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1 (95. 1.17)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욘1:1~4)
녹취자: 김경애
자! 오늘부터 네 번에 걸쳐서 이 요나서를 다는 못하고 1장 한 장만 강해를 하겠는데 우선 지난겨울 사경회 때에 시편 23편 강해도 그러했듯이 빠지면 안돼요. 빠지지 말고 네 번을 계속 들어야지만 연속된 스토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아침시간에는 부담을 갖지 말고 어제 저녁처럼 막 고래고래 소리를 안지를 테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잡수시고 그리고 말씀 속으로 우리가 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늘 이런 종류의 설교를 할 때에 특별히 이야기 식의 강해설교에 대한 우리들의 최대 준비는 무엇이냐 하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만 가지고 올라왔어요. 그러니까 듣는 자들과 그 다음에 전하는 자가 한마음이 되면 나도 이 본문을 피면서 오늘 얼마큼 들어갈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러니까 하나가 되고 그리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마음의 모든 경계를 풀고 그리고 편안한 가운데 그 말씀 속으로 따라 들어가면 그러면 더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것이 잘 안되면(호흡이 잘 안 맞으면) 말씀에 깊이 들어가고자 준비를 해도 깊이 못 들어가고 다시 빠져나와야 되는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설교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나는 시간까지 하나님이 내내 성령으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얼마만큼 들어가다가 갑자기 바보가 될 것이라는 그런 긴박감을 가지고, 성도들은 늘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의 한 줄이라도 놓치지 않으면서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성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늘 기도를 하면서 마음을 개방해야 해요.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은 ‘저 사람이 누굴까?’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요. 마음을 모두 개방하고 그리고 무슨 말씀이든지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깨닫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들이 고요히 들어가면 됩니다. 믿습니까?
요나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들이 아는 바대로 불순종의 대명사에요. 그렇지요? 그래서 요나하면 아무튼 불순종의 대명사에요. 그리고 우리가 뭔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에 우리는 ‘요나와 같이…….’
(찬양)
불순종한 요나와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
늘 불순종의 대명사에요.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이번 사경회에서 이유가 없는 것은 없어요. 왜 요나가 불순종의 대명사가 되게 되었으며 또 그 요나는 과연 그렇게 부정적인 것 밖에 없는가?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요나의 불순종의 결과를 보면서도 그 뒤를 따라가게 되는가? 하는 것들을 이제부터 천천히 더듬어가면서 1장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무대는 어디냐 하면 어저께 우리가 여로보암2세 때에 호세아가 예언한 이야기를 했지요? 그 사람보다 약간 후대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의 동시대의 사람이에요. 거의 동시대의 사람이고 또 이 사람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어요. 그러니까 북 왕국이 아주 번성하고 그리고 여로보암 2세 때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아주 사람들이 말하자면 고소득사회를 지향하면서 그러면서 흥청망청 살아가는 그런 시대 때에 이 선지자가 부름을 받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요나서는 많은 가치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가치 중의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이 요나서가 다른 선지자들과는 틀리게 굉장히 사역의 대부분을 이방에서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물론 이방나라를 향해서 예언을 했던 사람은 요나 한사람은 아니었어요. 그 이전에 많은 선지자들도 에돔이나 아니면 모압이나 암몬이나 블레셋이나 혹은 다메섹이나 그런 나라들을 향해서 예언을 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전적으로 그 장소로 파송을 받아서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런 족속들에게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심판을 예언한 사람은 이 사람이 최초였다는 이야기에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요나서는 선교사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더군다나 이 요나가 아주 철저하게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면 ‘아! 역시 선교는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텐데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그를 꺾으셔서 선교적인 소명을 달성시키시는 것으로 보아서 역시 선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고 하는 어떤 이 평범한 성경의 진리를 역사 속에서 가장 확증해 주었다고 하는 점에서 이 요나서는 선교사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하는 것은 선교사적인 측면에서 이 요나서를 살펴보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1장에서는 철저하게 요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그 하나님과 선지자 요나와의 관계에 따라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지연되고, 또 어떤 심리 속에서 불순종의 길을 택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런 불순종의 길을 택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고, 그리고 일어난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원래대로 이룰 수 있도록 회복시키시는가하는 문제를 보면서 우리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치유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일단 이 요나서의 시작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그렇게 시작합니다. 이게 선지서를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것이 파격적인 것이에요. 다른 선지서를 펼쳐보면 ‘무슨 왕 몇 년에 선지자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하나님이 일러 가라사대…….’ 이렇게 나오거든요. 다 그렇게 나와요. 그런데 이 요나서에서는 그런 모든 왕의 계보나 나라에 상관없이 불쑥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무엇을 얘기하고 싶으냐하면 이것은 요나의 사역이 이스라엘이나 유대에서의 사역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와는 상관이 없는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땅의 임금의 이름을 댈 필요가 없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그리고 너는 일어나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2절의 이야기를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 드릴게요.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는 것은 단순히 2절의 내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그리고 요나를 부르셔서 이 요나와 교통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냐 하면 하나님이 이 요나를 특별한 사명을 주어서 특별히 어려운 이방의 지역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선지자를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셨는데, 이 선지자를 부르셔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남들에게는 주시지 아니하는 특별한 영적인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늘을 열고 신적인 교통을 이 요나와 더불어 갖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말씀이 임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이 ‘너는 가서 무엇을 하라’ 그 지시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을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은 것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큰 은혜를 받은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또 하나님이 어떠한 사명을 자신에게 주시며 그 사명을 가지고 자기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이 1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시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크게 깨달은 것이에요.
글쎄 여러분들은 혹시 그런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지만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의 마음에 큰 찔림을 받고 변화를 받아서 인생 자체를 방향전환 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말씀, 이런 말씀이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에요. 아직 없는 사람들은 받아야지요.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것은 뭐 너무 사소해서 사실은 거기에 대한 예가 될 수가 없습니다만 그런 성경이 여러 군데 있어요. 한 6년인가 7년 전에 그 중에 한 성경구절 하나를 드러누워서 자다가 잠이 안와서 일어나서 성경을 딱 펼치고 누가복음 19장을 보게 되었어요. 누가복음 19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거든요. 이 장면을 읽었는데 자다가 일어나서 잠 올 때 까지만 읽으려고 했는데 한번 읽었는데 그 말씀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해요. 두 번, 세 번 읽기 시작하면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불과 같이 와 닿았어요. 10시 40분에 자다가 일어나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 부분만……. 그것을 성경을 다 읽고 기도하고 마치고 나니까 아침 8시였어요.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강하게 붙잡아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고 그러다가 내가 약해지면 놓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주장해서 나로 하여금 그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기를 원하는 그 메시지 앞에서 내 마음이 녹아지고, 내 전 삶이 그 말씀에 붙들려서 그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 말씀 속에서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과 눈물이 느껴지는……. 그런 말씀의 체험, 그런 것을 무한대로 확대시켜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할 때의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는 가서 말하라.’ 라는 그 말씀을 그냥 이렇게 주신 것이 아니에요. 그냥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요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가 그렇지요.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딱 가슴속에 다가와서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사명감에 막 불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세례요한이 30년 동안을 광야에 있었어요. 30년 가까이……. 그런데 왜 그가 광야로 갑자기 뛰어나와가지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친 이유가 무엇이에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야에 나와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적인 부흥에 조금도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면서 그들의 심령 속에 있는 죄악을 질타하면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회개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끝까지 몰고 가서 항복을 받아내게 만들었던 그런 위대한 힘이 어디에 있었어요? 쉽게 얘기해서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까 그가 이제 더 이상 고요히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뛰어나온 것이에요. 막 외치는 사람이 된 것이에요. 이제 임했다는 말이 이해가 갑니까? 그것이죠! 그러니까 신약의 용어로 말한다면 진리의 말씀과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 속에 역사하는 강력한 성령의 체험이 동반된 가운데 이 선지자가 큰 은혜를 받은 것이에요.
여러분! 큰 은혜가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에게 곧 심판이 이르렀다고 외쳐도 선지자들을 목 베어 죽이고 채찍으로 두드려 패가지고 순교의 길을 가게 만들었는데 여기 니느웨는 전혀 하나님을 믿는 데가 아니에요. 요나가 갈 때에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갔어요? 아니면 호위대를 거느리고 갔어요? 장갑차를 앞세우고 갔어요. 홀홀 단신으로 거기를 가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디로? 왕들이 있고, 호위병들이 있고, 군사들이 가득한 수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잠시 후면 하나님이 너희 성을 무너뜨리시리라.’ 그리고 지나가야 되는데 누가 그러겠어요? 쉽게 얘기해도 이해가 안가면 지금 이북으로 들어가서 평양에 가서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시리라 몇 날이 못 되어서 너희 지도자는 죽고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서 이 나라는 망하리라.’ 누가 가서 그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에요. 이해가 되십니까? 그 사명의 어려움을?
그런데 은혜를 안주시고 그렇게 가라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보고 김정일 사는 평양에 가서 잠시 후면 망한다고 그러라고 그렇게 안하셔요. 큰 고난을 받으며 죽어갔던 사람들은 동일하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에요. 그 무엇입니까? 우리교회는 안사다 놨는데 교회마다 보면 순교자라고 사진이 쭉 나오는 것이 있잖아요? 순교자들은 그렇게 교회에다가 족자를 걸어놓고 자기네들을 지켜봐주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옛날에 있던 교회의 목사님이 평양에서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하셨거든요. 교역자회의가 끝나고 나면 한사람씩 순교자를 짚어가면서 이 사람의 본받을 점이 무엇이고……. (당신이 다 본 사람들이고 만난 사람들이 굉장히 많으니까) 그러면서 이야기를 해주는데 어떤 대목에 가서는 그래요 ‘이 사람이 순교를 했다? 글쎄요.’ 죽기는 죽었겠지요. 그런데 평소에 삶이 순교자적인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죽은 것이죠. 그런 사람들도 세상의 사람들은 순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순교자 명단은 같지 않아요. 진짜 순교를 한 사람들은 죽는 것만 틀린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죽는 것이 뭔가 남다른 죽음을 한 사람들은 사는 것이 남달랐다는 것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죽는 것이 남달랐던 사람들은 먼저 사는 것이 남달랐다는 것이에요. 어떻데 남다른 삶을 살 수 있었어요?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니까 그 은혜를 주셔야지 순교를 하든지 가서 사명을 감당하든지 하지요. 옛날에 내가 내수동교회에서 가르치던 형제, 자매가 둘이 있었는데 그 형제가 동생이고 그 자매가 누나에요. 그런데 그 누나 되는 애가 좀 황당해요. 만날 기도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내 동생 순교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순교하려면 자기가 해야지 왜 동생을 순교하게 해 달래요? ‘주님, 내 동생이 순교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옆에서 동생이 있다가 ‘아니 누나 나 순교하기 싫어 왜 나보고 순교하라고 그래?’ 하나님이 사명을 주시기 전에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은혜를 안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은 그것은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착각한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명을 주셔서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착각을 해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나보다고 가는 사람은 결국은 그 길을 걸어가다가 결국은 이 길이 자기의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큰 은혜를 요나에게 주신 것이에요. 더 설명하고 싶지만 더 설명하면 오늘 1절밖에 못하니까 진도를 나가야지요. 아무튼 큰 은혜를 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렇게 큰 은혜를 받으니까 요나에게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여러분 은혜 받은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는 것이에요. 왜 은혜를 자꾸 잃어버려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데 왜 그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고 자꾸 쏟아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무엇 때문에 그래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계획이 있어요. 뜻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거기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알아요.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자기가 안다고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셔요. 은혜를 받을 때는 ‘할렐루야!’ 하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왜? 이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도 알게 되고 그리고 만날 강도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뭐 심령이 녹아진다고 그러더니 ‘야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랬더니 이게 과연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일이 다 다른 사람들의 일과 같았는데 이 방언의 은사라는 것이 이렇게 오는 거구나! 아! 성령을 불붙듯 부어주신다고 그랬는데 아! 이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사랑의 은사를 주신다고 그랬는데 이거구나! 내가 참 미워하고 진짜 만날 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사람을 아! 이렇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구나! 야! 내가 돈은 많고 남편이 높은 지위에 있지만 그러나 한 번도 평안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이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시는 평안이 이런 것이로구나!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받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때는 기분이 너무 좋아요. 할렐루야! 은혜가 너무 좋구나!
