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짖게 하시는 하나님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시107:13-14)
녹취자: 조은상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은 그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비참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다루시는 인격적인 특성들이 나타납니다.
요즘에 음식점에 들어가려고 하면 사람만한 인형이 서서 인사를 하는 음식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쁩니다. 사람이 하던지 그만 두던지 했으면 합니다. 사람 모양을 하고 옷을 사람과 똑같이 입혀서 가발까지 쓰고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하고 인사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다 인격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렇게 리모컨 하나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셔서 그것을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아는 가운데 주님을 경배하고 이것이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신앙과 사랑에서 우러나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때에는 고통가운데 두심으로서 하나님을 떠난 결과가 어떤지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충분히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엎드려져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극복해 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 끊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 모든 나의 고통과 비참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이에 그들이 그 환란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신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그 환란과 고통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기 위하여 돕는 자 없이 내버려 두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하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동 가운데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크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마음을 쏟아 부어 주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의 실천이야 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입니다. 물론 기도 없이도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고,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에서 커다란 요동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 없이도 커다란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간다든지 어떤 일들을 열심히 하는 것은 모두 신앙의 원리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합적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바리세인의 열심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고 있지만 기도의 동기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율법을 정확하게 따랐고 관습을 따라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살아가는 원리들이 모두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자동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능가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는 자기들이 쌓은 의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의 의는 그리스도의 행위로 인한 의인데 사실은 이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기도의 실천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입증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란 중에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흑암 속에서도 버려두시고, 고통을 받을 때도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큰 고통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좌충우돌하면서 결국 거기서 벗어나면 재수가 좋았다고 말하고, 비록 그것이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응답이 되면 마음속에 큰 기쁨이 밀려오면서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구나’ 하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칼빈선생님이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말씀 하실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대답을 하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부르짖을 때에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두 가지가 대비하게 되는데 자기를 의지하며 살 때에 찾아왔던 그 비참한 결과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에 나타나는 그 아름다운 결과 이 두 가지를 대비하면서 자기를 향한 신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 속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이 기도의 경륜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언제 잘 되냐 하면 고통을 받을 때 기도가 잘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이 이 세상의 도움이 다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 한분 외에 자신을 도울 분이 없다는 마음이 가득할 때 가장 기도가 잘 됩니다. 그리고 이때가 바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랑은 의존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의존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닙니다.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깊이 사랑하는 독립적이면서도 사랑하는 감정은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반드시 그 사람을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의존의 감정이 풍부한 기도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신앙의 요소가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주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온전히 의존하며 하나님 앞에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못 받으면 기도를 해야 하지만, 은혜를 많이 받으면 기도가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쓰고 결단을 하고 안하려는 자신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 사람에게 고백을 하게 되고 잘해주게 되지 않습니까? 그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향 자체가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지막에 기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형식과 모양이 중요하긴 하지만, 형식과 모양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새벽에 밤늦게 자고 피곤을 이기며 싸우며 추운 새벽길을 걸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무감, 성실성, 혹은 몸에 배인 기도의 습관 이런 것들로도 충분히 이렇게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온 모든 사람들이 열렬하게 기도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외국에 가도 꼭 낮에 낮잠을 자다가도 한국의 새벽기도 시간이면 깹니다. 오랜 세월 살아왔기 때문에 몸에 배인 겁니다. 그리고 거기 새벽시간에 또 깹니다. 두 번을 깹니다. 우리의 몸은 어느 정도 우리의 의무에 익숙해 질 수 있습니다.그렇지만 다른 일과는 달리 이 기도는 그렇게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곧 좋은 신앙의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저는 직장을 다닐 때 한 6개월 동안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지내본 적이 있습니다. 뭐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 때 관사에 잠시 있을 때였는데, 관사에 있으면서 새벽이면 그 시간에 눈이 딱 떠져서 성경찬송을 들고 동네 언덕에 있는 교회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한 3개월 정도 관사에서 매일 잔 것은 아니지만, 3개월 정도 묵으면서 내 일을 돌보고 학교를 다니고 그랬는데, 어쩌면 그렇게 교회에 가면 캄캄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아직 까지도 사실은 비밀들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캄캄할 수 있을까. 결국은 석 달 동안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직장을 사표내고 신앙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정이 났는데, 하나님이 나의 길을 바꾸기 위해서 한동안 나에게 그렇게 하셨나, 의도적으로 불순종한 것은 아니었는데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6개월 중에 한 3개월 동안은 캄캄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셔터가 내려진 것처럼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러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두 가지를 해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육적인 깊음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고, 영적인 깊음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육적인 깊음이 무엇이냐면 고통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욥처럼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대부분이 우리들이 뿌린 우리 삶의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을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해고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나중에 우리에게 그것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에 최대의 관심사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고통에서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어서 간절히 우리들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려움 속에 고통을 당하면 우리가 잘 못된 길로 가서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이 한 번에 기도로 우리를 쉽게 건져 주시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기도하게 하셔서 그 부르짖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육적인 깊음에서 건져내시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영적인 깊음에서 건져내시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해 내시고 그들을 얽어매고 있는 줄을 하나님께서 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얽어매고 있는 속박의 줄입니다.
