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3
네가 누구냐(욘1:4-10)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음으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전부다 반복할 수 없지만 어제 이야기를 잠깐 해야지만 오늘 속편이 되겠으니 혹시 어제 못 들으신 분은 테이프가 제작되어 나왔으니 들으시고 연결을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부르셨는데 우선 말씀이 임하게 하시는 큰 은혜를 주셨다.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들에게는 사명이 있다. 작게 받은 사람이든 크게 받은 사람이든 하여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그 은혜에 비례하는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의 길을 망각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길을 불순종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배를 타게 내버려두셨다. 불순종하고 걸어갈 때도 형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었을 때 다시스로 가게 되었는데 선가를 주고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이것은 니느웨이를 향해 갔더라면 보무도 당당하게 한 민족의 모든 역사를 손아귀에 쥐고 그리고 갈수 있는 장엄한 사신의 길을 하나님의 대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사람이 치사하게 돈 몇 푼 주고 겨우 삼등칸을 타고 가는 그런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는 이제 두둥실 두리둥실 순풍의 돛을 달고 바다 가운데로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지켜보셨습니까? 이 세상에 모든 만물 가운데 무엇을 지켜보았습니까? 바다위에 떠있는 배 한척을 지켜보셨습니다. 왜? 바다위에 떠있는 배를 지켜보셨습니까? 그 속에 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까지가 어제 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입니다. 4절 한번 봅시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진지라.” 그러니 벌써 눈치를 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다 위를 떠가는 그 요나가 탄 배 하나를 지켜보셨을 때 이미 뭔가 사건이 일어나리라. 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면 하여튼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사건을 일으키시기 전에 반드시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도 우리를 주목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도 일단 우리를 뭔가 하나님이 주목하셔야만 합니다. 성경이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이 시간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또한 찾으시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에 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너를 주목하고 할 때 위로가 됩니까, 아님 고통이 됩니까? 위로가 됩니다. 참.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부르짖으면서 주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주님을 전심으로 진짜 첫날 저녁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럴 때 그 말씀에 응답하듯이 전심으로 내가 하나님을 찾고 또 찾기 위해서 내가 몸부림치며 그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누가 알아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뭘 알아줍니까.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기 위해서 살아가고 또 찾는 과정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고통을 받으면서 이 길을 걸어가는 나의 마음과 심령의 상태나 그 하나님만을 찾아가는 그런 삶의 그 뼈저린 외로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걸어가는 그 뼈저린 외로움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찾으라, 그럼 내가 즉시 나타나리라. 그게 아닙니다. 그저께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상당한 시간을 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찾아가는 고통을 여러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주시지 않는 것이 고통이 아닙니다. 오시면 오시고 말면 마는 것이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전심으로 그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고 마치 그 하님을 찾는 그 심정이 활을 쏘는 사람이 과녁을 응시하는 것같이 그것 하나밖에 바라보는 것이 없는데 전심이라는 것은 하나도 흐트러진 것이 없는 마음, 오직 그것 하나, 그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면 모든 것을 가질 것이고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없는 것 같은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전심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가십니까? 누가 그 외로움을 알겠습니까. 그것은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쓰라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처절한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하나님을 크게 만난 사람을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주님, 만나주시든지 내 생명을 차라리 거두어가시든지 양단간에 하나 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하나님만을 철저히 바라고 간절히 사모할 때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 증표를 내게 보여주시지 않는데도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걸어가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나은 것 같은 그것은 고통이고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돈이 듭니까? 뭐가 듭니까? 그냥 찾으면 됩니다. 공짜도 좋아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못합니다. 그것은 차라리 돈 내는 것이 훨씬 낫고 차라리 몸을 두들겨 맞아서 고통을 받는 것이 훨씬 낫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아감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내게 나타나주시지 않고 시간을 끄시는 데서 오는 그 처절한 외로움, 그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주님, 만나주시든지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처절한 외로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은 싫고 짱! 하고 나타나주시는 것, 그것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여도 하나님께서 모두 한곳으로 치우쳐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주목하는 그것 하나를 얻어내기 위해서 그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치루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홀로 비참하게 처절할 정도로 외로워지기까지 그렇게 견디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자꾸 회피하니까 신앙이 피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운데 우리를 두실 때 하나님께서는 해결도 옆에 두셨습니다. 옆에 두신 것이 아니라 해결도 이 안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손닿으면 만질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 해결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져왔기 때문에 이것들이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그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끔 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기심과 더러운 죄악과 우리의 오류와 이런 것들이 부서져나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성경은 우리의 자존심이 상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부패함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너희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 하는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해도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극소수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많이 우리 교회가 정돈이 되었습니다. 1년 오면서 저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굉장히 큰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 놀라운 것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있는 이 교묘함, 처절한 자기 속임수 이런 것을 저는 참 많이 봤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그게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만나리라.” 왜 하나님께서 내가 나타나리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찾으라고 말하십니까? 여러분, 지금은 많이 정돈되었는데 교회를 개척하면서 사람들에게 죄송합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하고 같이 교회를 섬기면서 제 설교를 들으면 뭔가 저절로 하나님을 만날 것 같은 환상에 빠지는 사람이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걱정마세요. 절대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위대한 사람이 누가 와서 설교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통해서 나의 상태와 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홀연히 나타나셔서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외로움이든가 주님을 찾아가는 그 처절함이든가 그런 것 하나도 없이 그리고 짠! 하고 나타나서 우리에게 좋은 것만 마구 부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이런 어리석음으로부터 빨리 탈출하십시오.
여러분, 그러면서 서서히 뭔가 저를 보는 눈빛이 틀려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때 나는 일 년 동안 교회를 하면서 가장 위기를 느꼈습니다. 왜? 저도 아직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 우리가 하나님을 찾노라 하면서도 얼마나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 처절한 외로움과 전심으로 여호와만을 바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그 철저한 외로움, 그것을 피하고 열매만을 맺기를 원하는가. 그때 제 마음속에 분노와 같이 다가온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번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적이 있는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한 적이 있는가?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주님이 나를 주목하고 나를 만나주시기만 한다면 내가 어떤 처절함의 외로움의 터널도 지나갈 수 있고, 불안의 계곡도 지날 수 있고, 그리고 처절하고 비참한 고통의 쓴 물을 머금으면서도 주님을 찾아가는 광야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고 하는 결의 속에서 세상의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본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네 번 정도 설교를 하니까 분위기가 확 섞어지면서 어느 정도 성도들이 정돈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대충 살려고 할 때는 우리에게 그런 어떤 오류와 무지의 시험 같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살면 되니까. 그러나 우리가 좀 더 깊어지고 우리가 뭔가 깊은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거기에는 우리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수많은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되어서 진리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들을 분별하면 피해갈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바로 그렇게 암초가 수없이 있는 속으로 교회라는 배를 몰고 가는 그런 하나님이 세우신 안내자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이런 처절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목하시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목하시고 계시면 그것은 우리에게 한량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패망하고 절망하고 비참하게 무너진 일이 먼저 있고서 그 다음에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절망에 직면하게 되어서 하나님 이외에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될 때 그때에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진정한 부흥과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더 하면 깊게 들어가니까 이만큼 해놓고 그런데 불행한 경우에 요나의 경우에는 이런 복스러운 주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망망대해에 얼마나 많은 배가 떠다녔겠습니까. 다른 배, 쳐다보셨습니까? 아닙니다. 요나가 탄 그 배, 그것 하나만 쳐다봤습니다. 그러니까 그 배에 탄 사람들은 요나에게 배 삯, 몇 푼 받고 톡톡히 대가를 치룹니다. 여러분, 사업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예수를 제대로 안 믿는 사람하고 사업했다가는 그것은 이 뱃사공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진짜 작게 하더라도 혼자 하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오늘 성경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그 바다에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데는 없고 그 바다에만, 어느 바다. 요나의 배가 지나가는 그 바다에만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대풍을 내리셨다고 그랬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팻틸’이라고 하는 동사입니다. 그것은 휙! 하고 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급히 단속하셨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냥 바람아 내려가라. 그러니까 훅! 며칠 걸려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돌격! 위에서 하니까 휙! 하고 내려간 것입니다. 뭐가? 태풍이, 어디에만? 요나가 탄 배가 있는 바다에만 쿵! 하고 떨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팻틸이라는 동사가 뒤에 보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마지막에 요나를 집어던질 때 집어던졌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한손에 대풍과 바람을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데 가지고 있다가 그냥 내려 보낸 것이 아니라 요나가 탄 배를 겨냥해서 주님은 정확한 투수이니까 봐서 휙! 던지니까 그 대풍이 날아가서 맞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니까 좀 이상하네. 요나가 들으면 섭섭하겠네. 어떻든지 간에 내려갔습니다. 그러니 온전할 리가 있나요.
