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좋은 것의 여호와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시 85:12)
녹취자 : 최희정A
이제 시를 12절과 13절에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12절에서 다루는 내용과 13절에서 다루는 내용이 각각 다릅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땅이 산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비슷하게 있죠. 추수 혹은 수확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 땅들이 많은 곡식과 그 수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겨 주어서 부유하게 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가 하면 13절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히브리어 성경에는 ‘선함’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모든 선을 우리에게 베푸시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하다, 악하다고 하는 것은 기준이 없으면 판단해서 그것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준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우리들의 소비 생활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어렵고 가난하고 이럴 때에는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을 죄악처럼 가르칩니다. 그래서 몽당연필에다가 볼펜 껍질을 끼워서 쓰고, 그 다음에 치약도 5밀리만 짜서 쓰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인제 나라가 어느 정도 살게 되어서 경제라는 것이 돌아가게 되면 그렇게 사는 것은 나라 경제에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소비가 미덕이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이 매체들을 동원해서 소비를 촉진시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결국은 인간이 정한 선, 악이라고 하는 이 구도가 얼마나 근거가 수시로 변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영원한 선악의 기준이 되는 근거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냐는 판단을 매우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대표적인 것이 법입니다. 법이 생물체라고 계속 진화하면서 변합니다. 지금과 30년 전의 법이 다르고, 60년 전의 법이 다르고, 90년 전의 법이 다릅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어떤 기준을 선과 악으로 악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도록 주시느냐 이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그 기본적인 선과 악의 판단에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의도하셨던 바에 부합하면 선이고, 그것을 거스르면 악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세월이 변하고 법이 변하고 해도 그 뒤에 있는 궁극적인 판단이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의 목적을 희미하게나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질서들이 있고, 그리고 그 질서를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인간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악하게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을 하나님은 아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충족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은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러고 새롭게 깨닫는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거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자신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계시고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나 자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같은 것들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기도 하고 알지만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선에 대해서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또 더 심각한 것은 인간 안에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함께 있습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가 악을 향해서는 자유한 상태에 있지만 선을 향해서는 노예의 상태에 있습니다. 부자유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선과 관련해서 수많은 무능력과 모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하고 보면 그러면 ‘여호와께서 좋은 것, 혹은 여호와께서 선을 주시나니’라고 할 때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은 모순이 없으시고 혹은 결함이나 무능하지 않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선하시고 그래서 당신 자신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정해 놓으신 목적도 선합니다. 그리고 거기로 모든 만물들을 거기에 합당하게 살도록 돌보고 인간들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혹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게 거스르며 살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되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산 결과를 인간들이 받게 됩니다. 그 때에 수많은 악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하나님이 악의 책임자는 아니시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 때에 경험하는 고통과 좋지 않은 많은 것들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도 모든 것이 계속 좋고 괜찮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의사표명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희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님 말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이 시편 85편에서도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하신 것도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율법을 주신 것도 그리고 주신 그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주신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 힘을 주신 것도 그들이 불순종할 때 책망하신 것도 책망한 후에 그들을 회개케하신 것도 회개하는 그들을 용서해 주신 것도 용서한 후에 다시 은혜를 베푸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의 결과다 이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했을 때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그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크기는 부모마다 다릅니다. 진짜 자식만도 못한 짐승같은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뭔가 나쁜 길로 빠지고 악하게 합니다. 근데 그 부모가 이 자식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서라도 이 자식이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근데 매우 실망스럽게도 악을 행했습니다, 이 자식이.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그 자식에 대한 그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매우 크게 마음 아파하고 자식을 향한 그 기대와 사랑은 자식이 행한 악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부모가 자식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악을 행했습니다. 감옥을 드나듭니다. 나쁜 짓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악을 행하며 삽니다. 그런데 부모가 마음의 커다란 동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무엇입니까? 관심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라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악하게 살아도 혹은 그 악의 결과로 고통을 받아도 그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듯이 아픈 것은 아닙니다. 그런가보다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을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용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이스라엘을 향해 한없이 크고 그리고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으로 녹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그 결과로 비참해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때려서라도 그를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오히려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그 부모의 그러한 분노와 그 다음에 마음 아픈 그 표현들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성숙하고 난 다음에는 아는 것입니다. ‘아 그게 그때 부모가 나를 때린 것이 진짜 보기 싫어서 나를 때린 것이 아니라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라 정말 나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내가 그릇된 길로 갈 때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면서 때리셨구나.’ 