그런 속박들이 어떤 것들 입니까? 많습니다. 특정한 죄에 대한 사랑이라 든지, 반복해서 동일한 것에 실패하는 그런 것이라든지, 약점이라든지 이런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사슬이 됩니다. 그런 사슬들을 하나님께서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슬에서 끊으시는 방법은 이게 우리의 본성과 정신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작용이 우리의 본성이 미쳐서 이런 것들을 끊어내시는 것입니다. 환경만으로 절대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예화) 언젠가 방배동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담임 목사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법 글을 썼는데 제법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무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막 행패를 부리니까 집에서 정신과 판정을 받아서 강제로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 사람은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3년 동안을 강제 수용소에 입원을 시켰는데 자기를 치료할 목적이 아니고 자기가 귀찮았기 때문에 정신병동에 넣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3년 동안을 거기서 술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면 고쳐져야 할 텐데 3년 마치고 나오는 날 제일 먼저 한 것이 술을 마신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속에서 자신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얽어매는 줄들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몸에 밴 버릇 하나를 고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데 우리의 영혼에 사슬처럼 얽어맨 줄, 그 줄 때문에 사실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로 들어갔고, 곤고한 쇠사슬에 매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 힘으로 끊어낼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때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끊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영혼의 사슬을 하나님께서 끊어주시는 것입니다.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그것을 끊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새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맨 처음에는 흑암의 그늘에 앉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실제로 돕는 자 없이 고독한 가운데 주님께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과정 가운데 육적인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이 모든 악한 줄을 주님이 끊으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잖습니까? 그러면 억울하다, 힘들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면 하나님이 선물이다, 내가 교만하여 지고 하나님을 멀리 마음으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나태하니까 하나님이 이런 어려움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깨여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화) 저는 그래요 실천이 잘 되지는 않는데 가끔 해봅니다. 친구 목사님을 한분 만났는데 건강이 너무 안 좋았는데 냉온욕을 1년 했더니 그렇게 몸이 좋아지더랍니다. 뜨거운 물이 2분 있다가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2분 있고, 다시 뜨거운 물에 들어오는 것을 6번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럼 도합 12번이고 24분이 걸립니다.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는 것입니다. 그게 왜 몸에 좋은지 아십니까? 따뜻한 몸에 들어가 있으면 온 몸이 따뜻한 몸에 익숙해 져서 신호가 가면서 축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풍덩 들어가면 우리는 그냥 찬 물에 옮긴 것인데 우리 몸은 어떻게 하냐면, 이상한 것들이 몸에 침투하는 구나라고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몸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의 감각들이 깨어나서 방심하던 모든 육체의 세포들이 긴장을 하는 것입니다. 2분 쯤 긴장했는데 별일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풀어질 쯤되니까 뜨거운 물에 풍덩 들어가면 온 몸이 다시 두 번째 비상을 거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갔다 나오면서 우리 온 몸을 깨어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발동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시련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