욥바에서 출발할 때 풍우대작 했더라면 떠났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나가 욥바에서 배에 승선하고 그리고 선창에 나와서 바다를 보면서 야, 좋다. 내가 지금쯤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탔으면 간이 콩알만 하게 녹아서 마음에도 안 드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참 시름이 많았을 텐데 참 해방이다. 야, 이 배를 봐라 참 순풍이구나. 그리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해도 잠시는 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인간들을 잘못하면 즉시 톡톡 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들도 애들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육이 안 됩니다. 완전히 아이를 로봇으로 만들어놓고 때릴 때가 되면 일주일동안 지켜보다가 몰아서 때립니다. 적어났다가 적금 주듯이 한 번에 해야지, 요렇게 한다고 치고 저렇게 한다고 치고 그러면 교육이 안 됩니다. 나두고 가만히 쳐다보면 그것도 잘하는 줄 알고 계속 합니다. 그게 다 쌓이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몰아서 적금 타는 것입니다. 배가 순풍에 돛달고 잘 갑니다. 요나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한참 지나서 바다 위를 욥바에서 빠져나올 때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뻔합니다. 아, 이제는 우리 여호와의 경계구역에서 벗어낫구나. 하나님이 이제 그래. 손을 못 대시겠지.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바로 그렇습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죄인이 뭐 똑같이 코가 좀 높으나, 낮으냐. 눈이 좀 째졌나. 동그란가, 그 차이지 뭐가 차이가 있겠습니까? 머릿속에 생각하는 게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도 형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 형통할 때 아, 내가 지금 잘못 가고 있구나. 깨닫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극소수입니다. 왜, 이미 불순종을 택할 때 이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버리기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더 큰 자극이 오기 전에는 이 죄인의 마음이 무디어져서 자기가 내린 그 결정을 그대로 지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그 배를 타고 그리고 바다위로 나아갔습니다. 이제 한번 불순종을 하면 그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키기가 얼마나 힘든지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욥바에서 배를 타고 진행합니다. 쭉 갑니다. 바다를 가는데 그런 일이 안 일어났지만 혹시 일어났다고 칩시다. 배가 며칠을 갔는데 요나가 아,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게 내 길이 아니야.’ 하나님 앞에 간절히 회개하고 주여, 내가 돌아가겠나이다.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에 그런 일이 안 일어났지만 일어났다면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어디까지 가야지 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렇지, 요나가 뉘우치든지 말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그 배가 다시스까지 가야지만 해결이 됩니다. 이게 바로 불순종의 무서움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적인 선택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착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요나가 배를 타고 하루쯤 가다가 아니 이 길이 아니구나.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주여, 잘못했나이다. 그러면 하늘에서 또 다른 배가 내려와서 갈아타기 위해서 요나 배 옆에다 갈아타라고 대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회개를 해도 돌이킬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스까지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에 개입하셔서 요나를 바다 속에 던져서 물고기가 삼켰으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할 수 없이 다시스까지 가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도 할 수 없이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불순종은 또 다른 불순종을 낫고 할 수 없이 불순종을 해야 하는 악의 열매를 계속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점점 가중되어 무거워지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최선은 선택을 할 때 신중해야 합니다. 선택을 할 때 큰소리 펑펑 치면서 선택하는 것은 자동차 운전할 때 옆에 들이박고 저리 들이박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과속하지 말고 천천히 가십시오.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좀 늦게 가면 어때. 뭐 그게 인생이 그렇게 급해서, 모래알에 싹이 날 리 있습니까. 딱 서서 주님 이 길입니까? 나를 항상 버리고 주님이 뜻이 무엇인지 구별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빨리 가는 길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요나가 생각했어야 합니다. 돈을 가지고 지금으로 가자면 매표소가 있어서 돈을 내니까 어디 가시려고요? 다시스 가실건가요, 니느웨이 가실 건가요? 그럴 때 검표원이 물어봤을지 모릅니다. 그때 돈을 내밀고 다시스, 그러기 전에 다시스로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최대의 상상력을 동원하고 앞에 선지자의 예를 보고 성경을 기억하면서 생각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양반은 신앙만 없었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상당히 없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니까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받는 고통이 내 죄 때문이 아니라 예전에 잘못된 선택 때문입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지금 받는 내 고통이 지금 내 잘못 때문이라면 고치겠는데 옛날에 선택 때문입니다. 옛날에 선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쓰디쓴 열매를 계속 산출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까지 끌고 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에서는 그 옛날에 잘못됐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를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옛날로 다시 돌이킬 수 있을까?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옛날로 갖다놓으면 그 선택을 안 할 마음도 있고 정말 안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는 흘러갔고 옛날은 지나갔습니다. 지금에 와서 옛날이야기를 해봐야 죽은 자식 만지기입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후회는 사단이 줍니다. 설령 잘못 선택했을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시스가는 배를 탔는데,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옛날은 잘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잘못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러나 이미 그것은 끝난 일이고 어떻게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와있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은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지나간 과거를 인해서 슬퍼하거나 마음아파하고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회개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생 소모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수 없게 두고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예전에 내가 잘못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새롭게 해주십니다.
우리들 인생 가운데 선택을 해서 그 선택을 언제든지 물릴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무를 수 없고 무르면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질 수 있는 선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결혼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결혼할 당시는 신앙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자기의 육체의 욕심이 원하는 대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유산해버렸습니다. 왜,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데 나중에 말씀을 듣고 가만히 듣고 생각하니까 살인한 것입니다. 돌이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 돌이킬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 잘못이 묻혀 집니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선택을 돌이킬 수 없으니까 주님이 그냥 지나갈 리가 있겠습니까. 자, 때리십시오. 하며 엉덩이를 걷어 부치며 하나님 앞에 차렷! 자세로 서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 그 선택을 돌이킬 때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질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없이 하나님도 인정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떤가 하면 그것들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 얼마나 커다란 파괴를 가져왔는가를 기억하면서 다시 하나님을 찾아서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댐을 건설합니다. 그래서 농토를 보상하고 해서 수천억을 들여서 어마어마한 댐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땅 주인이 생각해보니까 댐 속에 땅이 한 30평 있는데 보상을 안 해주고 불법하게 가져가버렸습니다. 소송을 제기합니다. 분명히 국가에서 혹은 건설업자가 댐을 짓기 위해서 정당한 토지수용절차를 밟지 않고 마구잡이로 지어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좋은 땅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 땅 위에 자기가 함부로 댐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주민들끼리 이렇게 살면서 옆에 사람이 측량을 잘못해서 우리의 땅으로 한 평만 들어왔다고 그러면 법원에서 무엇이라고 판결을 내립니까? 부셔라. 그리고 한 평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한 평도 아니고 30평, 심지어는 300평이 그렇게 묻혀 들어갔는데도 법원에서는 사정판결이라는 것을 내립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대신 돈으로 얼마 주고 끝납니다. 왜 30평을 돌려주기 위해서 그 수천억짜리 댐을 부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앞에서 지나온 과거를 가지고 후회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찾으면 우리의 그 잘못된 선택을 오늘 당신을 찾고 사랑하는 일을 기억하사 우리의 인생에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비근한 예 중에 하나가 우리아의 아내와 범죄 했던 다윗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고통스러운 열매를 산출해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큰 징계를 받았고, 두 번째로는 그것 때문에 사실은 그 왕자들이 그렇게 끔찍한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이런 사건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에 대해서 후회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았습니다. 늘 그 이전의 과오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오히려 다윗이 그렇게 겸비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의 열매로 말미암은 그 많은 시련과 환난을 주셨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붙드니까 오히려 그것이 다윗을 정금과 같이 연단하는 불이 되어서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다윗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친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시작해서 잠시 육체로 갔으나 다시 성령으로 마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신약성경에 뚜껑을 열면 한국말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라고 나오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세계라고 나옵니다. 그럴 정도로 신앙의 위대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면서 이 배가 불순종 가운데 갈 때도 하나님께서 이 배를 가도록 내버려두셨는데 그러나 그것은 잠시고 시간이 흐르자 하나님께서 드디어 때가 되매 하나님이 대풍을 던지신 것입니다. 휙! 하고 보내시니까 쾅! 하면서 큰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폭풍이 대작하여 그랬는데 원문 성경에는 커다란 바람이 날라 가서 쾅! 하고 부딪혀 배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 톤, 칠천 톤, 팔천 톤, 그러면 우리는 와! 하는데 바다 한가운데 나가면 그것은 가랑잎입니다. 이때 통나무로 만든 배가 규모가 어땠겠습니까. 그 까짓 것, 엊그제도 파도가 6미터,8미터 친다고 뉴스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 반만 해도 다 뒤집힐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 그 배만 흔드시는 것입니다. 뭐하려고? 요나를 내놓으라고. 요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니까 배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만 괴롭히실까? 수많은 사람이 탈세해도 걸리는 사람은 하필이면 나야, 예수 안 믿을 때는 잘 해먹었는데’ 예수 믿고 땅! 하니까 내가 걸리는 것입니다. 사건이 있는 데마다 내가 걸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그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형통한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기의 기업을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생각할 때 이렇게 고달프게 예수를 믿느니 내가 적금 타는 일이 있어도 세상에서 살걸 그랬다. 제가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신앙이 별로 없는데도 즉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를 믿고 나니까 아, 하나님 손에 잡혔구나. 발목 잡혔구나. 이것을 취소할 수 없겠구나. 돌아다니면서 그 시절에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 믿은 것을 후회한다고,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일수불퇴입니다. 한번 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안 물러주십니다. 물러 주면 무를 사람이 많습니다. 안 물러주십니다. 그리고 안 물러주시니까 결국 우리 앞에 있는 삶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과는 상관이 없이 당당하게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자로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 나아가서 한번 옛날처럼 살아보려고 그러다가 삼등칸에 타든가 둘 중의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삼의 선택이 있다는 그 희망 때문에 사람들이 곁길로 가는 것입니다. 최선의 선택은 없습니다.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딱 두 가지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빨리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이 주신 땅에서 살든가, 광야에서 불순종으로 죽든가 둘 중의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까? 그러나 한사람도 애굽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하십니다. 끝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놓은 홍해를 하나님이 왜 합치셨습니까? 애굽의 병사들을 죽이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게 합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꾸로 돌아가서 그쪽을 향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이제 안 갈라집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니까 갈라졌지,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 손을 내밀고 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아무리 해도 그 바다가 다시 애굽을 향해서 갈라지지 않습니다. 