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비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시 107:12)
녹취자: 박효준
앞에서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의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정리하고 나서 12절부터 뒤에 쭉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이 부르셔서 은총을 베푸시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상세하게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할 때 인간은 곤고하게 되고 마음과 영혼이 쇠사슬에 얽힌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무리 힘센 장사라 할지라도 감옥에 갇혀서 발에 착고가 채여지고 손에 쇠사슬이 감기게 되면 그러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무엇하나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잘못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고 선하게 대해주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속박이라고 믿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보려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결과도 가져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의 그 자유를 찾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면서 살면 육체로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마음과 영혼의 속박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육신의 줄이 아니라 마음의 줄. 우리 영혼의 사슬입니다.
(예화) 여러분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용기를 다룬 영화 <쿼바디스>를 보신적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형에 당할 위기에 있습니다. 사슬에 묶이고 감옥에 갇혀 있고 잠시 후 맹수들의 밥이 됩니다. 이보다 더 큰 속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무리들이 콜로세움에 모여 이윽고 문이 열리고 사자들이, 굶주린 사자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할 때에도 조용히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게 영혼과 마음의 자유입니다.
(찬양)
주여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게 마음과 영혼의 온전한 자유입니다. 이 세상이 결국은 죄로 말미암아 물든 세상이고 불완전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데 어찌 시련과 고난이 없겠습니까.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때로는 형통한 것보다 더 커다란 선물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극복할 수가 없는 시련을 만나거나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거나 혹은 자신의 성격의 부족한 것을 보고 괴로워하거나 이러는 모든 고통 속에서 우리는 육체가 속박 받는 대신 우리의 영혼의 자유를 앗아가는 불순종과 죄 그리고 자만해질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리 탁월한 신앙을 갖은 사람이라도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를 떠받들어 섬겨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런저런 시련과 고난 혹은 비난과 고통 이런 많은 것들을 당하게 하시면서 그러면서 그 속에서 육체의 자유를 구가하여 영혼의 자유와 마음의 참된 이 평화를 잃어버리는 대신 그것을 얻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징계의 전혀 다른 국면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냥 메여있는 것 하나로 내버려 두시면 그들은 그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고통을 주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면 우리들이 어떤 기쁘고 선한 일을 만나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고통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 아주 지극한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우리가 뿌려 놓은 씨를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베풀지를 못하고 박복하게 굴면 이사 갈 때 이웃이 인사도 안 합니다. 우리가 뿌려 놓은 것들을, 그 결과들을 고통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썩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육체를 위해서 심었기 때문에 거기서 썩을 것들을 스스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통도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주셨다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 결과를 그대로 거두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처음부터 고통이었다면 아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인간이 더 이상 잘못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과 거역을 택해도 즉각적으로 고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을 아주 고귀한 하나님 닮은 자율성과 인격을 갖은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택해도 그렇게 해 보게끔 하나님이 그들을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깊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물론 하나님의 허용 속에서 일어나고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니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당연히 하나님이 허락을 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 자신의 불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그 결과와 열매들을 거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그 고통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의도가 있으시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다.” ‘겸손’이라고 하기 보다는 ‘겸비’라고 번역하면 더 좋겠습니다. 겸손은 신앙을 갖고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서 자신을 깊이 낮춘 것을 의미합니다. 겸비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기를 내세울 것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 비참해진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에서 겸손이 자신의 가치를 정당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낮아진 것을 의미한다면 이 겸비는 비참함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교만한 마음을 꺾게 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겸비라는 단어가 훨씬 어울립니다. 그들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한없이 낮아진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처음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외감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 소외감은 결국 어디에서 오는 소외감이냐면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소외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탈해서 많이 불순종하게 되면 그것과 똑같은 비례로 양심은 시비의 판단을 통해서 가책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책을 느끼는 정도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사람으로부터 소외되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즉각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마음의 불순종으로 기울어져서 하나님을 대항하게 되면 거기에는 반듯이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죄의 낙이라고 합니다. 그 즐거움이 우리를 속여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되어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커다란 속임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오는 즐거움 때문에 이제 이런 고통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한순간에 끝납니다. 언뜻, 언뜻 끝날 수도 있고 어느 한 순간에 고통의 크기가 너무 커서 즐거움이 종식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소외 되었다는 두려움이 밀려오는데 우주 공간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커다란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깊은 소외감을 느끼게 될 때 인간은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면을 돌아보아도 자기를 돕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돕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도울 자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으로 처하게 된 이 영혼과 마음의 어려움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화) 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외로우면 친구들을 만나서 잡담을 하고 교제를 함으로써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물질이 없어서 어려움을 당한다면 누군가가 우리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 어려움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서 그래서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도움으로서는 자신의 이 궁극적인 고통과 소외의 문제를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속에서 인간을 한없이 낮추시는 것입니다. 이 낮추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낮추시는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미워하고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옛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판단과는 다른 판단을 선택하며 내 마음대로 살았던 자아를 미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불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실 그 모든 믿음 생활의 본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를 심판하고 마지막에는 자기를 처벌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항상 사랑하고 감싸야 할 자신이라고 생각하질 않고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엄하게 꾸짖고 타이르고 경계하여야 할 자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하여 불신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겸비해지게 됩니다. 이때에 인간의 시선은 한 곳을 고정하게 됩니다.