어저께도 전에 있던 교회의 자매들이 우리 집회에 잠깐 참석한다고 왔는데 참 안타까워요. 제가 한곳에서 1년 반인가를 사역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1년 반 동안 설교를 했는데 1년 3개월이 되도록 설교를 안 들어요. 그러니까 제가 단상에만 올라가면 눈이 좌불안석이에요. 나를 쳐다보자니 부담스럽고, 안 쳐다보자니 괴롭고, 계속 설교를 듣지 않아요. 솔직한 심정으로 말씀이 도대체 소리로 밖에는 안 들린다는 것이에요. 그러더니 내가 떠나기 한 3개월 전쯤인데 눈빛이 달라지면서 말씀이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해요. 메말랐던 눈동자에 이슬이 맺히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어린아이처럼 서서히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계속 주시는데 어느 날 안타깝게 3개월이 딱 지나니까 나는 열린 교회로 오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때 그 시간들이 참으로 귀했다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요나에게는 이렇게 인생과 영혼 전체를 뒤흔드는 은혜를 주셨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엄청나게 커다란 것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이렇게 달란트를 각각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도 우리에게 어떤 사람에게는 큰 은혜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필요한대로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사람들이 그 은혜를 받고 그 은혜가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면 더 큰 은혜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나누어주시는 것이죠. 믿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큰 은혜든, 작은 은혜든 은혜를 주신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다는 말이죠. 거저가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참 할 만했잖아요. 사도바울이 무슨 공로가 있었어요? 공로라고 그래봐야 교회를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달려가는 것밖에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어요. 그래서 늘 하는 말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은혜로 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죄인중의 괴수인 나를 사도로 삼으셨다.’ 항상 그 은혜가 거저 주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이에요. 아! 하나님의 은혜라! 나는 공로 없으나 주님이 은혜를 우리에게 거저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인생을 살면서 나중에 깨달은 것이 무엇이에요?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아 그렇구나! 참 좋다!’ 그러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우리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이에요.
잘 보세요. 은혜를 받고나서 가정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고,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심지어는 여러분 자신의 심령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은혜가 넘치는 곳에는 틀림없이 문제가 많은 환경이 있어요. 문제가 많은 그 환경 속에다가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신앙으로 그 문제들을 개척해나가지 아니하면 그 문제가 있는 것이 영원히 문제로 남고 끝나게 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있는 곳에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두셔서 그를 사용하시고 역사하셔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시고 역경을 은혜로 바꾸시는 이러한 역사를 펼쳐나감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보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어때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인생의 많은 무거운 짐과 그리고 문제들 속에서 고통하면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예수를 제대로 믿어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총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대책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듯이 고통 하는 모든 인간의 고통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에요. 그리고 은혜를 받는 것이에요. 그것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신 것은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문제를 보게 하시는 것이에요. 자기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그리고 교회의 문제,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개척해나가고, 해답을 주고, 해결을 해서 그래서 그 문제들 속에서 얽매인 사람들을 풀어주고 놓아주고, 또 자신을 해방시키고 이러면서 사명에 충실해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끊임없이 주시는 것이에요. 그 이스라엘의 한쪽으로 요단강이 쭉 흐르잖아요? 그 요단강이 흐르면서 그 중간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는데 갈릴리호수에요. 그 밑에는 사해가 있어요. 저는 사해를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가끔 보면 한강에서 빠져죽겠다고(그런데 왜 동작대교를 잘 애용하는지 모르겠어요.) 동작대교 위에 올라가서 거기가 요만하거든요. 걸어가면 걸어갈 수 있어요. 거기를 올라가서 빠져죽으려면 얼른 빠져 죽어버리지 거기서 계속 ‘나 죽는다.’ 그러면서 손을 흔든단 말이에요. 그러면 소방대가 오고 사이렌이 울리고 교통이 통제되고 그리고 거기 죽으려고 올라간 사람들만 살살 꼬셔가지고 내려오게 하는 전문 경찰이 있어요.(말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는 담당이 두 사람이 있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올라가서 ‘왜 그러느냐?’ 그러면 대부분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진짜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부인이 도망쳤는데 내가 죽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을 우리들이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되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해에서 빠져 죽으려고 몸을 집어던져도 (아마 그런 사람들은 사해에 가서 쇼를 하면 잘 될 것 같아요.) 몸을 집어던져도 그냥 가슴까지 올라오며 둥둥 떠다니는 것이에요. 소금이 많아가지고……. 죽으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거기 가면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없어요. 가서 누워만 있으면 그냥 몸이 둥둥 뜨는 것이에요. 한없이 잘 가는 것이죠. 아무 생물도 살지 않아요. 살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흘러들어오는 물에 비해서 증발이 많아서 그런지. 그리고 밑에 소금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그래서 물이 굉장히 짜요. 그래서 생물이 살수가 없어요. 김장때 거기다가 배추를 절이면 확실할 것이에요. 그렇게 짠데 그 바로 위의 갈릴리 호수에는 아주 맛있는 물고기들이(맛있는 물고기라고 그러니까 이상하다), 아무튼 싱싱한 물고기들이 아주 잘 살아요. 그리고 생물들이 풍성해요. 폭이 4킬로쯤 되고 길이가 73킬로나 된다고 하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호수가 아니라 차라리 바다지요. 그렇게 물이 맑고 좋대요. 지금도 가면 베드로 고기라고 해가지고, 베드로가 잡던 물고기라고 일컬어지는 그 넓적한 고기가 많이 돌아다닌대요. 왜 같은 강줄기에 있으면서 위, 아래가 틀린 이유가 무엇이에요? 아래에서는 물을 받기만 하고 계속해서 그 물이 축적되면서 그 물이 증발하니까 짜지는 것이에요. 위에서는 물이 흘러들어오면서 한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을 칭찬하셨어요.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두 달란트 맡은 종도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동일한 칭찬을 받았어요. 무슨 뜻이에요?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비교 개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늘 나는 왜 한 달란트일까? 그리고 그 한 달란트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은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주는데 나는 왜 한 달란트일까?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것을 혹시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내가 이것을 투자했다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주인이 얼마나 나를 욕할까? 라는 그런 어떤 노예적인 근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훌륭한 사람은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한 번도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왜 다섯 달란트고 나는 왜 두 달란트 밖에 안주었을까? 사람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절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달란트를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 속에서 비교개념 없이 살았던 것이에요. 나는 몰라. 누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고 내 은혜가 큰지 저 사람의 은혜가 큰지 나는 몰라요. 나는 상관없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나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가 아무리 클지라도 나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다는 것이에요. 시내에 돌아다녀보면 좋은 차들이 얼마나 많아요? 한번은 지나가는데 뭐 교회도……. 요새는 봉고가 너무 좋은 봉고가 나와요. 얼마나 좋으냐하면 의자가 6개밖에 없어요. 편안히 앉아서 가는 그런 봉고들이 나와요. 그런 봉고가 다 지나가도 나는 남의 봉고가 몇 백만 원을 주고 샀는지 몇 천만 원을 주고 샀는지 나는 몰라요. 나는 우리 봉고가 제일 좋아요. 왜 그래요? 이게 조그마해가지고 골목길도 잘 돌아다니면서 심방을 하고, 새벽기도에도 실어 나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절대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생각을 해야 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셨지요? 그렇게 주신 은혜가 큰 것이든지 적은 것이든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주신만큼 우리가 문제가 있는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감당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 네가 어찌하여 다섯 달란트를 못 남겼느냐고 그렇게 말씀하지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네 달란트를 남겼다면 절대적인 개수에 있어서는 두 달란트 맡은 종을 추월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코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없었을 것이에요. 바로 그것이에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큰 사명을, 작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작은 사명을 감당해 나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할 때에 어떤 한계를 느끼느냐 하면 나에게는 더 큰 은혜가 필요하구나! 더 큰 은혜가 아니면 내가 이 사명을 감당할 길이 없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더 은혜를 주시는 것이죠. 은혜를 주시니까 좀 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이런 관계가 계속되게 되는 것이에요. 이미 요나는 과연 큰 사명이 주어졌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한 개인의 죄도 중하게 보시지만 전체적인 죄도 중하게 여기셔요. 한 도시와 한 나라의 죄악이 가득하게 되면 개인적으로 죄악이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징벌을 하시고 깨닫게 하시지만 나라에 죄악이 가득차면 그 속에 경건한 사람 몇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 경건한 사람들도 불경건한 사람들의 불경건한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정과 그 다음에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들이 감당해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가 은혜를 받아도 교회의 고민을 짊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라의 어떤 문제나 이런 죄악들에 전혀 관심 없이 개인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포기하고 망각하고 아예 그냥 단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전혀 기뻐하지 않으셔요. 오늘 보세요. 이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때에 그러면 거기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습니까? 다니엘과 같이 경건한 사람이 있었어요. 하나냐 와 아사냐와 미사엘과 같은 그렇게 불굴의 신앙을 가진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틀림없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차니까 경건한 사람들도 그 심판을 겪게 하셔요. 그러면 로마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일 것이라고 하는 그 예언이 바로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던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장면에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언이 주어지게 되는데 로마의 디도장군이 와서 토성을 쌓고, 어린아이를 메치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때에 그러면 그 죽은 사람들은 전부 다 하나님을 잘 안 믿는 사람들만 꼭 족집게처럼 뽑아내서 죽였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게 하나님의 백성의 연대적인 책임이에요. 그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 속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사명과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들의 사명은 각각 틀린 것이에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더 힘에 넘치게 죽도록 충성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되는 것이에요. 가정을 돌아보세요. 가정을 돌아보면서 여러분 이외에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가정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짊어져야 되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 먼저 은혜를 주신 것이에요. 그 하나님의 사명의 자리를 여러분들이 외면하고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있는 곳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 자체만을 괴로워 해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이유가 분명히 있어요. 보세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교회 구석, 구석을 살펴보세요. 그러면 해 아래 있는 교회치고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어요. 어느 교회는 아주 많고 어느 교회는 조금 적다는 것뿐이지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어요. 그리고 앓지 않는 교회는 없다는 것이에요. 어느 부분이든지 상처가 있고 그리고 아픔이 있어요.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기만 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교회의 그런 아픈 부분들을 찾아내고 그 부분들을 스스로 자기의 고통인 것처럼 쓸어안고 고민하고 고뇌하고 그리고 아파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자기를 도구로 써달라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는 이런 일들이 없다면 그러면 우리의 은혜가 자꾸 마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사람들은 문제를 보게 되고 그 문제를 위해서 헌신하게 되요. 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문제를 보고, 문제에 헌신하게 되니까 이전에 받았던 그 은혜 가지고는 도저히 필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더 큰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에요. 더 간구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더 큰 은혜, 더 큰 사랑, 더 큰 능력, 더 위대한 성령의 힘, 그리고 더 놀라운 권능, 이런 힘들을 강하게 필요하게 됩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고 그리고 예수 안에서 진정 해방된 사람들이 몇이나 됩니까? 