아마 엄청나게 많이 갔을 것입니다. 이미 끝난 것입니다. 발목 잡힌 것입니다. 일수불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결국은 요나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게 되었을 때 다른 배들은 잘 다녔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토해놓자 이 배도 잘 갔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잘 살고 형통한 것을 여러분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날? 혹독한 심판의 날을, 그러니까 사냥개나 이런 것을 주인이 데리고 다니면서 산에 가서 운동을 시키고 다이어트를 시켜서 날씬하게 만들고 주력을 길러주고 그렇게 합니다. 돼지를 에어로빅 시키는 것을 보셨습니까? 돼지 세수시켜주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런 것 안 합니다. 그냥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 살찌기만 기다립니다. 돼지는 아마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가축가운데 우리 같이 사랑받는 짐승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밭을 가는 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살찌는 것만 기대하고 마지막에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그 증인들이 남대문에 즐비하게 깔려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형통한 것을 조금도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은 기업으로 바꾸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양식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에게는 다른 양식이 있노라. 제자들이 누가 먹을 것을 갖다 드렸나. 아니라 나의 양식은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게 되니까 사공이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공들이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두 사람이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그 배를 운행하는 모든 승무원들이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배가 막 요동치니까 이제 물건을 바다에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건을 제일 먼저 배 밑에다 쌓습니다. 그다음에 쌓으면 계속 그 위로 올라가는데 이게 무게 중심이 흔들리니까 배가 흔들리면 무게 중심이 이렇게 이동하면 배가 뒤집힙니다. 배가 생각보다 잘 뒤집힙니다. 그러니까 위에 있는 짐부터 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배가 계속해서 바다에 잠기는 수위를 더 낮게 하기 위해서 모든 물건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 고단한 길을 무릅쓰고 욥바로부터 출발해서 다시스까지 갈 때는 그 물건이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흔드시면 같은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의 제물이고 물질이고 명예고 다 털어버립니다. 다 남김없이 다 털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불순종으로 가는 길에 대풍을 한번 내리시고 하나님이 한번 터시면 그러면 다 털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이 그렇게 폭풍을 만나면서도 그 폭풍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이제 물건을 없애시기 시작하십니다. 살아나기 위해 물건을 다 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물건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러나 미안하지만 하나님이 노리시는 것은 물건이라면 물건을 다 버리면 되지만 하나님이 노리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것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내 앞에 나와서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기 전에는 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살아가지 못하면서 헌금이나 몇 푼 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감추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안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물건이나 그런 물질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바다에서 유독 이 배만 폭풍을 만나서 두려움에 빠지게 되니까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니까 막 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자기 신들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 모든(?)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불순종으로 가는 요나의 배를 흔들기로 결심하니까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완악한가 하면 자기가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늘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슛은 제가 쏠 테니까 센터링이나 똑바로 해주십시오. 결정적인 순간은 제가 할 테니까 하나님은 보조나 잘 맞추어주십시오. 그 이야기는 춤은 내가 출 테니까 북이나 잘 쳐주십시오. 그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신들을 부르고 자기 신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합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환난을 만났을 때 그들은 인간의 머리를 다 굴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것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 자기의 지혜를 동원해서 몸부림치면서 자기를 구해보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면서 노력할 때 이들은 부질함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위기를 만났을 때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합니다. ‘아, 이게 아닌가보다.’ 생각합니다.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 폭풍이 그치지 않습니다. 더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언제까지? 생각을 바꿀 때까지,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는데 굴리는 것만큼 폭풍이 굴러가는 것입니다. 폭풍이 굴러가는 것만큼 자기의 인생도 계속해서 요나가 탄 배 밑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찌그러지고 깨지면서 짐짝 같이 그렇게 굴러다니면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덕적도에서 한번 배를 탔는데 나는 바다에 풍랑이라고 해도 우습게 생각했는데 나는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폭풍 주의보가 안 일어나면 물결이 아무리 높아도 그냥 배는 출발하고 폭풍주의보가 일어나면 아무리 잔잔해도 배는 안 떠납니다. 그런데 폭풍주의보가 안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안 될 것 같은데 간다고 합니다. 다행이다. 그리고 배를 탔는데 딱 반을 왔습니다. 인천하고 덕적도 하고 딱 반을 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게 한 250명 타는 배였는데 작지도 않고 꽤 컸는데 우리 교회 한 두 배 정도 되었는데 이쪽 파도가 저쪽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배가 가다가 요동치는데 파도가 밀려와서 왼쪽 뱃머리를 때리면 배가 오른쪽으로 휘청 합니다. 그런데 밑에 나도 요나처럼 탔는데 이렇게 누워있는데 사정없이 이쪽에서 저쪽 벽에 부딪혀 쿵! 하고 부딪힙니다. 조금 있다가 저쪽으로, 처음에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 15분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뱃속에서 구라파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붙들고 통회 자복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 쏟아놓습니다. 깡통을 갖다가, 그러다 드디어 위기의 순간에 방송이 나오는데 승객은 모두 구명복을 입으시고 탈출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아, 내 젊은 청춘이 바다에 묻히는가보다. 그리고 입고 기다리는데 엄청납니다. 그냥 이렇게 슬슬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배가 통에 집어넣고 막 흔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짐짝이 저쪽으로 움직이다 쾅! 하고 부딪히면 쪼개지고 그런 폭풍을 경험해봤습니다. 결국은 건너지 못하고 그냥 토하기만 하고 난리를 치고 눈물을 흘리고 고생고생 하다가 결국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니까 오밤중입니다. 할 수 없이 하루 자고 그 다음날 다시 배가 떴는데 그렇게 폭풍이 무서웠습니다.
그 폭풍 속에서 불순종하기만 하면 불순종한 이 요나를 찾아내어서 하나님께서 결국 이 배가 요나를 토해놓을 때까지 왜 이 배가 요나를 토해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요나하고만 마주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사람들 속에 숨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너는 내 앞에만 서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너는 내 앞에 서라.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같이 설게요. 필요 없다. 우리 교인들하고 같이 서면 안 됩니까? 필요 없다. 우리 회사사람들하고 필요 없다. 예수 잘 믿는 우리 엄마 옷자락 뒤에 서면 안 될까요? 필요 없다. 너 혼자 서라. 요나의 경우 바다 가운데서 너는 나하고만 이야기하라. 단둘이 이야기하자, 우리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 많이 있으면 다른 사람 필요 없고 단 둘이 이야기하자. 나와라, 그때 인간들은 모두 싫어합니다. 왜 싫어합니까? 사람들이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난리를 치고 있을 때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배 밑창에 내려가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아,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또 배에서 자는 분이 또 한분이 나오는데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온 하늘이 어두워지고 피할 곳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막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합니까? 주무십니다. 그런데 두 잠이 똑같은 잠이 아닙니다. 뭘 보면 알 수 있는가 하면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 요나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막 배가 거의 깨어질 정도로 요동을 치는데 어떻게 주무실 수 있는지 난 이해가 안갑니다. 고단하신 것이 상당한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더 큰 원인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막 흔들면서 주님, 주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주무실 때입니까? 왜 그러는가. 하니까 이것 보십시오. 하는데 확! 배가 파도 위를 튀어 오릅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왜 그래. 가만히 있어. 바람아 잠잠하라. 파도야 그쳐라. 그러니까 다시 조용한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 잠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류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잠입니다. 할렐루야! 그냥 평안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이 그야말로 사업에 있어서 엄청난 위기를 당한 것입니다. 회사가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수 십 명의 종업원이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달 리가 차압을 붙일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뜨고 쳐다보면 큰일 났구나. 그러는데 와서 잠을 자면 잠이 그렇게 맛있게 잘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눈을 뜨고 보면 이제 인생 막차를 타는구나. 그리고 부인이 매일 하는 말이 당신 이러다 쇠고랑 차는 것 아니야. 그러는데도 기도만 하면 평안합니다. 그러니 자기가 어떻게 잠을 안 잘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평안히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너무 은혜를 주실 때, 그때 잠이 잘 안 오는 것을 여러분 아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숲속에 들어간 것같이 맑습니다. 잠이 안 옵니다. 피곤한데 정신이 말똥말똥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그렇습니다.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마음에 죄악이 쌓이고 심기가 불편할 때 잠 못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든지 간에 예수님의 잠은 그런 잠이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그것은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예배가 어떤가? 했더니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왔데. 그래서 깜짝 놀라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했더니 증표를 봤다는데 자기는 오늘 예배 가운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한 것 밖에는 자기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주는 잠이 아닙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잠자는 모습은 예수님과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불순종해서 자는데 무슨 이러고 잤을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잠자는 것은 똑같은데 일어나서는 폭풍이 부니까 눈을 껌벅껌벅 하면서 사람들이 야, 이거 어떻게 된 것인가 하니까 눈을 껌벅껌벅하면서 폭풍에 대해서 아무런 제어할 능력이 없는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죄악의 삶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세상에 어떻게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잠이 오는가. 그렇게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잠을 자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심령이 하도 강퍅하고 죄악으로 말미암아 무디어지니까 그러니까 무디어진 심령을 가지고 잠잘 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자는 것입니다. 죄악에 잠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다준 잠입니다. 그렇게 잠을 자는 동안에 요나는 정말 평안했습니다. 배도 잘 가고 이제는 깊이 잠이 들고 얼마나 잠이 들었는지 파도가 치고 난리를 쳐도 잠을 잘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심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배 밑창에 있는 요나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일단 불순종으로 욥바를 떠나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만 하면 이제 우리도 이런 죄악의 잠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명하게 이 길이 아니라고 하는 표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끼면 모르는지 아니, 바본가. 잠을 자도 어느 정도지, 다른 사람은 물건을 다 퍼내고 이 난리를 치는데 자기는 전혀 몰랐을 리 있습니까? 뒤척이다가 또 자고 늘 부는 바람이니까 하며 그런 것입니다. 그게 바로 무감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되면 단순히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게 아니라 영적인 무감각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바람이 늘 있는 폭풍인지 하나님이 훅! 보내신 폭풍인지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을 때는 분별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지혜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아, 이것은 시련의 폭풍이니까 기도로 이길 수 있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시는 폭풍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키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이 안 된다. 그런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이 없으니까 바람은 다 바람이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바람이 다 바람이 아닙니다. 자연히 부는 바람이 있고, 우리가 부주의해서 부는 바람이 있고, 하나님이 뭔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부는 바람이 있습니다.
