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1)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시 85:10)
녹취자 : 조원정
85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윤곽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는 내용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사실의 조화를 계속 이야기 하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고 그들의 죄 때문인데 왜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은총을 베푸셨는가 하는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을 9절 이하에서부터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는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분노하셔서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지만 구원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계속 탄원하는 노래가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옛날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다시 그들을 돌아오게 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들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곤란 중에 쳐했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해주셔서 다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 탄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역사에서 잊혀 지지 않는 두 개의 커다란 구원사건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포로로 살다가 해방된 구원의 사건과 특별히 홍해를 가르고 구원을 받은 사건, 두 번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이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하나의 징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9절에서 두 개의 상반된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하나님의 다시 베푸시는 자비의 근거를 하나님의 구원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를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10절이 나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두 가지 병행구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의와 화평이라는 말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두 단어가 서로 바뀌어 지면서 서로 X자 모양으로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하면 인애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허물이 있으면 덮어주고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어도 덮고 넘어가서 그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 주는 것이 인애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이 진리로 판단을 받지 않으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아닌지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작용들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분별될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져다가 비추면 너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너는 돈이 많을지는 모르지만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너란 인간은 매우 잘못되었다. 왜 그렇게 악한 생각을 하면서 사느냐? 진리의 말씀을 비추어 보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이 멀쩡합니다. 진리를 비추면 네가 얼굴은 예쁜지는 모르지만 마음 심보가 틀려먹었다. 그래서 너는 옳은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진리가 판단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진리는 냉정한 것입니다. 타협이 없는 것입니다. 칼날과도 같은 것입니다. 칼날이어서 칼날로 무엇이든지 치고 지나가면 베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럼 진리를 왜 그렇게 날카로운 칼같이 우리를 베고 지나가는 건데 왜 그렇게 진리를 좋다고 합니까? 그것은 진리가 비추어 질 때 책망 받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진리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똑같은 것입니까? 절대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진리에 스스로 합치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똑같이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로 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께 구원을 얻은 사람의 경우에는 의롭게 살아서 이미 얻은 구원을 다시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합당하게 살고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차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현저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와는 매우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진리가 치는 칼날처럼 되어서 언제나 진리를 마주할 때 아픈 것입니다. 진리가 언제나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진리를 자꾸 피하게 됩니다. 진리에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빛이 계속 비추지만 거기에 합당하게 살려는 진지하고 진실한 노력이 없으면 그 진리로 말미암아 계속 상처와 판단을 받지 그것으로 인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자꾸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가리켜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생각이라는 얘깁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환하게 비취는 아침 햇살, 쓰레기 소각장 있는 이런데서 먼지가 펄펄 나는 그런 아침 말고 숲속에 싱그럽게 새소리가 들리는 환한 아침에 창문을 열면 환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안질이 걸린 사람에게는 그 아침에 찬란한 햇살이 고역인 것입니다. 눈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맛있게 잘 요리된 한 접시에 맛있는 음식,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아귀찜 같은 것,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데 입이 헐어서 다 터진 사람에게는 고문입니다. 음식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질병이 그 좋은 것들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애와 진리는 함께 만나기는 매우 어려운 반대편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두 개는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그 두 가지가 언제나 함께 있어서 진리를 따라서 책망을 받아도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설교 시간에 너 잘한다고 계속 칭찬해 주는 설교가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서 그 말씀이 자신을 해부해서 자기가 몰랐던 죄를 보여주고 이렇게 고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회개가 나오고 거기에서 자신의 영혼이 고쳐지고 온전해지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맛입니다. 그런 아픔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만드는 것이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이고 성도가 누구인가 하면 진리의 맛을 안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빛이 멀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어거스틴이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면 육체와 영혼 중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진리의 빛이 비추면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를 올바르게 사랑합니다.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나면 나라는 존재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육체만을 편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인애와 진리가 멀리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끊임없이 원하지만 진리로 자신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것으로 체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와 함께 사는 성도에게는 항상 진리의 말씀을 통한 은혜의 정동이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애와 진리는 만나는 것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우리 안에서 만나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진리는 책망하지만 그 책망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이 상반된 사실이 우리에게 경험되기 위해서는 자기 바깥에서 먼저 하나님이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우리에게 짓이겨서 짓밟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우리를 고치셔서 다시 살리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인애와 진리를 조화시켜서 우리 안에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 안에서 진리와 인애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험 되어 집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고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더라. 거기에서 말하는 은혜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인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진리가 우리를 향해 갖는 판단을 보여준 것입니다. 진리가 뭐라고 판단합니까? 너희 모두 사형이다. 그것이 진리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심으로서 대속의 공로 때문에 우리와 다시 관계를 맺으시는 그 모습은 결국 구원으로 나타났는데 그럴 가치 없는 인간들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X자로 교차하는 이야기가 전개하고 발전시키는데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합니다. 지지난 주일에 의의 개념에 대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꽤 길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의는 율법에 합치하는 정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정의의 개념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 했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것입니다.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할 그 사람과 하나님이 평화로운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열망인 두 개가 함께 입 맞추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그 구원이 이루어지기전에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기 전에 하나님 마음 안에서 인애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춤으로서 이 일들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입 맞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무하고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하고 입을 맞춥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애와 진리를 만나게 하고 의와 화평을 서로 입 맞추는 그래서 이 두 개가 만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강령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진리가 너무 투철하고 정의가 투철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 막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인애와 화평이라는 명목 하에 진리도 밟고 정의도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는 사랑이 아니면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추구하는 정의가 아니면 그것은 참된 정의가 아니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