사람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정죄함이 없고, 너희는 해방되었고,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의에 대해서 산자로 여겨야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이 많아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에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은혜의 해로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주고 눈먼 자들을 보게 하게 하는 이러한 자유케 되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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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 속에 있는 문제만을 보면서 그 문제 때문에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우리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들을 우리는 돌아보아야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또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죠. 뿐만 아니라 가정의 경우에는 더 극명하게 드러나죠. 그렇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를 들면 모든 믿지 않는 가족들 중에서 나를 먼저 믿는 자로 부르셨다. 그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는 것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그 가정을 목회해야할 사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그 목회의 특성이 뭐냐 하면 교회의 목회자는 믿는 자들을 목회하지만 그 목회는 불신자들까지 포함해서 목회를 해야 되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생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왜 30년 전에 안 믿는 남편하고 결혼을 했을까?’ 라고 한탄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왜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라고 안 믿는 부모를 두고 원망하는 것은 오히려 받은바 우리 은혜를 앗아 가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의 삶의 태도였어요. 하나님이 그런 속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즉시 사명에 눈을 뜨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어때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즐겁고 신나는 인생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는 사명이 기다리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할 사명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가? 디모데후서 1장에 보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복음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따라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은혜는 고난을 받기 위한 증표냐?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을 해서는 안 되죠. 왜?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그것은 너무나 말하자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있고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실 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에요. 선지자들을 봐요. 죽음의 위협이 순간, 순간에 눈앞에 나타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어요. 즐거운 길이었어요? 그런데도 얼마나 놀라워요? 옥 속에 갇혀서 온 몸이 채찍에 맞아서 피가 터지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그러면서 밖의 자유로운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커다란 영적인 교통을 주시는 것이에요. 오죽했으면 성경에 옥 속에 갇혀있는 사형수가 옥 밖에 있는 사람들 보고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너희는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온전히 기뻐하라.’누구의 편지에요?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요. 옥 속에 갇혀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곳에는 문제가 있고 문제가 있는 곳에는 사명이 있는데 그 문제 속에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애를 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셔요. 그래서 감당을 하면서 고난을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을 잊어버릴 수 있고 고난을 고난으로 안 알 수 있는 그런 내면의 놀라운 평화와 그리고 위대한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바로 그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때요?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돈이 많지 않아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이에요. 기뻐하며 노래하며 춤추는 자들이 아니라 ‘울며 애통하는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세상에서 대접받는 자들이 아니라 ‘핍박을 받고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에요.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이 요나에게 큰 은혜를 주시니까 이 요나에게 하나님이 큰 사명을 주시는 것이에요. 만약에 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옵고 바로 들어가서 이 사명을 이루었다면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을까요? 그게 두 번째 회개하고 가는 곳에서 나타나잖아요? 그게 요나 생각에 여기에 가서 말씀을 전해야 되는데 우선 두 가지 생각이 커다란 위기를 부딪친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을 것인가? 그렇지 않아요? 죽음밖에 무엇이 기다리는 것이 있겠는가? 하는 그런 커다란 두려움이었지요. 그렇죠?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 부흥회를 할 테니까 오라. 그래서 강사가 가보아도 구석에 앉아서 말씀도 안 듣고 그냥 마음을 닫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그득한 것이 요즘 세상인데 여호와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백성들이 비무장인 자기가 들어가서 ‘하나님을 믿어라.’ 이렇게 말할 때 자기를 놔둘 것인가? 이게 큰 문제였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러한 걱정과 우려를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간단했어요. 그냥 뭐 복잡한 말을 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40일후면 하나님이 이 성을 멸하신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간단한 메시지를 가지고서 돌아다녔어요. 대대적인 각성이 온 도시에 일어났어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금식하고 왕이 그 옷을 찢고 재를 무릅쓰고 베옷을 입는……. 말하자면 전국적인 대 각성이 일어난 것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은혜를 주신 곳에는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아무리 커 보인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예기치도 못한 정도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높아져가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찬송하나 부르겠습니다.
(찬양)
337장입니다.
1.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2. 자비하신 보좌 앞에 끓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주여! 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3.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 맘을 고치시고 구원 하소서 주여! 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4. 만복 근원 예수시여 위로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 이 어디 있을까 주여! 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아멘.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큰 사명을 감당케 하시려고 애를 쓰시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3절이에요. 3절 초반을 보세요. 처음 시작이 별로 좋지 않지요? 1장 3절의 처음에 뭐라고 시작합니까? ‘그러나’ 이게 문제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사명을 주셨으나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그랬습니다. 2절을 보면 뭐라고 그랬어요? ‘너는’ 어떻게? ‘일어나’ 3절에 보니까 또 뭐라고 그래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 중에서 ‘일어나’라는 말처럼 의미가 깊은 동사도 흔치않아요. 일어나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쿰’ 인데 그래서 달리다쿰 그러잖아요? ‘달리타’는 여자아이에요. ‘쿰’은 ‘일어나’에요. 이게 명령형으로 쓰여요. 쿰=일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너는 일어나’ 지금 현재 무슨 이야기에요? 지금 엎어져있는 것 같은 상태를 표현하는 것 아니에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요. 요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누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고개를 똑바로 들고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린 청년들 기억하세요. 어른하고 대화할 때는 두 번째 단추를 쳐다보면 되요. 어디를 가든지 실수를 안 해요. 어른하고 이야기하는데 먼 산을 쳐다보아도 실수가 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면상을 쳐다보아도 실례에요. 그러니까 야단을 맞을 때는 세 번째 단추쯤을 쳐다보고 야단을 맞지 않을 때는 첫 번째 단추쯤을 쳐다보면 어디 가서 실례를 안 해요. 그리고 고요히 듣는 것이죠. 사람도 그러한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선지자가 고개를 똑바로 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뭐라고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 뭐라고 그러셨어요? ‘내가 죽은 자와 같이’ 어떻게 되었다? ‘엎드려졌더니’ 엎드려진 것이에요. 그러니까 쿰=일어나라.
또 하나는 요나의 영적인 상태나 삶을 표현한 것이죠. 그게 뭐에요? 엎드려져 있는 자와 같이 살아가는 그 삶에서 너는 이제 결단을 하고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는 환경이 있고 문제가 있는 환경 속에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쿰’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이야기에요? 결단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결단하고 일어나는 것이에요. 일어나야 될 것 아니에요? 결단을 하고 일어나라. 하나님이 촉구하는 그 결단은 어떤 의미에요? ‘그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갚겠는가? 그래! 나는 비록 호위병이 없고 창과 칼이 내게 없고 그리고 니느웨에서 도사리고 있는 백성들이 아무리 험악하고 그리고 내 생명을 위협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일어나리라!’ 그러한 사명을 향한 도전의 결단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에서 일어나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비슷한 것이 사도행전 20장에 나오잖아요? 뭐라고 그래요?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려고 하는데 예언을 하는 것이에요. 행동으로 예언을 하는데 바울이 혁대를 풀어서 자기 손을 매면서 예언을 하는데 ‘이 띠의 임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환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환경이 가로막는 것 보다 더 큰 것이 내 마음속에 있는데 그것은 사명이다. 그러니까 뭐라고 그래요? ‘내가 예루살렘에서 어떠한 고난을 당할지 알지 못하나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는 내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노라.’ 하고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쿰’이에요. 그것은 결단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제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니까 그 받은 은혜를 통해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이고 내 주위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고 내가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 결단함으로써 응답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사실 어제의 메시지하고도 통하는 것이에요.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결단을 하고 쟁기를 들고 나서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보따리를 싸들고 부흥회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뭔가 변화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만날 은혜를 받았지만 그러나 은혜는 받고 삶을 결단하고 이제는 그 문제 많은 현장 속에 뛰어 들어가서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능력으로 싸우고 고쳐 나가야 되요. 자신 속에 있는 그런 고통들이 있으면 그것을 무너뜨리면서 이기려고하고 교회 속에서 그런 부분들을 짊어지고 고난을 받으면서 내가 싸워가야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가정 속에 그런 문제가 있으면 여러분 포기하지 말고 그리고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야 되는 것이에요. 에스겔 선지자가 뭐라고 말했어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심판을 받게 되면 그들은 불순종한 대가로 멸망을 하려니와 너희들에게는 내가 핏 값을 찾겠다고 그랬어요. 왜?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이런 특별한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간단 말이에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증가될 길이 없어요. 증가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마지막 그 한 달란트도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버리시잖아요. 그런데 그런 결단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큰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주시기 전에 그 사명 속에서 하나님이 미리 알려주시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그런데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요나야 결단이 필요하단다. 요나야 일어나라.’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에요. 은혜만 사모하고 ‘아, 좋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는 결단을 하라는 것이에요. 그리고는 ‘문제가 있고 사명이 있는 그곳으로 네가 가야되느니라.’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그렇게 되어야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그러나 요나가 일어났다.’ 일어나긴 일어났는데 이것도 결단은 결단이었어요. 무엇을 하기로 결단한 것이에요? 순종을 안 하기로 결단한 것이에요. 이러니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제 비극이 시작되었어요. 이 간단한 말 하나로 비극이 시작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가만히 보면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내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매순간마다 결단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안 행하기로 결심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것을 아세요? 신기하지요? 그것은 우리의 변명이에요.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여기로 왔다. 아니에요. 매순간마다 불순종을 선택한 것이에요. 일어나서 결단을 하고 선택을 하는 것이에요. ‘나는 이 길을 안가리라. 나는 이 사명의 길은 싫다. 내가 왜 이 길을 가야해?’ 그러면서 간 것이에요. 때로는 작은 결단일 때도 있고 때로는 큰 결단일 때도 있지요. 여기서는 아주 큰 결심을 한 것이지요. 참 잘났어요. 큰 결단을 한 것이에요.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들려서 ‘요나야 너는 일어나서 내가 너에게 준 큰 은혜를 힘입어서 문제가 많은 니느웨로 가서 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결단을 하여라.’ 그랬는데 가만히 있다가 ‘아유 씨! 내가 결단을 하고 말리라.’ 결단을 쾅 하고 ‘싫습니다.’ 그리고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느 설교가는 훌륭한 이야기를 했어요. 매 순간의 불순종은 매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얼마나 훌륭한 말이에요? 그러니까 한번 이 길이 아닌지를 알면서도 이 길로 가는 것은 그 순간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에요. 그것이 계속 쌓여가면서 우리는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눈을 떠보니까 이런 곳으로 왔다. 아니에요. 