인간이 육신의 병에 걸립니다. 다 똑같은 질병입니까? 어떤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감기도 안 걸립니까? 어떤 사람은 감기에 걸리는 것도 다 귀신이 와서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무슨 귀신이 아스피린을 제일 무서워합니까. 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어도 계속 무리하고 그러면 몸져눕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철야기도를 해야 하고 금식기도를해야만 해결이 됩니까? 그러면 더 병이 깊어집니다. 그럴 때는 새벽기도도 좀 쉬고 편안하게 이부자리 깔고 약 먹고 누워서 하루 자고 일어나면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서 오는 질병은 아무리 은사를 동원하고 약사를 동원하고 약을 먹고 쉬고 그래도 안 납니다. 그것은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그리고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모사가 필요 없고 자기를 도와주는 지혜로운 자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도움이 허사입니다. 하나님이 터시니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면서 약의 도움을 받아야지 효력을 보지,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약에 도움을 안 받고도 하나님이 고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렇게 해결해 보는 것입니다. 바람에 따라서 해결방법이 다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질병을 주셨는데 그것을 갖다가 미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고친다. 소련으로 배를 타고 고친다고 아무리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고치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람이 불게 되고 이럴 때 이런 불순종의 길로 일단 들어서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져서 불순종의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도 안 됩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그 불순종의 매듭을 풀기 전에는 안 들어주십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아이 성의 전투에 들어갈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외투와 금덩이를 훔칩니다. 그러니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엎드려 아버지! 하며 막 몸부림치면서 기도할 때 그럼 할 이야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길갈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호수아가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통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고 너희는 가나안으로 진군하라. 이제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전진한 것이 여리고성이었고 그 다음에 아이 성이었으니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딱 막히고 수많은 사람이 다 죽은 것입니다. 다 갈 필요가 없으니 몇 천 명만 갔는데 아주 쑥밭이 될 정도로 패배하고 내려온 것입니다.
여리고 성과 같이 엄청난 성을 점령했는데 동네 하나를 점령하러 갔다가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라린 가슴을 부여 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했겠습니까. 신나게 기도하면서 주여! 아버지, 요즘으로 말하자면 기도원에 올라가서 주여! 막 이러고 있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김 빼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너 왜 그러고 있니? 아니, 기도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너 왜 그러고 있니? 그렇게 물으신다니 아니, 그렇게 섭섭한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섭섭한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왜요? 네가 기도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아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니까 불순종하게 되니까 바르게 분별하지 못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니까 불순종하게 되고 불순종하게 되니까 풍랑이 일어나고 풍랑이 일어나니까 마음이 더 둔해지고 마음이 둔해지니까 더 분별하지 못하고 분별을 못하니까 좌충우돌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데 부지런한 것도 소용없고, 열심히 한 것도 소용없고, 마음은 더 무디어져서 이제는 영적으로 더 죄악의 깊은 잠에 빠져들어서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소용없습니다. 부지런한 것도 소용없고, 악착같이 사는 것 소용없습니다. 몸부림쳐도 소용없습니다. 매일 문제의 근원을 가지고 씨름하고 가슴앓이를 해도 여러분,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해결이 없습니다. 아픈 것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아픔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는지 어제도 2.7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 가도 주님의 마음은 고통을 받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분별이 식어지면서 죄악에 깊이 빠져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길을 타서 계속 걸어가다가 이제는 그 걸어간 정도가 아주 깊이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왜 가끔 교회에 나와서 아버지! 하고 울며 기도해봤는데 뭐 그렇게 기도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한번 나오고 주여! 그리고 눈물 흘려봤는데 그런데 눈을 비비고 가면 갑자기 무슨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공부 못하는 자식이 갑자기 무슨 ‘수’를 몇 개 받는다든가. 돈을 못 벌어오던 남편이 갑자기 어디서 눈먼 돈이라도 가지고 들어온다든가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안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예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포기하고 살면 세월이 약이겠지, 언젠가는 그 문제가 해결이 되겠지.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월이 약이겠지, 라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안 풀고 내버려두면 그대로 있다가 그 다음에 다시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문제를 풀지 않고 계속 살아갈 때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동안 하나님하고 휴전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다툼에는 하나님의 열심에는 휴전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휴식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토해놓을 때까지 계속 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멀쩡하던 가정이 풍파가 일어나고 깨지고 고통 받기 시작합니다. 잘나가던 사업이 부도가 나기 시작하고 이상하게 삼천포로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물건도 버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고 나중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일도 어기고 뛰어다니는데 결국은 그 부지런한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 속에서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선을 위한 싸움과 몸부림에서 지치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는 합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여러분, 정상적으로 내가 예수를 잘 믿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면서 더 높은 단계의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영적인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일도 힘든데 이미 선택을 해서 배가 욥바를 떠나서 다시스로 한참 흘러갔는데 내가 잘못 왔다고 다시 배를 돌리자고 그래도 그 배가 돌아가겠습니까? 안 돌아갑니다. 어차피 그 배는 다시스로 가게 되어있는 배입니다. 그것을 탄 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를 잘못 들어갔는데 판교까지 가기 전에는 길이 없습니다. 싫어도 판교까지 가야지 됩니다. 그 판교를 놓치면 그 다음에는 신갈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잘못하면 부산까지 할 수 없이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비행기를 탔는데 잘못 탔습니다. 일본에 가야지 되는데 미국 비행기를 탔습니다. 일본 옆에까지 가다가 미국으로 가는 것입니까? 그냥 가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돌이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는데 그 속에서 우리가 매듭을 풀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것은 결국 나중에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그런 속에서 이미 잘못나아가고 삼천포로 나가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관계를 회복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한 정도라면 하루에도 백번이라도 합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잘못했는데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방배동에 사는 아무 아무개 도장을 찍으면 될 텐데, 각서라도 백번이라도 쓸 텐데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돌이켜서 그 위에다 참다운 영적인 회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 위에 우리를 말 할 수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회복시켜주시는 증표까지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사도가 하는 말이 각각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것으로 끝납니까? 그 위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그렇게 처절하게 고통스럽고 외롭다는 말씀을 이미 드렸는데 그게 아니라 이미 비뚜로 나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놓고 거기서 회개를 하고 후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 위에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받아서 불꽃과 같은 사람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너무 그렇게 되어가기까지 내 마음이 전심으로 따라 주면 좋은데 여전히 세상은 나를 유혹하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환경은 그렇게 안 된다고 우리를 송사하고 이전에 네가 잘못한 것이 과연 해결이 될 줄 아는가. 율법에 송사, 양심의 송사, 이런 모든 것이 다 다가오고 눈앞의 환경이 점점 변하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눈물 한 방울 흘리고 갔는데도 환경은 변한 것이 없고 여전히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사실 인간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왜, 너무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회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번 회복해주셨을 때 그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땀을 흘리면 나중에 그 평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피를 흘려야하는 고통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속에서 깊이 몸부림을 치면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면서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월이 흘러가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덮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의 형법에도 공소시효라는 것이 있습니다. 7년인가 10년이 지나면 내가 범인이라고 나서도 못 잡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10년을 묻어두었는데 나중에 마지막에 그 10년 후에 하나님 앞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딱, 그 문제 앞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해결을 받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이 배 밑창에 내려가서도 깊이 잠이 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결국은 죄악의 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렇게 깊은 잠이 든 것처럼 우리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었을 때 이런 깊은 잠에 빠져서 우리가 이렇게 죄악 중에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죄악 중에 평안함은 결코 우리를 궁극적인 평안함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선장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는 놈, 자는 자여, 어쩐 일이냐.” 우리 성경에는 “자는 자여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에게 구하라.” 히브리 성경에는 이것을 “일어나 네 하나님께 부르짖어라.”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봐도 이것은 지금 그냥 이렇게 편하게 있을 상황이 아닌데 태평하게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무디어지니까 큰 풍파가 일어나서 배가 깨지게 되었는데 될 때가 되라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험한 사람에게서 잘 나오는 말이 될 때로 되라지, 나도 몰라. 되는 대로 살지, 이런 말을 입에다 달고 삽니다. 이런 큰 풍파를 만나게 될 때 요나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장에게 윽박지름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너 누구냐. 선지자가 물어봐야 하는데, 너는 웬 놈이냐. 주 하나님을 믿어야 되느니라. 이럴 권세를 가진 선지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 불순종하게 되니까 이 어찐 일이냐.