(예화) 차를 타고 서 있을 때는 거의 180도가 보이는데 달리기 시작하면 보이는 시각이 줄어듭니다. 180~200km 정도로 달리기 시작하면 눈에 보이는 각도가 아주 작아지고 300km 정도로 달리는 그 포뮬레이션카의 경주에서는 눈에 보이는 각도가 5도 정도밖에 안 된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막 지나가니까 눈에 안 들어오고 저 멀리 있는 동그라미. 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이 이렇게 깊이 겸비하게 되면 하나님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의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모든 친구들. 이 세상에 내가 믿고 좋아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자기에게 의지가 되지 않고 자기가 그것을 신뢰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겸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주시는 게 아니라 고통은 그 결과로 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어떤 것도 나를 이 커다란 고통에서 건져낼 수 없다.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께 매달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 보면 아시겠습니다만 뒤에 기도가 나오는데 결국 이 기도는 입술의 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고 심령의 펌프질 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화려한 웅변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겸비하고 낮아지지 않으면 그 마음속에서 제대로 된 기도가 울려 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 고통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당신 우러러보고 바라보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마음을 비참하게 하시고 때로는 시련과 고통을 당함으로 마음을 무너지게 하시고 때로는 비난을 당하고 때로는 건강을 잃어버리고 고통을 당함으로 때로는 자신의 불순종과 죄의 결과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근거 없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다양한 많은 사연을 통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복종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려고 하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룬 사람들은 이런 시련과 고난, 어려움이나 환란, 이런 것들이 계속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그 모든 풍랑을 인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때문입니다.
(예화) 제가 꼭 이맘때였습니다. 구정 직전이었는데... 그러니까 그게 몇 년도일까요? 한 30년쯤, 30한 3년쯤 전인가 본데 회심하고 얼마 안 되서 은혜를 많이 받고 그랬을 때였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저 멀리 동두천에 있는 기도원을 잡고 1주일 동안 거기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퇴근을 하면 기차 타고 거기까지 가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직장을 나에 오고 밤에는 또 가고. 뭐 어마어마하게 추웠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에서 너무 추우니까 기도를 하다가 교인들이 모여서 난로를 쬐는데 그 때 마침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찬송)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때 권사님 한 분이 65세나 75세쯤 돼 보이는 권사님이 “나는요 이 찬송을 부르면 우리 딸이 생각이 나요.” 젊은 나이에 이 딸을 여읜 것입니다. 이 딸이 젊었을 때 젊은 나이에 부모를 앞세우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을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는데 그 딸이 얼마나 가엽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자식을 잃어버리면 부모는 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자식은 슬픔을 금방 극복하지만 부모는 그 슬픔을 일평생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죽었을 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뭐 주위에서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을 했으면 사람이 끔찍한 일을 당할까?’ 그런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때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렇게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인생의 배가 결국은 바다를 항해하여 천국을 가는데 잔잔할 때에는 온 힘의 노를 저어도 배가 조금씩밖에 안 가는데 풍랑이 일어서 바람이 부니까 그 물결은 요동을 치지만 그 물결 때문에 배가 힘차게 항해하는 것처럼 결국은 딸을 여의고 그 큰 고통 중에서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지마는 그 물과는, 먹는 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 풍랑으로 인해서 떠나가면서 내가 이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이 세상과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사명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 나의 행복 그리고 나의 위로 이 모든 것을 내가 이 풍랑이는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찾아낼 것인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눈물 골짜기이고 시련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마음을 겸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통을 당한 후에야 주님 앞에 겸비해지는 자들이 되지 말고 생에 본질을 직관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죄들을 짓고 있으며 불순종 해 왔으며 또 어떤 사람들에 비해서 내가 그것을 바깥으로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에 잉태되지 않은 얼마나 많은 죄와 불순종들이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풍랑과 시련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겸비하게 하셔서 당신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십자가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형통하면서 마음이 기름져 지방이 가득하여 둔탁해진 사람보다는 오히려 고통 속에서 마음이 겸비해져서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주님이 나를 돌보시는 그 은총이 아니면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 속에서 주님을 붙드는 것이 복된 생활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나쁜 모든 것도 결국은 좋은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의 손길 아래서 겸비한 마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