순간순간 하나님을 버렸어요. 그리고 순간순간 하나님을 향한 사명의 길로 가야되겠다는 그 믿음을 택하기 전에 불순종을 택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어느 날 더 이상 택하려야 택할 불순종의 길이 없는 상황에 갔을 때 그때서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 흘러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죠.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니까 참 이 사람을 보면 선지자 가운데 제일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이 사람이에요.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의 사명을 주셨는데 니느웨까지 가고 나서 가다가 성을 보면서 말하자면 그 성의 사람들이 마치 가나안 원주민처럼 거인과 같고 기린과 같아서 메뚜기같이 느껴져서 그런 두려움 때문에 ‘아이코! 나는 마음이 녹는 것 같아서 못하겠다.’ 그랬다면 이해가 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또 그 교통 속에서 놀라운 음성을 들려 주셔서 ‘너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 그러시는데 어떻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어나라고 그러니까 일어나면서 결단을 하는데 불순종하리라는 결단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느냐는 것이에요.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이 불순종하는 것과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불순종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이러는데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런 생각을 하거나 이런 비교의식을 갖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바보가 없어요. 그런 것은 그렇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교회를 봉사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비교할 것이 없는 것이에요.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몰라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가장 난해한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이 사람이에요. 단순히 수준이 낮은 정도만이 아니라 이 사람의 심리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다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라면 안 그랬을 것이에요. 최소한 그래도 배는 탔을 것이에요. 가다가 다시 돌아올지는 몰라도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랬어요. 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지 압니까? 인간 속에 깃들여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좋은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표독하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불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그 가능성이 인간 속에는 무한하게 깃들여져 잇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아직까지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면 언젠가 한번 큰코다치는 일이 일어나요. 늘 드리는 말씀이 그것이지요. 자신을 믿지 마라. 정말 자신을 믿지 말아야해요. 이런 큰 은혜를 받은 사람도 이럴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아무리 큰 은혜를 받은 사람도 매일 매일의 신앙을 긴장 가운데 살아 가야돼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랬어요? 신령한 면에서라면 천국을 갔다 온 사람이에요. 삼층 천을 보았다고 그랬어요. 능력에 있어서는 죽은 유두고를 기도해서 살렸어요. 말씀에 있어서는 성경을 알뿐만 아니라 아예 성경을 썼어요. 목회적인 역량에 있어서는 수많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회를 개척했어요. 사심이 없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일체의 사례금을 받지 않고 천막을 기워가면서 자기와 동료들을 먹여 살리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생애를 마침에 있어서는 순교를 했어요. 그 사람도 뭐라고 그랬어요? ‘모든 사람들을 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내가 그리스도께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니 내가 날마다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나니…….’ 이게 바로 인간의 본모습이에요. 이런 요나의 본성이 요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요나는 지금의 우리를 대변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다 깃들여져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그런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이런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강한 불순종과 그리고 강한 순종의 길을 걷지 않는 사명의 길을 걷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이 요나 속에 있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매순간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에요. 여기에서의 이야기의 구도를 간단하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가치 없는 요나를 불러서 큰 은혜를 주셨고 큰 은혜를 주신 다음에 큰 사명을 주셨어요. 큰 은혜를 주시고 큰 사명을 주셨는데 요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설교자의 말이 정말 진리에요. 그러니까 ‘매 순간의 불순종은 매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택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워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긴장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왜 요나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사명을 회피했는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죄에 해당하지만 요나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언제든지 상대적인 것이니까 말이죠. 우리들이 요나의 입장에서 요나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어요. 요나의 심정 속에 들어가서 요나가 왜……. 그 사람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니에요? 내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그렇게 놀랍고 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생각되는데 그런 길을 택한 데에는 요나는 요나대로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 아니에요. 할 얘기가 없고 ‘나도 몰라.’ 그러면 그것은 정신병자이지요. 하나님이 설마 정신병자를 불러서 선교사로 불렀겠어요? 이유가 있지요. 이유가 있었어요. 무슨 이유인지 아세요?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니느웨로 가서……. 우리로 표현을 하면 간단하게 말하자면 평양이에요. 복잡하게 말할 필요가 없어요. 앗수르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수시로 침공하면서 억압하고 있었거든요. 적국이에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침략으로 죽어 넘어갔어요. 그리고 최대의 난적이에요. 세력이 너무나 커요. 강대국이에요. 그런데 그 앗수르 니느웨는 그 강대국의 수도 한복판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로 가서 전하라. 우선은 뭐냐 하면 인간적인 두려움이 앞선 것이에요.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느냐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정신이 나가셨나봐. 왜 나를 거기로 보내……. 차라리 은혜를 주시지 말지……. 은혜를 줄때는 좋았는데 끔찍하지 세상에 나를……. 내가 무엇이 관대 이런 미물의 인생이 그 엄청난 포악한 인생들이 도사리고 있는 그 적국의 수도 한복판 더군다나 왕궁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를 죽일 일 났어?’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때요?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문제가 작아 보이지 않는 것이에요. 왜? 문제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에요? 은혜를 안 받았을 때도 문제를 쳐다보면 한숨만 나오는데 은혜를 받고나서 쳐다보니까 은혜를 딱 받고나니까 그 문제가 콩알만 해지고 ‘이까짓거’ 그랬으면 좋겠는데 은혜를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도 문제는 역시 문제로 보이는 것이에요. 역시 은혜를 받았는데도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회피했지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에요. 뭐에요?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이 쓸어버리시면 되지…….’ 누가 원하는 바에요?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요. 왜? 너무 그 민족으로부터 고통을 받아왔으니까 하나님이 싹 쓸어버리시면 되잖아요. 싹 쓸어버리면 되는데 쓸어버리시지를 않고 ‘가서 외쳐라!’ 그러는 것을 보니까 이 선지자가 모종의 하나님이 꿍꿍이속이 있으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게 뭐에요? 회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인지 알 수 있지요.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들이 불순종을 잘해요. 헌신도 잘하는데 불순종도 잘해요. 벌써 판단을 할 때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낌새가 드는 것이에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에요. 그게 증명이 어디서 되요? 나중에 커다란 회개가 일어났어요. 아니 설교자로 파송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외칠 때 수많은 백성들이 막 옷을 찢고 ‘여호와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면서 매달릴 때 그때 기분이 좋아야지 마음에 독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에요. ‘세상에 하나님이 나를 속였구나! 쓸어버리신다고 그러시더니 쓸어버리시기는커녕 회개케 해? 세상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 그리고 이빨을 악무는 것은 왜 그러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보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의 벽을 더 단단히 붙든 것이에요. 그 상식의 벽이 뭐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누가 만든 하나님이에요.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성경은 뭐라고 대답을 하느냐하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자기를 그렇게 소개하거든요. 그게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느냐하면 하늘을 지으시고 바다를 지으시고 육지를 지으시고 그 모든 것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 우리의 사명을 방해하는 것이에요. 방해하는 것이죠.
이 요나가 그랬기 때문에 오늘 뭐라고 그래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그랬잖아요. 이 ‘피하려고’ 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도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에요. 그 당시에는 어떤 신관이 유행했느냐하면 신들이 지역을 정해놓고 통치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담당구역이 있어요. 바알은 이 구역, 아세라신은 이 구역, 그 다음에 몰렉신은 이 구역, 그 다음에 여호와는 이 구역……. 이렇게 구역이 정해져 있어서 그 구역 안에서는 그 신을 섬기지만 그 구역을 떠나면 쫒아오지 못한다는 이런 지역신 개념이 있었어요. 이게 다 미신에서 나온 것이고 이방종교에서 나온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선지자인데 그런 이방종교에서 흘러들어온 사고방식이 안 깨어지고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보세요. 은혜를 한번 받아서 깨어졌다고 그러기 잘하는데 깨어졌다. 그래요. 깨어지지요. 그런데 한번 깨어질 때 하나씩 상식이 무너지는 것이에요. 깨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냥 애통하면서 데굴데굴 구르고 울고불고 하는데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대요. 성경에 다 나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무너진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나봐.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시나봐. 나는 아무래도 가망이 없어.’ 이런 것들이 먼저 깨지는 것이에요. 그 상식이 깨뜨려져 나가고 부러져 나가지 않은 것이 바로 요나 선지자의 불순종의 원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었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이 길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대신에 인간의 상식이 계속 역사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의 길을 택하도록 우리를 충동하고 불순종의 길을 가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도전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어야 해요. 이렇게 잘못된 생각의 벽이 깨뜨려져야 되요. 생각의 벽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가 가슴으로 밀려오기 전에 먼저 우리의 머리가 부서져야 되요. 그래서 그냥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쭉 읊은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 정말 미련한 것을 깨달은 것이에요. ‘이 세상에 지혜 있는 자들이 미련하구나!’ 이 요나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요나에게 주어져서 요나가 다른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어요. 그리고 그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큰 사명을 주셨어요. 그러면 그저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야 되요. ‘주님은 은혜를 나에게 주셨고 그리고 나에게 사명을 주셨으니 아멘 내가 가겠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계획표는 내게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는 완전한 계획표가 있어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내게 사명을 내리시고 그 사명에 내가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내게 은혜를 주셨던 그 증표로 볼 때에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곧 고난이 생기고 어려움임 생기면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열어주셔서 결국은 내가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붙드셔서 자기의 뜻을 충족하게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믿는 이 단순한 믿음이 필요했는데 요나는 이런 믿음으로 반응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결국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갔어요. 니느웨로 안가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결단하고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왜 그러면 우리는 이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결단을 하고 일어났어요. 그러면 일어나려고 그러는 선지자의 옷자락을 붙드시면 못 일어날 것 아니에요? 일어나는 놈의 발목을 발로 뻥 차버리시면 그러면 선지자가 즉시 어이쿠 하면서 ‘주여 이것이 아니었군요.’ 그럴 것 아니에요. 그렇게 복잡하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헤매는 일이 안 일어날 것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셔요. 우리가 불순종하려고 결단하면 하나님이 놔두신단 말이에요. 놔두셔요. 그러면서 인생들은 얼마나 악하냐하면 자기가 일어나리라 하고 결단을 하고 불순종을 해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 왜 나를 내버려두실까?’ 그런 것이죠. 그것이 말이 되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왜 나를 내버려두실까?’ 만약에 요나처럼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발목을 한 번씩 차신다면 우리는 아마 전부 다 앉은뱅이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수시로 일어난다고요. 수시로 인격적으로 결단하면서 불순종의 길을 택한단 말이에요. 아침부터 일어나서도 벌써 여러 차례 선택했을 것이에요. 그때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교회는 얻어터진 깁스한 환자들로 가득차 있을 것이에요. 병신들의 집합소가 될 것이라고요. 잘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요나가 결단하고 일어나려고 할 때 ‘자식이!’ 하면서 한번 뻥 찼으면 요나는 틀림없이 ‘어이쿠 하나님!’ 그랬을 것이에요. 여러분이라고 안 그러겠어요? 100%에요. 얻어맞으면서 ‘때려!’ 그러면서 대들지는 않았을 것이에요. 그것은 죽으려고 기를 쓰는 것이죠. 그럴 사람은 없어요. ‘일어나 내가 니느웨로 안가리라!’ 그러면서 결단을 하면 하나님이 발길로 뻥 차면 ‘오 주여!’