바울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큰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니까 사람들이 이 어찌된 일인가 하면서 막 불안해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을 것 같은 위기 속에서 벌벌 떨 때 걱정마라. 하나님이 생명을 해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분별력이 있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그렇게 폭풍 속에서 사람들이 이 어찐 일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폭풍이니 너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라. 그렇게 말할 사람이 오히려 선장과 사공들에게 윽박지름을 당하면서 이 어찌된 일이냐. 너는 누구냐?
여러분, 어제 한 이야기가 여기 그대로 정답이 나옵니다. 두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세상을 지배하며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않고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하나는 세상 밖으로 나가서 그 좋은 영적인 권위를 모두 잃어버리고 짓밟히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살아가는 것, 딱 두 가지 길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그 둘 중에서 요나는 불행하게도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을 받습니다.
선지자의 영광을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수많은 백성들이 말했습니다. 역사의 밤이 어디쯤 왔는가. 우리나라에 이 커다란 환란이 무엇 때문이며 앞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어찌되겠는가 하고 물을 때 선지자들은 너희는 내게 귀를 기울이라. 말합니다. 너희가 오늘날 환란을 만나는 것은 너희 죄악 때문이요, 너희가 오늘은 포로로 끌려가나 70년 후에 너희를 돌이키시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와서 폭풍이 일어나는 이유도 이게 어찜이뇨? 물었을 때 요나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틀림없습니다. 눈을 껌벅껌벅 하면서 나도 몰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맛을 잃은 소금 ,하나님을 잃어버린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면 이정도로 큰 폭풍이 만약에 니느웨이로 일어나는 길에 일어났다면 이 성경에 틀림없이 나왔을 말이 한 구절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 요나에게 두 번째 이르시니라. 요나야 이 폭풍은 어찌어찌하여 이것이 일어나게 되었느니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관계가 끊어지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나가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깊이 통회자복하고 물고기가 바닷가에 토해놓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니까 즉시 두 번째로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통되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일 년 동안에도 그런 분이 있었지만 가끔 그런 분이 있습니다. 열심은 특심인데 철야하고 싶어 하고, 기도하고 싶어 하고 그러는데 늘 그분을 보면서 받는 인상은 아닌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도가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철야를 해도 좋습니다. 매듭을 먼저 풀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목청이 큰가. 통성기도의 능력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그렇게 부르짖기를 원한다면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그것을 안 풀고 아무리 부르짖고 금식을 해도 배만 고픕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가. 물으십니다. 그럼 김이 빠지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 애야, 다이어트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있어야지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결국은 부르짖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볼 때 결국은 요나가 이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딱 다시스 가는 배를 타고 기도를 안 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기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다시스로 가야지 되는데 니느웨이가는 배를 타야 할 사람이 다시스로 가는데 기도가 될 리가 있나,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꼭 다물고 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어라. 그러면서 혹시 하나님이 그런데, 이 하나님이란 말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혹시, 심히, 무슨 이야긴가 하면 이 사람들은 다신론자들이니까 너는 너희 신에게 우리는 우리 신들에게 기도하면서 합하면 더 빨리 들어주지 않겠는가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웃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라. 결국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그들이 당시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방법을 택해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제비로 뽑는 방법이었습니다. 사도들을 세울 때도 제비를 뽑습니다. 성령이 이 땅에 편만하게 오셔서 신약 때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지도하시기 전까지 고대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던 방법이 제비였습니다. 그러니까 아간의 경우를 찾아낼 때도 제비로 찾아냅니다. 그런데 그 제비를 뽑는 이는 사람인데 깊은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이 간섭하셔야 할 경우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 제비를 뽑는 방법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무슨 물건을 놓아놓고 그리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할 때 손을 집어넣고 제비를 뽑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이런 방법을 택했습니다. 뽑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뽑아서 상관이 없는데 요나에게 딱 가서 걸린 것입니다. 누가 간섭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셨습니다. 그를 토해놓게 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게 하자. 하고 제비를 뽑았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이 배를 타고 다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점에서는 이런 풍랑이 일어날 수 없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상식을 깬 폭풍이 지금 오는 것입니다. 상식을 깬 폭풍이 지금 오는 것은 그것은 분명이 거기에 하나님의 뭔가 부르심, 그러니까 뭔가 신적인 간섭이 있다는 것을 신앙이 없는 사람도 감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만 몰라. 예수 믿는 사람이 무디어지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미련하게 변합니다. 더 강퍅해집니다.
이 상황에서 제비를 뽑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 재앙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폭풍이 아니라 큰 재앙이다. 이것은 뭔가 이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는데 이 속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뭔가 하나님의 신이면 신이 신적으로 간섭을 하셔서 지금 우리에게 이런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이게 원인이 누구 때문인가, 하고 제비를 돌렸는데 요나에게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처음에는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넓은 품으로 내버려두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가 탄 바다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는 요나가 탄 배를 지켜보십니다. 그 다음에는 요나를 토해놓으라고 폭풍을 집어던지셨습니다. 배가 거의 깨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요나를 내어놓지 않고 그때는 요나가 빨리 나와야 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에 있사옵나이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튀어나오면 되는데 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번에는 더 좁히시는 것입니다. 어디로? 선장으로 하여금 요나를 찾아가게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위기에 있게 되니까 그때 더 좁히십니다. 그것은 제비로 꼼짝 못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 번에 너! 이렇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시면서 다가오십니다. 그럼 생각해봅시다. 왜 하나님이 복잡하게 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손가락을 보이시면서 너! 나와 이렇게 하시지 않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깨닫고 인격적으로 결단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데 어느 우리나라에서 저명한 인사였는데 초빙강사로 우리 신학대학원에서 불렀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교회에서 특강을 하시는데 워낙 저명하신 분이니까 한반에 500명 정도 들어가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강의를 할 때 껌 씹는 것처럼 보기 싫은 것이 없는데 한사람이 껌을 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뱉으라고 교수님이 그러면 되는데 ‘껌 씹고 계신 분 나가십시오.’ 그러니까 아무도 안 나가니까 나가십시오. 가만히 있습니다. 너 나가면 되는데, 안 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지금은 현재 껌 씹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누구 한사람이 씹고 있었는데 이미 뱉었습니다. 나가십시오. 안 나갑니다. 다섯을 셀 동안 안 나가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싸는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넷, 까지 안 나가다가 다섯, 하니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데 제 친구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한 번에 배 밑창에 뚫고 들어와서 너! 나가 멱살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안 나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 정말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을 다루어 주리라고 기대를 한다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렇게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실 대면할 가치도 없는데 너 그럴 수가 있어. 그러시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냥 포위망을 좁히시면서 환경을 보며 하나님을 생각하라.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한 후에 네가 인격적인 결단을 내리고 내게 나오라. 이것을 원하십니다.
