 하나님의 궁정을 향한 사모함이 마음속에 불붙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이 자비와 긍휼입니다.
성경에서 참새라는 것은 가장 하찮은 피조물의 명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하나님의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다스리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셨으니까 이 참새는 가장 하찮고 가치 없는 피조물 중의 하나입니다. 제비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뭐라 규명할 수 없는데 참새는 어쨌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소위 병행법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무엇은 어떻게 어떻게 하고 또 다른 무엇은 어떻게 어떻게 한다거 할 때 이 두개가 짝을 이루면서 마치 같은 의미를 가진 말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제비는 참새라는 말에 짝을 맞춘 병행법의 또 다른 평행단어 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참새도 제비도 모두 그렇게 하찮은 피조물의 한 대표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들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는 같은 말을 다르게 반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이 세상 어디에서나 중요한 피조물로 대접받지 못하는 하찮은 참새도 하나님의 궁정에서는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돌봄을 받고 또 그 집의 제비조차도 새끼를 둘 수 있는 그런 보금자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러니 참새나 제비 새끼도 이러한 긍휼과 자비를 하나님의 집에서 받으니 우리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 살펴주실 것을 우리는 압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말리 떠나있기 때문에 지금 비로소 느끼는 그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외에 자신을 긍휼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없다는 것을 깊이 경험했고 그러한 자비와 긍휼을 이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많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 기억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래서 아무 가치 없는 무가치 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나 같은 인간, 때로는 나 자신도 나 스스로의 가치를 몰라서 어리석게 여기고 방황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이 여기셔서 그래서 나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것을 경함하는 그것이 이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그리움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양심의 그 작용과 그리고 양심의 의식하는 율법의 기능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하여 두렵고 떨리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든지 이 양심이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올바르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캄캄하고 어두운 밤길을 큰 트럭이 지나갈 때 앞을 환하게 비취는 헤드라이트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 하나 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며는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뿐만 아니라 매 순간 자기들을 붙들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래서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의식하고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이미 그것을 경험했고 단지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구약시대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마음이 서러울 때도 하나님의 집을 찾았고 나라가 큰 위기를 만나 고통을 받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마음을 쏟으며 자신의 중심을 토했고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찾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죄가 있으면 용서하시고 시련이 있을 경우에는 피할 길을 주시고 죽은 자와 방불하도록 연약할 때에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는 언제나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양심은 네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는 인간이냐 하고 매질을 하여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언제나 계속되어서 그래서 때리시면서도 어루만지시고 치시면서도 싸매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성도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거기에서 세상을 이길 모든 힘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모든 능력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여기에서 산다고 하는 뜻은 거한다는 뜻으로 잠간 앉아 있다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아예 삶의 기반을 찾고 거기에서 영원히 거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잠간 찾아와서 부탁하고 가는 사람을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서 나누고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고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사랑이 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 앞에 한 자녀로써 저들의 느끼는 기쁨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고 저들의 느끼는 고통이 나에게 아픔이 되는 그 모든 삶을 함께 하면서 살아가는 생활, 이것이 바로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입니다. 연애와 결혼이 어떻게 다릅니까? 연애는 그냥 사랑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을 통해서 사람들은 살게 됩니다.
이는 삶을 함께 영위해 가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에게 운명이 되고 짊어져야 할 짐이 되고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이런 일체의 삶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마치 전깃줄에 앉은 참새처럼 총소리 한 번 나면 모두 날아갈 것 같은 신앙생활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그들이 항상 주님을 찬송하리이다 합니다. 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이 항상 찬송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비와 긍휼하심을 매일 매일 누리며 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겨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긍휼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이 사랑과 자비를 힘입어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