(찬양)
손들고 옵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놔두셔요. 이것이 신비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요나를 그렇게 하실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요나가 내가 이리로 안가면 하나님이 나를 가만 안 내버려두실 것이라고 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어요. ‘내 인생에 있어서는 이렇게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그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신약성경이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사람을 계속 거명하는 가운데 요나는 안 나와요. 그렇죠?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물고기 뱃속에서 깊이 회개를 하고 그리고 다시 사명의 길을 갔는데 그것도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어요. 인격적인 결단이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느 것이었어요? 하나님은 그 니느웨 백성들을 그렇게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에요. 박 넝쿨 사건이 보여주잖아요? 박 넝쿨이 이렇게 있으니까 뜨거운 햇볕아래 하나님이 벌레를 보내셔서 그것을 와삭와삭 먹어버려서 갑자기 박 넝쿨이 없어졌잖아요. ‘아니 이게 박 쿨도 없어지고…….’ 그러면서 화를 내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야! 너는 뜨거운 햇볕을 피하게 해주는 박 넝쿨이 없어진 것 때문에 그렇게 섭섭해서 그러느냐? 여기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120,000명의 어린이들이 있다. 내가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라.’ 이것이 주님의 메시지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면서 진심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눈물로 외치는 그 길을 가기를 원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결국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절대로 그렇게 간섭 안하셔요. 내버려두신다고요. 기억해요. 내버려두신다니까요. 일평생 놔두실 수도 있어요. 왜 그래요? 우리가 계속해서 세상에 이렇게 흔들려서 어디론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표현한 것이고 하나님이 볼 때는 매순간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안가리라.’ 매순간 일어나고 매순간 결단하면서 딴 길로 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결단하고 딴 길로 갈 때 하나님은 놔두신다고요. 왜 놔두셔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두려움 속에서 여러분들이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에요. 노예적인 복종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노예적인 복종이지 순종이 아니에요. 그런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바에야 차라리 50억 인구를 로봇으로 만들어 놓으시지요. 그렇지 않아요? 스위치를 누르면 50억이 전부 다 찬송을 하고, 스위치를 누르면 밥 먹고, 스위치를 누르면 잠자고 간단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통해서는 영광을 안 받으셔요. 그래서 보세요. 하나님이 결단을 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해야겠다고 하는 것들을 안 내버려두시고 하나님이 발로 차시고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어퍼컷 그래가지고 우리를 쓰러뜨리실까봐, 우리가 얻어터질까봐 겁이 나서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어떻게 전심으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될 수가 있겠어요? 마음은 콩밭에 가잇는데……. 그렇지 않아요? 마음은 콩밭에 가있어요. 하나님께서 전혀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결단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안주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벌 받는 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에게 간섭 안하신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간섭하는 한 하나님은 간섭 안하셔요. 매 순간 결단하는데 하나님이 두고 보시는 것이에요. 간단하잖아요. 선악과를 하와가 땄어요. 왜 따먹게 내버려두셔요? 따려고 그럴 때 주님도 말씀하셨네요. 손목 하나가 부러지고 천당에 가는 것이 온전하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그러셨는데 따먹으려고 그럴 때 손목가지를 똑 부러뜨리면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을 따먹기로 결단을 하고 선악과에 손을 때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것처럼 잠자코 계셨어요. 잠자코 계신 것이에요. 그리고 아담을 주었어요. 아담이 그것을 먹으려고 입을 벌릴 때에 입을 그냥 대일밴드로 확 봉해버리시면 안 먹고 하와 혼자 죽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왜 같이 물을 건너가게 만드셔요? 아담이 ‘내가 저것을 일어나 먹으리라.’ 결단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택하는 것이에요. 놔두신 것이에요. 먹은 것이에요. 상황이 다 끝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이게 마음에 안 들어요? 할 수 없어요. 성경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할 수 없어요. 왜 하나님이 그러시는지는 천국에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해답은 얻을 수 있어요. 그것은 뭐에요? 그런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노예가 되고 말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주일날 예배 나오는 것은 왜 나왔느냐고 물어보면 전부다 내가 오는 관악산에 놀러갈 계획이 있었는데 발목이 부러질까봐 나왔다고 그러고 영화 볼 계획이 있었는데 애꾸눈 될까봐 여기에 왔다고 그러고 노래방 가려고 그랬는데 벙어리 될까봐 여기에 왔다고 그러고 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 있을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것이에요. 주일을 어기려고 결단을 하지요. 그러면 어기는 것이에요. 놔두신다고요. 은혜를 안 받아야겠다고 결단을 해요. 하나님이 은혜를 안 받게 내버려두시는 것이에요. 매 순간 순간 마다 아주 강력한 결단을 내리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것이에요.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요나가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결단을 내리라고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같은 ‘쿰’인데 같은 일어나라 인데 이런 식으로 일어나라는 것이 아니에요. 일어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런 식으로 자기를 사로잡으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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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단을 내리긴 내렸는데 모든 결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은 아니죠. ‘주님 없이 살리라.’ 결단을 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에요? 그리고는 이제 이 요나가 가난한 형편에 비싼 과외비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고액의 과외비를 내기 위해서 이제 1장과 2장까지 전체를 헤매는 것이에요. 마지막에는 그냥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가 가지고 완전히 그야말로 튀겨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불순종을 향하여서 결단을 하려고 하는 한은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결단을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할 길이 없어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요. 결단은 자유에요. 그러나 책임은 자유가 아니에요. 결단을 내릴 때는 가볍게 결단을 내렸지만 그 결단의 결과는 무거운 것이에요. 요나가 딱 한번 결단을 했거든요. ‘나는 니느웨로 안가리라.’ 결단을 하였는데 요나는 그 안가리라고 결단한 것이 혼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결단을 한 것이겠지요? 그렇지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결단을 했다고 하니까 다 좋은 것 인줄 아는데 아무튼 뭔가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있다가 기껏 은혜를 받고 결단을 했는데 그 때의 결단은 혼자서 고요히 마음속에서 한 것이었어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의논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안살기로 결단을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이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풍랑 속에 휩쓸리면서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에요.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결단을 내리게 되면 그 결단은 밀실에서 고요히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그 불순종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에요. 얼마나 비참해요? 그리고 큰 풍랑 속에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어요. 나 하나가 잘 먹고, 잘 산다고 되요? 그것가지고 되요? 어림없어요. 동생이나 누구 하나가 사고 치면서 돌아다니는 놈 딱 하나가 생기면 그러면 자기의 평안은 다 깨지는 것이에요.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말하자면 풍랑 속에 휩쓸리고 돌아가게 되면 그러면 전부 다 불행해지는 것이에요. 비참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것이에요. 문제의 해결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그 문제가 많은 현장이 더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에요.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예수를 믿고 신앙 하나로만 살아가는 우리들을 우습게 여길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뿐이 문제의 해결이 없음을 우리로 알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결단을 해가지고 결국은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는데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것도 무임승차가 아니라 고액의 말하자면 승선료를 내고 그리고 가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 선지자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면서 그는 후줄근한 사람들 틈에 끼고 장사꾼들 틈에 끼어서 그래서 선가를 지불하고 거기에 빌붙어서 가는 사람이 되었어요. 여러분! 만약에 이 사람이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탔더라면 그는 그가 탄 배를 하나님은 마치 당신의 대사를 실려 보내는 그런 배로 여기셨을 것이에요. 그리고 눈동자같이 그 배를 보호하시면서 이 세상으로 볼 때에는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는 그 요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탔다면 하나님의 눈앞에는 이 사람이 큰 사자! 뭐에요? 니느웨와 앗수르의 모든 역사가 이 사람의 손 하나에 달렸어요. 위대해요? 위대하지 않아요? 위대한 사람이죠. 온 천하에 생명을 손 하나에 쥐고 앗수르와 니느웨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 위해서 장엄한 선지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그 사명의 길을 포기하니까 후줄근한 장사치들과 함께 어울려서 잡류들과 함께 섞여가는 삼등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바로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한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라고 결심을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게 일어나지를 않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려고 결단을 하고 일어설 때에 그 인생 앞에 선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그래도 한번 모험을 해볼 만한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막차를 탄 삼등 인생일 뿐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이미 요나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니느웨에서 거부가 된다든지 이스라엘에서 대 부호가 된다든지 그런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었고 선지자와는 상관없는 인생이었어요. 오직 두 개의 길만 남아있을 뿐이었어요. 하나는 무엇이에요? 온 천하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하나님과 샬롬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 니느웨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그러한 영적인 전권대사의 길을 걸어갈 것이냐? 불순종하고 삼등 막차를 타는 인생이 되는 길을 걸어갈 것이냐? 이 두 가지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어저께도 홍정길 목사님하고 만나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우리나라 어느 그룹의 회장이에요. 그 교회 집사래요. 그런데 늘 삼등칸만 탄대요. 무엇을 타든지 삼등칸만 탄대요. 1년의 매출이 2000억이 되는 회사의 회장이 신앙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죠. 19평 아파트에 살고……. 그 수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회장이 지금도 프라이드를 타고 다닌대요. 그래서 이제 같이 비행기를 타는데 둘이 삼등으로 끊어서 같이 선교여행을 위해 타는데 그 교회의 집사님 한분이 있어서 그 비행사에 있으니까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미리 연락을 해서 ‘야! 너희 훌륭한 목사님이 가시니까 잘 모셔야 된다.’ 그러면 삼등칸을 끊으면 이등칸으로 올려주고 이등칸을 끊으면 일등칸으로 자꾸 올려준대요. 그래서 정말 그 사람 모르게 숨어서 여행을 다니려고 애를 쓰는데 어떻게든 알아내서 프랑스를 가면 프랑스로 연락하고, 미국으로 가면 미국으로 연락을 해가지고 자기가 괴로워죽겠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그 사람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님! 목사님을 계속 쫒아 다니지 말아야겠습니다.’ ‘왜 그래요?’ ‘목사님을 쫒아 다니다가는 타락하겠습니다.’ 자꾸 귀한 대접만 받으니까 자기는 삼등 인생으로 살아가야 좋은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어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지요.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이에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우리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는 아니에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니까 물질도 주시고, 명예도 주시고, 학벌도 주시고, 학식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예요? 우리의 신분은 그것이에요. 하나님의 뜻대로 깊이 순종하면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갑부가 된다고 장담할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여러분은 굶어죽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내가 그것은 장담할 수 있어요. 안되면 제가 책임져 드릴게요. 성경이 약속했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 모든 생활의 염려를 해결해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셔요.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갑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성경에서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문제는 무엇이에요? 주님의 관점은 그것이 아니에요. 하실 수도 있어요. 그리고 또 하실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가면서 이러한 영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가는 곳마다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 심판을 눈앞에 둔사람, 가정, 교회, 국가, 민족, 회사 그런 모든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그리고 의와 하나님의 나라,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함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샬롬시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때에 세상의 문제는 그가 나타나면 해결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는 문제의 해결이 있지만 그러나 그가 없는 곳에는 문제의 해결이 없어요. 왜? 그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세상 모든 권세를 손에 넣은 것처럼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하나님이 보낸 대사와 같이 당당하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을 하고 삼등칸의 막차를 탈것인가? 딱 이 두 개의 갈림길밖에 없는 것이에요. 다른 것 없어요. 제 3의 선택? 없어요. 딱 두 가지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이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뭐 하나님을 잃어버린 가족들에게 무슨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시키고 아이고 고리타분하다 그러면 남은 대화는 그것이에요. 불순종을 택하는 것이에요. 일어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미안하게 훌륭하게 결단을 내리고 선택을 했는데 결과는 항상 삼등 막차를 타는 인생이에요. 요나가 어디에 가있었어요? 배 밑창에. 배가 위에서부터 일등칸이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 물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죽으니까 싸구려 인생들이 밑의 삼등칸으로 깔리고 제일 돈 많이 내면 맨 꼭대기로 가요. 죽을 때도 제일 늦게 죽거든요. 삼등칸에 가서 누워서 잠들어있는 후줄근한 신세가 되는 것이에요.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손에 쓰일 때만 귀한 것이에요. 그렇게 버려지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찬송 하나 부르고 조금만 더하겠어요.
(찬양)
336장
1.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그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2. 죄악에 죽을 인생을 심히 불쌍히 여기사 저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3. 홍포를 입은 구주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저 십자가 높이 달리 사 그 아픔을 참았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4. 미련한 우리 인생은 주의 공로를 모르고 그 쓸쓸한 사막 가운데 늘 헤매고 다녔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선택의 여지가 미안하게 딱 두 개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불순종하느냐하면 제 3의 선택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에요? 꿩도 잡고, 매도 잡고…….임도 보고, 뽕도 따고……. 무슨 뜻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도 가고, 그리고 또 세상연락도 즐기고 살아갈 수 있고, 세상적으로도 끗발 나는 인생을 살고,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이 완전히 인정해주는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그 두 가지가 제 3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고 자꾸 꼬이는 것이에요 누가? 사단이……. 재미있지요! 그러니까 첫 번째 유혹의 장면을 보면 우리들이 상당히 교훈을 많이 받아요. 뱀이 와가지고 하와보고 ‘얘야! 이것을 먹어라 먹으면 하나님을 쫒아내고 네가 왕좌에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말 안하고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먹어라. 그러면 네 눈의 밝기가 하나님처럼 밝아지리라.’ 눈에 관해서만 말했어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하와의 생각에 딱 끼어들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먹고 내가 불순종하고 사망의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내가 하나님의 위에 올라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쉽게 얘기하면 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았잖아요? 그렇지요? 주님의 음성을 늘 들었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못 보고…….’ 그런 것이 없었어요. 거기에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복이 있도다.’ 그럼 말이 필요 없어요. 왜? 주님을 늘 뵙고 언제나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니까. 그런데 선악과로 유혹을 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그런 교제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는 그런 축복의 길도 갈 수 있으리라 양수 겹장이 가능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에요. 그러나 없어요. 그러더니 그 제 3의 선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선택을 했는데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야말로 쓰디쓴 막차인생을 탄 것이에요. 삼등 인생도 못되었어요. 쓰레기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셔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그러셨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셔요?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어디다 쓰리요.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니까 대책이 없다는 것이에요. 짠 소금의 맛을 가지고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이 세상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밖에 버리어져서 밟힐 것인가?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의 선택이 없다는 것이에요. 예수 믿는 삶을 너무 단조롭게 생각하고 그리고 이것을 다 포기하고 세상으로 가보려고 마음이 기울어졌더니 세상이 환영했어요. 환영 못 받아요. 아무리 흉내를 내보려고 해도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해요. 세상은 이미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환영을 못 받는 것이에요. 탕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잖아요? 왜요? 그 아버지 집에서 만날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며 사는 삶이 지겨운 것이에요. 뭔가 신나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떠났어요. 거기서도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내버려두었어요. 그리고 갔는데 결국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았어요? 아니 환영받지 못했어요. 결국은 언제까지만 세상이 그를 환영했느냐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알거지가 될 때까지만 그를 환영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질 때까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우리는 이 비참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탕자를 우리는 보게 되는 거예요. 기억하세요. 언제든지 그것만 기억하면 되요. 딱 두 가지 길밖에 없어요. 복음성가에도 있지요.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요 예수를 믿는 사람의 삶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때에 ‘와 정말 대단하다.’ 그럴만한 것이 없어요.