더 재미있는 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요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갑판으로 올라오게 하시고 훅! 불어버리면 바다에 떨어트려도 되시는데 언제까지 기다리십니까? 요나가 이 사람들아 나를 바다에 던져버려. 차라리 죽여, 나는 하나님 앞에 잘못했어. 나를 바다에 던져버려. 이럴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요나가 마지막에 불순종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회개하기까지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멱살을 잡는 주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내모시는 주권이 아닙니다. 나와라. 거기에 있으면 안 된다. 나와라. 하나님이 나와, 나와 이렇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주먹이 멀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이러시다 다음에는 가까이 가십니다. 제미 없습니다. 그런데 점점 포위망을 좁혀 가시는 것입니다. 큰 바다. 그 다음에 작은 바다. 거기에 한 배, 그리고 그 배를 흔듦, 사람들이 그에게 가게 만드시고 마지막에 제비를 뽑게 만드시고 그 다음에 딱 당해서 결국은 그 제비를 통해서 요나가 모든 폭풍의 원인이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자기를 지금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하고 이유를 대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아직 평안할 때 아직 배를 타고 있으니까 잠시 후에 하나님이 바람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배가 흔들리고 있습니까? 그 흔들리는 것이 자연적인 흔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흔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흔들리고 누군가가 와서 여러분에게 와서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이게 다 사공들입니다. 정신 차리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렇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다 사공들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공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도 못 깨달으니까 발람 선지자를 나귀를 통해 깨닫게 하신 것처럼 하도 깨닫지 못하니까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안 되면 믿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당신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는 게 경고 없이 재앙이 오거나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환란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고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결단할 수 있도록 길을 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게 바로 그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것과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자기와의 관계를 저버리고 그리고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 그러면 남는 것은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각오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새끼, 나쁜 놈,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만나면 내가 죽여버릴거야. 이런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멱살 잡혀 나오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 멱살을 잡으십시오, 차라리 저는 그것을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접어든다면 접어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부르심에 대해서 무디게 계속 살아가면 두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포위망을 좁히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불순종할 때는 이상하게 집안에 경제적인 어려움만 왔었는데 옛날부터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개겨보자. 이러면 그 다음에 건강의 문제가 옵니다. 그래도 의사가 날지도 모른다고 그랬어. 하고 또 개기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건드리십니다. 자식이 뭐 다 그런 것이지. 그러면 포위망이 더 좁아집니다. 그러면서 계속 포위망이 좁혀집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탁! 살래, 죽을래. 그 자리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결단을 할 때까지 하나님이 끊임없이 말씀을 보내시고 기다리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년에 23편을 설교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결단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런 성품을 오해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홀대합니다. 아, 삼천포로 빠져도 하나님은 못 건드리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결단입니다. 그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미적미적하면 포위망이 점점 좁아집니다. 결국 마지막에 벼랑 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일, 포위망이 좁혀질 때마다 나만 좁히면 괜찮은데 좁혀질 때마다 피해가 속출합니다. 제비를 뽑아서 요나에게 당할 때까지 배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배하고 생명을 제외하고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한번 포위망이 좁혀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포위망 내에 들어가는 것을 쓸어 가십니다. 제물을 쓸어갑니다. 그 다음에 가족을 쓸어갑니다. 건강을 쓸어가고 명예를 쓸어갑니다. 그러면서 좁히고, 좁히고 그리고 마지막 끝까지 생명만 남겨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것도 말을 안 들으면 그것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병든 몸을 가지고 이끌고 나와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화: 어느 신앙이 좋은 장로님이 방앗간을 하시는데 사업이 잘되어 번창하면 서 처음에는 6일 동안 방앗간 운영을 하다가 너무 잘되니까 주일날도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처음에는 종업원들에게만 맡기고 그러다가 나중에 는 주일날도 출근했다가 급히 교회에 가고 하면서 마음이 방앗간에 빼 앗겨 하나님을 섬기는데 소홀하다가 결국 방앗간 피대에 발이 끼어 다 리를 한쪽 못 쓰는 경우가 되었다 그렇게 된 후에 뻐정다리라는 별명이 생겼다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막판에 코너로 몰고 가서 결국은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신다는 내용)
여러분, 하나님이 절대 우리가 죄악에 깊이 빠졌을 때 하나님이 그 죄의 수렁에서 건져내시거나 문제의 수렁에서 짠! 하고 나타나셔서 해결해주시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다른 곳에 가셔서 기대하십시오. 기독교에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번지를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칠지 모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복주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없이는 그것이 없습니다. 울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믿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믿으면 안 될까요? 늘 말씀드리잖아요.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믿음도 있는 것입니다. 믿어도 안 돼. 부르짖으라고 그러는데 그럼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아낌없이 내 자신을 드리면 안 될까요? 그래도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막판까지 몰고 가서 결국은 마지막에도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 온 인격으로 그렇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밖에는 참된 인생의 행복이 없다. 그것밖에는 나에게 대안이 없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심령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코너로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 배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관심이 있었던 것은 오직 요나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요나 사이에 문제인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이게 하나님과 요나 사이의 문제인데 이 문제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귀한 재물을 다 잃어버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고통스러운 지경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제 앞부분을 3절까지 강해를 하면서 여러분, 요나에게 나타난 대표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가족 중에서 여러분이 유일하게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들이 요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 가족을 사용하십니다. 포위망을 좁혀 가시는데 그 피해의 대상이 여러분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예수를 잘못 믿는데 자식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빠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니까 엄마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니까 그 피해가 남편에게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예수를 잘 믿으니까 자식들이 복을 받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요나 그 한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포위망을 좁히시는데 수많은 피해가 나타나는데 이 피해는 하나님이 아랑곳 안 하십니다. 문제는 여기에 깔려있는 수많은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요나를 찾아서 사명의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쓸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한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자식도 데려갑니다. 부모도 데려가고 사업도 무너트립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막 무너트립니다. 죽음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코너로 몰고 가십니다. 그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이 더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한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에 충실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한자리에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만약에 여러분들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가장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다윗의경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구조사를 했는데 왜 왕이 인구조사를 하라고 해서 한 7만 명의 사람이 온역으로 하루아침에 죽어야 됩니까? 대표성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의 가장은 주민등록에 등록되어있습니다. 영적인 가장은 하나님의 주민등록증에 등록되어있는데 이것은 연령층도 아니고 남자 여자의 신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 그 사람이 순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와 가정을 굳게 지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포위망이 좁힐 때마다 피해가 속출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피해가 복구불능의 피해로 발생합니다. 돈은? 벌면 되는데 그런데 부모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하나님께서 자식을 데려가셨습니다. 어떻게 돌려줍니까? 돌려줄 수 없습니다. 이런 피해도 기꺼이 속출시키면서 하나님이 좁혀 가십니다.
(예화: 신학교에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을 뵈면 느끼는 점이 깡마른 교수님이 라고 느껴졌다. 그런데 신학교 교수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보다 분석하고 비판하고 도전하는 정신이 자리 잡 고 있어 깨어지지 않은 정신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어린자녀를 데 려가시자 통곡하며 관을 붙들고 ‘애야 어디로 갔느냐’ 하며 우는 그 모 습이 죽음 이후에 영원한 안식이 있다고 가르치는 학문과 맞지 않는 모 순된 모습이었다는 내용)
하나님은 우리 하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따라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하여 아까운 것이 없다.’ 우리에게는 남편이 귀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남편이 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식이 귀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누가 제일 귀합니까? 요나. 내가 가장 귀한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워놓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돈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은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놓고야 하나님께서 만족을 하십니다. 할렐루야! 이게 바로 은혜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져야 하는 책임입니다. 이것을 회피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순종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하나님은 기필코 찾아내십니다.
인공위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동해바다에다 신문지 두 장 합쳐놓은 것 만한 쇠판대기를 띄우면 그게 인공위성에 잡힙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모스코바 광장에서 소련신문을 읽고 있는데 첩보위성이 잡으니까 신문에 기사가 읽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인간의 인공위성이 찾아내는데 하나님이 온 천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지중해가 아니라 대서양, 인도양, 바다 끝에 가서 첩첩산중에 둘러싸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세우기 위해서 포위망을 좁혀 가시는 것입니다. 포위망이 어디까지 왔습니까? 아직까지 견딜만하십니까?
그렇게 요나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잘못하면 죽어가게 생겼습니다. 그 핏 값을 어떻게 갚으려고. 왜, 여러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듭니까? 왜, 여러분들의 가족들과, 이웃들과, 여러분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을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렇게 모든 이웃들에게 문제를 던져주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들의 좋은 것을 앗아가고 행복을 무너트리고 이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오히려 문제가 잇는 곳에 유일한 대안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와의 관계가 끊어진 곳에 회복을 가져다주고 평화를 잃어버린 곳에 샬롬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런 화목을 창출해내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먼저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셨고, 남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듣게 하셨고, 남에게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요나라면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오늘 이 요나와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누가 여호와 앞에 선 사람이 있었습니까? 여호와 앞에서 그 우렁찬 음성을 들어본 사람이 있었습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배에 탄 누구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기이한 세계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 니느웨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보여주시고 그 계시를 받았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보다도 가족 중에서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먼저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다면 여러분들처럼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신 분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여러분들처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사명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제비는 요나에게 당하였고 사람들은 드디어 모든 시선을 요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의 근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 재앙을 설명해달라고,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는가. 제비가 너에게 당했는데 도대체 네가 결국은 이 모든 폭풍의 원흉임에는 틀림없는데 왜 그런가? 너밖에 설명할 사람이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 세상으로부터 또 환경으로부터 시련과 폭풍의 바람을 만날 때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 답을 갖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 고통이 나 때문입니다. 이 결론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사업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까? 동업자를 원망하고 있는 한은 해결의 길은 아직 멉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은 남편을 원망하고 있습니까? 아내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이 가족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여러분들의 기도는 하늘에 오르지 못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답은 그게 아닙니다. 주님, 내 남편 무능합니다. 어쩌라는 것입니까? 다 무능한지 알고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언제 일어나는 일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대의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다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이제는 완전히 죽일 관계가 된 것입니다. 애가 그랬데요. 하면서 애들 말로 표현하자면, 애가 그랬데요. 하나님이 너는 왜 그랬니. 제가 그랬데요. 그러면서 가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란 말인지,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제 때문이래요. 다 아십니다. 뱀이 그랬데요. 하나님이 지금 그것을 몰라서 왜 그랬느냐. 아담에게 물어보고 조금 있다가 하와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그것을 알려주어야지 아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답은 그게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대답이 안 나오니까 할 수 없이 에덴동산을 떠나는 비극이 뒤따르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기꺼해야 애 때문입니다. 하는 대답을 가지고 있는 한, 대답을 바꾸기 전에는 기도도 소용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사실은 무지하기 때문에 너무나 쓸데없는 신앙적인 전력을 필요 없는데 소비해버립니다. 대답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응답을 위해 헌금하고 용한 사람 다 찾아다니면서 안수기도 받으면서 문제에 대한 대답은 애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애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애한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요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정답은 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 껄끄러우면서 고통을 당하고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가족들도 많고 이웃들도 많습니다. 평화스런 관계들이 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애 때문이래요. 하는 이런 식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 한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하나님이 제비를 요나에게 당하게 하시고 결국은 요나 앞에까지 오게 하셔서 결국은 그 요나에게 제비가 당하게 하시고 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해보라. 그 설명에 대한 대답을 항상 가지면서 살아야 할 사람이 요나였습니다. 오히려 왜 폭풍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어야 할 사람이 이 사람이었습니다. 폭풍이 일어날 것을 예견해줄 사람이 요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버리니까, 이탈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되니까 마지막에 이런 상황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말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일수도 있고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가난 때문이래요. 아니면 내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면 이런 집안에 시집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면 내가 낳은 자식이 잘못되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러분들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일차원적이 대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알고 있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답은 그게 아닙니다. 문제는 폭풍이 왜 일어났는가. 바람이 불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는지 아니 바람이 불지 않고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바람이 부니까 폭풍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답은 그게 아닙니다. 폭풍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는데 왜 하나님이 그 폭풍을 보내실 수밖에 없었는지 그 대답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신앙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께로 돌아갈 가망성이 있는 사람들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나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되겠네요. 그전에 거쳐야 할 절차가 있는데, 왜 이렇게 복잡한가. 여러분 온 길이 얼마나 복잡한 길을 걸어서 왔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유턴을 하려고 해도 복잡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나요. 하는 대답을 원하시는가. 정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전심으로 추구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이야기는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고 추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리고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의 은혜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상황이 어찌된 일인가 할 때 제 때문이래요. 하는 사람은 그 대답을 통해서 뭘 보여주는가 하면 전심으로 하나님 한분을 과녁처럼 추구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지 않음을 그 말로서 입증해주고 있기 때문에 해결로부터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업이 휘청거리면서 무너질 수 있는 것, 남편이 판단착오로 그럴 수 있고 동업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엇 그제 어떤 교회에 갔더니 부인이 남편 모르게 돈 놀이를 해서 7-8천만 원 빚을 졌는데 남편은 2천만 원 밖에 모르니 큰일 났습니다. 그리고 돈이 달러로 불어간다고 합니다. 아니, 요새 세상에 달러가 있다는 것은 그 동네 가서 확인했습니다. 하루에 자고 일어나면 백분의 일씩 이자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백만 원을 빌리면 만원씩 이자가 늘어납니다. 석 달 십일 만에 원전하고 똑같아진 것입니다. 그 돈이 굴러간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애 때문이래요. 하는 대답을 가지고 있는 한, 물론 그런 것이 그럴 수 있습니다. 부인을 잘못 얻었고 또 부인이 잘못해서 돈놀이를 해서 가정이 파산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차원적인 답이고 하나님은 그게 틀리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이 사건이 왜 일어나는지, 폭풍이 왜 일어나는가. 바람이 불어서. 그것은 일차원적인 답이고 그럼 왜 하나님이 바람을 다른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에만 바람을 보내셨는가. 거기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습니까?