그걸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계속 불순종하면서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시련을 당하고 그 내적인 고통을 겪고 이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밖에는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모든 길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우리를 우리가 헛된 것들을 추구할 때에 우리의 마음을 허무하게 하는 것, 악을 행했을 때 고통스러운 결과가 오게 해 주신 것, 불순종할 때에 영혼에 고통이 있었던 것,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때리셨던 것.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때려서 우리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그 무한하게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그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난 후에야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가르쳐주는 교훈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뜻에서인지 그대로 해 줬습니다. 깨달음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렇게 마음이 들떠서 유산을 나누어 가지고 자기를 멀리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고 싶어하는 이 자식을 몸만 붙들어 두어서는 결코 진정으로 자기의 유업을 물려받을 만한 자식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이 자식을 고치기 위해서 아버지가 일부러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먼 곳에 갔습니다. 허랑방탕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못 깨닫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재물을 허비하고 당연히 친구도 떠났을 겁니다. 그리고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 이제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돼지 쥐엄 열매라도 먹어 보려고 하는데 그것조차 없어서 쓰러질 정도가 되었을 때 그 때에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풍족한 품꾼들이 생각이 나고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이 났고. 그게 바로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집나간 자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탕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버지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선한 것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모든 것은 말도 안되는 모순된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자신도 우리들이 당신을 거스르고 악하게 사는데도 무조건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을 주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린아이, 청소년밖에 안된 아이가 온갖 난잡한 행동을 하고 악에 빠지고 이 세상을 향해 갈 때 여러분들이 정말 그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냥 가만 내버려두면서 어떤 일을 해도 그 아이를 예쁘다고 하고 칭찬만 하고 그런 일을 계속 하라고 돈을 주고 시간을 주고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자식이 파괴되는 일인데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사랑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모든 선한 것에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 우리는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고 자신들의 불순종을 회고하면서 불순종한 사람들을 진노로 다루신 것도, 진노를 돌이켜 그들을 용서해주신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왔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
진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이렇게 노래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우리의 육신의 안목에 좋은 것만 주시는 하나님을 그렇게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노래할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거슬러 살 때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치시고 아프게 하시고 때리시고 고치시고 해서 결국은 우리의 의지로는 주님을 버리고 멀리 떠나려고 했지만은 결국은 하나님이 그 수많은 사연 속에서 우리를 때리시고 어루만지고 치셔서 올바르게 하셨던 그 모든 기억을 함께 가지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그 신실하지 못하고 악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사실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의 불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의 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의 불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 인간은 모든 좋은 것들을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부터만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반절의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더 말씀을 드리자면 그 뒤에 ‘우리 땅이 그 추수를 혹은 그 수확을 주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여호와께서 주시리니’, ‘내시리니’ 똑같은 단어입니다. 이건 결국 뭘 의미하냐면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며 사는 그것이 그 땅과 너무나 밀접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함부로 이야기하기에는 좀 어렵지만. 땅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그리고 주님이 보실 때에 그 땅에 공의가 현저하게 망가질 때 그 때에 땅에는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 나라라 할지라도 그 악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매우 크게 되면 땅들이 고통을 느끼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땅이 소산을 풍부하게 내지 못하도록, 땅이 충분한 소산을 내지 못하는 재앙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과 인간은 그야말로 신토불입니다.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얼마나 평화를 누리며 온전히 사는가에 따라서 땅의 상태는 현저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모든 세계의 운명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운명이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 후에 노아에게 은총을 약속하시면서 이 땅에 추위와 더위 그 다음에 자연의 모든 질서들이 회복될 것, 영구히 계속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도 바로 그렇게 인간의 운명과 땅의 운명이 얼마나 밀접한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락한 후에 이 모든 세계의 피조물들이, 피조세계가 탄식하면서 우리의 몸의 구속을 바라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이 온전한 구속을 받을 때에 땅에 맺힌 그 모든 저주와 모든 그 심판들이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의 모든 저주와 맺힘이 풀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노래하고 충만한 생명에 땅과 인간이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또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시고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에 이 땅에 있는 그 모든 산물들이 나와서 그래서 그것들이 인간에 의해서 누려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그 주님을 향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 믿음의 도리를 발견하고 근실하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어마어마한 부자 재벌로 만들어주신다는 것은 약속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손에 수고한 대로 먹고 이 세상에서 평안한 질서를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와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 선하심을 맛보며 사는 그 안에서 우리들의 인생에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주님의 선하심 아래 살아가도록 저희를 붙잡아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언제나 주님께 순종하고 의지하며 우리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선하심 아래에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