오히려 어이구 요즘에는 자동차위에다가 스키를 매달고 다니는 것이 나는 한 2, 3만원하는 줄 알았더니 스키는 그만두고 스키를 매다는 것 살돈이 없어서 스키를 줘도 못 타요. 그 스키 매다는 것을 19만원이라고 써 붙여놨어요. 그것도 싼 거래요. 그렇게 두 개 매달고 다니는 게 19만원이래요. 세상에……. 그리고 잘 봐요. 누가 끗발 나는 인생 같아요?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하얀 중형 승용차에다가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은 승용차에다가 파랗고 빨간색 스키를 딱 걸치고 그 다음에는 그 바지 하나에 26만원씩 한다고 하니……. 그런 스키복을 입고, 부츠를 신고, 그리고 딱 올라타서 선글라스를 끼고, 그리고 스키장으로 가는 것이 진짜 끗발 나는 인생 같아요? 아니면 후줄근하게 일어나가지고 뭐 폴라 하나 걸치고, 다 떨어진 성경찬송 들고 (주일날 나올 때는 꼭 이러고 나와요) 이러고 나오는 게 끗발 날리는 인생이에요? 그것도 뭐 어디 좋은 데로 가나 했더니 그것도 뭐 방배동 골목을 돌고, 돌고 돌아서 어디 변소 옆을 지나서 지하실로 내려와요. 그게 끗발 나는 인생이에요? 아니면 아까 말씀드린 것이 끗발 날리는 인생이에요? 거기서 그 다음프로, 그 다음 장면을 볼까요? 드디어 스키장에 올라갔어요. 그러고 나서 백설이 하얗게 깔린 데를 그냥 음악에 맞춰 스키를 타면서 신나게 내려오면서……. 그리고 있을 동안에 이렇게 후줄근하게 나왔던 사람은 여기에서 ‘예수사랑 하심은…….’ 그리고 끝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저쪽에서는 스키를 다 타고 내려와 가지고는 산장에 들어가서 은은한 카펫이 깔린 방에서 멋있는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하이네켄 맥주를 한잔씩 걸치면서 ‘위하여’ 그러고 있을 때 여기서는 김칫국에 밥 말아먹고 있단 말이에요. 어느 것이 더 끗발 날리는 인생 같아요? 화려해요. 세상은 언제나 화려해요. 그리고 신나요. 교회는 언제나 단조로워요. 진짜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에요. 참 비유가 기가 막히네요. 그렇지 않아요? 뭐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려면 시간이 너무 가겠지요. 겨울만 예를 들면 그래요. 얼마나 멋있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그런 잣대를 가지고 들여다보면 고리타분하고 답답해서 못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그림을 가지고 그 생활을 보니까 자꾸 불순종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무언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진짜 사탄에게라도 넙죽 절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왜? 너무 찬란해. 너무 colorful해요. 색깔이 너무 형형색색이에요. 너무너무 좋은 것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들 그것을 부러워해요. 뭐 지나간 얘기를 들으니까 스키복하고 스키하고 다 마련하는데 백오십만원정도 들어간대요. 그러니 그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설마 들고 갈리는 없잖아요. 승용차가 있어야지요. 그리고 가서 하루 자는데 돈 십만 원정도 내야지 밥도 먹어야지. 그러니까 돈을 갖다 쳐 바르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이에요. 신나죠.
어제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하용조 목사님 교회에 여행사를 하는 어느 집사님이 있는데 돈을 많이 벌었대요. 어떻게 벌었느냐고 하니까 실명제가 되고 나니까 사람들이 돈을 쓸데가 없어서 그냥 그 돈을 가지고 막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처바르는 거예요. 돈을 쓰고 오기 작전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나 결심을 하고 돈을 쓰겠다고 보따리를 들고 가가지고 막 처바르고 오는 것이에요. 왜? 어차피 통장에 저축할 수 없는 돈이고 집에다 현찰을 가기고 있어봐야 위험하니까 실컷 쓰고나 오자고 가서 막 처바르는 거예요. 대한항공이 재작년까지 적자였는데 작년에 흑자로 돌아섰대요. 실명제 때문에……. 막 쓰고 처바르는 거예요. colorful해요.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고, 호놀룰루에서 점심을 먹고, 하면서 사람들이 추워가지고 잠바 하나 걸치고 새벽기도에 ‘예수사랑 하심은…….’ 나올 때 해변에서 비키니차림으로 수영이나 하고 앉았고, 주스나 마시고……. 어느 것이 더 colorful하고 화려해요? 그쪽이에요. 눈가진 사람들은 다 아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에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계속 사는 것이 가능해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그것이 가능하면 되겠는데 그게 안 되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일등칸에 안태우시고 삼등칸 막장에 태워서 거기서 굴리시는 거예요. 세상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맛 좀 봐라. 신물이 나오도록 맛을 보게 굴리시는 거예요. 요나가 결국은 하나님이 보낸 사신으로서 니느웨와 앗수르(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에게 영향력에 있어서는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거대한 강대국이에요.) 와 같은 그러한 나라에 문명을 한 손에 쥐고 ‘이것을 죽여? 살려?’ 이것을 한손에 쥐고 당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걸어가서 ‘너희들 정신 차려라!’ 한마디 하면 모두들 고꾸라뜨릴 수 있는 이러한 영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가기를 포기하니까 하나님이 삼등칸에 태우시는 거예요. 삼등칸도 하다못해 쥐포라도 먹으면서 편안히 갔으면 그 항해가 그래도 할 만했을 텐데 그 삼등칸도 하나님이 안 내버려 두셔가지고 삼등칸도 안 되니까 사등 칸에 태웠는데 사등 칸이 어디에요? 어디긴 어디에요. 바다 속에 집어던진 것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딱 두 가지 선택이에요. 제 3의 선택은 없어요. 그러면 가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갔다가 스키도 타러 다니고 끝나는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그러나 잠시에요. 쪼금 있다가 삼등칸을 타게 되고 하나님이 그 삼등칸도 흔들어서 바다 속에 던져버리신다는 거예요. 믿습니까? 켕겨요? 왜 아멘을 안 해요? 믿습니까? 바로 그 얘기에요.
자! 이러면서 이제 이 요나 선지자가 결국은 결단을 하고 선가를 주고 배를 탔어요. 역사의 배를 움직이는 선장이 될 수 있는 자리를 버리고 이방인들이 몰고 있는 배에 돈을 주고 그것도 삼등칸에 내려가서 배 밑창에 가 있게 되었어요. 그럴 때에 오늘 성경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이런 사람하고 함께 탄 사람들은 참 재수 없는 거예요. 군대 가면 고문관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정상으로 안 되는 사람들……. 앞으로 가 그러면 이렇게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일주일을 가르치는데도 계속 이러고 걸어가요. 이러고……. 그것을 고치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못 고쳐요. 일부로 하려고 해도 안 될 덴데 꼭 그래요. 그러면 거기에 속해있는 그 부대 사람들은 이제 밥도 제시간에 못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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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 배를 왜 째려보시겠어요? 그냥 가는 것인데 자기네들 그냥 가는 것을 하나님이 뭐 하러 째려보셔요?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좀 안됐지만 그러나 또 안 믿는 사람들은 심판으로 가면 되니까 째려보실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딱 타시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한쪽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하나를 딱 째려보시는데 그게 바로 바다 위에 떠있는 이 점만도 못한 티끌만한 배 하나를 째려보고 계시는 것이에요. 이렇게 째려보는 배에 동승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어때요? 나 하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니까 하나님과 관계없는 애매한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주고, 고난이 있는 곳에 위로가 넘치게 해야지, 평화가 있는 곳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의 물결 속에 집어넣는 사람들이 되어서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사명을 감당해서 폭풍이 일어나는 상황을 잠잠케 하지는 못할지언정 왜 하나님의 뜻대로 안 행하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 때문에 애매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째려보시는데 온전할 수 있겠어요? 어림도 없어요. 하나님이 째려보시면 이제 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결단하고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두시더니 그러면 하나님이 왜 배를 타고 간 다음에 그렇게 째려보시느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배를 흔드셨어요. 어떻게 될 때까지 배를 흔드셨어요? 요나가 죗값을 갚을 때까지 흔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를 흔든 것은 요나가 손을 들 때까지 흔드시는 거예요. 주님은 뭐냐? 손이 이렇게 있어요. 손이 이렇게 있으면 두 손을 치켜 들어야하는데 하나님이 두 손을 이렇게 치켜들어서 ‘가만히 서 있어! 네가 손을 들었지?’ 이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흔들어가지고 자기 힘으로 ‘야! 이제는 손을 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구나!’ 그리고 손을 들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계속 요나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고백을 안 하고 손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계속 흔드시는 것이죠. 계속……. 내일도 보겠습니다만 뭐 좋은 짐이고 뭐고 다 갖다 버렸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막 죽게 된 거에요.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했더니 이신, 저신 불러서 안 되니까 ‘그러면 여호와도 한번 나와 보시오.’ 하고 불렀어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면서 제비를 뽑는 게 아니에요?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거예요. 제비가 딱 당하니까 그때서야 요나가 ‘네가 누구냐?’ ‘나는 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후줄근하게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요나가 드디어 ‘나를 바다에 던져라 그래야 바다가 잔잔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고백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거예요. 원하시는 것은 뭐에요? 불순종한 요나를 괴롭히시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흔들어서 항복을 받아내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뭐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을 결단하고 불순종의 길로 걸어가면 고난이 넘쳐요. 그리고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워요. 주여 생명을 거둬주시옵소서 백번을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절대 안 거둬 가셔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 걷어가세요. 걷어가셨으면 좋겠지요? 안 거둬 가셔요. 고난이 넘쳐서 꼴깍꼴깍하는데도 안 거둬 가셔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에요? 죽여 버리시옵소서.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을 들어라!’ 안 드느냐? 물 좀 더 먹어라 그리고 흔드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야지 부모가 자식이 똑바로 되라고 패는데 ‘아버지 차라리 나를 죽여…….’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패는 거지! 여러분! 이 두 가지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에요. 요나가 이쪽 길을 택했을 때 그는 화려한 인생으로 갔던 것이 아니라 삼등 배 밑창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배에 탄 선지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꼭 누가 생각이 나느냐하면 로마로 호송되어 갔던 바울 생각이 꼭 나요. 그 바울은 오히려(이 사람은 돈이나 주고 탔지) 무임승차를 했거든요. 잘나서 무임승차를 한 것이 아니라 죄수니까, 돈이 없으니까, 이렇게 쇠가락지로 묶여가지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탔어요. 그런데 어때요? 이 사람은 돈을 주고 탔는데도 삼등칸에 내려가 가지고 풍랑이 일어나는데 그 풍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사람들이 쥐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거기에 앉아가지고 마지막 막판에 가서 ‘나를 바다에 던져라’ 이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죄수의 몸으로 묶여 가는데 바울이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서 ‘가지 마라’ 그러는데 간 거예요. 그러다가 큰 풍랑을 만나서 다 죽게 된 것이에요.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일주일을 깊은 밤을 지내면서 먹지도 못하고 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뭐라고 그래요? 묶여있는 채로 ‘너희는 평안하여라 어젯밤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의 생명도 거둬가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너희는 평안하여라.’ 그러니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아 예 평안해도 되겠습니까?’ 이게 도대체 뭐 묶인 죄수가 창, 칼을 든 모든 군인들에게 ‘너희는 평안하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힘이에요. 하나님이 이 배에 요나가 타니까 하나님이 그 배를 째려보시는 거예요. 째려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오늘의 결론을 맺으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 또 적은 은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문제가 있는 환경이 있고, 그 문제 속에는 우리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상식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선입견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순종의 삶을 택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들은 매 순간 불순종을 결단하고 일어나서 그래서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이 요나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끊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단을 내리긴 내렸는데 모든 결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은 아니죠. ‘주님 없이 살리라.’ 결단을 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에요? 그리고는 이제 이 요나가 가난한 형편에 비싼 과외비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고액의 과외비를 내기 위해서 이제 1장과 2장까지 전체를 헤매는 것이에요. 마지막에는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가 가지고 완전히 그야말로 튀겨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불순종을 향하여서 결단을 하려고 하는 한은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결단을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할 길이 없어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요. 결단은 자유에요. 그러나 책임은 자유가 아니에요. 결단을 내릴 때는 가볍게 결단을 내렸지만 그 결단의 결과는 무거운 것이에요. 요나가 딱 한번 결단을 했거든요. ‘나는 니느웨로 안가리라.’ 결단을 하였는데 요나는 그 안가리라고 결단한 것이 혼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결단을 한 것이겠지요? 