왜 여러분, 때로는 교회가 그 시련 가운데 지나고, 가정이 폭풍 가운데 지나고,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된 것 같은 도움을 받을래야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 같은 골짜기를 지나야 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여러분 아직도 제 때문이래요. 이런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고 사명을 받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뒷쪽 넘어가면서 많이 들리지 않아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요나처럼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면 가정에서도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나서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여, 이 고통을 기억하여주옵소서, 해결해주시옵소서, 하고 집에 가서 멱살잡이하고 싸우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먼저 많이 받은 사람이 견디고 참고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거 안 받고 문제 해결을 받기를 원합니까? 안 됩니다. 뭘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참을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 내 마음대로 안 움직여주는 남편, 아내, 내 자녀를 보면서 분통이 터지고 복장이 터질 때 ‘하나님이 다시스가는 배를 타기까지 하나님이 이러시겠다.’ 생각하면 됩니다.
돈 들고 선창가에 가서 배표를 살 때 모든 사람의 마음이 편하고 바다도 편안하고 자기도 편안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순풍에 돛달고 갈 때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요나가 선창가에서 갈매기 구경하면서 아이스크림 먹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은 가슴을 치시고 계셨습니다. 요나야 네가 어쩌려고 그러는가. 그러다 바다를 쳐다보는 것도 진력이 나니까 이제 배 밑창에 가서 자자, 그리고 평안하게 잘 때도 하나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셨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걸어왔으면서 그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조금 맛보기로 보여주셔서 내 마음을 한번 알아달라고 그러시는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관계를 돌이키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누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희생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는 해결이 안 됩니다. 될 리가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것들을 각오하면서 심지가 견고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해결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바라고 싶은 게 그런 것이 아닙니까? 자식이 속을 썩이면 어느 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오니까 하나님이 뿅! 해서 자식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고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면 여러분 간증이 많이 생길 것 같을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영원히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여러분들이 돌아오면 참는 것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애 때문이래요. 그 대답을 하고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도 안다. 또 울면서 애 때문이래요. 나도 안다, 다른 대답이 없는가. 애 때문이래요. 몇 번 하다가 보면 가슴이 이제 한이 맺히는 것입니다. 저 원수! 사랑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저 놈의 원수! 하면서 가슴에 칼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살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해결이 되겠습니까? 이제는 죄가 쌓이면서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다가 이제는 삼천포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올 길이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 서서 정말 죄악의 길을 가다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서 정말 감격하는 이런 일들이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참답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런 놀라운 그 이상한 일들이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불순종한 대가들을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그 모든 잘못된 관계를 돌이켜 놓기 위해서 희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멈칫멈칫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가만히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도 스톱하시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은혜 받을 때 다시 시작하면 좋겠는데 아닙니다. 쉬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켜 놓고자 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입니다. 한번 포위망이 좁혀갈 적마다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으면서 재산이 날아가고 가정이 무너지고 회사가 무너지고 자식들이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좁혀 가십니까?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께서 계속 좁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그러나 영원히 참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좁히다, 좁히다 끝가지 안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흔들어버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선지자가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바다에 폭풍이 일어날 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 때 오히려 많은 사람들 앞에 너희는 안심하라. 이 풍랑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설명해주어야 할 사람이 그 모든 선지자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삼등칸 배 밑창에 쭈그려 앉아서 그 무식한 뱃사공들이 와서 뱃놈들이 와서 야, 이게 어떻게 된 것이나. 따질 때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면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여러분, 요나의 위치를 여러분들이 만약에 버리고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은 점점 불행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함께 하고 있는 그 모든 공동체가 계속해서 함께 불행해집니다. 왜 그런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가십니까? 여러분, 내가 말씀드리잖아요.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내가 이해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결국은 이렇게 닦달을 당하게 되었을 때 물었던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네가 누구냐. 생업이 무엇이냐. 어디에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집요하게 그 이상한 근본을 묻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러 가고 있는가? 이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생업이 무엇인가, 어디에 속했는가, 고국이 어딘가? 쉽게 얘기해서 너의 정체가 무엇인가? 여기에서 요나가 녹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네가 도대체 정체가 누구냐, 웬 놈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네가 웬 놈이기에 하나님이 너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광풍을 주시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평범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제일 먼저 은혜를 주시고 남다른 은혜를 주셨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통 사람처럼 섞여서 살고 싶다.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하십니다.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별하게 산다고 해서 장로가 되어야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가슴을 저미는 슬픈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모두들 돌아가고 비어버린 하나님의 성전을 끌어안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긍휼히 여기사 주의 영광을 나타내신 거룩한 부흥을 주시도록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몸부림을 쳐도 보통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수색해내십니다.
