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우러를 때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 86:3-4)
녹취자 : 정유선
지난 시간에 2절을 해설하면서 ‘경건하다’라는 뜻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라는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자기 영혼을 보존해주소서’라고 했는데 여기서 영혼은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호소하면서 3절과 4절 이하로 아주 간절한 기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며 괴롭힘을 받고 있는지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때에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하는 호소였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은혜’ 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은혜를 내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감동시켜주시는 것, 이것이지만 외적으로 보면 은혜는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사태 속에서 자기의 힘으로 그 사태를 극복하고 사는 데 한계를 느낄 적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인 같은 경우는 지금 언제 이 시를 썼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시인을 치고 포악한 무리가 목숨을 노리고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가 아마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 쫓겼을 적에 지은 시라고 볼 수 있는 그런 구절들이 13절, 14절 이하에 나옵니다. 만약에 이 시의 저작 연대를 그때로 설정을 하고 시를 생각해본다면 사울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돕는 자가 없습니다. 홀로 도망을 다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부어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비록 하나님이 버리셨는데도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깊은 존중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이려고 사람들을 보냅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으로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망 다니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해달라고 하는,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개념은 내적으로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의 감화를 주셔서 이 고난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뜻이 되지만 외적으로 적용을 하면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사울왕의 집요한 추격으로부터 자기를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의 옷을 조금 베고 그의 물건을 훔쳐 온 것에 대해서 뉘우칩니다. 주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자기가 한 것을 깊이 뉘우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하게 할 때 나도 악을 행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멸시할 때 나도 그 사람들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바라보는 인생의 사태와 신앙이 없는 사람이 바라보는 인생의 사태에 무슨 차이가 나겠습니까. 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기도의 간절함을 두 가지로 표현을 하는데, 하나는 ‘종일 부르짖나이다’ 시간과 관련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가운데 하루 종일을 보내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뭘 의미하냐면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형식적으로 나온 기도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소원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주 열렬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열렬하게 기도하고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열렬해 보여도 그 기도가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사로잡고 있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기도 중 많은 부분들은 형식적으로 하게 되고 기도를 하고도 우리들이 그 기도를 했는지조차도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을 해주셔도 우리의 마음속으로 응답된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들을 놓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시인은 마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시지 않으시면 이 삶의 사태로부터 나를 건져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아주 치열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간절한 기도는 마치 렌즈에 초점이 맞은 것처럼 그 돋보기에다 초점을 맞추면 햇빛이 모아지고 활활 불이 붙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에 초점이 맞은 기도는 기도할 때뿐만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실은 삶과 기도는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의 기도의 간절함이 이처럼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하는 시간적인 길이로 나타나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라면 두 번째는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봅니다’. 우러른다는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종이 상전을 바람같이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보는 것 같이 그렇게 제가 주님을 우러릅니다. 이런 표현들은 결국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고 자신의 삶에 어떤 사태를 만나든지 간에 결국 그 모든 사태를 해결하고 도우시는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86편 3절과 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걸 입증하듯이 1절에서는 ‘여호와여’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3절에서부터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5절까지 계속 주님이라고 나옵니다. ‘아도나이’라고 하는 이 주님은 같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인데도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신 권한, 처분하고 돕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만들고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그런 것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계속 주님을 부르고 있는 이유는 시련을 당할 때에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에 하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악인들이 나를 해치려고 하고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죄 때문에 모순되는 일이 일어나도 결국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어서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라고 하는 아주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다, 모든 것을 통치하고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라는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성경 구절에서 4번이나 주님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목숨이 아니고 또 다른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여기서 영혼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심령입니다. 그 영혼이라는 ‘네페쉬’라는 단어가 다양한 뜻으로 사용이 됩니다. 여기서는 마음입니다. 마음도 떠도는 거칠고 세속적인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게 만드는 깊은 마음의 내밀한 좌소, 심령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의 깊은 중심이 우러러보는데, 우러러보는 그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자신의 삶에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모순된 것 같은 삶의 사태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올바로 돌아가도록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그런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당신 자신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일은 끊임없이 바꾸시는 하나님, 하나님 자신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호소하면 인간이 처한 삶의 사태들을 바꾸심으로써 우리를 교훈하시고 당신을 신뢰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생활 하는 가운데 ‘정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나의 마음이 주님을 우러러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을 우러르던 영혼은 기도할 시간이 허락될 때 그 기도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하는 시간보다는 기도를 하기 위해 적합한 마음이 되도록 씨름하며 보내는 시간이 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멈췄을 때 우리의 영혼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우러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우러르고 있는 마음은 언제든지 기도의 시간이 찾아올 때 마치 가두어 두었던 댐의 물이 수문을 열자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우러르던 영혼의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었으나 이 시인의 마음은 주님만을 우러르고 있었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사태들을 하나님 한 분께 맡기며 주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도 자신의 부모는 자기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영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부모는 자기를 버렸어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붙드셔서 고난의 길에서 고난보다 더 큰 은혜를, 시련의 인생길에서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지 사랑스러워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모든 생사와 화복, 일의 성취와 모든 실패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하나님만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장 커다란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풍랑 이는 바다에 계셨을 때에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시던 능력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당신께 오라 하셨을 때 그 때에 베드로는 믿음이 있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출렁거리는 파도를 보고 두려움에 휩싸여서 믿음이 흔들릴 때 그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이 책망하셨습니다.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영혼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벽에 나와서 많은 시간을 헌신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리는 것은 우리 훌륭한 기도생활입니다. 그것과 함께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 손을 얹고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불러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우러르는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위로 그리고 용기를 주셔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삶을 헤쳐 나가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간절한 소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시인이 ‘주님 내 영혼을 기쁘게 해주십시오.’ 라고 이렇게 기도할 때에 시인의 마음속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마음 따뜻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선물을 해 주는 정도의 물건은 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으면서 기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통해서 저 사람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나를 향한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 마음에 기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인은 시련과 고통 속에 있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자신을 이 교만하고 포악한 자의 무리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져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진짜 이 시인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은 ‘죽을 위협에서 살았다. 악인이 물러갔다. 교만한 자가 사라졌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 하나님이 시인이 처한 삶의 사태에서 많은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을 건져주셔서 거기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해 주시는 것 때문에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 속에 있을 때 그 시련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면 그 자체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더 기쁜 것은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았구나.’ 이걸 확인하면서 우리는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주님을 우러러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