그렇지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결단을 했다고 하니까 다 좋은 것 인줄 아는데 아무튼 뭔가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있다가 기껏 은혜를 받고 결단을 했는데 그 때의 결단은 혼자서 고요히 마음속에서 한 것이었어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의논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안살기로 결단을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이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풍랑 속에 휩쓸리면서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에요.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결단을 내리게 되면 그 결단은 밀실에서 고요히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그 불순종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에요. 얼마나 비참해요? 그리고 큰 풍랑 속에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어요. 나 하나가 잘 먹고, 잘 산다고 되요? 어림없어요. 동생이나 누구 하나가 사고 치면서 돌아다니는 놈 딱 하나가 생기면 그러면 자기의 평안은 다 깨지는 것이에요.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말하자면 풍랑 속에 휩쓸리고 돌아가게 되면 그러면 전부다 불행해지는 것이에요. 비참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것이에요. 문제의 해결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그 문제가 많은 현장이 더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에요.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예수를 믿고 신앙 하나로만 살아가는 우리를 우습게 여길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밖에 문제의 해결이 없음을 우리로 알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결단을 해가지고 결국은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는데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그것도 무임승차가 아니라 고액의 말하자면 승선료를 내고 그리고 가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 선지자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면서 그는 후줄근한 사람들 틈에 끼고 장사꾼들 틈에 끼어서 그래서 선가를 지불하고 거기에 빌붙어서 가는 사람이 되었어요. 여러분! 만약에 이 사람이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탔더라면 그는 그가 탄 배를 하나님은 마치 당신의 대사를 실려 보내는 그런 배로 여기셨을 것이에요. 그리고 눈동자같이 그 배를 보호하시면서 이 세상으로 볼 때에는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탄 그 요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탔다면 하나님의 눈앞에는 이 사람이 큰 사자! 뭐에요? 니느웨와 앗수르의 모든 역사가 이 사람의 손 하나에 달렸어요. 위대해요? 위대하지 않아요? 위대한 사람이죠. 온 천하에 생명을 손 하나에 쥐고 앗수르와 니느웨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 위해서 장엄한 선지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그 사명의 길을 포기하니까 후줄근한 장사치들과 함께 어울려서 잡류들과 함께 섞여가는 삼등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바로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한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라고 결심을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게 일어나지를 않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려고 결단을 하고 일어설 때에 그 인생 앞에 선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그래도 한번 모험을 해볼 만한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막차를 탄 삼등 인생일 뿐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이미 요나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니느웨에서 거부가 된다든지 이스라엘에서 대 부호가 된다든지 그런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었고 선지자와는 상관없는 인생이었어요. 오직 두 개의 길만 남아있을 뿐이었어요. 하나는 무엇이에요? 온 천하에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를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하나님과 샬롬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 니느웨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그러한 영적인 전권대사의 길을 돌아갈 것이냐? 불순종하고 삼등 막차를 타는 인생이 되는 길을 걸어갈 것이냐? 이 두 가지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어저께도 홍정길 목사님하고 만나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우리나라 어느 그룹의 회장이에요. 그 교회 집사래요. 그런데 늘 삼등칸만 탄대요. 무엇을 타든지 삼등칸만 탄대요. 1년의 매출이 2000억이 되는 회사의 회장이 신앙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죠. 19평 아파트에 살고……. 그 수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회장이 지금도 프라이드를 타고 다닌대요. 그래서 이제 같이 비행기를 타는데 둘이 삼등으로 끊어서 같이 선교여행을 위해 타는데 그 교회의 집사님 한분이 있어서 그 비행사에 있으니까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미리 연락을 해서 ‘야! 너희 훌륭한 목사님이 가시니까 잘 모셔야 된다.’ 그러면 삼등칸을 끊으면 이등칸으로 올려주고 이등칸을 끊으면 일등칸으로 자꾸 올려준대요. 그래서 정말 그 사람 모르게 숨어서 여행을 다니려고 애를 쓰는데 어떻게든 알아내서 프랑스를 가면 프랑스로 연락하고, 미국으로 가면 미국으로 연락을 해가지고 자기가 괴로워죽겠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그 사람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님! 목사님을 계속 쫒아 다니지 말아야겠습니다.’ ‘왜 그래요?’ ‘목사님을 쫒아 다니다가는 타락하겠습니다.’ 자꾸 귀한 대접만 받으니까 자기는 삼등 인생으로 살아가야 좋은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어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지요.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이에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우리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는 아니에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니까 물질도 주시고, 명예도 주시고, 학벌도 주시고, 학식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예요? 우리의 신분은 그것이에요. 하나님의 뜻대로 깊이 순종하면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갑부가 된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여러분은 굶어죽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내가 그것은 장담할 수 있어요. 안되면 제가 책임져 드릴게요. 성경이 약속했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 모든 생활의 염려를 해결해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셔요.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갑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성경에서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문제는 무엇이에요? 주님의 관점은 그것이 아니에요. 하실 수도 있어요. 그리고 또 하실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가면서 이러한 영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가는 곳마다 하나님과의 무너진 심판을 눈앞에 둔사람, 가정, 교회, 국가, 민족, 회사 그런 모든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그리고 의와 하나님의 나라,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과 샬롬시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때에 세상의 문제는 그가 나타나면 해결이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는 문제의 해결이 있지만 그러나 그가 없는 곳에는 문제의 해결이 없어요. 왜? 그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으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세상 모든 권세를 손에 넣은 것처럼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하나님이 보낸 대사와 같이 당당하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을 하고 삼등칸의 막차를 탈것인가? 딱 이두개의 갈림길밖에 없는 것이에요. 다른 것 없어요. 제 3의 선택? 없어요. 딱 두 가지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이 두가지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뭐 하나님을 잃어버린 가족들에게 무슨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시키고 아이고 고리타분하다 그러면 남은 대화는 뭐에요. 불순종을 택하는 것이에요. 일어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미안하게 훌륭하게 결단을 내리고 선택을 했는데 결과는 항상 삼등 막차를 타는 인생이에요. 요나가 어디에 가있었어요? 배 밑창에. 배가 위에서부터 일등칸이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 물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죽으니까 싸구려 인생들이 밑의 삼등칸으로 깔리고 제일 돈 많이 내면 맨 꼭대기로 가요. 죽을 때도 제일 나중에 죽거든요. 삼등칸에 가서 누워서 잠들어있는 후줄근한 신세가 되는 것이에요.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손에 쓰일 때만 귀한 것이에요. 그렇게 버려지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찬송 하나 부르고 조금만 더하겠어요.
(찬양)
336장
1.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저 흉악한 죄에 빠져서 그 은혜를 잊었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2. 죄악에 죽을 인생을 심히 불쌍히 여기사 저 하늘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3. 홍포를 입은 구주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저 십자가 높이 달리 사 그 아픔을 참았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4. 미련한 우리 인생은 주의 공로를 모르고 그 쓸쓸한 사막 가운데 늘 헤매고 다녔네.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선택의 여지가 미안하게 딱 두 개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불순종하느냐하면 제 3의 선택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에요? 꿩도 잡고, 매도 잡고…….임도 보고, 뽕도 따고……. 무슨 뜻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도 가고, 그리고 또 세상연락도 즐기고 살아갈 수 있고, 세상적으로도 끗발 나는 인생을 살고,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이 완전히 인정해주는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그 두 가지가 제삼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고 자꾸 꼬이는 것이에요 누가? 사단이……. 재미있지요!
그러니까 첫 번째 유혹의 장면을 보면 우리들이 상당히 교훈을 많이 받아요. 뱀이 와가지고 하와보고 ‘얘야! 이것을 먹어라 먹으면 하나님을 쫒아내고 네가 왕좌에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말 안하고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먹어라. 그러면 네 눈의 밝기가 하나님처럼 밝아지리라.’ 눈에 관해서만 말했어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하와의 생각에 딱 끼어들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먹고 내가 불순종하고 사망의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내가 하나님의 위에 올라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쉽게 얘기하면 그 에덴동산에서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았잖아요? 그렇지요? 주님의 음성을 늘 들었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못 보고……. 그런 것이 없었어요. 거기에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복이 있도다. 그럼 말이 필요 없어요. 왜? 주님을 늘 뵙고 언제나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니까. 그런데 XX로 유혹을 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그런 교제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는 그런 축복의 길도 갈 수 있으리라 양수 겹장이 가능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에요. 그러나 없어요. 그러더니 그 제 3의 선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선택을 했는데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야말로 쓰디쓴 막차인생을 탄 것이에요. 삼등 인생도 못돼요. 쓰레기와 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셔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그러셨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셔요?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어디다 쓰리요.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리니까 대책이 없다는 것이에요. 짠 소금의 맛을 가지고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이 세상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밖에 버리어져서 밟힐 것인가?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의 선택이 없다는 것이에요. 예수 믿는 삶을 너무 단조롭게 생각하고 그리고 이것을 다 포기하고 세상으로 가보려고 마음이 기울어졌더니 세상이 환영했어요. 환영 못 받아요. 아무리 흉내를 내보려고 해도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해요. 세상은 이미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환영을 못 받는 것이에요. 탕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잖아요? 왜요? 그 아버지 집에서 만날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삶이 지겨운 것이에요. 뭔가 신나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떠났어요. 거기서도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내버려두었어요. 그리고 갔는데 결국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았어요? 아니 환영받지 못했어요. 결국은 언제까지만 세상이 그를 환영했느냐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알거지가 될 때까지만 그를 환영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질 때까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우리는 이 비참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탕자를 우리는 보게 되는 거예요. 기억하세요. 언제든지 그것만 기억하면 되요. 딱 두 가지길밖에 없어요. 복음성가에도 있지요.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요 예수를 믿는 사람의 삶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때에 ‘와 정말 대단하다.’ 그럴만한 것이 없어요.