가족 중에 여러분이 먼저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스스로 영적인 가장의 지위를 포기하려고 애를 쓰려고 해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신 것 도로 가져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은혜는 거두어갈지 모르지만 사명은 거두어가지 않으십니다. 결국은 직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요나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분명히 그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그의 귀에 또렷하게 들을 수 있도록 너는 니느웨이에 가서 그들을 쳐서 외치라. 이렇게 말했는데도 덜렁덜렁 말씀할 때는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다가 덜렁덜렁 표를 끊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선창에서 매표소에서 표를 사는 그 순간만이라도 여기서 고백하는 거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그 이스라엘 백성 중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불러주신 신앙고백을 한번만 되뇌었어도 돈을 내밀면서 어디요? 라고 할 때 다시스요 라고 대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자식들이 속 썩이고, 부인이 속 썩이고, 남편이 속 썩여 멱살잡이를 하더라도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서 이 상처 많고 문제 많은 가정과 사회에 교회에 해결자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지’ 하는 생각을 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렇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목회자가 여기서 설교하면서 우리 교회는 또 특이한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만약에 그 속에서 어떤 마음의 고통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목회자가 뛰어나와 그때마다 멱살잡이를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참아요? 우리 교회니까 참아야 합니다. 왜 사명이 따로 있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참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자꾸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 그게 무슨 사도냐? 열두 사도에 속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사도냐?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누가 아는가? 그러니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사도된 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이렇게 참는 것을 보라. 그리고 두 번째 이적을 행한 것을 보라. 내가 진짜로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명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참을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참고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한다고 하는데 처음서부터 시종일관 하는 이야기가 제 때문이래요. 주님, 저 놈을 뜯어고쳐주시옵소서, 그것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도 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대답을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선지자가 질문 앞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네가 누구냐? 아, 얼마나 놀랍습니까?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하나님이 불순종해서 니느웨이로 안 가고 다시스 가는 배를 타고 상당히 먼 곳으로 갔고 폭풍이 일어났고 배에 짐을 다 들어냈고 배가 깨질 것 같고 선장이 배 밑에 누워 자고 뱃사공들이 와서 따지고 제비를 뽑고 하는 가운데 굉장한 시간이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표현으로 말할 때 요나를 볼 때 얼마나 많이 쌓였겠습니까? 우리가 말 안 듣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많이 쌓였겠습니까. 이게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대뜸 하는 말이 너, 정말 이럴래. 하나님이 그러시면 간단합니다. 우리가 그 입장이라면 그렇게밖에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 정말 이럴래? 좀 더 험악하게 말하면 너 죽을래?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공들을 통해서 물으시는 질문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무슨 이야기입니까? 환경과 사정과 여건을 다 바라보면 우리들이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문제 속에만 쌓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아까 초두에 말씀드린 것도 바로 인간적으로는 백번 이해가 갑니다. 내가 봐도 그렇게밖에 못 살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나 우리가 누구냐고 하나님이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요나는 오늘 네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두 번째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다. 이것은 뚱딴지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순종하면서 배 밑창에 들어가서 죄악의 잠을 자면서 평안하게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면서 잘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지금은 죄악의 잠이 들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름을 받고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은 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죄악에 빠져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순풍의 돛을 달고 다시스로 갈 때 풍랑이 일어날 때도 그는 자기가 누구라고 하는 의식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문제가 일어나고 고통하면서 하나님이 포위망을 좁혀 오고 결국은 우리 한 사람을 지목해 부르면서 너는 내 앞에 결단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속에서 우리가 멱살잡이하고 싸우고 애 때문이래요. 하면서 악악거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나! 요나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문제가 많은 곳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은혜를 주신 사람입니다. 나, 아니면 해결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날 통해서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거기에 나를 두셨는데 그 대답이 내가 누구냐고 물을 때 항상 주님, 저는 주님의 음성을 먼저 들은 자로서, 말씀이 임하게 하신 자로서, 하나님이 소명을 주신 자로서 하나님과의 바르지 못한 관계 속에서 심판을 앞두고 있는 니느웨이를 고쳐놓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던 요나와 같이 망가진 우리 가정에 무너진 우리 교회에 깨어진 이 세상에 하나님과의 화목의 다리를 놓기 위해서 치료자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입니다. 이 고백을 하면 어떻게 멱살잡이를 하면서 애 때문이래요 하고 그리고 그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해결의 길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는 네가 누구냐?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이게 어떻게 보면 새빨간 거짓말이 아닙니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여호와의 낯을 바다로 배를 타고가면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하나님의 바다요, 하나님의 하늘이라고 그러면서, 신앙 속에 묻혀있는 불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다. 고백했는데 이 말을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고백을 할 때 이것은 과거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지금은 불순종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으나 사실 내 본분은 히브리 사람이요, 하늘과 육지를 모두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난사람이다. 자기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문제가 많은 시련 속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확인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은 확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확인하면 그 확인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갈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자신을 여길지어다. 무슨 뜻입니까? 죄에 대해서 죽은 자처럼 생각하라. 자기가 누구인지 신분을 깨닫게 되면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애를 씁니다. 신분을 망각하면 이제 자기가 마땅히 행해야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하면 안 될 그런 일이 막 생각납니다. 한번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봉고차를 몰고 가다가 옆에 차가 새치기를 하니까 창문을 열고 못된 놈의 자식아, 하면서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는 잠시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목회자라는 신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문을 닫고 보니까 권사님, 장로님이 앉아있는데 옆에서 장로님이 목사님, 잘하셨습니다. 자기의 신분을 잊어버리면 막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삶에 있어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 가운데 물먹듯 마시면서 그렇게 막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한번쯤 그렇게 살아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혹을 받을 때마다 고개를 젓게 만드는 신원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 즐거움을 버리고 그리고 진짜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닌 이런 삶으로 들어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어제 설명했듯이 하얀 승용차에다 스키 케리어에 스키 달고 150만 원짜리 스키복을 입고 그리고 신나게 끝발 날리는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스키장을 향해 모든 사람이 같이 가자고 유혹할 때 고개를 흔들면서 후줄근한 성경찬송을 들고 화장실 앞을 지나서 지하실 교회로 내려오게 만드는 그 힘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니까 나는 그렇게 살수 없는 사람이야. 주 없이 살수 없는 사람이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결국은 요나를 돌이키고 회개시키기에 앞서서 우리는 회개부터 먼저 하려고 합니다. 회개가 아닙니다. 깨달아야지 뭘 잘못한 것을 알지, 깨달아야지. 회개는 하는데 말씀은 안 들으려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졸고 기도하는 시간에는 눈물을 흘리고 찬송 부르는 시간에 또 뜨겁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먼저 회개시키기 전에 먼저 요나로 하여금 신분 확인을 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누구의 입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까? 누구의 입으로? 자기의 입으로 토설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지자가 지금 뱃놈들 앞에서 제가 누구입니다. 하고 취조를 받을 사람입니까? 이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어디로 담대히 가면서 오히려 너희가 누구냐. 너희 역사의 밤이 어디쯤 왔는가? 너희의 민족이 이렇게 계속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너희를 어찌하시겠는가. 너희가 이제 하나님께로 돌이키겠는가.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돌아서겠는가. 이렇게 촉구를 하고 추궁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니까 지금 후줄근한 뱃놈들에게 추궁을 당하면서 모퉁이에 몰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적인 권위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다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면서 살아가면서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앞에 나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해결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귀를 기울여서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힘든 일들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 남에게 안 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을 그들에게 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 구했다. 그렇게 고하실 때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막 떠드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2절까지 가려고 하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가서 오늘은 10절로 마치겠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결국 요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선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싹트는 무모한 생각은 담대함입니다. 주 없이 잘 살았습니다. 자기 길을 잘 선택할 수 있다는 사람들, 극상황이 여기까지 몰고 왔습니다. 요나는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셔서 단번에 배 밑창을 드러내시고 요나를 집게로 집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서서히 좁혀가셨습니다. 한번 풍랑이 일기 시작할 때 배 간판으로 뛰어나오면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여 요나가 여기에 있사옵나이다. 주여! 내가불순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면 이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의 위협을 안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물건을 바다 속에 집어넣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옵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여러분들이 요나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포위망은 좁혀지고 그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회복될 수 없는 피해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 하나를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손 때문에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 그 많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주인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습니다. 그 열매를 후손에게까지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고통을 시련 속에서 살아갑니다. 해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오시면 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오시는 것입니다. 밤낮 애 때문이래요. 하고 남을 원망해봐야 해결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여기에 있사옵나이다. 제가 어찌할 수 없나이다. 고백하고 포위망을 더 좁히지 마옵소서, 이제는 나를 살리시옵소서. 내가 이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어떻게 내가 니느웨이로 돌아갈 수 있겠나이까.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무슨 짓이든 하겠나이다. 그렇게 손들고 나올 때 하나님께서 배보다 더 훌륭한 물고기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요나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물에 던져지면, 요나는 물에 던지라고 그럴 때 이미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이제 죽어야 되겠다.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어날 수 없는 방법을 예비하셨습니다. 니느웨이로 가는 배가 다시스 배가 옆을 지나가고 있을 때 요나가 물에 빠졌습니까? 아닙니다. 뒤웅 치는 파도의 소용돌이 밖에는 없었습니다. 죽음밖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날 던지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서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던졌습니다. 요나는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추리가가 하나님이 요나가 떨어지는 바로 그 밑에 그 요나를 삼킬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결국은 요나를 하나님이 그 파도를 헤치고 니느웨이로 갔다가 토해놓게 하실 것을 누가 감히 생각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합니다.
여러분이 볼 때 상황이 답답하고 도저히 뚫고 나갈 길이 없는 것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그렇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그 벽이 점점 더 높아져서 진짜 소망이 없어집니다. 왜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하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해서 우리를 완전히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서 환경을 보고 요만큼이라도 소망이 있다고 생각이 들면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그것을 의지하니까. 요나의 심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막판까지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을 주목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점점 철의장벽이 될 것이고, 점점 벼랑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무슨 개선이 있으리라 생각됩니까? 아닙니다. 우리 아들이 탕자의 길에서 돌아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남편이 손들고 오면 될 텐데. 아닙니다. 요나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 부인이 돌아왔으면, 아닙니다. 여러분이 요나인데 포위망을 좁혀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결단입니다. 무릎을 꿇고 주여. 이제는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밖에 보이지 않고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를 던져주었던 모든 환경들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상황까지 나아갈 때 그때 이 인격적으로 깊이 승복해서 주여, 이제는 죽음밖에 없사옵나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을 곧 바다에 던지는 것이고 이것은 곧 죽음이옵나이다. 그래도 아버지의 뜻대로, 그러면서 던져지는 일들이 일어날 때 여러분들이 인간의 눈으로 아무리 봐도 캄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캄캄한 문제 옆에 환한 해결을 이루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엘리사가 도단성에서 게하시가 아침에 일어나서 쳐다보니 사람들이 새카맣게 들러 싸인 것입니다. 그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 봤습니까? 정확하게 봤습니다. 해결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영안으로 봤습니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병거들과 하늘의 천군천사들의 병력이 그 둘러싸고 있는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병력이 문제의 해결이 문제는 두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해결은 백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깨어날 때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이제 아침 시간 딱 두 시간 밖에 안 남았습니다. 여러분, 피하지 마십시오. 회피하지 말고 끝까지 이 말씀 앞에 직면하면서 제발 좀 여러분, 개방하십시오. 여십시오. 왜, 여러분 자꾸 정답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꾸 시험하다가 결국은 여러분의 모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으려고 그렇게 합니까? 왜 안 듣습니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듣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니 여러분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주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