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같은 승리를 주심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시 107:15-16)
녹취자: 장형주
15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라는 구절은 후렴구입니다. 그래서 109편에서 3번 반복되는데 15절, 21절, 31절에서 반복이 됩니다. 이 후렴구를 기준으로해서 이것을 세 토막으로 나뉘어진다라고 보고 이 후렴 구절이 아래 오는 것으로 보고 이렇게 세 토막으로 나눌 수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어떤 규정적인 형식에 매었다기보다는 이 시인이 후렴구처럼 이 세 가지를 감동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서술한 후에 군데군데 집어넣어서 이 시를 읽을 때에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적인 능력을 찬송하는 흥을 돋우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15절의 내용을 보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세 개중 하나, 첫 번째인데 보면 가장 커다란 찬송 제목이 인자하심과 기적입니다. 인자하심과 행하신 기적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에 관한 호칭이 여호와라고 등장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계시해주셨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자하심은 헤세드인데 이 헤세드는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유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성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사람들은 바로 그저 일반적인 모든 인간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과 특별히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영혼과 그리고 환경의 깊음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라고 하는 이 말 자체가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탁월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당신과 언약을 맺은 사랑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진노하사 파멸시키실 수 없는 분이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면은 이 하나님의 헤세드는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성품으로 계시됩니다. 즉, 자기의 백성들과 맺은 이 언약의 관계에 기초해서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한 이 그림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은 하나님의 진노가 종종 나타납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도 그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온역으로 죽어가거나 혹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죽이시거나 혹은 그들 가운데 당신의 종들을 들어 보복하게 하셔서 의로운 진노를 푸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대답하기에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우리들이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구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충분히 계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 인자하심, 헤세드는 결국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도록 충만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런 인자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혹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진노하시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섭리 속에서 많은 백성들이 시련을 당하고 죽어가는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 헤세드는 신약에서 나타난 이 아가페의 사랑의 말하자면 구속사적인 전개과정이고 계시의 과정이다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할지라도 항상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역사를 다루실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실 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다루시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 그 다음에 멸망하고 하는 이 끔찍한 심판의 과정 속에서 그 전쟁이나 혹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이 모든 과정에서 그 전쟁에서 죽고 끌려간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악인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니엘 같이 하나님 사랑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왜 포로로 끌려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항상 환난이나 시련, 하나님의 진노나 축복 이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가 산 것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개인적은 차원에서도 사람을 다루시지만 공동체의 차원에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죄를 바라보시고 이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야되겠다고 마음먹으실 때 그것은 이 공동체를 정화하시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는 일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전쟁이 나서 죽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이제 신약시대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워질 그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의 종자씨들을 준비하는 시간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으신 언약에 있어서 시종일관 인자하시고 신실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충분히 찬양할 이유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진노의 표현을 통해서 이것은 하나의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알려주시기 위한 하나의 accmodatio, 당신 자신이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지셔서 인간을 심판하시고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어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남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덕스러운 생활을 하나님이 진작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의 표현이라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이 죽음은 영원한 파멸과 심판을 의미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환난과 시련, 이 모든 것들 너머에는 하나님의 더 크고 원대한 계획들이 아름다운 직조물처럼 조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충분히 조화가 됩니다. 신앙이 없이 이성적인 생각만을 가지고는 충분히 납득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완전히 불합리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이 인자하심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이것이 찬송의 제목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서 저 깊고 깊은 산 중 토굴에 많은 병사들이 에워 쌓인 요새와 같은 곳에 그렇게 감추어져서 그래서 거기서 만약에 깊은 굴속에 갇혀서 그래서 손발이 사슬에 묶이고 목에 칼을 쓰고 그렇게 부자유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끊고 그 옥에서 나온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근데 영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래서 요새 지금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하나의 전쟁의 문맥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놋문을 깨드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이게 무슨뜻이냐하면 두 가지 그림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전쟁의 문맥이고 이 전쟁의 문맥을 절망적인 상태에서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투사함으로서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이 절망적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을 구하러 가시는 구원자로서 묘사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포가 발달하기 전까지는 이 성이 지금은 군대들이 무슨 성을 쌓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근데 옛날에 대포가 발달하기 전까지는 이 성은 말하자면 전쟁 시의 최고의 방비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그렇게 성을 쌓기 위해서 애를 썼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이런 거 쌓아본다 하더라도 뭐 폭격한번하면 다 없어지는 것이니까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성을 공약하는 많은 방법이 있는데 어디를 공약해도 쉽지 않습니다. 왜? 높이가 엄청나고 옛날에 콘스탄티노플 같은 경우는 이 벽의 두께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런 벽이 이중으로 되어있습니다. 두께가 얼마나 넓은지 다른 성들 보면 성위에서 말을 타고 달리지 않습니까? 만리장성 같은 거 보면 그걸 어떻게 뚫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사다리 같은 것을 놓고 이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야 되는데 어마어마하게 많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전쟁이 일어날 때 공략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성문입니다. 물론 이제 그 성문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결심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시대 같은 때 보면 성을 지을 때 지금 우리들이 흔히 보는 건 성문이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앞에 성이 쭉 되어 있고 문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안하고 성문 옆으로 벽을 다시 쌓았습니다. 그래서 성문으로 들어오려면 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적군들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 위에서 화살을 비 같이 쏟아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성문들을 되게 할 때 놋문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래서 어쨌든 문이니까 나무로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무로 만들고 그 위를 갑옷처럼 이 철제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두꺼운 쇠를 거기에 계속 붙여서 저쪽에서 화살이나 불화살이나 이런 것들을 던져도 성 문이 소실되지 않도록 그렇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이제 저쪽에서 커다란 나무 같은 것들을 가지고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면서 무력으로 성문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런 공격에 성문이 부서지지 않도록 놋문으로 만들고 이 뒤에는 쇠빗장을 걸어서 이런 공격에 끄떡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장을 꺾어버리셔서 그래서 성문을 부수고 성문을 향해 돌진하여 그 흑암에 그늘에 앉아있는 그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내시는 장면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의 비유이지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한 사람을 감옥에서 건지기 위해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서 하나님은 용사처럼 놋문을 깨뜨리시고 쇠빗장을 꺾어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을 건져냈기 때문에 그것을 기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향한 자비와 인자하심과 놀라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약시대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아주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보다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들이 계시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당신의 아들의 피로 세우신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자하심과 끝없는 자비와 용서가 당신의 교회에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환난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은총과 사랑을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적인 축복을 통해서 교회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커다란 변화들이 도입이 되면서 이렇게 인생에게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이 영적인 측면에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서 포로가 된 경우도 해당되겠지만 그것보다 이렇게 영적인 세력들에 의해, 죄에 의해 사로잡혀서 아무 희망도 없이 비참하게 그렇게 되어있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건져내시고 부르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강한 손과 능력으로 그들을 이끌어내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크고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베푸시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성취해가셔서 그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영광을 온 땅에 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적용한다면 우리가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그 절망보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능력이 크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기적으로 우리를 건지실 것이라는 확신속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