오히려 어이구 요즘에는 자동차위에다가 스키를 매달고 다니는 것이 나는 한 2,3만원하는 줄 알았더니 스키는 그만두고 스키를 매다는 것 살돈이 없어서 스키를 줘도 못 타요. 그 스키 매다는 것을 19만원이라고 써 붙여놨어요. 그것도 싼 거래요. 그렇게 두 개 매달고 다니는 게 19만원이래요. 세상에……. 그리고 잘 봐요. 누가 끗발 나는 인생 같아요?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하얀 중형 승용차에다가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은 승용차에다가 파랗고 빨간색 스키를 딱 걸치고 그 다음에는 그 바지 하나에 26만원씩 한다고 하니……. 그런 스키복을 입고, 부츠를 신고, 그리고 딱 올라타서 선글라스를 끼고, 그리고 스키장으로 가는 것이 진짜 끗발 나는 인생 같아요? 아니면 후줄근하게 일어나가지고 뭐 폴라 하나 걸치고, 다 떨어진 성경찬송 들고 (주일날 나올 때는 꼭 이러고 나와요) 이러고 나오는 게 끗발 날리는 인생이에요? 그것도 뭐 어디 좋은 데로 가나 했더니 그것도 뭐 방배동 골목을 돌고, 돌고 돌아서 어디 변소 옆을 지나서 지하실로 내려와요. 그게 끗발 나는 인생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것이 끗발 날리는 인생이에요? 거기서 그 다음프로, 그 다음 장면을 볼까요? 드디어 스키장에 올라갔어요. 그러고 나서 백설이 하얗게 깔린 데를 그냥 음악에 맞춰 스키를 타면서 신나게 내려오면서……. 그리고 있을 동안에 이렇게 후줄근하게 나왔던 사람은 여기에서 ‘예수사랑 하심은…….’ 그리고 끝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저쪽에서는 스키를 다 타고 내려와 가지고는 산장에 들어가서 은은한 카펫이 깔린 방에서 멋있는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하이네캔 맥주를 한잔씩 걸치면서 ‘위하여’ 그러고 있을 때 여기서는 김칫국에 밥 말아먹고 있단 말이에요. 어느 것이 더 끗발 날리는 인생 같아요? 화려해요. 세상은 언제나 화려해요. 그리고 신나요. 교회는 언제나 단조로워요. 진짜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에요. 참 비유가 기가 막히네요. 그렇지 않아요? 뭐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려면 시간이 너무 가겠지요. 겨울만 예를 들면 그래요. 얼마나 멋있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그런 잣대를 가지고 들여다보면 고리타분하고 답답해서 못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그림을 가지고 그 생활을 보니까 자꾸 불순종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무언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진짜 사탄에게라도 넙죽 절하고 싶은 충동을 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왜? 너무 찬란해. 너무 칼라풀해요. 색깔이 너무 형형색색이에요. 너무너무 좋은 것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들 그것을 부러워해요. 뭐 지나간 얘기를 들으니까 스키복하고 스키하고 다 마련하는데 백오십만원정도 들어간대요. 그러니 그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설마 들고 갈리는 없잖아요. 승용차가 있어야지요. 그리고 하루 자는데 돈 십만 원정도 내야지 밥도 먹어야지. 그러니까 돈을 갖다 쳐 바르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이에요. 신나죠.
어제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하용조 목사님 교회에 여행사를 하는 어느 집사님이 있는데 돈을 많이 벌었대요. 어떻게 벌었느냐고 하니까 실명제가 되고 나니까 사람들이 돈을 쓸데가 없어서 그냥 그 돈을 가지고 막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처바르는 거예요. 돈을 쓰고 오기 작전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나 결심을 하고 돈을 쓰겠다고 보따리를 들고 가가지고 막 처바르고 오는 것이에요. 왜? 어차피 통장에 저축할 수 없는 돈이고 집에다 현찰을 가기고 있어봐야 위험하니까 실컷 쓰고나 오자고 가서 막 처바르는 거예요. 대한항공이 재작년까지 적자였는데 작년에 흑자로 돌아섰대요. 실명제 때문에……. 막 쓰고 처바르는 거예요. 칼라풀해요.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고, 호놀룰루에서 점심을 먹고, 하면서 사람들이 추워가지고 잠바 하나 걸치고 새벽기도에 ‘예수사랑 하심은…….’ 나올 때 해변에서 비키니차림으로 수영이나 하고 앉았고, 주스나 마시고……. 어느 것이 더 칼라풀하고 화려해요? 그쪽이에요. 눈가진 사람들은 다 아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에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계속 사는 것이 가능해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그것이 가능하면 되겠는데 그게 안 되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일등칸에 안태우시고 삼등칸 막장에 태워서 굴리시는 거예요. 세상을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맛 좀 봐라. 신물이 나오도록 맛을 보게 굴리시는 거예요. 요나가 결국은 하나님이 보낸 사신으로서 니느웨와 앗수르(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에게 영향력에 있어서는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거대한 강대국이에요.) 와 같은 그러한 나라에 문명을 한 손에 쥐고 ‘이것을 죽여? 살려?’ 이것을 손에 쥐고 당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걸어가서 ‘너희들 정신 차려라!’ 한마디 하면 모두들 고꾸라트릴 수 있는 이러한 영적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가기를 포기하니까 하나님이 삼등칸에 태우시는 거예요. 삼등칸도 하다못해 쥐포라도 먹으면서 편안히 갔으면 그 항해가 그래도 할 만했을 텐데 그 삼등칸도 하나님이 안 내버려 두셔가지고 삼등칸도 안 되니까 사등칸에 태웠는데 사등칸이 어디에요? 어디긴 어디에요. 바다 속에 집어던진 것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딱 두 가지 선택이에요. 제 3의 선택은 없어요. 그러면 가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나갔다가 스키도 타러 다니고 끝나는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그러나 잠시에요. 쪼금 있다가 삼등칸을 타게 되고 하나님이 그 삼등칸도 흔들어서 바다 속에 던져버리신다는 거예요. 믿습니까? 켕겨요? 왜 아멘을 안 해요? 믿습니까? 바로 그 얘기에요.
자! 이러면서 이제 이 요나 선지자가 결국은 결단을 하고 선가를 주고 배를 탔어요. 역사의 배를 움직이는 선장이 될 수 있는 자리를 버리고 이방인들이 몰고 있는 배에 돈을 주고 그것도 삼등칸에 내려가서 배 밑창에 가 있게 되었어요. 그럴 때에 오늘 성경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이런 사람하고 함께 탄 사람들은 참 재수 없는 거예요. 군대 가면 고문관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정상으로 안 되는 사람들……. 앞으로 가 그러면 이렇게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일주일을 가르치는데도 계속 이러고 걸어가요. 이러고……. 그것을 고치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못 고쳐요. 일부로 하려고 해도 안 될 덴데 꼭 그래요. 그러면 거기에 속해있는 그 부대 사람들은 이제 밥도 제시간에…….
(A면과 B면 사이)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하나님이 그 배를 왜 째려보시겠어요? 그냥 가는 것인데 자기네들 그냥 가는 것을 하나님이 뭐 하러 째려보셔요?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좀 안됐지만 그러나 또 안 믿는 사람들은 심판으로 가면 되니까 째려보실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딱 타시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한쪽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하나를 딱 째려보시는데 그게 바로 바다 위에 떠있는 이 점만도 못한 티끌만한 배 하나를 째려보고 계시는 것이에요. 이렇게 째려보는 배에 동승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 어때요? 나 하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니까 하나님과 관계없는 애매한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주고, 고난이 있는 곳에 위로가 넘치게 해야지, 평화가 있는 곳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의 물결 속에 집어넣는 사람들이 되어서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사명을 감당해서 폭풍이 일어나는 상황을 잠잠케 하지는 못할지언정 왜 하나님의 뜻대로 안 행하니까 이 사람 때문에 애매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째려보시는데 온전할 수 있겠어요? 어림도 없어요. 하나님이 째려보시면 이제 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결단하고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두시더니 그러면 하나님이 왜 배를 타고 간 다음에 째려보시느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배를 흔드셨어요. 어떻게 될 때까지 배를 흔드셨어요? 요나가 죗값을 갚을 때까지 흔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를 흔든 것은 요나가 손을 들 때까지 흔드시는 거예요. 주님은 뭐냐? 손이 이렇게 있어요. 손이 이렇게 있으면 두 손을 치켜 들어야하는데 하나님이 두 손을 이렇게 치켜들어서 ‘가만히 서 있어! 네가 손을 들었지?’ 이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흔들어가지고 자기 힘으로 야! 이제는 손을 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구나! 그리고 손을 들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계속 요나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고백을 안 하고 손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계속 흔드시는 것이죠. 계속……. 내일도 보겠습니다만 뭐 좋은 짐이고 뭐고 다 갖다 버렸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막 죽게 된 거에요.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했더니 이신, 저신 불러서 안 되니까 그러면 여호와도 한번 나와 보시오 하고 불렀어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면서 제비를 뽑는 게 아니에요?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거예요. 제비가 딱 당하니까 그때서야 요나가 ‘네가 누구냐?’ ‘나는 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후줄근하게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요나가 드디어 ‘나를 바다에 던져라 그래야 바다가 잔잔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고백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거예요.
원하시는 것은 뭐에요? 불순종한 요나를 괴롭히시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흔들어서 항복을 받아내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뭐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을 결단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 고난이 넘쳐요. 그리고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워요. 주여 생명을 거둬주시옵소서 백번을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절대 안 거둬 가셔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 걷어가세요. 걷어가셨으면 좋겠지요? 안 거둬 가셔요. 고난이 넘쳐서 꼴깍꼴깍하는데도 안 거둬 가셔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에요? 죽여 버리시옵소서.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을 들어라!’ 안 드느냐? 물 좀 더 먹어라 그리고 흔드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야지 부모가 자식이 똑바로 되라고 패는데 아버지 차라리 나를 죽여…….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패는 거지! 여러분! 이 두 가지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에요.
요나가 이쪽 길을 택했을 때 그는 화려한 인생으로 갔던 것이 아니라 삼등 배 밑창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배에 탄 선지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꼭 누가 생각이 나느냐하면 로마로 호송되어 갔던 바울 생각이 꼭 나요. 그 바울은 오히려(이 사람은 돈이나 주고 탔지) 무임승차를 했거든요. 잘나서 무임승차를 한 것이 아니라 죄수니까, 돈이 없으니까, 이렇게 쇠가락지로 묶여가지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탔어요. 그런데 어때요? 이 사람은 돈을 주고 탔는데도 삼등칸에 내려가 가지고 풍랑이 일어나는데 그 풍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사람들이 쥐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거기에 앉아가지고 마지막 막판에 가서 ‘나를 바다에 던져라’ 이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죄수의 몸으로 묶여 가는데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서 ‘가지 마라’ 그러는데 간 거예요. 그러다가 큰 풍랑을 만나서 다 죽게 된 것이에요.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일주일을 깊은 밤을 지내면서 먹지도 못하고 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뭐라고 그래요? 묶여있는 채로 ‘너희는 평안하여라 어젯밤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의 생명도 거둬가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너희는 평안하여라.’ 그러니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아 예 평안해도 되겠습니까?’ 이게 도대체 뭐 묶인 죄수가 창, 칼을 든 군인들에게 ‘너희는 평안하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힘이에요.
하나님이 이 배에 요나가 타니까 하나님이 그 배를 째려보시는 거예요. 째려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오늘의 결론을 맺으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 또 적은 은혜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문제가 있는 환경이 있고, 그 문제 속에는 우리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상식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선입견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순종의 삶을 택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들은 매 순간 불순종을 결단하고 일어나서 그래서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이 요나가 아닐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